마란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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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란 아다
(마 25: 1-13/계22:20 )
마태복음 25:1–13 (NKRV)
1.그 때에 천국은 마치 등을 들고 신랑을 맞으러 나간 열 처녀와 같다 하리니
2.그 중의 다섯은 미련하고 다섯은 슬기 있는 자라 3.미련한 자들은 등을 가지되 기름을 가지지 아니하고 4.슬기 있는 자들은 그릇에 기름을 담아 등과 함께 가져갔더니 5.신랑이 더디 오므로 다 졸며 잘새 6.밤중에 소리가 나되 보라 신랑이로다 맞으러 나오라 하매 7.이에 그 처녀들이 다 일어나 등을 준비할새 8미련한 자들이 슬기 있는 자들에게 이르되 우리 등불이 꺼져가니 너희 기름을 좀 나눠 달라 하거늘 9.슬기 있는 자들이 대답하여 이르되 우리와 너희가 쓰기에 다 부족할까 하노니 차라리 파는 자들에게 가서 너희 쓸 것을 사라 하니 10.그들이 사러 간 사이에 신랑이 오므로 준비하였던 자들은 함께 혼인 잔치에 들어가고 문은 닫힌지라 11.그 후에 남은 처녀들이 와서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에게 열어 주소서 12.대답하여 이르되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너희를 알지 못하노라 하였느니라 13.그런즉 깨어 있으라 너희는 그 날과 그 때를 알지 못하느니라
계22:20
이것들을 증언하신 이가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 하시거늘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오늘의 설교 제목은 ‘마란 아다’입니다. 혹시 ‘마라나타’ 를 잘못 쓴 것이 아닌가? 생각 하시는 분도 있겠습니다. 본문 계시록의 22장:20절 말씀 끝부분을 헬라어 원어로는 “ 아멘 에르쿠 퀴리에 예수” 인데 이 말씀이 아람어로 하면 ‘마란아다’ 입니다. ‘마라나타’ 는 ‘마란아다’의 헬라어 발음입니다. 뜻은 아멘 주 예수여 오시 옵소서’의 뜻입니다. 이 말은 초대 그리스도인들의 신앙고백으로, 그리고 만나고 헤어질 때, 인사말로 사용되었다고 합니다. 오늘날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할렐루야’ 혹은 ‘샬롬’ 이렇게 인사를 하듯이 초대 교회 성도들 사이에서는 ‘마란아다’ 이렇게 인사했다는 것이지요! 우리도 서로 한번 인사 나누겠습니다. 앞뒤 좌우로 “주님 다시 오십니다” 이렇게 인사 한번 나누시고 대답으로 “마란 아다” 이렇게 답변해 보시겠습니다.
4복음서(마태,마가,누가,요한)은 각자 독특한 구조를 가지고 있습니다. 최근 저는 복음서 중 예수님의 고별 설교를 읽으며 은혜를 받고 있습니다.그 중 요한복음 13장-16장에 나오는 예수님의 다락방 설교와 마태복음 24장-25장은 특별히 우리가 예수님의 고별 설교라고 부릅니다. 장소는 모두 예수님의 공생애 마지막해의 예루살렘입니다.
유언과 같은 고별 설교인데도 복음서별 관점이 서로 다릅니다. 요한복음은 제자들을 향한 위로와 약속의 고별설교라면 오늘 우리가 함께 살펴볼 마태복음의 경우는 경계와 주의를 주기 위한 목적을 가집니다. 이처럼 두 복음서는 서로 다른 관점을 우리에게 보여 주지만 결론은 한가지 입니다. ‘주님이 다시 오신다는 것입니다’.
마태복음은 독특하게 하나님 나라를 ‘천국’이라고 표현합니다. 같은 뜻인데 누가와 요한 그리고 마가는 ‘천국’ 이라는 표현보다 하나님 나라로 표현합니다. 이는 마태가 복음서의 독자를 유대인을 염두에 두고 썼기에 ‘하나님’이라는 표현을 극도로 공경의 의미에서 쓰지 않는 유대인의 특성으로 ‘천국’으로 표현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주님이 다시 오시는 걸 원하십니까? 예수님이 다시 오시는 걸 가장 원하지 않는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이 교회라는 웃을 수 없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교회가 예수님 빼고 다 있기 때문이라는 세상의 조롱입니다. 마음은 아프고 전적으로 동의를 할 수 없지만 우리는 스스로를 돌아봐야 합니다.
여러분 혹시 이렇게 생각하고 있지는 않으시지요?교회안에 두가지 패턴이 있다고 합니다. 주님! 지금 다시 오시면 안되요! 아직 준비가 안됐어요! 휴가를 못 썼어요! 혹은 제가 아직 못다한 일이 있어요! 결혼도 해야 하고, 사업도 더 키워야 하고, 대출금도 아직 못 갚았습니다. 공부도 좀 더 해야 하고 아이들 뒷바라지 좀 만 더 해야 하니 주님! 조그만 더 있다가 오세요? (세상을 사랑함) 주님! 저 아직 회개를 덜 했습니다. 좀만 착한 일 더 하고 마일리지 좀 쌓으면 오시면 안되겠습니까?(자신의 의를 세움,종교)
오늘날 저와 여러분은 너무도 풍성한 삶을 이 세상에서 살아갑니다. 초기 기독교인들은 하나님 나라에 소망을 두고 살았습니다. 현실적 고통과 박해 가운데 있었기에 그 소망이 이 세상이 아니라 하늘나라에 확실하게 있었고 주님의 재림을 갈망하고 소망했습니다. 저와 여러분은 어떤 가요? 잠자리에 누울 때, 아침에 일어날 때마다 주님 다시 오시길 소망하고 ‘마라나타’를 부르 시나요? 아니면 주님 여기가 좋사오니 이 세상 삶에서의 무사 안일과 성공을 위해 기도하시나요?
오늘 본문에서는 유대인의 결혼식에 대한 상황이 나옵니다. 일명 열 처녀의 비유입니다. 이 비유는 우리가 자주 들어본 주님의 재림에 대한 비유라 모든 복음서에 있을 것 같지만 마태복음 25장에만 기록되어 있습니다. 주님의 비유는 24장부터 나옵니다. 이 세상 끝 날에 대한 경고의 말씀이 계속 이어집니다.24장에 예루살렘 성전에서 나오시면서 예수님이 성전의 무너짐을 예언하십니다. 그러자 제자들이 조용히 그때와 시기의 징조를 주님께 물어 봅니다. 주님이 징조로 곳곳에 난리와 전쟁과 기근과 지진이 일어나고 환란과 배교와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나고 너희를 미혹할 것이다. 24장 30-32절 말씀을 한번 보겠습니다. “그 때에 인자의 징조가 하늘에서 보이겠고 그 때에 땅의 모든 족속들이 통곡하며 그들이 인자가 구름을 타고 능력과 큰 영광으로 오는 것을 보리라/ 그가 큰 나팔소리와 함께 천사들을 보내리니 그들이 그의 택하신 자들을 하늘 이 끝에서 저 끝까지 사방에서 모으리라” 아멘! 그 후에도 무화과 나무의 비유를 통하여 시기를 살피고 깨어 있으라고 말씀 하십니다. 24장 42절 “그러므로 깨어 있으라 어느 날에 너희 주가 임할는지 너희가 알지 못함이니라
그 다음 25장으로 넘어와서 열 처녀 비유를 하시고 달란트 비유와 양과 염소의 비유를 하시면서 심판의 날을 경계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열 처녀 비유는 24장에서 25장으로 이어지는 심판과 멸망의 날에 대한 비유 말씀 한가운데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우리가 여기서 우리가 주목할 점은 모든 비유에서 공통적으로 언급되는 것은 주님이 다시 오신다는 말씀입니다. 각 비유의 시작점 혹은 마지막에는 이런 말씀이 포함됩니다. ‘인자가 임할 때’ “주인이 다시 올 때’ ‘신랑이 오매’ 이것은 내가 다시 오니 너희는 그날을 경계하고 세상을 두려워 말고 나의 재림을 준비하라는 뜻입니다. 위로와 경계의 말씀인 것입니다. 그러기에 요16:33 말씀에 “이것을 너희에게 이르는 것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하십니다.
주님은 [그가 죽으시기 전에도] 요14:2 말씀에’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러 가노니’ 말씀하셨고 그가 [승천하실 때에도] 행 1:11 ‘이르되 갈릴리 사람들아 어찌하여 서서 하늘을 쳐다보느냐 너희 가운데서 하늘로 올려지신 이 예수는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 하였느니라’ 또한 [성경의 마지막] 계22:20 이것들을 증언하신 이가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 하시거늘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고 거듭 자신이 다시 오실 거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마지막 날, 심판의 날, 주님의 재림은 연결되어 있는 한 날 입니다. 그날과 그 시는 우리가 모릅니다.
신랑이신 예수님은 반드시 옵니다. 신부가 준비가 덜 되었다고 주님이 더디 오시지 않고 반대로 준비가 다 되었다고 빨리 오시지 않습니다. 그것은 신랑의 전적인 주권입니다. 그러나 신랑은 반드시 오십니다. 주님이 직접 말씀 하셨고 성경이 그것을 거듭 말씀하고 있기 때문에 확실합니다. 여기에 은혜가 있습니다. 주님의 다시 오심은 우리의 상황에 의존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준비도에 의존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의로움에 따라 달라지지 않습니다. 전적으로 하나님의 뜻에 따라 다시 오시게 됩니다. 만약 우리의 능력과 준비도에 따라 주님이 오신다면 그것은 하나님이 주권이 훼손될 뿐만 아니라 우리의 구원도 불확실해 집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불완전하고 연약하고 선한 것이 없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주님이 우리의 상황에 따라 오시는 것이 아니라 불변 하시는 하나님의 전적인 주권에 따라 이 땅에 오심에 감사와 찬양을 드립니다. 할렐루야!
어떤 이들은 마24장 14절 말씀을 인용하여 우리가 열심히 전도하여 복음이 세상 끝까지 전해지면 주님이 오신다고 말합니다 ‘이 천국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언되기 위하여 온 세상 에 전파되리니 그제야 끝이 오리라’. 들어 보셨나요? 전도를 열심히 하는 것은 좋지만 우리가 무언가를 이루어서 주님이 오시는 것이 아닙니다. 이는 성경을 자신의 뜻대로 해석한 잘못된 사례입니다. 그날과 그때는 누구도 알지 못할 뿐만 아니라 우리의 노력으로 앞당기거나 늦출 수도 없습니다.
한동안 선교분야의 사역자들이 ‘백투더 예루살렘’ 프로젝트를 홍보 했습니다. 땅끝이 지구 한바퀴를 돌아 다시 이스라엘 로 돌아가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것도 성경적이 아닙니다. 속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무엇인가를 완수해야 주님이 다시 오시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 본문을 다시 보겠습니다. 이스라엘의 결혼식은 우리처럼 하루에 예식장 빌려서 한시간 만에 치루어 지는 것이 아닙니다. 1주일 내내 열린다고 합니다. 신랑과 신부는 왕과 왕비처럼 대우를 받습니다. 그리고 낮에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밤에 시작합니다. 이는 유대인의 하루의 시작은 밤부터 이기 때문입니다. 저녁 6시경부터 하루가 시작됩니다. 또한 결혼의 과정을 보면 바로 결혼이 이루어 지는 것이 아니라 약혼을 하고 난 후에 1년 동안 신랑이 거처를 마련한 후에 비로서 이루어 집니다. 따라서 결혼식이 정해지면 신랑이 친구들과 즐겁게 지내다가 신부를 데리러 마을을 지나 밤에 신부의 집을 찾아 갑니다. 그래서 그 잔치에 참여하려면 등을 하나씩 준비해야 합니다. 우리는 결혼식에 가려면 무엇을 가지고 가야 하나요? 봉투를 들고 가죠? ^^.
1절을 보면 신부와 함께 들러리로 서는 10명의 처녀들이 등을 준비하고 신랑을 맞이할 준비를 합니다. 여기서 신랑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리고 열 처녀들은 신앙을 고백한 그리스도인을 비유합니다. 본문을 통해 10처녀로 비유된 그리스도인은 주님을 맞이하는 종이며 그의 재림을 기다리는 자들임을 알 수 있습니다. 여기서 등은 어두운 밤을 넘어, 신부와 신랑이 돌아가는 길에 인근 마을들을 들려 축하를 받고 신랑이 마련한 처소로 들어가야 하기에 준비 해야 하기도 하지만, 비유적으로 보면 복음이 빛이며, 복음을 받아 들이는 자는 그것으로 밝아져야 하며, 또한, 그 빛을 밝혀야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결혼식에 참여하는 신부와 그 친구들은 등을 준비하는 것이 필수적인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는 2절 말씀에 5명의 슬기로운 처녀와 5명의 미련한 처녀들이 구분이 되는것입니다. 슬기로운 처녀들은 신실한 그리스도인을 미련한 처녀들은 종교적 그리스도인을 비유합니다. 여기서 잠에 든 것은 누구인가요?
네! 열 처녀 모두 잠에 들었습니다. 본문 5절 말씀을 보면 ‘신랑이 더디 오므로 다 졸며 잘새’ 미련한 처녀들이나 지혜로운 처녀들이나 모두 잠이 든 것이지요! 안타깝게도 신랑이 지체하는 이유로 미련한 처녀들이나 슬기로운 처녀들 모두 잠이 들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여기서 신랑은 왜 지체를 할까요? 마땅한 이유가 있습니다. 영국의 청교도 신학자 매튜 헨리는 그의 주석서에서 주님이 다시 오시기 전에는 “하나님의 경륜들과 목적들이 그 전에 이루어 져야 하고, 택한 자들이 모두 부르심을 받아야 하며,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이 드러나야 합니다, 또한 성도들의 인내가 시험 받아야 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우리가 예상하는 시간보다는 지체 하지만, 정해진 시간보다는 지체하지 않으신 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고 말합니다. 동의가 되시나요?
슬기로운 처녀들도 신앙 생활이 오래 되면 그리스도의 재림을 준비하는 일에 부주의 하게 됨을 보게 됩니다. 그러니 13절 말씀에 “그런즉 깨어 있으라 너희는 그 날과 그 때를 알지 못하느라” 를 명심해야 겠습니다. 6절을 보면 신랑을 맞으라는 통지가 사전에 있음을 봅니다. “밤중에 소리가 나되 보라 신랑이로다 맞으러 나오라 하매” 밤중은 그리스도의 오심을 무엇을 의미할까요? 주님 오심을 머나먼 일로 생각하는 때, 주님을 가장 덜 찾고서도 세상에서 우리가 안락하게 있을 때를 말합니다. 지금이 그 때가 아닌가요?
그런데 문제는 여기서 미련한 다섯 처녀들입니다. 외식하는 그리스도인, 겉모습만 기독교인인 종교적인 사람들은 종말의 결과를 배웠음에도 그 눈이 가려져 진리를 알지 못하고 신앙 생활을 계속하고, 마지막까지 그것에서 위로를 찾는다는데 있습니다. 우리는 갈6:7절 말씀을 무겁게 받아야 합니다.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업신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미련한 5처녀들은 신랑이 온다고 하는 것을 알면서도 등잔만 준비하고 사용될 기름을 넉넉히 준비하지 못 했습니다. 그럼에도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조만간 자신의 은혜가 모자란 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겉모양의 신앙은 불행하게도 마지막 날에는 그 빛이 꺼져 버리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제서야 그들은 문을 두드립니다. 8절 말씀 “미련한 자들이 슬기 있는 자들에게 이르되 우리 등불이 꺼져가니 너희 기름을 좀 나눠 달라 하거늘” 그들은 의인의 삶을 살려 하지 않으면서, 죽을 때는 의인의 죽음을 죽기를 바라는 사람과 같습니다. 진정한 회개도 없고 열심도 없이 우리 안에 있는 자유를 보고 들어왔으나 어떠한 댓가 지불도 하지 않는 신앙인의 모습을 보여 줍니다. 본문의 미련한 5 처녀들은 신랑이 오리라는 것을 알지만 그것을 믿지 않았습니다. 반면에 슬기로운 처녀들은 비록 같이 잠들었지만 신랑을 기다리며 잤습니다. 겉으로는 10처녀 모두 다같이 잠을 잤지만 잠의 성격이 다릅니다. 슬기로운 처녀들은 신랑을 기다리고 준비하며 기쁘고 행복한 잠을 잤습니다. 그런데 미련한 처녀들은 아주 지루하고 따분한 잠을 잤습니다. 신랑이 온다는 것에 믿음이 없었습니다. 기름을 챙기지 않은 것이 그 증거 입니다. 확신없이 기다리는 것보다 지루한 일이 없습니다. 재림을 믿는 그리스도인은 직장 생활을 해도 기쁘고 정직함으로 합니다. 하루 하루를 피곤하지만 소망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직장을 선교지로 삼고 빛과 소금으로 살아갑니다. 그러나 재림을 모르는 사람들은 어떻습니까? 직장 생활이 괴롭고 반복되는 일상에 권태롭고 지루하기가 짝이 없지요! 겉으로 보는 삶의 모양은 같아도 이처럼 그 중심은 천지 차이입니다. 주님은 우리의 중심을 보시는 분이십니다. 우리의 겉모습은 모두 같아도 그 중심은 모두 다릅니다. 10처녀 모두 등을 가지고 기다리다 잠에 들었지만 슬기로운 처녀들은 그 중심에 주님의 다시 오심에 대한 확실한 믿음을 가지고 기름을 준비해 놓고 있었고 미련한 처녀들은 모양은 같지만 그 안에 내용 (즉 은혜가) 없는 종교인 이였음이 오늘 드러납니다.
9절 ‘슬기 있는 자들이 대답하여 이르되 우리와 너희가 쓰기에 다 부족할까 하노니 차라리 파는 자들에게 가서 너희 쓸 것을 사라 하니“우리가 은혜를 많이 받아도 나눠줄 수는 없다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구원과 은혜는 자신의 것입니다. 누구에게서 건네 받을 수가 없습니다. 은혜와 구원은 나누어 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많이 받았다고 옆사람에게 줄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죠!
사랑하는 여러분 배우고 확실한 것에 거하시기 바랍니다. 주님의 재림을 확실하게 믿으시기 바랍니다. 주님이 다시 오시고 우리가 새하늘과 새 땅, 새 예루살렘에서 주님과 함께 영생과 기쁨을 누린다는 것을 믿을 때 이 세상에서의 우리의 삶의 무게가 가벼워 집니다. 그래서 주님이 마11:28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고 말씀 하십니다.
‘우리 아들이 군대에 있어서 살펴보면 먼 길인데도 휴가 나올 때는 버스 타고 기차 타고 알아서 나옵니다. 오래 걸려도 와서 보면 생기가 넘칩니다. 집에 가기 때문에 그 과정이 즐거운 것입니다. 그런데 특이한 것은 돌아갈 때는 저랑 친한 권사님 차를 타고 가는데도 멀미를 하더군요!’
에버랜드에 가면 t-익스프레스라는 놀이기구가 있습니다. 보면 사람들이 줄을 엄청 서서 기다립니다. 이해가 안됩니다. 밑에서 보면 빙빙 돌고 높은 데서 떨어질 때 사람들이 비명을 지릅니다. 그 비명이 죽을 것 같은 사람의 비명 인가요? 아닙니다. 결과를 알기 때문입니다. 안 죽는다는 것을 알기에 그 공포와 두려움을 재미로 느끼는 겁니다. 그리스도인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땅의 고통과 괴로움도 모두 지나갑니다. 심지어 죽음조차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입니다. 그 하나님 나라에 대한 소망을 가지고 사는 우리는 그런 사람들입니다.
‘제가 축구를 좋아합니다. 부끄럽게도 제가 아직도 프리미어리그를 좋아합니다. 언젠가는 이 또한 내려놓는 시간이 오리라 믿습니다. 그런데 이 프리미어 리그에 굉장한 팀이 있는다. 바로 리버풀 fc 입니다. 이 팀은 항상 기적을 만들어 냅니다. 그러면서도 강팀에게는 강한데 하위팀에게 종종 지기도 합니다.그래서 의적풀이라고 놀림을 받기도 합니다. 90분이 지나고 극장골을 넣은 횟수가 47회로 가장 많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경기를 보면 심장이 쫄깃쫄깃 합니다. 그런데 항상 새벽에 경기를 잘 못 봅니다.그러다 인생 경기에 대한 결과를 알고 보게 되면 그렇게 마음이 평안할 수 가 없습니다. 골을 먹어도 얼굴에 미소가 번집니다. 왜냐하면 결국은 이기는 결과를 알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신앙과 믿음도 이와 같다고 생각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현실이 고단하고 힘드십니까? 예수님을 믿는데도 질병으로 고통스럽고, 관계에서 어려움이 있으며 재정적으로 고통 당하고 계신 가요? 알 수 없는 삶의 이유와 원인으로 우리는 두려움과 불안한 삶을 살고 있지는 않으신 가요? 걱정하지 마시기 바랍니다.주를 향하여 신실한 믿음을 가지고 오늘 이 자리에서 예배하고 말씀을 받는 우리에게는 주님이 허락하시는 새하늘과 새 땅 새 예루살렘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롬8:18말씀을 기억하십시오! “ 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
우리의 형편과 어떠함에 영향 받지 않으시고 주님은 반드시 이 땅에 재림 하십니다. 그러면 우리는 죽음을 보지 않고 주님을 만날 수도 있습니다. 신령한 몸을 입고 재림하시는 주님을 맞아 새 하늘 새 땅 새 예루살렘으로 들어 갑니다. 빌3:20 ‘ 그러나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거기로부터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
사랑하는 여러분! 주님이 오시기 전에 죽으면 우리의 몸은 썩어져 사라지고 우리의 영혼은 천국에 갑니다. 그러나 신령한 몸은 없습니다. 신령한 몸을 입고 새 하늘 새 땅에 들어가는 것은 주님의 재림하실 때입니다. 그때에 주안에서 먼저 죽어 천국에 계신 주는 믿는 성도들이 먼저 신령한 몸으로 입고 주님과 함께 이 땅의 성도를 맞이 하러 옵니다. 가장 좋은 것은 이 땅에서 바로 주님이 오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죽음을 보지 않고 신령함 몸을 입고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게 되어 영원히 하나님과 기쁨과 복락을 누리며 삽니다. 어떤 이는 열 고을을 다스리고 어떤 이는 한 고을을 다스립니다. 고전 15:42-44 “죽은 자의 부활도 그와 같으니 썩을 것으로 심고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아나며 욕된 것으로 심고 영광스러운 것으로 다시 살아나며 약한 것으로 심고 강한 것으로 다시 살아나며 육의 몸으로 심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살아나나니 육의 몸이 있은즉 또 영의 몸도 있느니라”
사랑하는 여러분 신자의 삶은 짧은 이 생의 삶, 불완전한 우리의 육신과 선하지 못한 마음을 주님께 드리고 영원한 생명을 얻는 장사와 같습니다. 그리고 그 영원한 생명은 죽어도 살겠고 살아서 믿으면 영원히 죽지 않는 신비입니다. 고전 15:14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바라는 것이 다만 이 세상의 삶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이리라” 그 과정이 드라마틱할수록 더욱 즐거운 길입니다.
마지막으로 13절 말씀을 보겠습니다.”그런즉 깨어 있으라 너희는 그 날과 그 때를 알지 못하느니라” 여러분 깨어 있으십시오!. 항상 말씀을 가까이 두고 은혜로 충만함을 누리십시오! 주님은 반드시 오십니다. 곧 오십니다. 우리의 형편이 어떻든, 준비가 되었든 안되었든 그분은 곧 우리에게 다시 오십니다. 천사장과 호령과 나팔소리로 주안에서 먼저 잠든 성도들과 함께 심판주로 하늘에서 강림하십니다. 그러면 우리도 홀연히 새롭고 신령한 몸으로 옷 입고 새 하늘 새 땅 새 예루살렘 에서 하나님과 영원한 복락을 누리며 완전하고 온전하며 충만한 삶을 살게 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마란 아다’ 를 소망하고 날마다 밤이든 낮이든 주님 다시 오실 그날을 기대하십시오! 약속된 것을 받을 그날을 고대 하시기 바랍니다. 이 소망을 누구에게도 빼앗기지 말고 소중히 간직하며 늘 누리시면 살아가시기를 예수님 이름으로 축복하고 기도 드립니다. 마지막으로 말씀 한 절 읽고 찬양 하시겠습니다.
찬양 (이 시간에 함께 찬양 하실 텐데요~~)
통성기도1, 오늘 말씀 생각하며 기도 (회개, 결단)
통성기도2. 교회 ( 특별 새벽기도, 담임목사님, 다음세대, 나라와 민족, 한국교회)
찬양.
마무리기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