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에 시민을 둔자
강해설교 • Sermon • Submitted • Presen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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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6 views하늘에 시민권을 둔자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왜 우리는 이땅에서 고통당하는가?
Notes
Transcript
17 형제들아 너희는 함께 나를 본받으라 그리고 너희가 우리를 본받은 것처럼 그와 같이 행하는 자들을 눈여겨 보라
18 내가 여러 번 너희에게 말하였거니와 이제도 눈물을 흘리며 말하노니 여러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느니라
19 그들의 마침은 멸망이요 그들의 신은 배요 그 영광은 그들의 부끄러움에 있고 땅의 일을 생각하는 자라
20 그러나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거기로부터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
21 그는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하게 하실 수 있는 자의 역사로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하게 하시리라
1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고 사모하는 형제들, 나의 기쁨이요 면류관인 사랑하는 자들아 이와 같이 주 안에 서라
서론
-예화
-문제제기
저는 오늘 하늘에 시민권을 둔자라는 제목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하길 원합니다.
세상의 삶은 다양하지만, 결국 둘중 하나라고 볼수 있습니다.
세상을 바라보고 살아가는 삶 그리고 본향을 바라보고 살아가는 삶입니다.
허무하게 멸망으로 끝나는 삶, 새생명에 들어가는 삶. 삶은 복잡한 것처럼 보여도 결국 둘중하나인것입니다.
본문 연구
-본문설명
-본문의 진리
-본문에 나타난 교리
세상은 굉장히 다양합니다.
성경은 세상을 살아가는 삶의 방식을 두가지로 나눠서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다양한 차이가 있는 삶이지만 둘중하나로 평가되고 있습니다.
첫 번째 삶은 이세상을 생각하는 삶입니다.
이세상만 생각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삽니까? 이땅에 모든 것을 누리고 싶어하는 것이죠
욕심과 정욕과 충동이 이끄는 대로 살아갑니다. 그들의 신은 배라고 19절에는 말합니다. 이땅이 전부이기 때문에 욕심이 이끄는대로 다해야 행복하다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세상을 살아가다보니 탐욕과 욕심을 합리화하게 되고 가치관에 모순까지 생깁니다.
그래서 수치와 부끄러움을 영광과 자랑으로 생각하는 생각의 왜곡이 일어나게 됩니다.
그 결과는 무엇입니까? 멸망입니다.
틀림없는 것입니다.
살아봐야 안다고 해서는 안됩니다. 결국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눈여겨 보아야 하는 두 번째 삶의 방식이 있습니다.
20절에는 “그러나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라고 합니다.
여기서 시민권을 다르게 표현하면 소속, 신분, 지위등이 될것입니다.
우리의 신분과 소속은 하늘인 것을 아는 삶, 이땅에 몸담고 있지만 진짜 소속은 하늘이요
오고가는 하나님나라가 진짜 본향인줄 아는 삶이 두 번째 삶인것입니다.
외국생활을 해보신 분들은 많이 느낄것입니다.
외국생활은 경험에 도움이 되고 많은 교훈을 줍니다.
외국에서 살면 삶이 아무리 행복하다 하더라도 막연한 외로움에 잠기게 됩니다.
꼭 삶이 어려워서 그런 것은 아닙니다.
삶은 잘 살아가고 있는데 괜찮은 것 같은데 막연한 외로움과 그리움에 사로잡히게 되는것입니다.
집에 대한 갈망입니다.
우리의 본향과 소속이 어디인지를 아는데서 오는 그리움을 마음에 담은채로 이땅에서 살아가는 것이 두 번째 삶의 방식입니다.
이런 삶을 언제 느낍니까?
나중에 하늘나라의 심판대에 섰을 때 하늘에 속한자라는 사실을 명확히 보게 되겠지만
어떤면에서는 이미 이땅에서 하늘에 속한 사람의 삶은 이미 시작되었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것이 성경이 우리에게 전하는 핵심내용중 하나입니다.
본문은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을 것이다”라고 미래형을 취하지 않습니다. 현재형을 썼습니다.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다”라고 말합니다.
에베소서에서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는 은혜로 구원을 받은 것이라)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엡 2:4–6).
우리가 예수님을 믿을 때 일어나는 일이 무엇이냐면
우리가 살아나고 함께 일으켜지고 하늘에 앉혀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과거형 시제를 사용합니다.
과거에 예수님을 영접할 때 한순간 일어난 일이기에 그러합니다.
하늘에 앉힌바 되어 지금도 하늘나라 시민인줄 알고 사는것입니다.
미래에 예수님이 오셔서 심판하고 판단할 때 하나님의 나라의 시민이 되는게 아니라
이땅에 살고 있는 지금, 이땅에 몸담고 있지만 하늘나라 시민인줄 알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핵심이 무엇이겠습니까?
하늘나라를 끝없이 생각하는 것입니다.
하늘나라를 그리워하는 것입니다.
하늘나라에 보물을 쌓으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두 번째 형태의 삶의 핵심입니다.
예수님을 믿어서 성도가 되는 것은
주일에 교회에 가고 안가는 것 같은 외적인 차이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도가 되는 것은 단순히 세상보다 선하거나 바른 존재가 되는 것이 아니다라는 사실입니다.
세상은 하지 못하는 두 번째 출생을 경험한 것이 성도입니다.
모태로부터 한번 태어나는 것은 모두 경험하지만
성령으로 잉태되어 하늘나라에 소속된 것이 성도의 특징입니다.
본질이 다른 것입니다.
소속과 신분과 지위가 완전 하늘과 땅차이입니다.
성도는 그저 교회에 출석하고,착하고, 잘웃는 자가 아닙니다.
한번더 태어나 소속이 달라진 사람이 성도입니다.
성도는 하늘나라를 사모하며 살아갑니다.
이땅에 몸담고 있지만
이땅의 일들을 무시하거나 등한시하거나 무가치하게 여기지 않지만
우선적인 관심은 하나님 나라에 있다라는 것입니다.
호주에 있을 때 참 힘든 삶을 살았었습니다. 유학을 하면서 돈이 없어서 주머니를 뒤져보니 10달러 미만의 돈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돈을 속히 모아서 좋은 집을 사야지, 이땅에 좋은 거처를 마련해야지 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갈급함이 생기자 한국에 들어와 공부하고 예수그리스도 알자였습니다. 또 그것으로 섬기자였습니다.
하늘나라의 시민은 그러합니다.
이땅에 몸담고 살지만 ‘어떻게 하면 완전한 하나님 나라에 신속하게 들어가 그나라에 속한 백성으로 살까’하는 마음으로 살아갑니다.
그런데 이세상을 생각하면서 살면 어떻게 됩니까?
남이 가진거 다 가져야 합니다.
욕심과 욕망을 부립니다.
이왕이면 잘 살아야지하며 욕심을 채우려 합니다.
하지만 성도는 그 욕망대로 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이곳은 잠시 사는 곳이고 진짜 살곳은 따로 있다는 것을 알기에 그러합니다.
때로는 세상에서 자녀를 잘 기르고 싶지만 잘 안될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성도는 비통하지 않습니다.
남이 다 가진것같고 나만 못가진 것 같다는 생각을 하지 않고
억울하다면서 세상을 살지 않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늘 아버지 집이 있는 것을 알기에 그러합니다.
욕망이 휘두르는 대로 살지 않으면 진짜 영광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세상은 “이게 성공이다. 이렇게 살아야 한다”라고 말하지만
세상자랑은 결국 수치와 부끄러움일때가 많습니다.
진짜 영광과 존귀가 아니라 부끄러움과 욕망을 따라살다보니 영혼이 무뎌지고 둔해지고 가치가 없게 느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끄러움을 자랑하고 영광스럽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늘을 붙들고 살면 진짜가 보입니다. 영원한 것이 보입니다.
우리가 한번 밖에 없는 인생이 하나님이 다스려질 나라를 추구하고 사니까
영원한 것이 무엇인지 보이고
그것을 보고 사니까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이웃이 행복해하고 결국 내영혼이 잘됩니다.
그런삶을 사는 것이 영광인것입니다.
그뿐아니라 마지막은 무엇입니까? 멸망이 아니라 생명입니다.
풍성하고 넘치는 생명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소유가 좀 적어도 부요할수 있는 것입니다.
고린도 후서 말씀대로 우리는 아무것도 없는자입니다.
하지만 모든 것을 가졌으며
세상을 부요케하고 넘어지는자같으나 일어나서 사람들을 살리는 자이며
아무것도 못하는 자같으나 모든 것을 하는자입니다.
성도들의 삶이 바로 이 역설의 말속에 들어있습니다.
하나님 나라를 바라보기에 가능한 것입니다.
남들보다 먼저가려고 경쟁하고 힘으로 하다보면 그리고 내가 원하는 것을 남이 하도록하면
우리는 스스로 종이되어버립니다. 진짜 자유자에서 스스로 종의 신분이 되는것입니다.
지난 시간들을 돌아보시기 바랍니다.
저는 그런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주님을 위해 한 것이 너무 없구나. 내 핑계 내 생각, 내판단에 흐려져 주님을 멀리했구나. 생각하며 지내왔습니다.
고난당하고 욕을 듣고 주님은 손가락질 당하면서도 나를 외면하지 않으셨는데, 나는 외면했구나입니다.
우리가 주님께 드린 것이 못드렸는데 주님은 나를 도와주셨구나 생각하게 되는것입니다.
우리는 진짜 본향이 있고 그 하나님의 백성이라면 세상에 마음을 두지않고 외면하지 않으며
더 가까이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가려 오늘도 그길을 걸어가야 합니다.
어그러진 세상, 어그러진 나
우리는 세상 사람들처럼 욕망이 다 채워져야 행복하다 생각하며 살지 않습니다.
본향에 온전한 나라가 있는줄 알기에 다른방식으로 살아갑니다.
우리가 다 경험하는 것처럼 이땅이 전부가 아닙니다.
하늘나라가 있기에 욕망을 따라 살지 않고 영광을 위해 삽니다.
그 결과가 영생인줄 알기에 그러합니다.
우리의 삶에는 적지 않은 수고와 고통이 있습니다.
이땅에서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사는 것은 결코 쉬운일이 아닙니다.
아프고 어렵습니다.
왜 그럴까요?
어그러진 세상이기에 그러합니다.
이세상은 어그러졌고 거스르는 세상입니다.
정말 본향을 위해 결심하고 결심해도, 이 세대의 파도와 함께 휩쓸려 영혼이 상하고 아플때가 많습니다.
사역을 하면서 보면
하나님 나라의 시민권은 따 놓고
이땅에서 1등시민으로 살아가고 싶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기독교는 없습니다.
어떻게 해야 할까요? 내려놓아야 합니다.
하늘나라의 시민권과 복됨 때문에 이땅에서 아픈순간을 경험하게 됩니다.
거스르는 세대, 어그러진 세대안에 몸담고 살아가기에 아픈일을 당하게 됩니다.
그리고 또다른 문제가 생깁니다.
세상만 그러하면 감당하겠는데, 우리자신이 문제가 됩니다.
우리는 죄성을 갖고 태어났기에
본성적으로 죄가 더 맞습니다.
또 나쁜것과 악한 것을 잘 습득합니다.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기 전까지
사회에서 이세상에서 나쁜삶의 습관이 베일대로 배어있는 존재들이 우리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되어 주님의 법과 도를 배우지만 말을 듣지 않습니다.
그렇게 주님앞에서 결심하고 다짐해도, 주님이 기뻐하신다고 여기는 삶에 달려가는 길에 얼마나 많은 실패들이 존재하는 지 모릅니다.
훈련과 많은 연단이 있는지 모릅니다.
수십년 동안 주님을 알아왔지만
하나님나라 백성의 습관보다 죄악된 모습에 쉽게 이끌려갑니다.
그래서 아픈것입니다.
하늘나라 시민으로 세상을 살다보면 아프고 수고로운 과정이 참많습니다.
아이들을 가르치는 문제에 있어서 학원보다 중요한게 있습니다.
부모와 함께 하는 것입니다.
많은 시간을 보내고 뒹굴고 시간을 보내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이들이 학교에 들어가다보면
흔들려서 절제하지 못하고 자식을 망치는 것이 아닌가 하여 도태되는거 아닌가하여
학원을 한곳, 그리고 조금있다 하나더, 또 하나더 그렇게 하다 결국 세상의 부모와 같은 모습이 되어버립니다.
세대가 어그러져 있고 우리가 어그러져 있기 때문에 하나님 나라의 백성의 습관을 체득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성도인 우리의 삶에 아픔과 고통이 있습니다.
그럴 때 기억해야 할것이 있습니다.
성도가 바라보는 한지점입니다.
그것은 무엇입니까?
“그러나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거기로부터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빌 3:20).
진리를 취하면 유익한점
우리의 산 소망
성도는 주님을 기다리는 사람입니다.
아무리 믿음으로 살고 싶어도 살아지지 않는 이세대에 자신의 한계와 약함을 직시하면서
그 아픔과 눈물을 갖고 주님을 사모하는 사람입니다.
주님이 오셔서 우리의 모든 수고와 눈물을 닦아주시고
상하고 곤고한 심령을 위로하고 살려내시기를 기다립니다.
우리구주가 이땅에 오시길 사모하며 사는 것이 두 번째 삶의 방식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이고 하나님의 시민권을 갖고 있는 존귀와 영광을 갖고 있는데 이땅에서 눈물이 있습니까?
생명을 갖고 있는데 자신의 연약함을 거듭경험하고 아파 눈물을 흘립니까?
이것은 우리의 소망이 어디 있는지 보여주는 것입니다.
우리는 세상사람들처럼 세상에 관심을 두고 세상에 함몰되어 살지 않도록 때론 이땅에서 세상의 거스름을 경험해야 합니다.
우리편인 것 같았는데, 도와주는 것 같았는데 우리를 어그러지게 한다는 사실을 경험하며
본향에 대한 그리움과 소망이 생기는 것입니다.
한번은 필리핀에서 친구라고 생각하던 아이가 따갈로그로 욕을 하는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를 믿었고, 또 친구라 생각했는데 너무 괴롭고 아팠습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때론 눈물을 흘리고 마음상하고 조롱당하고 배반당해 버림받아도 그게 전부가 아닙니다.
우리가 경험한 것이 세상모든 것이 아니다는 것입니다.
선하신 하나님이 진짜소망, 참된본향, 다시오실 구주에 초점을 맞춰 살도록 하십니다.
목사로서 제 자신의 모습을 보며 나약한자신을 보며 실망스러운 적이 많았습니다.
기도가 너무나도 필요한데, 육체와 타협하고 있는 자신을 수없이 경험한것입니다.
몇 번을 인내하려다 안되는 것을 보며 낙심한적도 있었습니다.
어쩌면 이럴까라는 생각을 한적도 있습니다.
좌절을 하다가 우리주님이 계시지라고 생각했습니다.
주님이 아니면 내가 어떻게 살수 있을까? 사람앞에 어떻게 설수 있을까?
하나님 나라의 백성에게는 질고와 아픔이 있습니다.
그 질고와 아픔이 때론 우리를 넘어지게 하고 실망하게 하지만 냉소에 빠지지 않습니다.
우리 소망을 드러나게 하고 진짜 본질을 알게 합니다.
자기 자랑 자기신뢰를 다 내려놓게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야 말로 귀한 분이며, 산소망임을 깨닫게 되는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늘나라의 시민권을 갖고 사는 사람의 존귀와 영광입니다.
육신의 약함과 어리석음을 발견하고 주님을 사모하는 것이 소망의 전부가 아닙니다.
성경은 소망이 성취되는 순간이 있다합니다.
성경은 예수님을 첫열매라 부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첫열매라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몸은 결국 낮고 천한 몸이지만
결국 영광스럽고 강한몸으로 변화되는 순간이 있다는 것입니다.
죄 때문에 일그러지고 깨뜨려지고 낮아져있지만
감히 천사도 흉내내지 못하는 아름다운 상태가 되어 영광의 몸을 입게 되는것입니다.
“그는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하게 하실 수 있는 자의 역사로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하게 하시리라”(빌 3:21).
구체적인 실천방법
-버려야할 것
-현실에서 해야할 것 2~3가지
결론
-전체요약
-중요한 간증과 권면
이땅을 사는 성도의 질고의 핵심은 몸에 있습니다.
몸이 말을 듣지 않습니다.
주님의 말씀대로 법대로 하고 픈데 몸이 말을 듣지 않습니다.
세상 죄된 습관과 삶의 방식에 너무 빠르게 몸이 반응합니다.
주님 말씀, 법, 하나님의 방식에 미련하고 더딥니다.
하지만 아파하는 것이 마지막이 아니라 영광의 몸을 입게 되는 날이 온다말합니다.
하나님 나라의 백성은 하나님 나라에 완전하게 맞는 몸으로 바뀔 순간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때론 힘들지만 눈물나고 아프지만 낙심만해서는 안됩니다.
복된 상태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어떤 질고에도, 어떤 실망에도 산소망을 절대로 꺽지말고, 믿음의 경주를 멈추거나 늦추지 않아야 합니다.
구주가 오실날을 기다리며, 그분이 오셔서 완전히 변화시킬 영광을 목마르게 기대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새기비가 다가오고 있습니다.
만물을 복종시킨 그분을 만날 때입니다.
사망을 깨뜨리시고 생명으로 부활하신 주님을 만날때입니다.
결국 주님앞에서 그 살아있는 권능과 역사로 우리의 몸이 변화될것입니다.
영광을 누리고 경험하게 될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성도는 세상사람들처럼 마음을 세상것에 빼앗기며 추구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세상의 성공을 쫓아가는 자가 아닙니다.
하늘에 그리움을 담고 하늘의 보화와 모든 존귀와 영광을 생각하며
살아가는 존재인것입니다.
오늘 철야기도를 시작으로
아픈 땅을 치료하며, 살리며, 복음의 능력이 살아 숨쉬는 역사가
우리를 통해, 나를 통해 구석구석 나타나는 은혜있길 원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