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유한 자의 복

팔복➂  •  Sermon  •  Submitted   •  Presented
0 ratings
· 7 views
Notes
Transcript
마태복음 5:1-5
오늘은 팔복 중에 가장 솔깃한 복에 대해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팔복의 세 번째 복인 온유한 자에게 주어지는 땅에 대한 복입니다. 여러분, 땅 좋아하시죠? 진짜 부자는 땅 부자라고 하더라고요. 팔복의 다른 복은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하나님의 위로가 있을 것임이요” 이러면서 뭔가 추상적인 데 반해, 세 번째 복은 땅을 준다고 하니 얼마나 명확하고 좋습니까? 그런데 어떤 사람이 땅을 얻는다고 합니까? 바로 온유한 사람이라고 합니다.
그럼 온유한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요? 의외로 우리 한국인들은 이것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우리 민족의 전래문화인 '흥부와 놀부' 가운데 흥부 같은 사람, 온유한 사람의 대명사죠? 또 '콩쥐와 팥쥐' 이야기의 콩쥐. 역시 온유한 사람 아닙니까? 이들처럼 온갖 핍박과 구박에도 아무 말 없이 묵묵하게, 부당하고 억울한 일을 당했음에도 항의하거나 변명하지 않고, 그저 달라면 달라는 대로, 주면 주는 대로 맞춰 사는 사람이 온유한 사람일 것입니다.
그런데요. 여러분, 온유한 것은 좋은데 여러분들 자녀들이 흥부나 콩쥐처럼 누군가 구박하면 묵묵하게 구박받고 부당한 일에도 아무 말도 못 하고 그저 맞춰 살고 순종만 한다면 어떠시겠어요?
야 이 녀석아, 그렇게 물러 터져서 어디 먹고살 수나 있겠니?” 이러시지 않겠어요? 아니 치열한 생존경쟁 사회에서 가난한 흥부보다는 좀 손가락질당해도 부자인 놀부가 낫고 구박받는 콩쥐보다는 얄미운 팥쥐가 낫잖아요? 맨날 빼앗기고 당하면서 살다가 어느 세월에 자기 몫을 챙길 수 있겠어요? 그러면 인생 실패하는 것 아닙니까? 땅을 얻기는커녕 빼앗기게 되겠죠. 그런데요. 여러분, 성경은 그런 사람에게 복이 있다고 합니다.
먼저 이 ‘온유’라고 번역이 된 그리스어 '프라우테스(paeres)‘는 '온순함'(meek), '겸손'(humble), '부드러움'(soft)이란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자료에 보니까요. 이 온유를 동물로 비유하자면,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할 때 타고 가셨던 ‘어린 새끼 나귀’와 같다고 하더라고요. 또 식물로 치면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주님을 환영하던 군중들 손에 들렸던 ‘종려나무가지’ 아시잖아요? 그것과 같다고 합니다. 여하튼 이 온유는 하나님의 부드러운 성품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성경 곳곳에는 죄인이나 약자를 구원하시고 도우시는 하나님을 표현할 때 온유라는 단어를 사용했던 것이죠. 그리고 하나님이 온유한 자를 구하고 도우시는 이유는 그에게 “땅을 기업으로” 맡기기 위해서라고 말씀하시는 거예요. 화면 [시37:9-11]
9 진실로 악을 행하는 자들은 끊어질 것이나 여호와를 소망하는 자들은 땅을 차지하리로다
10 잠시 후에는 악인이 없어지리니 네가 그곳을 자세히 살필지라도 없으리로다
11 그러나 온유한 자들은 땅을 차지하며 풍성한 화평으로 즐거워하리로다
아시다시피 성경에서 말하는 땅은 처음부터 ‘하나님의 것’ 아닙니까? 특히 이스라엘 조상에게 주겠다고 약속했던 가나안 땅은 더욱더 그랬죠. 그래서 가나안 정복 후에 하나님은 그 땅을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에게 골고루 나눠 주셨고, 그렇게 해서 그 땅이 이스라엘 백성의 ‘기업’이 되었던 것이죠. 이제 백성들은 하나님의 땅에서 하나님의 농사를 지으며 잘 살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이 어땠어요? 하나님께 불순종하고 범죄함으로 그 땅을 스스로 잃어버리게 됩니다. 그리고 그런 상황에서 하나님의 아들 예수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셨습니다.
제가 예전에 청년사역할 때 이 온유에 대해 설교했던 것을 보니까요. 제자의 삶은, 이 온유를 통해서 승리해야 한다는 식으로 설교를 해서 좀 아쉬움이 남더라고요. 너무 의도적으로 제자도와 연결하려고 했다는 생각에 그때 청년들에게 좀 미안해요. 그래서 오늘은 온유라는 덕목에 대해서 다른 관점보다는 더 성경적이고 본질적 관점에서 온유라는 덕목에 대해 말씀을 좀 나누려고 합니다.
성경에서 하나님께 ‘온유한 자'로 인정받은 대표적인 인물이 누군지 아십니까? 바로 모세입니다. 애굽을 탈출한 이스라엘 백성이 시내 광야에 이르러 하나님의 지시대로 성막을 만들고 약속의 땅인 가나안을 향해 갈 때쯤이었습니다. 모세의 형인 아론과 누나 미리암이 모세의 권위에 도전하기 시작합니다. 이 남매들이요. 모세가 구스 여인을 아내로 취한 것을 빌미로 모세를 막 비방하기 시작합니다. “아니 하나님께서 모세와만 말씀하셨냐고 우리와도 말씀하지 않으셨느냐?”라며 모세의 지도력에 반기를 든 것이죠. 당시 이 문제는 가족의 문제가 아닙니다. 리더십들의 분열은요. 이스라엘 백성 전체가 분열할 수도 있는 위기였던 것이죠.
그런 상황에 하나님은 아론과 미리암에게 “내 종 모세를 비방하지 말라” 호통치시지 않습니까? 그때 받은 충격으로 미리암은 나병에 걸려서 한동안 진영 밖으로 추방을 당했던 것이죠. 그 정도로 모세는 하나님으로부터 절대적 신임과 지지를 받는 인물이었습니다. 왜 그렇죠? 그의 '온유함' 때문이었습니다. 민수기 12장 3절
3 이 사람 모세는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더하였더라
그러나 모세가 처음부터 온유한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혈기 왕성하고 패기와 열정이 넘쳐 살인을 주저하지 않던 시절도 있었죠. 모세는 태어나자마자 나일강에 버려졌지만, 바로의 딸에게 구출되어 바로의 궁전에서 왕자 대접을 받으며 자라지 않았습니까? 그리고 나이가 들면서 “나는 애굽인인가? 히브리인인가?” 하는 정체성의 혼란을 겪었던 것이고요.
하루는 자기 동족인 히브리인들의 노동 현장에 나갔다가 히브리인과 애굽인의 다툼을 목격하고 그 싸움에 개입하다가 애굽인을 살해하고 맙니다. 동족을 향한 애정과 열정이 그를 사로잡았던 것 같아요. 그러나 정작 히브리인들은 “누가 너를 우리 지도자로 삼았느냐? 우리까지 죽이려느냐?” 하며 모세를 지도자로 인정하지를 않았습니다. 그렇게 모세는 애굽인과 히브리인 어느 쪽에도 끼지를 못하는 거예요. 그래서 결국 애굽 땅을 떠나야 했잖아요? 그때 그의 나이 40세, 한창 일할 때였습니다.
도망자 모세가 자리 잡은 곳은 미디안 땅이었는데요. 멀어도 아주 먼 곳이었어요. 다행히도 그곳 제사장 이드로가 딸을 주어 가정을 꾸리고 데릴사위가 되어서 양띠를 치며 먹고 살 수는 있었습니다.
그렇게 40년의 세월이 지나고 나니까 어때요? 세월 이기는 장사가 없다고 젊은 날의 패기도, 야망도 모두 사라지지 않았겠어요? 얻은 것이라곤 이방인 아내에게서 얻은 아들 하나뿐이죠. 자기 소유로 된 재산도 지위도 없었습니다. 삶에 대한 의욕도, 미래에 대한 꿈도 없는 채 여든 살의 노인이 되었습니다. 하루하루 되는 대로 살아가는 무기력한 인생이었던 것이죠. 이런 그에게 하나님이 나타나신 거예요. 호렙산 떨기나무 불꽃 속에서 당신의 계획을 알려 주셨습니다. 자, 화면을 통해 말씀을 같이 보시겠습니다. [출3:7-11]
7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애굽에 있는 내 백성의 고통을 분명히 보고 그들이 그들의 감독자로 말미암아 부르짖음을 듣고 그 근심을 알고
8 내가 내려가서 그들을 애굽인의 손에서 건져내고 그들을 그 땅에서 인도하여 아름답고 광대한 땅, 젖과 꿀이 흐르는 땅 곧 가나안 족속, 헷 족속, 아모리 족속, 브리스 족속, 히위 족속, 여부스 족속의 지방에 데려가려 하노라
9 이제 가라 이스라엘 자손의 부르짖음이 내게 달하고 애굽 사람이 그들을 괴롭히는 학대도 내가 보았으니
[10절부터 합독] 10 이제 내가 너를 바로에게 보내어 너에게 내 백성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게 하리라
11 모세가 하나님께 아뢰되 내가 누구이기에 바로에게 가며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리이까
하나님의 엄청난 계시를 들은 모세가요. “예, 가겠습니다. 하나님의 명령만 기다렸습니다” 이러질 않아요. 있는 핑계 없는 핑계를 대면서 몸을 사리기 시작합니다. “나를 보내려는 당신은 누구십니까?” “동족들도 나를 믿지 않을 것입니다.” “나는 말도 잘 못 합니다. 입이 뻣뻣하고 혀가 둔한 사람입니다.” “보낼 만한 사람을 보내세요.” 그러는 겁니다.
생각해 보니까 모세로서는 그럴 만도 했겠어요. 차라리 부르시려면 40년 전에 부르시지, 그때는 혈기도 있고 패기도 넘쳤잖아요? 주변에 나름대로 지지 세력도 있었고 동원할만한 군사력도 있지 않았습니까? 무엇보다요. 그 당시 모세는 동족을 향한 뜨거운 열정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때는 하나님이 돕지를 않으시더라고요. 그런 하나님이 이제 나타나시더니 갑자기 “가라!” 이러시는데 갈 맘이 있겠어요?
그런데요. 여러분! 여기서부터 모세를 향하신 하나님의 시험이 시작됩니다. “저는 가진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하고 발뺌을 하는 모세에게 하나님은 “네 손에 있는 것이 무엇이냐?" 물으셨다. “지팡이입니다” 하는 그에게 “그것을 땅에 던져라” 명하시잖아요? 시키는 대로 했더니 그게 뱀이 되었습니다. “네 손으로 꼬리를 잡아라.” 시키는 대로 했더니 다시 막대기가 되었고요. 이렇게 해서 하나님의 테스트가 진행됩니다. 그냥 그게 전부에요. 그렇게 순종의 테스트를 다 마친 모세에게 하나님이 이렇게 말씀을 하십니다. 출4:17(ppt 없음)
17 너는 이 지팡이를 손에 잡고 이것으로 이적을 행할지니라.
터키 이스탄불의 토프카프 박물관에는 다윗이 거인 골리앗의 목을 베었던 칼, 그리고 세례 요한의 뼈와 같은 성경 관련 유물들과 더불어 모세의 지팡이가 전시되어 있습니다. 물론 그것들이 모세와 다윗이 사용한 진품이라고는 단정 지을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전시물들은, 그 옛날 모세와 다윗이 사용했던 지팡이와 칼이 실제로 어떤 모양이었을 것인지를 충분히 짐작하게 해 줍니다. (이미지)
그런데 그 박물관에서 모세의 지팡이라는 설명이 붙어 있는 전시물을 관람한 사람들은 대부분 실망을 한다고 합니다. 지금은 고인이 된 미국의 영화배우 찰턴 헤스턴은 영화 <십계>에서 모세 역을 맡아 열연을 펼치지 않았습니까? 영화 속에서 찰턴 헤스턴은 거구인 자신의 키만큼이나 길고도 굵은 어떤 면에서는 신비스러워 보이기까지 한 지팡이를 들고 있습니다. (다 기억나시죠?) 찰턴 헤스턴은 바로 그 거대한 지팡이로 나일강을 핏물이 되게 했고, 홍해가 갈라지게 했으며, 반석에서 강이 터지게 했습니다. 그 지팡이는 그 정도의 신통력을 발휘하고도 남아 보일 정도로 신비스러운 모양이었습니다. 그러나 토프카프 박물관에 전시된 소위 모세의 지팡이라고 전시된 막대기는 1m 미만의 가느다란 막대기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평소 <십계> 영화에서 나오던 찰턴 헤스턴의 지팡이처럼 연상하던 사람들에게 토프카프 박물관의 전시물은 지팡이라고 부르는 것조차 민망할 정도입니다.
여러분, 실제로 중동을 여행해보면 영화 속 찰턴 헤스턴처럼 신비스러운 모양의 길고 굵은 지팡이를 들고 있는 목자는 그 어디에도 없습니다. 중동의 목자들이 양 떼를 치기 위해 들고 있는 것은 다 예외 없이 저 정도 크기의 작고 마른 막대기일 뿐입니다.
만일 그 전시물이 영화 속 지팡이처럼 신비로운 모양의 길고 굵은 지팡이였다면, 모세가 지팡이를 들고 행하였던 모든 이적의 출처가 바로 그 신비로운 지팡이라고 생각하기 쉬울 것입니다. 그러나 모세의 지팡이가 작은 막대기에 지나지 않는다면, 그 볼품없는 막대기가 모세가 행한 모든 능력의 근원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도 초라해 보이는 거예요.
그래서요. 여러분, 이 작고 볼품없는 마른 막대기는요. 실은 모세 그 자신이었습니다. 미디안 광야에서 40년 동안 양을 치던 팔십 노인 모세, 그 나이에 이르기까지 장인에게 얹혀사느라 자기 재산이라고는 아무것도 없던 모세, 그 어떤 소망도 없이 더 이상 미래를 꿈꿀 수조차 없던 팔십 노인이었던 모세야말로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마른 막대기와도 같았던 것이죠.
그래서 모세의 마른 나무 막대기와 주름지고 뼈마디가 드러난 나이 든 손의 주름은요. 미디안 광야에서 40년 세월에 모세가 습득한 온유를 상징했습니다. 마른 나무로 만든 지팡이는 생명이 없어 감각도 없고 반응도 없죠. 단지 그걸 손에 잡은 사람의 의지대로 움직일 뿐이잖아요? 모세가 그렇게 되었던 거예요. 모세가 하나님의 출애굽 계획을 들었을 때, 막무가내로 거부한 것은 그 일을 자기가 해야 하는 줄 알았기 때문입니다. 돈도 없고 권력도 없고 패기도 없는 그로서는 감당할 수 없는 일이었어요. 그런데 알고 보니 그것은 자기 일이 아니라는 거예요. “내가 내려가리라.” “내가 인도하여 내리라” 그것은 하나님의 계획이었고 하나님이 하실 일이었습니다. 그는 단지 하나님의 능력을 드러낼 마른 막대기와 같은 도구일 뿐, 모세가 책임질 일도, 걱정할 것도 없었습니다. 그저 그분이 시키는 대로 하면 되는 거예요.
그렇게 해서 모세는 조금 전까지 자기 것이었지만, 이제는 하나님의 것이 된 하나님의 지팡이를 손에 잡고 애굽으로 돌아가게 됩니다. 그리고 바로 왕 앞에 서죠. 40년 전 모세를 왕궁에서 쫓아낸 왕은 아니었지만, 그보다 훨씬 더 완고하고 고집 센 왕이 애굽을 통치하고 있었던 시기입니다.
여러분, 한번 상상해 보세요. 누더기 옷에 마른 나무 지팡이를 잡고 바닥에 서 있는 모세와 그에 반해 온갖 보석으로 화려하게 치장한 옷을 입고 황금이 둥글게 박힌 지휘봉을 쥔 채 근엄하게 앉아 있는 바로, 완전히 대비되는 장면 아닙니까? 애굽의 밑바닥 노예 집단을 대표하는 모세와 애굽의 권력 집단을 대표하는 바로 왕의 대결이 펼쳐집니다. 두 사람의 대결은 모세의 말로 시작이 됩니다. 출애굽기 5:1
1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렇게 말씀하시기를 내백성을 보내라. 그러면 그들이 광야에서 내 앞에 절기를 지킬 것이니라 하셨나이다.
모세는 단도직입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합니다. 이에 대한 바로의 말도 들어보세요. 출5:2
2 여호와가 누구이기에 내가 그의 목소리를 듣고 이스라엘을 보내겠느냐? 나는 여호와를 알지 못하니 이스라엘을 보내지 아니하리라.
딱 보면, 가진 것도 없는 늙은 목자와 부와 권력을 모두 장악한 왕의 대결은 누가 봐도 끝날 게임이었습니다. 게다가 모세는요. 아직도 히브리인들의 지지를 얻지 못하고 있었을 때입니다. 모세의 패배는 불을 보듯 뻔했고, 아마 히브리인들도 그렇게 예상했을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요. 결과는 모세의 승리였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그것은 외면의 전쟁이 아니라 내면(마음)의 전쟁이었기 때문입니다. 모세의 마음속에는 마른 지팡이와 같은 온유와 겸손이 있었지만, 바로의 마음속에는 황금 지휘봉과 같은 교만과 오만이 자리 잡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이 모세와 바로의 대결을 기록하면서 “하나님이 바로의 마음을 완악하게 하셨다”라는 표현을 반복해서 사용했던 것을 기억하십니까?
여기서 ‘완악(完惡)’으로 번역된 히브리어 '차자크’는 ‘강하다’, ‘딱딱하다’, ‘굳세다’, ‘고집 세다’는 뜻입니다. 이전의 개역한글판 성경의 '강팍하다‘가 오히려 본뜻에 가까운 것 같아요. 그렇게 온유와 강팍이 맞붙었던 것입니다. 결과는 어땠습니까? <10전 10패> 바로가 완패했습니다.
모세에게는 바로와 같은 강력한 권력과 무기는 없었지만, 그의 내면이 온유와 겸손으로 무장했기에 강팍했던 바로와의 전투에서 승리했습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이 세계의 질서는 승자독식하고 강해야 이긴다고 하는 외면의 질서가 지배하는 세상이지만, 하나님의 질서는 우리 내면의 온유와 겸손의 능력으로 바로와 같이 화려하고 웅장하며 강하게 보이는 허세를 무너뜨리는 것이 하나님의 역사인 줄로 믿으시길 바랍니다.
그래서 존 맥아더 목사님은 이 온유함에 대한 정의를 “연약함이 아닌 절제된 힘”이라고 했습니다. 주기도문의 정신이 뭡니까? ‘일용할 양식’ 절제하는 것 아닙니까?
<개는 훌륭하다>라는 프로그램을 보니까요. 강형욱 씨라고 동물훈련사 있으시잖아요? 아무리 길들지 않은 거친 반려견이라도 그분의 손에 잡히면 1~2시간 후면 완전히 길들여지던데요. 그런데도 그 개들은 여전히 힘은 남아있어요. 연약해진 게 아니라 길들여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온유와 관련해서 꼭 점검해야 할 것이 3가지가 있는데요. 첫 번째는 ‘나의 감정은 하나님의 통제하심을 받고 있는가?’ 두 번째는 ’내 입술의 언어가 성령님에 의해 통제받고 있는가?’ 하는 점입니다.
여러분들 어린 자녀들이나 손주들이 험한 말을 하고 거친 행동을 하면 어떻습니까? 다 통제하시잖아요? “그러면 안 돼!”라고 하시지 않습니까? <개는 훌륭하다>의 강형욱 씨도 그 통제되지 않고 사람에게 달려드는 반려견들을 향해 “그러면 안 돼!”하는 거거든요.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이러한 통제를 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왜? 우리가 모세가 아니라, 미리암과 아론처럼 나에게 많은 권한이 주어지면 언제든지 변질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마지막 세 번째는 ’성령님에 의해 통제받고 있는 온유가 사람들에게 나타나고 있는가?‘ 하는 점입니다.
김병삼 목사님의 온유에 관한 설교 중에 그 교회의 어느 권사님의 고백이 은혜가 되어 여러분들과 나누고자 합니다. 잘 들어 보십시오.
믿지 않을 때 나는 온유함이란 인생을 많이 살아온 인심 좋은 할아버지를 뜻하는 단어인 줄 알았다. 믿음이 시작되고 온유함이란 모세의 특징이고, 무엇보다 예수님께서 ‘나는 온유하고 겸손한 자’라고 말씀하셨기에 평생에 바라보고 나아가야 할 성품이라 생각된다. 마냥 착한 것이 아니라 야생마 같은 성질이 잘 다스려져 나오는 그 성품은 정말 어렵고 힘든 시간이 필요한 일이다.
내가 몇 년 전 새벽기도를 다닐 때의 일이었다. 새벽기도를 마치고 집에 가는 길에 집에 식빵이 필요하다는 것이 생각나서 동네 일찍 문을 연 빵집에 들러 식빵을 사려고 했다. 그런데 그 빵집에 혼자 있던 직원이 아직 계산하는 사람이 안 나와 빵을 팔 수 없다는 것이다. 그 식빵은 아침에 만든 것도 아니고, 전날 팔고 남은 식빵이었는데 급한 김에 그 하루 지난 빵이라도 사려 한 것인데, 계산원이 없다는 이유로 빵을 사려면 다시 오든지, 아니면 기다리라고 하는 말에 화가 났다. 직원이 출근하는 시간을 맞추려면 2시간 가까이 기다려야 했다.
‘아니 고작 3,000원밖에 하지 않는 식빵 하나 사는 건데, 그것도 현금을 주고 오겠다는데 같은 직원이면서 기다렸다가 그 돈을 계산하는 직원에게 전해 주는 것이 무엇이 어렵다고 이렇게 고객을 힘들게 하지?’ 하는 생각에 그 직원에게 호통을 쳤다.
“하루 지난 식빵을 급해서 사겠다는데, 같은 직원이면서 식빵값 3,000원을 전해 주지 못하겠다는 것은 고객을 그 시간까지 기다리게 하는 몹시 나쁜 횡포예요! 그냥 두고 볼 수 없으니 사장에게 일러 바로 잡아야겠어요, 이름이 어떻게 되죠?” 하면서 화를 마구 내었다.
그러나 직원은 끝까지 의견을 굽히지 않았고, 나는 씩씩거리며 집에 갔다가 9시가 넘어 다시 빵집에 가서 사장을 만나 자초지종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빵집 사장은 다 이야기를 공손히 듣고선 얼마나 마음이 상했냐면서 아침 일찍부터 찾아오신 고객에게 응대가 분명히 잘못되었다는 것을 아르바이트생에게 일러 주었고 하니 마음을 풀라고 하는 것이 아닌가! 뭔가 얼떨떨한 기분이 들던 중에 빵집 사장은 아침에 갓 구운 빵이라면서 서비스로 얹어 주고 앞으로 그런 일은 없을 것이고 손님을 기억하니 앞으로 더 잘 챙겨 드리겠다고 연신 고개를 숙이며 말하는 것이다. 그렇게 빵집 사장에게 인사를 받으며 빵을 들고나오는데 기분이 묘했다.
분명히 옳은 일이라고 당당히 따지려 했는데, 이미 알고 있던 사장은 자신의 그 긴 불평을 다 들어 주고, 낮은 자세로 직원의 실수라면서 빵까지 챙겨주니 딱히 할 말은 없었다. 그때, 빵집 사장의 목에 걸린 십자가가 기억났다. ‘그래 십자가는 저렇게 행동하는 사람에게 있을 때 더 빛이 나는 거야. 그런데 나는 새벽에 가서 무엇을 기도하고 왔지?’ 하는 생각에 매우 부끄러웠다.
사랑하는 여러분! 좋은 교회의 성도는 교회 안에서만 온유하고 겸손해서는 안 됩니다. 민수기에서는 모세의 온유함에 대해 이렇게 말을 합니다. 민12:3(새번역)
3 모세로 말하자면, 땅 위에 사는 모든 사람 가운데서 가장 겸손한 사람이다.
그는 이스라엘 지파 안에서만 온유한 사람이 아니라 ‘땅 위에 사는 모든 사람 가운데서 가장 겸손한 사람’이었습니다. 저도 그렇고 우리 성도님들도 이 땅을 밟고 사는 동안에 모든 사람 가운데서 가장 겸손한 예수님과 모세를 닮은 온유한 성도의 삶을 살아가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땅은 뭘까요? 땅의 의미를 간단히 살펴보고 말씀을 마치고자 합니다. 온유한 자에게 주어지는 복이 왜 하필 땅일까요? 온유한 사람보다는 투자도 잘하고 대범한 사람이 땅을 많이 차지할 것 같은데 성경은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땅에 대해서는 여러 학자들의 견해가 있지만, 변종길 교수님이라는 분이 쓴 「산상보훈」이라는 책에서 참 설명을 잘해주셨더라고요. 그 책에서 이렇게 말을 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땅은 일차적으로 미래의 새 땅을 가리킨다. 다시 말해 성도들이 미래에 들어가서 살게 될 새 하늘과 새 땅을 말한다.” 베드로후서 3장 12절요
12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라 그날에 하늘이 불에 타서 풀어지고 물질이 뜨거운 불에 녹아지려니와 우리는 그의 약속대로 의가 있는 곳인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도다. 이 본문을 현대인의 성경으로 보니까요. 이렇게 번역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약속대로 정의만이 있는 새 하늘과 새 땅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여러분, 온유한 자에게 어떤 복이 있습니까? 온유한 자가 누리는 복이 무엇인가요? 장차 주님이 이 땅에 재림하실 때 정의가 지배하는 땅, 불의가 자리 잡지 못하고 정의만이 흐르는 새 하늘과 새 땅, 그 땅을 다시 오실 주님이 주실 것이기 때문에 그런 자들이 땅에서는 맨날 손해 보는 것 같고 맨날 억울하면서도 흥부처럼 콩쥐처럼 말 한마디 제대로 못 하고 삼키고 억울하지만, 우리 믿는 자들이 다르게 살 수 있는 게 무엇 때문이죠? 우리에게 소망이 있거든요.
장차 다시 오실 주님이 우리에게 주실 새 하늘과 새 땅은 가나안 땅과 같이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 아니라, 정의가 강물처럼 흐르는 땅. 우리가 바로 일구어야 할 땅은 바로 이것입니다.
<선한 능력으로>라는 찬양 시를 쓰신 본회퍼 목사님을 잘 아시잖아요? 나치를 피해 미국에 가서 살면 되는데, 굳이 다시 조국으로 돌아와서 서른아홉 살 젊은 나이에 목숨을 잃는데요. 어떻게 그게 가능했을까 보니까요. 「디트리히 본회퍼 묵상52」의 ‘온유한 자가 땅을 차지한다’를 읽어드리는 것으로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땅은 이처럼 권리와 힘이 없는 사람들에게 속합니다. 지금 폭력과 불법으로 땅을 차지한 자들은 땅을 잃어버릴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땅을 포기한 자들, 십자가에 이르기까지 온유한 자들은 새로운 땅을 지배할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세상 안에서 일어날 형벌의 정의를 생각할 필요는 없습니다. 칼뱅은 하늘나라가 내려오면 땅에 모습은 새로워질 것이며 땅은 예수님의 공동체의 땅이 될 것입니다.”
또 이런 대목도 있습니다. “하나님은 땅을 버리지 아니하십니다. 하나님은 땅을 창조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아들을 세상에 보내셨습니다. 하나님은 이 땅에 자신의 교회를 세우셨습니다. 이처럼 이미 이 시대에 주춧돌이 세워졌습니다. 이미 이곳에서 힘없는 자들에게 한 조각의 땅이 주어졌습니다. 그들은 십자가에 이르기까지 박해를 당하는 가운데서도 교회와 공동체와 자매들과 형제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골고다도 한 조각의 땅입니다. 가장 온유한 자가 죽었던 골고다로부터 땅은 새로워질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올 때 온유한 자들이 땅을 차지하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 나치의 그 끔찍한 박해 속에서 결국은 죽음으로 인생을 끝낼 수밖에 없었던 본회퍼 목사님을 우리 모두가 존경하고 흠모하는 것은, 그가 꿈꾸는 온유한 자가 일구어야 할 정의만이 있는 새 하늘과 새 땅. 그 땅을 사모하면서 바로의 황금 지휘봉이 아닌 모세의 마른 막대기를 손에 쥐고 로마 황제의 길이 아닌 제자의 길을 갔기 때문 아닙니까?
여러분, 우리가 그 위대한 지도자 모세와 같이, 본회퍼 목사님과 같이 인류 역사의 한 획을 그을 만한 위대한 일을 하지는 못할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모인 우리가 주님 다시 오실 그날까지 새 하늘과 새 땅을 기다리며 정의가 강물처럼 흐르는 땅을 우리 자녀들과 우리 후손들에게 믿음의 기업으로 물려주어야 하지 않을까요?
때로는 모욕적인 일도 있고 억울한 일도 있을 것입니다. 그럴 때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모세와 같이 온유로 그를 품고 대하는 그런 믿음의 사람들, 그래서 하나님이 약속하신 약속의 땅으로 한 걸음 한 걸음 믿음의 걸음을 걸으며 복된 땅을 일구는 저와 우리 교우님들이 다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결단찬양 : 선한 능력으로
❙합심기도
이제 함께 기도하실 때, “주님, 온유한 사람이 되길 원합니다. 아버지, 제게 온유를 허락해 주시길 원합니다. 그 온유는 내 안에 있는 성품이 아닌 성령의 열매인 줄로 믿습니다.” 오늘 성령 충만할 때, 내게 아픔을 주고 모질게 굴었던 그 사람도 모세처럼 그 영혼을 위해 기도하길 원합니다. 내 안에 온유가 회복되면 가정이 살아날 줄로 믿습니다. 내가 온유해지면 교회가 살아날 줄로 믿습니다. 모든 믿는 자들이 온유가 회복될 때 이 땅 대한민국이 살아날 줄로 믿습니다. 이 시간 오늘 말씀을 기억하면서 주신 은혜를 기억하며 간절한 마음으로 합심하여 함께 기도하겠습니다.
❙기도
살아계신 하나님 아버지! 모세의 마른 막대기와 같이 이 쓸데없던 우리를 불러 주시고 오늘날까지 주님의 도구로 삼아주시니 감사를 드립니다. 모세와 같이 온유한 자의 길을 걷게 하여 주시옵소서. 미리암이나 바로의 길이 아닌 모세의 길을 가길 원합니다. 강팍한 마음을 버리고 온유와 겸손의 능력으로 절제된 힘을 가지고 남은 인생을 성령님의 통제를 받으며 작은 예수의 삶을 살게 하여 주시옵소서.
주님, 우리 하름교회의 남신도회가 더욱 영적으로 부흥하길 원합니다. 모세와 같이 하나님의 통제하심을 받은 절제된 힘을 가진 이 시대의 모세와 같은 우리 남신회가 되어 하나님 나라가 임할 때 주님이 주시는 새 하늘과 새 땅을 차지하는 복된 우리 남신도회원들이 다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모든 것을 주님께 맡겨 드리며 사랑이 많으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축도
이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아버지 하나님의 크신 사랑과 성령님의 교통 하심이, 모세와 같이 예수님과 같이 온유하고 겸손함으로 주님이 주실 새 하늘과 새 땅을 사모하며 살아가길 다짐하는 사랑하는 교우들 머리 위에 특별히 모든 남신도회원들 머리 머리 위에 지금부터 영원히 함께하시기를 간절히 축원하옵나이다. 아멘.
Related Media
See more
Related Sermons
See mor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