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면의 빛을 밝히라
Notes
Transcript
서론
서론
오늘은 조각품 하나 소개 해드리겠습니다.
프렌체스코 케이 롤로
이 작품의 놀라운 점은 저 그물이 섬유가 아니고 대리석으로 조각한 것이라는 점입니다. 그리고 대리석 덩어리 하나 전체를 조각한 작품이라는 것입니다.
제가 이 조각품에서 감명을 받은 것은 작품에 쏟은 작가의 열정과 재능에 놀랐지만, 더 인상 깊었던 것은 이 작품의 제목 입니다.
“속임수로 부터의 자유"
세상은 많은 면에서 기만적인 정보를 많이 제공 합니다.
너도 나도 각자의 생각으로 행복에 대해 인생에 대해 말합니다.
세상은 끊임 없이 잘못된 길로 인도 합니다.
마치 맹인이 맹인을 인도하듯이 말입니다.
세상은 가치는 우리의 신앙에 도전하고 심지어 비난을 퍼붇는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저 작품이 보여주는 모습이 어쩌면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 기독교인들의 모습이 아닐까 생각해보았습니다.
오늘 주님은 진정 우리가 살펴야 할 것이 무엇인지 말씀 해주십니다.
그것은 우리의 내면에 빛이 어둡지 아니 한지 살펴 보아야 한다고 말씀 하십니다.
오늘 설교를 통해 우리의 영혼의 상태에 대해 살펴보시는 귀한 시간되시기를 축원 합니다.
표적을 구하는 악한 세대
표적을 구하는 악한 세대
표적을 구하는 시대에서 눈에 보이는 것들을 추구하는 시대에서
내면의 빛을 추구 해야 한다.
지난 시간에도 말씀 드렸습니다만 주님의 공생애를 평가하는 여러가지 관점이 존재 하지만 아마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메시야 이신 주님이 이 땅에 오신 이유와 의미 보다 예수님이 행하신 기적과 이적과 표적에 가장 관심이 많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주님은 이렇게 표적 즉, 눈에 보이는 역사나 가치만을 추구하는 삶을 ‘악하다' 라고 표현 하십니다.
요나의 표적 외에는 보일 표적이 없다.
무리가 모였을 때에 예수께서 말씀하시되 이 세대는 악한 세대라 표적을 구하되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일 표적이 없나니
왜 주님은 ‘악하다' 라는 표현으로 이 시대를 정의 하셨는지 그리고 하나님의 관점에서 선함은 어떤 것인지 이후에 더 설명 하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왠 주님은 요나의 표적은 어떤 표적이기에 강조했을까? 부터 살펴 보겠습니다.
하나님은 요나에게 니느웨에 가서 하나님의 경고의 말씀을 전하라는 명령을 받습니다.
니느웨는 당시 강대국이었던 아시리아(앗수르)의 수도 였습니다.
요나를 보내 경고의 말씀을 선포하시려던 이유는 이 나라의 죄악과 불의 때문 이었습니다.
너는 일어나 저 큰 성읍 니느웨로 가서 그것을 향하여 외치라 그 악독이 내 앞에 상달되었음이니라 하시니라
앗수르는 영토확장에 노력했고 그 과정에서 피 정복 민족을 완전 말살하는 것을 자랑으로 여겼습니다. 종교적으로는 말할 것이 없고 정치적으로도 불의가 판을 치는 야만적인 나라로 성경에서는 묘사 합니다. 또한 성경에서는 앗수르를 이스라엘을 정신 차리게 하는데 하나님이 사용하시는 몽둥이로 묘사 하기도 합니다.
앗수르 사람은 화 있을진저 그는 내 진노의 막대기요 그 손의 몽둥이는 내 분노라
내가 그를 보내어 경건하지 아니한 나라를 치게 하며 내가 그에게 명령하여 나를 노하게 한 백성을 쳐서 탈취하며 노략하게 하며 또 그들을 길거리의 진흙 같이 짓밟게 하려 하거니와
이런 앗수르에게 마지막으로 회개할 기회를 주기 위해 요나를 보내주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요나를 통한 대 회개 운동 이후 딱 100년 후 바벨론에 의해 철저하게 짇밟히는 기사를 기록한 것이 나훔서 입니다. 물론 회개 후 더 교만해지고 타락한 결과 입니다.
한편, 요나는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다시스로 도망합니다.
니느웨가 현재의 이라크 모술 지역 이라면
다시스는 스페인 남부의 지브롤트 지역 으로 추정 됩니다.
다시스는 금속제련이 발달하고 무역이 활발한 도시 였습니다.
당시 가장 부하고 화려한 도시였습니다.
흉폭하고 야만적인 나라와 세련되고 풍요로운 나라 중 여러분은 가고 싶은 나라가 어디겠습니까? 더군다나, 앗수르는 하나님이 이스라엘이 잘못할 때마다 몽둥이로 상용하시던 나라이니 원수의 나라 라고 여겼을 것입니다.
적용
이런 배경에서 요나는 다시스로 도망 한 것입니다.
우리가 여기서 얻을 수 있는 통찰은 ...
우리의 기호와 선호를 따르지 말고 하나님의 음성에 순종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은 하지 말아야 할 것을 안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을 정확히 순종하는 것도 중요 합니다.
요나는 아마도 ...
‘하나님, 제가 느니웨 처럼 죄악된 원수 나라를 선교 하느니, 차라리 먼길을 목숨을 걸더라도 다시스로 가겠습니다. 니느웨가 가깝고 편하지만 그들에게 가는 대신 제가 더 수고해서 다시스로 가겠습니다.” 라는 마음이었을지도 모릅니다.
하나님의 관점에서 우리가 더 고생하고 더 힘든 길을 선택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정확히 알고 순종하는 것을 더 기뻐 하신다는 것을 요나를 통해 알 수 있습니다.
“요나 보다 큰 이"
또 한편, -
요나의 기사는 요나의 불순종에 촛점을 마추는 경향이 있지만,
사실, 이 기사에서 중요한 부분은 그의 인생의 터닝 포인트 입니다.
요나의 기사 중에 주님이 언급하신 부분은 물고기 뱃속 이전과 이후의 차이점 입니다.
신학적으로 요나의 기사는 예수님의 공생애 대한 예표 입니다.
요나를 들어 바다에 던지매 바다가 뛰노는 것이 곧 그친지라
요나를 바다에 던졌다는 것은 다른 사람들의 생명을 구하기 위해 대표로 죽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지는 예수님을 상징 합니다. 다른 점은 주님은 죄없으신 하나님의 아들이었다는 것입니다.
요나는 불완전한 선지자로 죄지은 인간으로 묘사 되지만 주님은 요나 보다 더 큰 이로서 침몰 해가는 이 세상을 구원할 구원자 라는 것을 예표 합니다.
누가복음 11:32 (NKRV)
심판 때에 니느웨 사람들이 일어나 이 세대 사람을 정죄하리니 이는 그들이 요나의 전도를 듣고 회개하였음이거니와 요나보다 더 큰 이가 여기 있느니라
요나의 니느웨 회개 운동은 한계가 있는 것이지만 주님의 회개운동은 온 인류에게 영생을 얻게한다는 점에서 큰 차이를 보이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 주님의 부활을 요나의 기사를 통해 계시 하십니다.
여호와께서 이미 큰 물고기를 예비하사 요나를 삼키게 하셨으므로 요나가 밤낮 삼 일을 물고기 뱃속에 있으니라
요나의 표적 외에는 보일 것이 없다고 하신 주님의 말씀의 의미를 아시겠습니까?
인생의 기적과 이적이 나타난다면 놀라움의 연속일 것입니다.
인간의 힘으로 해결 할 수 없는 일들이 주님의 권능으로 해결된다면 누가 하나님을 믿지 않겠는가 라고 생각할지 모릅니다. 하지만, 기적을 체험하는 것이 우리를 구원으로 인도 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내적인 체험이 아닌 가시적인 체험 입니다.
인생의 스올 속에 갇혀 보고 그 어둠 속에 던져 졌을때,
그 스올 뱃속에서 절망을 체험하고 결국 오직 우리의 소망은 예수뿐임을 알게 될때,
비로서 우리는 내 안에 빛나고 있는 진리의 빛을 발견하게 됩니다.
주님의 부활은 단지 주님이 하나님의 아들임을 보여주는 것으로 머물지 않습니다.
주님의 부활은 믿는 자들에게 첫 열매가 되어서 우리도 주님과 함께 부활 할것임을 소망하게 하고 죽음을 이기는 강력한 힘을 줍니다.
영적침체
이 스올의 시간은 일종의 영적 침체 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예레미야가 이세벨의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 850과의 신령한 전투에서 승리한 직후 찾아온 무력감과 공포는 그를 로뎀나무 가에 기대 앉아 죽음을 바라는 처지로 내몰아 갑니다.
의기양양 했던 선지자 요나도 마찬가지로 스올에 갇혀 죽음을 기다고 있었습니다.
제가 일전에도 소개 한적이 있는 20세기 최고의 설교자 마틴 로이드 존스의 책 <영적침체> 라는 책에서 신자가 처하는 영적 침체에 대해 이야기 합니다.
“그들은 교회의 역사를 아름답게 장식하고 있는 여러 성도들의 생애와 그리스도인들의 전기를 읽으면서 그들과 자신의 차이를 바로 인정합니다. 자신은 한 번도 그들처럼 살아 본 적이 없다는 것, 그들이 분명히 누렸던 것을 누리지 못한다는 것을 압니다.
이런 불행한 상황에 처한 그리스도인들이 많습니다. 그들에게 그리스도인의 삶은 해결되지 않는 숙제입니다. 그들은 늘 같은 질문을 던집니다. “왜 난 저런 자리에 이를 수 없을까? 왜 저렇게 되지 못할까?” 그래서 자신에게 없는 그 무언가를 찾기 위해 끊임없이 기독교적인 삶의 방식을 가르치는 책을 읽거나 이런저런 집회와 수련회에 참석합니다. 그들은 낙심합니다. 그들의 영혼은 낙심하며 속에서 불안해하고 있습니다.”
교회에 대한 전반적인 문화에는 익숙하고 잘알고 있고 소위 영적이고 믿음 좋은 사람들에 대한 존경과 선망을 가지고 있지만 일차적이고 기본적인 원리들을 분명히 모르고 있다.
예컨데, 칭의에 대해 지식적으로 알고는 있지만 정확히 나와의 관계를 느끼지 못한다. 칭의에 대해 모르면, 도덕적 선함을 추구하고 그것이 성화의 길이라고 착각하게 된다. 성화를 이루며 살기 위해서는 먼저 칭의를 알아야 하고 칭의를 알기 위해서는 인간의 전적 타락 교리를 받아 들여야 합니다.
내가 죄인이고 나를 위해 십자가 지셨다는 것을 진심으로 받아들일때, 진정한 삶의 변화가 시작되고 성화의 여정이 시작됩니다.
이것을
구원의 서정 이라고 합니다.
마틴 로이드 존스는 많은 그리스도인 특히, 모태신앙을 가진 사람들이 이 죄의 문제를 통한 자신의 죄인 됨을 체험 하지 못하기에 진정한 은혜를 체험 하지 못한다고 말합니다.
몹시 경건한 가정에서 자라난 그 여성은 예배에 꼬박꼬박 참석했을 뿐 아니라 교회생활도 적극적으로 부지런히 했습니다. 그런데 그가 다니던 교회에는 갑자기 회심하여 악한 과거―술에 빠져 지내는 등의 생활―를 청산한 이들이 많았습니다. 그 여성이 저한테 했던 말이 지금도 생생히 기억납니다. “이해하시겠지만, 저도 다른 환경에서 자랐다면 좋았을 것 같아요. 저도 그런 분들처럼 살았다면 그렇게 놀라운 경험을 할 수 있었을 테니까요.”
이 말에 담긴 의미가 무엇인지 알겠습니까? 그 여성은 한 번도 자신을 죄인으로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왜 없었을까요? 거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그런 사람은 죄를 행동의 문제, 구체적인 잘못의 문제로만 생각합니다. 그것도 몇 가지 특정한 행동의 문제로만 생각합니다
보통 사람들은 죄를 술취함 방탕함 같은은 몇 몇의 특정 잘못된 행동으로 생각 합니다.
제가 십계명에 대해 여러번 다뤘지만, 하나님의 관점에서 죄는 무엇인지 보여주는 것이 십계명 입니다. 십계명을 요약하면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 입니다.
네 마음을 다하여 뜻을 다하여 힘을 다하여 ...
하나님을 사랑했느냐?
네 이웃을 살인하지 않고 도적질 하지 않고 간음 하지 않고 또 부모에게 효도했느냐? 즉, 사랑했느냐?
이 질문에 자유로울 수 있는가 묻고 있는 것이 율법이고 십계명 입니다.
율법은 우리가 다 지킬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아주 역설적인 규율 입니다.
유대인들의 가장 큰 문제 이자 착각은 하나님이 인간이 율법을 지키면 좋아 하실 것이라고 믿은 것입니다.
오히려 하나님은 인간이 율법을 지키려고 애쓰고 선하게 살려고 발버둥을 치다가 안된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 토해내는 고백을 통해 하나님만 의지하게 하는 목적이 율법이고 그리스도가 구주로 오셔야 하는 이유를 말해주시는 것이 율법의 목적 이었습니다.
마치, 요나가 자신의 혈기를 다 내려놓고 스올에 갇혀 하나님께만 의지하고 부르짖는 모습과도 같습니다.
요나가 물고기 뱃속에서 그의 하나님 여호와께 기도하여
이르되 내가 받는 고난으로 말미암아 여호와께 불러 아뢰었더니 주께서 내게 대답하셨고 내가 스올의 뱃속에서 부르짖었더니 주께서 내 음성을 들으셨나이다
인간의 몸을 입은 자라면 누구라도 이 육적 멸망을 경험해야만이 영적 흥함을 체험할 준비가 됩니다. 스올에 내려간 자만이 부활을 체험하게 됩니다.
시므온이 그들에게 축복하고 그의 어머니 마리아에게 말하여 이르되 보라 이는 이스라엘 중 많은 사람을 패하거나 흥하게 하며 비방을 받는 표적이 되기 위하여 세움을 받았고
또 칼이 네 마음을 찌르듯 하리니 이는 여러 사람의 마음의 생각을 드러내려 함이니라 하더라
기록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자신이 의인이 아니었다는 것을 깨달아야 비로서 죽게 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고 나아가 예수를 찾게 됩니다.
내면의 세계에 관심을 갖게 되고 내 영의 상태를 관리하게 될 때,
인간은 그 안에 빛이 필요하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이 책도 예전에 소개한적이 있던 책인데,
고든 맥도날드의 <내면세계와 영적성장> 이라는 책입니다.
요즘 날마다 주님따라에서 함께 묵상하고 있는 책이기도 합니다.
맥도날드 목사는 30살이 되던 해에 다음일, 다음일을 반사적으로 처리하며 바쁘게 살던 자신이 내면적으로 질서도 없고 영적으로 고갈된 상태 라는 것을 깨닫게 되면서 쓰게 된 자전적 책 입니다.
“우리는 바쁘면 바쁠수록 스스로를 그만큼 더 중요한 인물인 양 여기고 남들에게도 그렇게 비칠 것이라고 상상한다.”
“더 많은 프로그램, 더 많은 모임, 더 높은 학력, 더 넓은 대인관계, 더 바쁜 일정 등 삶의 표면을 이루는 이 모든 것이 너무 무거워져 도무지 감당 할 수 없게 되면 결국 삶 전체가 무너져 내린다.”
“종교적 소음 저변에는 견고하고 흔들리지 않는 무언가가 있어야 한다.”
“심각한 거리감 때문에 하나님과 맞닿아 있는 삶의 중심을 놓치고 있을지...”
유명 비행사 찰스 린드버그의 아내인 앤 머로우 린드버그는
“나는 무엇보다 먼저 나 자신과 평화롭게 지내고 싶다. 내 책임과 활동을 능력껏 잘 수행해 갈 수 있도록 한눈팔지 않고 순수한 의도를 가지며 삶의 중심을 붙들고 살기 원한다.... 가능한 많은 시간을 ‘은혜 안에서' 살기 원한다.
영적 침체, 내면의 질서를 잃은 상태
우리의 심령이 점점 빛을 잃어 가는 상태를 말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주님은 내면의 빛으로 설명 하십니다.
그러므로 네 속에 있는 빛이 어둡지 아니한가 보라
우리 눈이 어두우면 빛을 보지 못하고 글을 보지 못하지만
내면의 빛이 어두우면 바로 주님을 볼 수 없게 됩니다.
요나는 하나님의 명령을 가볍게 무시 했습니다.
내면에 진리의 말씀의 빛이 흐릿한 상태였기 때문 입니다.
엘리야는 850명의 이방신을 음란하게 섬기는 자들을 상대해 승리했는데도
내면의 빛을 잃고 로뎀나무에 기대어 죽음을 빌었습니다.
하지만 우리의 절망스러운 경험 즉, 스올의 뱃속과 로뎀나무 그리고 고든 맥도날드가 경험한 “텅빈 영혼”의 상태 그리고 존 웨슬레가 모라비안 형제단과 침몰해 가는 배에서 경험한 회심 등등은 오히려 우리 영혼의 빛을 찾기 위해 울부짖는 갈급함과 영적인 위기감을 주었습니다.
우리 신앙에는 끊임 없는 위기가 찾아 옵니다.
하지만 우리는 외적인 삶에서 찾아 오는 해결해야 할 위기 보다 심각하게 느끼지 못합니다. 오늘 일용할 양식과 몇년의 준비와 노후의 대비가 되어 있다면 더욱 더 우리는 내면에 신경을 쓸 시간적 여유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 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내면의 빛을 찾는 일은 시간의 여유가 있다고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일종의 훈련이고 지속적인 노력을 필요로 하는 또하나의 삶의 방식 이기때문 입니다.
누가 영적인 사람 입니까?
누가 신령한 성도 입니까?
하나님이 보시기에 선함은 무엇입니까?
진정 순수하고 지고지순한 하나님을 향한 사랑은 어떤 모습입니까?
저 십자가가 정말 여러분을 위한 피비린내 나는 처절한 희생 입니까?
우리 생각해 봅시다.
왜 우리는 지금 살고 있습니까?
우리가 해야 할 가장 가치 있고 고귀한 일은 무엇입니까?
저는 오늘 저 자신과 여러분에게 이 질문을 던지고 묵상하고자 합니다.
여러분 우리의 고귀한 인생을 하루 하루 주어진 일상의 필요를 채우고
해결해야 할 일을 처리하는데에만 쓰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우리 내면에 빛을 잃어가고 있고
우리의 영이 파리하게 메말라가고 있다면
빛을 찾고 영을 살리는 일이 그 어떤 일보다 시급합니다.
또한 우리 가족과 자녀들이 형제들이 만약에 그런 상태라면
그들을 위해 절실하게 중보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태도가 결국 우리의 삶의 태도 입니다.
오늘 주님의 권면 처럼
우리 내면에 빛이 어둡지 아니한가 점검해보시는 영적인 성찰의 하루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 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