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랑의 들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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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 들러리라는 말을 들어보셨나요? ‘너는 들러리야!’라고 말한다면 그 말의 뜻은 너는 “주인공이야”라는 의미라기 보다는 “주인공 곁에서 주인공에게 가려진 존재야”라는 의미로 말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들러리라는 존재는 사실 빛나고 주목 받는 존재라기 보다는 주인공을 빛나게 만드는 존재가 들러리라고 이야기할 수 있을것 같습니다. 들러리의 역할이 주인공을 빛나게하고 본인은 가려지기에 안좋은 의미로 사람들이 사용하기도 하지만 그 본연의 역할은 안좋은 의미라기 보다는 주인공을 빛나게 만드는 역할인 것이죠.
요즘 드라마의 표현으로는 ‘최고의 조연’이라는 표현으로 대체해서 쓸 수 있는 것이 들러리라는 표현인 것 같습니다. 특별히 들러리라는 표현은 결혼식 용어이기도 합니다. 신랑와 신부가 돋보이도록 섬기는 역할을 들러리라고도 하는데요. 고대 사회, 즉 예수님께서 계시던 사회 속에서는 들러리의 역할이 “결혼식 전체를 주관하고 모든 세부적인 일들을 계획해서 진행하는 역할”이 고대 사회에서 들러리의 역할이었다고 합니다.
즉 고대 사회에서 들러리의 가장 큰 기쁨은 결혼식이 아무런 문제 없이 진행되어져가고, 신랑 신부가 서로 크게 기뻐하며 결혼식을 잘 마무리하고, 서로가 부부로서 하나가 되는 것을 지켜보는 것이 들러리의 가장 큰 기쁨이었다고 합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오늘 자신 스스로를 “들러리”라고 표현하는 인물이 성경 속에 나오는데요. 바로 ‘세례 요한’이 자신 스스로를 들러리라고 표현함을 보게 됩니다.
세례 요한이 누구인지 잠시 살펴볼 필요가 있겠죠?? 세례요한은 구약 성경에 메시야가 오실길을 준비하는 자로 예언되었던 존재였습니다. 그리고 그 부르심의 목적대로 광야에서 메시야의 오실 길을 준비하고 있었던 자였습니다. 그리고 세례 요한이 예수를 처음 봤을 때, 예수께 성령이 임하시는 것을 보고 저 분이 “메시야”라는 것을 깨닫고 예수님에 대한 증언을 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세례 요한의 제자들도 무수히 많았겠죠?? 세례를 베풀고 회개의 운동을 펼치던 사람이었으니 세례 요한을 따르는 제자들도 많았고, 그 무렵 예수를 따르는 사람들, 제자들도 무수히 많은 상이에 있었습니다. 한번 상상해봅시다. 예수님이 나타나기 전에는 모든 주목을 세례 요한이 받았는데 예수님이 나타나신 이후로는 그 주목이 예수님께 뺏기게 되었단 말이죠?? 이러한 상황 속에서 세례 요한을 따르던 제자들은 어떤 마음이었을까요??
제가 낭만닥터 김사부라는 드라마를 엄청 좋아합니다. 시즌 1부터 3까지 모두 다 챙겨보았는데요. 시즌 2에서 이런 대사가 나옵니다. 김사부를 따르는 사람들이 있고, 박민국 원장이란 사람을 따르는 사람들이 있는데, 박민국 원장이란 사람이 무리한 수술을 진행하다가 환자를 죽게 만들고 결국 무너며내리며 모든 책임을 스스로 지고 떠나려고 하는 상황이 펼쳐지죠. 이 때 박민국 원장을 따르던 한 의사 선생이 있습니다. 양호준이라고 ..
이 캐릭터가 뭐라고 이야기하면, 원장님이 이렇게 무너지시면! 원장님을 쫓아 모든걸 버려두고 따랐던 저는요!!! 저는 뭐가 됩니까?? 무너지지 마세요!!! 라고 이야기를 합니다.
저는 이 마음이 세례 요한의 제자들의 인간적인 마음이지 않았을까?? 생각해보게 됩니다. 자드이 따랐던 스승보다 새로 나타난 예수라는 사람에 대한 주목과 관심이 더더욱 강해지니, 자신의 스승의 사역과 일들이 계속 가능할까?? 요한을 따랐던 나는 어떻게 되는거지?? 하는 그런 인간적인 마음들 말이죠.
오늘말씀 25-26절에서 이러한 요한의 제마들의 마음이 여실히 드러납니다. 한번 같이 읽어볼까요??
“이에 요한의 제자 중에서 한 유대인과 더불어 정결예식에 대하여 변론이 되었더니 그들이 요한에게 가서 이르되 랍비여 선생님과 함께 요단 강 저편에 있던 이 곧 선생님이 증언하시던 이가 세례를 베풀매 사람이 다 그에게로 가더이다” 아멘
요한의 제자가 한 유대인과 논쟁을 벌이다가 요한에게 와서 사람들이 저기 예수께 다 몰려서 갑니다!! 어쩝니까!! 선생님!! 이라고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죠. 즉 세례 요한의 제자들은 자신의 스승인 요한의 명성이 예수께 빼앗기는 것에 대해서 우려하고 자신의 스승의 사역들이 앞으로 어떻게 될지 걱정하고 있다는 것을 말씀을 통해서 보게 됩니다.
이러한 제자들의 우려에 세례 요한은 자신을 “들러리”로 표현하며 제자들의 우려섞인 질문에 대해 답합니다. 우리 한번 28-30절을 같이 읽어볼까요??
“내가 말한 바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요 그의 앞에 보내심을 받은 자라고 한 것을 증언할 자는 너희니라 신부를 취하는 자는 신랑이나 서서 신랑의 음성을 듣는 친구가 크게 기뻐하나니 나는 이러한 기쁨으로 충만하였노라 그는 흥하여야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하니라” 아멘
세례 요한은 자신의 역할은 그리스도 앞에 보냄 받은 들러리임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제가 앞서 고대 사회 속에서 들러리의 역할이 어떤 역할이라고 말씀 드렸죠?? 결혼식 전체를 주관하면서 결혼식이 무사히 진행되도록 돕고, 진행하는 역할이라고 말씀드렸죠?? 그리고 들러리의 기쁨은 결혼식이 무사히 마쳐져가고, 신랑과 신부가 부부로서 하나가 되는 것이 들러리의 기쁨이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세례요한은 자신의 역할이 신랑의 들러리임을 이야기하며 자신은 제자들의 우려와 다르게 오히려 들러리로서의 기쁨으로 충만함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자, 그럼 여기서 한가지 의문이 들죠 . 세례요한이 들러리로 자신을 소개하고 있다면, 세례 요한이 바라본 신랑과 신부는 누구일까요??
먼저 세례 요한은 신랑을 ‘예수 그리스도’에게 빗대어 이야기하고 있음을 말씀의 문맥 가운데 파악하게 됩니다. 그렇다면 신부는 누구일까요?? 구약의 여러 본문에서 이스라엘 가운데 신실한 자들을 ‘여호와의 신부’로 표현합니다. 요한은 이러한 구약의 내용들을 분명히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즉 세례 요한은 다음과 같이 인물을 설정하고 있는 것이죠.
신랑은 예수이며, 신부는 하나님의 부르심으로 예수를 따르는 자들(교회), 그리고 이 신랑과 신부의 들러리가 바로 ‘자기 자신’이라고 인물을 설정하고 있는 것입니다.
들러리인 세례요한 입장에서 신랑이신 예수께 하나님이 부르신 자들이 나아가는 것은 신랑과 신부의 결혼식이 무사히 진행되고 있는 것이며, 신부가 되는 하나님의 사람들이 신랑되시는 예수께 나아가서 그분을 만나고 그분과 연합하여 하나가 되는 것 이것이 들러리로서의 자신의 기쁨이라는 것을 세례 요한은 제자들에게 설명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오늘 말씀 22절이 이야기하고 있는 바는 흥미롭습니다. 한번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 그 후에 예수께서 제자들과 유대땅으로 가서 거기 함께 유하시며 세례를 베푸시더라 “ 아멘
예수께서 세례를 베풀었다고 요한복음 기자는 서술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바로 다음 장인 4:2절을 보면 사실 예수께서 베푸신 세례가 아니라 예수의 제자들이 세례를 베푼 것이라고 요한복음 기자는 다시 이야기를 합니다. 즉 요한복음의 기자는 예수께서 세례를 베푸신게 아니라, 예수의 제자들이 세례를 베풀었다는 사실을 다 알고 있으면서도 3:22절에 굳이 예수께서 세례를 베푸셨다고 쓰고 있는 것이죠.
이러한 요한복음 기자의 의도는 세례 요한과 예수의 구도를 대립의 구도로 제시하기 위함임을 보게 됩니다. 세례 요한의 제자들이 생각하고 있는 것 처럼 세례 요한과 예수의 구도가 서로 경쟁하는 구도로 독자들에게 비춰주고 있는 것이죠. 이러한 긴장감 있는 구도 속에서 요한복음을 읽는 사람들은들 세례요한의 제자들과 같은 마음으로 성경을 읽어 내려가게 되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 가운데 자신을 들러리로 소개하는 ‘세례 요한’의 이야기를 만나게 되는 것이죠. 나는 신랑이 아니다. 신랑은 오직 예수님이시며 하나님의 사람들이 신부로서 신랑께 나아가 그분과 연합하는 것이 나의 기쁨이다! 라는 세례 요한의 이야기를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세례 요한의 마지막 말로 모든 긴장의 구도는 해결이 되고 오직 예수님만이 드러나게 됩니다.
30절에 “그는 흥하여야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라는 요한의 고백을 통해서 말이죠.
사랑하는 피프리 여러분, 오늘 말씀 속에서 결국 우리는 무엇을 발견하게 되나요?? 특별히 요한복음 기자가 사용하고 있는 긴장의 구도 속에서 만나게 되는 세례 요한의 고백은 우리에게 무엇을 전해주고 있나요??
의도적으로 긴장의 구도를 우리에게 제시하며 우리도 모르게 세례 요한의 제자의 입장에 서서 성경을 읽어나가다가 세례 요한의 고백을 통해 모든 긴장의 구도가 해소 되고 오직 예수님만이 흥해야한다는 메시지를 전하고 있는 것이 오늘의 본문인 것이죠.
22-30절은 세례요한과 제자들의 대화라면 31-36절은 이러한 대화에 대한 요한복음 기자의 해석입니다. 31-36절을 보면 결국 요한복음 기자는 예수 그리스도만이 하늘에서 오신 분이며, 그분만이 참되고 그분께 모든 만물이 속했으며 예수에게 영생이 있고 그를 믿는 자에게 영생이 있음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즉 세례 요한의 스스로를 들러리로 칭하며 신랑되신 예수님만이 흥해야하고 자신은 들러리로서 쇠하는 것이 마땅한 것이라는 고백을 통해 예수님만을 더욱 부각시키고, 그 예수께 모든 것이 속하였고 영생이 있다는 것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죠.
사랑하는 피프리 여러분, 오늘 말씀을 통해서 우리의 삶을 한번 돌아보았으면 좋겠습니다. 여러분은 어떠신가요?? 여러분 스스로를 예수님과 경쟁 구도에 두고 계시진 않으신지요?? 여러분의 인생과 삶에 있어서 예수님께서 모든 것을 맡기고, 주님이 끌어가시는 삶과 인생이 아니라 예수님의 경쟁자로서 자신이 굳게 서서 나의 마음과 나의 뜻대로 예수님과 상관 없이 살아가는 인생을 살고 계시진 않으신지요??
어쩌면 요한복음 기자가 예수께서 세례를 베푸신 것이 아니라, 예수의 제자들이 세례를 베푼 사실을 알면서도 의도적으로 예수께서 세례를 베푸셨다고 서술하면서 세례요한과 예수의 경쟁구도로 이야기를 시작하는 이유는 우리의 삶과 인생이 순간 순간 예수님과의 경쟁구도로 서서 주님과 싸우며 나아가고 있기 때문이지 않나 생각해보게 됩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음에도 예수님과 무관하게 살고 싶어하고, 예수님을 모른채 살고 싶어하고, 예수님의 뜻보다 나의 뜻과 마음을 우선으로 생각하며 나아가는 죄인들의 삶을 지적하기 위해서 요한복음의 기자가 의도적으로 경쟁구도를 그리고 있진 않나 생각해보게 됩니다.
하지만 이러한 경쟁 구도 속에서 만나게 되는 세례 요한의 고백을 기억합시다. 우리는 예수님과 경쟁하는 자들이 아닙니다. 우리는 신랑되신 예수님의 신부임과 동시에 주님 다시 오실 길을 준비하는 예수님의 들러리임을 기억합시다. 신랑되신 예수님께 신부로서, 들러리로서 모든 것을 맡기면 세례요한과 같이 예수님은 흥하고 나는 쇠하여야한다는 믿음의 고백을 드릴 수 있는 우리 공동체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저는 중학교 2학년 때 사실 이런 고백이 납득이 되지 않았습니다. 내 삶은 나의 것이지 왜 예수님께 드려야하는가? 예수님보다 내가 흥하는 것이 더 맞지 않나?? 내가 왜 굳이 그래야하지??라는 생각들을 하곤 했었습니다. 하지만 여러분, 제가 예수님을 만난 후 저의 모든 고백은 뒤바뀌었습니다. 세례 요한의 고백처럼 정말 저의 삶 가운데 예수님만이 드러나고 예수님만이 높이 받는 것이 저의 간절한 소원이 되었습니다.
어떻게 이렇게 고백이 바뀔 수 있었을까요?? 저도 세례요한도 예수님만 드러나고 높이고 싶다는 고백을 할 수 있었던 이유는 바로 예수님을 만났기 때문입니다. 세례 요한은 자신에게 세례 받으러 오시는 주님을 만났을 때, 그분 위에 성령이 내리시는 것을 보며 예수 그리스도를 만났고, 저 역시도 수련회의 자리에서, 말씀의 자리에서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났기 때문에 이러한 고백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피프리 여러분, 여러분의 삶을 돌아보시길 바랍니다. 혹 여러분의 삶을 예수님과 경쟁 구도로 설정해두고 있다면 그 모든 것을 내려놓고 세례요한과 같이 주는 흥하여야겠고 나는 쇠하여야겠다는 고백을 드리셨으면 좋겠습니다.
혹여 저처럼 이러한 고백이 납득이 되지 않는다면 예수님을 만나기를 간절히 사모하시길 부탁드립니다. 우리의 삶의 고백은 예수님을 만나기 전과 후로 뒤바뀜을 기억하셨으면 좋겠습니다. 그리하여서 예수님만이 흥하는 공동체가 바로 우리 피프리 공동체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이런 은혜가 우리 가운데 넘쳐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