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계가 힘들때 기억해야할 하나님의 성품 (22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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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troduction
저는 연년생 누나가 한명 있습니다. 14개월 차이밖에 나지 않다 보니 엄청 많이 싸웠습니다. 특히 제가 누나보다 더 키가 커지기 전까지 저는 누나한테 많이 두들겨 맞았습니다. 그럴 때면 저는 엄마나 아빠한테 달려가서 누나의 불의와 악행을 낱낱히 일러 바쳤습니다. 그 시절 저희 누나는 장미란 이상으로 힘이 쌨고 김구라 만큼의 독설가 였기 때문에 억울한 일을 당해도 저 혼자서는 누나와의 싸움에서 도저히 이길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저는 그래서 부모님의 공의로운 개입과 중재가 항상 필요했습니다.
Need
그런데 어른이 되어서도 여전히 관계의 어려움을 겪고있는 저를 발견합니다. 아내나 가족과의 관계에서도, 교회에서도, 심지어 선교지와 이 신학교에서도 말입니다. 예수님을 만나고 나면 이런 어려움이 없을 줄 알았는데, 오히려 더 많이 발견되더라는 것입니다. 저는 이 관계의 전쟁이 단순한 육의 싸움만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역사는 사람을 통해 진행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사단의 입장에서 그 역사를 늦추고 하나님의 영광을 깨뜨릴 가장 좋은 방법은 바로 분열을 일으키고 서로 싸우게 해서 함께 일하지 못하도록 만드는 것입니다.
Theme
우리는 연약합니다. 불완전합니다. 사람들의 관계는 얼음 조각같이 부서지기가 너무 쉽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공의로우신 하나님의 중재와 도움이 필요합니다. 아버지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고통과 필요를 아시고, 도우시며 나 대신에 그 전쟁을 싸우시는 하나님 이십니다.
Outline
다윗의 기도를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의 성품을 발견하고 우리의 관계를 주님께 맡길 근거를 찾을 것입니다.
공의의 하나님을 의지하라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라
신음을 해석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Point1
첫번째, 공의의 하나님을 의지하라
우리의 관계가 힘들때 하나님을 의지할 수 있는 이유는 그분이 공의로운 하나님 이시기 때문입니다.
illustration1
최근 미국에서 ‘오염된 재판’ 이라는 책이 출간되었습니다. 이 책에는 DNA 검사가 불가능 했던 시절 일어났던 여러가지 강력 사건과 그 가해자들의 재판 사례가 나와 있습니다. 1944년 인종차별이 성행했을 당시였습니다. 조지 스티니라는 14살의 흑인 소년은 당시 두 여자 소녀를 성폭행하고 살인한 죄로 재판에 넘겨저 사형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70년이 지난 뒤, DNA 검사를 통해 이 소년은 누명을 벗게되었습니다. 이미 죽었는데 누명을 벗게 된 것이 무슨 소용입니까? 그들의 가족들은 이 억울함과 고통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합니까? 우리가 경찰과 사법부의 공의를 믿을 수 있을까요? 사람의 힘으로 정의와 공의를 완전하게 세우기란 불가능 합니다.
Exegesis1
그러나 하나님은 사람이 아니시니, 그분은 세상에 정의라는 단어가 생기기 전에 이미 공의와 정의를 이 세우신 완전한 하나님 이십니다. 우리가 조직신학에서 배우는 가장 기본적인 원리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은 거짓말을 할 수 없으시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아신다. 하나님은 모든 곳에 계신다. 그분의 선하신 뜻대로 모든것을 하신다! 그러므로 그분의 재판은 실수가 없으시며 공의로울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 다윗도 관계에 대한 자신의 억울함을, 고통을 공의의 하나님께 토로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를 함께 보겠습니다. (시편 109편 1절-5절 함께 읽기)
[시109:1-5]
1 내가 찬양하는 하나님이여 잠잠하지 마옵소서
2 그들이 악한 입과 거짓된 입을 열어 나를 치며 속이는 혀로 내게 말하며
3 또 미워하는 말로 나를 두르고 까닭 없이 나를 공격하였음이니이다
4 나는 사랑하나 그들은 도리어 나를 대적하니 나는 기도할 뿐이라
5 그들이 악으로 나의 선을 갚으며 미워함으로 나의 사랑을 갚았사오니
문맥으로 보건데, 다윗은 그들을 사랑했고 선대하며 잘해주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이유없이 다윗을 미워하고 대적했으며 선을 악으로 갚았다고 합니다. 그들이 어떤 이유로 다윗을 적대했는지 우리는 알지 못하지만, 한가지 분명한 것은 다윗은 도저히 이유를 모르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공의의 하나님께 자신의 억울함을 풀어달라고 외치고 있는 것입니다.
본문에 나오는 그들에 대한 여러가지 추측이 있는데, 많은 학자들은 다윗 주변의 고위 관료들, 혹은 이스라엘 각 지파의 장들 이었을 것으로 추측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지금 다윗의 최 측근들! 다윗을 보필하여 나라를 강건하게 하고 협력해서 백성들을 보살펴야 할 관료들이 자신들의 리더를 괴롭히고 있는 상황인 것입니다.
만약에 누군가 여러분을 이유없이 해꼬지 하거나 험담 한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보통은 화를 내거나, 싸우거나, 주변에 도움을 요청하겠죠. 공권력의 힘을 빌려 경찰에 신고를 하거나, 재판에서 정의롭게 판결 해주기를 기대할 것입니다. 요즘은 온라인에서 누군가에게 험담이나 욕설을 한 것도 명예 훼손죄로 처벌을 할 수 있으니, 요즘 이런 제도가 얼마나 잘 되어 있습니까?
그러나 다윗은 이런 제도가 없었습니다. 그는 2000년도 훨씬 전에 살고 있습니다. 게다가 자신이 왕입니다! 이 나라에 자신보다 높은 사람이 없는데, 누구에게 이 억울함을, 공의 없음을 호소할 수 있겠습니까? 절대 권력과 공의의 주인이신 하나님 밖에 없는 것입니다.
Objection1
누군가는 이런 질문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정의롭고 공의로우시다면, 도대체 이 세상에는 왜이렇게 힘들고 억울한 일들이 많은건가요? 왜 악인은 형통하고 의인은 핍박받나요? 대답은 ‘ 모른다’ 입니다. ‘우리의 지혜로는 알수 없다’ 가 정확한 표현일 것입니다. 하지만 알빈 플랑팅가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에 지속적으로 악과 고통을 허락하는 이유를 나는 도무지 생각해 낼 수 없다. 하지만 좋은 이유를 찾아내지 못했다고 해서, 그것에 아무런 이유가 없다고는 말할 수 없다.’ 그러므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그저 고통 가운데서도 하나님은 선하시고 공의로우시다는 것을 성경을 통해 배우고, 믿음으로 그분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아니, 하나님이 공의로우신 분이라면 그분을 믿는 자녀들이 형통해야 하는것 아닙니까?
그러나 보세요 여러분, 요셉은 형통했습니까? 성경에 그가 ‘형통했다’ 라고 할때마다 그는 가시 밭길을 걷고 있었습니다. 욥은 형통했습니까? 그가 극심한 고난중에 있을 때, 아무도 그 이유를 알지 못했습니다. 그 이유를 추측하려던 친구들과 많은 사람들이 결국 실패하고 하나님의 꾸지람을 들었던 것을 우리는 봅니다.
여러분, 고통은 나쁜 것이고 형통은 좋은것이라는 이분법적인 생각은, 우리가 형통이 세상에서의 번영, 즉 잘사는 것이라고 착각하게 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의 형통은 이런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미 구약에서 수차례 우리에게 형통의 길을 알려 주셨습니다. “네게 명령한 그 율법을 다 지켜 행하고 우로나 좌로나 치우치지 말라 그리하면 어디로 가든지 네가 형통하리라"
주님의 말씀안에 거하는것, 사랑이신 그분의 말씀대로 사는것! 그분의 말씀이 내 안에 거하고, 그 말씀안에 내가 거하는것! 그것이 곧 형통인줄을 믿으시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Restatement1
그러니 여러분 공의의 하나님께 여러분의 관계를 맡기세요.
transition1
정말 힘들고 관계 때문에 무너질때 세상과 주변에 도와달라고 하소연하는 것이 아니라, 정말 믿을만한 재판장에게 상소 하십시오. 하나님은 공의로우시고 정의로우시고 거짓을 말할 수 없는 분이시기에, 여러분의 관계와 삶이 형통하도록 여러분을 도우실 능력의 하나님 이십니다.
Point 2
두번째,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라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 하면 상대방을 이해하게 됩니다.
illustration2
제가 우간다에 선교사로 있을 때의 일입니다. 저와 친분이 있는 선교사님의 부탁으로 우간다 북동쪽의 사파리를 정탐하러 가게 되었습니다. 그곳은 도시에서 왕복 12시간이 걸리는 먼 거리였습니다. 선교사님과 함께 차를 타고 가는 중에 그 사파리 근처에 사시는 다른 선교사님에 대한 이야기를 하게 되었습니다. 이분은 그 선교사님을 싫어했는지 그분에 대해 험담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힘든 지역에 있다고 자기만 선교사인줄 안다. 교만하고 협력할 줄 모른다. 가난하게 사는것이 선교사의 본분인줄 안다.’ 등등의 안좋은 내용 들이었습니다. 저는 그 선교사님을 몰랐기 때문에 그저 듣고만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앞에 오는 오토바이를 피하려다가 차가 전복되고 말았습니다. 차는 뒤집히고 충격으로 창문이 모두 부숴졌습니다. 그곳은 산골짜기 였고 렉카를 불러도 최소 내일 도착한다는 답을 받았습니다. 도저히 방법이 없자 선교사님은 사파리 근처에 사시는, 자신이 험담했던 그 선교사님에게 도움을 요청했습니다. 그런데 제가 만난 그 선교사님 부부는 굉장히 친절했고, 겸손했으며, 우리를 극진히 섬겨 주셨습니다. 저는 순간 강력한 성령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내가 내 손으로 세운 내 종을 너희가 판단하지 말라’ 는 음성이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주권으로 하나님이 부르신 종을 멸시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사고를 통해 우리의 불의함을 꾸짖으셨습니다. 선교사님 부부의 섬김으로 우리를 부끄럽게 하셨습니다. 다음날 다시 도시로 돌아올때까지 선교사님과 저는 서로 한마디도 할 수 없었습니다.
Exegesis2
오늘 본문에서 우리는 다윗의 이상한 점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시109:6-20] 을 제가 읽겠습니다.
6 악인이 그를 다스리게 하시며 사탄이 그의 오른쪽에 서게 하소서
7 그가 심판을 받을 때에 죄인이 되어 나오게 하시며 그의 기도가 죄로 변하게 하시며
8 그의 연수를 짧게 하시며 그의 직분을 타인이 빼앗게 하시며
9 그의 자녀는 고아가 되고 그의 아내는 과부가 되며
10 그의 자녀들은 유리하며 구걸하고 그들의 황폐한 집을 떠나 빌어먹게 하소서
11 고리대금하는 자가 그의 소유를 다 빼앗게 하시며 그가 수고한 것을 낯선 사람이 탈취하게 하시며
12 그에게 인애를 베풀 자가 없게 하시며 그의 고아에게 은혜를 베풀 자도 없게 하시며
13 그의 자손이 끊어지게 하시며 후대에 그들의 이름이 지워지게 하소서
14 여호와는 그의 조상들의 죄악을 기억하시며 그의 어머니의 죄를 지워 버리지 마시고
15 그 죄악을 항상 여호와 앞에 있게 하사 그들의 기억을 땅에서 끊으소서
16 그가 인자를 베풀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가난하고 궁핍한 자와 마음이 상한 자를 핍박하여 죽이려 하였기 때문이니이다
17 그가 저주하기를 좋아하더니 그것이 자기에게 임하고 축복하기를 기뻐하지 아니하더니 복이 그를 멀리 떠났으며
18 또 저주하기를 옷 입듯 하더니 저주가 물 같이 그의 몸 속으로 들어가며 기름 같이 그의 뼈 속으로 들어갔나이다
19 저주가 그에게는 입는 옷 같고 항상 띠는 띠와 같게 하소서
20 이는 나의 대적들이 곧 내 영혼을 대적하여 악담하는 자들이 여호와께 받는 보응이니이다
엄청난 저주입니다. 모두 알다시피, 다윗은 이스라엘의 왕이었습니다. 그 당시 권력은 왕 한명에게 집중되어 있었습니다. 오늘날의 대통령보다 훨씬 힘있고 강한 존재였단 말입니다. 왕의 말 한 마디면 산을 옮기고, 왕의 말 한 마디면 일가족을 몰살할 수 있는, 그런 권력을 가진 왕이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다윗은 왜 이렇게 구구절절 그 사람들을 저주하고 하나님께 그들의 악행을 일러바치고 있습니까?
그럴것 없이 그냥 하면 되잖아요! 다윗은 이 저주를 직접 실행할 권력과 능력을 가진 왕이잖아요! 상대방이 강대국 사람들도 아니고, 자신이 관리하는 백성, 신하들인데 그는 전혀 자신의 힘을 사용할 생각조차 못하고 있습니다. 대체 왜그럴까요?
왜냐하면, 우리가 아는 다윗은 하나님의 주권을 누구보다도 인정하고 신뢰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다윗을 돌아보면 그는 참으로 신실하게 하나님의 왕 되심을 인정하고, 그분이 세우신 사람들을 존중하고 사랑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자기를 죽이려는 사울을 두번이나 살려주었고, 나는 감히 여호와의 기름 부은자를 칠 수 없다고 했습니다. 그의 옷자락을 벤 것 만으로도 마음이 찔렸습니다. 또 아무것도 아닌 백성 시므이가 자신을 저주 했을 때에도 그는 자신의 권력으로 그를 죽이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하나님이 세우신 사람들을 인정했고, 하나님이 허락하신 일을 인정했습니다.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다윗은 알고 있었습니다. 자신이 이스라엘의 왕이 아니라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왕인것을 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을 괴롭히는 신하들을 죽이지 못하고 이렇게 괴로워하며 하나님께 부르짖는 것입니다.
우리는 얼마나 많이 스스로 왕일때가 많습니까? 내 맘에 들지 않는다고, 내 철학과 신학대로 하지 않는다고 얼마나 많이 주변 사람들을 정죄하고 판단합니까? 그러나 여러분 주변을 보세요. 모두 하나님이 세우신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이 자신의 영광을 위해서 사용하시려고 한명 한명 연단하셔서 귀하게 부르신 주의 사람들 입니다. 우리가 대체 무엇이기에 다른 사람을 미워하고 판단할 수 있습니까? 우리는 그럴 수 없습니다. 세우고 폐하는 모든 주권이 하나님께 있기 때문입니다.
Objection2
믿지 않는 사람들은 반문할 수 있습니다. 왜 관계에 그렇게 어려워하나요? 다윗이 그들을 죽일 수 없다면 그냥 좌천시키고 안보면 되지 않나요? 나 좋아해주는 사람 만나기도 시간이 부족합니다! 그냥 적당히 맞춰주면 편해요:)
그러나 우리가 배운 말씀, 성경은 그렇게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차갑거나 뜨겁거나, 사랑하거나 사랑하지 않거나, 예수님을 믿어 천국에 가거나 영원한 불에 떨어지거나! 성경의 원리가 그렇습니다. 중간은 없습니다.
정직한 사람이라면 우리는 알 것입니다. 적당히 사랑하는것이 미워하는것보다 어렵다는 것을요. 얘는 나랑 안맞아, 그냥 적당히 챙겨주고, 적당히 맞춰주고, 때가 되면 각자 갈길 가겠지~
여러분, 이것은요 세상 사람들이 하는 사랑입니다. 우리가 따르는 예수님의 사랑이 아니에요! 우리는 죽도록 사랑해야 합니다. 처절하게 우리의 미워하려는 죄성과 맞서 싸워야 합니다! 왜! 예수님께서 먼저 우리가 죄인 되었을 때에 오물같은 우리를 죽기까지 사랑하셨으니까요. 그리고 우리도 그렇게 하라고 하셨으니까요.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한다 하면서 형제를 미워하면 거짓말하는 자이며, 그 자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
여러분, 거짓말 하는 자가 되지 마시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처럼 사십시오. 그리고 여러분을 부르신 하나님의 주권에 감사하세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용하시고 함께 동역하는것이, 우리가 그럴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셔서 입니까? 아닙니다. 우리 모두는 연약하고 하나님의 기준에 한참 못미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셔서, 하나님의 영광과 그 승리의 기쁨을 함께 맛보고 싶으셔서, 은혜로 우리를 부르신 것입니다.
Restatement2
그러므로 여러분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세요.
Transition2
모든 관계에서 그분이 내 친구를, 저 목사님과 전도사님, 사모님을 세우셨음을 인정하세요! 나 말고 하나님을 왕으로 삼으시고 그분께 나의 관계를 맡기세요. 그러면 그리스도의 사랑과 평강이 여러분에게 사랑할 힘을 주실 것입니다.
Point 3
우리의 신음을 해석하시는 분께 구하라
셋째, 우리의 신음을 완벽하게 아시는 하나님께 구하십시오.
illustration3
우리는 간혹 대화할때 속 마음과 다른 말을 하곤 합니다. 상대방을 배려해서, 혹은 내 마음을 들키기 싫어서 일 수있겠죠. 그래서 저는 대화할때 지금 이 사람이 무엇을 원하는지, 진짜 하고싶은 말이 무엇인지 파악하기 위해 애를 쓰곤 합니다. 쉬운 예를 들어, 바울이는 저한테 자주 달려와서 ‘뿌신다-!’ 라고 이야기 하고 주먹을 내지릅니다. 그 말을 곧이 곧대로 해석하면 저를 주먹으로 부셔버리겠다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바울이는 저에게 놀아달라고 하는 것입니다. 지금 자신이 신나고 컨디션이 좋다고,말과 행동과 표정, 온몸으로 그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Exegesis3
이전 본문을 보면 다윗은 자신의 대적자 들에게 엄청난 저주를 퍼붓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다음 절에서 진짜 다윗의 마음, 하고자 하는 말을 읽을 수 있습니다.
[시109:21-31] 절을 제가 읽겠습니다.
21 그러나 주 여호와여 주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나를 선대하소서 주의 인자하심이 선하시오니 나를 건지소서
22 나는 가난하고 궁핍하여 나의 중심이 상함이니이다
23 나는 석양 그림자 같이 지나가고 또 메뚜기 같이 불려 가오며
24 금식하므로 내 무릎이 흔들리고 내 육체는 수척하오며
25 나는 또 그들의 비방거리라 그들이 나를 보면 머리를 흔드나이다
26 여호와 나의 하나님이여 나를 도우시며 주의 인자하심을 따라 나를 구원하소서
27 이것이 주의 손이 하신 일인 줄을 그들이 알게 하소서 주 여호와께서 이를 행하셨나이다
28 그들은 내게 저주하여도 주는 내게 복을 주소서 그들은 일어날 때에 수치를 당할지라도 주의 종은 즐거워하리이다
29 나의 대적들이 욕을 옷 입듯 하게 하시며 자기 수치를 겉옷 같이 입게 하소서
30 내가 입으로 여호와께 크게 감사하며 많은 사람 중에서 찬송하리니
31 그가 궁핍한 자의 오른쪽에 서사 그의 영혼을 심판하려 하는 자들에게서 구원하실 것임이로다
구약 시대에 할 수 있는 최고의 저주들을 내뱉고 난 뒤, 다윗의 마음은 이와같이 상한 갈대가 되었습니다.
아까 읽었던 저주의 기도처럼, 정말 그들이 죽어버리고 아이들이 고아가 되면 다윗은 행복할까요? 그것이 정말 다윗이 원했던 것일까요? 아닙니다. 다윗은 하나님께 도와달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의 마음을 이해해주시고 구원해 주시기를 간절하게 기도하는 것입니다.
21절 22절에 “그러나 주 여호와여 주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나를 선대하소서 주의 인자하심이 선하시오니 나를 건지소서, 나는 가난하고 궁핍하여 나의 중심이 상함이니이다.” 이것이 정말 다윗이 하고싶은 말이었습니다. 주님 나의 마음이 가난하고 상처받아서 죽겠습니다. 좀 도와주세요!
저주 기도를 하는 다윗을 하나님 께서는 어떤 생각을 하셨을까요? 어떻게 이렇게 심한욕을 할 수 있냐고 다윗을 꾸짖으셨을까요? 아니죠, 그분은 다윗의 거친 표현이 아니라 정말 그 마음의 중심에 있는 심정을 알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누구든지 다른 사람을 100%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아니, 오히려 우리 자신도 자기를 잘 모를때가 있습니다. 내가 왜이렇게 우울한지, 왜이렇게 화가나고 이유모를 눈물이 나는지 그 원인을 정확하게 가늠하기 어려울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나보다 나를 더 잘 아시는이가 여기 계십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모든것을 아시고, 모든곳에 존재 하십니다. 그분은 우리를 태초 전부터 아셨고, 어린 시절과 청년기, 그리고 지금까지 우리와 함께하시는 여호와 하나님 이십니다. 그가 우리의 신음을 완벽하게 이해하십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이 전쟁을 주께 맡기십시오. 주께 소리내어 부르짖으십시오. 무슨 말이라도 하십시오! 힘들다고 하소연 하세요. 아니면 그저 신음소리라도, 아주 작은 소리라도 주님께 말하세요.
사람은 겉모습을 보지만 하나님은 우리의 중심과 마음을 보십니다. 우리의 작은 신음소리도 주님은 들으십니다. 그리고 어떨 때는 그것이 우리의 여러 말보다 하나님께 더 좋은 기도가 될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Objection3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반문할 수도 있습니다. ‘아니, 아무리 그래도 원수를 사랑하라고 하셨는데, 저렇게 욕하고 저주하는 것은 성경이 가르치는 바가 아니지 않습니까?’
네 맞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원수를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또한 너를 사랑하는 자만 사랑하면 너에게 무슨 상이 있겠느냐? 너를 미워하는 자도 사랑하라고 말씀 하셨습니다. 우리는 마땅히 그렇게 해야 합니다.
다윗이 잘했다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다윗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는 모세의 율법을 기억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방 나라들의 핍박에서 구원하신 공의의 하나님을 기억했을 것입니다. 다윗의 저주는 단순한 저주 이상입니다. 그저 다윗의 감정을 표출한 감정 쓰레기통 같은 기도가 아닙니다. 처음에도 말했듯이 이 기도는 하나님의 공의를 구하는 기도입니다. 우리의 마음을 100% 이해하시는 하나님, 그분을 사랑하는 백성들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신뢰의 표현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다윗과 같이 하나님 앞에 떳떳하다면 악한자에 대한 거룩한 분노와 저주의 기도는 어떻게 보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임하길 기도하는 신실한 사람의 기도일 것입니다.
Restatement3
여러분, 그러므로 그분께 구하세요. 하나님은 우리의 신음을 들으시고, 이해하시고, 완벽하게 해석 하십니다. 그분은 상한 갈대를 꺾지 않으시며 우리의 상처받은 마음을 치유해 주시는 사랑의 하나님 이십니다.
transition3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Conclusion/application
우리는 오늘 다윗의 기도를 통해서 인간 관계를 하나님께 맡겨야 함을 배울 수 있습니다.
공의의 하나님을 의지함으로,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함으로, 그리고 우리의 신음을 해석하시는 분께 간구함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두가지만 여러분에게 권면하고 싶습니다.
첫번째, 사랑하는 것처럼 행동하라
C.s 루이스는 순전한 기독교에서 이런말을 남겼습니다. “그냥 그를 사랑한다고 치고 행동하십시오. 그러면 곧 위대한 비밀을 하나 발견할 것입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진짜로 그를 사랑하게 된다는 비밀 말입니다.” 또 얼마전 돌아가신 위대한 영적 리더 팀 켈러 목사님도 비슷한 말을 했습니다. “누구에게나 친절하려고 노력하는 그리스도인이라면, 자신이 그렇게 시도할수록 처음에는 좋아하리라고 꿈도 꾸지 못했던 이들까지 포함해서 차츰차츰 더 많은 이들이 좋아지는 것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저는 오래전에 이 책들을 읽었고 이렇게 살려고 노력해왔습니다. 관계가 깨어질 때마다 그렇게 했습니다. 신기한 것은, 정말 그렇게 되더라는 것입니다. 아버지와의 관계가 회복되고 제가 싫어하던 친구의 옷 냄새 마저도 향기로워지는 신기한 일들이 일어났습니다. 그러나 영적 전쟁은 쉽지 않습니다. 이겼다고 생각하는 그 순간 넘어질 때도 많습니다. 그럴 때 우리는 두번째 공식을 적용을 할 수 있습니다.
두번째, 바로 기도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가장 확실하고 효과적인 관계 개선 방법입니다. 사랑의 원천이신 하나님께 사랑을 달라고 구하세요. 말 그대로 신음하고 부르짖고 매달리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죽을 때까지 이 관계의 영적 전쟁은 끝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가 기도를 게을리 한다면 이 싸움은 더 치열한 싸움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미 승리를 선포하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할 수 있으니, 이것이 얼마나 복된 일입니까?
“구하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다만 너희는 그의 나라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런 것들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눅12:31
여러분, 우리의 깨어진 관계가 회복되고 함께 동역하기를 기도하는 것이 하나님 나라를 구하는 것인줄 믿습니다. 여러분이 공의의 하나님께 구하고 그분의 주권을 인정할 때 우리의 마음과 신음을 들으시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모든 관계를 회복시키시고 그분의 영광을 위해 우리를 사용하실 줄 믿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