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66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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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도입
1. 도입
2. 공동체의 믿음은 개인의 예배의 바탕이 됩니다.
2. 공동체의 믿음은 개인의 예배의 바탕이 됩니다.
6절부터 12절에 등장하는 주요 대상은 “우리"입니다. 반면, 13절부터 마지막까지의 주어는 “나"입니다.
내가 번제물을 가지고 주의 집에 들어가서 나의 서원을 주께 갚으리니
분명 주어는 “나"입니다. 내가 번제물을 가지고 주의 집에 들어가는 행위는 예배를 말합니다. 왜 시편 기자는 12절까지 우리에 대해서 언급하다가 예배를 드리는 장면에서는 “나"라고 말하고 있을까요? 그것은 나의 예배의 바탕은 우리라는 공동체의 경험과 밀접하게 관련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나”의 예배의 근거가 되는 “우리 공동체"의 경험은 무엇일까요?
10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하나님이여 주께서 우리를 시험하시되 우리를 단련하시기를 은을 단련함 같이 하셨으며
우리는 하나님으로 부터 시험을 당하고 단련을 받습니다. 11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우리를 끌어 그물에 걸리게 하시며 어려운 짐을 우리 허리에 매어 두셨으며
그물에 걸리게 합니다. 마치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급의 종 되었던 상황을 말합니다. 그리고 어려운 짐, 즉 고난을 허리에 매우 둡니다.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급에서 종살이의 어려운 상황을 말합니다. 12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사람들이 우리 머리를 타고 가게 하셨나이다 우리가 불과 물을 통과하였더니 주께서 우리를 끌어내사 풍부한 곳에 들이셨나이다
이 말씀은 10절의 “은을 단련함 같이 하셨으며"라는 말과 관련있습니다. 은을 재련하려면 어떻게 합니까? 불에 넣었다가 망치로 때리고, 물로 식히고, 또 불에 넣고, 망치로 때리고를 반복합니다. 그러면, 은은 더 단단하게 되고, 모양을 갖추고, 더 영롱한 빛을 냅니다.
믿음은 고난으로 견고해 집니다. 바울 사도는 우리의 믿음의 견고함에 대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또한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서 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믿음은 환난과 연단을 받음으로 성장합니다. 예수님도 죽음이라는 고난을 통과하시고 부활이라는 영광을 입으셨습니다. 우리의 믿음도 이와 같습니다. 연단없이 고난없이 믿음이 성장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시편기자는 이 연단을 개인에 한정하지 않습니다. 우리라는 공동체가 은처럼 단련받는 것에 대해서 말합니다.
그렇습니다. 이 세상의 원리가 다 그렇습니다. 일제 시대 때는 조국이 일제에 의해서 점령당할 때, 개인들이 목숨 걸고 독립투쟁을 했습니다. 6.25 전쟁이 발발 할 때, 개인들이 살기 위해 똘똘 뭉쳤습니다. MB 정권 초 광우병 사태 때 모든 국민이 촛불을 들었습니다. 국정농단 때에는 어땠습니까?
우리 개인의 믿음도 교회 공동체의 단련됨과 관련됩니다. 풍유한 교회에서는 결코 개인의 믿음의 성장을 바랐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중국 지하교회 성도들의 믿음을 우리는 결코 따라 갈 수 없습니다.
한 번의 예배를 드리기 위해서 목숨을 걸어야 하는 중국 지하 교회의 성도들은 온전한 마음으로 정성껏 예배할 수 있습니다. 반면, 현재 종교의 자유와 더 편안하고 안락한 의자에 앉아 좋은 사운드와 영상을 즐길 수 있는 예배 프로그램에서 사람들은 1시간 이상 지연되는 예배를 지루해 하고 싫어합니다. 중국 지하 교회 성도들은 3시간이고 4시간이고 무릅꿇고 예배를 드린다고 합니다.
<전환문> 또 공동체의 믿음은 누구에게 영향을 줄까요?
3. 공동체의 믿음은 세상 사람들의 찬양에 근거가 됩니다.
3. 공동체의 믿음은 세상 사람들의 찬양에 근거가 됩니다.
1절에서 8절까지의 대상은 “만민"입니다. 즉, 온 세상 민족들입니다. 1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온 땅이여 하나님께 즐거운 소리를 낼지어다
온 땅이란 온 세상을 말하고, 특히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을 말합니다. “즐거운 소리"란 찬양을 말합니다. 2절을 보겠습니다.
그의 이름의 영광을 찬양하고 영화롭게 찬송할지어다
그렇다면, 온 세상 사람들이 하나님을 찬양해야 하는 근거는 무엇일까요? 5절 6절입니다.
와서 하나님께서 행하신 것을 보라 사람의 아들들에게 행하심이 엄위하시도다
하나님이 바다를 변하여 육지가 되게 하셨으므로 무리가 걸어서 강을 건너고 우리가 거기서 주로 말미암아 기뻐하였도다
이스라엘이 출애급 할 때 홍해가 갈라져서 육지가 되었고, 온 이스라엘이 걸어서 그 바다를 건넜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애급에서 종 되었다가 하나님에 의해서 자유롭게 되었습니다.
고난으로 부터 구원받는 경험은 단순히 그 공동체에 속한 개인들의 예배의 근거가 될 뿐만 아니라, 온 세상이 하나님을 믿고 그 분을 찬양해야 할 근거가 됩니다.
사실, 교회 공동체가 작고, 은을 단련되듯이 단련되어질 때, 하나님을 세상 사람들에게 담대하게 소개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모르는 모든 세상 사람들이 하나님을 찬양하게 합니다. 공동체의 믿음이 세상 사람들의 찬양의 근거가 됩니다.
마무리
마무리
말씀을 맺겠습니다. 오늘 날 기독교인들이 날이 갈수록 줄어들고 있었습니다. 7-80년대에는 기독교인이 1000만이라는 영광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400만이 채 안 됩니다. 왜 그렇습니까? 7-80년대는 국가 자체가 오늘 날 처럼 그렇게 부자가 아니었습니다. 많은 나라들이 한국이 어디에 있는 나라인지 조차도 몰랐습니다. 그렇지만, 지금은 어떻습니까? 한국은 경제 대국입니다. 한국은 전 세계에 이미 잘 알려진 나라가 되었습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7-80년대에 교회는 불편한 마루바닥에 방석을 깔고 앉아 예배드렸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세상 편한 의자에 겨울에는 따뜻하고, 여름에는 시원하고 쾌적한 예배당에 모여 예배를 드립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교회를 찾지 않습니다.
고난을 당하고 연단을 받지 않는 나라와 그 속에 속한 교회, 그리고, 그 안에 있는 개인의 믿음은 저절로 성장하지 않습니다. 오늘 날과 같이 편안하고 부유한 시기에 기독교인인 우리들은 우리자신의 믿음에 대해서 매일 같이 돌아보고 채찍질 하며 돌아 보아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