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해야할 하나님의 성품 (27분)

그리스도인의 영적 전쟁  •  Sermon  •  Submitted   •  Presen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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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관계는 영적 전쟁이다. 다윗의 저주 기도를 통해 우리는 하나님께 우리의 관계를 맡겨야 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1. 하나님은 공의의 하나님이기 때문에 2. 모든 주권은 하나님께 있기 때문에 3. 하나님이 우리의 신음을 이해하시기 때문에

Notes
Transcript
Introduction
저는 연년생 누나가 한명 있습니다. 14개월 차이가 납니다. 나이 차이가 얼마 안나 서그런지 초등학생 때부터 서로 욕하고 치고박고 싸우고 서로를 많이 미워했습니다. 같은 공간에 살면서 서로를 미워하며 냉담하게 지내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아시는 분도 있을 것입니다. 제가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면서 우리의 관계는 점차 사랑으로 변했지만 그 전까지는 정말 많이 힘들었습니다. 제가 누나보다 더 키가 커지기 전까지 저는 누나한테 많이 맞았습니다. 그럴 때면 저는 엄마나 아빠한테 달려가서 누나의 불의와 악행을 낱낱히 일러 바쳤습니다. 왜냐하면 저 혼자서는 그녀와의 싸움에서 도저히 승산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 시절 저희 누나는 장미란 이상으로 힘이 쌨고 김구라 만큼의 독설가였습니다. 저는 그래서 부모님의 공의로운 개입과 중재가 항상 필요했습니다.
Need
그런데요, 인생을 살다보니 저는 지금도 별반 다르지 않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어릴적에는 육체적으로, 언어적으로 싸움을 했다면, 지금은 영적인 전쟁을 치루고 있는 나를 발견합니다. 그 중에서도 항상 관계에 대해 치열한 영전 전쟁을 하고 있더라구요. 대학생 때도 그랬구요, 군대에서도, 교회에서도, 심지어 선교지와 이 신학교 에서도 마찬가지 였습니다. 예수님을 만나고 나서도 이런 일들이 반복 되었을 때 저는 이것이 단순히 육의 싸움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역사는 사람을 통해 진행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사단의 입장에서 그 역사를 늦추고 하나님의 영광을 깨뜨릴 가장 좋은 방법은 바로 분열을 일으키고 서로 싸우게 해서 함께 일하지 못하도록 만드는 것입니다.
Theme
우리는 연약합니다. 불완전합니다. 옳고 그름을 100% 정확하게 판단할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공의로우신 하나님의 중재와 도움이 필요합니다. 우리 아버지 되시는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고통과 필요를 아시고 우리를 도우시며 우리 대신에 그 전쟁을 싸우시는 하나님 이십니다.
Outline
오늘 다윗의 기도를 통해서 우리의 관계가 힘들때 어떤 근거로 하나님을 의지할 수 있는지 알고 적용할 수 있습니다.
1. 공의의 하나님을 의지하라
2.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라
3. 우리의 신음을 이해하시는 분께 기도하라
이 세가지 사실을 통해 하나님께서 우리의 영적 전쟁에서 함께 싸우시는 하나님을 더 이해하고 하나님께 의지할 수 있습니다.
Point1
첫번째, 공의의 하나님을 의지하라
우리의 관계가 힘들때 하나님을 의지할 수 있는 이유는 그분이 공의로우시기 때문입니다.
시편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시편 109:1–5 KRV
나의 찬송하는 하나님이여 잠잠하지 마옵소서 대저 저희가 악한 입과 궤사한 입을 열어 나를 치며 거짓된 혀로 내게 말하며 또 미워하는 말로 나를 두르고 무고히 나를 공격하였나이다 나는 사랑하나 저희는 도리어 나를 대적하니 나는 기도할 뿐이라 저희가 악으로 나의 선을 갚으며 미워함으로 나의 사랑을 갚았사오니
illustration
요즘 많은 드라마나 영화에서 학교 폭력에 대한 소재가 많이 나옵니다. 그만큼 사회적인 이슈이고 많은 사람들이 공감하고 겪었다는 것이겠지요. 그런데 이 학폭 이야기의 대부분의 문제점은 중재자, 즉 심판자가 제대로 자신의 역할을 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대부분의 스토리는 이렇게 흘러갑니다. 극심한 괴롭힘을 당하는 학생이 있습니다. 이 학생은 몸과 마음이 너무나 고통스러운 나머지 극단적인 선택을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 전에, 딱 한번 담임 선생님을 믿어보기로 하고 선생님께 모든것을 털어 놓습니다. 선생님은 아이를 진정시키고 걱정말라고 말합니다. 선생님이 다 알아서 하겠다고 합니다. 다음날 선생님은 아침 조회시간부터 으름장을 놓습니다. 다시 한번 더 이런 불미스러운 일이 생긴다면 학교폭력 위원회를 소집해서 가해 학생들을 벌 줄 것이라고 말입니다. 그렇게 선생님의 가벼운 협박이 끝나고 위협을 받은 가해자들의 괴롭힘은 더욱 심해집니다.
결국 피해 학생은 학교 옥상에 올라가 자신의 목숨을 포기하게 됩니다. 우리가 이런 스토리에서 가슴이 먹먹하고 답답한 것은, 가해 학생들에 대한 분노도 있겠지만, 힘 있다고 생각했던 어른들이 충분히 지혜롭고 정의롭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것이 현실이라는 것을 여러 사건을 통해, 경험을 통해 알고 있으며 너무나 많은 부분에서 이미 세상의 공의가 무너졌다는 것을 알고있습니다.
비단 학교 뿐만이 아닙니다. 최근 미국에서 ‘오염된 재판’ 이라는 책이 출간되었는데 여기에는 DNA 검사가 불가능 했던 시절 일어났던 여러가지 강력 사건과 그 가해자들의 재판 사례가 나와 있습니다. 1944년 인종차별이 성행했을 당시였습니다. 조지 스티니라는 14살의 흑인 소년은 당시 두 여자 소녀를 성폭행하고 살인한 죄로 재판에 넘겨저 사형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70년이 지난 뒤, DNA를 통해 이 소년은 누명을 벗게되었습니다. 이미 죽었는데 누명을 벗게 된 것이 무슨 소용입니까? 그들의 가족들은 이 고통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합니까? 이런 일이 한 두 가지가 아닙니다. 우리가 경찰과 사법부의 공의를 믿을 수 있을까요? 이 나라가 주장하는 정의가 도대체 어디에 있습니까? 사람의 힘으로 정의와 공의를 완전하게 세우기란 불가능 합니다.
Exegesis
그러나 하나님은 사람이 아니시니, 그분은 세상에 정의라는 단어가 생기기 전에 이미 공의와 정의를 이 세우신 완전한 하나님 이십니다. 우리가 조직신학에서 배우는 가장 기본적인 원리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은 거짓말을 할 수 없으시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아신다. 하나님은 모든 곳에 계신다. 그분의 선하신 뜻대로 모든것을 하신다! Omnipressent, Omnipotent 아닙니까? 그러므로 그분의 재판은 실수가 없으시며 공의로울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신명기 32:4절 “그는 반석이시니 그가 하신 일이 완전하고 그의 모든 길이 정의롭고 진실하고 거짓이 없으신 하나님이시니 공의로우시고 바르시도다.”
그러니 다윗도 자신의 억울함을, 고통을 공의의 하나님께 토로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를 함께 보겠습니다
“내가 찬양하는 하나님이여, 잠잠하지 마옵소서! 그들이 악한 입과 거짓된 입을 열어 나를 치며 속이는 혀로 내게 말하며, 또 미워하는 말로 나를 두르고 까닭없이 나를 공격하였음이니이다.” (1-3절) 다윗은 지금 그들의 악한 일들에 대해 하나님께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이유 없이 나를 공격했다는 말은 그 당시의 상황을 자세히 보여줍니다. 다윗은 지금 그들이 자신을 험담하고 공격하는 이유를 도무지 모르겠다는 것입니다.
4절에 계속해서 다윗의 한탄이 나옵니다. “나는 사랑하나 그들은 도리어 나를 대적하니 나는 기도할 뿐이라.” 나는 그들을 사랑했는데! 그들은 오히려 나에게 반기를 듭니다. 주님 어떡합니까? 나는 공의의 하나님께 기도밖에 할 수 없습니다. 이렇게 고백하는 것입니다.
5절 “그들이 악으로 나의 선을 갚으며 미워함으로 나의 사랑을 갚았사오니.” 다윗은 자신은 그들에게 선대했지만 그들은 미워함으로 자신을 악하게 대했다고 합니다.
그러니 지금 1절에서 5절은 무엇을 말하고 있습니까? 공의의 하나님을 찾고 있는 것입니다!나는 분명 그들을 사랑했고 잘해주었고 선하게 베풀었는데, 이 사람들은 나를 적대하고 오히려 모여서 험담하고 공격합니다! 정의로우신 주님 도와주세요!이렇게 외치는 것입니다.
본문에 나오는 그들에 대한 여러가지 추측이 있는데, 많은 학자들은 다윗 주변의 고위 관료들, 혹은 각 지파의 장들 이었을 것으로 추측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지금 다윗의 최 측근들! 다윗을 보필하여 나라를 강건하게 하고 협력해서 백성들을 보살펴야 할 관료들이 자신들의 리더를 괴롭히고 있는 상황인 것입니다. 오늘날로 비유 하자면 대통령 주변의 장관들 각 처의 실장들이 대통령을 괴롭히고 있는 것이겠죠.
만약에 누군가 여러분을 이유없이 해꼬지 하거나 험담 한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어떤 관계냐에 따라 다르겠지만, 보통은 화를 내거나, 싸우거나, 주변에 도움을 요청하겠죠. 일이 커진다면, 공권력의 힘을 빌려 경찰에 신고를 하거나, 재판에서 정의롭게 판결 해주기를 기대할 것입니다. 한국에서는 온라인에서 누군가에게 험담이나 욕설을 한 것도 명예 훼손죄로 처벌을 할 수 있으니, 요즘 이런 시스템이 얼마나 잘 되어 있습니까?
그러나 다윗은 이런 제도가 없었습니다. 그는 2000년도 훨씬 전에 살고 있습니다. 게다가 자신이 왕입니다! 이 나라에 자신보다 높은 사람이 없는데, 누구에게 이 억울함을, 공의 없음을 호소할 수 있겠습니까? 절대 권력과 공의의 주인이신 하나님 밖에 없는 것입니다.
Objection
누군가는 이런 질문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정의롭고 공의로우시다면, 도대체 이 세상에는 왜이렇게 힘들고 억울한 일들이 많은건가요? 왜 악인은 형통하고 의인은 핍박받나요? 보통 이 질문에, 우리는 이렇게 대답 할 것입니다. ‘세상에서 의인이 고통받는 이유는 그 고통을 통해 하나님께서 너를 연단하시고 정금과 같이 되게 하시기 위함이야.’ 또는 ‘그것은 아담의 죄로인해 그 후부터 이 세상이 죄로 가득하기 때문이야.’ 물론 사실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고통의 이유를 정확하게 설명하기 힘듭니다. ‘사실 우리는 알지 못한다’ 가 더 정확한 표현일 것입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그저 고통 가운데서도 하나님은 선하시고 공의로우시다는 것을 성경을 통해 배우고, 믿음으로 그분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아니, 하나님이 공의로우신 분이라면 그분을 믿는 자녀들이 형통해야 하는것 아닙니까?
그러나 보세요 여러분, 요셉은 형통했습니까? 성경에 그가 ‘형통했다’ 라고 할때마다 그는 가시 밭길을 걷고 있었습니다. 욥은 형통했습니까? 그가 극심한 고난중에 있을 때, 아무도 그 이유를 알지 못했습니다. 그 이유를 추측하려던 친구들과 많은 사람들이 결국 실패하고 하나님의 꾸지람를 들었던 것을 우리는 봅니다.
여러분, 우리는 고통은 나쁜 것이고 형통은 좋은것이라고 이분법적으로 생각할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는 간혹 세상의 번영을 형통이라고 착각합니다.
시편 73:7절 아삽의 시에 이것이 잘 나와있습니나. “이는 내가 악인의 형통함을 보고 오만한 자를 질투하였음이로다.” 여기서 시편 기자는 악인의 형통함을 질투했다고 합니다. 여기서 히브리어 퀴네티는 다른사람의 성공을 시기하는 envious 로 번역됩니다.
그러니까 시편 기자와 우리는 이해가 안되는 것이죠. 나는 예수님 잘 믿는데, 돈도 잘 못벌고, 하는일 마다 잘 안되고, 억울한일 투성이에 고통당하며 사는데, 저 오만한 자는 사기치면서 돈벌어도 걸리지도 않고 떵떵거리면서 산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그리스도인의 형통은 이런것이 아닙니다. 이미 하나님께서는 구약에서 수차례 우리에게 형통의 길을 알려 주셨습니다. “이 율법책을 네 입에서 떠나지 말게 하며 주야로 그것을 묵상하여 그 안에 기록된 대로 다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네 길이 평탄하게 될것이며 니가 형통하리라.”
주님의 말씀안에 거하는것, 사랑이신 그분의 말씀대로 사는것! 그분의 말씀이 내 안에 거하고, 그 말씀안에 내가 거하는것! 그것이 곧 형통인줄을 믿으시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Restatement
우리 주변에도 다윗처럼 너무나 많은 관계의 어려움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을 의지할 수 있습니다. 그분은 공의의 하나님 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분이 모든것을 아십니다. 나를 아시고, 상대방을 아십니다. 우리의 관계를 아시고, 사단의 공격법을 아시며, 이 전쟁을 이길 방법을 알고 계십니다.
transition
여러분, 정말 힘들때, 관계 때문에 무너지고 지칠 때, 세상이 아니라, 주변에 도와달라고 하소연하는 것이 아니라, 정말 믿을만한 재판장에게 상소 하십시오. 하나님은 공의로우시고 정의로우시고 거짓을 말할 수 없는 분이시기에, 여러분의 관계와 삶이 형통하도록 여러분에게 힘을 주실 능력의 하나님 이십니다.
Point 2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라
두번째, 하나님의 주권(세우심)을 인정 하면 상대방을 이해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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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우간다에 선교사로 있을 때의 일입니다. 저와 친분이 있는 선교사님의 부탁으로 여름 미션 트립 준비를 위해 우간다 북동쪽의 사파리를 정탐하러 가게 되었습니다. 그곳은 왕복 12시간이 걸리는 먼 거리였습니다. 선교사님과 함께 차를 타고 가는 중에 그 사파리 근처에 사시는 다른 선교사님에 대한 이야기를 하게 되었습니다. 이분은 그 선교사님을 싫어했는지 그분에 대해 험담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힘든 지역에 있다고 자기만 선교사인줄 안다. 그 선교단체 선교사님들은 다 그렇더라. 교만하고 협력할 줄 모른다. 가난하게 사는것이 선교사의 본분인줄 안다 등등 안좋은 내용 들이었습니다. 저는 그 선교사님을 전혀 몰랐기때문에 그저 듣고만 있었습니다. 비가 부슬부슬 내리고 4시간 정도 운전했을 때, 교대해서 제가 운전하기 시작했습니다. 양쪽에 가파른 도랑이 있는 길을 지날때 앞에서 오토바이가 긴 파이프를 싣고 다가왔고, 저는 그 오토파이를 피하려다가 도랑으로 미끄러져 버렸습니다. 차는 전복되서 뒤집혔고 그 충격으로 인해 창문이 모두 부숴져 버렸습니다.
저는 멀쩡했지만 선교사님은 안전벨트를 하지 않아 허리를 다치고 말았습니다. 더 큰 문제는 날이 어두워지기 시작했고 그곳이 도심과 많이 떨어져있는 깊은 산골짜기 였다는 것입니다. 렉카를 요청했지만 빨라야 내일 도착한다는 말에 우리는 좌절했습니다.
도저히 방법이 없자 선교사님은 사파리 근처에 살고있는, 자신이 험담했던 그 선교사님에게 도움을 요청했습니다. 그런데 제가 만난 그 선교사님 부부는 굉장히 친절했고, 겸손했으며, 사고로 놀랐을 우리를 극진히 섬겨 주셨습니다. 저는 그 순간 강력한 성령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내가 내 손으로 세운 종을 너희가 비방하지 마라”
하나님께서는 자동차 사고를 통해 우리의 불의함을 꾸짖으셨습니다. 선교사님 부부의 섬김으로 우리를 부끄럽게 하셨습니다. 다음날 다시 도시로 돌아올때까지 선교사님과 저는 서로 한마디도 할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앞으로도 그 선교사님에 대한 험담을 절대 하지 않으셨습니다.
Exegesis
오늘 본문에서 우리는 이상한 점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미 말했다시피, 다윗은 왕이었습니다. 그 당시 권력은 왕 한명에게 집중되어 있었습니다. 오늘날의 대통령보다 훨씬 힘있고 강한 존재였단 말입니다. 왕의 말 한 마디면 산을 옮기고, 왕의 말 한 마디면 일가족을 몰살할 수 있는, 그런 권력을 가진 왕이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다윗은 왜 이렇게 고통스러워 합니까? 강대국 사람들도 아니고, 자신이 관리하는 백성, 신하들인데 그는 자신의 힘을 사용하지 못하고 괴로워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아는 다윗은 하나님의 주권을 누구보다도 인정하고 신뢰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다윗을 돌아보면 그는 참으로 신실하게 하나님의 왕 되심을 인정하고, 그분이 세우신 사람들을 존중하고 사랑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자기를 죽이려는 사울을 두번이나 살려주었습니다. 나는 감히 여호와의 기름 부은자를 칠 수 없다고 했습니다. 그는 사울의 옷자락을 벤 것만으로도 마음이 찔렸던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그가 인정했던 것은 교만한 사울이 아니라, 그 사울을 세우신 하나님의 주권과 계획이었기 때문입니다. 또 자신의 아들 압살롬이 자신을 죽이려 했을 때에도, 아무것도 아닌 백성 시므이가 자신을 욕했을 때에도 그는 자신의 권력으로 그들을 죽이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다윗은 자신리 받는 고통이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일이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아는 다윗의 가장 큰 잘못, 우리야를 죽이고 밧세바를 빼앗은 그 사건으로 하나님께서 자신을 벌하시는 것을 다윗은 담담히 받아들였던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이 세우신 사람을 인정했고, 하나님이 허락하신 일을 인정했습니다. 왜냐하면 다윗에게는 자신이 이스라엘의 왕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왕이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얼마나 많이 스스로 왕일때가 많습니까? 내 맘에 들지 않는다고, 내 철학과 신학대로 하지 않는다고, 잘 못한다고, 얼마나 주변 사람들을 정죄하고 판단합니까? 그러나 여러분 주변을 보세요. 하나님이 세우신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이 이곳으로 부르셨고 자신의 영광을 위해서 사용하겠다고 한명 한명 연단하셔서 귀하게 부르신 사람들 입니다. 우리가 대체 무엇이기에 다른 사람을 미워하고 판단할 수 있습니까? 우리는 그럴 수 없습니다. 모든 주권이 하나님께 있기 때문입니다.
관계가 어려울 때, 우리는 다시 한번 생각해 봐야 합니다. 정말 저 사람이 하는 일들이 잘못된 일인지, 하나님의 말씀에 위배되는 일인지 말입니다. 만약 아니라면 내가 교만해져 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정말 그렇습니다. 교만은 하나님이 왕이 아니라 내가 왕이 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내 기준과 내 머리로 하나님의 판단을 비판하는 것입니다. 교만은 쉽게 사라지지 않습니다. 교만은 내가 얼마나 비참하고 처절한 죄인인지 깨달을 때만 가장 희미해 집니다.
Objection
믿지 않는 사람들은 반문할 수 있습니다. 왜 관계에 그렇게 어려워하나요? 다윗이 죽일 수 없다면 그냥 좌천시키고 안보면 되지 않나요? 나 좋아해주는 사람 만나기도 시간이 부족합니다! 그냥 적당히 맞춰주면 편해요:)
그러나 우리가 배운 말씀에는, 성경에는 그렇게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차갑거나 뜨겁거나, 사랑하거나 사랑하지 않거나, 예수님을 믿어 천국에 가거나 영원한 불에 떨어지거나! 성경의 원리가 그렇습니다. 중간은 없습니다.
정직한 사람이라면 우리는 알 것입니다. 적당히 사랑하는것이 미워하는것보다 어렵다는 것을요. 얘는 나랑 안맞아, 그냥 적당히 챙겨주고, 적당히 맞춰주고, 친하게 지내는 척 하다가 때가 되면 헤어지겠지~
여러분, 이것은요 세상 사람들이 하는 사랑입니다. 우리가 따르는 예수님의 사랑이 아니에요! 우리는 죽도록 사랑해야 합니다. 처절하게 우리의 미워하려는 죄성과 맞서 싸워야 합니다! 왜! 예수님께서 먼저 오물같은 우리를 죽기까지 사랑하셨으니까요. 우리도 그렇게 하라고 하셨으니까요.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보지 못하는 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으니라”
하나님의 주권으로 그분이 우리를 세우셨다는 사실은 당신의 크신 사랑을 더욱 부각시킵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우리를 사용하시고 함께 동역하는것이, 우리가 그럴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셔서 일것 같습니까? 아닙니다. 우리는 모두 연약하고 하나님의 기준에 한참 못미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셔서, 하나님의 영광과 그 승리의 기쁨을 함께 맛보고 싶으셔서, 우리에게도 보여주고 싶어셔서 우리를 이곳으로 부르신 것입니다.
Restatement
그러므로 여러분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세요. 모든 관계에서 그분이 내 친구를, 저 목사님과 전도사님, 사모님을 세우셨음을 인정하세요! 그분을 왕으로 삼으시고 그분께 나의 관계를 맡기세요. 그러면 그리스도의 사랑과 평강이 여러분에게 사랑할 힘을 주실 것입니다.
transition 없음!
Point 3 우리의 신음을 이해하시는 분께 구하라
셋째, 우리의 신음을 들으시는 하나님께 구하십시오.
illustration
사람들의 대화속에는 많은 오해가 생길 수 있습니다. 나는 좋은 의미로 이렇게 얘기했는데, 듣는 사람은 나쁘게 받아들일 때도 있고, 억양이나 말투에 따라서 전달되는 의미가 변질되기도 합니다. 많이들 경험 하셨겠지만, 카카오톡 같은 메시지로 대화할 때 상대방의 제스쳐, 얼굴 표정, 억양등을 구분할 수 없으므로 더 많은 오해를 불러 일으키기도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대화할 때, 지금 이 사람이 무슨말을 하고 있는건지, 진짜 하고자 하는 말이 무엇인지 파악하기 위해 신체의 모든 감각을 총 동원합니다. 한가지 예를 들어, 바울이는 저한테 자주 달려와서 ‘뿌신다-!’ 라고 이야기 하고 주먹을 내지릅니다. 그 말을 곧이곧대로 해석하면 저를 주먹으로 부셔버리겠다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바울이는 저에게 놀아달라고 하는 것입니다. 지금 자신이 신나고 컨디션이 좋다고! 말과 행동과 표정, 온몸으로 그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Exegesis
오늘 본문을 보면 다윗은 자신의 대적자들에게 엄청난 저주를 퍼붓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서 진짜 다윗의 마음, 하고자 하는 말을 읽어야 합니다.
8절 그의 연수를 짧게 하시며, 그의 직분을 타인이 빼앗게 하시며
9절 그의 자녀는 고아가 되고 그의 아내는 과부가 되며
10절 그의 자녀들은 유리하며 구걸하고 그들의 황폐한 집을 떠나 빌어먹게 하소서
다윗의 시대에 할 수 있는 최고의 저주들! 내가 할 수 있는 최고의 욕을 지금 다윗이 내뱉고 있는 것입니다. 그 시대에는 우리와 같은 함축적인 욕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 문화에서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끌어모아 다윗은 욕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다윗이 진짜 원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정말 그들이 죽어버리고 그들의 아이들이 고아가 되면 다윗은 행복할까요? 아닙니다. 다윗은 하나님께 도와달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구원해 주시기를 간절하게 기도하는 것입니다.
21절부터 31절 까지는 다윗의 상한 심령이 그대로 드러납니다.
21-22 절을 보겠습니다. “그러나 주 여호와여 주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나를 선대하소서 주의 인자하심이 선하시오니 나를 건지소서, 나는 가난하고 궁핍하여 나의 중심이 상함이니이다.”
그렇습니다. 다윗은 지금 공의의 하나님께 부르짖으며 하나님께 나의 상한 마음을 알아달라고, 이 사람들과의 어려운 관계, 그 고통 가운데서 나를 건져주실 구원의 하나님께 신음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이가 저에게 하는 말과 행동의 숨은 의미를 제가 이해한다고 하지만, 아마 바울이의 부모님 보다는 그렇지 못할 것입니다. 부모님은 바울이를 매일 만나고, 매일 사랑해주고, 매일 관심가지고 지켜보시 때문입니다. 하지만 가끔 바울이가 이유없이 울거나 떼를 쓸때, 정말 얘가 왜이럴까? 하며 혼내는 것을 보기도 합니다. 누구든지 다른 사람을 100%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오히려 우리는 우리의 마음을 스스로도 모를때가 있습니다. 내가 왜이렇게 우울한지, 왜이렇게 화가나는지, 왜이렇게 울적하고 울고 싶은지! 그 이유를 정확하게 가늠하기 어려울 때도 있지않습니까?그러나 나보다 나를 더 잘 아시는이가 여기 계십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모든것을 아시고, 모든곳에 존재 하십니다. 그분은 우리를 태초 전부터 아셨고, 어린 시절과 청년기, 그리고 지금까지 우리와 함께하시는 여호와 하나님 이십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이 영적 전쟁을 주께 맡기십시오. 주께 소리내어 부르짖으십시오. 무슨 말이라도 하십시오! 힘들다고 하소연 하세요. 아니면 그저 신음소리라도, 아주 작은 소리라도 주님께 말하세요. 하나님은 우리의 표현이 아니라, 표정이 아니라, 우리의 중심과 마음을 아십니다. 우리의 작은 신음소리도 주님은 들으십니다. 그리고 어떨 때는 그것이 우리의 여러 말보다 더 좋은 기도가 될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Objection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반문할 수도 있습니다. ‘아니, 아무리 그래도 원수를 사랑하라고 하셨는데, 저렇게 욕하고 저주하는 것은 성경이 가르치는 바가 아니지 않습니까?’ 네 맞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원수를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또한 너를 사랑하는 자만 사랑하면 너에게 무슨 상이 있겠느냐? 너를 미워하는 자도 사랑하라고 말씀 하셨습니다. 우리는 마땅히 그렇게 해야 합니다.
다윗이 잘했다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다윗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는 모세의 율법을 기억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방 나라들의 핍박에서 구원하신 공의의 하나님을 기억했을 것입니다. 다윗의 저주는 단순한 저주 이상입니다. 그저 다윗의 감정을 표출한 감정 쓰레기통 같은 기도가 아닙니다. 처음에도 말했듯이 이 기도는 하나님의 공의를 구하는 기도입니다.
악한자를 징벌하시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백성들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신뢰의 표현입니다. 시편 109편 이외에도 다윗의 저주가 곳곳에 나오는데, 이 구절들을 보면 악한일을 행한자에게 그 보응이 돌아가도록 하나님의 공의를 구하는 내용 들입니다. 그러므로 정말 우리가 다윗처럼 하나님 앞에 떳떳하다면, 선하신 하나님께서 그들과 싸워 주시기를 기도할 수 있는 것입니다.
Restatement
하나님은 우리의 신음을 들으시고, 이해하시고, 완벽하게 해석 하십니다. 그분은 상한 갈대를 꺾지 않으시며 우리의 상처받은 마음을 아시는 분입니다. 그분께 기도합시다. 우리의 관계를 회복시켜 주시기를, 영적 전쟁에서 승리하도록 도와주시기를, 우리의 작은 신음도, 탄식도 우리를 아시는 하나님께는 좋은 기도가 될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transition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Conclusion/application
우리는 다윗의 저주 기도를 통해 하나님께서 우리의 관계를 회복시키실 영전 전쟁의 선봉장 이시며, 중재자 라는 것을 배웠습니다.
첫째, 하나님은 공의의 하나님 이시기 때문에 그분께 우리의 옳고 그름의 판단을 맡길 수 있습니다.
둘째, 하나님의 주권과 세우심을 인정 하는 것이, 영적 전쟁을 이기는 힘 이라는 것을 함께 보았습니다.
셋째,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것을 아시기 때문에, 우리의 작은 신음 소리도 좋은 기도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관계가 영적 전쟁이라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이것이 단지 나와 상대방의 문제가 아니라, 사단의 개입이 있는 전투라는 것을 깨달을때, 우리는 그 문제를 우리 스스로 해결하려고 더 깊이 파고들어가서 구덩이에 갇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늘 높이 올라가 하나님과 함께 제 3자의 입장으로 이 영적 전투를 바라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그럴때 우리의 관계를 위해 하나님께 맡기고 그의 영광을 위해 중보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구체적으로 어떻게 오늘 말씀들을 적용할 수 있을까요? 두가지만 여러분에게 권면하고 싶습니다.
사랑하는 것처럼 행동하라 믿음에 관하여 한번 생각해 봅시다. 믿음은 보이지 않지만 행동은 보입니다. 그래서 야고보서에는 ‘네 믿음을 내게 보이라’고 말합니다. 감정도 마찬가지 입니다. 감정은 우리에게 보이지 않습니다. 감정을 가지고 씨름하면 내 안에서 씨름하기 때문에 나도 볼 수 없고 다른 사람도 볼 수 없습니다. 그리고 감정은 시시각각 급격하게 변합니다. 그러나 행동은 다릅니다. 만약 믿지 않는 사람이 믿는것처럼 성경을 읽고, 기도하고 매주 교회에 나와 말씀을 듣는다면, 그는 곧 믿음의 사람이 될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내 안에 미움이라는 감정이 있지만, 그 사람을 사랑하는 것처럼 행동하면 어느새 내 안에 미움이 사랑으로 바뀐다는 것입니다. C.s 루이스는 순전한 기독교에서 이런말을 남겼습니다. “그냥 그를 사랑한다고 치고 행동하십시오. 그러면 곧 위대한 비밀을 하나 발견할 것입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진짜로 그를 사랑하게 된다는 비밀 말입니다.” 또 얼마전 돌아가신 위대한 영적 리더 팀 켈러 목사님도 비슷한 말을 했습니다. “누구에게나 친절하려고 노력하는 그리스도인이라면, 자신이 그렇게 시도할수록 처음에는 좋아하리라고 꿈도 꾸지 못했던 이들까지 포함해서 차츰차츰 더 많은 이들이 좋아지는 것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저는 오래전에 이 책들을 읽었고 이렇게 살려고 노력해왔습니다. 관계가 깨어질 때마다 그렇게 했습니다. 신기한 것은, 정말 그렇게 되더라는 것입니다. 미워하던 친구의 옷 냄새 마저도 좋아하게되는 신기한 일들이 일어났습니다. 그러나 영적 전쟁은 쉽지 않습니다. 이겼다고 생각하는 그 순간 넘어질 때도 많습니다. 그럴 때 우리는 두번째 공식을 적용을 할 수 있습니다.
공의의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입니다. 신음하고 부르짖고 매달리는 것입니다. 사랑의 원천이신 하나님께 사랑을 달라고 구하는 겁니다. 우리가 죽을 때까지 이 영적 전쟁은 끝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가 기도를 게을리 한다면 이 싸움은 더 치열한 싸움이 될 것입니다. 이미 승리하신 하나님께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세요. “구하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다만 너희는 그의 나라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런 것들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눅12:31 여러분, 우리의 깨어진 관계가 회복되고 함께 동역하기를 기도하는 것이 하나님 나라를 구하는 것인줄 믿습니다. 여러분이 공의의 하나님께 구하고 그분의 주권을 인정할 때 우리의 마음과 신음을 들으시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모든 관계를 회복시키시고 그의 영광을 위해 우리를 사용하실 줄 믿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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