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0920 수요예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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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enesis 21:8–21 NKRV
8 아이가 자라매 젖을 떼고 이삭이 젖을 떼는 날에 아브라함이 큰 잔치를 베풀었더라 9 사라가 본즉 아브라함의 아들 애굽 여인 하갈의 아들이 이삭을 놀리는지라 10 그가 아브라함에게 이르되 이 여종과 그 아들을 내쫓으라 이 종의 아들은 내 아들 이삭과 함께 기업을 얻지 못하리라 하므로 11 아브라함이 그의 아들로 말미암아 그 일이 매우 근심이 되었더니 12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네 아이나 네 여종으로 말미암아 근심하지 말고 사라가 네게 이른 말을 다 들으라 이삭에게서 나는 자라야 네 씨라 부를 것임이니라 13 그러나 여종의 아들도 네 씨니 내가 그로 한 민족을 이루게 하리라 하신지라 14 아브라함이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떡과 물 한 가죽부대를 가져다가 하갈의 어깨에 메워 주고 그 아이를 데리고 가게 하니 하갈이 나가서 브엘세바 광야에서 방황하더니 15 가죽부대의 물이 떨어진지라 그 자식을 관목덤불 아래에 두고 16 이르되 아이가 죽는 것을 차마 보지 못하겠다 하고 화살 한 바탕 거리 떨어져 마주 앉아 바라보며 소리 내어 우니 17 하나님이 그 어린 아이의 소리를 들으셨으므로 하나님의 사자가 하늘에서부터 하갈을 불러 이르시되 하갈아 무슨 일이냐 두려워하지 말라 하나님이 저기 있는 아이의 소리를 들으셨나니 18 일어나 아이를 일으켜 네 손으로 붙들라 그가 큰 민족을 이루게 하리라 하시니라 19 하나님이 하갈의 눈을 밝히셨으므로 샘물을 보고 가서 가죽부대에 물을 채워다가 그 아이에게 마시게 하였더라 20 하나님이 그 아이와 함께 계시매 그가 장성하여 광야에서 거주하며 활 쏘는 자가 되었더니 21 그가 바란 광야에 거주할 때에 그의 어머니가 그를 위하여 애굽 땅에서 아내를 얻어 주었더라
우리는 살아가며 선택을 하며 살아갑니다. 그래서 우리의 인생은 끊임없는 선택의 연속입니다. 오늘 하루도 아침에 눈을 떠서 지금까지 수많은 선택을 하며 이자리까지 나왔습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매순간 선택을 잘 해야 합니다. 세상의 사람들의 선택의 기준은 자신의 유익입니다. 자신에게 있어서 유익이 되는 것에 선택을 합니다. 그 유익은 물질이 될 수도 있고, 인간관계가 될 수 도 있습니다. 성도인 우리도 매순간 선택을 하며 살아갑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성도인 우리의 선택의 기준은 세상사람과는 달라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눈 앞의 유익이 선택의 기준이 될 수 없습니다. 성도인 우리의 선택의 기준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이 되어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는 하나님의 말씀이 아닌 자신의 뜻대로 선택해 곤란한 상황에 처한 사람이 나옵니다. 바로 아브라함과 사라 입니다.
아브라함은 백세가 되었을 때 마침내 사라를 통해 아들을 낳았습니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이 말씀하신대로 하나님이 계획하신 대로 그대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래서 21장 1절에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대로 사라를 돌보셨고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대로 사라에게 행하셨다고 말씀합니다.” 하나님께는 다 계획이 있습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에 그 아이가 자라 젖을 뗄 때가 되었습니다. 당시 히브리 사회에서 영아들은 3세 무렵에 젖을 뗐습니다. 그러자 아브라함은 아들 이삭을 위해 큰 잔치를 베풀었습니다. 성경에 그냥 잔치라 하지 않고 큰 잔치라고 한 것으로 보아, 노년에 얻은 이삭으로 인한 기쁨이 아브라함에게 얼마나 큰지 알 수 있습니다. 이 날은 너무나도 기쁜 날입니다. 그런데 이 때 이스마엘이 이삭을 놀렸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놀렸다는 말에 대해서 학자들의 여러 가지 해석이 있습니다. 그래서 놀렸다는 말 하나로 그것이 핍박이었는지 조롱이었는지 단순히 짓궂은 장난이었는지 확정하기는 어렵습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그것을 본 이삭의 엄마인 사라가 보기에 불편하였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뿐만 아니라 이전부터 사라는 이스마엘의 엄마인 하갈로 인해 마음고생을 많이 하였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과 계획은 아브라함과 사라를 통해 태어난 아들로 인해 민족을 이루는 것 이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하나님만 알고 계신 뜻이 아니라 몇번씩 아브라함과 사라에게 말씀하셨던 뜻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라는 하나님의 뜻과 계획보다 자신이 생각하기 쉽고 편한 길을 선택하였습니다. 창세기 16:1 -2
Genesis 16:1–2 NKRV
1 아브람의 아내 사래는 출산하지 못하였고 그에게 한 여종이 있으니 애굽 사람이요 이름은 하갈이라 2 사래가 아브람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내 출산을 허락하지 아니하셨으니 원하건대 내 여종에게 들어가라 내가 혹 그로 말미암아 자녀를 얻을까 하노라 하매 아브람이 사래의 말을 들으니라
당시에 아이를 가지지 못 하였을때 그래서 대를 이을 수 있는 아들이 없을 때, 사라와 같이 종을 통해 자손을 이어가는 것이 당시 일반적인 풍습이었습니다. 당시의 눈으로 사라의 행동을 보면 크게 잘못된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그것이 하나님의 뜻은 아니었습니다. 하갈을 통해 아들을 얻겠다는 사라의 그 선택으로 사라는 자신이 고통받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라는 아브라함에게 하갈과 이스마엘을 내쫓으라고 요구합니다. 여기서 내쫓으라는 말은 원어로’추방하다'는 뜻으로 관계를 청산하고 상속을 받을 권리를 끊어버리라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당시 법적인 관행에 의하면 상속권은 이스마엘이 아니라 이삭에게 있었습니다. 그러기에 사라가 이스마엘을 내 쫓지 않아도 이삭의 상속권은 보장되어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사라가 하갈과 이스마엘을 내쫓으라고 한 것은 이삭을 괴롭히고 놀리는 이스마엘이 싫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의 엄마인 하갈이 싫었던 것이었습니다.
사라의 요구를 들은 아브라함도 괴롭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아브라함은 이스마엘을 진심으로 자신의 아들로 여겼습니다. 창세기 17장에 보면 이삭이 태어나기 전까지 아브라함은 하나님께 자식을 주지 않아도 되니 이스마엘이나 하나님 앞에 살기를 원한다고 할 정도로 이스마엘을 사랑하고 아꼈습니다. 이삭이 태어나기까지 십여년 동안 아브라함은 이스마엘을 유일한 독자로 여기며 살았습니다. 그런 그가 이스마엘을 내쫓는 것은 매우 근심되는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도 지금 이렇게 근심하는 원인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뜻이 아닌 자신의 뜻을 선택하여 살아간 결과 입니다. 사라가 아무리 자신의 여종으로 자녀를 얻자고 했을지라도 하나님의 말씀을 기억하고 있다면, 아니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있었다면 사라의 제안을 거절하는 선택을 했어야 합니다. 하지만 아브라함도 하나님의 약속을 온전히 신뢰하지 못하였습니다.
우리는 선택의 기준이 내 유익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선택의 기준이 편리가 되어서도 안됩니다. 우리의 선택의 기준은 항상 하나님의 말씀 이어야 합니다. 아무리 어려운 상황과 환경일지라도 하나님의 말씀이 분명하면 우리는 그 말씀을 기준으로 선택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후 비슷한 상황이 성경에 또 기록되어 있습니다. 바로 야곱과 에서 입니다. 리브가가 야곱과 에서를 임신하였을 때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큰자가 어린 자를 섬길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에서가 형이고 야곱이 동생이니 하나님의 말씀은 형인 에서가 동생인 야곱을 섬길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랬으면 장자의 축복은 당연히 야곱이 받아야 했습니다. 하지만 이삭의 선택은 야곱이 아니라 에서였습니다. 그도 그럴것이 에서는 사냥을 잘 했습니다. 이에 반해서 야곱은 집에 있기를 좋아했습니다. 그리고 에서는 남자다웠고 누가봐도 한 가정을 이끌어 가기에 부족함이 없어보였습니다. 하지만 야곱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늘 집에 있었고 자신의 꾀로 형인 에서를 속이는 비겁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니 누가봐도 장자권은 에서가 가져가는게 당연합니다. 당시 부족사회에서 가족을 지킬 수 있는 힘도 있어야 했기에 야곱이 장자권을 가진다는 것은 말 도 안되는 일이었습니다. 누가봐도 에서가 장자 입니다. 장차 대를 이을 사람입니다. 그래서 이삭은 에서를 사랑했고 그래서 에서에게 축복을 하려 하였습니다.
하지만 여기서도 하나님의 뜻과 계획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선택은 야곱 이었습니다. 그랬다면 이삭은 아무리 에서를 축복하고 싶어도 그전에 하나님께 물었어야 합니다. 그러나 이삭은 자신이 보기에 좋은대로 선택하였습니다. 또한 리브가도 분명한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다면 하나님의 뜻과 계획을 믿고 기다렸어야 했습니다. 지금 당장 에서가 축복을 받는 것 같아 보여도, 못하실 것이 없는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하며 기다렸어야 합니다. 하지만 리브가는 자신이 보기에 옳은대로 남편 이삭을 속이고 에서가 아닌 야곱이 장자의 축복을 받게 하였습니다. 그래서 결과가 야곱이 장자의 축복을 받고 모두가 행복하게 잘 살았습니다~ 로 끝나면 좋겠는데 그렇게 끝나지 않았습니다. 리브가의 인간적인 선택의 결과가 어떤지 아십니까? 그 이후로 죽을 때까지 사랑하는 아들 야곱을 보지 못 합니다.
그 순간 내가 볼때 옳은 선택이라고 할지라도 우리는 하나님의 약속을 기억해야 하고 하나님의 뜻을 구해야 합니다. 그래서 오직 하나님의 말씀만이 우리의 선택의 기준이 되어야 합니다.
지금 아브라함과 사라는 하나님의 뜻과 계획이 아닌 자신이 보기에 좋은대로 편한대로 선택하였습니다. 그결과로 그들은 지금 고통받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럼에도 하나님은 모두를 위한 놀라운 하나님의 사랑이 드러납니다.
다시 본문으로 돌아와 근심하는 아브라함에게 하나님께서 근심하지 말고 사라의 말을 들으라고 하십니다. 이 말은 사라가 말한 것처럼 하갈과 이스마엘을 내쫓으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사라의 손을 들어주시는 것 같아 보입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하시는 이유는, 하나님께서는 이삭이 태어나기 전부터, 이스마엘이 있음에도 이삭과 언약을 맺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에게 다시한번 이삭에게서 나는 자라야 네 씨라 부를 것이라고 하시며, 이스마엘을 내쫓는 것입니다. 다시말해 하나님은 지금 하나님의 계획대로 이루시는 것뿐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이삭의 자손만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부를 것이라고 하는 이유는 이삭은 선하고 이스마엘은 악해서가 아닙니다. 그리고 이삭이 이스마엘 보다 믿음이 더 좋아서도 아닙니다. 그것은 단지 이스마엘은 하나님께서 낳게 하신 자녀가 아니고, 이삭은 하나님께서 낳게 해주신 자녀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오늘 본문에서 누가 옳고 누가 잘못했다는식의 판단을 하지 않십니다. 그저 하나님의 언약의 결과가 무엇인지만을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묵묵히 하나님의 계획을 이루어 가시는 것 뿐입니다.
아브라함과 사라의 잘못된 선택임에도 불구하고하나님은 아브라함의 이스마엘을 향한 사랑과 인간적인 도리를 무시하지 않으셨고 또한, 사라의 괴로움도 잊지 않으셨습니다.
우리는 삶에 일어나는 크고 작은 일들속에서 사라처럼 인간적인 감정과 순간의 유익이 기준이 되어 선택 하기도 하고, 아브라함처럼 인간적 애정과 도리기 기준이 되어 선택하기도 합니다. 그리나 우리는 보이는 것으로 부터 눈을 들어 하나님의 약속을 기억하고 그 계획을 바라보며 하나님의 뜻을 구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사라는 자신의 아들이 종의 아들에게 놀림 받는 것과, 미래에 있을 두 아들의 상속의 갈등을 바라보았지만, 하나님의 크고 놀라우신 계획은 바라보지는 못하였습니다. 아브라함 또한 과거의 이스마엘과 쌓은 정과 현재의 부성애와 미래의 이스마엘의 삶은 걱정하였습니다. 하지만 마찬가지로 그 속에서 하나님의 놀라운 뜻과 계획은 바라보지 못하였습니다.
우리는 반드시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것은 그것이 무엇이든 반드시 이루십니다. 그러기에 우리의 시선은 내 앞의 일어나는 일들이 아니라, 내 경험과 내 지혜가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에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근심하지 말라고 말씀하시면서 여종의 아들도 네 씨니 내가 그로 한 민족을 이루게 하리라 말씀하십니다.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하나님의 뜻이 이삭을 통해 언약을 이루거가는 것이지만, 이스마엘을 버리신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이스마엘에게도 복을 주시겠다 약속하십니다.
아브라함은 이 하나님의 계획을 믿었습니다. 그래서 사라의 말대로 내쫓으라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합니다. 그래서 그 다음날 아침 일찍 떡과 물 한 가죽부대를 주며 하갈과 이스마엘을 내보냅니다.
아브라함이 담아준 가죽부대의 물이 바닥이 나고 이스마엘의 목숨이 위태로운 상황에 처해지자 하나님께서는 하갈로 하여금 샘을 발견하게 하시고 이스마엘의 생명을 지켜 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마엘의 목숨을 살려주셨을 뿐만 아니라, 이스마엘로 큰 민족을 이루게 하겠다고 약속 하십니다.
하나님은 이삭의 기도만을 들으신 것이 아니라, 이스마엘의 기도도 들으셨습니다. 언약이 아닌 육체를 통해 태어난 자손의 소리도 하나님께서 듣고 응답하신 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이스마엘이 성장할 때 하나님께서 함께 하셨습니다. 이것이 놀라우신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우리는 흔히 내가 미워하고 싫어하는 사람은 하나님도 싫어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나만을 특별히 사랑한다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모두를 사랑하십니다. 나만, 우리 교회만, 우리 나라만 특별히 사랑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모두를 동일 하게 사랑하십니다. 내가 미워하는 그 사람도 하나님은 사랑하십니다. 우리가 정말 없었으면 좋겠다 생각하는 그 사람도 하나님이 사랑하시어 구원하시려고 예수님이 이 땅에 내려왔습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남을 볼 때 나의 눈이 아니라 하나님의 눈으로 보아야 합니다.
사라는 자신의 잘못된 선택으로 하갈과 이스마엘을 쫓아내라고 요구하였지만, 하나님의 의도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이삭을 향한 계획과는 별도로, 이스마엘을 향한 계획도 가지고 계셨기에 그를 아브라함의 집에서 분리시키신 것 이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계획을 다 알지 못합니다.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의 그 높으신 뜻과 계획을 알 수 있겠습니까? 그러기에 우리는 하나님의 뜻과 계획을 이해하려 하지 말고 믿기로 마음 먹어야 합니다. 그리고 믿음으로 순종하는 것이 가장 아름다운 결과로 이어집니다. 그러니 성도님들의 삶속에서도 때로는 이해 되지 않아도, 때로는 이루어질 것 같이 않은 상황일지라도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붙잡고 그것이 기준되어 선택하는 삶을 살아가길 소망합니다.
이 놀라운 하나님의 사랑을 기억하며 우리는 매순간 주님이 하신 말씀을 순종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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