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0922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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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이 이기는 것 같을 때
악이 이기는 것 같을 때
여러분 반갑습니다! 오늘도 이자리에서 함께 하나님의 말씀을 나누게 되어 너무나도 반갑습니다.
제가 또 오랜만에 여러분들과 함께 말씀을 나누게 되었는데요, 제가 저번에 말씀을 전할 때에는 8월 말 개강을 앞두고 있을 때였던 것 같은데, 벌써 9월도 마지막을 향해 나아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지금 시기면 아마도 여러분들이 과제의 노예가 되어있을 시기인 것 같아요. 그렇죠?
그리고 아마 여러분들은 곧 찾아올 추석 연휴만을 바라보면서 그때 좀 쉬면서 할 수 있는 과제들을 해놓아야지 라고 생각을 하고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제가 한가지 예언을 하자면, 여러분들은 추석을 맞이하면 지금 생각하는 것들을 다 하지 못할 가능성이 큽니다. 그렇죠?
제가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은 저도 다 겪은 일들이기도 하구요, 지금도 여러분들과 같은 생각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기말에 내야 할 과제를 추석때 좀 해놓아야겠구나 라는 생각을 하지만 아마도 한 주 미래의 저는 여러 핑계를 대면서 아무것도 안 할 가능성이 큽니다.
이렇게 서두에 이런 이야기들을 하는 것도, 여러분들이 이 예언이 예언이 아니도록 하기를 바라는 저의 마음이기도 하고, 제 스스로의 다짐이기도 합니다.
네. 이렇게 장난스럽게 서두에 제가 예언을 했는데요, 오늘 말씀도 이 예언에 관련된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함께 이 말씀을 읽었는데요, 한가지 물어볼게요. 여러분들은 이 말씀, 하나냐 선지자의 예언이 반드시 이루어질 것이라 생각하나요?
우리가 읽은 내용들을 보면 여호와의 말씀이라고도 말하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다시 모든 포로를 돌아오게 할 것이라고 하는 것을 보면 이루어질 것 같아요.
하지만 결론적으로 말씀드리자면 이 말씀은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었습니다.
이상하죠? 우리가 아시는 하나님은 분명히 저렇게 백성들을 다시금 살려주실 것 같은 그러한 분이신데,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니. 뭔가 설명이 필요해 보입니다.
그래서 사실 오늘 우리가 살펴볼 말씀은 28장 전체의 내용입니다. 우리 이 말씀을 보면서 우리가 방금 바라본 이 이상한 결론에 대해서 살펴보고, 하나님의 우릴 향한 말씀은 무엇을 말하는 것인지를 함께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오늘 말씀은 간단한 배경 설명이 필요해요. 먼저 등장인물을 설명해 드리자면, 우리가 방금 읽었던 예언을 한 하나냐 선지자입니다. 그리고 다른 한명은 우리가 잘 아는 예레미야 선지자입니다.
당시 예레미야 선지자는 유다 왕국을 다니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했는데요, 그 내용은 당시로서는 충격적인 내용이었습니다.
유다 왕국이 바벨론에게 멸망할 것이고, 하나님께서 백성들을 바벨론에게 넘기셨기 때문에, 우리는 바벨론의 멍에를 메고 살아가야 한다!
라는 내용이었죠. 그래서 예레미야는 스스로 줄과 멍에를 자신의 목에 걸고 다니면서 ‘너희가 이렇게 되어야 할 것이다’라는 식으로 말씀을 전하고 다녔던 것이죠.
그러한 이야기들을 들은 왕과 신하들, 그리고 백성들의 입장에서는 이것이 어떻게 들렸겠어요? 당연히 좋지 않게 들리겠죠. 이 나라를 저주하는 것처럼 느껴질 거에요.
이러한 상황에서 왕과 함께하는 또 다른 선지자들이 예레미야를 거짓 선지자로 내모면서, 제게 주신 하나님의 말씀은 다릅니다! 하나님은 바벨론을 무찌를 수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라고 맞서게 됩니다.
그리고 그들 중 하나가 바로 오늘 말씀에 등장하는 하나냐였던 것이죠.
하나냐는 예레미야가 보란듯이 하나님께서 바벨론의 멍에를 꺾어 버리실 것이다! 그리고 그들이 빼앗아간 모든 물건들과 포로들이 다시 돌아올 것이다! 라고 예언을 합니다.
두 선지자가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예언하는 것이 서로 충돌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아주 어려운 상황인 것이죠. 여러분들이 보았을 때에는 이 상반된 두가지 말씀을 어떻게 가려내야 할까요?
이사야는 여기서 또 다른 하나님의 말씀을 인용합니다.
바로 신명기의 말씀입니다.
네가 마음속으로 이르기를 그 말이 여호와께서 이르신 말씀인지 우리가 어떻게 알리요 하리라
만일 선지자가 있어 여호와의 이름으로 말한 일에 증험도 없고 성취함도 없으면 이는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것이 아니요 그 선지자가 제 마음대로 한 말이니 너는 그를 두려워하지 말지니라
이 말씀에 따르면 선지자의 메시지가 실현되는 것에 따라 그 말씀의 진위여부가 결정이 됩니다.
그래서 예레미야는 이 말씀을 인용하여 하나냐에게 너가 정말 하나님의 선지자라고 말할 수 있겠어? 하고 압박을 한 것이죠.
하나냐는 이 말을 듣고 자극을 받은 것인지, 아니면 찔림을 느낀 것인지,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예레미야의 목에 걸려있던 멍에를 빼앗아 꺾어버립니다.
그러면서 말하죠. ‘하나님께서 2년 안에 느부갓네살의 멍에를 이처럼 꺾어 버릴 것이다!’라고요.
원래 거짓을 말하는 사람들은 수세에 몰리면 더 무리한 말을 하게 되죠. 하나냐 역시도 그러한 모습을 보였던 것 같습니다.
예레미야는 이 말을 듣고 다시 돌아가죠. 그 때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나무 멍에가 꺾였지만, 대신 쇠 멍에들을 만들었다. 이 쇠 멍에로 모든 나라의 목에 메워 바벨론을 섬기게 하였으니 모두가 바벨론을 섬길 것이다.’
예레미야는 하나냐에게 마지막으로 말합니다.
‘하나냐야 하나님께서 너를 보내신 것이 아닌데, 너는 백성들에게 거짓을 믿게 하는도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너를 지면에서 제할 것이니 금년에 너가 죽을 것이다’
그리고 하나냐는 말씀대로 그 해 일곱째 달에 죽게 됩니다.
하나냐가 이렇게 죽었으니, 유다 왕국은 어떻게 되었겠어요? 예레미야가 전한 말씀 그대로, 바벨론에게 멸망당해 수도가 쑥대밭이 되고, 또 다시 포로들이 끌려가는 수모를 겪게 됩니다.
자. 이렇게 우리가 처음 보았던 하나냐의 예언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우리는 볼 수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의문이 생기겠죠. ‘왜 대체 하나님은 그가 택하신 백성들이 고통을 받게 하시는가?’
우리가 아는 하나님이시면 하나냐가 말한 것처럼 바벨론을 무너뜨리셔야 할 것 같죠.
심지어 다윗과 그의 나라가 멸망하지 않을 것이라는 언약까지 맺으셨잖아요. 그런 것을 보면 왜 하나님께서 이러시는지 이해가 잘 안될 것입니다.
그리고 대신 영광을 받는 바벨론을 보자구요. 그 나라가 하나님을 믿는 나라인가요? 아니죠. 아마 하나님의 존재조차도 모를 거에요. 그런데 왜 대체 하나님은 그의 백성도 아닌 나라에게 영광을 주시냐는 것이죠.
왜 악한 세력이 승리하느냐? 라는 이 질문은 사실 우리만 한 것은 아닙니다. 예레미야 역시도 이러한 질문을 동일하게 했었습니다.
여호와여 내가 주와 변론할 때에는 주께서 의로우시니이다 그러나 내가 주께 질문하옵나니 악한 자의 길이 형통하며 반역한 자가 다 평안함은 무슨 까닭이니이까
주께서 그들을 심으시므로 그들이 뿌리가 박히고 장성하여 열매를 맺었거늘 그들의 입은 주께 가까우나 그들의 마음은 머니이다
여호와여 주께서 나를 아시고 나를 보시며 내 마음이 주를 향하여 어떠함을 감찰하시오니 양을 잡으려고 끌어냄과 같이 그들을 끌어내시되 죽일 날을 위하여 그들을 구별하옵소서
언제까지 이 땅이 슬퍼하며 온 지방의 채소가 마르리이까 짐승과 새들도 멸절하게 되었사오니 이는 이 땅 주민이 악하여 스스로 말하기를 그가 우리의 나중 일을 보지 못하리라 함이니이다
예레미야가 이 말씀을 전할 때는, 예레미야의 친한 지인들이 자신을 죽이고자 꾀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였습니다.
예레미야는 자신의 이러한 고통으로 인해 하나님께 질문을 한 것이죠. 왜 악한 이들이 세상에서 평화를 얻게 되느냐는 것입니다.
그 질문에 하나님은 이렇게 답하십니다.
만일 네가 보행자와 함께 달려도 피곤하면 어찌 능히 말과 경주하겠느냐 네가 평안한 땅에서는 무사하려니와 요단 강 물이 넘칠 때에는 어찌하겠느냐
네 형제와 아버지의 집이라도 너를 속이며 네 뒤에서 크게 외치나니 그들이 네게 좋은 말을 할지라도 너는 믿지 말지니라
하나님의 말씀은 한마디로, ‘앞으로 더 그런 악한 일들이 있을 건데, 이거 가지고 이러면 안되지!’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러한 말씀을 하신 것은 예레미야의 삶이 고통 속에 있는 것이 하나님의 뜻하신 바였기 때문이었습니다. 그의 삶에 지속적으로 고통이 있을 것이기에, 이러한 것들을 통해 더 강하게 만드시고자 했다는 것이죠.
그러면 더 이해가 안됩니다. 왜 예레미야의 삶이 고통 속에 있어냐 하냐는 것이죠.
그것은 이스라엘의 모든 죄로 인함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이 행한 죄로 인해서 벌을 받아야 했고, 예레미야는 이를 전해야 했기에 고통 속에 살아갈 수밖에 없었던 것이죠.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의 한 가지 속성, 그의 공의를 바라보게 됩니다.
우리는 주로 하나님의 모습을 신약 속에 나타나는 사랑이 많으시고 은혜가 넘치시는 하나님의 모습으로 보게 됩니다.
맞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이 넘치시고 은혜가 넘치시는 분이십니다.
그런데, 그렇다면, 구약에 나타나는 하나님은 어떤 분이시냐는 것이죠. 가차없이 이방 민족들을 멸절하시고, 죄를 짓는 자들을 응징하시는 하나님은 하나님이 아니신 걸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구약의 하나님도 신약과 동일하신 하나님의 모습이십니다.
다시 말하자면, 하나님의 속성에는 신약에서와 같은 다함없는 사랑도 있으시지만, 동시에 구약에서 나타나는 죄를 처벌하시는 공의, 정의도 있으시다는 것입니다.
우리 한번 생각해보자구요. 하나님의 말씀은 온전한 말씀입니다. 그의 말씀 하나로 세상이 창조되었고, 세상이 운행되어지기 때문에, 그의 한마디 한마디가 너무나도 완벽한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한번 명하시면, 그것은 실패나 실수가 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한번 선포된 말씀은 반드시 선하고 반드시 온전합니다. 하나님은 완벽하시고 틀림이 없으신 분이시기 때문이죠.
그러면 당연히 하나님께서 명하신 말씀을 거스르는 죄에 대해서는 합당한 벌이 따라야 할 것입니다. 맞죠? 그것이 정의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하나님 스스로 그것을 깨라고 말하고 있다라는 거에요. 하나님은 사랑이 많으신 분이시니까.
그럼 그것이 과연 정의로운 행동일까요? 그렇지 않죠. 말씀이 불완전해지는 것인데, 절대로 정의로울 수는 없습니다.
그렇기에 하나님은 죄에 대해서 반드시 합당한 처벌을 내리십니다. 오늘 말씀에서처럼 이스라엘의 죄를 벌하시기도 하시고, 다윗의 간음에 대해서도 아들의 반란으로 그 값을 치루십니다.
그러면, 한가지 질문이 우리 가운데 생길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의 죄도 처벌을 받아야 하나요?
그렇습니다. 우리의 죄는 반드시 처벌을 받아야 합니다. 그것도 하나님의 말씀을 어겨버린 큰 벌로 죽음이라는 형벌을 받아야 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하나님의 사랑하심이 나타납니다. 그의 택하신 백성들을, 그 생명들을 끝내실 수는 없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보았듯이 하나님의 정의는 지켜져야 했습니다. 그 상충되는 두 가지가 어떻게 가능할 수 있을까요?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방법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랑이었습니다. 우리가 로마서에서 보았듯이, 성자께서 성육신하시고 인간으로서 모든 의를 이루시고, 그 의가 우리의 죄와 이중으로 전가되면서, 우리의 죄를 성자께서 대신 짊어지신 것입니다.
그렇게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서 하나님의 정의는 지켜질 수 있었고, 동시에 우리는 그리스도의 의로 살아나면서 하나님의 사랑 역시도 지켜질 수 있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입니다.
우리는 그로 인해 새 생명을 얻었고, 이 땅에서 그의 생명으로 살아갈 수가 있게 되었습니다.
자. 그러면 여러분들께 물어보겠습니다. 여러분들의 지금 삶,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사는 삶은 행복한가요? 너무나도 즐거운가요?
그렇습니다. 사실 우리의 지금 삶은 행복하지만은 않아요. 어느 드라마의 대사처럼, 왜 우리는 햄보칼수가 없냐는 거에요.
그래요. 우리의 삶은 행복하지 않습니다. 아니 오히려 불행할 때가 많죠. 예수님께서도 우리의 삶이 행복할 것이라고는 말씀하시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고통을 받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죠.
우리의 삶이 왜 이모양일까요? 그것은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이 한번 더 이 땅 가운데서 이루어져야 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다시 이 땅에 오셔서 모든 생명을 심판하실 그 때,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은 다시금 이루어질 것입니다.
우리는 그 때를 전하는 전달자로서 지금 이 땅을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마치 멸망의 때를 선포하려 다니는 예레미야의 모습처럼, 우리 역시도 진리를 선포하며 살아가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렇기에 우리의 삶은 예레미야처럼 고통의 연속일 것입니다. 세상이 원하는 메시지를 전하지 않기에, 우리를 핍박하고 고통스럽게 하는 일들이 있을 것이라는 말입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우리가 이 고통을 이겨내고 행복한 삶을 살아갈 수 있는 것은 재림 이후에 펼쳐질 하나님 나라를 우리는 소망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레미야가 고통 속에도 불구하고 지속적으로 말씀을 선포할 수 있었던 것도, 그가 받은 하나님의 말씀이 심판 뿐만이 아닌 회복의 말씀 또한 주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그 회복의 말씀을 선포해야 합니다. 우리가 비록 이 땅에서 어려움을 겪더라도, 우리가 바라볼 것은 이 땅의 것들이 아닌 그 이후의 것들이기에, 우리는 하나님과 함께할 그 때를 기다리고 기대하며 기쁨의 삶을 살아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세상의 사람들은 그러한 우리의 모습을 통해서, 우리의 기쁨의 원천인 하나님 나라를 궁금해하고, 그것을 알고자 우리에게 나아올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를 위해 여러분들에게 각자의 달란트를 허락하셨습니다. 저는 여러분들을 보면서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여러분들이 각자의 달란트를 가지고 세상에서 그리스도를 바라는 삶, 그리스도와 함께하는 삶을 살아간다면, 그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에게 원하시는 그 모습일 것이라고 말이죠.
이 자리에 모인 우리 모든 청년들, 여러분들의 삶이 힘들다고 하더라도 포기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여러분들은 예레미야처럼 하나님의 크신 계획을 이루고 그의 말씀을 선포할 전달자의 역할을 받은 이들입니다.
우리를 통해 모든 이들이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을 알 수 있도록, 우리와 함께 그 기쁨이 넘치는 하나님 나라에 살아갈 수 있도록, 담대히 세상 속으로 나아가는 우리 모든 하임 공동체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찬양 : 하나님의 등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