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0923 양청] 88문

소요리문답  •  Sermon  •  Submitted   •  Presented
0 ratings
· 3 views
Notes
Transcript
[제88문] 그리스도가 구속의 유익들을 우리에게 전하시는 외적 수단은 무엇입니까?
(답) 그리스도가 구속의 유익들을 우리에게 전하시는 외적이고 통상적인 수단은 그의 규례들인데 특별히 말씀, 성례, 기도입니다. 이 모든 것들은 구원을 위해 택자들에게 효과적입니다[마28:19-20, 행2:41-42, 46-47]
오늘 우리가 배우는 것은 은혜의 수단이다. 여러분, 기독교 신앙에서 제일 중요한 것이 무엇인가? 바로 은혜 받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하나님께서 우리가 은혜를 받도록 정하신 수단이 있는데, 그것들을 정확하게 제대로 바르게 열심히 사용하지 않는다면, 우리가 은혜를 받고 살 수가 없을 뿐만 아니라, 더 심각하고 충격적인 것은, 우리는 종교 생활으로 갈 수는 있지만 제대로 하나님을 닮아가지 않는다는 것이다. 우리의 구원의 단계들을 다시한번 되짚어보자. 영원전에 하나님께서 그분의 선하시고 기뻐하시는 뜻 가운데 구원하실 자들을 은혜로 택하셨다. 그리고 그들을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셨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기까지 율법에 복종하심으로서 의를 얻으셨다. 성령님께서는 우리를 거듭나게 하셔서 우리의 단단한 마음을 부드럽게 하시고 하나님께 향하게 하시고, 복음을 듣고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게 하심으로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의를 우리에게 적용해주신다.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한 자는 그 즉시 칭의가 선언되고, 의롭다 여겨진 자는 하나님의 거룩하신 아들들로 받아들여진다. 하나님의 거룩한 자녀된 자들은 그 즉시 성화 구원의 과정을 이루게 된다. 칭의가 있었는데 성화가 없는 일은 없다. 그리고 우리의 구원의 결과는 무엇인가? 우리 구원의 최종적인 사건? 바로 영화, 즉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변하는 것이다. 이 모든 과정들이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우리의 인간적인 노력이나 선행이나 결단이나 공로가 조금도 들어가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시작해서, 은혜로 이어지고, 은혜로 다듬어져가고, 은혜로 완성된다. 하나님의 은혜. 그래서 에베소서 말씀은 이 모든 구원의 은혜들이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한다.
그러나 너무나도 안타까운 것은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임도 알지 못하고 여전히 내가 뭔가를 보태야 하고 내가 뭔가를 협업해서 구원을 이루어야 한다는 식의 율법주의적 구원론을 가진 성도들이 많다는 점과 그보다 훨씬 더 심각한 것은 이 모든 것들이 하나님의 은혜임을 알면서도 하나님께서 그 은혜를 내려주시는 수단들을 통해서 은혜를 받는 것이 아니라 자기 마음대로 은혜를 받으려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이다. 이것은 정말로 중요한 것이다.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시면서 그 은혜를 베푸시는 바른 수단들도 함께 정하셨는데 그 수단들을 통해서 은혜를 누리는 것이 아니라 다른 내 소견에 옳은 것들을 의지하여 은혜를 누리려 한다는 것이다. 이런 면에서 교리가 얼마나 중요한지 모른다. 한국교회에 교리교육이 약화되면서 기이한 기독교가 만들어졌다. 하나님이 정하신 방법대로가 아니라 내 소견에 옳게 보이는대로… 그러니 온갖 이단들의 온갖 말도 안되는 비성경적인 공격에도 쉽게 흔들리는 것이다. 앞서 84문에서 사람의 각 죄는 금생과 내생에서 하나님의 진노와 저주를 받는다고 했다. 죄인의 딜레마다. 어찌할 방법이 없다. 그래서 85문에서 그 진노와 저주에서 벗어나도록 하나님께서 믿음과 회개 외적 수단들을 근면하게 사용할 것을 요구하신다고 했다. 믿음과 회개와 외적인 수단들을 사용해서 벗어날 수 있게 하셨다. 여기서 중요한 건 믿음과 회개였다. 믿음과 회개를 한마디로 뭐라고 하는가? 바로 회심이다. 우리가 어찌할 수 없는 죄인의 딜레마 속에서 구원자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의지하고 그분을 붙들고 그분을 사모하는 것이 회심이다. 이를 통해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신다. 진노와 저주에서 건져주신다. 또한 86문과 87문,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과 생명에 이르는 회개가 무엇인지에 대해서 지난주에 했다.
이제 오늘 88문부터 시작해서 107문까지, 107문은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의 끝이다. 88문에서 107문은 이렇다. 신자들은 이제 믿음과 회개를 통해서 진노와 저주에서 벗어났다. 의롭다 함을 받았다. 칭의. 그러면 이제 내가 죄의 진노와 저주에서 벗어난 자로서 어떻게 하면 내가 이 은혜의 수단들을 통해서 거룩해짐을 입어가느냐. 이 주제를 107문까지 다룬다. 그런데 이 부분에 있어서 너무나 많은 오해들과 잘못된 생각들이 한국교회 가운데 자리를 잡고 있다.
먼저 성경이 얘기하고 있는 외적이고 통상적 수단이라고 그랬는데 이 의미를 좀 설명을 드리겠다. 우리는 기도원 가서도 은혜 받을 수 있다. 또는 찬양을 부르면서 은혜를 받을 수도 있다. 또는 우리는 서로 교제를 하면서도 은혜를 받을 수 있고, 큐티를 하다가 은혜를 받기도 한다. 이처럼 사람이 각기 다양한 것처럼 사람마다 은혜받는 방식들이 다양하다. 그럴 수 있다. 그런데 그토록 다양한 은혜받는 그 방식들을 총망라해서 지금 여기다가 써놓은 게 아니다. 여기서 외적이고 통상적인 통상적이라는 것은 특별한 수단이 아니고 일상적 수단이라는 것이다. 가장 일반적인, 가장 보편적인 수단. 모두에게 보편성을 지니는 보통 방식을 말하는 것이다.
그리고 외적인 수단이라는 것은 “나는 신비적으로 이렇게 어디선가 뭔가 이렇게 떨어지는 걸 받았어" 그런 게 아니고 아주 외적으로 누구나 다 접근할 수 있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그래서 교재 2번의 A, 그리스도께서 획득하신 구속이라 했는데, 이것이 무엇인가? 괄호를 보면, 먼저 그리스도와 연합하는 것이라 했다. 우리가 그리스도와 연합한다. 그리고 효과적인 부르심, 성령께서 우리를 부르실 때 우리는 저항할 수 없고 반드시 그 부르심은 효과가 나타난다 했다. 그리고 칭의, 의롭다 하심, 양자 됨, 하나님의 아들로 우리를 택하시는 것이다. 그다음에 거룩하게 하심, 성화, 믿음, 회개 등 이 모든 것들이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획득하신 구속이다. 이것들을 우리에게 적용하는 분이 성령님이신데, 성령님께서 예수님이 이루신 것들을 우리의 것으로 만들어 주시는데, 중요한 것은 어떤 수단을 통해서 하신다는 것이다. 그러면 그 수단이 무엇이냐, 외적이고 통상적인 수단이라 했다. 이는 우리가 은혜를 받는 주관적인 방식들이 아니라 객관적인 방식을 가리키는 것이다. 주관적인 방식이라 함은 아까 제가 조금 전에 말씀드렸던, “ 나는 찬양을 부를 때 은혜를 받아! 나는 말씀은 별로 은혜가 안되는 것 같아" 이런 경우이다. 이런 경우는 어떠한가? 찬양을 너무나도 뜨겁게 한다. 격정적으로 찬양한다. 그리고 이어서 말씀이 시작되면 벌써 자고 있는 경우들이다. 이를 바른 신앙의 모습이라 할 수 있을까? 그건 아니다. 이렇게 우리는 자기만의 방식을 고집하기가 쉽다.
조금 더 예를 들어보면, 이런 경우도 있었다. 어떤 사람이 상담을 하면서 말한다. “목사님, 저는요. 크게 부르짖어야 기도가 됩니다.” 그래서 기도할 때마다 교회가 떠나갈 정도로 막 부르짖는 것이다. 그런데 함께 기도하는 분들은 그렇게 떠나가라 기도하는 그분의 기도소리가 너무 거슬리고 그분들에게는 방해가 된다. 이런 경우 그렇게 부르짖는 기도하는 분은 다른 사람들의 유익을 위해 통성기도할 때는 자중을 하는게 맞고, 오히려 혼자 골방에서 기도할 때 그렇게 기도하는 게 맞다. 그래서 그렇게 조언을 드렸더니 대뜸 하시는 말이, “아니 목사님이 그렇게 말씀하실 줄은 몰랐어요! 내가 이렇게 해야 은혜를 받는데 왜 내가 은혜받는 것을 목사님이 방해하나요?” 그분에게 그것은 은혜 받는 수단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여러분, 이렇게 각자 소견에 옳은대로 은혜 받는 수단들을 수용하다보면 결국 교회는 이상해질 수 밖에 없다. 하나님께서 ‘나’라는 사람에게 은혜를 주실 때는 교회에게 은혜를 주셔서 그 교회가 함께 은혜를 누리는 것이고, 교회에 속한 나도 그 은혜를 누리는 것이다. 언제나 하나님의 은혜는 공동체적이다. 그런데 이것을 떠나서 “나는 이렇게 해야 은혜가 된다" 라는 식의 내 방식을 고집하는 것이 위험하다. 물론 제가 드리는 말씀을 오해하지 않으시길 바란다.
분명 하나님께서 각자에게 주시는 은혜의 방법들이 있으리라 생각한다. 어떤 분들에게는 잔잔한 음악을 틀어놓고 조용히 기도하는 것이 은혜가 될 수 있고, 어떤 분들은 큐티를 통해 은혜를 경험하기도 하며, 어떤 분들은 뜨거운 찬양과 통성기도를 통해 은혜를 경험하기도 할 것이다. 그러다보니 신앙생활을 하면서 각자만의 은혜받는 방식이 고착화되기 시작한다. 그러다보니 보편적인 은혜의 수단을 사용하는 것은 뒤로 미뤄두고 늘상 자기만의 스타일, 그 인스턴트식 은혜방법을 좇길 시작한다.
여러분, 아무리 입에 짝짝 붙는다 할지라도 삼시세끼를 365일 배달만 시켜먹으면 건강이 상하기 마련이다. 때로는 인스턴트를 통해 자극적인 것들도 경험하지만, 그것이 맛있다고 맨날 그렇게만 먹는다면, 그리고 그런 삶에 익숙해진다면 그 사람의 건강상태가 양호하다고 할 수 없는 지경이 반드시 올 것이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보편적인 그 은혜의 수단을 사용해야 하는데 그것을 무시하고 자기 방식을 고집하는 것은, 자신의 신앙이 좋다고, 자기는 지금 잘 해오고 있다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나는 이렇게 나는 은혜받았으니까 나에겐 오직 이것 밖에 없어!” 라거나 “나는 이런 식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했으니까 너희도 이런 식으로 따라 해!” 이런 식으로 주장하는 것은 합당하지도 않고 성경적이지도 않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그래서 늘상 신앙생활에서 위험한 것이 무엇인가하면, 주관적인 것을 객관화하는 게 위험한 것이다. 내가 주관적으로 느끼는 거를 가지고 막 강요를 한다. 다른 사람들에게도 오직 이게 맞는 거라고!
정말 잘못된 신앙이다. 성경적으로 살펴보아도 이런 신앙은 지지 받지 못한다. 그런데 교회 안에서 이런 신앙들이 더러 받아들여지는 이유가 무엇일까? 우리의 신앙이라는 것을 주관적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신앙이라는 것이 주관적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물론 신앙의 주관적인 요소는 있다. 없을 수는 없다. 신앙은 내가 하나님과 밀접하게 만나는 만남이다. 그것은 주관적인 요소이다.
그러나 그 주관적인 요소보다 더 중요한 것이 바로 객관적 요소이다. 그 부분이 교회를 이루어 가는 것이다. 그래서 여러분들 교재에 B의 마지막 부분을 보면, 검증이나 확인이 가능한 객관적이고 가시적인 외적인 수단들이 필요하다 했다. 그것이 무엇인가? 말씀, 성례, 기도라는 것이다.
C를 보라. 외적 수단에 대한 오해가 있는데, 첫째 성령님은 외적 수단 없이 은혜를 주신다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들의 주장에 의하면 “나는 이런 거 필요 없습니다! 말씀도 필요 없고, 성례도 필요 없습니다! 나는 그냥 성령의 직통계시 하나면 끝납니다!” 이렇게 되면 이단이 되는 것이다. 직통파가 요즘 얼마나 많은가. 그리고 또 하나 오해는, 이러한 외적 수단들이 기계적으로 은혜를 부어준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서 말씀과 성례와 기도가 은혜의 외적수단인데, “나는 오늘 아침에 말씀 읽었고, 밥먹기 전에 기도도 했고, 또 엊그제 성례도 참여했으니까 나는 은혜 받는다” 라는 것이다. 천만의 말씀이다. 은혜는 기계적으로 오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D를 보면, 의존할 수 있는 통상적인 수단이 아닌 것들이 있다고 했다. 성경을 찾아보지. 수5:12또 그 땅의 소산물을 먹은 다음 날에 만나가 그쳤으니 이스라엘 사람들이 다시는 만나를 얻지 못하였고 그 해에 가나안 땅의 소출을 먹었더라” 만나가 가나안 땅에 딱 들어가니까 끝났다. 더 이상 안 내린다. 너무 희한하지 않은가? 가나안 땅에 딱 들어가니까 안 내린다. 40년 동안 하루도 어김없이 내렸던 만나가 안 내린다. 무슨 의미인가? 만나는 일상적인 것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이제 약속의 땅에 들어갔으니 더이상 만나를 하염없이 기다릴 것이 아니라, 농사지어서 먹고 살 수 있는 땅이 있고, 그렇게 수고하고 애써서 소산을 얻는 것이 정상이라는 것이다.
제가 목사로 부르심을 받은 후 어느날 설교 준비를 하면서 딱 한 번 이런 경험이 있었다. 이번 돌아오는 설교때 무슨 말씀을 전해야 할지 늘상 이게 고민이었다. 그런데 어느날 기도를 하다가 갑자기 마음에 어떤 감동이 팍 꽂히는 것이다. 마치 예레미야가 하나님의 계시를 받고는, 이를 전하지 않고서는 어찌 감당할 수 없는 그런 상태에 빠졌던 것처럼, 하나님께서 마음 가운데 불을 내리셔서 이것을 설교로 준비하지 않고는 어찌 할 수 없을, 그런 경험을 주셨다. 그래서 부랴부랴 노트를 꺼내서 하나님 주시는 메세지들을 적었다.
물론 이렇게 말한다고 여러분들이 저를 또 너무 신령하게 보실까 봐 그러는데.. 그렇다고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설교자인데 이런 경험이 아예 없는 것도 문제이겠지만, 그렇다고 특히 대단하게 보실 것도 없다. 말하자면 이런 은혜는 통상적인 방법이 아니라는 것이다. 성경을 공부하고, 이 말씀이 어떤 역사적 배경 속에서 주어졌는지, 이 의미가 무엇인지 다양한 주석책들을 살피면서 연구하고, 이 말씀이 왜 주어진 것이며 학자들은 어떻게 해석했으며, 목사님들은 어떻게 설교했는지를 공부를 하면서 말씀을 소화해서 설교로 만드는 것이 통상적 수단이다. 그런데 이런 보편적이고 통상적인 수단 대신, 하나님께서 뭔가 특별하게 나에게 은혜를 베푸시고, 특별하게 뭔가를 행해주시기를 계속해서 바란다? 이것은 결코 정상적인 신앙의 모습이 아니라는 것이다. 신앙생활하면서 그것이 여러분들의 일상처럼 되면 안된다. 그러면 사람이 신앙생활을 감사함과 자족함으로 나아갈 수가 없다. 이것이 참 중요한 부분이다. 아람 군대에 포위돼서 기근에 시달리던 사마리아 성에 하나님이 음식을 어떻게 공급하셨는지 아는가? 나병환자들이 부정하기 때문에 성 밖에서 모여 살고 있었다. 그러다 기근이 닥쳤고 심지어 아람 군대에 포위까지 되었다. 더이상 음식이 공급되지 않는다. 그래서 나병환자들이 “우리가 이래 죽으나 저래 죽으나 죽게 생겼는데, 이왕 죽을거면 아람군대 진영쪽에 가서 음식이라도 좀 구걸해서 먹고 죽자!” 그래서 아람군대 진영으로 건너갔는데 이게 웬걸. 옷이니 온갖 장비들이니 다 널부러져 있고, 그곳에서 생활하던 그대로 아람군대가 황급하게 다 도망간 것 아니겠나? 그래서 그 가운데 맛있는 음식들도 있고, 비싼 자재들도 있고 하니까 처음에는 신나게 먹고 물건들을 취했을 것이다. 그러다 문득 생각해보니, 지금 자기들의 성 안에는 굶어죽고 있는데 자기들만 이렇게 먹고 가지면 하나님한테 벌을 받을 것 같은 것이다. 그래서 성에 가서 이 사실을 알린다.
당시 사마리아 성은 도저히 먹을 것이 없어서 어미들은 자기 자식들을 솥에 삶아 먹었다고 성경은 기록한다. 그 참담하고 비통한 상황에서 하나님께서는 참으로 신비한 방법으로 그들에게 양식을 공급하신다. 물론 이 사실이 얼마나 신비롭고 감격스러운가? 그러나 이런 일들은 일상적이지 않다. 특별하게 여러분들의 삶 속에서 행하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일이다. 정말 하나님께서 비상한 방식으로 뭔가를 하시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 속에서 그런 일을 하실 때가 분명히 있다. 그러나 그것이 일상적인 은혜는 아니다. 따라서 이런 놀라운 일들을 경험하는 것이 참 감사하고 감격스러운 일이지만, 그것이 매일 매순간마다 우리의 삶 속에 일어나길 바라며 일상의 은혜를 저버리는 것은 결코 건강한 신앙이 아님을 기억해야 한다.
여러분 한번 상상해보라. 사랑하는 애인과 드넓은 호수에서 단둘이 돛단배를 타고 있다. 살랑이는 바람과 따스한 햇살과 잔잔하게 이는 물결, 모든 것이 아름답고 낭만적이다. 그런데 갑자기 급똥소식이 밀려온다. 막 어찌할 수 없을 정도로 적군들이 밀려온다. 배는 호수 정 한가운데에 있다. 이런 상황에서 여러분 어찌 하겠나? 도저히 밀려오는 적군들을 감당할 수가 없다. 사랑하는 애인 앞에서 바지를 내리고 호수를 향해 발포하겠나? 아님 그대로 바지 안에서 적들을 맞이하겠나? 이럴 때 호수에 바람이 불기 시작한다. 그래서 배가 바람따라 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한다. 얼마나 신나는가? 화장실, 그 목적지가 가까워올수록 내 속에서는 찬송이 터져나온다. 그런데 바람이 없다면? 그냥 잔잔하다면? 여기서 바람이 분다는 것은 특별한 은혜이다. 그러나 우리가 일상적으로 움직이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바람이 불기를 마냥 누워 기다리면 되는가? 아니다. 노를 저어야지. 열심히 노를 저어야지. 우리는 이것을 소중하게 여겨야 한다. 일상의 은혜이다. 나는 바람이 불기까지 그냥 드러누워있겠다! 물론 신앙생활 가운데 하나님께서 바람 불게 하실 때가 있다. 그러나 우리는 노를 저으며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우리의 신앙에 항상 바람이 부는 거라고 생각하면 안된다. 바람이 불 때도 있고 때로 역풍이 불 때도 있고 바람이 잔잔할 때도 있는데 늘 우리는 변함없이 노를 젓고 가는 것이다. 그러다 보면 하나님이 바람을 주셔서 또 신나게 갈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말씀과 성례와 기도 이 3가지가 비유하자면, 노를 젓는 거라고 볼 수가 있다. 먼저 성례를 보자. 여러분들 교재 3번의 A를 함께 읽어보자. “성례는 보이는 말씀이고, 기도는 하나님의 말씀에 드러난 하나님의 뜻을 따라서 구하는 것이므로, 은혜의 수단인 말씀, 성례, 기도의 중심은 말씀이다" 성례를 보이는 말씀이라고 했다. 우리가 예배드릴때 선포되는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는 주로 귀로 듣는다. 근데 성례를 할 때는, 성찬을 할 때는, 그 성찬을 우리는 시각적으로 보고 또 감각적으로도 맛을 본다. 이를 통해 우리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말씀을 설교를 통해 듣는다면, 그 말씀이 눈으로 볼 수 있게 경험하는 것이 바로 성례라 할 수 있다.
그다음에 기도는 어떻게 은혜의 수단이 되는가? 기도를 내 마음대로 하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따라서, 말씀을 중심으로 하는 기도가 바른 기도이다.그래서 말씀이 중요하다.
이런 의미에서 사람이 경험으로 검증하고 임의로 결정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정하신 게 말씀과 성례와 기도이다. 우리가 이러한 사실들을 성경을 통해 발견해야 하는데, 성경을 찾아보자. 요17:17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기 전에 기도를 하시는데, “그들을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곧 진리라고 하셨다. 딤전4:5 을 보면 바울이 목회자 디모데에게 중요한 원리를 가르치는데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거룩하여짐이라”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과 그 말씀에 기초한 기도로 우리가 거룩해 진다 했다.
마28:19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또한 행2: 42그들이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고 떡을 떼며 오로지 기도하기를 힘쓰니라행2:46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초대교회 성도들이 성령을 받은 이후 함께 모여 예배하며 성찬을 행했음을 발견하게 된다. 또한 함께 읽진 않겠습니다만, 고전11:17-34 까지가 주님께서 제정하신 성찬에 대한 말씀이 기록되어 있다. 이런 것들로 미루어 볼 때,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 말씀에 기초한 기도, 그리고 성례 이 두 가지는 교회 역사를 통해 성도들이 “이게 제일 좋더라, 이렇게 하면 은혜를 많이 받더라” 이렇게 결정된 바가 아니라는 것이다. 이것들은 성경에서 우리에게 은혜를 주시는 가장 기본적인 수단들, 가장 통상적이고 가장 보편적이며 가장 안전하고 가장 신뢰할만한 수단들이다. 그래서 웨스트민스터 신학자들은 이를 가리켜 "외적이고 통상적 수단”이라고 설명한 것이다.
그러면 여러분, 이 사실을 우리 신앙생활 가운데 어떻게 적용할 수 있을까? 저는 이 시간 3가지로 여러분의 신앙에 도전드리고 싶다. 첫째는, 신앙에 있어서 주관성의 요소를 조심하라는 것이다. 물론 우리 신앙생활에는 주관적인 게 있다. 주관적인 것들을 아예 부정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한 번 유익했던 경험이 고정관념이 되거나 추구하는 목적이 되는 건 위험하다. 황홀경과 같은 체험도 그럴 수 있다. 이런 것들은 때로 나에게 눈물을 나게 만들고, 가슴을 뜨겁게 만들고, 도전을 심어줘서 뭔가 은혜를 받은 것 같다.
하지만 그것을 다른 사람에게 강요하거나, 혹은 그것만이 하나님이 베푸시는 은혜의 전부인 것처럼 생각하는 것은 위험하다는 것이다. 민수기를 보면,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불평과 원망을 하자, 하나님이 불뱀을 보내셔서 심판하신다. 이때 모세를 통하여 놋뱀을 만들어 나무 위에 걸어서 뱀에 물린 자들이 이를 보게 하자 그걸 보는 자들마다 회복되었다. 장대에 달린 놋뱀이 하나님의 은혜의 상징이었다. 그런데 나중에 히스기야 때 보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 놋뱀을 다시 만들어가지고 우상처럼 섬겼다고 말한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을 그저 은혜의 수단으로만 여기면 좋은데 그것을 우상처럼 받들어 섬기고, 그것들을 맹신하기 시작하면 이게 문제라는 것이다.
괜히 십자가를 부적처럼 사용하는 경우들이 얼마나 많던가. 또한 성경책을 우상처럼 받드는 자들이 얼마나 많던가. 성경책을 배고 잠을 자면 두통이 사라지고, 전쟁통에서 총에 맞았는데 옆에 끼고 있던 성경책이 대신 맞아줘서 내 생명을 살렸다. 그러면 나를 살린 것은 하나님이 아니라 성경책이 되어버린다. 이런 식으로 우리가 자신의 어떤 주관적이고 일시적인 경험을 객관화하거나 혹은 일상화하게 되면 그것은 위험천만하다는 것이다.
둘째로, 특별한 것이 통상적인 것을 대신하는 것도 위험하다. 일상적인 성경 읽기, 기도하기, 성례에 참여하기 이것이 굉장히 중요한 것이다. 그러니까 여러분, 주일날 드리는 예배는 별로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별로 사모함도 없고, 기대도 없고, 중요하게 여기지 않다가, 어느날 옆 교회에 아주 유명한 김윤진 간사가 찬양콘서트를 하러 온다더라, 아주 유명한 부흥강사가 온다더라 거기에 솔깃한다면, 그런 신앙은 아주 나쁜 신앙이다. 일상적인 것들 속에서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잘 되어야 한다. 일상적인 것들에서 연달아 실패하면서 기도원에 가서 한번 뜨겁게 기도하고, 수련회나 부흥회를 통해 이 불쌍한 인생이 뒤집어지길 기대한다면, 그 뜨겁게 경험했던 것은 내가 장담하건데 한달도 못되어 식어버릴 것이다. 일상적으로 여러분에게 주어진 것에서 은혜를 누리지 못한다면, 그래서 말씀을 읽고 묵상하고 설교를 듣는 일들을 통해서, 일상에서 잠잠히 하나님께 기도하는 일들을 통해서, 성례를 통해서 하나님이 주신 은혜의 수단들을 붙들지 않는다면, 다른 무엇을 통해서도 여러분 성공한 신앙을 살기 어렵다는 점을 기억하길 바란다.
마지막으로, 여러분의 신앙의 초점이 그러면 어디로 맞춰져야 하겠나? 일상의 은혜의 수단이다. 가장 기본적이고 가장 평범하며 가장 안전하고 가장 통상적인 수단에 맞춰져야 한다. 이 요소들이 앞으로 여러분들이 하나님께 부르심을 받는 그 날까지 신앙생활을 하는 동안에 너무나 중요한 것들이다. 물론 이 자리의 청년 여러분들의 삶이 얼마나 바쁘고, 얼마나 분주하고, 얼마나 즐길 거리들이 많은지 잘 안다. 그러나 그렇게 바쁘고 분주한 가운데에서도 여러분들이 최대한 하나님의 말씀이 공식적으로 선포되고 가르쳐지는 자리에 참여하려고 애쓰는 것이 되게 중요하다. 물론 내가 그 자리에 머문다 할지라도 그것이 기계적으로 은혜를 만들어내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말씀드렸다. 그러니까 여러분들이 신앙생활을 하시면서 말씀과 성례와 기도 늘 이 세 가지 끈을 붙잡고 계셔야 한다. 이것이 여러분들을 살린다.
그리고 이렇게 일상적인 것들 속에서 우리의 성화가 이루어진다. 그렇게 성령님께서 우리 안에 열매들을 맺어가시는데, 오늘 읽은 88문에서 보면, 그 효력이 우리에게 효과적으로 나타난다고 했다. 성령님께서 그리스도가 이루신 구속을 우리에게 적용하실 때 말씀을 사용하시고, 기도를 사용하시고, 성례들을 사용하셔서 성령의 열매를 맺어가신다는 것이다. 이 일은 일상적이고 외적이며 통상적 수단을 통해서 이루심을 기억하라. 앞으로 이제 말씀과 성례와 기도에 대해서 우리가 107문까지 살펴 보게 될 것이다.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지금으로부터 약 450년 전에 하나님께서 영국의 신학자들을 통해서 수년 동안 그 많은 사람들이 모여서 밥 먹고 회의하고 어떻게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을 온전하게 설명할 수 있고 가르칠 수 있는지를 연구하게 하셔서 저희들에게 이와 같이 귀한 믿음의 유산을 주신 거 감사합니다. 그것을 저희가 우리 말로 함께 나눌 수 있으니 그 또한 감사합니다.
하나님 아버지 참 한국교회가 물론 교단이 많이 있을지라도 같은 교단 안에서도 참 믿는 것이 다르고 개개인이 다른 것들을 봅니다. 주님께서 저희에게 주신 이 외적이고 통상적인 수단들을 통해서 은혜받는 일을 내려놓고 아주 특별한 방식으로 추구하게 되는 이런 기 현상들을 저희가 많이 봅니다. 하나님 아버지 하나님께서 이 진리의 말씀으로 먼저 우리 양청이 정말 하나가 되게 해 주시고 우리가 같은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을 분명하게 확인할 수 있는 그런 진리 안에서 하나가 되고 진리 안에서 서로 사랑하는 그런 복된 일들이 저희 안에서 많이 경험되게 해주셔서 주님 이와 같은 일들이 한국 교회 가운데에도 널리 드러날 수 있도록 전 세계의 교회 가운데 진리 안에서 하나가 되어 사랑하는 일들이 일어나게 하여 주시기를 원합니다. 하나님 아버지 평생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과 성례와 기도를 통해서 저희의 믿음이 자라게 해주시고, 성령의 열매가 저희 안에 풍성하게 맺어지는 복된 은혜를 저희 모두가 서로 함께 경험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앞으로 우리 청년들의 신앙 여정에서도 은혜의 수단을 사모하며 그것을 붙드는 삶이 되게 하시고, 늘 일상에서 은혜를 누리는 삶 살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Related Media
See more
Related Sermons
See mor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