뭐 먹을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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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피프리 아이들이 저에게 자주 하는 말 중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전도사님 때문에 살쪄서 큰일이에요!” 라는 말인데요. 금요일이든, 토요일이든 주일이든 아이들이 교회에 나오면 제가 아이들에게 습관적으로 하는 말이 ‘밥 먹었니?’ ‘뭐 먹고가라’라는 말을 하곤 합니다. 또 가끔 CCC사역 마치고 퇴근하다가 의정부나 도봉구 쪽을 지나가게 되면 평일에도 근처 사는 피프리 아이들에게 전화해서 뭐하냐고 밥 먹자고 연락해서 같이 밥을 자주 먹습니다.
누가 보면 밥 먹는거에 한이 있나 무슨 밥 먹자는 이야기를 저렇게 많이 하나 싶을 수도 있는데요.. 사실 제가 밥 먹는거에 한이 있다거나, 밥에 집착증이 있어서 그런것은 아니고 제가 받은 사랑, 제가 보고 배운 사랑이 그런거기 때문에 저 역시도 그렇게 ‘밥 먹고가라, 밥 먹자’라는 말을 많이 하는 것 같습니다.
CCC에서 학생으로 훈련 받을 때 CCC 선배들은 항상 후배들을 보면 ‘밥 먹었어? 밥 사줄게 같이 밥 먹자’라는 말을 정말 많이 합니다. 솔직히 그들도 대학생이고 돈이 그렇게 많지도 않은데 그렇게 CCC후배들을 보면 밥 먹자고, 밥 사주겠다고 이야기를 많이하곤 합니다. 저 역시도 CCC에서 선배들과 간사님들에게 그렇게 사랑을 받았고, 제가 선배가 되어서는 후배들을 그렇게 사랑해주었고, 사역자가 되어서도 동일하게 그런 모습들이 제 안에 나타나게 되는 것 같습니다.
도대체 CCC선배들은 왜 이렇게 밥을 먹고 가라고 했을까요?? 그리고 저 역시도 우리 피프리 친구들에게 ‘밥 먹자’고 왜 이렇게 많이 이야게하게 될까요??
돌아보면 사실 ‘먹는 행위’에 초점이 있기에 했던 말들은 아니었던것 같습니다. 저는 혼밥을 진짜 좋아하는 사람이거든요. 혼자 밥을 먹으면서 유투브를 보는 것 만큼 힐링이 되는 것도 없는데, 제가 먹는 행위에 초점이 있었다면 ‘밥 먹고 가’라는 말을 아이들에게 그렇게 하진 않았겠죠. CCC 선배들이, 그리고 제가 밥에 한이 있는 것도 아니고, 밥에 집착이 있는 것도 아닌데 ‘밥 먹고가’라고 입에 닳도록 이야기하는 이유는 사실 ‘무엇인가를 먹는 행위’에 초점이 있다기 보다는, ‘밥을 먹으면서 자연스럽게 가지게 되는 “인격과 인격의 교제”에 큰 의미가 있는 것 같습니다.
CCC선배들이 밥 먹을 사람이 없어서 밥을 같이 먹자고 하는 것도 아니고, 제가 혼밥을 싫어해서 아이들보고 밥을 먹자고 하는 것도 아니고!! 똑같은 대학생으로서 자신들도 돈이 없지만, 사역자로서 경제적으로 그렇게 넉넉하진 않아도! “밥 먹자”라는 말을 건내는 이유는 ‘밥이 아니라’ ‘너라는 인격과의 교제’를 원한다는 의미인 것이죠. 이것이 밥을 먹는 것의 의미인 것 같습니다. 먹는다는 행위이면에 더욱 깊은 뜻과 의미가 있는 것이죠.
이런 관점에서 우리가 오늘 말씀을 통해서 만나게 된 버가모 교회를 이해해보았으면 좋겠습니다. 피프리 공동체는 세대통합예배 때 계속해서 ‘요한계시록의 7편지’를 다루며 말씀을 살펴보고 있는데요. 지난 달까지 에베소, 서머나 교회를 향한 편지를 살펴보았고제 오늘은 3번째 편으인 “버가모 교회”를 향한 편지입니다.
초대 7교회의 7이라는 완전하고도 충만한 숫자를 통해서 이 편지들은 단순히 초대교회를 향한 편지가 아니라 예수님 재림하실 때까지의 모든 교회를 향한 편지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즉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이 편지는 버가모 교회를 넘어 피플스교회를 향한 편지인 것이죠.
오늘 말씀을 보면 버가모라는 지역에 대해서 예수님께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13절을 보니까 ‘네가 어디에 사는지를 내가 아노니 거기는 사탄의 권좌가 있는데라’라고 이야기하고 계십니다. 버가모 지역을 예수께서 사탄의 권좌로 부르시는 이유가 있습니다. 버가모는 소아시아 지역에서 최초로 황제숭배를 위한 신전을 세웠고 이를 “아데미 신전”이라고 부른 최초의 도시였습니다. 그뿐 아니라 버가모에는 치료의 신 ‘아스클레피오스’를 숭배하는 중심지였으며 그 외에도 수많은 이방 신전들이 세워져 온 갖 우상을 숭배했던 지역이 버가모였습니다. 그렇기에 예수께서는 버가모 지역을 ‘사탄의 권좌’라고 부르시고 계신 것이죠.
이러한 사탄의 권좌 위에 ‘하나님의 교회 버가모 교회’가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버가모 교회는 예수께 책망을 받을 것들이 있었는데요 한번 14절,15절의 말씀을 같이 읽어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러나 네게 두어가지 책망할 것이 있나니 거기 네게 발람의 교훈을 지키는 자들이 있도다 바람이 발락을 가르쳐 이스라엘 자손 앞에 걸림돌을 놓아 우상의 제물을 먹게 하였고 또 행음하게 하였느니라 이와 같이 네게도 니골라 당의 교훈을 지키는 자들이 있도다” 아멘
니골라당과 발람의 집단은 유사한 집단으로 이해하면 좋을 것 같습니다. 니골라라는 이름은 “사람들을 이기는 자”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고, 발람은 “사람들을 빼앗고 지배하는 자”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아무조록 니골라당, 그리고 발람의 집단이 버가모 교회를 혼란스럽게 만들고 있다는 것을 우리는 말씀을 통해서 확인하게 됩니다. 특별히 이들이 버가모 교회를 어떻게 혼란스럽게 만들었는가를 살펴볼 필요가 있는데요. 예수께서는 구약에서 자주 등장하는 ‘발람’이란 이름을 통해서 버가모 교회에 놓여져있는 혼란을 설명합니다.
구약에서 “발람”이라는 이름은 경제적인 이득을 위해서 하나님의 백성들을 우상숭배 관습에 참여시키려고 애쓴 거짓 선생을 의미하는 대명사로 사용됩니다. 즉 버가모 교회를 혼란스럽게하는 발람의 집단 그리고 니골라 당은 버가모 교회가 우상숭배의 관습에 참여토록 하며 그들을 죄악 가운데 빠지게 만드는 집단이라는 것을 보게 되는 것이죠.
특별히 당시 사회적인 배경을 볼 때 황제 숭배는 직간접적으로 경제활동과 연결이 되어있었습니다. 사도바울이 우상의 제물을 먹는 문제에 대해서 고린도전서에 이야기하고 있는 것에서도 보듯이 황제 숭배, 우상 숭배의 문제는 당시 사회 속에서 삶 속 깊숙이 다가와 있는 문제들이었습니다. 소아시아에서 이방인의 축제들은 황제나 다른 신들을 숭배하기 위해 열렸고 우상숭배와 음란한 일들이 축제 가운데 펼쳐졌으며 주민들은 여기에 참여하도록 강요받았던 것이죠.
그리고 여기에 참여하지 않으면 사회적인 활동이 축소되고 경제적인 불이익을 받게되는 그러한 시대적 배경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중에서도 최초로 황제 숭배를 위한 신전이 세워지고 수많은 이방 신들을 섬기는 지역인 버가모였다면 그러한 유혹과 문제들이 교회를 얼마나 많이 괴롭혔겠습니까?? 버가모 교회는 이러한 문제들 속에 놓여져 있던 것입니다. 단순히 우리가 동성애에축제에 가지 않는 그정도의 문제가 아니라, 이방신을 섬기고 황제를 숭배하는 축제에 참여하지 않으면 그리고 거기에서 우상의 제물들을 먹지 않으면 당장 사회생활이 어려워지는 그런 상황들 속에 놓여있는 것이죠.
이런 상황 속에서 믿음을 지켰던 신실한 성도도 있었음을 말씀을 통해 우리는 확인하게 됩니다.13절에 등장하는 ‘안디바’라는 성도인데요. 안디바는 이런 상황들 속에서 예수의 이름을 굳게 붙잡고 예수를 향한 믿음을 저버리지 않은 성도였습니다. 이렇게 신실함을 지키며 나아가는 성도가 버가모 교회 안에 있었던 반면에 그렇지 않고 타협으로 나아가는 성도들도 있었던 것이죠. 예수께서는 버가모 교회 안에서 모두가 안디바와 같지 않고 어쩔 수 없다는 이유로, 우상숭배와 황제 숭배에 가담하며 죄와 타협하는 자들을 지적하고 그들을 향한 회개를 촉구하고 계신 것이 바로 오늘의 말씀인 것입니다.
특별히 오늘 말씀 속에서 ‘우상을 숭배하는 문제’와 ‘여기서 돌이켜 회개하는 것’은 “먹는 것”이라는 이미지를 가지고 대치되어 나타납니다.
버가모 교회는 우상의 제물을 먹으며 발람의 교훈을 따랐습니다.
우리 한번 고린도전서 10:19-20절 말씀을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 그런즉 내가 무엇을 말하느냐 우상의 제물은 무엇이며 우상은 무엇이냐 무릇 이방인이 제사하는 것은 귀신에게하는 것이요 하나님께 제사하는 것이 아니니 나는 너희가 귀신과 교제하는 자가 되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라” 아멘
우상의 제물을 먹는 것에 대해서 바울 사도는 뭐라고 표현하고 있나요?? “귀신과 교제하는 것”이라고 표현을 하고 있습니다. 제가 앞서 서두에 밥을 먹는 것은 단순히 ‘먹는 행위’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 이면에 “인격과 인격의 교제”가 있는 것 같다 말씀드렸었죠. 이러한 모티브가 성경 속에서도 녹아져 있는 것이죠 “우상의 제물”을 먹는 것은 “귀신과의 교제”라고 바울 사도가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버가모 교회 안에 우상의 제물을 먹는 것을 타협하는 것은 단순히 먹는 의미를 넘어서 이러한 의미가 내포되어 있는 것이죠.
이러한 관점에서 예수께서 버가모 교회에게 말씀하시는 회개의 열매는 더욱 우리에게 부각되어 다가오게 됩니다. 계시록 2:17절 말씀을 같이 읽어볼까요??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감추었던 만나를 주고 또 흰 돌을 줄 터인데 그 돌 위에 새 이름을 기록한 것이 있나니 받는 자 밖에는 그 이름을 알 사람이 없느니라” 아멘
예수께서 회개하고 돌이키는 자에게 무엇을 약속하고 계신가요?? 바로 ‘감추었던 만나’를 약속하고 계십니다. 이는 훗날 ‘어린양의 혼인 잔치’에서 온전하게 먹게 될 음식입니다. 어린양의 신부로서 우리에게 주어진 교제의 떡이죠. 예수께서는 구약의 이스라엘이 먹었던 만나가 자신의 몸으로 대체 되었음을 오병이어의 기적을 통해서 이미 밝히 말씀하셨고 이 감추어진 만나가 우리에게 구원의 선물로 주어진 것이죠.
즉 감추어진 만나의 진정한 의미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이는 곧 그리스도와의 교제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주님이 재림하셔서 하나님 나라를 완성하실 때 누릴 우리의 선물이며 동시에 이 땅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성찬”이란 성례로 허락하신 귀중한 음식이요, 그리스도와의 연합인 것이죠.
버가모 교회는 우상의 제물을 먹으며 ‘귀신과의 교제’로 나아갈 것인가 아니면 타협하고 있는 모든 죄에서 돌이켜 주님의 몸을 먹으며 ‘그리스도와의 교제’로 나아갈 것인가라는 도전과 권면 앞에 놓여져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편지는 비단 버가모 교회를 향한 편지가 아니라 7이라는 완전하고 충만한 숫자를 통해서 보았을 때 우리 교회를 향한 편지임을 말씀 드렸습니다. 제가 특별히 설교의 제목을 “뭐 먹을래?”라고 정했는데요. 오늘 이시간 여러분을 향해서도 여쭙고 싶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무엇을 드시겠습니까?”
여러분의 삶 속에서 외면하고 타협하고 있는 우상의 제물을 드시겠습니까? 하나님의 자녀로서 우리에게 허락하신 영생의 만나,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드시겠습니까??
오늘 날 우상숭배의 형태가 초대교회 당시와는 같지 않죠. 하지만 우리가 알면서 외면하고 알면서도 타협하는 수많은 죄악들이 영적인 간음이요, 우상숭배와 다를 것이 없는 죄라는 사실은 모두가 동의할 것 입니다. 이는 말씀을 전하고 있는 저도 자유할 수 없는 것 같습니다.
저의 삶 속에서도 여전히 타협하고 모른척 나아가며 반복해서 짓는 죄악들이 무수히 많기 때문이죠. 하지만 오늘 말씀을 통해서 예수님은 우리를 향해 회개를 촉구하시며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먹고 마실 것을 말씀하십니다. 즉 그 모든 죄에서 돌이켜 그리스도와의 깊은 교제 가운데로 나아오라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이렇게 그리스도와의 깊은 교제로 나아오는 자는 결국 승리할 것이며, 승리의 열매로 우리에게 감추어진 만나가 훗날 허락될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특별히 감추어진 만나와 더불어 우리에게 약속된 또 하나의 선물이 있는데 바로 ‘흰 돌과 그 위에 새겨진 새 이름’입니다.
17절이 이야기하고 있는 ‘흰 돌’을 이해하려면 유대인들의 관습을 이해해야하는데요.
유대인들은 누군가를 석방할 때 ‘돌’을 투표의 도구로 이용했고 특별히 흰 색돌은 어떤 특별한 일이 있을 때 그것을 승인한다는 표시로 ‘흰 돌’을 사용하곤 했습니다. 이러한 관습에 비추어 보았을 때 타협하는 모든 죄에서 돌이키는 자에게 약속된 ‘흰 돌’은 세상에서 황제 숭배를 거부한 자들, 그로 인해 받게 되는 온 갖 불이익과 핍박들로 부터 예수께서 허락하시는 “자유의 석방”을 의미하는 것이며, 세상이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행한 모든 것을 뒤집는 역전의 판결인 것입니다.
그리고 그 역전의 판결의 돌 위에 새겨진 ‘새이름’은 계시록 3:12절을 요약한 표현인데요. 이 새이름은 “예수 그리스도”를 의미합니다. 즉 예수의 이름이 새겨진 흰 돌을 약속하고 계신 것이죠. 이는 곧 예수의 이름이 세상의 모든 것을 뒤집는 역전의 판결을 내리며 하나님의 자녀들을 어린양의 혼인잔치로 초대하시고 그 가운데 영원한 만나를 주실 것임을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다시한번 여러분에게 여쭤보고 싶습니다.
여러분은 무엇을 드시겠습니까??
세상의 가치를 따르며 세상의 문화에 타협하며 죄악 가운데 살아가는, 우상의 제물을 드시겠습니까?? 아니면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먹고 마시며 그리스도와의 교제 가운데 살아가시겠습니까?
우상의 제물을 드신다면 이 세상 가운데서 어쩌면 손해보지 않고 나름대로 잘 먹고 잘 살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이들에게는 예수의 이름으로 말미 암는 역전의 판결과 감추어진 만나의 약속은 주어져있지 않죠.
반면에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먹고 마시는, 예수와 교제 하는 자는 이 세상에서 어쩌면 그 믿음으로 인해 손해를 보며 바보 처럼 살아는 모습일 수 있겠습니다. 하지만 이들에게 예수의 이름이 주어지며 모든 것을 뒤집는 하나님의 역전의 판결이 약속되어있고 영생의 만나가 허락되어져 있습니다.
여러분은 무엇을 드시겠습니까??
저는 굉장히 이성적인 사람이여서 제가 봤을 때는 사실 이 세상에서 잘 먹고 잘 사는 것이 더 중요한 것 같습니다. 이것이 저는 죄인의 이성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요 정말 이성적인 사람인 제가 봐도 좀 타협하면서 이 세상에서 잘 먹고 잘 사는게 맞아보이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눈에 보이는 세상의 가치보다 눈에 보이지 않는 영원의 가치에 우리의 삶을 드려 살아가고 싶어지는 것은 우리가 구원받은 이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란 생각이 듭니다.
세상적으로 보았을 때 미련해보이고, 이해되지 않는 삶의 모습이 어쩌면 그리스도인의 삶일 수 있겠습니다. 하지만, 그러한 미련한 삶으로 한걸음 한걸음 걸어가게 되며, 오히려 미련해 보이는 이러한 삶의 모습을 소망하게 되는 것은 우리에게 이미 예수 그리스도라는 새 이름이 허락된, 구원 받은 이성을 가진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죽을 힘을 다해 예수님과의 교제에 힘쓰며 나아갑시다. 결국 죄와 타협하지 않고 안디바와 같이 믿음을 지킬 수 있는 힘은 그리스도 예수와의 깊이 있는 교제로부터 말미 암는다는 것을 기억하며 나아갑시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당신의 살과 피라는 영생의 만나를 주셨으며 이를 통해 우리의 구원은 시작되었으며, 이 믿음의 여정의 끝에서 예수께서 우리를 향해 감추어진 만나와 주님의 이름이 적힌 흰 돌을 주시며 우리의 모든 구원을 완성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 앞에 나아가는 것을 사모하십시요. 하나님께 기도하는 시간을 매일 매일 반드시 가지며 나아가시길 부탁드립니다. 그리고 그 속에서 하나님과의 교제의 달콤함을 깊이 누리며 나아시길 부탁드립니다. 여러분 하나님과의 교제는 단순히 말씀을 읽고 기도를 하는 행위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살아계셔서 우리의 삶과 인생 가운데 깊숙이 말씀하심으로 다가오십니다. 이것은 제가 강한 확신을 가지고 말씀 드릴 수 있습니다.
이 이야기만 드리고 말씀을 마무리하도록 하겠습니다.
우리가 흔히 말씀을 읽고, 기도를 하는 것을 하나님과의 교제라고 이야기하지만 그것이 우리의 삶에 깊숙히 다가옴을 경험하기보다 그저 종교적인 행위에 그침으로 나아갈 때가 많은 것 같습니다. 그렇기에 하나님의 말씀을 가까이하고 기도를 하는 것들이 지루하고 재미없는 것으로 다가올 때가 많죠. 하지만 제가 경험한 신앙의 경험은 절대 그렇지 않다는 것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제가 올 봄 쯤에 하나님이 너무 원망스럽고 실망스러워서 개인의 기도의 자리에서 이렇게 기도했던 적이 있습니다. “하나님, 하나님께서 저에게 이런식으로 대하시면 저는 앞으로 하나님의 일 못합니다. 이런식으로 역사하시는 분을 제가 도대체 어떻게 증거하고 하나님에 대해서 증언할 수 있겠습니까? 저는 절대 못합니다. 아니 안합니다!!”라고 기도하며 나아갔던 적이 있습니다.
저는 매주 마커스 예배를 목요일마다 유트브로 드리는 신앙의 루틴을 가지고 있는데 그게 바로 위와 같은 기도를 드린 다음 날이었습니다. 습관에 따라서 마커스 목요 예배를 드리며 설교 말씀을 듣는데, 그 말씀을 통해서 정확하게 하나님이 말씀하시더라고요. “그래도! 나를 증언해야지! 그게 네가 해야할 일이 아니냐!!”라는 말씀을 말이죠.
어떤 하나님의 신비적인 음성이 귀에 들렸다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허락하신 기록된 말씀을 묵상하는 가운데, 또는 그 말씀을 선포하는 말씀 사역자를 통해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시며 우리의 삶의 순간 순간을 이끌어 가신다는 것을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비단 이러한 일 뿐만 아니라 정말 많은 순간 순간 저는 기도로 하나님께 아뢰고, 하나님은 매일의 QT나 또는 설교를 통해서 그에 대한 말씀을 주시는 하나님과의 교제를 정말 많이 합니다.
이것을 경험한다면 하나님과의 교제가 얼마나 달콤한지 알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 기도를 하게되고, 또 하나님의 말씀 앞으로 나아가게 될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제가 매일 같이 성령 충만함으로 살아가냐?? 그렇지 않죠. 여전히 부족하기에 오늘도 넘어지고 무너지는 부족한 모습을 보입니다. 하지만 그렇게 무너져있을 때 조차도 하나님은 제게 당신의 말씀을 허락하시며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저를 돌이키시며 끝까지 끌고 나아가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에게 허락된 영생의 만나,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며 날마다 그리스도와의 교제에 힘씀으로 나아갑시다. 매일의 QT의 자리를 사수하시고, 예배의 자리를 사모하시고, 또 개인의 자리에서 기도하기를 힘쓰며 하나님과의 깊은 교제로 나아갑시다. 하나님과의 교제가 우리가 죄와 싸워 이길 힘이며, 주님 다시 오실 날 까지 우리의 믿음을 지켜나갈 비결입니다. 이러한 은혜가 우리 교회 가운데 넘쳐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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