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배가 주는 안정감 가운데 일어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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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그 후에 유대인의 명절이 되어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올라가시니라
2 예루살렘에 있는 양문 곁에 히브리 말로 베데스다라 하는 못이 있는데 거기 행각 다섯이 있고
3 그 안에 많은 병자, 맹인, 다리 저는 사람, 혈기 마른 사람들이 누워 [물의 움직임을 기다리니
4 이는 천사가 가끔 못에 내려와 물을 움직이게 하는데 움직인 후에 먼저 들어가는 자는 어떤 병에 걸렸든지 낫게 됨이러라]
5 거기 서른여덟 해 된 병자가 있더라
6 예수께서 그 누운 것을 보시고 병이 벌써 오래된 줄 아시고 이르시되 네가 낫고자 하느냐
7 병자가 대답하되 주여 물이 움직일 때에 나를 못에 넣어 주는 사람이 없어 내가 가는 동안에 다른 사람이 먼저 내려가나이다
8 예수께서 이르시되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하시니
9 그 사람이 곧 나아서 자리를 들고 걸어가니라 이 날은 안식일이니
M3 : 본문의 사건을 오늘날로 연관하라
M3 : 본문의 사건을 오늘날로 연관하라
M1 : 본문의 사건을 전개하라
M1 : 본문의 사건을 전개하라
양문 곁에 베데스다 못에서 있었던 이야기
예수님은 명절이 되시자 예루살렘으로 다시 올라가십니다.
이 명절은 어떤 명절일지 정확히 알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당시 유대인들은 명절이 되면 예루살렘으로 모이죠.
오늘 이야기는 예루살렘에 있는 ‘양문’이라고 하는 문 곁에 ‘베데스다’라는 연못가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거기서 예수님은 수많은 병자들을 마주하게 됩니다.
베데스다라는 못에는 어떤 미신 신앙이 있었던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 미신 신앙의 내용은 뭐냐면 베데스다 연못이 한번씩 간헐적으로 흔들리는 거에요. 그러면 그게 천사가 연못에 닿아서 생기는 현상이라고 믿는 겁니다.
그리고 그 천사가 연못에 닿으면 천사의 능력이 연못에 생기는데 그 능력은 바로 어떤 병이든 치유하는 능력인 겁니다.
그래서 병자들이 그 연못에서 준비하고 있는 겁니다. 물이 움직일 때까지요. 그리고 그 연못이 움직이고 난 다음 선착순 한명만 병이 치유되는 겁니다.
예수님 당시에 많은 미신 신앙이 있었다고 수많은 고대 문헌들에서 그 출처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 미신 신앙들이 유대인들의 신앙 안에서도 마찬가지로 이루어지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천사는 이방 종교에서도 곧잘 등장하지만, 무엇보다 베데스다 연못의 위치가 예루살렘 성전의 근처라는 점을 감안하면, 유대인 신앙 안에서 왜곡된 미신 신앙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 왜곡된 미신 신앙이 천사에게 특별한 능력을 부여하고 베데스다 연못이 그런 미신 신앙의 장소가 되어버린 것입니다.
여러분 사실 이 연못은 간헐천이라고 하는데, 지금으로 생각하면 온천의 원리와 비슷한 현상으로 생기는 연못인거에요.
그래서 그 온천에서 물이 나오듯이 어쩌다 한번씩 물이 솟구쳐 오르는거죠.
우리가 이제는 과학이 많이 발전했으니까, 이게 단순히 간헐천이라고는 생각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곳에서 기다리는 병자들을 보면 어리석다고 생각할 수 있겠죠. 왜냐하면 그 간헐천은 진짜 병을 치유하는 능력이 있는게 아니고 과학적으로 온천의 원리에 의해서 가끔 솟구쳐오르는 간헐천일 뿐이니까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시 병자들은 그 미신적인 신앙을 가지고 그곳에 머무르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병자들은 그곳에서 숙박을 합니다. 그러면 그들은 도대체 어떻게 먹을 것을 구할까요?
그곳에서 구걸하거나, 어떻게든 얻어먹는 생활을 하는 겁니다. 예루살렘 성전 근처죠. 그러면 유대인들이 많을 것입니다. 그 다니는 유대인들, 그들에게 빌어먹고 사는 것입니다.
이 병자들은 병이 진짜로 치료될지 완전히 확신할 수 없지만 그래도 실낱같은 희망을 가지고, 그 베데스다 연못 근처에서 자신의 삶을 살아가며, 구걸하며 겨우 생을 유지하는 자들이었습니다.
M2 : 본문의 위기를 보여주라
M2 : 본문의 위기를 보여주라
맹인, 다리 저는 사람, 혈기 마른 사람들
베데스다 못의 의미는 “자비(은혜)의 집”이다. 자비의 집에 있는 자들이 맹인, 다리 저는 사람, 혈기 마른 사람들이었다.
간헐천에 몸을 담그기 위해 필요한 것은 무엇인가?
예민한 시각
반응하고 움직일 수 있는 몸
움직이는데 필요한 에너지(혈기)
그러나 정작 “자비의 집”에 있었던 자들은 몸을 담그기 위해 필요한 것들이 없는 자들이었다.
이곳은 이름은 “자비의 집”이지만, 자신의 병을 치료하기 위해서 끝없이 경쟁하며 결국 경쟁에서 도태된 자들이 여전히 병을 가지고 있는 무자비한 공간이다.
자비의 집은 이름만 자비일 뿐 실상은 무자비함이며, 경쟁 속에서 도태된 패배자들만 가득한 곳이다.
이 병자들의 삶은 구걸하는 패배자의 삶이었습니다.
그들은 자비의 집에서 생활하는 자들이었지만, 그들에게 자비는 없었습니다. 무자비한 경쟁 속에서 항상 패배하는 삶을 살아가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그곳을 떠날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에겐 그곳이 유일한 희망이거든요.
그런데 사실 어쩌면요. 그 병자들은 그곳을 떠나고 싶어도 떠날 수 없는 자들이 되어버렸을 것입니다.
그들은 그곳의 자발적 노예가 된겁니다.
오늘의 주인공인 38년 동안 병을 가지고 있던 병자가 예수님을 만납니다.
예수님이 그 병자에게 이렇게 묻습니다.
요한복음 5:6 (NKRV)
6 예수께서 그 누운 것을 보시고 병이 벌써 오래된 줄 아시고 이르시되 네가 낫고자 하느냐
예수님이 병자에게 “네가 낫고 싶냐?”라고 물어보십니다.
당연히 낫고싶겠죠. 병을 그렇게 오래 가지고 살아왔는데 당연히 낫고싶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병자의 말을 잘 생각해보면 예수님이 어떤 의도로 질문하셨는지 알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 5:7 (NKRV)
7 병자가 대답하되 주여 물이 움직일 때에 나를 못에 넣어 주는 사람이 없어 내가 가는 동안에 다른 사람이 먼저 내려가나이다
사실 그가 베데스다 연못에 있으면서 병이 나을 수 있는 가능성은 0%이다.
베데스다 연못은 사람들이 믿고 있었던 것과는 달리 그렇게 병을 낫게 할 능력이 없을 뿐만 아니라, 설사 백 번 양보해서 그 소문이 사실이었다고 할지라도 그는 제일 먼저 연못 속으로 들어갈 수 없었다.
그런데 왜 그는 거기에 있는 것인가? 병이 낫기 위해 있는 것이 아니라, 그곳이 자신의 생활에 일부가 되어 버렸기 때문일 것이다.
딱히 어디 다른 곳에 갈 수도 없고, 자신의 삶이 된 그곳을 떠날 용기가 없었다. 만일 병에서 정말 낫게 된다면 어떻게 될 것인가? 이제는 더 이상 구걸도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래서 그는 병이 낫지 않는 것이 더 낫겠다는 무의식적 결단을 하고 있었고, 자신이 병에서 나을 수 없는 여러 가지 핑계만을 만들어내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병자들은 계속된 무자비한 경쟁 속에서 계속해서 패배하는 그 공간 안에서 적응해서, 그 패배의 공간 속 안정감에 안주하는 자들인 것입니다.
모순적이지만 그것이 그들에게 나타나는 모습인거죠. 희망을 놓아버리지 못하는 것 같아 보입니다. 그러나 그 속에는 사실 그 비참한 공간 안에서도 적응하여 안정감을 찾는 것이죠.
병이 낫고 난 이후의 삶이 지금의 삶보다 더 나을 것이라는 확신이 없는 가운데 그들은 무자비한 공간 안에서의 패배를 택했습니다. 패배가 주는 역설적인 안정감을 택했습니다.
그것이 베데스다 연못의 병자들의 삶이었습니다.
M4 : 본문의 위기가 오늘날의 위기임을 느끼게 하라
M4 : 본문의 위기가 오늘날의 위기임을 느끼게 하라
자신이 바라는 이상에 자발적 노예가 된 현대인들
우리는 베데스다 연못의 병자들을 통해서 우리를 다시 돌아보게 됩니다.
우리가 바로 베데스다 연못의 병자들과 같을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세상은 무언가 얻고싶은 것이 있을 때 그것을 얻기 위해서 무자비한 경쟁 속에서 살아가야하는 세상입니다.
우리는 건강했으면 좋겠다는 소망이 있다. 하지만 건강해지기 위해서 운동을 실행하는 결단까지 하기는 어렵다. 저녁을 먹고 소파에 누워 텔레비전을 즐기는 그 편안함을 포기하고는 싶지 않기 때문이다.
살을 빼고 싶지만, 지금 내 눈 앞에 있는 맛있는 음식에 대한 탐욕을 제어기 어려워 늘 다이어트는 내일부터 시작하기로 하는 것이다.
우리 가정이 행복한 가정이 되기를 소망하지만, 그렇게 되기 위해서 내가 짊어져야 할 수고는 하기 싫다.
교회가 부흥하기를 소망하지만, 누군가 새로운 사람이 와서 교회 내에서 내가 차지하던 자리를 누리고 지금까지 편안하게 느껴졌던 교회의 분위기에 새로운 사람이 나타나 설치는 모습을 용납하고 싶지는 않는 것이다.
젊은이들이 교회 안에 많았으면 하는 소망을 가지고 있지만, 그들의 생각을 이해하며 나의 기득권을 내려놓기는 싫은 것이다.
너무나도 뼈아픈 얘기지만 우리의 삶은 실제로 이러한 모습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M5 : 본문에 나타난 구원자 하나님과 믿음의 반응을 보여주라
M5 : 본문에 나타난 구원자 하나님과 믿음의 반응을 보여주라
자발적인 노예가 된 베데스다 연못의 병자에게 예수님은 어떤 일을 하시나요?
요한복음 5:8 (NKRV)
8 예수께서 이르시되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하시니
예수님은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이미 그 패배의 장소에서 안정감을 찾았던, 실은 병을 낫고싶지 않았을 수도 있는 그 장소에서 병자를 고치십니다.
무슨 일이 벌어진 것입니까?
병이 나았죠. 네 먼저 병은 나았습니다.
그런데 본질적으로 이 일은 단순히 병이 나은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 병자가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자발적 노예였습니다.
병 때문에 찾아가긴 했지만 사실은 자신을 패배자로 만드는 장소를 혐오하고 증오하기는 커녕 그 안에서 구걸해서 살아가는 삶에서 안정감을 느꼈던 자발적 노예를 일으키십니다.
저는 예수님이 병자에게 “네 병이 고쳐졌다”라고 말씀하시지 않은 분명한 이유가 있다고 확신합니다.
예수님은 일부로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실 병자에게 필요했던 것은 단순히 병이 낫는 것이 아닙니다. 그 패배자의 안정감을 가지고있던 그 마음이 새롭게 되는 것이었습니다.
병이 치유될 뿐만 아니라 패배자로서의 안정감을 던져버리고, 새로운 마음으로 거듭나는 것, 새창조가 일어난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님이 병자에게 뭐라고 물었었나요?
6 예수께서 그 누운 것을 보시고 병이 벌써 오래된 줄 아시고 이르시되 네가 낫고자 하느냐
예수님은 정말로 낫고싶은지 물어보십니다. 이 질문 속에 담긴 의미가 무엇입니까?
단순히 병을 낫고싶은지 물어보는게 아니라, 정말로 그 생활을 청산해버리고 싶은지 물으시는거죠.
이제 그 연못이 헛된 것임을 앎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그 삶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 것을 앎에도 불구하고. 그곳에서 살아가면 어느정도 안정감을 느낄 수 있으니까 그것을 바라는 삶을 청산하고 싶은지 물어보는 것입니다.
그리고나서 예수님은 바로 그 일을 행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구원, 새창조가 일어나면 어떤 일이 일어납니까? 패배가 주는 안정감을 버리고 일어납니다.
이름으로만 “자비의 집”이었던 베데스다에서 일어나 진정한 “자비의 집”인 예수 그리스도를 향해 걸어갑니다.
스스로를 패배자로 만들었던 노예 근성에서 벗어나 진정한 구원받은 자유인으로서 그의 삶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 힘으로 살아나가게 됩니다.
병자의 삶의 외부적 상황은 병이 나은 것 이외에는 변함이 없을 것입니다.
그가 살아갈 환경이 변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 병자는 이제 예수님이 주신 그 은혜로, 그 은혜가 주는 힘으로 일어나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이 주시는 그 구원의 은혜는 병자의 삶을 움직이는 원동력이 됩니다.
M6 : 동일한 구원자 하나님과 우리에게 필요한 믿음의 반응을 제시하
M6 : 동일한 구원자 하나님과 우리에게 필요한 믿음의 반응을 제시하
청년 여러분.
예수님께서 주시는 구원의 은혜는 단지 병을 치유하는 그 정도의 능력으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주시는 구원의 은혜는 우리가 마땅히 소망하는 바는 있지만 그것을 위해 움직이지 못했던 우리의 모습을 변화시키는 능력입니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물어보십니다.
“너 진짜로 돈을 벌고싶니?”
“너 진짜로 세상 가운데 성공한 모습 보여주고싶니?”
“너 진짜로 건강해지고싶니?”
“너 진짜로 너의 가정이 행복해지고싶니?”
“너 진짜로 교회가 부흥했으면 좋겠니?”
그 질문 앞에서 여러분 그렇다고 대답할지라도 그 마음 깊은 곳 가운데 실상은 얻고싶어하면서도, 움직이지 않는 그 행동. 그 행동이 주는 안정감에 안주하고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주시는 은혜는 무엇인가요? 일어나서 걷게 하십니다. 들고 일어나게 하십니다.
우리가 그 어줍짢은 우리가 소망하고 바라는 그것들을 이제 베데스다 연못에서 얼쩡거려서 얻을 것들은 없는겁니다.
이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와 만났다면 자유인의 삶, 자리를 들고 걸어가는 삶이 됩니다. 그것이 은혜를 받은 자의 삶이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의 삶이 바로 이런 것입니다.
무자비함의 세상 속, 그 경쟁 가운데에서도 아무 것도 얻을 수 없는 것을 속으로는 인정하면서도, 그 삶이 주는 나름의 안정감 속에서 살아가는 자들은 은혜로 살아가는 자들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은혜로 살아가는 자들은 그 패배의 삶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일어나서 걷는 자들의 삶이죠.
베데스다의 병자들은 사실상 병이 문제가 아닙니다. 그들의 마음의 그 패배가 주는 안정감. 그것에 안주하는 것이 문제죠.
우리들의 문제도 사실은 치열한 경쟁 속에서 살아가는 그 삶이 문제가 아닙니다. 그안에서 나름의 안정감에 머물러 있는 것이 문제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자리에서 일어나야 하는 은혜를 받은 자들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살아가는 힘은 예수 그리스도로 인한 것입니다.
스톡홀름 신드롬이라는 말을 아시나요?
어떤 자신에게 범죄를 행한 범죄자를 마음으로 동정하게 돼서, 그 범죄자에게 연민의 감정을 느끼고, 그 범죄자에게 동조하는 증후군입니다.
예를 들어 어떤 납치범이 여자를 납치했는데, 그 여자가 납치범에게 연민의 감정을 느끼고, 동조하게 되는거죠.
실제로 이게 종종 벌어지는데, 왜 이런 현상이 발생하냐면 심리학자들의 의견인데요. 그 납치가 된 상황은 상당히 극심한 스트레스와 압박감을 주게 되죠. 납치당한 사람은 극심한 스트레스의 상황 속에서 납치범이 주는 호의 예를 들면 식사를 제공한다던가, 나름대로 친절하게 베푼다던가 하는거죠.ㅣ
그러면 그 납치당한 사람은 스트레스 상황에서 받는 신체적 반응 심박수가 증가한다던가, 긴장하게 된다던가 하는 이런 몸의 반응이 이성을 좋아할 때 발생하는 몸의 현상과 비슷해서 뇌가 착각을 일으키는겁니다.
그러면 그 호의를 베푸는 범죄자의 행동과 뇌의 착각으로 범죄자에게 호감을 가지게 되고, 범죄 행위를 옹호하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 얘기를 왜 하겠습니까?
그 무자비한 세상의 계속되는 패배 속에서도 그것이 주는 나름의 안정감 가운데 살아가는 모습이 마치 스톡홀름 신드롬에 빠진 사람과 같은겁니다.
세상이 주는 것은 사실 패배입니다. 계속되는 패배감이죠. 그런데도 그 안에서 나름대로 안정감을 주는 무언가가 있죠.
정작 진짜 얻고싶은 것이 있었는데도 나름대로 주는 그 안정감 때문에 그곳을 못벗어나는겁니다.
세상 사람들이 그렇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 가운데 은혜로 그들을 건지시는 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은혜를 베푸신다면, 그 안정감이 주는 마치 마약에 중독돼서 헤어나오지 못하는 상황을 박차고 자리에서 일어나게 하시는 것입니다.
청년 여러분. 세상 가운데 세상이 주는 패배의 평안함에 만족하시던 분이 있습니까? 사실 그게 진정한 행복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싸구려 행복에 만족하시던 분이 있으십니까?
예수님이 주시는 은혜는 온전한 평안함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