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의 평강, 말씀 그리고 이름(골 3:1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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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의 평강, 말씀 그리고 이름(골 3:15-17)
INTRODUCTION:
(Image) 두 화가가 평화(eivrh,nh, peace)를 주제로 한 그림대회에 참가했습니다.
한 화가는 넓고 고요한 호수 위로 태양이 넘어가는 고즈넉한(quiet) 저녁 풍경을 그렸습니다.
너무나 아름다운 풍경을 그려냈고, 누가 보아도 ‘평화란 이런 것이야!’라는 생각이 들게 했습니다.
그런데 또 다른 화가는 폭풍이 몰아치는 장면으로 자신의 캔버스를 가득 채웠습니다.
태양 빛이 사라져 온통 시꺼멓게 변한 하늘에 천둥과 번개가 난무했습니다.
금방이라도 온 땅을 삼킬 것 같은 검은 먹구름이 이리저리 몰려다니고 있었습니다.
강한 바람에 휩쓸려가는 돌덩이들은 서로 무서운 기세로 부딪히며 불꽃을 만들어 내기도 했습니다.
평화는커녕 혼돈과 불안 그 자체였습니다.
그런데 그 그림 밑부분에 두 개의 큰 바위가 놓여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바위 사이에 새 한 마리가 평화롭게 날고 있었습니다.
하늘에서 벌어지는 폭풍과는 전혀 상관 없는 듯, 그곳에서 아름다운 목소리로 지절거리고 있었습니다.
(Need)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렇다면 오늘 우리의 삶은 과연 어떻습니까?
진정한 평화가 경험되고 있습니까?
삶의 모든 소란스러움을 잠재우는 그런 평화가 있습니까?
혹시 걷잡을 수 없는 혼돈과 불안이 여러분의 삶을 지배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만약 그렇다면 우리가 평화를 잃어버리고 혼돈 속에 빠져드는 가장 큰 이유는 과연 무엇일까요?
무엇 때문에 우리는 불안과 초조함을 감추지 못하는 것일까요?
그것은 다름 아니라 우리 안에 그리스도의 평강이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그리스도의 말씀이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거기에다 모든 일을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행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평화를 상실한 채 혼돈과 불안 속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Subject) 오늘 본문 골로새서 3:15-17은 새 사람이 된 우리가 어떻게 우리 삶의 모든 불안을 잠재울 수 있는 지를 말씀합니다.
다시 말해서 새 사람이 된 우리가 추구해야 할 삶의 모습이 어떤 것인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그리스도의 평강이 우리의 마음을 다스리게 하는 것입니다.
또한 그리스도의 말씀이 우리 가운데 풍성히 거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말이든 일이든 다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행하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말하면 그리스도 중심의 삶을 우리가 살아내는 것입니다.
(Text & Preview) 이처럼 새 사람이 된 우리가 그리스도 중심의 삶을 살 것을 요청하는 오늘 본문 골로새서 3:15-17을 통해 우리는 다음과 같은 새 사람의 충분조건 몇 가지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먼저, 그리스도의 평강이 우리의 마음을 다스리게 하는 것입니다(15).
둘째, 그리스도의 말씀이 우리 속에 풍성히 거하게 하는 것입니다(16).
끝으로, 무엇을 하든지 다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하고,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입니다(17).
BODY:
(Background) 사도바울은 오늘 본문을 통해서도 새 사람을 덧입은 성도들이 힘써야 할 삶의 모습이 어떤 것인지를 계속 말씀하고 있습니다.
지난 주에 살펴 보았지만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요, 거룩한 자요, 사랑 받는 자들이라면 성도들은 당연히 긍휼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을 옷 입고 용납과 용서, 그리고 사랑의 삶을 힘써야 합니다(12-14).
그러나 이것만이 전부가 아닙니다.
교회 공동체 전체가 새롭게 되기 위해서는 또 다른 경건의 연습들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그런 노력은 각 가정 안으로까지 확산되어야 합니다.
바로 그 사실을 오늘 본문 3:15-17과 이어지는 3:18-4:1이 말씀하고 있습니다.
(Exegesis) 이런 흐름 속에서 오늘 본문은 특별히 새 사람이 되어 그리스도의 중심의 삶을 힘쓰는 우리가 갖추어야 할 또 다른 충분조건을 세 가지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 첫 번째는,
I. 그리스도의 평강이 우리의 마음을 다스리게 하는 것입니다(15).
본문 15절이 바로 그 사실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의 평강’ 곧 ‘예수님의 평화’는 과연 어떤 것입니까?
그것은 십자가를 통해 하나님과 마음으로까지 원수 되었던 우리를 하나님과 화목(화해)하게 하심으로 이룬 평화입니다(골 1:20-22).
뿐만 아니라, 우리 서로 간에 놓여 서로 원수가 되게 했던 중간에 막힌 담을 자신의 육체로 무너뜨리시고 이루어 내신 그런 평화입니다(엡 2:14).
그래서 예수님의 별명이 ‘평강의 왕(the Prince of Peace)’이며(사 9:6), ‘평강의 주(the Lord of peace)’인 것입니다(살후 3:16).
사도바울은 골로새교회 성도들을 향해 이런 그리스도의 평화가 저들의 마음을 주장하게 하라고 요청했습니다(15).
여기서 ‘주장한다(brabeu,w, rule, judge, control)’는 것은 ‘다스리며’(rule), ‘통제하는’(control) 것을 의미합니다.
또 다른 의미로는 ‘결정적인 요소가 되게 한다’(be a decisive factor)는 것입니다.
또한 ‘중재자(arbiter)가 되게 한다’는 의미도 가지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평강이 마음을 주장하게 한다는 것은 공동체 안에서 서로 관심이나 이익이 충돌할 때, 평화를 우선적으로 고려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새 사람의 특성 중 하나인 평화는 우리의 내면을 다스리는 원리인 동시에 교회 공동체의 지체들간의 관계 속에서도 동일하게 적용되어야 하는 원리입니다.
이런 평화는 예수님을 통해 실현되었고, 또한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요한복음 14:27에서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27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세상이 주는 것과는 전혀 다른 평안 곧 평화를 주시는 분이 바로 예수님 자신이라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사도바울 또한 데살로니가후서 3:16에서 성도들을 향해 ‘평강의 주께서 친히 때마다, 일마다 너희에게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라며 복을 빌었습니다.
그런데 성도들이 이토록 평화를 갈망해야 하는 이유는 과연 무엇일까요?
그것은 다름아니라 성도들은 모두 그리스도 안에서 평화를 이루는 한 몸으로 부르심을 받았기 때문입니다(15b).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을 선택하실 때에 단지 저와 여러분이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 만을 위해 선택하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선택하신 것은 우리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삶을 살게 하시기 위해 선택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그 삶이 바로 우리 서로가 하나되는 것입니다.
15절에 따르면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 된 우리가 서로 진정한 평화를 이루며 살게 하시기 위해 선택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15절 끝부분을 보면 바로 그 사실 때문에 감사해야 한다고 말씀합니다.
사실 함께 그리스도 안에 있지만 우리가 서로 평화를 이루는 것이 말처럼 그렇게 쉽지 않습니다.
많은 수고와 희생, 양보가 있어야 진정한 평화가 찾아오는 법입니다.
내 자존심을 죽이고, 내가 손해 볼 각오를 해야 서로 간에 평화를 이룰 수 있습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우리의 삶에 평화를 주시기 위해 하나님께서 지불하셨던 값비싼 대가를 통해 하나님께서 우리를 자녀로 불러주셨을 뿐만 아니라 서로 평화를 이루는 소명을 주셨다는 그 사실 때문에 감사하라고 당부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저와 여러분이 정말 그리스도 중심의 삶을 살기 원한다면 우리의 마음을 그리스도의 평화가 다스리게 해야 합니다.
인생의 거친 폭풍우 속에서도 영원한 반석 되시는 그리스도의 품 안에서만 누릴 수 있는 그 평화를 우리가 계속 추구해야 합니다.
물론 모든 불의를 용납하면서까지 평화를 이루어야 한다는 말씀이 결코 아닙니다.
거짓이 아니라 진리 안에서 평화를 이루어 가야 합니다.
그리고 평화를 이루는 그것이 우리의 소명이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불러주시고, 평화를 이루는 소명을 맡겨주신 하나님께 감사 드리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우리 각자의 마음과 공동체의 삶을 그리스도의 평화가 다스리게 하는 이런 삶을 힘쓰는 저와 여러분 모두가 되시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
오늘 본문이 말씀하는 새 사람이 된 우리가 갖추어야 할 두 번째 충분조건은,
II. 그리스도의 말씀이 우리 속에 풍성히 거하게 하는 것입니다(16).
오늘 본문 16절에서 언급된 ‘그리스도의 말씀’(~O lo,goj tou/ Cristou/, the word of Christ, the message of Christ)은 ‘예수님께서 직접 하신 말씀’을 지칭할 수도 있고, ‘예수님에 관한 말씀’을 지칭할 수도 있습니다.
그 말씀이 교회 공동체와 성도들 속에 풍성히 거하게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를 믿는 저와 여러분이 예수님의 말씀이 ‘머무는 장소’(dwelling place)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의 말씀이 교회 공동체의 모든 활동과 예배의 중심에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풍성히 거하게 한다’(noikei,tw evn u`mi/n plousi,wj, richly dwell within you)는 것은 그저 피상적으로 또는 일시적으로 말씀을 붙드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지속적으로, 실제적으로 성도들 속에 자리잡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깊이 있고 깨달음을 주는 말씀의 묵상을 통해 그 말씀이 공동체 구성원 모두의 삶을 변화시키는 능력으로 드러나게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어떻게 그리스도의 말씀이 공동체 가운데 풍성하게 거하게 할 수 있겠습니까?
그 방법을 16절 뒷부분이 말씀하고 있습니다.
먼저, 피차 지혜로 가르치는 것입니다.
둘째, 서로 권면하는 것입니다.
셋째, 감사하는 마음으로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로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떤 의미에서는 지혜로 가르치며, 권면하고, 감사함으로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이 그리스도의 말씀이 공동체 안에 풍성하게 거하게 하는 수단이라는 것입니다.
그 반대로 지혜로 피차 가르치며 권면하고,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기 위해 그리스도의 말씀이 우리 안에 풍성히 거하게 해야 한다고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다른 그 무엇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통해 우리가 지혜로 가르치며 권면할 수 있고, 하나님을 향해 감사가 넘치는 온전한 찬양도 올려드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공동체가 그리스도의 말씀 안에 견고하게 서 있어야 제대로 된 가르침과 권면이 가능하고, 하나님을 향해 감사에서 우러나오는 온전한 찬양을 올려드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의 말씀이 공동체의 예배와 교육, 교훈의 출발점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가르친다’(dida,skw)는 것은 진리에 대한 적극적인 소개나 제시를 의미합니다.
반면에 ‘권면한다’(nouqete,w)는 것은 성경의 진리로부터 벗어나는 위험에 대한 경고를 통해 그 사람을 바로 잡는 것을 의미합니다.
헬라어로 ‘누세테오’라는 말이 사용되고 있습니다.
성경적 상담 중에 ‘권고적 상담’(Nouthetic Counseling)이라는 말이 있는데 바로 이 단어에서 파생된 것입니다.
그런데 무엇이 오늘 본문이 말씀하는 가르치고 권면하는데 필요한 지혜이겠습니까?
그것은 다름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알고, 그 뜻대로 살아가는 것이 지혜입니다(cf. 1:9, 28; 3:16).
또한 거짓교사들의 헛된 가르침에 빠져들지 않게 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과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 곧 지혜입니다.
뿐만 아니라 성도들이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 따라 살아가도록 목회적으로 성도들을 가르치고 권면하는 것이 지혜입니다.
이런 모든 지혜로 가르치고 권면하기 위해 예수님의 말씀 곧 하나님의 말씀이 교회 공동체 안에 풍성히 거해야 하는 것입니다.
또한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나님께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를 올려드리기 위해서도 공동체 안에 그리스도의 말씀 곧 하나님의 말씀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개혁주의를 표방하는 개신교회들의 예배의 중심에는 언제나 하나님의 말씀 선포가 놓여 있습니다.
우리 교회의 네 가지 핵심가치(말씀, 사람, 은사, 열정)의 첫 번째가 말씀이고, 여덟 가지 사명의 첫 번째 또한 ‘생명을 살리는 말씀 선포’인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말씀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의 창조를 알며, 하나님의 뜻을 알고, 인류 역사에 대한 하나님의 섭리를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말씀을 통해 우리도 예수님처럼 우리를 미혹하는 흉악한 자들을 이기는 것입니다(요일 2:14).
그래서 그리스도의 말씀이 우리 안에 풍성히 거하게 해야 하는 것입니다.
한편 시인은 시편 19:7-11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7 여호와의 율법은 완전하여 영혼을 소성시키며 여호와의 증거는 확실하여 우둔한 자를 지혜롭게 하며
8 여호와의 교훈은 정직하여 마음을 기쁘게 하고 여호와의 계명은 순결하여 눈을 밝게 하시도다
9 여호와를 경외하는 도는 정결하여 영원까지 이르고 여호와의 법도 진실하여 다 의로우니
10 금 곧 많은 순금보다 더 사모할 것이며 꿀과 송이꿀보다 더 달도다
11 또 주의 종이 이것으로 경고를 받고 이것을 지킴으로 상이 크니이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저는 우리 모두가 시인처럼 우리의 생애 내내 그리스도의 말씀, 하나님의 말씀에 붙들려 살아가게 되길 간절히 소망합니다.
그 말씀이 우리를 소생시키고, 새롭게 하는 능력으로 다가올 것입니다.
그것을 위해 말씀을 늘 곁에 두고, 읽고, 묵상하며, 말씀대로 살기 위해 발버둥치는 저와 여러분 모두가 되길 거듭 소망합니다.
오늘 본문이 말씀하고 있는 새 사람의 또 다른 충분조건은,
III. 무엇을 하든지 다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하고, 하나님께 감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17)
지난 수요일(6/29)은 2016년도 상반기 교회 마당 앞 전도 및 노방전도가 방학에 들어가는 날이었습니다.
마침 구역장 공과공부 때문에 많은 구역장들이 교회에 오시는 날이기도 해서 아침에 카페에 들러서 오만 원을 내고는 오늘 카페에 오시는 분들에게 공짜로 음료를 드리라고 부탁했습니다.
선착순으로 50잔만 공짜라고 광고를 했는데, 그 다음날 들리는 소식은 오십 분 이상 다녀가셨고, 두 번씩 다녀가신 분도 있었다고 했습니다.
다를 좋아하셨다고 해서 저도 기분이 참 좋았습니다.
그런데 그 날 카페 문 닫을 즈음에 카페를 들렀더니 어떤 집사님 한 분이 이번 주 수요일에 자기가 돈을 낼 테니 공짜로 음료를 제공해 달라고 부탁하셨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자기 이름은 절대로 밝히지 말라고 하셨다는 것입니다.
저는 제 이름을 밝히고 공짜 음료를 제공했는데, 이 집사님은 자기 이름 밝히는 것을 한사코 거부하셨다니, 목사인 저보다 훨씬 더 믿음이 좋고, 더 아름다운 삶을 살고 계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왜냐하면 자기 이름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섬기는 자세를 보여주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자칫 우리는 남을 도우면서도 생색을 내는 경우들이 더러 있습니다.
때로는 교회 공동체 안에서도 자신의 이름을 내려고 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물론 공동체 구성원들에게 동기를 부여하기 위해 그런 것이 필요한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근본 정신은 무엇을 하든지, 말에나 일에나 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17a).
한 걸음 더 나아가 우리가 말로나 행동으로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무엇인가를 행할 수 있다는 그 사실 자체에 대해 하나님께 감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17b).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 예수를 주로 영접한 새 사람의 또 다른 충분조건인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런데 과연 우리는 정말 우리의 말이나 행동을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행하고 있습니까?
내 이름이 전혀 드러나지 않는 그 자리에서도 한결같이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말하며 일하고 있습니까?
그리고 오늘 우리가 속한 이 자리에서 그리스도를 힘입어(diV auvtou/, through him) 정말 감사하는 마음으로 공동체를 섬기고 있습니까?
혹시 기쁨이 사라진 굳은 얼굴을 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래서 내가 섬기는 모습이 오히려 나를 바라보는 지체들에게 큰 부담이 되고 있지는 않습니까?
말씀의 거울을 통해 적어도 한 번쯤은 섬기는 내 모습을 점검해 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다시 한 번 골로새서 2:6-7의 말씀을 가슴에 되새겨야 합니다.
6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를 주로 받았으니 그 안에서 행하되
7 그 안에 뿌리를 박으며 세움을 받아 교훈을 받은 대로 믿음에 굳게 서서 감사함을 넘치게 하라
그래서 무엇을 하든지 말에나 일에나 다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힘 입어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 드리는 우리 모두가 되어야 합니다.
이런 삶을 힘쓰는 저와 여러분 모두가 되시길 간절히 소원합니다.
(Application) 그렇다면 이와 같은 사실을 깨달은 우리가 살아야 하는 삶의 구체적인 모습은 과연 어떤 것일까요?
먼저, 개인과 공동체의 평화를 깨뜨리는 불필요한 말들을 그쳐야 합니다.
우리가 누리는 평화가 내가 내뱉은 말 한 마디 때문에 깨어지는 경우가 비일비재합니다.
물론 내가 하고 싶은 얘기를 누군가에게 다 하고 나면 잠시 내 속은 시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다른 누군가가 아니라 바로 나 자신이 그 말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합니다.
내 감정을 다스리지 못한 채 이런저런 말을 한 것이 결과적으로 나 자신은 물론 공동체 전체에도 큰 해악을 일으키는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입니다.
때로 마음이 통하는 사람과 누군가에 대해 실컷 이런저런 얘기를 하고 나면 잠시 속이 후련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가만히 돌아보면 그 말에 지나치게 내 감정이 들어가 있고, 그래서 나는 점점 더 뒷담화를 좋아하는 왜곡된 인격을 소유하게 됩니다.
그래서 골로새서 3:8-9은 그러지 않도록 비방(slander, 험담)과 입의 더러운 말을 그치고, 거짓말을 하지 말라고 명령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진정한 마음의 평화는 그런 불필요한 말들로 얻게 되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억울하더라도, 밉더라도, 마음을 다 드러내고 말하기보다, 그래서 나의 처지와 억울함을 알아주는 누군가를 소유하려 하기보다, 누군가를 내 편으로 만들려 하기보다 예수 그리스도를 마음에 모실 때, 그리고 우리가 예수님 편이 될 때 얻게 되는 것입니다.
나의 억울함뿐만 아니라 상대방의 억울함까지도 공평하게 알아주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소유하게 될 때 진정한 평화가 찾아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나 자신과 내가 속한 교회공동체에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는, 나의 평화뿐만 아니라 공동체의 평화를 깨뜨리는 그런 불필요한 말들을 그쳐야 합니다.
그런 말들은 우리 각자의 마음에서 완전히 지워버려야 합니다.
그래야 저와 여러분이 그리스도의 평강을 제대로 누릴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둘째, 힘겨운 삶의 자리에서도 감사해야 합니다.
믿음 안에서 살아가는 우리가 늘 빼먹지 않아야 할 일 중 하나가 바로 감사입니다.
물론 우리 중에는 감사하기 어려운 처지에 놓여 있는 분들이 많이 있습니다.
믿지 않는 남편 때문에, 불순종하는 자녀들 때문에, 나 자신이나 가족의 건강 문제로 여전히 힘겨운 삶을 사는 많은 분들도 많이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장래에 대한 불확실성 때문에 마음이 불안한 분들도 더러 있습니다.
또한 깨어진 관계로 인해 속이 상한 분들도 있습니다.
더러는 생활비가 부족하고, 학비가 모자라는 그런 지체들도 있습니다.
어쩌면 교회가 집에서 너무 멀어 불편하고, 왠지 교회의 시스템과 성도들과 담임목사가 마음에 들지 않는 그런 분들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다소 불편하게 느껴지는 여러분이 앉아 있는 그 자리, 제가 지금 서 있는 이 자리, 우리 공동체, 우리 가정, 우리의 일터와 학원이 다 감사의 자리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 불편한 관계 속에서 하나님께서는 오히려 우리 각자의 어리석음을 보게 하시기 때문입니다.
그 불편함들 때문에 오히려 하나님의 은혜로 산다는 고백을 하게 하시기 때문입니다.
그 어색한 자리에서 오히려 나 자신을 보게 하시며, 나야 말로 그리스도의 평강과 말씀이 필요한 존재라는 사실을 깨닫게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저와 여러분이 머무는 그 자리, 도무지 감사할 것이라곤 눈을 닦고 쳐다봐도 보이지 않는 그 자리에서도 의지를 가지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는 저와 여러분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 우리에게 머지않아 하나님께서 확실한 감사의 조건들을 반드시 허락해 주실 것입니다.
CONCLUSION:
(Closing Image) 여성 작가 트리나 폴러스(Trina Paulus, 1931-)가 쓴 “꽃들에게 희망을(Hope for the Flowers)”이라는 동화는 사람들의 가슴에 더 나은 삶 곧 진정한 혁명을 심어주기 위한 글입니다.
주인공 호랑 애벌레와 노랑 애벌레는 서로 다른 과정을 거치지만 궁극적으로 다 나비가 되었습니다.
진정한 혁명을 이루어낸 것입니다.
이 두 애벌레는 미지의 세계로 여행을 떠나 때로는 누군가로부터 도움을 받고, 때로는 누군가를 도와주며 더 나은 삶을 만들어 낼 수 있었습니다.
동화 속에서 노랑 애벌레는 호랑 애벌레와 잠시 헤어진 후 나무에 매달린 늙은 애벌레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 애벌레가 불쌍해서 어떻게든 도와주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 애벌레는 자기가 그렇게 해야만 나비가 될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진정한 혁명을 만들어내는 과정이라고 말했던 것입니다.
그 때 노랑 애벌레가 ‘나비가 도대체 뭐예요?’라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그 늙은 애벌레는 ‘나비는 미래의 네 모습이지!’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는 계속해서 ‘나비는 아름다운 날개로 날아다니면서 땅과 하늘을 연결시켜 줄뿐만 아니라 꽃에서 꿀을 빨아 마시고, 이 꽃에서 저 꽃으로 사랑의 씨앗을 날라 준단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는 ‘나비가 없으면 꽃들도 이 세상에서 곧 사라지게 돼’라고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애벌레에서 나비로 변하는 과정은 어쩌면 또 다른 죽음의 문턱을 넘어야 하는 과정일 수 있습니다.
고치 속에 들어 있는 애벌레는 마치 무덤 속에 갇힌 것처럼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참 모습은 여전히 그 속에 살아 있습니다.
모양은 바뀌어도 목숨이 없어지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 고치의 시간을 지나면 드디어 꽃들에게 희망을 주는 나비가 되는 것입니다.
(Closing Repetition)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호랑 애벌레와 노랑 애벌레가 나비가 되는 길이 결코 쉽지 않았듯이 우리가 그리스도를 중심에 모신 새 사람으로 온전히 살아가는 것도 결코 쉽지 않습니다.
잘못된 호기심 때문에 좌충우돌 할 때도 있고, 더 높이 올라가려고 다른 사람을 이용하기도 하고, 그러는 중에 나 자신이 상처를 입기도 합니다.
평화는커녕 더 큰 불안과 초조감이 우리를 엄습해 올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나비 곧 새 사람이 되기를 포기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를 믿는 저와 여러분은 복음의 꽃이 만발하게 하는 이 시대의 영적인 나비가 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우리 스스로의 힘으로는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도움을 받으면 가능합니다.
바로 그 사실을 오늘 분문이 말씀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평강이 우리 마음을 주장하게 하고, 그리스도의 말씀이 우리 속에 풍성하게 거하게 하며, 그리고 무엇을 하든지 감사하며 다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하면 가능한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이런 삶을 살아낼 수 이유가 있습니다.
빼앗기지 않는 진정한 평화의 근원이 바로 예수님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우리를 늘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행하는 말이나 일이 우리의 삶에 감사가 넘쳐나게 하기 때문입니다.
이 사실을 기억하며 그리스도의 평화, 그리스도의 말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말미암는 감사가 넘치는 새 사람의 복된 삶을 계속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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