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0924주일예배_눅6:43-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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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열매 맺는 삶

누가복음 6:43–45 NKRV
못된 열매 맺는 좋은 나무가 없고 또 좋은 열매 맺는 못된 나무가 없느니라 나무는 각각 그 열매로 아나니 가시나무에서 무화과를, 또는 찔레에서 포도를 따지 못하느니라 선한 사람은 마음에 쌓은 선에서 선을 내고 악한 자는 그 쌓은 악에서 악을 내나니 이는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함이니라
오늘 말씀은 좋은 열매를 맺는 나무에 관한 교훈입니다. 똑같이 나오는 마태복음서(12:33-35)의 말씀이 바리새파 사람들에 대한 경고의 의미를 함축한다면, 오늘 누가복음의 말씀은 제자들을 향한 일반적 교훈의 의미가 강합니다. 바리새파 사람들을 향한 경고의 말씀으로서든 제자들을 향한 일반적인 교훈의 말씀으로서든, 이 말씀은 어떤 결과를 빚어내는 근본 동기를 문제시하고 있습니다. '나무는 각각 그 열매를 보면 안다'는 말씀은, 결과에 대해서만 집착을 하는 결과주의, 효율주의를 내세우는 뜻이 아닙니다. 어떤 결과를 빚어낸 데에는 다 그만한 동기와 사연이 있다는 사실을 나타내는 말씀입니다.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된다'든지 '꿩 잡는 게 매'라는 식의 편의주의 및 결과주의를 옹호하는 것이 아니라, '정당한 결과를 얻기 위한 정도'를 강조하는 말씀입니다.   오늘 말씀과 유사한 우리 속담으로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난다'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은 숙명론을 강조하는 말로 남용되기도 하지만, 어떤 결과를 빚어내는 근본과 그 사연을 이르는 말입니다. 오늘 성서 본문 말씀은 더더욱 말할 것 없이 숙명론과는 무관한 것입니다. 성서의 말씀도 경우에 따라서는 숙명론적으로 해석될 소지를 안고 있기는 하지만, 성서에는 특히 적어도 예수님에게서 이 말씀은 숙명론과는 상관이 없습니다. 외식하는 사람들, 겉으로 드러내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을 혐오하신 예수님의 입장에서, 이 말씀은 근본 동기부터 바로 잡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경고의 말씀이요 교훈의 말씀입니다. 물론 세상은 동기가 선하다고 해서 꼭 선한 결과만을 얻는 것은 아닙니다. 선의를 악용하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불행하게도, 우리는 선한 동기가 선한 결과를 얻는 것보다는 그 선의가 곡해되는 경우를 많이 봅니다. 그 때문에 순진하게 선한 동기와 선한 과정을 일관되게 지키기보다는 이래저래 나도 모르게 타협하는 경우가 빈번합니다. '개 같이 벌어 정승처럼 쓴다'는 것도 아마 그런 타협의 소산일 겁니다. 그것이 세상의 상식일지언정, 예수를 따르는 그리스도인의 상식이 될 수는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근본 동기를 문제시한 것은, 그 상식을 뛰어넘자는 것입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도 같은 맥락입니다. 사람들이 많이 좇는다고 그게 정도가 아니다, 오히려 사람들이 찾지 않는 길이 정도일 수 있다는 사실을 말합니다.         일상의 삶의 영역에서 기업을 운영하고 사업을 하는 데도 상도가 있고 기업의 윤리가 있습니다. 그저 돈벌이로서 그 결과에만 집착한다면, 그야말로 세상은 아수라장이 되고 말 것입니다. 특혜를 남용해 사리사욕을 챙기거나 돈벌이가 된다면 마음대로 주가를 조작하는 등의 행위를, 사회가 허용하지 않고 규제하는 것은, 암만 자유경쟁이라 하더라도 사회의 안정을 해치지 않는 한계선을 지키려는 시도입니다. 수단 방법 가리지 않고 저마다 추구하는 결과에만 매달릴 때 빚어지는 살벌한 공멸의 비극을 막기 위한 장치입니다.         우리의 일상의 삶이 그러할진대, 하물며 그리스도를 따르는 길은 더더욱 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한결같은 선의로 모든 일을 이루어내야 합니다. 일상의 우리의 현실이 그것을 쉽사리 허용하지 않기 때문에 결코 쉬운 일이 아닐 수 있습니다. 그러기에 그 길은 인내를 필요로 합니다. 곡식과 과일마다 심는 때와 꽃을 피우는 때가 다르고, 결실을 맺는 때가 다른 이치를 뛰어넘을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농업 기술이 발전해 시도 때도 없이 아무 과일이나 곡식이 쏟아지는 판이지만, 공산품이나 다를 바 없는 농산품이 건강한 먹거리가 될 수 없습니다. 그렇게 생산된 농산품이 과일로서 곡물로서 영양이 충분치 못하다는 것은 말할 것 없거니와, 그것을 먹거리로 삼는 사람들의 인성마저도 불완전하게 만듭니다. 요즘 아이들이 인내심이 부족하고 깊이가 부족한 게 어디에서 비롯되겠습니까? 이 때가 되면 이걸 먹고 저 때가 되면 저걸 먹는 게 아니라, 아무 때나 아무거나 먹고싶은 대로 먹으니, 철을 분간할 줄 모르고 그러니 철이 없는 겁니다. 정한 철을 기다리며, 그 철에 맞추어 마땅한 소산을 내기까지의 인내의 의미를 우리는 새삼 깨달아야 합니다. 그것은 그저 시간을 보내며 무작정 기다리는 것이 아닙니다. 보리가 보리쌀을 낼 수 있도록, 벼가 쌀을 낼 수 있도록, 포도나무가 포도를 낼 수 있도록, 감나무가 감을 낼 수 있도록 돌보고 보살피며 기다리는 시간입니다. 한마디로 자연의 순리를 터득하고 그 이치에 따라 우리가 해야 할 몫을 감당하는 것입니다. 폭풍이 몰아치면 그 폭풍을 막아낼 방도를 세우고, 가뭄이 닥치면 물을 끌어들일 방법을 강구하고, 거름이 부족하면 거름을 내고, 병충해가 깃들면 그것을 막아낼 방법을 찾아 대책을 세우는 것입니다. 그 나무에 마땅한 열매를 얻기 위한 지난한 과정입니다. 자연의 순리를 따라 풍요로운 추수의 계절을 맞고 있는 지금 우리는 모두 우리의 삶을 돌이켜 보기를 원합니다. 우리는 처음부터 좋은 열매를 맺는 나무로서 우뚝 서 있을까요? 아니면 애초부터 싹수가 노래 근근히 생명만 부지하고 있는 형상, 또는 잎파리와 가지는 무성하되 아무런 열매도 맺을 수 없는 나무와 같은 형상일까요? 좋은 열매를 낼 수 있는 나무로 서 있다면 그 열매를 얻을 수 있도록 정진해야 할 것이며, 만일 그렇지 못하다면 좋은 나무로 자랄 수 있는 자양분 또는 자기를 부정하는 새로운 접목이 필요할 것입니다. 우리를 건강하게 키우는 자양분, 또는 우리를 거듭나게 하는 접목은 그리스도 예수입니다.     우리 각자의 삶을 돌이켜 보는 것과 더불어 우리는 우리가 한 몸을 이룬 이 교회 공동체 또한 돌이켜 보아야 할 것입니다. 어떻습니까? 여러분! 과연 좋은 열매를 맺을 수 있는 좋은 나무로 자라고 있는 중일까요? 자신을 스스로 평가하는 일은 쉽지는 않습니다. 자화자찬 아니면 자기비하 양극의 위험성이 따릅니다. 그러나 스스로를 평하는 게 불가능한 것도 아니고 오히려 그 어떤 평가보다 훨씬 정확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자기 자신을 제일 잘 압니다. 어떤 면에서 자기 자신에게 진실하다면 스스로의 평가가 가장 정확한 평가일 수 있습니다. 우리 스스로 자신에게 물어봅시다. 과연 우리의 공동체는 좋은 열매를 맺을 나무로 자라고 있을까요? 아직도 떡잎 상태를 면하지 못하고 있는데 성급하게 물을 일인가,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신앙생활을 시작한지, 교회로 모인지 꽤 시간이 지났죠. 짧게 보면 올 한해를 보낸 것도 벌써 9개월이 지났습니다. '될 성 싶은 나무는 떡잎부터 알아본다'고 했으니, 떡잎 상태라도 평가를 할 수 있습니다. 어떤 평가를 내릴 수 있을까요? 저는 이 시간에 그에 대한 답변을 하나하나 늘어놓을 생각은 없습니다. 다만, 저에게는 깊은 자긍심이 있다는 것만은, 저의 대답으로 내놓을 수 있습니다. '꿩잡는 게 매'라는 식으로 성급하게 그 결과만을 눈에 그리며 마치 불나비처럼 내달리지 않고, 올곧게 그리스도의 복음을 살아가는 자세로 더디지만 한 걸음 한 걸음 내딛는 그 발걸음에 대한 자긍심입니다. 어떤 면에서 우리가 신앙인으로 하루하루를 성실하게 살아가는 것, 그것이 '대단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날마다 우리 스스로를 평가하고 돌아보면서 남은 시간들을 살아가고 걸어갑시다. 성장도 중요하지만 성숙을 향해 살아갑시다. 우리 삶에 대한, 우리의 신앙에 대한, 우리 교회에 대한 우리 안에 있는 자긍심, 그것이 중요합니다. 우리 스스로의 생명력을 스스로 확인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 자긍심의 근거가 흔들리지 않고 지속되기를 기원해야 할 것입니다. 규모에 상관없이 그리스도의 복음을 신실하게 따른다는 믿음, 거기에서 비롯되는 그 자긍심을 지켜나갈 때, 우리는 분명히 좋은 열매를 맺는 나무로 우뚝 서게 될 것입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우리의 이 공동체가 진정으로 처음부터 끝까지 한결같은 신실한 믿음을 지켜나가기를, 이 시간 간절히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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