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의 시작 (마가복음 1:1-11) 찬송가 96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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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론
서론
오늘도 이렇게 오후찬양예배 가운데 찾아오신 귀한 성도 여러분들을 구원자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오늘 정말 편하게 집에 일찍 들어가서 쉬셔도 되는데, 명절 전주라서 많이 피곤도 하시고, 바쁘기도 하실텐데, 그럼에도 그리스도의 은혜에 힘입어서 이 곳 예배의 자리로 나오신 우리 성도님들을 다시 한번 주님의 이름을 축복합니다. // 제목은 정말 중요합니다. 우리가 유튜브를 볼 때에도 썸네일이라고 하죠. 그 영상이 어떤 영상인지 느낌을 주는 첫 장면 썸네일이라고 하죠. 이 썸네일이 어떻게 생겼는지에 따라서 사람들이 더 보기도 하고, 아예 쳐다도 안 볼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영상의 제목도 잘 지어야 하겠지요. 아주 적절하고, 흥미를 유발하고, 관심을 끄는 그런 제목을 잘 지어야지 인기있는 유튜브 동영상이 될 수 있습니다. / 신문 기사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아주 자극적인 기사 제목을 써서 너무 좀 가짜 뉴스들이 생기기도 하겠지만, 제목을 잘 짓는 것이 정말 중요합니다. / 책에서도 마찬가지이겠지요. 우리 학교 어떤 교수님은 책 제목을 너무 시적으로 지어서 오히려 책이 덜 팔리게 되었다고 그런 자기 이야기도 하셨습니다.
본론
본론
오늘 우리가 마가복음을 처음부터 11절까지 살펴보게 됩니다. 그런데 마가복음은 엄밀하게 말한다면 마가복음의 제목이 아니지요. 그 옛날 성경은 몇 장 몇 절 이렇게 구분도 없었고, 제목도 없었습니다. 그러니까 제목이라고 한다면 1장 1절. 첫 부분 정도가 제목으로 볼 수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한 번 다시 1장 1절을 읽어보도록 하겠습니다.
1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이라
한글 성경에서는 이렇게 나와있습니다. 문장으로 나와있습니다. 시작이라. 그런데 정확히 원래의 말로 풀어서 읽어보면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시작. 복음의.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의 아들. // 그러니까 마가복음의 첫 단어는 시작이라는 것입니다. 문장 ~이다. 이렇게 나오지 않고, 그냥 단어. 시작. 이렇게 나와있다는 것입니다. 마가복음이 왜 이렇게 처음 서두를 문장으로 시작하지 않고, 시작이라는 단어를 사용한 것일까요? 일종의 책의 제목을 말하는 것입니다. 옛날에는 표지가 없었으니까. 이 마가복음을 읽은 사람들을 위해서 1장 1절에 제목 느낌을 강하게 주기 위해서 ‘시작’ 이라고 적게 된 것이지요.
그러면서 이 책을 읽으면서 사람들은 시작하는구나. 이런 느낌을 받으면서 읽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한 가지 독특한 것은 시작은 있는데, 끝은 표현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처음부터 이 책은 시작을 하면서 끝을 내는 게 아니라, 열린 결말을 보여준다는 것입니다. 쉽게 말해서, 이 마가복음 성경을 읽고, 이것을 시작으로 예수님의 제자가 되어서 사명의 길을 계속해서 걸어 나아가라. 이런 느낌을 처음부터 주고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은 뒷부분에 집중하고 싶지만, 1절에 너무 중요한 단어들이 등장하고 있어서 1절은 좀 더 꼼꼼하게 볼 수 밖에 없습니다. 시작인데, 복음의 시작이라는 것입니다. 복음이 무엇입니까? 구약 성경에서부터 복음을 말했습니다. 구약 성경 이사야로 가봅시다.
7 좋은 소식을 전하며 평화를 공포하며 복된 좋은 소식을 가져오며 구원을 공포하며 시온을 향하여 이르기를 네 하나님이 통치하신다 하는 자의 산을 넘는 발이 어찌 그리 아름다운가
좋은 소식. 복된 좋은 소식. 이것이 복음이지요. 이렇게 이사야 말씀을 통해서 이 당시 유대인들은 복음이라고 하면, 네 하나님이 통치하신다. 하나님의 통치, 하나님의 다스림이 이루어지는 것을 복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유대인은 이렇게 생각했지만, 유대인들을 지배하고 있던 로마에서는 복음을 다르게 생각했습니다. 로마에서의 복음이란 새로운 황제가 태어나는 것. 그 황제가 왕위에 올라가는 것. 로마 황제가 복음이었던 것이지요. 그런데 마가복음은 분명하게 선포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 다양한 복음들이 있었지만, 오직 복음은 하나이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만이 유일한 복음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지요. 그러니까 다른 복음은 없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만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잘 알고 계셨겠지만, 다시 들으시면서 은혜 받으시길 바랍니다. 복음은 오직 예수님의 복음 밖에 없습니다.
그 다음에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인데, 그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 소개합니다.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소개하는 것이지요. 아까와 비슷하게 로마 제국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아들은 누구입니까? 로마 황제겠죠. 신의 아들. 자신들을 신의 아들. 신과 동일하게 여겼으니까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마가복음은 로마 황제가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라, 오직 구원자 예수님만이 하나님의 아들이시라고 선포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놀라운 시작 앞에 저와 여러분들이 또다시 은혜 받으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그리고 다음에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세례 요한이 등장합니다. 이 세례 요한은 갑자기 등장한 것이 아니지요. 오래 전 부터 구약 성경 때부터 이미 예언된 사람이었습니다.
2 선지자 이사야의 글에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네 앞에 보내노니 그가 네 길을 준비하리라
3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어 이르되 너희는 주의 길을 준비하라 그의 오실 길을 곧게 하라 기록된 것과 같이
세례 요한은 구약 성경 이사야 에서부터 예언된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사명은 예수님의 오실 길을 준비하는 것이었지요. 그런데 이사야 뿐만 아니라 말라기에서도 세례 요한을 미리 보았던 것입니다.
5 보라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내가 선지자 엘리야를 너희에게 보내리니
하나님께서 선지자 엘리야와 같은, 엘리야가 직접 온다는 말이 아니라, 엘리야와 같이 백성들의 마음을 준비시키는 하나님께로 돌아오도록 준비시키는, 그러한 사람을 보내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보고 있는 세례 요한입니다. 이 세례 요한은 그렇게 예수님의 오실 길을 준비하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매우 특별한 세례를 백성들에게 주고 있었던 것입니다.
4 세례 요한이 광야에 이르러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의 세례를 전파하니
5 온 유대 지방과 예루살렘 사람이 다 나아가 자기 죄를 자복하고 요단 강에서 그에게 세례를 받더라
지금 세례 요한이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의 세례를 베풀었고, 많은 백성들이 그에게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의 세례란 도대체 무슨 뜻일까요? 죄를 사하는 것은 오직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데, 그렇기 때문에, 다르게 생각해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요한이 베푼 세례는 실제로 죄를 사하게 하는 그런 세례가 아니라, 앞으로 찾아올 진짜 죄를 사하게 할 그 세례를 미리 상징하는 그런 세례라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요한의 사명은 오실 분의 길을 준비하는 것이지요. 자기가 세례를 주면서 예수님의 길을 방해하고, 예수님의 것을 빼앗는 게 아니라, 오히려 예수님께서 앞으로 베푸실 진정한 세례를 위해서 백성들을 준비시키는 그런 상징적인 세례를 베풀었다는 것입니다. 백성들은 그렇게 요한의 세례를 받으면서 하나님 앞에서 마음을 열고 회개하면서 그렇게 준비되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만날 준비가 되었다는 것이지요.
이것을 세례 요한은 어느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렇기에 자신과 예수님을 비교할 때에 이렇게 말을 합니다.
7 그가 전파하여 이르되 나보다 능력 많으신 이가 내 뒤에 오시나니 나는 굽혀 그의 신발끈을 풀기도 감당하지 못하겠노라
여기서 신발끈을 풀기도 감당하지 못하겠다. 신발끈을 푸는 것은 굉장히 쉬운 일이었습니다. 그런데도 요한은 절대 하지 못하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기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능력이 많으시기 때문에, 자기는 예수님의 신발끈을 푸는 것도 감당하지 못하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얼마나 능력이 많으신 분인지 알 수 있는 대목입니다. 그렇기에 예수님은 요한의 세례와 차원이 다른 특별히 세례를 베푸는 것이지요. 바로 성령 세례입니다.
8 나는 너희에게 물로 세례를 베풀었거니와 그는 너희에게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시리라
우리 예수님은 한 번도 물세례를 주신 적이 없다고 합니다. 예수님은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성령 세례는 어떤 세례입니까? 여기서 예수님이 주시는 성령의 세례는 뭔가 받으면 방언이 터지고, 기적이 일어나서 치유가 일어나는 그런 것에 집중하는 세례가 아닙니다. 예수님이 베푸시는 성령의 세례는 예수님의 구원의 능력을 의미하는 것이지요.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죄와 사망과 사탄 마귀를 물리치시는 그러한 구원의 능력을 말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성령의 세례는 한 마디로 우리에게 죄인에게 행하실 실제 구원이라는 것이지요. 예수님은 그렇기에 물세례를 베푸시지 않으시고, 성령의 세례, 직접 우리 죄인들을 구원하여 주신 것입니다.
그렇기에 조심스럽게 성도 여러분들에게 권면하는 것입니다. 특별히 성령을 받기 위해서 검증되지 않는 집회나 단체에 참석하지 않으시길 바랍니다. 검증되지 않는 성령 체험의 영상을 시청하지 않으시길 바랍니다. 예수님께서 베푸신 성령의 세례는 우리 죽었던 죄인들을 살리시는 실제 구원을 말합니다. 이것을 기억하면서 성령을 구하시길 바랍니다. 예수님의 구원이 더욱 더 생생하게 다가오는 것. 예수님의 구원의 능력이 지금 내 안에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이 믿어지는 것. 이것이 성령의 세례입니다. 이것이 전제되지 않으면 감히 다른 성령 세례. 다른 복음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제 본격적으로 세례 베푸실 분이 세례를 받으시는 놀라운 사건, 그 가운데 펼쳐진 신비한 광경을 함께 같이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9 그 때에 예수께서 갈릴리 나사렛으로부터 와서 요단 강에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시고
예수님께서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십니다. 굉장히 아이러니한 모순적인 상황이지요. 세례를 베푸셔야 할 분이 세례를 받으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왜 세례를 받으신 것입니까? 예수님은 세례를 받지 않으셔도 되지만, 이제 앞으로 세례를 받은 우리 사람과 같이 되셔서, 죄가 없으시지만, 죄인들 처럼 죄인들과 같이 여기지시기 위해서 세례를 받으셨던 것입니다. 본격적으로 예수님의 사역이 시작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세례를 받으셔야 했던 것이지요. 그렇게 세례를 받으시고 물에서 나오실 때에 신비로운 일이 일어나게 됩니다.
10 곧 물에서 올라오실새 하늘이 갈라짐과 성령이 비둘기 같이 자기에게 내려오심을 보시더니
매우 신비로운 광경이 펼쳐졌습니다. 먼저는 하늘이 갈라졌다는 것이지요. 정확하게 말하면 하늘이 찢어졌다는 것입니다. 왜 굳이 하늘이 찢어졌다고 말하는 것일까요? 성경은 매우 정교한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에, 그냥 찢어졌다고 표현하지 않고, 분명한 의도가 들어있다는 것입니다. 1장 10절의 하늘이 찢어졌다는 것은 예수님의 앞으로의 사역을 미리 보여주는 표현입니다. 특별히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실 때에 나타나는 현상을 미리 보여주는 것이지요.
37 예수께서 큰 소리를 지르시고 숨지시니라
38 이에 성소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되니라
여기서 우리가 미리 알아야 할 것은 하나님의 성전은 하늘을 상징합니다. 여기서 휘장은 성전 안에 있는 지성소와 성소를 가리는 막입니다. 지성소는 매우 거룩한 장소여서 대제사장만 들어갈 수 있었지요. 지성소는 그렇기에 보이지 않는 하늘. 하나님이 계시는 그런 하늘이고, 그 밖에 있는 성소는 눈에 보이는 그런 하늘을 상징합니다. 그런데 지금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예수님이 죽으시고, 숨지시고, 지성소와 성소를 가리고 있던 휘장이 찢어져 버리는 것입니다. 엄격하게 분리되어있던 지성소와 성소가 이제는 휘장이 찢어져서 길이 열려 버린 것입니다.
쉽게 말하면 예수님이 죽으시고, 어떤 길이 열린 것입니까? 하나님께로 가는 구원의 길이 열리게 된 것입니다. 마가복음에서는 이미 1장에서부터 15장에서 일어날 예수님의 사건을 세례 받으실 때에 미리 보여주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 저와 여러분들은 이렇게 예수님으로 인하여 구원을 받게 되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으로 인하여 이제 우리가 하나님께로 담대하게 나아갈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렇게 하늘이 찢어지고, 그 다음에는 성령이 비둘기 같이 예수님께 내려오시는 장면이 펼쳐집니다. 다시 한 번 읽어보도로 하겠습니다.
10 곧 물에서 올라오실새 하늘이 갈라짐과 성령이 비둘기 같이 자기에게 내려오심을 보시더니
여기서 먼저 비둘기 하면 무슨 생각이 떠오르십니까? 비둘기를 보면 어떤 생각이 드십니까? 제가 추측한 게 맞다면, 아마도 평화의 상징. 올림픽에 등장하는 그런 평화의 상징을 떠올리실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부터 비둘기 보면 이 생각만 하시면 됩니다. 노아의 홍수. 길을 걷다가 비둘기를 보면, 평화의 상징? 아니고, 더럽다? 아니고, 노아의 홍수! 노아의 홍수 사건 때에 비둘기를 보내면서 비둘기를 통해서 새로운 창조 시대가 시작되었음을 알게 됩니다. 그러니까 성령이 비둘기 같이 내려오셨다는 것은 마치 성령이 비둘기 모습처럼 왔다는 뜻이 아니라, 비둘기의 역할을 우리 성령님이 보여주는 것이지요. 예수님에게 성령이 비둘기처럼 내려왔다는 것은 정리하자면, 우리 예수님께서 새로운 창조의 사역을 시작하게 된다는 뜻입니다. 우리를 구원하셔서 우리를 새롭게 창조하실 것이라는 놀라운 사역을 미리 보여주고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새롭게 창조하셨습니다. 죽었던 죄인들을 다시 새롭게 창조하여 주셨습니다. 이전 것이 지나갔고, 새 것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를 새롭게 창조하여 주신 구원자 예수님을 더 깊이 알아가는 저와 여러분 되시길 주님의 이름을 축복합니다.
마지막으로 이제 하늘로부터 소리가 나게 됩니다.
11 하늘로부터 소리가 나기를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하시니라
여기서 하늘로부터 소리가 나는 것은 하나님 아버지의 말씀이지요.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향해서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내 사랑하는 아들.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이러한 하나님의 말씀은 아까와 비슷하게 해석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원래는 그냥 평범한 사람이었는데, 세례를 받고,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다. 이런 해석은 매우 잘못된 해석입니다. 이러한 해석이 아니라, 아까와 같이 예수님의 정체를 미리 알려주는 말씀이라는 것이지요. 예수님의 정체를 1장에서부터 미리 계시하여 주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그렇기에 이제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이 분명하게 하나님의 아들로 선포될 것을 미리 보여주는 것이지요. 예수님께서 이스라엘의 강력한 왕이 되셔서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보여주는 게 아니라, 예수님께서는 어떻게 자신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보여주셨습니까? 십자가 위에서 고난을 받는 종으로서 자신을 하나님의 아들로 보여주셨습니다.
39 예수를 향하여 섰던 백부장이 그렇게 숨지심을 보고 이르되 이 사람은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 하더라
제자들도 예수님을 오해했습니다. 단순한 사람으로서 위대한 사람으로서 그렇게 뛰어난 한 명의 선생으로서 이제 왕이 되셔서 이스라엘을 정치적으로 다스리시는 그러한 왕으로 예수님을 오해했습니다. 그런데 우리 예수님께서는 그렇게 하심으로 하나님의 아들이라 보여주시지 않으셨습니다. 고난의 순종을 통해, 십자가에서 고통 받으시고, 하나님께 버림을 받으시는 그러한 고난의 순종을 통해서 예수님을 자신을 하나님의 아들로 나타내신 것입니다. 이제 이방인 백부장의 고백을 시작으로 여자들이 예수님을 만나고, 마지막으로 제자들이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믿고, 이제 예수님을 따라 자신들도 기꺼이 즐거워하며 고난의 길을 걸어가게 되었던 것입니다.
말씀을 정리합니다. 오늘은 한 가지를 놓고 집중적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쭉 흘러가는 대로 마가복음을 살펴보았습니다. 그 흘러가면서 저와 여러분들은 또다시 예수님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이제 예수님을 이 시간에 말씀 가운데 만났기 때문에, 저와 여러분들이 그 예수님 앞에서 그 예수님을 몰랐던 죄악을 다시금 회개하며, 그 예수님을 오늘과 같이 깊이 알아가며, 날마다 그 예수님을 보내주신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의 찬양을 올려드리는 저와 여러분 다 되시길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오늘 마가복음을 통해서 복음의 시작을 듣게 하시니 감사드립니다. 성령의 세례, 구원의 능력, 실제 구원을 베푸시는 그 예수님을 만나게 하여 주시니 감사드립니다. 하나님과 우리 죄인들 사이에 막혔던 하늘을 찢어주신 그 예수님 몰랐던 죄악을 회개합니다. 비둘기 같은 성령의 사역, 죄인들에게 새로운 창조의 사역을 행하신 예수님을 더 깊이 알아가게 하여 주시옵소서. 고난의 종으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보여주는 예수님께 날마다 찬송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감사드리며 구원자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