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마리아 여인(2) 요4:16-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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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마리아 여인의 변화를
사마리아 여인의 변화를
사람들이 자주 쓰는 말로 ‘내가 누군줄 알아’라고 합니다. 예전에는 통했습니다. 이 사람 뭔가 되는 사람이구나 싶었는데 요즘은 이렇게 반문 합니다. ‘니가 누군데’, 또는 ‘그래서 뭐 어쩌라고’ 처럼 되 돌아오는 말이 됩니다.
지난 주 본문에 예수님도 이렇게 말씀하셨던 것을 기억하실 겁니다. 10절에 ‘네게 물 좀 달라 하는 이가 누구인줄 알았더라면’이 바로 그런 표현이죠. 솔직하게 말해서 어떻게 알겠습니까? 우리는 그래서 명품이나 고급 차로 나를 좀 알아달라고 하죠. 그렇게 보이지 않으면 무시 당하기 때문이죠. 예전에 기억되는 외국 실험 하나가 바이올리니스트가 거리에서 공연할 때 사람들은 외면했지만 그는 대단히 유명한 바이올리니스트라는 것이였죠. 연예인이 되면 길거리에서 나를 알아볼까 알아보지 못할까를 매우 고민한다고 합니다. 그만큼 자신의 유명세를 판단하는 기준이 사람들이 알아보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그런 이유로 ‘나를 알았더라면’이라고 했을까요?
그렇게보기는 어렵습니다. 기억하시겠지만 이미 앞서 세례 요한의 제자가 그러한 유명세로 인해 마음에 생기는 갈등에 대해 세례 요한의 모습을 살펴 본적이 있습니다. 이렇게 ‘아는 것과 모르는 것’의 비교는 요한복음의 매우 중요한 일종의 ‘장치’입니다. 예를들어서 구약에 출애굽기서 모세가 애굽 왕을 만나서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을 내어 보내달라고 요구하자 애굽 왕은 거절했고 이어서 재앙이 닥쳤습니다. 그런 재앙에 대한 애굽 왕의 반응은 시덥지 않았고 결국은 10번의 재앙 그리고 자신의 아들이 죽고 나서야 어쩔수 없이 인정하게 됩니다. 결론적으로 말씀드리고 시작하고자 하는 것은 사람의 앎에는 하나님에 대한 앎이 없다는 의미이고 하나님 편에서 사람에게 앎을 열어주지 않는다면 우리의 지식으로 하나님을 아는 것은 그저 ‘어둠 속에서의 앎’에 불과한 것입니다. 이제 예수님께서 사마리아 여인의 무지함을 어떻게 열어 주시는지를 살피게 됩니다.
첫 번째가 ‘16절 네 남편을 불러 오라’입니다.
여러분 혹시 1장에서 나다나엘이 어떤 과정에서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로 고백했는지 기억하십니까? 기억을 소환하기 위해 요한복음 1:48 “48 나다나엘이 이르되 어떻게 나를 아시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빌립이 너를 부르기 전에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을 때에 보았노라”
‘너를 부르기 전에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을 때에 보았’다는 말씀으로 그는 이어서 고백을 하게 된 것입니다. 본문에서 ‘남편을 불러 오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남편이 없다’, 예수님께서 이어서 ‘네가 남편이 없다 하는 말이 옳다’ 그리고 18절에 ‘남편 다섯이 있었고 지금 있는 자도 네 남편이 아니니 네 말이 참되도다’라고 말합니다. 마치 점쟁이가 무엇인가를 맞추듯 숨기고 싶은 여자에게 일종의 부정적 팩트를 전한 것이죠. 예수님의 말씀은 앞서 ‘물을 좀 달라’는 모습과는 사뭇다릅니다. 그것을 알아차린 여인도 ‘주여 내가 보니 선지자로소이다’라고 말하는 것은 비록 선지자로 표현했지만 ‘참으로 용하십니다’는 차이와 그리크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예수에 대한 여인의 인식의 변화가 시작된 일종의 변곡점으로 그리고 있습니다. 39절을 앞서 보면 여인인 사마리아로 돌아가서 예수께서 자신이 행한 모든 것을 말하였다고 증언합니다. 우리는 자신을 아는 사람을 두려워 합니다. 그래서였을까요?
여인은 왠지 다른 주제로 대화를 넘어갑니다. 예배에 대한 정당성 즉 자신의 사마리아인이 그림심산에 세운 성전으로 예배하는 문제와 예루살렘에서 예배하는 문제는 선지자와 자연스럽게 연결되지만 일종의 테스트입니다. 그렇다면 선지자로 보이는 당신이 가장 큰 문제, 너와 나의 다른 점으로 절대 넘어설 수 없는 이것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던지는 것입니다. 자신을 이해할 것 같다면 그리심 산에서의 성전도 인정할 것이고, 유대인이라면 예루살렘의 성전만을 인정할 수밖에 없는 문제입니다.
이 문제를 풀려면 역사적인 상황을 조금 살펴야 합니다. 요한복음이 쓰여져 읽혔던 시대는 예수께서 십자가에 죽으심과 부활과 승천 후 로마의 장군 티투스에 의해 예루살렘 성전이 완전히 파괴되어 말 그대로 사라지게 된 70년을 넘어선 100년 어간에 기록되었습니다. 당시의 예루살렘의 많은 사람들은 유대, 사마리아 점더 멀리는 소아시아 지역으로 흩여지게 되었는데 이들을 ‘디아스포라’라고 부르게 된 것이죠. 예배의 구심점인 ‘예루살렘 성전’이 완전히 파괴되고 그들이 모였던 회당을 중심으로 예배의 형태가 바뀔 뿐만 아니라 유대인이 아닌 헬라인과 같은 이방인도 함께 하게 되었습니다.
이들이 지금 회당이나 어떤 모임장소에서 요한복음을 듣게 된다면 어떤 생각이 들까요? 그들은 불과 40-50년 전에 예수께서 성전이 있던 시기에 하신 이 말씀을 되짚으면서 무슨 생각을 하게 될까요?
계속해서 살펴보면 예수님께서는 먼저 ‘내 말을 믿으라’ 네가 나를 선지자로 인식했다면 선지자인 내가 하는 말을 믿으라고 먼저 여인을 설득합니다. ‘산에서 또는 특정 장소’가 아닌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른다’는 미래적인 경고인데 요한복음을 듣고 있는 성전을 잃은 독자들은 ‘경고가 성취’되었음을 알게 될 것입니다. 따라서 ‘예배란 무엇인가?’를 온전하게 깨닫게 되는 것이죠.
두 번째 예수님에 대한 인식의 변화는 예배에 대한 올바른 이해로 이어집니다.
왕국이 분열되며 구심점이 필요한 북 이스라엘은 자신들만의 성전를 만들었고 그것이 예수님 시대까지 이어졌고. 유다의 다윗의 계열을 따라 유대인은 예루살렘에서 성전을 중심으로 모였지만 앞에서 살핀 것처럼 제물을 사고 팔거나 돈을 바꾸는 등 이미 예배의 기능은 상실된 상태였습니다. 말 그대로 ‘참 되게 예배하지 못하는 시대’는 사마리아와 예루살렘 뿐만 아닌 오늘의 이야기입니다.
우리는 예수를 믿는다는 다양한 그룹을 알거나 참여합니다. 먼저는 교회이고 학교 동호회나 페이스북과 같은 곳 등 다양한 곳에서 그리스도인들을 만납니다. 그들에게서 저 사람이 정말 ‘예수를 믿는 사람인가?’하는 것, 그들의 말은 그러한데 아무리보아도 이건 아닌 것 같은 사람들을 보게 되면 정말 ‘참되게 믿는가?’하는 의구심을 갖게 됩니다.
대부분 신자는 사마리아 여인처럼 ‘남편의 문제’ 즉 우리 삶의 문제를 터치하는 정도에서 머물거나 종교적인 문제로 어디에서 어떻게 예배하는가에 대한 약간은 신학적인 문제로 시간을 허비 하며 보냅니다. 이런 문제가 중요하지 않은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보다 중요한 것은 예수에 대한 올바른 앎이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우리 자신의 영생과 직결되는 가장 중요한 문제이고 ‘믿는다는 것에 대한’ 올바른 구원관을 갖는 것이고, 참됨을 깨닫게 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것을 우리는 예배라고 부릅니다. 하지만 같은 용어를 쓰더라도 우리 주변의 그리스도인들이 예배를 ‘주일 성수’의 문제, ‘술과 담배’의 문제, ‘동성애’의 문제나 최근들어 좌파 우파의 문제로 바꿔버렸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 우리가 잘 아는 유명한 말씀을 하십니다. 23절(읽고)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온다’는 것과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아버지께서 찾는다’는 말씀이 연결됩니다. 진리는 무엇입니까, 가장 명확한 답은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알고 믿는 것입니다.
‘영’은 무엇입니까? 이러한 사실을 깨닫게 하는 것은 세상의 것이 아닌 예수님을 올바로 인식한다는 ‘앎’과 연결됩니다. 앞서 나다나엘은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신 진리를 예수께서 하신 ‘너를 안다’는 지점에서 출발 시킨 것입니다. 영은 그 자체로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우리가 영적이다, 이건 영에 관한 이야기다 하면 일상에서 벗어난 이야기, 믿고 안믿는 주관적 이야기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바로 성경의 말씀이 영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성경이 가리키는 대상이신 예수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그 답을 여인은 25절에서 하고 있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4:25 “25 여자가 이르되 메시야 곧 그리스도라 하는 이가 오실 줄을 내가 아노니 그가 오시면 모든 것을 우리에게 알려 주시리이다” 하지만 그녀는 예수님을 보고도 알지 못했습니다.
그리스도의 오심을 믿는 것이 진리라면 우리에게 알려주시는 방법이 ‘영’입니다. ‘육’으로는 깨달을 수가 없다는 것을 앞서 니고데모에게 하신 말씀과 정확하게 일치합니다. 요한복음 3:6 “6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영으로 난 것은 영이니” 거듭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께서 자신을 드러내십니다. 26절에 ‘네게 말하는 내가 그라’라고 하십니다. 마지막 대화인 이 말씀으로 그녀가 알고 있던 신학과 눈에 보인 예수님이 일치하는 순간 그녀는 어둠에서 밝음의 영역 즉 영의 일을 경험한 것입니다.
사마리아 여인의 놀라운 대화는 나다나엘의 변화 즉 ‘내가 보았다’라고 말하자 고백했던 바로 그 시점을 현미경으로 들여다보듯 보는 것입니다. 나다나엘에게도 ‘영과 진리’가 작동했고 그로 인해 ‘고백’하는 것 즉 예배에서 일어나는 일입니다. 이해를 돕기 위해
출애굽 이야기를 다시 하겠습니다. 출애굽은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 나가서 하나님을 경배하는 것이 목적입니다. 무엇을 경배합니까? 어려운 신학적인 용어와 내용이 아니라, 종되었던 애굽에서의 430년이 하나님의 말씀의 성취이며 구원하신 분이 하나님이심을 즉, 이러한 진리를 깨닫고 하나님의 통치하심, 왕으로 받아들여 그분의 백성으로 사는 것처럼 사마리아 여인은 예수님을 자신의 구주로 받아 들입니다.
세 번째 예배에 대한 이해와 변화는 삶과 연결됩니다.
대다수의 그리스도인들이 교회와 세상을 분리시킵니다. 아니면 어지중간한 회색지대에 머물러 있습니다. 진리는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 삶의 자리에서 일어나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출애굽한 백성은 시내산에서 하나님을 말 그대로 만납니다. 출애굽기의 19장부터 일어나는 일입니다’ 결과적으로 그들이 하나님을 만나러 올라간 산에서 하나님은 그들 속으로 거처를 옮김으로 끝이 납니다. 그것이 성막이죠. 성막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 임재하시는 것, 신약에서 예수께서 오셔서 그들 가운데 거하시는 것, 성령 하나님께서 이제 저와 여러분 마음에 임재하셔서 함께 하시는 것으로 (고전 3:16)즉 ‘거하는 것’의 문제입니다. 매일 매시간 우리는 하나님과 동행합니다.
그래서 그녀는 물동이를 버려’ 둡니다. 삶에 매일 같이 물을 길어야 하는 물동이를 버려 둡니다. 지금 우리는 물동이를 버려 두지 못합니다. 어제처럼 행동하고 어제의 연속에서 오늘을 피곤하게 살고 내일 즉 미래도 그럴 것이라고 예측해버리고 낙담합니다. 하지만 그 자리에서 물동이를 버린 그녀는 다른 곳이 아닌 자신의 동네로 다시 돌아갑니다. 그녀는 사람들에게 말합니다. 동네 사람들은 그녀의 삶을 아는 자들입니다. 남편 다섯이 어떻게 그리되었는지 그리고 지금도 남편이 아닌 자와 사는 그녀는, 말 그대로 누구하나 좋게 볼 일 없는 동네 사람들입니다. 그런 여인을 누가 취급하겠습니까? 그런데 그녀에게 일어난 일을 말합니다. 어쩌면 그녀는 남편을 만났을 때마다 동네 사람들에게 이번만은 정말 괜찮은 사람입니다. 라고 몇번을 말했을지 모를 여인이 이렇게 말합니다.
29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요한복음 4:29 “29 내가 행한 모든 일을 내게 말한 사람을 와서 보라 이는 그리스도가 아니냐 하니” 자세히 읽어야 하는 본문인데 ‘내게 행한 예수의 말이 아니라’ ‘내가 행한 모든 일을 내게 말한’입니다.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이 예수께서 자신에게 행한 것 즉 모든 것이 은혜라고 두루뭉술하게 말합니다. 하지만 사마리아 여인은 ‘내가 행한 모든 일’ 즉 남편 다섯을 얻기 위해 여인이 한 일, 지금도 결혼하지 않는 남편이라 부를 수 없는 남자와의 사는 삶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우리 나라 초기에 그리스도인으로 변화된 사람들은 ‘내가 그런 사람이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놀랐습니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내가 행한 일은 최대한 숨기고 예수께서 행하신 일 즉 ‘모든 것이 은혜’라고만 외치면서 오히려 사람들은 ‘왜 내게는 저런 은혜가 없지?’라고 은혜의 차등이 생기는 것처럼 되었습니다. 여러분 말끝마다 ‘하나님의 은혜라고’ 주문 외듯 말하는 사람들을 주의하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은 내가 행한 일을 다 아시는 분이십니다. 숨기고 싶은 수치스러운 것, 다른 이들도 다 알지만 서로 말하면 안되는 금기어 같은 것, 그렇지만 돌아서면 수근거리며 서로를 헐뜯고 상대의 약점과 고통을 퍼 나르는 것을 자신이 인정하는 일은 매우 고통스러운 일인데 예수께서 그녀의 삶을 그녀로 하여금 다시보게 하셨습니다. 그 결과 동네 사람들도 예수를 찾습니다. 찾을 뿐 아니라 39절에 ‘그 동네 중에 많은 사마리아인이 예수를 믿었고’, 40절 그들은 예수를 청하여 이틀을 함께 거하며 41절 예수의 말씀을 들음으로 말미암아 ‘믿는 자가 더욱 많아’ 졌다고 말합니다. 이들은 42절 (함께)‘우리가 친히 듣고 그가 참으로 세상의 구주신 줄 앎이라’고 고백함으로 예수님이 세상의 구주, 즉 하나님의 아들로 다시 오신 그리스도이심을 ‘알게’된다고 마무리합니다.
이러한 해설은 그 중간 34절부터 37절까지 예수님의 말씀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반드시 통과해야만 했던 필연적인 사마리아에서, 예수님이 쉬고자 머물렀던 우물에서, 먹을 것을 사러 떠난 제자들이 없는 기회를 기회로 삼은 예수님은 자신의 양식을 사러 떠난 자리에 자신의 양식을 위해 물을 길러 온 여인에게 진정한 양식을 먹이시고 있습니다.
진정한 양식이 무엇인가요? 34절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 일을 온전히 이루는 것’ 인데 사마리아 여인은 예수님과의 대화를 통해 뜻을 알았고 그일을 행함으로 그녀는 매일의 양식인 물 깃는 것보다 영의 양식이 무엇인지 맛 보았고, 이러한 예수의 행동이나 사마리아 여인의 행동은 ‘추수할 때’를 염두한 중요한 의도에서 나타납니다.
안타깝게도 이 말씀에 대한 오해는 신천지와 같은 이단이 젊은 청년들을 유혹하는 말로 사용합니다. 살아야할 ‘일상’을 버리고 추수때이므로 주님의 일을 하라’는 것이죠. 그것을 증명하듯 본문을 사용합니다. 하지만 잘못되었습니다. 그들은 ‘영과 진리’로 이루어지는 것을 깨닫지 못했을뿐만 아니라 철저하게 인간의 ‘이익’을 위해 고안한 거짓교사들입니다. 한편으로 사람의 마음을 얻기 위해 필요한 전략 전술을 교묘하게 사용하는 거짓된 자들입니다. 눈에 보이는 친절로 속여 예수를 알게 해주겠다고 접근하는 방식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말씀을 마무리하겠습니다.
‘믿음’에 관한 문제입니다. ‘믿음’은 곧 ‘세상의 구주’ 이신 에수님에 관한 문제입니다. 이것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예수께서 우리를 구원하러 오신 길은 우리가 따라가는 길이지 예수처럼 되는 길이 아닙니다. 37절 한 사람이 심은 것 즉 구원을 위한 예수님의 길은 이미 성경을 통해 우리에게 밝혀졌습니다. 사마리아 여인의 믿음은 거두신 예수님 즉 하나님의 뜻을 따라 그녀의 삶에서 거두었고 그녀의 삶은 그녀의 동네에서 이루어졌습니다. 3장에서 세례 요한은 신랑의 친구처럼 참여했고, 사마리아 여인은 자신에게 주어진 삶의 굴레를 벗음으로 기쁨에 참여했습니다.
요한복음의 또 다른 주제가 ‘기쁨’입니다. 기쁨은 개인에서서 공동체로 번져 나갑니다. 기쁨이야말로 가장 강력한 복음의 증거입니다. 우리는 삶이 한 순간에 바뀐다고 착각합니다. 어찌보면 사마리아 여인도 예수를 만나는 시간을 통해 변화된 삶으로 나타났기 때문에 그렇게 보일 것이지만 그녀는 내일도 물을 길러 왔을 것입니다. 그러나 전날의 그녀가 아닌 그리스도인으로 왔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동네에서 그녀의 삶은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그 증거는, 사마리아는 4복음서 뿐 아니라 계속해서 사도행전에서도 나옵니다. 예수의 죽으심 이후 박해받은 사람들이 피한 곳 중하나가 사마리아이기도 합니다. 사도행전 9:31 “31 그리하여 온 유대와 갈릴리와 사마리아 교회가 평안하여 든든히 서 가고 주를 경외함과 성령의 위로로 진행하여 수가 더 많아지니라” 여기에 ‘사마리아 교회’가 라고 드러난 부분을 유의깊게 보십시오. 그렇게 믿음이 올바르게 선 곳에 하나님의 교회가 세워집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