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의 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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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5:1-6
흔희 ‘먹방’이라고 하는 TV프로그램들이 있지 않습니까? 방송국마다 요리사와 음식 전문가들이 직접 요리하는 모습을 보여 주거나, 배우나 연예인들을 내세워 전국 맛집을 찾아가 먹는 장면을 보여 주기도 하는데요.
저는 그중에도 몸집 큰 연예인 네 명이 유명 음식점들을 찾아다니며 엄청난 양의 음식을 먹는 <맛있는 녀석들>이라는 프로그램이 흥미롭더라고요. 몸집이 큰 네 명의 방송인들이 경쟁적으로 맛있게 먹는 모습을 보고 있다 보면 '나도 저기 가서 먹어 보고 싶다'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언젠가 그렇게 다 먹은 후에 방송이 끝나려고 하는데, 느닷없이 한 출연자가 “이렇게 먹으면 뭐 해?”하는 짧은 멘트를 하는 거예요. 나머지 세 명의 동료들도 그런 대사는 예상을 못 했는지 동작을 멈추고 서로 얼굴을 쳐다보았던 장면이 짧은 순간이지만 의외이기도 했고 꽤 여운이 있었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먹기 위해 사나요? 살기 위해 먹나요?" 어떤 경우든 잘 먹고 잘 마셔야 사람은 행복하게 살 수 있지 않습니까? 반면에 먹지 못하고 마시지 못한다면 불행할 뿐만 아니라 건강과도 연결이 되기 때문에 생명에 지장이 생길 수도 있잖아요? 사실 우리 인간은 ‘주리고 목마르게 되면 어쩔까?’ 걱정하고 염려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우리 주님은요 “주리고 목마른 자가 배부르다”라고 역설적으로 말씀하십니다.
오늘은 이제 팔복의 네 번째 복인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가 받는 복”에 대해 은혜를 나누어 보도록 하겠는데요. 오늘 요절 말씀인 5장 6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6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배부를 것임이요
여러분, 어떻게 주리고 목마른 사람이 행복을 느낄 수 있을까요? 출애굽기를 보면 모세의 인도로 애굽을 탈출하여 홍해 바다를 건넌 이스라엘 백성들이요. 사흘 만에 수로 광야에 도달하게 되는데, 거기서 물이 떨어진 거예요. 마침 오아시스 하나가 있었는데 썩어서 마실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쓰다는 뜻으로 '마라'라고 했던 것이죠. 모세가 하나님께 부르짖자 하나님께서 그에게 한 나무를 보여 주시죠. 그 나뭇가지를 꺾어 연못에 던졌더니 쓴물이 단물로 바뀌었습니다. 그걸 마신 백성들의 기쁨이 어땠겠어요? 목마른 상황에서 쓴물을 먼저 맛보았기 때문에 달게 바뀐 그 물이 더욱 감격스러웠을 겁니다. 그리고 두 달을 더 행진해서 신 광야에 도착하게 됩니다. 그런데 애굽에서 가져온 양식이 떨어졌어요. 그래서 또 백성이 모세와 아론을 원망합니다. “아니, 우리가 애굽 땅에서 고기 가마 곁에 앉아 있던 때와 떡을 배불리 먹던 때에 여호와의 손에 죽었더라면 좋았을 것을, 당신이 이 광야로 우리를 인도해 내어 이 온 회중이 굶어 죽게 만드는 거요?” 이때도 모세는 그저 듣고만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 말씀을 주시는 거예요. “너희가 해 질 때에는 고기를 먹고 아침에는 떡으로 배부르리니 여호와 너희 하나님인 줄 알리라.”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때부터 만나와 메추라기를 먹게 되지 않습니까? 배가 잔뜩 고팠다가 먹으니 얼마나 꿀맛이었겠어요? 그래서 백성들이요. “맛이 꿀 섞은 과자 같았다”라고 할 정도였습니다. 이제부터는 아무런 수고도 하지 않고도 매일 고기와 곡식을 먹게 되었으니 이런 행운이 또 어디 있겠어요?
자! 이제 그들은 계속 행진하여 르비딤 광야에 이르게 됩니다. 그런데 거기서 또 물이 떨어져요. 심지어 쓴물도 없어요. 모래사막에 다 바위투성입니다. 절망에 빠진 백성들이요. 또 누굴 찾아가요? 또 모세를 찾아가 원망을 하는 거예요. (제가 모세이면 정말 도망갈 것 같아요) 심지어 이번에는 백성들이 죽일 기세로 달려들면서 “왜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해 내서 우리와 우리 자녀와 우리 가축이 목말라 죽게 하느냐?” 막 따지는 거예요. 다급한 모세가 또 하나님께 부르짖습니다. “어찌하면 좋습니까? 저들이 조금 있으면 내게 돌을 던지겠나이다.”
그때 하나님의 말씀대로 모세가 지팡이로 바위를 치자, 어떻게 되었어요? 그 속에 저장되었던 생수가 터져 나오는 거예요. 사막 뜨거운 열기에 목말라 죽을 지경이었던 백성들이요. 암반수 생수를 마셨으니 그 감격이 또한 얼마나 컸겠습니까?
자, 그런 식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여호와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는가, 아닌가?" 계속 시험을 했습니다. 그리고 먹을 양식과 물이 떨어져 주리고 목말라 죽을 위기에 처할 때마다 먹고 마실 것이 공급되는 기적을 체험하면서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키워나갔던 것이죠. 어떤 믿음이었겠어요? 물이 없어도, 양식이 떨어져도 하나님만 함께 계시면 된다는 믿음이었습니다.
여러분, 혹시 인생을 살아가시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왜 내 인생은 이렇게도 복이 없을까?’ ‘왜 이 모양일까?’ 이렇게 생각하시는 분 계십니까? 그러시다면 인생을 보는 관점을 바꾸어 보시길 바랍니다.
우리가 네 번째 복에 이르기까지 복에 대한 어떤 흐름을 발견할 수가 있는데요. 첫 번째는 심령이 가난해야 천국의 문턱에 설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 후에 천국 문이 열리면 어떻게 돼요? 그 첫발을 애통하고 회개함으로 들어가며, 천국 백성다운 온유함이 나타나게 됩니다. 그리고 그 온유함은 삶의 방향을 올바로 향하게 해 주는데 그게 바로 “의”를 향해 갈급한 삶을 살게 해 준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의’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갈망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의에 주리고 목마르다는 것은 주님의 뜻을 따라 사는 것을 의미하거든요. 우리가 주님의 뜻을 따라 살아가되, ”주리고 목마른 것처럼“ 살아야 하는 이유가 뭔지 아십니까? 우리가 이런 주림과 목마름이 아니고는 이 유혹 많은 세상에서 예수님의 뜻을 따라 사는 것이 쉽지 않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을 곧바로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지 않으셨습니다. 처음부터 배불리 먹이고 풍족하게 하지도 않으셨고요. 먼저 목마르게 하시고 굶주리게 하셨어요. 갈증과 배고픔을 겪은 후에 원망이든 부르짖음이든, 그들이 하나님을 향할 때 물과 양식이 공급되었던 것입니다.
갓난아기가 울지 않으면 젖을 물리지 않잖아요? 마찬가지로 목마름과 굶주림이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수 있는 조건이 된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그래서 실은 광야에서의 40년을 보낸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이 공급해주시는 물과 양식으로 배불리 먹으며 행복한 여정을 마칠 수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모세가 느보산에 올라가서 저 멀리 요단강 건너편 가나안 땅을 바라보면서 유언을 담은 설교를 했을 때, 이런 당부를 했던 것입니다. 신8:2-3 합독
2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사십 년 동안에 네게 광야 길을 걷게 하신 것을 기억하라 이는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네 마음이 어떠한지 그 명령을 지키는지 지키지 않는지 알려 하심이라
3 너를 낮추시며 너를 주리게 하시며 또 너도 알지 못하며 네 조상들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네가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
여러분, 이 말씀이 무슨 뜻인지 아시겠죠? 입으로 들어가는 육적인 만나(떡)보다 더 중요한 것의 귀(마음)로 듣는 마음 즉 영적인 말씀이라는 것 아닙니까? 가나안 땅에 들어가면 이제 만나는 더 이상 내리지 않을 것이고 농사를 지어먹고 살아야 하는데, 그렇더라도 보이는 물질보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소중하게 여기라는 마지막 유언이었습니다.
우리 성도님들은 마지막 유언으로 어떤 말을 준비하셨습니까? 사람이 한 평생 먹고 사는 문제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영적인 양식인 말씀! 말씀 붙들고 살아야 해! 우리가 그런 유언의 말을 준비해야 하지 않을까요?
그런가하면 예수님을 보십시오. 어느 날 예수님은 산 위에 오르셔서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가 복이 있다는 너무도 부담스러운 가르침을 주고 계시는 겁니다. 당시에 이스라엘은 로마의 속국 아니었습니까? 아시다시피 로마는 힘이 지배하던 제국이었습니다. 힘의 원리를 따르던 로마인들이 ‘의’를 어떻게 이해하고 있었을까요?
당시에 로마는 누가 나를 다치게 했으면 참아서는 안 되는 겁니다. 그것은 오히려 비굴한 행동이기 때문에 더 잔인하게 복수를 하는 게 로마식의 정의였습니다. 그런 사상에 지배받던 시대의 사람들에게 예수님이요.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배부를 것이다”라고 하시는 거예요. 마 6:33 합독
33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너무 익숙한 본문이다 보니 다 안다고 생각하실 수도 있는데, 처음 보는 것처럼 낯설게 보시길 바라요. 팔복처럼 ‘의’가 등장을 하는 것 같은데 앞에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즉 너희는 먼저” 여러분, 이 ‘먼저’라는 개념이 뭘까요? 일의 순서를 말하는 걸까요? 저도 이번에 알게 되었는데요. ‘먼저’라는 표현은 우선순위를 말하는 게 아니고 가장 최고의 가치를 뜻한다고 합니다.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은요. 우리가 생각하는 산수의 개념과 좀 다릅니다. 히브리인들은 먼저, 우선, 숫자 1, 장남(장자) 이런 거는요. ‘첫 번째’라는 순서를 의미하는 게 아니고, 말 그대로 모든 것, 전부를 뜻합니다. 예를 들어 집안의 장자는 그 집안의 모든 것이에요. 그래서 출애굽 전에 애굽의 장자의 목숨을 가져가신 것은 그 집안의 모든 것을 가져가신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라”는 말씀은, 하나님의 나라와 ‘의’ 이거 하나면 다 된다는 겁니다. 이게 전부라는 거예요. 가장 최고의 가치이고 이제 로마의 방식이 아닌 하나님 나라의 새로운 방식으로 살아가라는 말씀입니다.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어떻게 하신다고요? “더하시리라!”
그러면 이 “더한다”는 말은 무슨 뜻일까요? 성경에서 ‘더한다’는 말은요. 우리가 흔히 아는 것처럼 이미 하나를 줬는데 1+1처럼 하나 더 준다는 그런 의미가 아닙니다. 바로 이 ‘더한다’는 말이 전부, 모두라는 의미로서 나를 만족하고 배부르게 하신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6장 31절, 32절에 기록된 것처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하십니다. 왜?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기 때문에”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라” 다시 말해 양식이나 의복보다 먼저 구할 것은 “의(義)”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약성경에서 ‘의’라고 번역이 된 헬라어 ‘디카이오수네’(δικαιοσύνη)는 성품이나 행동이 ‘흠이 없고, 곧다’라는 의미로 ‘흠잡을 것이 없는 올바른 마음가짐과 행동거지’를 의미하는데요. 옛날 어른들이 한글로 번역하면서 이것을 ’사람의 바른 도리‘라는 뜻의 ’의‘로 번역을 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다윗의 시를 보면은요. 자기가 가난하다고 선언을 합니다. 왕인데 왜 가난해요? 자기 안에 의가 하나도 없거든요. 그래서 그가 밧세바와의 범죄 후에 구하는 것 단 한 가지가 “주의 성령을 거두지 마옵소서(시51:2)” 아닙니까?
여러분, 다윗의 이런 고백이 왜 절절한지 아십니까? 그가 인생의 절정을 찍을 때는요. 다 얻었을 거로 생각했을 것입니다. 국가의 재력이나 군사력이 절정을 찍을 때 되돌릴 수 없는 실수를 합니다. 밧세바와의 범죄로 나단 선지자의 지적 앞에 고꾸라지고요. 그냥 ‘악’ 소리도 못 지르고 무너져 버립니다. 다윗이 얼마나 절망을 했는지 수많은 밤을 눈물로 침대를 씌웠다고 하잖아요?
그러면서 다윗이 처절하기 자기 존재에 대해서 무너진 이후에 그가 발견한 게 뭐예요? ‘아! 인간은 이래서 중보자가 필요하구나’ ‘인간은 그래서 누군가 하나님 거룩하신 하나님과 이 죄 덩어리에 불과한 파산 받은 존재 나 사이에 구원을 위해서 누가 도와줄 중보자가 필요하구나’ 이걸 깨닫게 된 거예요.
다윗이 사울에게 쫓겨 다닐 때, 얼마나 주리고 목말랐습니까? 그때 다윗은요. 도망을 다니면서도 하나님만 의지하며 도망 다녔습니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했던 자 아니었습니까? 그가 또 얼마나 영적으로 영민했는지, 사울을 여러 차례 암살할 기회가 있었음에도 기름 부음을 받은 자를 해 할 수 없다며 죽이지를 않아요. 그렇게 주리고 목마를 때는 먼저 하나님의 의를 구하게 되더라고요. 그것이 최고의 가치이자, 그의 유일한 선택이 됩니다.
그런가 하면 다윗 주변에는 의에 주리지도 않고 목마르지도 않은 사람이 있었습니다. 바로 사울과 같은 사람 아닙니까? 그는 탁월하고 준수한 인물이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이 세우신 왕이었고 다윗이 자신의 뒤를 이어 이스라엘의 왕이 되어야 한다는 것도 알고 있었지만, 끝까지 자기 뜻, 자기 생각, 자기 계획과 주장만을 내세운 자기중심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냥 다 내 뜻대로예요. 여러분, 그런 사울의 마지막을 여러분들 잘 아시죠? 결국에는 하나님께 쓰임 받지 못하고 버림받은 인생으로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잖아요?
여러분, 하나님이 아닌 내가 왕이 되었을 때는요.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지 않고 내 나라가 세워집니다. 가정도 그럴 수 있고 교회도 그럴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공의와 정의가 아닌 내가 옳다는 것, 나를 위한 것, 나의 주림과 목마름을 채울 것들만 찾게 됩니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것이 아닌 것은 자기 중심성으로 끝까지 살아가게 됩니다.
성경의 역사와 교회사를 보면은요. 예수님을 믿어 의롭다고 함을 얻은 사람들의 이야기가 많이 나옵니다. 막달라 마리아와 바울이 그랬고요. 디모데와 디도가 그랬습니다. 오네시모와 빌레몬이 그랬고 어거스틴과 루터와 웨슬리가 그랬습니다. 평양대부흥 운동의 원동력을 제공했던 하디선교사가 그랬고요. 김익두 목사님 같은 분들이 그랬습니다.
하나같이 죄인으로 살면서 의에 주리고 목말라하다가 주님을 만난 후에 의인으로 살 때는 배부르게 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시편 42편을 통해 그의 목마름을 이렇게 고백하지 않습니까? “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나이다”(시42:1)
우리가 배고프고 목이 마르면 물을 찾거나 음식을 찾는 것처럼 의에 주린 자는 의를 찾게 되어 있습니다. 메시지 성경을 보니까요. ‘의’라는 말을 하나님을 향한 갈망이라고 표현하고 있어요. 조금 세상적인 표현으로 하자면, ‘하나님께 입맛이 당긴다’라는 뜻입니다. 결국 우리가 하나님을 바라거나 추구하지 않는 이유가 뭐죠? 하나님께 입맛이 당겨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시편 기자는 이런 표현을 썼던 것 아닙니까? “너희는 하나님을 맛보아 알지어다(시34:8)”
과거 독립운동에 목말라 있던 분들은 독립운동가가 되었습니다. 민주화 운동에 목말라 있던 분들은 민주투사가 되었습니다. 통일에 목말라 있는 분은 통일 운동가가 되었습니다. 요즘은 시청자들의 대리 만족으로 수없이 많은 먹방을 하게 됩니다. 그렇게 많이 먹었는데 그다음은 뭐예요? “이렇게 먹으면 뭐해?” 이러는 거예요. 여러분들은 무엇에 목마르고 굶주려 계십니까?
저 역시 겉으로는 심령이 가난해지는 제자의 삶을 따르는 것 같아도요. 저도 어느 때는 잘나가던 다윗이나 사울의 길을 따르고 싶을 때가 많더라고요. 제가 의에 대한 목마름이 없으니까요. 제 시야가 막 좁아져요. 시야가 좁아지고 보니까 저 가난한 것밖에 안 보여요. 제가 없는 것밖에 안 보여요. 남들이 잘 되는 것만 부럽게 보이고요. 말씀이 눈에 막 안 들어와요. 주리고 목마르니 불행하기만 하더라고요.
여러분,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면서 남기신 말씀이 뭐예요? “내가 목마르다” 아닙니까? 아니 그 당시 유대인들중에 하나님의 아들 메시아가 저주의 상징인 십자가에 달려 처형당하면서 “목마르다”고 할 줄 누가 상상이나 했겠습니까?
우리가 목마르고 죽어야 할 자리에서 예수님이 대신 목마르고 물과 피를 다 흘려 죽어주셨는데, 언제부턴가 나 목마르고 배고픈 것 때문에, 그 십자가에 달려 나 대신 죽으신 예수님이 안 보이기 시작하는 거예요. 눈물 골짜기를 지나야 생명 샘이 보이는데, 그게 싫은 거예요. 그냥 주시면 안 되나요? 먼저 더해주시고 제가 의를 구하면 안 되는 겁니까? 먼저 배부르게 해 주시면 좋잖아요? 우리가 이러고 있는 것 아닙니까? 그래서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배부를 것임이요” 이 본문을 히브리어 원본에 가깝게 해석하면 이렇습니다. (화면)
“행복하구나!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여! 그들의 영혼이 만족 될 것이다.”
왜 이렇게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가 행복한 사람인가? 우리의 영혼이 만족할 것이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여러분, 우리 인생이 그저 먹는 방송처럼 보이면 안 되잖아요? ‘이렇게 먹으면 뭐해?’ “이렇게 하면 뭐해?” 우리가 이러면 안 되는 것 아닙니까? 하나님을 갈망하고 그분의 의를 갈망하는 인생은 제아무리 눈물 골짜기를 수없이 통과한다 하더라도 나 혼자 통과하는 게 아니라, 주님이 함께하신다는 것을 아니까 힘을 낼 수 있는 것이죠. 우리 모두에게 그런 은혜가 있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이사야 58장 11절(혼자)
11 여호와가 너를 항상 인도하여 메마른 곳에서도 네 영혼을 만족하게 하며 네 뼈를 견고하게 하리니 너는 물 댄 동산 같겠고 물이 끊어지지 아니하는 샘 같을 것이라
시편 63편 1절(혼자)
1 하나님이여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라 내가 간절히 주를 찾되 물이 없어 마르고 황폐한 땅에서 내 영혼이 주를 갈망하며 내 육체가 주를 앙모하나이다.” 이 말씀이 어디로 연결되는지 아십니까? 시편 63:4 합독
2 이러므로(접속사) 나의 평생에 주를 송축하며 주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나의 손을 들리이다 골수와 기름진 것을 먹음과 같이 나의 영혼이 만족할 것이라
오늘 이 자리에 나오신 분들 중에 “내 인생 이렇게 살면 뭐해?” “난 여전히 만족감이 없는 걸!” 하시는 분들이 계신다면 하나님이 주시는 골수와 기름진 것으로 영혼의 만족감을 누리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1916년에 증축한 서울 정동제일교회의 머릿돌에는 이런 글귀가 새겨져 있다고 합니다. “주리고 목마른 자는 오시오. 참된 양식과 생명의 물이 여기에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만이 우리에게 궁극적인 만족을 주실 줄로 믿습니다. 그래서 이 팔복의 말씀들은요. 우리의 시야를 넓혀주는 말씀이에요. 다윗이요. 사울에게 쫓겨 다닐 때는 사울만 보이던 그가 시야가 넓혀지고 나니까 요나단도 보이고 그를 따르는 아둘람 공동체가 보이는 거예요.
그래서 지난 한 주 내내 제가 새벽에 기도한 제목이 뭔지 아십니까? “시야를 넓혀 달라는 거에요.” 20대, 30대 철없을 때는 뭘 달라는 기도 할 수 있죠. “해 주시옵소서!” “언제까지 주시옵소서” 이런 기도 할 수 있잖아요? 그러나 제가 모태신앙인으로 담임목사도 되었고 곧 50이 다 되어가는데, 언제까지 눈앞에 보이는 것들만 구하겠습니까? 제 시야가 넓혀져야 해요.
마찬가지로 여러분, 시야를 넓혀달라고 기도하세요. “내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반드시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거하리로다(시23:6)” 다윗과 같이 영원을 보는 눈이 넓혀질 줄로 믿습니다.
오늘 말씀을 마치면서 저는 여러분들에게 이런 질문을 드리고 싶습니다. 여러분들 주보 설교노트를 보면 그 질문이 있는데요.
“나에게 있어서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의 복은 ( )이다.”
저는 이 질문을 가지고 한 주간 내내 고민해 봤거든요. 제가 좀 시야가 넓혀진 상태가 되고 보니까 이런 답을 내리게 되었습니다. (화면)
“나에게 있어서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의 복은 (하나님의 꿈의 동역자로 빚어져 가는 것)이다.”
여러분들은 어떤 답을 쓰고 싶으신가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진짜 의에 주리고 목마름으로 간절히 주님을 찾는 사람들에게는 반드시 만나주시고 빚어가실 줄로 믿으시길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삶에 그분의 동역자가 되어 나를 맞추는 길이야말로 소망이 있는 길 아닙니까? 그런 사람에게 왜 하나님께서 더하여 주시는 복을 주시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에 대한 열망이 다른 결핍과 욕망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길이 될 줄로 믿습니다.
우리 모두에게 그런 은혜와 사랑이 충만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찬양 : 우물가의 여인처럼
❙합심기도
여러분, 우리 이제 함께 기도하시는데요. 우리 인생이 그 먹방에서 “이렇게 먹으면 뭐해?” 하며 나도 모르게 진심이 터져 나온 것처럼 “이렇게 살아서 뭐해?” 이런 인생이 되면 안 되잖아요? 오늘은 다른 것 구하지 마시고요. 이렇게 기도하세요. “주님, 저 갈급합니다. 주리고 목말라 있습니다. 하나님만을 갈망합니다. 하나님의 임재를 구합니다. 제 영혼의 온전한 만족만을 주시옵소서” 주님의 이름으로 한 번 크게 부르시고 함께 통성으로 기도하시겠습니다.
❙마침 기도
살아 계셔서 언제나 우리와 함께 하시는 아버지 하나님!
하나님을 갈망하는 인생은 그 어떤 고난의 길을 통과한다고 해도 나 혼자 통과하는 것이 아님을 알기에 힘을 낼 수 있는 줄로 믿습니다. 그러나 주님, 주리고 목마른 우리가 좁은 시야를 가지고 헛되고 헛된 것만을 구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요? 주님, 우리의 좁은 시야를 넓혀 주시옵소서! 이제는 무엇을 달라고만 하는 기도가 아닌, 의에 주리고 목마름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가길 원합니다.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먼저 구할 때 또 하나님의 동역자로 살 때 꿈을 주시고 더하여 주시는 복이 있는 줄로 믿습니다.
이제 우리의 목마른 잔을 채우시고 영혼의 만족감을 더하여 주시옵소서. 하나님의 꿈의 동역자로 당당하게 살아가게 하여 주시옵소서. 모든 것을 주님께 맡겨드리며 사랑이 많으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축도
이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크신 사랑과 성령님의 교통하심이, 오늘 말씀으로 좁은 시야를 넓혀서 주리고 목마른 인생이 아닌, 골수와 기름진 것으로 영혼의 만족을 누리며 살아가길 다짐하는 사랑하는 교우들 머리 머리 위에 지금부터 영원히 함께 계시기를 간절히 축원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