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려움, 그 거룩한 체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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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려움의 그림자-외식
두려움의 그림자-외식
‘그래비티’ 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보신 분도 계시겠지만,
내용은 사고로 인해 망망한 우주공간에 표류하게 되면서 영화가 시작 됩니다.
저 끝없는 우주을 바라보면 처음에는 하늘을 수놓은 은하수며 별을 보면 아름답습니다. 하지만 여러분 상상해 보십시오. 저 별과 별 사이의 거리는 빛의 속도로 가면 몇백년씩 가야할 만큼 멀리 떨어져 있고 그런 별들이 셀 수 없이 있는 것이 우주 인데, 그곳에 아무런 의지가 없이 그 어떤 연결점 없이 떠가고 있다고 생각해보십시오. 아마 그것은 공포 그 자체 일것입니다.
실제 사건 중에도 우주정거장 미르에서 300일을 혼자 남겨졌던 우주선 엔지니어도 있었습니다.
먼저, 그들에게 던져진 공포는 죽음의 공포 였을 것이고 그 다음은 단절의 공포 였습니다.
두려움의 원초적인 모습은 우리의 가장 약한 시절, 갓난 아기 시절 부터 경험한 엄마와의 단절의 두려움 입니다. 애착 형성기가 장래의 성격형성이나 사회생활에 많은 영향을 준다고 합니다.
오늘 본문의 여러 각도로 해석 할 수 있겠습니다만 오늘은 ‘두려움' 이라는 키워드로 살펴 볼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가 두려움에 휩싸였을때, 그 거룩한 체험을 통해 하나님에 대해 알게되는 과정과 인간의 반응에 대해 말씀해주십니다.
그 반응에는 크게 두 가지 측면이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하나는 창조주를 깨닫게 되는 경외심이라는 종교심으로
원시종교의 시작을 가장 잘 설명해주는 용어는 ‘누미노제' 라는 개념이 있습니다.
‘누미노제’ Numinose
-Rudolf Otto 누돌프 오토(독일 신학자)-
하나님을 인식하는 방법 중에 가장 원초적이고 확실한 방법은 바로 하나님의 거룩함과 압도적인 능력을 체험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경탄과 두려움과 존경심을 경외심 이라고 부릅니다. 이것이 누미노제 입니다.
인간은 그 존재가 창조된 이후로 이 두려움과 함께 했습니다.
에덴동산의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의 위대한 창조질서에 경탄 하면서도 한편으로 경외심을 갖고 청지기로 역할을 감당합니다.
가인은 형제를 살인한 후 죄의 눌려 두려움에 떨며 하나님을 피해 숨습니다.
이 경외심이 하나님께로 향했을때 인간은 하나님을 인식하게 되지만
반면에, 인간의 방식으로 이 두려움을 해결하려 하면 어처구니 없는 결과를 낳게 됩니다.
야생동물의 습격과 기근과 자연재해는 인간을 떨며 두려워 하게 하였습니다.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도 이 생존이라는 미션 앞에서 종종 두려움에 휩싸여 본 경험을 하게 됩니다.
고대 인간들은 이 두려움에서 안전을 보장 받기 위해 동물이나 큰 나무나 큰 바위 등의 자연물을 신으로 섬기게 됩니다. 이것을 에니미즘, 토테미즘 이라고 합니다.
또한, 정령이나 귀신을 숭배하고 그 영적 능력을 숭배하는 것을 샤며니즘 이라고 합니다.
현대에는 이 모든 것들이 존재 하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강력한 힘을 발휘 하는 것은 맘모니즘 입니다. 바로 돈만 있으면 미래와 건강과 행복을 보장 받을 수 있다고 믿게 해줍니다.
신앙에 있어서 호환마마 보다 더 무서운 것이 맘몬 입니다.
이 두려움에는 이렇게 어두운 면이 존재 합니다.
두려움이 갖는 이 어두운 면을 두려움의 그림자라고 부르겠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이 두려움의 그림자 중에서도 인간의 거짓된 가면에 대해 설명 하십니다.
그것은 바리새인들의 누룩, 외식 입니다.
바리새인들의 누룩, 외식(外飾)
그 동안에 무리 수만 명이 모여 서로 밟힐 만큼 되었더니 예수께서 먼저 제자들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바리새인들의 누룩 곧 외식을 주의하라
주님은 이 외식에 대해 여러번 주의를 시키십니다.
외식- ‘각색 하다' 연극을 하는 연기자가 관객 앞에서 연기를 하는 것에 어원이 있습니다.
진짜 처럼 보이면 성공이고 어설프면 실패
백성들 앞에 거룩하고 영적인 사람 처럼 보이기 위해, 과장하고 거짓된 모습으로 본래 모습을 숨기는 것을 말합니다.
외식을 경계 하라고 주님은 말씀 하시고 계십니다.
여기서 주님의 표현 중에 우리가 놓치지 말아야 할 표현이 등장 합니다.
그것은 “누룩" 이라는 것입니다.
누룩은 어떤 식품에 달라 붙어 그 성질을 변화 시킵니다.
예컨데, 밀가루에 넣으면 부풀어 오르게 하고 구수한 맛과 향기를 만들어 냅니다.
쌀에 넣으면 막걸리가 됩니다. 콩과 만나면 청국장이 됩니다.
주님이 경계 하는 것은 바리새인들이 백성들에게 끼치는 영향력 입니다.
바리새인들의 행실과 신앙이 진실되고 배울만 하다면 괜찮지만
외식적이고 진리에서 멀어졌다면 그 악영향은 순식간에 퍼지게 되고 그 화학 반응은 다시는 되돌릴 수 없을 만큼 강력 합니다.
당시, 종교지도자들은 백성이 따라 배우는 롤모델 이었습니다.
그들의 종교생활은 백성들이 하나님을 섬기는 방법을 제시 했습니다.
기독교인들의 삶은 누룩과도 같습니다. 요즘말로 인풀루언서 입니다.
구한말 사회를 개혁하고 더 좋은 세상으로 만들기 위한 일에 선봉에는 항상 선교사들과 그들을 통해 개종한 기독교인들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 나라의 독립을 위해 목숨을 걸고 싸우던 사람들은 많은 사람들이 기독교인 이었습니다.
3.1 운동을 통해 일본 경찰과 검찰에 구금되고 송치 된 사람들의 51%가 기독교인 이었습니다.
백범 김구 선생도 감리교인 이었습니다.
기독교인들이 남긴 수 많은 좋은 영향력은 이루 헤아릴 수 없습니다.
우리가 진실되게 하나님을 섬기고 그에 맞는 삶을 살아야 세상도 좀 더 나아질 수 있습니다.
쓰레기 분리해서 잘 버리고
어려운 이웃들 돌봐주고
선하게 살아가가야
이 세상에 살아갈 맛이 나고 향이 납니다.
외식은 그 당시 백성들에게 나쁜 영향을 주었습니다.
외식은 본래의 자신의 모습을 숨기고
거룩한 척, 영적인 척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자신도 하지 못하는 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강요하고
죄책감을 주어 자신의 뜻데로 끌어 가는 행위를 자행했습니다. 자신을 거룩하게 포장하고 숨기는 행위는 곧 그들의 본 모습을 들키면 안된다는 두려움의 발로 입니다.
화 있을진저 너희 바리새인이여 너희가 회당의 높은 자리와 시장에서 문안 받는 것을 기뻐하는도다
화 있을진저 너희여 너희는 평토장한 무덤 같아서 그 위를 밟는 사람이 알지 못하느니라
백성들의 존경과 칭송을 받고
하나님을 향한 겸허한 회개나,
죄를 짓는 인간으로서 하나님을 향한 두려움은 찾아 볼 수 없었습니다.
평토한 무덤. 봉분을 만들지 않은 평평한 무덤. 즉, 그 아래 시체가 있는 것을 알지 못하게 평평하게 잘 다져놓은 무덤을 말합니다. 회칠한 무덤과 유사한 표현 입니다.
이르시되 화 있을진저 또 너희 율법교사여 지기 어려운 짐을 사람에게 지우고 너희는 한 손가락도 이 짐에 대지 않는도다
화 있을진저 너희 율법교사여 너희가 지식의 열쇠를 가져가서 너희도 들어가지 않고 또 들어가고자 하는 자도 막았느니라 하시니라
적용
어쩌면, 바리새인과 율법학자들이 거룩하고 화례한 종교지도자 복장과 수많은 종교 의식 속에 숨기고 싶은 것은 자신들의 본래 모습이었을 것입니다.
그렇게 거룩하지 않은 실제 모습
그렇게 영적이지 않은 평소 생활
그렇게 선을 행하지 않는 일상 생활
그런 삶을 화려한 예복과 종교의식으로 가리고
백성들 앞에 각색하고 연기 하여 칭송을 받던 것입니다.
반면에 세례 요한은 넉마를 입고 광야에 떠돌며 석청과 메뚜기로 연명했습니다.
주님은 머리 둘 곳없이 방랑자와 같은 삶을 사셨습니다.
때론, 백성들에게 때론 종교지도자들에게 살해 위협도 받으셨습니다.
하지만, 주님은 질실되고 당당했으며,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위엄을 잃지 않으셨습니다.
저는 이 말씀을 준비하면서,
스스로를 돌아보았습니다.
설교자로서 매주 강단에 서는 일이 얼마나 두렵고 떨리는 일인지 또한 절감 했습니다.
내가 주님의 말씀을 전하는 사명자가 아니라면 절대로 할 수 없는 말씀을 우리 구주 예수의 보혈의 능력에 의지하여 전하고 있는 이 순간이 두렵고 떨립니다.
나의 강단 아래에서의 삶이
하나님의 말씀 앞에 철저히 부서지고 엎드려 지는 삶이 되기를 기도 합니다.
누군가에게 짐을 지우기 보다 내가 먼저 옳바로 섬기기를 위해 몸부림 칩니다.
여러분들은 어떻습니까?
오늘 하나님께 나와 있는 지금의 거룩하고 순결한 모습과 교회 밖에서의 삶이 일치하기 위해 몸부림 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 합니다.
외식, 이것이 우리가 진정 두려워 해야 할 모습 입니다.
사람들에게 외면 받고 무시 당하는 것보다.
외식, 우리가 두려워 해야 할 것
나도 모르는 사이, 바리새인이 되고 율법교사가 되버릴 수 있다는 두려움을 가져야 합니다.
안에서 썩은 내가 진동하지만
그 것들을 주님 앞에 끄집어 내기를 두려워 합니다.
평평하여 여느 땅과 다른 것이 없어 보이지만 그 안에서 시체가 썩고 있는 평토한 무덤이 되지 않기 위해 내 안에 썩어 가는 것들을 끄집어 내어 정화 해야 합니다.
그 과정은 아프고 수치 스럽습니다. 높은 자리에서 칭송 받던 사람이 하루 아침에 죄인 취급을 받을 수도 있지만
주님 앞에 진실되게 나아와야만
육도 살리고
영도 살릴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의 시작을 다시 한번 돌아 보십시오.
누가복음 12:1 (NKRV)
그 동안에 무리 수만 명이 모여 서로 밟힐 만큼 되었더니 ...
서로 밟힐 만큼 수만명이 모인 그 곳에서
바리새인과 율법 교사들은 모여든 사람들의 칭송과 기대에 찬 환호에 취해 있었을 것입니다.
그때, 주님은 제자들에게 외식을 경계 하라고 가르치십니다.
바리새인과 율법교사 그리고 유대인들은 빛이신 예수를 두려워 했습니다.
자신들의 악함과 본래의 흉직한 모습이 드러나는 것을 두려워 하였습니다.
사람들의 칭송을 받는 삶을 유지 하기 위해서
그들의 외식의 아성을 지키기 위해서
결국 하나님의 아들을 십자가에 못박습니다.
진정 두려워 해야 할 이
진정 두려워 해야 할 이
그 거룩한 두려움을 체험하는 일은 진정 우리가 두려워 해야 할 이를 만나는 것입니다.
당시 유대인들과 종교지도자들은 자신의 본모습이 드러나는 것을 두려워 하였습니다.
그런 그들의 마음을 간파하시고 주님은 진정 그들이 무서워 해야 할 이가 누구신지 알려주십니다.
내가 내 친구 너희에게 말하노니 몸을 죽이고 그 후에는 능히 더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라
왜 주님은 외식을 이야기 하시다가
두려움의 주제로 연관 시키셨을까?
외식은 본질은 두려움에서 기인했기 때문 입니다.
어두움은 빛을 두려워 합니다.
세상 두려워서 숨기고 움추리고 살지 말고 이제 빛 가운데 나아오라 말씀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진정 두려워 해야 할 것은 우리의 본 모습을 들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두려워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을 우리가 두려워 해야 하는 이유는
다름 아닌, 생명의 주관자 이시기 때문 입니다.
아무리 높은 자리에 앉고 칭송을 받아도 결국 인생의 종착지에서 하나님을 만나기 때문 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생명에도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는 것을 발견 할 수 있습니다.
몸을 죽이고 그 후에는 더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 하지 말라
곧 죽인 후에 또한 지옥에 던져 넣는 권세 있는 그를 두려워 하라
수 많은 순교자들과 독립운동가들이 이 정신으로 신앙과 신념을 지킨 것입니다.
비록 육체를 죽이려고 달려들어도 절대로 나의 영혼은 죽일 수 없는 이들 입니다.
우리가 진정 두려워 해야 하는 이가 누구인지 알려주십니다.
마땅히 두려워할 자를 내가 너희에게 보이리니 곧 죽인 후에 또한 지옥에 던져 넣는 권세 있는 그를 두려워하라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를 두려워하라
생명과 영의 주관자 이신 하나님을 두려워 해야 합니다.
전지전능 하신 하나님 앞에서는
그 어떤 것도 숨길 수 없습니다.
감추인 것이 드러나지 않을 것이 없고 숨긴 것이 알려지지 않을 것이 없나니
이러므로 너희가 어두운 데서 말한 모든 것이 광명한 데서 들리고 너희가 골방에서 귀에 대고 말한 것이 지붕 위에서 전파되리라
또한 세상은 우는 사자 처럼 우리를 삼키려 하지만
우리 하나님 아버지는 우리의 생명을 귀히 여기시고
우리 머리카락 숫자 까지 세시는 세심함으로 우리를 사랑 하시니 오직 하나님은 세상과 달리 두려워 하지 말라
너희에게는 심지어 머리털까지도 다 세신 바 되었나니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는 많은 참새보다 더 귀하니라
영적인 경외의 역설은
세상을 두려워 하지 않고 하나님을 두려워 하면
하나님을 두려워 하지 않아도 되게 된다.
왜냐하면 우리의 생명을 귀히 여기시는
하나님을 알게 되기 때문 입니다.
그러니, 세상을 두려워 말고 하나님을 경외하고 또 하나님을 두려워 말라
더나아가, 하나님을 두려워 하여 멀리 하기 보다는 하나님을 모든 사람 앞에 시인 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고 예수님은 말씀 하십니다.
내가 또한 너희에게 말하노니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인자도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서 그를 시인할 것이요
사람 앞에서 나를 부인하는 자는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서 부인을 당하리라
우리의 생각과 사상으로서
우리의 삶으로서
하나님을 생각과 실생활로 인정하라
주님이 이 땅에 오신이유는 바로
하나님을 인정하게 하기 위한 기회 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으로 돌아올 기회 입니다.
구원의 기회를 주기 위함 입니다.
심지어는 예수님을 죽이려 하고 공격하고 비판 하는 일들이 많았지만 주님은 주님을 거역하는 것은 괜찮다고 까지 너그럽게 말씀 하십니다.
단지, 성령을 모독하는 것은 사함을 받지 못한다고 말씀 하십니다.
누구든지 말로 인자를 거역하면 사하심을 받으려니와 성령을 모독하는 자는 사하심을 받지 못하리라
여기 담긴 주님의 깊은 뜻이 무엇인지 발견 하셨습니까?
주님은 일시적으로 이 땅에서 구원 사역을 하셨습니다.
다 이루시고 다시 아버지 우편 보좌에 앉아 계십니다.
반면, 성령은 지금도 우리 마음 속에서 우리 양심과 영혼에게 쉼 없이 말씀하고 계십니다.
하지만 우리는 때론 소극적으로 반항하며 음성을 외면하거나, 적극적으로 거부하기도 합니다.
옳은 길임을 알면서도 가지 않고
잘못된 것임을 알면서도 바꾸려 하지 않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인간이 왜 잘 변하지 않는지에 대해
신경과학자 조 디스펜자
“비슷한 상황에서 비슷한 결정을 하는 것을 반복하다보면 뇌의 신경도 익숙한 방식으로 연결을 반복하고 자신만의 정체성과 패턴을 형성하고 약 35세 정도 되면 고착화 된다.”
-조 디스펜자(신경과학자 )-
변화를 만들어야 겠다는 생각이 들다가도 좀 처럼 쉽게 바꾸지 못하는 것이 오래 지속된 고착화 된 패턴 때문 이라고 설명 합니다.
식습관, 운동, 직업, 학습 등 보다 익숙하고 해본 것 위주로 가게 된다
뇌는 항상 불확실성을 위험으로 인식 합니다.
내가 새로운 시도를 할때, 뇌는 이렇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 사람이 평소와 다르게 불확실한 선택을 하네. 불확실한 것은 위험하고 불안정하니,
차라리, 죄책감을 느끼더라도 늘 하던 것을 하자. 그게 더 편할 것같다. 하던대로 핸드폰을 보고 쉬고 싶다고 생각하자. 바빠서 시간이 없다고 생각하자"
라는 신호를 보낸다. 그리고 익숙한 오늘로 돌아 온다.
두려움을 넘어 새로운 장으로 한 발을 내딛어야 합니다.
산을 올라야 다른 각도로 아름다운 풍경을 즐길 수 있습니다.
두려움은 감추게 하고 가면을 쓰게 합니다.
우리 주님은 베드로에게 믿음을 갖고 용기 있게 두려움과 맞서라고 응원 하셨습니다.
오라 하시니 베드로가 배에서 내려 물 위로 걸어서 예수께로 가되
주님 이전에는 누구도 물위를 걷는 사람이 없어 누구도 물위를 걸을 생각조차 하지 않았으나,
주님을 보고 베드로는 잠시나마 물위를 걷을 용기를 얻었습니다.
저는 하나님이 여러분에게 어떤 사명을 주시고
어떤 삶을 살기를 원하는지 알지 못합니다.
하지만, 성령님은 분명 여러분에게 오늘도 하나님의 메세지를 전달하고 있다고 믿습니다.
그 음성에 귀기우려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의 두려움을 아주 거룩한 체험으로 돌릴 수 있게 됩니다.
결론
오늘 말씀을 마치면서,
여러분들께 묻고 싶습니다.
여러분의 신앙생활과 인생에서 지금 나의 발목을 잡아 물속으로 끌고 들어가는 두려움은 무엇입니까?
나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하나님 앞에 드러내고 해답을 구하는데 방해 되는 두려움과 외식은 무엇입니까?
오늘 설교의 목적은 이 질문의 답을 찾기 위해 여러분이 깊은 성찰의 시간으로 나아가게 하는 것입니다.
눈에 보이는 것에 현혹되지 마시고
내면의 빛을 비추고 스스로 질문해 보시기 바랍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