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므로

Sermon  •  Submitted   •  Presented
0 ratings
· 21 views
Notes
Transcript
오늘 본문을 알기 앞서 히브리서는 누구에게 쓰여진 글 일까요? 아마도 유대적 배경을 가진 사람에게 쓰여진 글로 보입니다. 게중에서도 그들은 아마 그리스도인(히 3:6; 4:14; 10:23)이였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예수님 세대에 직접 복음을 듣지는 못했지만, 예수님을 경험했던 사람들이 전해 준 메세지를 전해 들었던 것(히 2:3)으로 추정이 됩니다. 그러니까 믿음의 2세대로 보면 좋은 것입니다. 사실 히브리어는 헬라어로 볼때 헬라의 수사학이나 기교 등을 효과적으로 아주 섬세하게 사용한 책입니다. 그 수사학이나 기교등을 이해할 수 있는 공동체다, 집단이다 라고 한다면 나름의 학식과 교양도 갖춘 공동체로 보여 집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성령의 다양한 은사도 있었던 사람들입니다(히 2:4). 그러니까 한때 똑똑하고 영성 깊은 사람들이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들에게 모욕과 박해가 생깁니다(히 10:32-33). 그리고 이런 모욕과 박해로 인해 힘든 시간을 보내야만 했습니다. 그래서일까요? 그들 중 몇 사람은 믿음을 포기하는 일들도 생겼고, 진리 즉,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떠나며 배교를 하려는 위험에 노출되어 있었습니다 (히 2:13; 3:12-14; 4:1; 10:35-36). 아니 이미 일부는 공동체를 옮겼습니다(히 10:25). 여러 정황을 고려해 볼때 이 외부 공동체는 유대교인 듯합니다. 히브리서에 수신자가 되는 공동체 구성원들은 유대교로 돌아서기 직전의 상황이거나 유대교를 일부 수용한 상황인 것입니다.
그래서 저자는 안타까움이 들었나 봅니다. 신앙생활을 잘하고 있던 믿음의 2세들이 특정한 박해와 모욕으로 인해서 기독교를 떠나고 유대교로 배반하려고 하니 말입니다. 그래서 그들에게 권면의 메세지를 전하는 것이 히브리서 입니다. 그리고 그런 이들에게 오늘 본문은 이렇게 메세지를 전합니다. 히 12:1 입니다.
히브리서 12:1 DKV
이와 같이 우리를 둘러싼 구름같이 많은 증인들이 있으니 모든 짐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놓인 경주를 합시다.
1절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이와 같이.’ 여기서 이와 같이는 ‘토이가룬’이라는 단어 입니다. 주로 ‘이와 같이’, ‘그러므로'라는 의미로 사용되는 단어입니다. 이 단어는 성경에 단 한번 나오는 단어로 강한 추론 접속사 입니다. 그러니까 단순이 앞뒤의 내용의 원인을 설명하는 것 그 이상을 넘어서 뒷 내용을 강하게 강조하려는 의도가 담긴 접속사라고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제가 오랜 시간동안 전도를 하고 있는 친구가 있습니다. 겉으로는 투박하지만 정말 심성이 좋은 친구입니다. 봉사가 있으면 빼놓지 않고 섬기는 친구입니다. 그 친구와 한강에서 한번씩 이야기할 때면 자신은 생명을 살리는 일을 하고싶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의사가 될 정도의 머리는 아니니 소방관이 되고 싶다고 말하는 친구였습니다. 정말 이타적인 친구이며 남에게 선행을 베풀 줄도 아는 친구였습니다.
예수님도 참 잘 믿었습니다. 기도 시간만 되면 줄 곧 소리를 지르며, 하나님을 찾고 목놓아 기도하던 친구였습니다. 그 친구를 볼 때 신앙의 뜨거움이 무엇인지 새롭게 깨닫곤 했습니다.
하지만 그 친구에게도 언제나 어려움은 있었습니다. 그 친구의 천적은 언제나 가족이었습니다. 가족으로부터 존중받지 못하며, 도리어 핍박을 받았습니다. 신앙을 잘 세우고 있으면 한번씩와서 억장이 무너지는 말로 그 친구의 모든 것을 흔들어 놓곤 사라지셨습니다. 그럼 그 친구는 참 가슴 아프게 그동안 쌓아왔던 모든 것을 내려 놓곤 다시 익숙했던 죄의 자리로 돌아갔습니다. 그리곤 집앞에 찾아와 자신의 인생이 왜 이렇게 가혹하냐며 한탄을 늘어놓곤 했습니다.
인간은 좌절을 느끼거나 어려움이 닥치면 다시 죄의 자리로 돌아가기 마련입니다. 가정 환경이나 성장 배경에 따라 그 죄가 사회에서 용인을 받을 수 있을 정도이냐 아니냐의 차이는 있겠습니다만 결국 죄 앞으로 돌아갑니다. 자신이 가장 익숙했고, 위로를 받았던 그 죄 말입니다. 음란에 익숙했던 사람은 다시 음란으로 돌아갑니다. 거짓에 돌아갔던 사람은 다시 거짓으로 돌아갑니다. 그 죄가 시기이든, 질투이든, 그 무엇이든 말입니다. 하지만 그 죄를 짓고 난 이후 좌절감과 낙심은 말로 표현할 수가 없죠. 저도 동일한 실수를 하며 그와 다를 바 없지만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정말 마음이 무너집니다. 아니, 어쩌면 그 낙심과 아픔이 공감이 가서 그렇게 마음이 아플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한 때는 그 친구에게 제가 아는 지식과 경험을 가지고 열렬히 설득해 보기도 했습니다만 그 설득도 무용지물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 친구의 아픔을 제가 아무리 노력한다 한들 전부 이해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친구에게 말할 때면 ‘야, 하나님 살아 계시잖아 다시 한 번 더 기억해봐, 다시 한 번 더 주변을 살펴봐. 우리 하나님 잘 믿어보자.’ 라고 권면했던 기억이 납니다.
앞 장 11장에는 바로 믿음의 선조들에 대해서 나옵니다. 아벨, 에녹, 노아, 아브라함, 사라, 야곱, 요셉, 모세, 라합, 기드온, 바락, 삼손, 입다, 다윗, 사무엘을 비롯한 여러 선지자들 말입니다. 오늘 저자 또한 구체적인 상황은 다르지만 그 심경은 비슷했으리라 생각이 듭니다. ‘너희 지금 어려움에 처해 있니?’, ‘그래서 또 얽매이기 쉬운 죄를 선택하고 싶어지지?’, ‘그런데 이 믿음의 선조들이 어려움을 겪어내며 믿음을 지켜냈다. ‘그러니까!’, ‘그러므로!' 너희 또한 이 구름 같은 많은 증인들처럼 인내해’ 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라는 이 강한 접속사 안에 저자의 간절한 마음과 애타는 마음이 녹여져 있다고 볼 수 있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12:2-3 절입니다.
히브리서 12:2–3 DKV
믿음의 창시자요, 완성자이신 예수를 바라봅시다. 그는 자기 앞에 놓여 있는 기쁨을 위해 부끄러움을 개의치 않으시고 십자가를 참으셨습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의 보좌 오른편에 앉게 되셨습니다. 여러분, 거역하는 죄인들을 참으신 분을 생각하십시오. 그리하여 지쳐 낙심하지 마십시오.
그러면서 믿음의 조상, 믿음의 바른 모델 예수님을 상기시켜 주고 있습니다. 억울함으로 따지면 가장 억울하며, 치욕스럽기로 따지면 가장 치욕스러우며, 모욕을 당한 것으로 따지면 어쩌면 가장 큰 모욕을 당했음에도 하나님의 말씀을 저버리지 않고 순종함으로 그 믿음을 지켜 보여 준 예수님 말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끈기와 인내로 어려움을 견뎌낸 이유는 다름이 아니고 자기 앞에 놓여 있는 기쁨을 위해서 참으셨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앞서 1절에도 나왔지만, 저자는 인내를 경주에 비교하고 있습니다. 1세기 그레코-로만 문화에서 경주로 대표되는 운동경기는 그리 낯선 문화가 아니었습니다. 그렇기에 저자는 친숙한 그들의 문화를 빗대어 신앙생활을 계속해서 말해 나가고 있습니다. ‘경주는 그에 따른 보상이 따른다.’ ‘그 경주를 잘 인내하고 견뎠다면 그 사람에게는 분명 상이 주어질 것이다.’라고 말입니다. 예수님의 경우 또한 이와 같은 맥락으로 눈 앞에 놓인 기쁨을 위해서 그 모진 고난을 참았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에게 진정으로 기쁨이 되는 것이 무엇인지 잘 알고 계셨습니다. 이 땅에서의 고통과 고난은 장차 하나님 나라에서 맞이할 영광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님을 너무나도 잘 알고 계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모진 고난을 참으신 예수님께서는 마침내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앉는 영광을 맞이하게 되셨습니다. 진정한 기쁨을 얻어 내신 것입니다.
인간의 인생에서 어려움과 고난은 끊임없이 찾아 옵니다. 이것을 말해 무엇하겠습니까? 아마 인생이 고난의 연속인 것은 아주 어릴 때, 부모님이 그들에게 모든 것을 다 해줄 때가 아니라면, 자기 인생의 작은 짐을 짊어지기 시작할 때라면 그 인생의 무게와 고난을 알 것입니다.
특히 신앙인의 경우, 그 고난과 어려움이 신앙을 위협할 때도 참 많습니다. 그래서 어쩌면 그 고난과 어려움에 짓눌려 고난이 ‘신앙의 쉬어가기’ 인것처럼 ‘괜찮아', ‘힘들었잖아'라고 말하며, 무너진 신앙을 합리화 하기도 합니다. 고난의 무게가 얼마나 견디기 어려웠으면 그랬을까 하는 연민이 들기도합니다. 하지만 명심해야할 것은 모두가 인생의 어려움과 고난이 찾아올 때 넘어지고 낙심하는 것은 아닙니다.
태풍이 올 때 대부분의 새들은 미리 그 태풍을 감지하고 자신들을 보호해 줄 숲속이나 둥지로 숨는다고 합니다. 모두 자신의 날개를 접으며 그 태풍이 떠나가길 기다리는 것입니다. 하지만 독수리는 그와 정반대의 행동을 한다고 합니다. 거대한 파도를 마주치면서 그 마찰의 힘으로 하늘 높이 날아간다고 합니다. 지금까지 자신이 올라가보지 못했던 더 높은 하늘로 날아 저 높은 상공을 비행한다고 합니다. 태풍을 도리어 기회로 삼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독수리는 그 높은 하늘을 비행할 수 있을까요? 독수리가 단지 강해서 일까요? 아닙니다. 독수리는 이 태풍이 자신을 더 높은 곳에 데려다 줄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지금까지 경험하지 못했던 곳으로 자신을 데려다 줄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그 태풍을 뚫고 비행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태풍이 미치지 않는 높은 곳에서 그 태풍을 관조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인간에게 찾아 오는 어려움과 고난에도 동일하게 적용되는 원리라 생각이 듭니다. 고난과 어려움이 전부라고 생각하면 분명 고난에 매몰되어 버릴 것입니다. 그리고 그 고난과 어려움이 언제 끝나나 기다리고 있기만 할 것입니다. 고난에 매몰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고난 너머를 보는 사람들은 그 행동이 다릅니다. 자신에게 처한 이 고난이 , 지금 참고 있는 이 인내가 분명 나를 더 나은 곳으로 데려다 줄 것을 알기에 도리어 고난이 올 때 낙심하지 않고 기대하며 담대하게 그 고난을 맞이 합니다. 그리고 자기 자신과 상황을 뛰어 넘어 그 고난을 하나님 안에서 바르게 해석하며 믿음을 더욱더 견고하게 세우는 초석으로 삼습니다.
어쩌면 히브리서 저자는 고통받고 있는 공동체 구성원들에게 믿음을 견디라는 이야기와 동시에 이 세상에서 견줄 수 없는 하늘의 영광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 현실을 도피하기 위한 환각제가 아니라, 값싼 위로가 아니라 실재하는 하늘의 상급이 있으니 거 어려움들을 견디고 이겨내라고 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옥에 갖히기도 하며, 여러번 죽을 위기에도 처했고, 강도 당하며, 거짓 사도라 비난을 받으며, 친구들로 부터 버림을 받았음에도 그가 받을 상급이 실재하는 것을 잘 알기에 그리고 그 상급이 무엇보다 더 갚지기 때문에 자신의 모든 것을 내 던져 버릴 수 있었을 것입니다.
이처럼 하늘에 대한 소망, 하늘 영광에 대한 기대는 우리의 모든 상황과 어려움 초월하게 해줍니다. 그리고 우리를 더욱 더 담대하게, 강하게 만들어 줍니다.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도 히브리서 저작 시기와는 또 다른 어려움과 고난이 몰려오는 때라고 생각합니다. 너무나도 파국으로 치닫는 사회문제와 세계관의 문제로 신앙을 떠나는 청년들이 부지기수입니다. 그뿐만이 아니라 풍요로 대표되는 안정감은 우리의 신앙의 안일함을 심어줍니다. 히브리서 저작시기와는 정반대의 어려움과 고난이 직면한 것입니다. 그런 어려움과 고난이 닥친 우리에게도 히브리서는 동일한 해답을 주리라 생각을 합니다.
히브리서 12:2 DKV
믿음의 창시자요, 완성자이신 예수를 바라봅시다. 그는 자기 앞에 놓여 있는 기쁨을 위해 부끄러움을 개의치 않으시고 십자가를 참으셨습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의 보좌 오른편에 앉게 되셨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우리의 해답은 믿음의 완성을 이루신 예수님을 본받고 바라보는 일입니다. 그리고 그분이 누렸던 기쁨과 상급을 나의 상급과 기쁨으로 맞이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된다면 우리에게 고난과 어려움은 더 이상 고난과 어려움일 수 없습니다. 그것은 하늘의 영광을 소망하게 되는 시간이며 더 깊은 곳으로 주님을 바라보는 계기가 될 것입니다. 오늘 이 새벽에 나오신 여러분들도 그 하늘 소망을 두며 사시는 여러분 되시기를 소망합니다.
Related Media
See more
Related Sermons
See more
Earn an accredited degree from Redemption Seminary with Logo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