착하고 충성된 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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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마 25:14-30
제목 : 착하고 충성된 종
우리는 대한민국 사회에서 인생을 살아가면서 무한경쟁의 구도가 얼마나 치열하고 냉정하게 전개되는지 최소한 한 번쯤은 경험해 보았습니다. 대학교 입학부터 시작해서 취업을 준비하고 취직해서 승진하는 과정을 겪거나, 아니면 기술을 배우거나, 자영업을 하거나. 어떤 직종에 종사하든 타인과의 경쟁에서 자유로울 수 없죠. 이런 과정 가운데 우리는 한번쯤 자신의 능력의 한계를 경험하게 됩니다. 본인이 최선을 다했든 다하지 않았든, 본인의 능력을 의심하거나, 한계에 부딪쳐서, 요즘 말로 벽을 느껴서 좌절하는 경험을 하게 되죠.
이럴 때 주위를 둘러보면, 남들에 비해 탁월한 재능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을 발견하게 됩니다. 특별한 노력을 하지 않아도 조금만 어떻게 해보면 남들보다 뛰어난 능력을 발휘하는 사람들이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래서 누구누구는 넘사벽이다. 어떻게 해도 넘을 수 없는 사차원의 벽이다. 뭐 이런 표현을 하는 경우가 있는데요. 물론 그런 특별한 재능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주위에 얼마든지 있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사람을 보면서 하나님을 원망한다면, 예컨대, 하나님께서 나에게 한 달란트만 주셔서 내가 이 정도밖에 하지 못했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은사를 주지 않으셔서, 이게 최선이었다. 만약 하나님께서 나에게 저 사람이 가지고 있는 재능의 절반이라도 주셨으면 나는 저 사람보다 몇 배는 잘했다. 이렇게 잘못 생각하면서 하나님을 원망한다면, 그것은 잘못된 신앙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달란트를 주지 않으셔서 내가 해낼 수 없었으니 모든 것을 하나님의 책임으로 돌리는 것은 스스로 잘못된 신앙을 가지고 있음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한번 생각해 보세요. 과연 하나님께서 그만한 재능을 주지 않으셨기 때문에 실패한 것일까요? 본인이 하나님께 응당 받아야 할 것을 받지 못했기 때문에 실패한 것일까요? 더 잘할 수 있었는데, 하나님 때문에 그 이상의 열매를 맺을 수 없었던 것일까요? 누구한테는 다섯 달란트 주고, 누구한테는 한 달란트 주시는, 치사하게 차별하시는 하나님의 편애하시는 사랑이 빚어낸 비극일까요? 네. 어떠한 상황에도 그런 일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달란트의 비유는 이런 방식으로 이해할 수 없으며, 본인의 상황을 합리화하기 위한 목적으로 적용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또한 애초에 달란트라는 단어를 영어 탤런트로 이해하거나, 달란트 비유에서 재화로 등장하는 달란트를 사람의 어떤 재능이나 능력으로 이해하는 것 역시 하나도 말이 되지 않습니다. 이런 식으로 이해하면 달란트 비유를 처음부터 끝까지 제대로 이해한 부분이 하나도 없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우리 화평의 청년들, 그리고 우리 화평의 성도님들. 이 시간 마태복음 25장에 기록되어 있는 달란트 비유의 말씀을 살펴보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무엇을 원하시며, 또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함께 상고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우선 달란트 비유의 말씀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관해 살펴보기 전에, 이 말씀이 마태복음의 어떤 문맥에서 등장하는지 살펴보겠습니다. 마태복음 24장 42절 말씀 함께 읽겠습니다. 시작. (in) “그러므로 깨어 있으라 어느 날에 너희 주가 임할는지 너희가 알지 못함이니라”
달란트에 대한 비유가 마태복음 25장 14절에서 등장하는데요. 25장 14절을 기준으로 전전 단락에서 굉장히 중요한 한 가지 주제가 드러납니다. 그 주제는 바로 깨어 있으라는 주제입니다. 깨어 있으라. (out) 주님께서 언제 오실지 모르니, 잠을 자지 말고 깨어 있으라는 하나의 큰 틀 안에서 달란트 비유의 말씀이 주어진 것입니다.
그렇다면 잠자지 말고 깨어 있으라는 것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할까요? 요즘 “깨어 있다”라는 표현이 자주 사용되는데요. 깨어 있는 시민, 깨어 있는 부모. 정신적으로 올바른 분별력을 가지고 있거나, 안목이 탁 트인 사람들을 가리킬 때 깨어 있다는 표현을 사용하죠. 그런데 성경에서 깨어 있다는 표현은 영적으로 잠을 자지 않고 있는 상태, 다시 말해 종말을 대비하는 상태, 예수님께서 다시 오심을 소망하면서 그날이 다가옴을 성실하게 준비하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그러니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신자의 “깨어 있는 상태”는,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능력이 뭔가 특별하거나 특출나야만 깨어 있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자 그렇다면, 깨어 있는 상태는 구체적으로 어떤 상태를 의미할까요. 마태복음 24장과 25장 말씀을 읽어보면, 깨어 있으라는 경고의 말씀은, 게으른 종의 비유와 열 처녀의 비유, 달란트 비유, 양과 염소의 심판 말씀까지 반복해서 등장합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달란트 비유 말씀이니, 달란트 비유에 나타나는 깨어 있는 상태가 무엇인지 살펴보겠습니다.
마태복음 25장 14절 말씀 보세요. (in) “또 어떤 사람이 타국에 갈 때 그 종들을 불러 자기 소유를 맡김과 같으니” 노란색으로 표시된 부분을 주의해서 보세요. 개역개정 성경에서는 그 종들이라고 나와 있습니다. 우리말로 볼 때 그 종들이라고 하면, 그냥 정관사가 붙어있나 보다. 이렇게 생각하고 넘어갈 수밖에 없지만, 원어로 보면 정관사가 아니라, 자기 자신의 종들이라고 나와 있습니다. 그냥 종들이 아니라, 자기가 소유한 종들이라는 거예요. 그러니까 앞에 있는 어떤 사람이라는 표현에는 주인이라는 의미가 내포되어있는 것이죠. (out)
이러한 내용을 반영해서 14절 말씀을 직역하면 이렇게 읽을 수 있습니다. “또 어떤 사람이(주인이) 여행 갈 때, 자신이 소유한 종들을 불렀고, 그가 그들에게 그의 소유, 주인의 소유를 맡긴 것과 같다.” 달란트 비유의 시작부터 확실하게 신분이 구분됩니다. 주인과 노예들이 등장하죠. 그리고 주인은 자신의 소유를 본인에게 속해 있는 노예들에게 넘겨줍니다. 어떻게 넘겨줍니까? 15절 말씀 보세요. (in) “각각 그 재능대로 한 사람에게는 금 다섯 달란트를, 한 사람에게는 두 달란트를, 한 사람에게는 한 달란트를 주고 떠났더니” (out) 우리는 보통 이 구절에서 배알이 뒤틀립니다. 마음이 불편해요. 아니 누구는 다섯 달란트, 누구는 두 달란트, 누구는 한 달란트. 아니 맡길 거면 좀 일관성 있게 공평하게 좀 주지, 왜 재능에 따라 차별하냐. 한 달란트 받은 사람은 속상하지 않겠느냐. 이렇게 생각하는 경우가 있는데,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차별한다고 생각하는 경우는 달란트가 어떤 단위인지 몰라서 그러는 거예요.
한번 생각해 보세요. 유치부나 유년부, 초등부에서 달란트 시장, 달란트 잔치할 때 기억나시나요? 달란트 시장할 때, 최소 단위가 어떻게 되죠? 달란트죠. 무슨 달란트 시장에서 렙돈 받나요? 안 받죠. 고드란트 받나요? 안 받죠. 네. 지금 저는 굉장히 재미있는 농을 던지고 있는데요. 최소한 미소 정도는 지으셔야 성경을 좀 안다고 볼 수 있어요. 무슨 소린지 모르더라도 그냥 편하게 웃으시면 됩니다.
네. 그래서 교회에서 달란트 시장할 때 일반적으로 최소 단위는 달란트에요. 한번 출석하면 한 달란트씩은 기본적으로 받죠. 성실하게 출석하다 보면 1년에 52주니까, 최소 50달란트 이상은 출석만 해도 받습니다. 그리고 중간에 무슨 행사를 하거나, 성경퀴즈대회를 하거나. 이런 행사를 통해서 달란트 좀 챙기면, 100달란트, 후한 교회는 200달란트 이상 모으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렇게 달란트를 많이 모아본 사람일수록 달란트 비유를 읽을 때마다 불편해요.
뭐? 고작 한 달란트? 참나 그걸로 달란트 시장에서 컵떡볶이 하나 사먹겠냐? 농담반 진담반으로 이렇게 생각할 수 있다는 거예요. 달란트가 무슨 교회에서 달란트 시장할 때 사용되는 화폐로 생각하면 그럴 수 있다는 거죠.
하지만 신약성경에서 달란트가 어떤 단위인가 하면, 1달란트가 6천 데나리온이에요. 데나리온은 신약성경에서 가장 많이 등장하기 때문에 친숙하실텐데요. 데나리온은 노동자의 하루 일당입니다. 여러분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서 2023년 기준으로 하루 일당을 대략 10만원 정도로 계산하면, 1달란트는 6억원이에요. 요즘 1억이라는 돈이 억소리나는 억이 아니라고 하지만, 알바 해 본 청년들은 다 알 거예요. 1억을 모으려면 얼마나 힘이 들지, 1억이 얼마나 큰 돈인지 알 겁니다.
자 그래서 이런 기본적인 개념을 가지고 마태복음 25장 15절 말씀 다시 보세요. (in) 어떤 주인이 자기 노예들한테 5달란트, 30억원, 2달란트, 12억원, 1달란트 6억원. 이렇게 엄청난 금액을 자기 종들에게 맡기고 떠났다는 겁니다. (out) 자, 이래도 불편해요? 네 불편하죠. 왜요? 너무 많이 맡겨서 불편해요. 네. 이렇게 느껴야 정상입니다. 에게? 고작 1달란트? 아니 장난치세요 주인님? 이게 아니라, 아... 주인님, 이거 좀 부담스럽습니다. 한두 푼도 아니고, 30억, 12억, 6억. 이게 보통 금액이 아니지 않습니까? 이렇게 반응하는 게 정상이에요. 그러니 어떻게 보면, 1달란트 받은 노예, 6억원 받은 노예의 마음이 가장 편할 겁니다.
하지만 노예들이 어떤 마음을 품든지 달란트 비유에서 노예의 마음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주인은 자기의 소유를 노예들의 능력과 자질에 따라 맡기고 떠났습니다. 노예들 개개인이 부담스러워하든 덜 부담스러워하든, 일단 맡겨진 소유를 잘 관리해야만 하는 의무를 갖게 된 것입니다.
자, 그래서 노예들이 주인에게 받은 의무를 어떻게 수행하는가 하면, 16절 말씀 보세요. (in) “다섯 달란트 받은 자는 바로 가서 그것으로 장사하여 또 다섯 달란트를 남기고”
다섯 달란트 받은 사람이 어떻게 했습니까? 또 다른 다섯 달란트의 이윤을 창출했습니다. 30억을 받아서 30억을 남겼어요. 그래서 60억이 되었습니다. 자, 그런데 이것이 전부입니까? 아니죠. 우리는 이 말씀을 결과론적으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말 성경은 독자들의 편의성을 위해서 원어의 어순을 재배열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읽을 때 좀 편하고 쉽게 읽을 수 있도록 어순의 배치를 바꾸는 거예요. 그래서 원어로 이 구절을 읽으면, “즉시 가서 다섯 달란트 받은 자는 그것들로 장사해서 다른 다섯 달란트를 남겼다.” 이렇게 읽을 수 있습니다. (out) 어순에서 “즉시 가서”라는 표현이 문장 제일 앞에 나와 있습니다. 문장 제일 앞에 나와 있다는 것은 특별하게 강조하기 위한 목적이 있다고 볼 수 있는데요. 저자 마태는 다섯 달란트 받은 노예가 결과적으로 얼마를 남겼는지보다, 이 사람이 어떤 마음가짐으로 행동을 취했는지 주목합니다. 다섯 달란트 받은 노예, 30억 받은 노예가 30억 남겼다. 이게 전부가 아니라, 30억을 받자마자, 즉시, 즉각적으로 행동에 옮겼다는 거예요.
나는 일머리가 좋으니까. 효율적으로 일을 잘하니까. 내내 일을 하지 않더라도 충분히 이윤을 남길 수 있으니까. 그리고 어차피 나에게 주어진 30억이 내 돈도 아니고 주인님 돌아오시면 주인님께 드려야 하는 돈이니까. 굳이 뭐 그렇게 죽자 살자 열심히 할 필요 있나. 그냥 적당히 굴리면 되지. 이렇게 잔머리 굴리면서 본인 하고싶은대로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주인이 언제 돌아올지 모르지만, 돌아올 때까지 성실함으로 그 의무를 다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두 달란트 받은 사람은 어떻게 행동했을까요? 17절 말씀 보세요. (in) “두 달란트 받은 자도 그같이 하여 또 두 달란트를 남겼으되” 두 달란트, 6억 받은 노예가 어떻게 했습니까? 본인이 받은 6억 말고 또 다른 6억을 남겨서 총 12억을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이게 전부입니까? 그렇지 않죠. 17절 말씀을 직역하면, 이렇게 읽을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두 달란트 받은 사람은 다른 두 달란트의 이익을 얻었다.” (out) 16절과 동일하게 “마찬가지로”라는 표현이 문장 제일 앞에 등장합니다.
그렇다면 의미상으로 두 달란트 받은 사람이 어떻게 행동했다는 것입니까? 다섯 달란트 받은 노예와 똑같이, 두 달란트를 받자마자 즉시 가서 성실하게 일해서 두 달란트의 이윤을 창출했다는 의미가 됩니다.
여기서 다섯 달란트 받은 노예와 두 달란트 받은 노예에 대해서 정리해 보겠습니다. 15절 말씀에 따르면, 주인은 노예들의 재능에 따라 달란트를 나눠주는데요. 여기서 재능이라는 단어는 원어로 능력을 의미하는데요. 이 구절에서는 재능이나 능력이라는 의미로 사용되지 않고, “자질”이라는 의미로 사용됩니다.
그런데 이 자질이라는 것은, “어떤 일을 수행할 수 있는 특성 특별히 어떤 일을 달성하거나 성취하도록 하는 자질”을 의미합니다. 쉽게 말해서 다섯 달란트 받은 노예와 두 달란트 받은 노예가 어떤 일이든지 당장 해낼 수 있는 탁월한 능력을 가지고 있어서 다섯 달란트와 두 달란트를 받은 것이 아니라, 주인은 그저 이 노예들의 자질을 보고 달란트를 맡겨준 거예요.
그리고 이 노예들은 주인이 발견한 각각의 자질을 활용해서 달란트를 받자마자 즉시 가서 행동에 옮깁니다. 주인이 언제 오는지, 달란트를 얼마나 남겨야 하는지, 하루에 얼마나 일을 해야 하는지. 이런 요소들에 크게 좌지우지되지 않고, 주인이 맡겨준 임무를 성실하게, 충실하게 해내는 데에만 집중한 것입니다.
자, 그렇다면 한 달란트 받은 사람은 어떻습니까? 마태복음 25장 18절 말씀 보세요. (in) “한 달란트 받은 자는 가서 땅을 파고 그 주인의 돈을 감추어 두었더니” (out) 가장 적은 달란트를 받은 노예는 안전하게 돈을 숨깁니다. 어떤 일이 일어나도 절대로 손해 보지 않는, 속된 말로 안전빵을 선택한 것이죠. 하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결과론적인 측면에서 안전한 것일 뿐이지 주인의 의도와는 완전히 반대되는 행동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 이유인즉슨 주인이 어떤 평가를 내리는지에 관한 내용을 통해서 파악할 수 있습니다.
주인이 돌아와서 세 노예에 대해서 어떻게 평가를 내리는지 살펴보겠습니다.먼저 다섯 달란트 받은 노예에 대한 평가인데요. 마태복음 25장 21절 말씀 함께 읽겠습니다. (in) 시작. “그 주인이 이르되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적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을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 하고” 이어서 두 달란트 받은 노예는 이런 평가를 받습니다. 마태복음 25장 23절 말씀 함께 읽겠습니다. 시작. (in) “그 주인이 이르되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적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을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 하고”
다섯 달란트를 받은 노예와 두 달란트를 받은 노예는 토씨 하나 빠짐없이 똑같은 칭찬을 받습니다. 뭔가 인간적인 측면에서 볼 때, 더 많은 성과를 낸 노예가 조금이라도 더 칭찬받고 보상받아야 하지 않나. 이런 생각이 들 수 있겠습니다만, 욥의 고백에 따르면 어떻습니까? (in) 주신 이도 여호와시요. 거두신 이도 여호와시오니. 주신 분도 하나님, 거두시는 분도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몇 달란트를 맡기든지, 어떤 칭찬을 하시든지, 어떤 보상을 하시든지. 이 모든 것은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에 달려있습니다. (out)
따라서 우리는 다섯 달란트 남긴 노예와 두 달란트 남긴 노예에 대한 칭찬이 동일하다는 점에 대해서 의아하게 생각할 것이 아니라, 이들이 칭찬받은 내용에 집중해야 합니다. 칭찬받은 내용과 결과를 살펴볼텐데요. 먼저 칭찬받은 내용의 핵심은, (in) 다섯 달란트 받은 노예와 두 달란트 받은 노예가 “착하고 충성되다.”라는 칭찬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착하고 충성된”이라는 표현은 중의적인 표현입니다. 원어로 “착한”이라는 표현은 다양한 의미로 사용됩니다. 대표적으로 “착한, 선한, 좋은” 이렇게 세 가지 의미로 사용되죠. 일단 개역개정에 나와 있는 대로 착한 종이라는 표현으로 생각해 보면, 우리가 생각하는 “착하다”라는 표현의 선입견에서 벗어날 필요가 있습니다.
연배가 좀 있으신 분들은 공감하지 못하실 수 있는데요. 요즘 젊은 세대 친구들의 경우에 이성 친구를 소개받을 때, 상대방에 대해서 먼저 물어보죠. “어떻게 생겼어?” “어... 착해” 이런 대답을 들으면 어떻게 생각합니까? 아... 외모가 좀 그렇구나. 이렇게 생각하죠. 반대로 좀 외설적인 농담으로 몸매가 착하다고 하면, 몸매가 좋구나. 이렇게 생각하지 않습니까? 또 성격에 대해서 물어볼 때, 성격이 착하다고 하면, 어떻게 받아들입니까. 지혜로운지 지혜롭지 않은지는 잘 모르겠지만, 성격은 그냥 무난하고 선한가 보다. 이렇게 생각하죠. 그런데 이런 생각은 달란트 비유 말씀에 따르면, 다 잘못된 생각입니다.
주인은 다섯 달란트 남긴 노예와 두 달란트 남긴 노예에게 착하다고 칭찬했습니다. 앞에서 두 노예가 어떻게 행동했습니까? 주인이 달란트를 맡기자마자 즉시 가서 일했습니다. 이러한 태도와 행동이 그 종으로 하여금 착하고 선하고 좋은 종이라는 칭찬을 받게 만든 겁니다.
이어서 충성된 노예라는 표현 역시 다양한 의미를 가지고 있는데요. “충성된”이라는 말은 책임감 있는, 신뢰할 만한, 믿을 만한, 충성스러운. 이런 의미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주인이 칭찬한 내용을 정리해 보면, 주인의 평가 기준은 종들이 잘했느냐 못했느냐는 하나도 중요하지 않습니다. 또한 종들이 결과적으로 얼마를 남겼느냐는 평가 기준에 포함되지 않습니다. 주인이 종들을 평가할 때 가장 중요한 점은, 이 종들이 어떤 마음과 태도와 행동으로 얼마나 성실하고 책임감 있게 주어진 의무를 감당했는가. 이것이 가장 중요한 것입니다.
이어서 땅에 달란트를 묻어놓은 종에 대한 평가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마태복음 25장 24절 말씀 함께 읽겠습니다. 시작. (in) “한 달란트 받았던 자는 와서 이르되 주인이여 당신은 굳은 사람이라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 데서 모으는 줄을 내가 알았으므로” 여기서 우리는 이 노예가 주인을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주목해야 합니다. 이 노예는 자기 주인을 굳은 사람이라고 표현합니다. “굳은”이라는 말은 원어로 “엄격한, 완악한, 완고한”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out) 그러니 이 노예는 자기 주인이 불합리하고 욕심 많고 엄격한 독재자라고 생각해서 달란트를 땅에 묻어놓았다는 것입니다. 자기가 일하기 싫어서 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주인의 됨됨이 때문에, 주인이 가지고 있는 성향 때문에, 안전하게 한 달란트를 잘 보관해 두었다는 것이죠.
하지만 이러한 생각은 완전히 잘못된 생각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이 주인은 처음부터 노예들에게 달란트를 맡길 때, 목표치를 아무것도 제시하지 않은 상태에서 달란트를 맡겼기 때문이죠. 그러니 달란트를 맡긴 주인의 행위에서 주인이 어떤 사람인지를 판단할 수 있는 근거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다시 말해 달란트를 땅에 묻어놓은 노예는 자기 주인에 대해 철저하게 오해하고 있었으며, 어떤 측면에서는 억지 핑계를 대는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주인은 이러한 오해나 핑계에 속아 넘어가지 않죠. 그 결과 이 노예가 묻어놓은 한 달란트는 열 달란트 가진 노예에게 넘어가게 됩니다.
앞서 살펴보던 내용, 두 노예가 칭찬받은 내용에 이어서 칭찬받은 그 결과를 살펴볼텐데요. 칭찬의 결과는, (in)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입니다. 이 비유가 어떤 문맥에서 주어졌다고 했습니까? 주님께서 다시 오시는 그날을 어떻게 준비해야 하는가. 깨어있으라. 이런 문맥에서 주어졌다고 했습니다. 이러한 측면에서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해라.”라는 표현은 예수님께서 재림하신 이후에 완전한 하나님 나라에서 우리 주님과 영원히 기쁨의 교제를 나누도록 초대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out) 여기에서 우리는 구원과 천국에 대한 개념을 심화시켜서 이해해야 합니다. 보통 예수님 믿고 구원받으면 천국 간다고 하죠. 그런데 이 명제는 성경의 진리를 충실하게 담고 있는 명제가 아닙니다. 한줄 요약해서 복음을 전해야 한다면 어쩔 수 없이, 예수님 믿고 구원 받아 천국가세요.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지만, 설명을 보탤 수만 있다면, 달란트 비유의 핵심적인 내용이 들어가야 합니다. 앞서 살펴본 달란트 비유에 따르면, 구원을 받는 것은 예수님을 믿고 기다리기만 하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주인이 맡겨준 달란트를 어떤 마음과 어떤 자세로 관리하고 그 사명을 어떻게 감당하느냐에 달려있습니다.
한번 생각해 보세요. 우리가 어떤 주인의 노예가 되었는데, 그 주인이 온 세상을 다스리는 사람이면서 동시에 온 세상을 소유하고 있는 사람이라면, 내가 그 주인의 노예가 되었으니, 이제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걱정없다. 이렇게 생각할 수 있습니까? 그럴 수 없죠. 주인은 주인이고 노예는 노예에요. 주인이 돈이 많고 온 세상을 소유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주인의 소유가 그렇게 많은 것 뿐이지, 내 돈이 많은 것은 아니죠. 그러니 노예가 주인을 잘 만났다고 해서 탱자 탱자 놀고 먹고 마시고 즐기면서 살 수만은 없습니다. 본인의 정체성이 노예이고, 본인에게 어떤 해야할 일이 주어져 있으면, 본인의 마음이 어떻고 저떻고, 생각이 어쩌고 저쩌고. 이런 것 다 내려놓고, 무엇보다 주어진 일을 성실하고 충성되게 감당하는 것에 초점이 맞춰져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본인이 맡은 일을 성실하게 수행하다 보면, 주인에게 칭찬을 받을 뿐만 아니라 기쁨의 교제를 나눌 수 있도록 초대를 받게 됩니다.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너의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우리 화평의 성도님들, 이제 말씀을 맺겠습니다. 서두에 제가 달란트 비유에 대한 오해를 말씀드렸습니다. 어떤 일을 할 때 실패하거나 원하는 결과를 얻지 못했을 때,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한 달란트만 주셔서 해낼 수 없었다는 식의 표현은 어떤 일이 있어도 절대로 하지 말아야 할 표현입니다. 오늘 살펴본 말씀에 따르면, 달란트 비유는 깨어 있으라는 명령에 대한 구체적인 예시입니다. 그냥 눈 뜨고 멀뚱멀뚱 멍때리는 것이 깨어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순종과 행함이 뒷받침되어야 깨어 있는 상태로 취급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살아 숨 쉬는 지금 이 순간은, 예수님께서 다시 오시는 그날을 준비하는 기간입니다. 단순하게 멍 때리면서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정욕대로, 자기가 하고 싶은대로 살아가면서, 중간 중간에 물질적으로 필요한 것을 하나님께 채워달라고 떼쓰듯이 기도하면서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 된 사명을 온전히 감당해야 하는 기간입니다. 이 사명을 감당하려면, 본인이 하나님께 몇 달란트를 받았는지 생각하고 하나님 앞에서 불평만 하는 것이 아니라, 본인에게 주어진 환경과 본인의 능력을 200% 이상 끌어내기 위한 노력을 해내는 데에 있습니다.
또한 깨어 있는 삶을 살아간다는 것은, 다섯 달란트 받은 노예와 두 달란트 받은 노예가 해냈듯이, 자기 주인을 위해서 투자하고 이익을 창출해 내는 기회의 시간으로 삼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우리 화평의 청년들, 그리고 화평의 성도님들.
지금 이 순간은 우리에게 어떤 순간입니까? 그리고 우리 삶의 목표는 무엇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기다릴 때, 무엇을 하면서 기다리시겠습니까? 과연 우리의 삶은 주님 다시 오시는 그날에, 우리 주님을 만났을 때, 착하고 충성된 종이라는 칭찬을 받기에 합당한 인생입니까? 과연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라고 불리기에 합당한 인생을 살고 있습니까? 만약 이러한 질문에 자신 있게 답하지 못한다면, 앞으로 자신의 어떤 부분을 변화시켜야 할지, 고민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세속적인 욕심과 정욕에 휘둘리는 모든 죄성을 내려놓고, 다시금 결단하시면서, 착하고 충성된 종이라는 칭찬을 받으며 복된 인생을 살아내시는 모든 화평의 성도님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은혜와 자비가 풍성하신 하나님 아버지 감사를 드립니다. 달란트 비유의 말씀을 통해, 우리의 삶을 돌아보게 하시고, 과연 우리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어떤 사람으로 칭함 받을지 돌아보게 하시니 감사를 드립니다. 나 자신이 인생의 주인이 되어, 세속적인 가치관에 휘둘리며 신앙을 보조적인 수단으로만 사용하는 것은 아닌지 돌아봅니다. 다섯 달란트 받은 종과 두 달란트 받은 종이 주인으로부터 달란트를 받은 그 순간 즉각적으로 행동에 옮겼듯이, 우리 역시 머리로만, 마음으로만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말씀대로,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다운 삶을 살아내기를 원하오니, 착하고 충성된 종의 삶을 살아내는 우리 모두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감사드리며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축도
지금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무한하신 은혜와, 하나님 아버지의 지극히 크신 사랑하심과, 성령 하나님의 임재하심과 충만케 하심이, 착하고 충성된 종이라 칭찬받기를 원하는 마음으로 새롭게 결단하며 나아가는 모든 주님의 자녀들 머리 머리 위에, 이제로부터 영원토록 함께 있을지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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틴데일
마지막 단원에 지배적으로 나타나는 ‘준비’에 관한 주제는 ‘오심’과 그것을 준비하는 자들에 대한 결과에 대해 묘사하고 있는 이 비유에서도 핵심 내용으로 다루어진다. 그러나 이 비유는 열 처녀 비유가 다루지 않은 ‘준비가 무엇이냐’라는 문제를 다룬다. 그것은 수동적인 ‘기다림’의 문제가 아니라 장차 올 주인이 보고 인정할 수 있는 열매를 맺는 책임 있는 행동에 관한 문제이다. 지연된 시간은 공허하고 의미 없는 ‘기다림’이 아니라 ‘종’에게 맡긴 ‘달란트’를 선용할 수 있는 기회의 시간이다.
영어에서 육신적(또는 영적) 재능이라는 의미로 사용되는 ‘달란트’는 이 비유에서 나온 것으로 ‘잠재된 역량을 최대한 발휘’하기 위해서는 이러한 달란트의 활용이 필요하다. 물론 이 비유에 나오는 헬라어 탈란톤(talanton)은 돈의 합계를 말하는 것으로 우리의 해석은 영어의 용례에 지나친 영향을 받지 않아야 한다. 예수님의 사역적 환경에서 종에게 맡긴 돈은 모든 사람에게 부여된 원래적 재능을 말한다기보다 천국과 관련된 구체적인 특권이나 기회에 대한 언급으로 보인다. 제자들에게 주어진 기회는 성격이나 규모에 있어서 다르지만 주인이 돌아오기 전에 신실하게 활용해야 한다. 그러므로 크든 작든 제자로서 자신에게 주어진 책임을 신실하게 수행하는 것이 곧 ‘준비’이다. 책임의 분량을 결정하는 것은 주인이다. 종이 할 일은 자신에게 주어진 역할을 신실하게 수행하는 것뿐이다.
누가복음 19:12–27은 세부적인 묘사에 있어서는 차이가 있지만 본질적으로 동일한 내용이다. 두 본문은 어느 것이 원문에 충실한가라는 문제에서 이견을 보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일반적으로 동일한 예수님의 비유의 다른 형태로 본다. 그러나 적어도 예수님이 다양한 청중에게 다른 적용을 위해 유사한 이야기를 세부적인 사항만 바꾸어 여러 차례 하셨을 가능성이 있다. 어쨌든 두 본문은 상호적 방법이 아니라 각자의 방식대로 해석되어야 한다.
〈14–18〉 ‘또’(for)는 24:36–25:13의 주제, 특히 13절의 호소와 밀접한 연결을 보여준다. 종이 영향력이 큰 책임 있는 자리에 오르는 경우도 있다(참조, 18:23이하; 21:34–36; 24:45이하). 그렇다고 해도 그들에게 맡긴 돈은 지나치게 큰 금액이다. 한 ‘달란트’는 장소에 따라, 그리고 화폐로 사용된 금속의 종류에 따라 다르지만 일반적으로 6천 데나리온에 해당하며(참조, 20:1–7 주석) 오늘날 구매력을 기준으로 하면 수천 파운드의 가치에 달한다(참조, 18:23–34 주석). 이처럼 큰 금액을 ‘재능대로’ 나누어주었다는 것은 상업적 의미를 가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이 자기 백성에 대해 각자 상황과 개성이 다른 개인으로 생각하고 계신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세 번째 종은 주인의 의도를 읽는데 실패하였으며 사역을 안전으로 대치하였다. 이러한 (잘못된) 목적에 따르면 그의 행위는 전적으로 합리적이다. 한 후기 랍비(Baba Metzia 42a)는 “돈은 땅을 파고 감추는 것이 가장 안전하다”고 생각했다!(그러나 일어날 수 있는 결과에 대해서는 13:44을 보라.)
〈19–23〉 ‘오랜 후’에 대해서는 25:5 주석을 보라. ‘결산할새’는 돈을 받은 용도가 장사를 위한 것임을 보여준다. 그들이 남긴 이익은 예기치 않은 수익이 아니라 처음부터 의도한 것이었다(참조, 눅 17:10의 개념). 자신의 책임을 신실하게 이행한 자에 대한 보상은 “풍성한 장려금이 아니라 더 큰 책임”(Schweizer, 471)이었다. 두 종이 원래 맡은 책임이 달랐음에도 불구하고 같은 칭찬을 들었다는 것은 의미가 있다. 원래 받은 재능은 달랐으나 그들은 가진 것에 비례하여 같은 보상을 받았다.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는 상업적인 언어로 볼 수 없다(‘들어와서 나의 행복에 참여하라’는 GNB의 세속적인 번역조차 그렇게 보이지 않는다!). 이 부분은 30절에서처럼 다시 한 번 이야기 속에 적용이 개입된 경우이다.
〈24–28〉 세 번째 종은 책임의 본
질을 깨닫는데 실패했을 뿐이다. 그의 실패는 게으름 때문이라기보다 ‘일종의 종교적이고 동양적인 운명론’(Bonnard) 때문이다. 이러한 사실은 그가 주인을 ‘탐욕스러운 자본가’(Beare)로 생각했다는(이에 대해 주인은 26절에서 무자비한 풍자로 책망한다) 사실에서 확인된다. 이러한 인물묘사는 하나님에 대한 알레고리적 묘사가 될 수 없으며 다른 비유에서 하나님을 나타내는 덜 이상적인 인물(눅 11:5–8; 16:8; 18:2–5)에 대한 묘사도 될 수 없다. 그러나 그가 생각하는 이처럼 노골적인 주인의 관점에서 보아도 그의 행동은 무책임하다. 그의 행동은 안전을 꾀하는 제자도로서, 아무 것도 얻을 수 없다(10:39의 내용과 대조적으로). 그것은 “잘못을 범하지 않는 것에만 관심을 가진 신앙”(Schweizer, 473)이다. 파루시아에 대한 ‘준비’는 오점을 남기지 않는 작업일 뿐만 아니라 열매를 맺을 수 있는 적극적이고 신실하며 책임감 있는 사역이다.
〈29–30〉 29절은 13:12을 반복한 것이다. 24:51에서와 마찬가지로 30절에서도 이야기 속에 적용이 개입했으며 악인의 운명에 대한 전통적 묘사(참조, 8:12; 13:42, 50)는 이 비유를 (21, 23절에서 암시했듯이) 구원이나 정죄와 같은 궁극적 차원에서 이해해야 함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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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영삼
깨어있는 삶, 중대한 기회 (25:14-30)
깨어 있는 기간은 단순한 기다림이 아니라 중대한 기회임. 달란트 비유는 ‘깨어있음’에 대해 한 걸음 더 나아간 시각을 제공함. 깨어 있다는 것은 세속에 함몰되지 않는 것 그 이상임. 깨어서 그 날을 기다린다는 것은 자기 위치를 지키며 충성하는 것 그 이상임. 깨어 있는 삶을 산다는 것은 예기치 않은 늦어임, 생각 이상으로 계속되는 시련을 견딜 사랑을 지켜 가는 것 그 이상임. 깨어 있는 삶을 산다는 것은 늦어지는 종말의 날을 단순하게 기다리는 시간이 아니라 투자하고 주인을 위해 이익을 내는 기회의 시간이어야 함. ‘깨어 있음’에 대한 연속적인 비유는 달란트 비유에 와서 적극적인 시간으로 바뀜.
악하다는 것은(악하고 게으른 종아) 앞서 나온 비유들에서 표현된 의미와 다름. 비유의 문맥이 그 단어에 새로운 의미를 부과함. 갑작스럽게 닥친 도둑의 비유에서 악하다는 뜻은 신실하지 못함, 무지함, 오만함을 뜻했음. 달란트 비유에서 악하다는 뜻은 기회를 굳이 활용하지 않으려는 의도적인 악함을 뜻함. 그것은 일부러 게으름을 택하는 변명에 기초한 기회의 악용임. 그는 분명히 나중에 주인이 와서 자신에게 맡긴 기회와 사명에 대한 책임을 물을 것을 알았음.
종말의 그 날이 늦어지는 것은 뜻밖의 사건이 아님. 그 기간은 사명을 다하고 주인에게 무엇을 남겨 드릴 의미 있는 시간임. 악함은 이것을 일부러 잊는 것. 아무것도 하지 않고 기다리는 것. 그것은 깨어 있지 않는 것. 단순히 맡겨진 것들에 충성하는 것뿐 아니라 자신의 모든 것을 드려 적극적으로 주인의 뜻을 이루어야 함. 이제 깨어 있는 기간, 기다리는 기간은 자기에게 주어진 은사와 사명, 곧 그의 사랑의 흔적들을 일깨워 그 사랑의 열매들을 맺는 기간이어야 함. 기다림은 무미건조함이나 무력함이 아님. 주인이 오신 후에 있을 교제와 기쁨의 삶은 이미 그들 안에 그들의 은사와 시간이라는 기회로 와 있음. 그들의 은사와 사명은 이미 그 기다림 안에서도 그분과 교제하며 기쁨을 누릴 수 있는 기회로 주어져 있는 것.
자유하기 때문에 그 자유로 자기를 기쁘게 하는 삶이 아니라, 그 삶을 주인의 기쁨을 위해 드리는 것, 그것이 충성임. 착하고 충성된 것이 판단의 기준이라면 그 일이 크든 작든 문제되지 않음. 직분이나 사역의 종류와 무관함. 아무 상관 없음. 그분은 우리가 착하고 또한 주어진 사명에 충성된 것으로 판단하심. 얼마나 공평한 기준인가?
이렇게 보면 깨어 있는 삶이란 끝에서 시작하는 삶이요 하나님 앞에서 사는 삶임. 그 끝에서 오시는 주님을 바라보고, 바로 그 주님 앞에서 오늘의 선택을 만드는 지혜의 삶임. 그 기간은 기다림으로 채워지지만, 그 기다림은 단순한 기다림이 아님. 섬김의 기회이며, 사랑의 기회이며, 열매 맺어야 하는 기간임. 종말에 관한 이런 연속적인 비유들은 주께서 다시 오시는 그 알지 못하는 때, 그 때에 이르기까지 기다려야 할 교회들이 그 기다림의 기간을 어떻게 바라보아야 하는가에 대한 가르침을 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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