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 없는 미래는 없다(창 32: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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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의 관계를 이해하고 사랑으로 세워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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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에 모인 가족이라는 이름 아래 우리가 있지만 서로 다른 삶과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보편적을 ‘옳은 것이 무엇인가를 고민하며 우리나라의 법으로 주어진 최대한의 자유를 누리며 바라기는 안정적인 경제활동을 통해 자녀들에게 좋은 것을 주고자 하는 마음으로 살것입니다.’
오늘 이야기는 야곱이라는 사람의 이야기를 하고 싶습니다. 야곱의 인생을 4막으로 나눈다면 아버지와 살았던 청소년기, 아버지를 떠나 외삼촌 집에서 20년을 살며 아버지가 되어 돌아오는 2막, 그리고 자식으로 인한 고통 속에서의 3막과 인생 노년기인 4막으로 나눠볼 때 외삼촌 집에서의 20년을 보내고 고향으로 돌아오는 이야기입니다. 야곱은 그의 아버지 이삭이 60세에 얻은 아들로 형 에서의 쌍둥이 동생으로 태어났습니다. 어린 시절 야곱은 엄마와 협작해서 장자에게 주어지는 축복을 형 에서에게 빼앗았고 그 결과 자신을 죽이려하는 형을 떠나 800킬로 떨어진 외삼촌 집에 가게 됩니다. (외삼촌 집이 가까운데 있어요) (창27.41 에서는 아버지에게 받을 출복을 야곱에게 빼앗긴 것 때문에 야곱에게 원한이 깊어갔다. 그는 혼자서 아버지를 곡할 날이 멀지 않았으니 그 때가 되면 동생 야곱을 죽이겠다 하고 마음을 먹었다.)
말이 800킬로지 쫓기듯 나온 그의 길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오늘 본문에 ‘지팡이 하나 의지했다’고 합니다. 가는 도중 노숙을 하던 그에게 하나님의 사자가 나타나서 ‘복을 얻으리라,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 것이다’는 약속이 유일한 위로였습니다. 그곳을 ‘벧엘’하나님의 집이라는 의미의 이름을 부여합니다. 구약 성경을 읽다 보면 중요한 시기에 자주 등장하는 곳이 ‘벧엘’이고 흔하지 않게 우리 주변에서 종종 보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리고 외삼촌의 집에서 자그마치 20년동안 일하게 됩니다. 그러면서 외삼촌의 딸인 레아와 라헬을 아내로 얻고 또 각각 몸종인 실바와 빌하를 아내를 얻게 됩니다. 그리고 그들에게서 12명의 아들과 딸을 얻게 됩니다. 비록 당시가 아내를 여러명 두는 것이 처음에 말씀드린 것처럼 당시의 법으로 주어진 최대한의 자유라하더라도 20년 동안 4명의 부인 그리고 거기에 서로 다른 12명의 아들, 1명의 딸디나라는 가족 구성은 말 그대로 ‘지지고 볶는 삶’ 돌아서면 자매인 엄마들의 시기와 종의 아들로 태어난 서러움, 우리가 알고 있는 ‘금쪽 같은 내새끼’, ‘결혼지옥’이라는 것은 너무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알고 보면 그 만한 이유들이 성경에 나옵니다만 그렇다하더라도 야곱 입장에서는 (잠 25:24 다투기를 좋아하는 여자와 넓은 집에서 함께 사는 것보다 차라리 다락 한 구석에서 혼자 사는 것이 더 낫다’) 일지도 모릅니다. 이렇듯 많은 부인으로 인해 얻은 자녀가 비록 당시의 문화가 괜찮다고 하나님께서 허락하셨다고 하면 안됩니다. 창조 때부터 하나님께서는 한 남자와 한 여자의 결혼을 세우신 분이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벗어난 사람은 인생이라는 고통의 강을 건너기 마련입니다. 첫째, 사람의 한계에 갇힌다. 둘째, 그래서 자신이 아는 것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야곱은 자신에게 임했던 ‘복’, ‘번성하게 하신다’ ‘다시 돌아오게 하시겠다’는 말씀을 어쩌면 부인을 많이 얻는 것, 자녀를 이 두는 것, 재산을 많이 늘리는 것이 그 약속의 실현이라고 자신의 한계에 갇혀 그것만 보는 삶이죠.
야곱이 20년동안 일했던 외삼촌은 ‘스펀지 밥’에 등장하는 악덕 사장과 같았습니다(사진). 계속된 갑질속에서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떠나야겠다는 마음은 20년이 지나서야 가능했습니다. 살다보면 급하게 살던 곳을 떠나야 할 때가 있습니다. 몸은 하나라 어쩔 수 없이 자녀를 아는 분 집에 맡기거나 친인척의 집에 잠시 살게 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어린 시절 떠나 외삼촌의 집에서 20년 잡혀 살다싶이 한 그가 한 둘도 아니고 많은 식솔과 자신의 재물인 가축을 데리고 나온 곳은 그나마도 외삼촌의 집이라는 보호의 테두리를 벗어난 말 그대로 아무것도 없는 상황에 맞닦트린 것이죠. 비록 하나님께서 ‘네 조상의 땅, 너의 친족에게로 돌아가거라 내가 너와 함께 있겠다’고 하셨지만 그일도 결국 야곱이 해야 할 일입니다.
그렇게 그가 형이 있는 고향으로 돌아가는 길은 요즘 말로 금의환향이 아닙니다. 그래서 형에게 종을 보내어 돌아가려고 한다. 그러니 잘 봐달라고 말하는데 돌아온 종은 오히려 형이 자신을 만나러 400명의 장정을 거느리고 적을 향해 오는 것처럼 ‘치러 온다’는 종의 말을 듣고 근심에 빠집니다. 형의 축복인 장자권을 빼았는 만행이 시간이 지나면 쉽게 해결 될까요? 그렇게 가족들의 묵은 감정은 쉽게 해결되지 않고 깊은 상처를 깊게 줍니다. 결코 야곱의 뜻대로 흘러가지 않습니다.
하다못해 20년 동안 그래도 명절이면 선물이라도 보내고, 안부라도 묻기라도 했더라면 하는 후회는 하지 않았을까요? 어쩌면 야곱 생각에 ‘나는 저곳으로 돌아갈 일이 없다’라고 야곱은 마음먹고 살았다면' 벧엘에서 하나님께서 ‘다시 돌아오게 하겠다는 ‘ 하나님의 말씀을 귓등으로도 안들었고. 아니면 그저 주어진 시간에 말 그대로 죽을 힘을 다해 발버둥치며 살았기 때문에 주변을 살펴볼 겨를이 없다는 핑계 일 것입니다. 참 아이러니 하게도 인생은 뜻하지 않는 순간을 맞이합니다. 마치 공부하지도 않고, 노력하지 않은 친구들이 어김없이 시험날이 찾아오고 아침에 갑자기 배가 아픈 것처럼 말입니다.
그래도 야곱은 자신이 할 수 있는 것부터 합니다.(13) 그렇게도 아끼던 재물부터 내어 놓습니다. 재물로 말하면 아버지로 부터 장자권을 받기 위해서 , 외삼촌으로 부터 자기 재산을 보호하기 위해 온갖 애를 썼던 야곱입니다. 자기도 지킬 수 없는 재산, 어쩌면 ‘ 자식을 잃었는데 재산이 뭔 소용이라고도 생각했거나, 이렇게 하는게 더 이익이라고 빠른 계산을 했을지 모릅니다. 성경은 혹시 예물을 드림으로 형님의 화를 누그러뜨릴 생각이었다고 하는데 여러분 생각은 어떻습니까?
야곱은 아부에도 천재입니다. 그렇게 자신의 재산을 뚝 떼어 형에게 선물 공세를 하고(암염소 이백, 숫염소 이십, 암양 이백, 숫양 이십, 젖 나는 낙타 삼십과 그새끼, 암소가 사십, 황소가 열, 암나귀 이십, 그 새끼 나귀 열). 그리고 많은 예물을 보내면서 이 많은 것이 누구것이냐고 물으며 ‘야곱의 것이지만 주인 에서에게 보내는 예물’이라고 말하라고 시킵니다. 야곱은 이것이 분명하게 ‘형의 감정을 풀’(32.20)어 주기를 기대했고 그후에 형을 만나려고 한 것입니다. 이것이 야곱이 할 수 있는 최선입니다. 다행히 야곱은 자신이 이룩한 것을 움켜쥐고 죽으려하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재물도 자신을 따르는 무리도 앞서 보내고 부인들과 자녀들도 모두 앞서 보내고 이제 남은 것은 자신 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야곱이 홀로 남았더니’ 삶에 바쁘고, 돈 벌기에 바쁘다 문득, 혼자 남았다고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먼 길을 오가는 차에서, 출퇴근하는 복잡한 차 안에서, 뜬금없이 짙은 생각들이 문득 우리 인생을 허락없이 방문합니다. 아마도 야곱은 이렇게 생각했을지 모릅니다. ‘이제 어떻게 하나’ ‘더 할 것이 없나’ ‘혹시 빠뜨린 것은 없나’그렇게 아무것도 할 수 없을 때 ‘하나님이 찾아오십니다’ 사람은 살아야겠다는 이유가 없을 때 절망한다고 합니다. 나이가 40대와는 또 다르게 50대가 되면 남은 것은 집, 사업, 자녀들 밖에는 없다고 하고 그리고 주변으로 아내, 부모님 어쩌면 친구 정도까지가 최대한의 거리이고 거기에 자신을 묶어 둡니다. 그러면서 한편으로‘내가 죽으면’ 다 헛된 일이고 안된다는 생각은 삶의 지푸라기라도 잡고자 하는 것이 우리의 모습인데 이것을 탓할 수는 없는 일입니다. 생각해보면 우리 부모님들이 그 지푸라기라도 잡았기 때문에 지금의 우리 가족이 있고 그것이 죽음의 이유가 아니라 삶의 이유가 되었기 때문에 오늘 우리 가족이 이곳 마치 ‘벧엘’이라는 곳에서 함께 할 수 있는 것은 어쩌면 홀로 남은 야곱보다 더 나은 것은 분명합니다. 그렇게 혼자서 하나님 앞에 섭니다.
2. 야곱은 이곳에서 자신의 이름이 하나님과 싸워서 이겼다는 의미로‘이스라엘’로 바뀌었고 그곳의 이름을 ‘하나님의 얼굴’이라는 의미로 ‘브니엘’이라고 불렀습니다. 야곱은 하나님과의 문제를 먼저 풀었습니다. 20년 동안 아내를 얻은 것도, 많은 자녀를 얻은 것도, 많은 재물을 얻은 것도 모두 자기가 한 것입니다. 그러나 야곱이 가진 거라고는 남을 속이 재주, 좋게 말하면 잔재주가 많아 ‘넌 어디가도 그 재주로 굶어 죽지는 않겠어’라는 말을 듣는 부류의 사람이죠. 갑질하는 외삼촌으로부터 자신의 재산을 불리고 한편으로는 자신이 가족의 관계를 끊었던 것처럼 결과적으로 외삼촌의 딸들도 설득하여 떠나게 만드는 인물이 야곱이었지만 그럼에도 야곱의 성격은 하나님과 씨름할 때 문제를 풀어내는 실마리가 됩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하나님을 만나는 일을 두려워합니다. 왜냐하면 내가 ‘내가 아닌 다른 것으로 바뀔 것 같다는 불안함이 있기 때문이죠, 우리가 보는 교회 다니는 사람들의 그 이상함이 내가 입을 부자연스러운 옷 같이 느껴지기 때문이죠. 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만나는 길을 두려워 마시길 바랍니다. 여러분의 성격을 바꾸어 로보트로 모두를 똑같이 만드시는 분이 아닙니다. 교회가 사람을 바꾼다고 하는데 제가 보기에 절반만 맞는 말입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dBsBfqH5N1A 아무것도 두려워 말라
그는 에서보다 더 크신 하나님을 만났고 이제 현실의 두려움인 에서도 만납니다. 제일 내려놓기 어려운 것이 자존심 아닐까요? 때론 재물도 떼어 줄 수 있고, 아내와 자녀들도 앞서 보낼 수도 있고 하나님 앞에서 눈물 콧물을 흘리며 기도할 수 있어도 사람 앞에 머리를 숙이는 것은 결코 쉽지 않습니다. 재물을 앞세우고, 자신의 처와 자식을 앞세웠던 야곱은 막상 에서를 만나자 1)‘야곱은 맨 앞으로 나가서’ ‘일곱 번이나 땅에 엎드려’ 그러자 에서는 ‘그를 끌어 안았고 야곱의 목을 끌어안고서 입을 맞추고 둘은 함께 울었다’고 성경은 이 장면을 상세하게 그 둘의 화해의 장면을 다룹니다. 그리고 계속해서 부인과 자녀들이 ‘절한다’는 의미를 강조합니다. 자신의 많은 제물을 얻은 것도 ‘형님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형님께 드린 예물은 ‘주께 은혜를 입으려 함입니다’ 형이라고 부르지 않고 ‘주’라고 부릅니다.
형은 동생에게 이 예물을 거두라고 말합니다. 형도 나름 살았습니다. 400의 장정을 데리고 다닐 수 있는 능력, 그러면서도 동생을 안아줄 수 있는 형, 많은 예물을 보고도 손 사례를 할 줄 아는 형도 그리 나쁜 형이라고 볼 여지는 없습니다. 야곱의 아부는 극에 달합니다. ‘형님의 얼굴을 뵙는 것이 하나님의 얼굴을 뵙는 듯합니다’ 그러면서 결국 선물을 형에게 쥐여 줍니다. 이렇게 외삼촌의 집에서 파란만장한 20년을 보내고 고향으로 돌아가는 길 장자권을 훔친 형 에서와도 극적으로화해합니다. 이만하면 괜찮을 인생일지 모르지만 인생 3막은 개판의 끝장이고 어쩌어찌해 4막의 시작을 잠깐 더 보려합니다.
3. 창47장에서 이집트로 내려 전 집안 70명이 다 내려갈 일이 생깁니다. 인생 3막의 최고 하이라이트는 아버지의 사랑을 독차지하는 요셉을 미워해서 죽이려 했다가 간신히 죽음은 면하고 아버지에게는 동물에게 잡혀 먹었다고 했던 사건인데, 애굽으로 팔려간 요셉이 이집트의 국무총리가 되어 있었고 우여곡절 끝에 극심한 기근에 처해있던 아버지 일가를 모두 초대한 것입니다. 그리고 야곱은 총리의 아버지로 왕 앞에 섭니다.
왕은 ‘어른께서는 연세가 어떻게 되시오’라고 물으니 야곱은 이렇게 대답합니다. ‘떠돌아다닌 햇수가 백 년하고도 삼십 년입니다 그리고 험악한 세월을 보냈습니다’라고 말합니다. 앞서 살핀 야곱의 이야기는 인생 2막에 어린시절 형의 장자권을 훔쳐 달아난 그의 삶은 외삼촌의 집에도 여전히 훔치는 삶이었지만 하나님의 개입으로 방향을 잡는듯했습니다. 하지만 아직 인생은 끝나지 않았고 그의 파란만장한 삶은 이집트 왕 앞에서 ‘험악한 세월을 보냈다’이라는 그의 말에 모든 것이 담겨있습니다.
여기 우리가 가족 각자는 노년의 부모님을 비롯해 자신도 인생의 후반을 바라보며 살아야하는 어떤 지점에 와 있습니다. 우리가 그때에 나이가 몇이며 삶이 어떠했냐고 물어볼 때 아직 우리는 ‘험악한 세월’과 다르게 말할 기회를 오늘 얻었습니다. 시편에 보니 90:10 우리의 연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연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뿐이요, 빠르게 지나가며 마치 날아가는 것 같다고 정확하게 표현합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에게 우리의 날을 세는 법을 가르쳐 주셔서 지혜의 마음을 얻게 해주십시오 주님 돌아와 주십시오 언제까지입니까 주님의 종들을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여기 ‘지혜의 마음이’ 무엇일까요? 시편기자는 ‘주님의 사랑으로 우리를 채우’는 것이라고 고백합니다. 더 사랑하십시오. 정으로 살더라도 더 사랑하십시오. 내가 하는 사랑에는 한계가 있기 때문에 한계가 없으신 아버지 하나님의 사랑을 배우는 것입니다. 그분은 저와 여러분을 사랑하셔서 자신이 가장 아끼는 독생자 예수님을 죽음에 내어 주신 분이십니다. (롬5.8, 요1 4.10) 그 사랑을 채울 때 우리의 인생의 삶은 누구나 그러한 답 ‘험악한 세월을 보내’지 않고 사랑하며 살았다고 말할 것입니다. 아멘.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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