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년) 주기도문 (마 6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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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ndou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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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백 :
대표기도 : 우리를 예배자로 부르신 하나님 아버지, 온전히 영광과 찬송을 받으시옵소서. 이 시간 드리는 예배를 통해 천국의 비밀을 맛보게 하시며 성령으로 충만하게 하여 주옵소서. 우리의 죄를 깨닫게 하시는 하나님 아버지, 사랑하는 마음으로 주시는 말씀에 자복과 회개로 반응하게 하시고, 주께서 기뻐하실만한 거룩한 그릇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우리의 필요를 아시고 문제를 해결하실 능력의 하나님, 우리 각자의 삶에서 겪는 갖가지 질병들과 아픔, 고난과 슬픔들을 헤아려주시고, 하나님의 크신 능력으로 이끄사, 주의 은혜를 경험하게 하여 주옵소서. 이 시간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만 의지하여 예배하오니, 우리 예배를 받아 주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헌금 :
예배를 위하여 (부르심, 감사, 회개, 간구, 영광)
오늘도 우리를 예배자로 부르신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날마다 내 뜻과 내 생각을 위해 살아왔던 삶을 회개하오니 이 시간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용서하여 주옵소서. 오늘의 예배를 통해 더욱 주님을 닮아가는 시간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봉헌을 위하여
이 시간 우리의 귀한 물질을 봉헌합니다. 이 물질을 통해 주의 뜻을 이루어 주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기도 찬양 : 온전케 되리 / 온 맘 다해 / 전심으로
본문 : 마 6:9-13 (5-15)
5 또 너희는 기도할 때에 외식하는 자와 같이 하지 말라 그들은 사람에게 보이려고 회당과 큰 거리 어귀에 서서 기도하기를 좋아하느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들은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6 너는 기도할 때 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7 또 기도할 때에 이방인과 같이 중언부언하지 말라 그들은 말을 많이 하여야 들으실 줄 생각하느니라
8 그러므로 그들을 본받지 말라 구하기 전에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하나님 너희 아버지께서 아시느니라
9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10 나라가 임하시오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11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
12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
13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고 다만 악에서 구하시옵소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
*두 가지 부정문이 나오고, 한 가지 긍정명령이 나옵니다.
5절입니다.
“또 너희는 기도할 때에 외식하는 자와 같이 하지 말라”
외식이라는 단어는,
위선자, 가면을 쓰다, 연기자 라는 의미입니다.
외식하는 자와 같이 기도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이 사람들의 특징이 무엇입니까?
“그들은 사람에게 보이려고 회당과 큰 거리 어귀에 서서 기도하기를 좋아한다.” 입니다.
사람에게 보이기 위해서,
회당, 큰 거리 어귀 등
사람들이 자주 찾는 명소에서 기도하는 것을 좋아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자기 상을 이미 받았습니다.
상이라는 단어는,
품삯, 보수 라는 의미입니다.
이미 다 받았다는 것이죠.
*또, 7절에
“또 기도할 때에 이방인과 같이 중언부언하지 말라”
중언부언이라는 단어는,
말이 많다, 수다 스럽다
라는 의미인데,
이것은 마치, 하나님이 귀를 막고 있음을 의미하는 단어입니다.
하나님은 기도하는 것은 싫어하시는데,
말을 많이 하면,
괴로워서, 들으신다. 라는 의미이죠.
“그들은 말을 많이 하여야 들으실 줄 생각하느니라”
*두 가지 부정문이 끝난 후에,
한 가지 긍정문이 나오는데,
9절입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원문으로 보면, 그러므로 이와 같이, 너희는 기도하라.
두 가지 부정문을 통해서,
위선자처럼 기도하지 말라.
그들은 사람에게 보이기 위해서 기도한다.
이방인과 같이 중언부언하지 말라.
그들은 말을 많이 하여야 하나님이 들으실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렇게 기도하지 말라.
그러므로 너희는 위의 두 가지 사례처럼 기도하지 말고,
아래 내가 가르치는 기도처럼,
이와 같이 기도하라.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여러분, 하나님은 진실한 기도를 좋아하십니다.
우리의 진심을 담은 기도를 좋아하십니다.
위선자처럼 기도하지 말아야 합니다.
거짓된 기도는 하나님이 좋아하시지 않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기도를 싫어하지 않으십니다.
말을 많이 하면, 억지로 그 기도를 들으시는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의 기도에 귀를 열고 계십니다.
*이제 그러고 난 다음에
주기도문
9절부터 13절까지 주기도문인데
같이 읽어볼까요?
9절부터 13절입니다.
9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10 나라가 임하시오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11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
12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
13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고 다만 악에서 구하시옵소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
11절부터 13절까지
우리 라는 단어가 보이나요?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고 다만 악에서 구하시옵소서
여기까지가 이제 우리 간구라고 불리는 기도이고,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가 임하시오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여기서는
우리 라는 단어가 한 번 나오기는 하는데
모두, 하나님에 대한 기도에요.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당신의 이름이 거룩하게 하소서.
하나님의 이름이라는 단어는,
하나님 자체를 이야기하는 것인데,
하나님이 거룩하게 되기를 기도하는 것입니다.
기독교인들은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하게 되기를 기도했는데,
하나님이 가장 소중한 분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에 관심을 가지고,
하나님의 이름이 높아지기를 바라는 것이
기독교인들의 소원이었습니다.
그래서,
주기도문에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무엇보다 당신의 이름이 거룩하게 되기를 기도합니다.
기독교인들은 무엇보다
하나님의 이름에 관심을 가지고
하나님의 이름이 해가 되지 않도록,
조심하고 또 조심하는 삶을 살아가게 되는 것이죠.
구원받은 자의 삶은,
관심사가, 바뀌게 되어 있습니다.
이방인들처럼, 자신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기도하지 않습니다.
구원받은 자는,
하나님의 이름을 위해서기도하고,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기도하고,
하나님의 뜻을 위해서 기도하는 것이죠.
이것이 주기도문에서 가르치는 우선순위입니다.
우리의 기도는, 당연히 이렇게 되게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도 이런 기도를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우리 인생을 통해서도,
하나님의 나라가 확장되고,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고,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이,
가장 기뻐하시는 기도인 것이죠.
마태복음, 7장 21절에도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자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여기서도 뜻이라는 단어가 나오는데
나더러 주여 주여 소리만 지르는 사람이 다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쎌레마, 뜻대로 행하는 자가 들어가게 될 것이다.
마태복음, 12장 5절에도
“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이니라 하시더라”
예수님의 가족을 소개하고 있는데,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쎌레마, 뜻대로 행하는 자가, 예수님의 가족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기독교인들은
필연적으로,
자신의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게 되어 있습니다.
이게 기독교인들의 당연한 정체성이죠.
*또한 주기도문은
하나님 뜻만 위해서 기도하지 말고,
우리의 필요를 위해서도 기도하라고 가르치고 있는데,
11절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
빵에 대한 기도인데
물질적 필요에 대한 기도를 하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먹을 것, 마실 것, 입을 것, 거주할 곳 모두가 필요한 것들인데
물질적 필요들입니다.
기독교인들은,
물질적 필요 역시 하나님을 의지해야 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창조주라고 믿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아무리 열심히 일한다고 해도,
창조주 하나님의 역사가 없이는,
우리의 일의 수고를 받을 수 없다고 믿었던 것이죠.
기독교인은
하나님을 의지하면서
열심히 일을 해야 했습니다.
내가 하는 일도, 공부도, 모든 것들도,
그 수고의 열매를 하나님이 맺게 하신다는 것이죠.
이게 기독교인들의 믿음이었고,
그러므로, 일용할 양식을 달라는 기도를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물질적 필요를 기도했다면,
또한 우리는 영적 필요를 위해서도 기도해야 했습니다.
우리는 날마다 죄를 짓고,
또 날마다, 범죄하기 쉽습니다.
12절을 보니까,
당신은 우리를 우리의 죄에서 용서하소서.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용서해준 것처럼.
용서는 우리의 영적인 양식입니다.
용서받지 못한 자는, 영혼이 말라 죽게 되어 있습니다.
세상의 영은,
정죄의 영입니다.
항상 비판하고, 항상 나무라고, 항상 우리로 하여금 죄책감에 시달리게 하는 영입니다.
물론
기독교인도 건강한 죄책감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과도한 죄책감은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늘, 부족함만 보고,
죄책감만 가지고,
기쁨과 은혜는 전혀 없고,
이것은 기독교인의 정상적인 삶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날마다 영적인 필요를 채움 받아야 하는데,
그것이 뭐냐?
하늘에 계신 우리의 아버지로부터 받는 용서라는 것입니다.
12절을 다시 읽어보겠습니다.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
기독교인들은
다른 사람을 쉽게 용서할 수 있는데,
날마다, 하늘 아버지로부터 용서의 은혜를 기도하고 누리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용서받은 자만,
용서할 수 있는데,
기독교인들은,
물질적 필요뿐만 아니라,
영적인 필요도 날마다 기도함으로, 공급받기 때문에,
타인을 쉽게 용서하게 되는 것입니다.
용서하려면
용서받아야 합니다.
하나님께 영적인 필요를 공급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용서받지 못할 죄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죽으셨기 때문입니다.
죽음보다 더 큰 값은 없습니다.
예수님은 이미 모든 값을 치르셨습니다.
기독교인은
날마다 용서의 은혜를 구해야 합니다.
그래야 영적으로 건강해지고,
영적으로 건강해져야,
하루하루의 삶이 벅차지 않습니다.
우리는 날마다,
타인과 부딪치는데,
영적으로 연약하면,
우리가 분별이 안 되고, 쉽게 좌절과 낙심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내 죄를 용서하시고,
나를 있는 그대로 사랑하시는, 아버지의 사랑에 푹 젖어들어야,
타인을 사랑하고,
분별력 있게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13절인데
시험이라는 단어는, 유혹이라는 의미입니다.
죄 짓게 유혹하는 것,
마태복음, 4장에 보면,
마귀가 예수님을 시험하고 있는데,
그 단어가,
유혹이라는 의미입니다.
마귀는
예수님을
세 번이나 시험했는데,
예수님은
말씀으로
세 가지 시험을 모두 이기셨습니다.
기독교인도
시험에 들 수 있는데,
마귀가,
기독교인들을 시험하기 때문입니다.
마귀는
전설이나 이야기가 아니라,
실존하고 있는 영적인 실체인데,
실제로,
우리를 넘어지게 하는 존재가 마귀입니다.
우리가 마귀의 존재를 간과하면,
시험에 쉽게 빠져들어가는데,
마귀는,
우리를 가만 놔두지 않고,
항상 시험에들도록 우리를 유혹하고 있기 때문에,
날마다 깨어서 기도하지 않는 이상,
우리는 시험을 이길 수가 없는 것입니다.
악이라는 단어는,
포메로스 라는 단어인데,
그 앞에, 남성 단수 관사가 붙어서,
어떤 학자들은,
이거 마귀다,
사탄이다,
라고 해석하기도 합니다.
저는 그 해석을 따르기도 하는데,
악을 사탄이라고 번역하면,
우리를 시험에들게 하지 마시옵고 다만 사탄으로부터 우리를 구하시옵소서.
이렇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물질적 필요,
영적 필요를 구했다면,
사탄으로부터의 승리,
악으로부터 승리할 수 있는 능력도 구해야 하는 것입니다.
*주기도문은, 찬송으로 마무리가 되는데,
나라와 권세와 영광을,
아버지께 되돌려드리는 형식으로
찬송을 부르고 있습니다.
나라도 아버지께
권세도 아버지께
영광도 아버지께
영원히 있습니다. 아멘.
여러분,
하늘 아버지가 계시다는 것을 믿는 것이 기독교인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하늘 아버지의 뜻대로 이루어지기를 간절히 바라는 것이 기독교인입니다.
이제는
내가 없고, 주만 있고,
하나님의 뜻만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발버둥쳐도, 하나님의 뜻만 이루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알고 순종하는 것이 성숙한 기독교인입니다.
어릴 때는,
우리가 우리의 목표와 성취를 위해서 기도합니다.
그런데,
고난과 시련과 아픔을 당해보면서,
아, 이제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을 살자. 라는 것으로 변화되게 됩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당신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소서.
당신의 나라가 임하시옵소서.
당신의 뜻이 이루어지옵소서.
우리에게 필요한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
우리에게 필요한 영적인 양식도 주시옵고.
우리가 시험에서 이길 수 있도록 성령의 능력도 더하여 주시옵소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
주기도문은,
우리가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며,
무엇을 위해 기도해야 하는지를 명확히 보여줍니다.
기독교인들은
평생 이 기도의 원리대로 기도하면서,
내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구하며,
물질적 필요도,
영적인 필요도,
성령의 능력도,
오직 하나님께 기도함으로 얻어내야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기도하는 은혜가 있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이제 찬양합시다.
전심으로 라는 찬양을 드릴텐데
주님 손에 맡겨드린다는 내용입니다.
나의 삶이 주님께 있고,
내가 믿는 분은 오직 예수라는 내용입니다.
이 믿음 가지고 찬양으로 고백합시다.
*기도합시다.
교회를 위해서.
내 뜻과 내 생각과 내 목표만 추구했던 삶을 회개합시다.
돌이켜서, 하나님의 이름과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뜻을 위해 기도합시다.
하나님, 당신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옵소서.
당신의 나라가 속히 이루어지게 하여 주옵소서.
당신의 말씀에 순종하게 하여 주옵소서.
또한, 병약한 자들을 위해서,
추석 연휴 간, 고독과 씨름하는 모든 청년들, 형제자매들을 위해서.
내가 누리는 은혜가 당연한 것이 아닙니다. 누군가에게는 간절한 기도제목일 수 있습니다.
내가 누리는만큼, 타인의 아픔에 공감하고, 위로해줄 수 있도록.
우리 주변에 아프고 힘든 지체들 있다면, 그들에게 위로를 전해주는 삶을 살도록. 순종하겠노라고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내 생각과 내 목표와 내 뜻을 위해 살아왔던 삶을 회개합니다. 이 시간 주의 보혈로 덮으시고 용서하여 주옵소서. 우리 주변에 고통받는 많은 이웃들을 위해 기도하고 간구합니다. 그들의 필요를 살피시고, 그들의 아픔을 어루만져 주옵소서. 우리가 받는 혜택이 당연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가진 물질을 통해 주님을 섬기고, 이웃을 돌아보는 은혜가 있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묵상
이미 기도는 사라졌고,
하나님을 의식하는 사람은 드물고,
거의 기도의 능력에 관해선 기억을 상실할 정도의 시대에 주기도문은 무슨 의미가 있을까?
해설
'하늘'은 하나님의 초월성을 가리키고, '아버지'는 하나님과 사람들이 맺고 있는 헌신적인 관계를 가리킨다.
이는 '그들(이스라엘 백성)이 내 [하나님의] 이름을 거룩하게 할 것'을 기대하며, 하나님이 어디에 계시든지분명히 관련되어 있다에드, 행동과 찬양으로 하나님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하는 사람들은 바로 사람들입니다.
우리의 기도는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하게 되기를 간절히 바라는 기도인가?
우리의 기도는 = 곧 우리의 소망이다.
교회는 하나님을 거룩하게 하고자 하는 사람들의 모임이다.
자신의 행위와 자기 계시. 그분의 이름을 거룩하게 하는 것에는 특히 의식적인 순종을 통해 그분의 명령을 이행하는 것이 포함됩니다.
심판과 구원을 위해 하나님이 오실 것이라는 구약의 기대를 왕국 언어로 다시 표현한 것으로 쉽게 이해됩니다.
그의 뜻에 맞서 당신의 뜻을 취소하라'
마태복음에서 θέlamnμα ('의지') 의 다른 용법은 하나님께 대한 순종에 대한 동일한 관심을 가리킨다( 마 7:21 ; 12:50 ; 18:14 ; 21:31 ).
Matthew 7:21 NKRV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Matthew 12:50 NKRV
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이니라 하시더라
Matthew 18:14 NKRV
이와 같이 이 작은 자 중의 하나라도 잃는 것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뜻이 아니니라
마 21:31
Matthew 21:31 NKRV
그 둘 중의 누가 아버지의 뜻대로 하였느냐 이르되 둘째 아들이니이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세리들과 창녀들이 너희보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리라
위선자들이 참 많았다.
실제로 보면 정말 하나님의 뜻에 관심있는 사람은 몇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자신의 뜻이 좌절되면 크게 상심하지만, 하나님의 뜻은 무엇인지도 모르기 때문에 좌절이나 상심이 없다.
1.4. 기도( 마 6:12-15 ; 막 11:25 ; 눅 11:4 ) . 예수님은 용서를 구하고 받는 주요 수단으로 아버지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을 옹호 하십니다. 그렇지만모든 사람이 부담 없이 하나님께 직접 나아갈 수 있도록 초대합니다.중개자이신 예수님께서는 기도와 용서에 대한 깊은 공동체적이고 상호적인 경험을 가정하십니다. 주기도문에서 우리는 우리에게 상처를 준 모든 사람을 용서하겠다고 다짐하면서 “우리의 빚/죄를 용서해 주십시오”라고 공동으로 간청해야 합니다.마 6:11–15 ; 눅 11:4 ).
위선은 기도할 때 피해야 할 유일한 죄는 아닙니다. 무의미하고 기계적인 발언은 또 다른 것입니다. 전자는 바리새인의 어리석음이다e, 이방인 또는 이교도의 후자( 7 ). 위선은 기도의 목적을 오용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에서 자신의 영광으로 기도를 돌리는 것). 장황한 말은 기도의 본질을 오용하는 것이다(하나님께 대한 실제적이고 개인적인 접근에서 단순한 말의 암송으로 전락시킵니다.)
일반적인 경건의 실천과 관련하여 그는 바리새인의 방식(과시적이고 이기적인)과 기독교의 방식(은밀하고 경건한 방식)을 대조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의는 비기독교 공동체에서 볼 수 있는 그 어떤 것보다 더 크고(내면적이기 때문에), 그리스도인의 사랑은 더 넓고(적을 포함하기 때문에) 더 깊으며, 그리스도인의 기도는 더 깊다는 점(신실하고 사려 깊기 때문에)을 강조합니다.
주기도문의 후반부에서는 소유격 형용사가 '당신의'에서 '우리의'로 바뀌는데, 이는 우리가 하나님의 일에서 우리의 일로 전환하기 때문입니다. 그분의 영광에 대한 뜨거운 관심을 표명한 우리는 이제그분의 은혜에 대한 우리의 겸손한 의존을 표현하십시오.
요약하자면, 예수님께서 자기 백성에게 금하신 것은 마음이 열리지 않을 때 입으로 하는 기도입니다.
'신자들은 하나님께 알려지지 않은 일에 대해 알리려는 목적으로 기도하지 않으며, 그분이 그의 의무를 행하도록 자극시키려는 목적으로, 또는 마치 그분이 꺼려하시는 것처럼 촉구하기 위한 목적으로 기도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들은 일어나서 그분을 찾고, 믿음을 행사하여 그분의 약속을 묵상하고, 그 약속을 그분의 품에 부어서 근심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기도합니다.
우리가 기도하기 전에 그분이 누구신지 고의적으로 기억하는 데 시간을 보내는 것이 항상 현명합니다. 그래야만 우리는 합당한 겸손과 헌신, 확신을 가지고 사랑이 많으신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 나아갈 수 있습니다.
첫째, 하나님의 관심이 우선시될 것입니다…('당신의 이름, 당신의 왕국…, 당신의 뜻…').
그분의 이름은 다른 모든 이름과 구별되어 높임을 받는다는 점에서 이미 '거룩'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이 거룩히 여김을 받고, '거룩한 것으로 다루어지기'를 기도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것이 우리 생활과 교회와 세상에서 이름을 지닌 이에게 합당한 존경을 받게 되기를 간절히 원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왕국은 그분의 왕의 통치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그분은 이미 거룩하시므로 자연과 역사 모두에 대해 절대적인 주권을 갖고 다스리시는 왕이십니다. 그러나 예수께서 오셨을 때, 그분은 구원의 모든 축복과 하나님의 통치가 암시하는 복종의 요구와 함께 하나님의 왕적 통치의 새롭고 특별한 침입을 선언하셨습니다. 그의 나라가 임하도록 기도하는 것은 교회의 증거를 통해 사람들이 예수님께 복종하는 것처럼 그 나라가 성장하도록 기도하는 것이며, 예수님께서 그의 권세와 통치를 받으러 영광 중에 다시 오실 때 그 나라가 곧 완성될 것이라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지식과 사랑과 능력이 무한하신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의 뜻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것을 저항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며, 그것을 분별하고 원하고 행하는 것은 지혜입니다. 그분의 이름이 이미 거룩하고 왕이 되셨듯이 그분의 뜻도 이미 '하늘에서'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우리에게 기도하라고 명하신 것은 땅에서의 삶이 하늘에서의 삶에 더욱 가까워지도록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표현되는 표현은 하나님의 이름을 거룩하게 하는 것과 그의 왕국을 확장하는 것과 그의 뜻을 행하는 것에 동일하게 적용되는 것 같기 때문입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이시며 아버지의 사랑으로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당신 자녀들의 전적인 복지에 관심을 갖고 계시며 우리가 믿음으로 우리의 필요, 즉 음식과 용서와 구출의 필요를 그분께 가져오기를 원하십니다.
물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먹을 것을 '주시어' 달라는 청원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스스로 생활비를 벌어야 한다는 사실, 농부들이 기본적인 곡물을 공급하기 위해 밭을 갈고 씨를 뿌리고 수확해야 한다는 사실, 또는 우리가 배고픈 사람들에게 먹을 것을 주라는 명령을 받았다는 사실을 부정하지 않습니다.
용서는 음식이 육체를 위한 것처럼 영혼의 생명과 건강에 없어서는 안 될 요소입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을 용서하지 않으면 우리를 용서하지 않으실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확실히 다른 사람을 용서하면 용서받을 권리가 생긴다는 뜻은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은 회개한 사람만을 용서하신다는 것과 참된 회개의 주요 증거 중 하나는 용서하는 영이라는 것입니다.
세 가지 청원은 매우 포괄적입니다. 원칙적으로 그것들은 물질적(일용할 양식), 영적(죄 용서), 도덕적(악으로부터의 구원) 등 우리 인간의 모든 필요를 다룹니다. 이 기도를 할 때마다 우리가 하는 일은 우리 인간 생활의 모든 영역에서 하나님께 의존하고 있음을 표현하는 것입니다. 더욱이, 삼위일체적 그리스도인은 이 세 가지 간구에서 삼위일체에 대한 숨겨진 암시를 보게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일용할 양식을 받는 것은 아버지의 창조와 섭리를 통해서이고, 아들의 속죄의 죽음을 통해서이고, 성령의 섭리를 통해서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악한 자로부터 구원하는 능력이 내주하시는 것입니다. 일부 고대 사본(최고는 아니지만)이 '왕국과 권세와 영광'을 홀로 속해 있는 이 삼위일체 하나님께 돌리는 송영으로 끝나는 것은 당연합니다.
사역
5 너희는 기도할 때에 위선자들처럼 하지 말라. 그들은 사랑한다(필레오). 기도하는 것을 / 집회소들과 넓은 거리 어귀에 서서.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하여. 아멘. 내가 말하노니, 그들은 아페코(받다, 멀다, 끊다 / 현능직)하였다, 그들의 그 미쏘스(품삯, 상),
아페코 : 자신의 몫을 받다. 전액을 받다.
6 너의 아버지께서 아포디도미(갚다, 도로주시다 / 미능직).
아포디도미 : 갚다, 되돌려주다
7 또 기도할 때에 이방인들처럼 중언부언하지 말라. 그들은 생각한다. 말이 많아서 들으실 것이다 라고.
8 그러므로 그들처럼 되지 말라. 그는 아신다(오이다 / 완능직). 너희가 가지고 있어야 할 필요를. 네가 그에게 요청하기 전에.
9 그러므로 이와 같이 너희는 기도하라(명령), 우리 아버지, 하늘에 계신. 거룩하게 하소서(명령), 당신의 이름
10 당신의 나라가 오게 하소서. 당신의 뜻이 되게 하소서. 하늘에서처럼 그리고 땅에서도
11 우리의 빵을, 일용할, 당신은 주소서. 우리에게. 오늘
12 당신은 용서하소서, 우리를, 우리의 죄에서. 우리가 용서해준 것처럼,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13 당신은 가지고 들어오지 마소서. 우리 안으로, 유혹을. 도리어 당신은 구원하소서, 우리를, 나쁜 것으로부터.
주석
세례 받은 자만 기도할 수 있다. 세례 받은 자만 기도할 수 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된 사람만 기도할 수 있다.
5-6 바리새인들처럼 “위선”적으로, 사람에게 보이기 위해서 기도하지 말라.
기도의 법칙 1 - 진실한 사람이 드리는 기도 /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께 주목받는 기도
지옥은 “거짓”만 존재한다.
천국에는 “진실”만 있다.
위선 :

외식(外飾, hypocrisy) ‘외식’을 뜻하는 헬라어 ‘휘포크리시스’(ὑπόκρισις)는 ‘…인 체하다’, ‘연극을 하다’, ‘꾸미다’는 의미의 ‘휘포크리노마이’(ὑποκρίνομαι)에서 파생된 말로서, 원래 가면(假面)을 쓰고 자기가 아닌 다른 사람의 모습으로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사람, 즉 연극 배우를 가리키는 단어였다. 성경에서는 이 단어를 사용하여 남에게 보이기 위해 거짓으로 행동하는 것, 곧 자기 자랑(만족)이 밑바탕 된 종교적(도덕적) 가식(假飾)이나 위선(僞善)을 가리키게 되었다(마 6:5; 23:27; 눅 6:42; 12:1; 갈 2:13; 벧전 2:1). 현대 영어에서 ‘위선자’를 가리키는 ‘hypocrite’는 여기서 차용된 표현이다.

예수께서는 공생애 기간 내내 이 외식하는 자들에 대해 책망하셨는데, 외식의 행태로 보면 구제(마 6:2), 기도(마 6:5; 막 12:40), 금식(마 6:16), 판단이나 비판(마 7:5), 부모 공경(마 15:5–7), 그리고 하나님을 섬기는 일(마 15:8), 율법을 준수하는 일(마 23:23) 등에서 표리부동(表裏不同)하게 행동함을 지적하셨다. 특히 예수께서는 이스라엘의 종교 지도자들(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외식에 대해 신랄하게 꾸짖으셨다. 그들은 남을 가르치기는 잘 하면서 정작 자신들은 그 가르침대로 행하지 않았다(마 23:3). 따라서 예수께서는 그들을 가리켜 그 속은 썩고 냄새가 나지만 겉은 잘 꾸며 놓은 회칠한 무덤 같다고 지적하셨다(마 23:25–28).

한편, 외식은 초대교회 안에서도 성행하던 악습이었다. 그 대표적인 경우로, 자신들의 신앙심을 자랑하려다 성령을 속인 죄로 급사(急死)한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 사건을 들 수 있다(행 5:1–11). 또 베드로가 이방인들과 식사하다가 유대 출신 교인들의 눈을 의식하여 그 자리를 슬그머니 빠져나간 이중적인 모습을 보임으로써 신앙의 모범을 보이지 못한 일로 사도 바울에게 면책당한 일이 있는데, 이 사건 역시 외식적인 행동을 책망받은 것이다(갈 2:11–14). 베드로는 이처럼 외식한 일로 인해 두고두고 후회했을 것이다(벧전 2:1).

이처럼 사람이 외식을 하게 되는 이유는, ① 하나님보다 사람들의 눈을 먼저 의식하기 때문이며(마 6:4–6,18; 23:28), ② 타인으로부터 영광과 칭찬을 받고자 하기 때문이고(마 6:2; 23:5,7), ③ 마음이 하나님으로부터 멀리 떠났기 때문이며(마 15:7–8), ④ 그 마음에 간사함과 악함과 불의가 충만하기 때문이고(마 22:18; 23:25,28), ⑤ 믿음을 배반했기 때문이다(딤전 4:1–2). 따라서 외식하는 자들은 그 하는 일에 이미 상을 받았기 때문에(타인에게서 칭찬을 받고, 자기 스스로도 만족을 얻었기 때문에) 천국에서 상을 기대할 수 없다(마 6:2,5). 외식을 피하기 위해서는 무엇을 하든지 먼저 하나님을 의식하며, 은밀히 살피시는 하나님 앞에서 행한다는 마음가짐으로 매사에 행동해야 한다(마 6:6,18).

구약에서 "위선자"는 KJV에서 사용되었지만 이후 번역(예: RSV, NIV)에서는 종종 "경건하지 않은" 또는 "경건하지 않은"으로 사용되었습니다(욥 8:13; 15:34-35; 17:8; 사 9:17; 33:14 등). 이 "경건하지 않은" 사람은 하나님을 전적으로 반대하거나 하나님을 잊어버린 사람입니다.
예수님은 위선자들이 공공장소에서 경건한 척하는 것을 비판하셨습니다(마 6:2, 5, 16). 그들은 자선을 베풀고 기도하고 금식할 때 하나님의 보상보다 사람들의 칭찬에 더 관심이 있었습니다. 위선자들은 또한 다른 사람의 잘못을 판단하고 자신의 잘못은 무시하는 죄를 범했습니다(마 7:1-5).
신약성경의 저자들은 여섯 번이나 (위선 없는) 진실함(아누포크리토스)이 그리스도인의 특징이 되어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사랑(롬 12:9; 고후 6:6; 벧전 1:22), 믿음(딤전 1:5; 딤후 1:5), 지혜(약 3:17)는 진실해야 합니다.
7-8 예수님은 끈질긴 기도를 격려하셨고(눅 18:1-8) 곧 기도의 모범을 제시하셨지만(6:9-13 참조), 아버지와의 개인적인 관계가 없는 사람들이 얄팍하게 말을 반복하는 것을 정죄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다른 종교를 믿는 사람들처럼 계속 중얼거리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를 필요로 하지 않으시지만, 우리의 기도를 원하시고 우리가 기도를 필요로 한다는 것을 알고 계십니다. 기도는 "아버지, 당신이 가장 잘 아십니다."라는 신뢰를 발전시킵니다.
기도로 우리의 필요를 구하며, 우리는 “하나님을 알게” 되며, “하나님을 신뢰”하게 된다.
기도의 법칙2 - 친밀함 가운데 기도하라.
안 친한데 구하는 기도는 이방인의 기도이다.
주문을 외우지 말라.
하나님을 조종하지 말라.
중얼거림. 그리스어와 영어 모두에서 의성어입니다. 이 용어는 정해진 기도문을 암송하거나 같은 문제를 반복하는 것을 금지하지는 않지만, 이교도처럼 정해진 공식이나 무의미한 언어를 통해 하나님을 조종하려는 시도는 제외합니다. 이교도들은 기도에 신들의 이름을 길게 나열하여 끊임없이 반복함으로써 자신을 도울 수 있는 신의 이름을 부를 수 있기를 바랐습니다.
성경 문화배경 사전 중언부언하는 기도

성경 시대 이방인들이 믿었던 신은 못해도 300개 이상 되었다고 한다(또 다른 통계에서는 한 민족당 평균 300여 개 되었다고도 함). 따라서 어느 신이 자기 기도를 들어줄런지 모르는 상황에서 이방인들은 그 많은 신들의 이름을 모두 불러가며 기도했다. 그러다 보면 이방인의 기도는 자연히 횡설수설 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더욱이 이방인의 기도 습관 중에는 여러 말들을 많이 늘어놓고, 또 했던 말을 거듭거듭 무한 반복하는 경우가 있었다. 이것은 기도 응답에 대한 확신이 없기 때문에 일어나는 현상이다. 기도를 듣는 신의 응답 확신이 없이 주문 외우듯 드리는 기도는 허탄한 기도에 불과하다. 이외에도 이방인은 자신이 드린 제물이나 지금까지의 선행을 신에게 상기시킴으로써 신의 도움을 반강요하는 종교적 습관도 있었다. 따라서 자신의 종교적 헌신과 선행을 나열하느라고 기도 내용이 끝없이 늘어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이처럼 자신이 하는 기도의 내용도 모르고, 그저 주문을 외우듯이 열거하는 기도, 그것이 이방인들이 하는 기도의 특징이었다. 예수께서는 아무런 생각도 목적도 없이 타성에 젖어하는 기도는 이방인들의 중언부언하는 기도와 다를 바 없다고 책망하시면서 기도의 본보기로 ‘주님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일명 ‘주기도문’)를 가르치셨다(마 6:7).

7 이교도들처럼 계속 옹알거려라. 이방인들은 때때로 그들이 부르는 신들의 이름을 많이 나열하고, 청원자의 제물 등에 대한 보상을 위해 신들의 "의무"에 호소하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접근 방식은 신실하신 하나님 아버지에 대한 단순한 의존과 대조를 이룹니다(8절).
“제물드림”을 빌미고, 신을 압박함.
10 아버지의 나라가 임하옵시며. "임하옵시며"라는 의미가 아니라 완전하고 최종적으로 완성될 때까지 "더욱 완전하게 임하옵시며"라는 의미입니다. 당신의 뜻이 이루어지이다. 인간은 특히 성경을 통해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을 이미 알고 있습니다.
12 우리의 빚을 용서하여 주옵소서. 우리가 죄를 지을 때마다 구원을 잃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잘못을 회개하지 않을 때 하나님과의 교제가 방해받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또한 빚진 자들을 사하여 준 것 같이. 14-15절에 설명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은 "같은 정도로"가 아니라 "똑같이"를 의미합니다. 이 기도는 하나님께서 용서하신 사람들이 차례로 다른 사람들을 용서한다고 가정합니다.
용서하지 못하는 것은 “짐”이다.
마음의 “짐”이다.
무겁다.
그러나, “사랑”하는 사람은 늘 마음이 “가볍다.”
용서 받은 만큼, 용서할 수 있다.
용서를 받아들인만큼, 용서가 자연스럽게 된다.
용서할 줄 모르는 것은, 그만큼 하나님의 용서를 거부하는 것이다.
자기 의
기도의 법칙 3 - 은혜로 기도하라 / 자기 의를 의지하지 말라.
성경은 하나님의 백성에게 7년과 50년마다 모든 경제적 빚을 탕감하여 영구적으로 가난해지는 사람이 없도록 하라고 명령했습니다. 또한 유대인 교사들은 죄를 하나님 앞에서 "빚"으로 인식했습니다(참조, 18:21-35). 유대인들이 정기적으로 드리는 기도인 아미다의 여섯 번째 축도에는 용서를 구하는 기도가 포함되어 있습니다(14절 참고).
Matthew 18:27 NKRV
그 종의 주인이 불쌍히 여겨 놓아 보내며 그 빚을 탕감하여 주었더니

Sirach 28:2

2이웃의 잘못을 용서해 주어라. 그러면 네가 기도할 때에 네 죄도 사해질 것이다.

13 신자들은 악의 유혹에서 구해달라고 기도할 때 자신의 영적 연약함을 인식합니다(약 1:13-14 참조).
기도의 법칙 4 - 자신의 영적 연약함을 인식하며 기도하라 / 겸손한 기도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13절)는 우리가 실패할 정도로 어려운 시험에 빠지지 않게 해 달라는 뜻입니다.
그리스어 포네로스는 "악" 또는 악한 자로 번역될 수 있습니다. 히브리어 사상에서 사탄은 "악한 자"로 지정되지 않았기 때문에 많은 해석자들은 전자의 의미(즉, 우리 삶을 종종 괴롭히는 어려운 상황)를 선호합니다.
사탄은 우리보다 더 영리하며 수세기 동안 인간의 삶을 망친 경험이 있습니다. 그러니 여러분이 하나님 나라의 길에서 우회하는 상황에 빠지지 않게 해달라고 하나님께 간구하세요.
14-15 하나님의 용서는 여러분의 다른 사람에 대한 용서를 조건으로 한다는 사실을 놓치지 마세요. 예수님은 여기서 구원에 대해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제자도의 일부로서 구원받은 후 하나님과의 교제에 대해 말씀하고 계십니다. 용서한다는 것은 원한을 품지 않는 것이고 복수를 바라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정기적으로 용서가 필요하기 때문에 용서를 미루지 말아야 합니다.
주기도문
하늘

2. 하늘의 구조

하늘은 원래 신들이 거주하던 장소였다. 메소포타미아 문헌에서는 아다파(Adapa)가 아누(Anu)와 회담하려고 하늘로 올라갔다. 위대한 신들의 천상 신전이 거기 있었다. 천상은 1층, 3층, 7층으로 변형이 가능한데, 이것은 보통 만신전에서 신들의 계급적 위치와 관련된 서로 다른 거주지를 구별하는 차원으로 묘사하려는 목적을 지녔다.8 메소포타미아에는 천상 안에서 거리 와 형태에 대한 이론이 있었다. 가나안인들은 신들이 산 정상에 거주한다고 믿었지만 이것은 하늘이 산 정상에 있었으므로 상반되지 않는다.

“샤마쉬 명판”은 특히 유익한데, 예배자들이 물리적으로는 지상 신전에 있지만 샤마쉬의 하늘 보좌 앞에 있는 것으로 보여주기 때문이다. 천상의 물이 그의 발아래 있고, 별들은 그 장면의 밑부분 궁창에 보인다. 바벨론의 “쿠두루”(kudurru, 경계석)에는 중요한 하늘 신의 상징이 상단에 그려졌는데 이것은 하늘의 영역을 나타낸다.

구약성경에서는 천상의 지리적 측면에 관한 언급은 거의 없으며, 주로 하나님께서 거기에 거하시고 그가 하늘을 창조하셨다고 말한다.

아버지
현대의 이교도 세계는 신을 두려움이나 불확실성 속에 두었지만(예배 참조), 기독교의 하나님 아버지 관점은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에 비교할 수 없는 친밀감을 가져다 줍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의 아버지로서의 하나님 개념에는 눈에 띄는 측면이 있지만, 구약이나 유대인의 관습에서 이 개념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그의 백성의 아버지로 생각됩니다.
목자로서의 하나님에 대한 생각(시 23편, 사 40편, 겔 34장)은 놀랍도록 부드러운 하나님관을 소개하지만, 하나님을 아버지로 온전히 받아들이는 데는 미치지 못합니다. 그리스도의 출현과 함께 이러한 부성애의 표현은 가장 친밀한 형태의 인간 관계(부모와 자녀)가 하나님의 본질적인 특성을 반영하는 것임을 보여주는 신관으로 드러납니다(아래 엡 3:14, 15에 대한 주석 참조).
생물학적 아버지는 아니지만 그 사람을 마치 생물학적 아버지처럼 대하는 사람을 후원자라고 합니다.
후원자는 본질적으로 다른 사람이 개인적인 노력으로 충족할 수 없거나 필요할 때 충족할 수 있는 욕구를 충족시킬 수 있는 여유가 있는 사람 또는 잉여를 가진 사람입니다.
이름

이름은 한 사람이나 사물을 다른 존재와 구별시키는 외적인 표시이다. 대개 그 대상의 인격이나 성격, 성품, 정체성, 신체적 특성 혹은 태어날 때의 비화(秘話), 부모의 소망, 하나님에 대한 가족의 신앙 등에 근거해서 이름이 붙여진다. 아이의 이름을 언제 지어야 한다는 규정은 없으나 대개 아이가 태어나는 즉시 지어 붙이는 것이 관례였다(삼상 4:21). 특히 신약 시대의 기록을 보면, 생후 8일째 할례를 행할 때에 아이의 이름을 정식으로 붙여준 것을 보게 된다(눅 1:59; 2:21).

성경 문화배경 사전 이름이 지닌 의미

이름이 지닌 의미(a sense with the name)

① 단순한 호칭 이상으로 기념할 만한 명성과 영예를 간직하고 있다(사 14:22). ② 개인의 전 인격과 전 인생을 대표하고 상징한다(전 9:5). ③ 개인의 본질적인 성격(성품)이나 특징, 정체성을 표시한다(창 27:36; 마 1:21,23; 눅 1:13–17). 이런 이유들에서 경건한 자들은 그토록 하나님의 이름을 알고자 갈망했던 것이다(시 9:11; 91:14). ④ 출생을 전후한 때에 일어난 특정한 일들이나 태어날 때의 신체적 특징 등을 함축하고 있는 명칭이기도 하다(창 18:12; 25:24–26). ⑤ 권세나 능력을 나타낸다(출 9:16; 대상 17:8,21; 시 54:1; 마 7:22; 약 5:14). ⑥ 영광과 지위를 나타낸다(삿 13:17–18; 삼상 18:30; 전 7:1; 엡 1:20–21). ⑦ 어떤 소원(소망)이나 축복 혹은 그 인생에 대한 예언적 메시지(운명에 영향을 끼치는 것)를 담고 있다(사 8:1–4; 호 1:4). ⑧ 이름의 존속은 그 존재의 계속성을, 이름을 제함은 멸망을 상징한다(신 7:24; 수 7:9; 전 6:10; 사 56:5). ⑨ 다른 사람의 이름으로 말하거나 대표(대리)하는 것은 그의 권위에 참여하는 것을 뜻한다(왕상 21:8; 렘 11:21; 29:25; 마 10:41; 고후 5:20). ⑩ 누구의 이름으로 세례받는다는 것은 그의 소유가 됨을 뜻한다(마 28:19; 행 8:16; 고전 1:13,15). ⑪ 이름의 변화는 그 사람의 인격(성격)과 신분(지위)의 변화를 뜻한다(창 17:5,15; 32:28–30; 41:45; 마 16:17–18; 막 3:17; 행 13:9).

거룩
Lexham 성경사전 고대 세계의 거룩 용어

고대 세계의 거룩 용어

고대 세계 문헌에 대한 폭넓은 연구는 고대 근동 주민들이 신성 영역으로의 일원됨과 근접성을 표현하기 위해 거룩의 언어들을 발전시켰음을 시사한다. 고대 근동 문헌들은 대개 신에게 바쳐지는 어떤 사람 또는 사물의 헌신을 가리키며 거룩의 언어를 “성별”(consecration)의 의미로 사용한다. 이런 문맥에서 도덕적 성결 또는 완전의 의미는 포함되지 않는다.

Lexham 성경사전 수메르어

수메르.수메르 문헌에서, 쐐기문자 표기 “쿠”(KU)는3“거룩한”을 상징한다. 문헌학적 접근법을 사용해, 윌슨은 “거룩한”을 뜻하는 이 수메르어는 “신성의 영역에 부속한/속한”으로 규정되어야 가장 적절하다고 주장했다(Wilson, “Holiness” and “Purity,” 17). 수메르 문헌은 “거룩한”(쿠)이란 용어를3 다음과 관련해 사용한다:

• 신전들과 같은 거룩한 장소 또는 신전에 속한 기구들(성막 및 성막 기구들과 관련해 출애굽기와 레위기에 나타난 “거룩한”의 용례를 비교해 보라)

• 때론 “거룩한 산”으로도 언급되는, 어떤 신들의 거주지(DU6.KU3; 참고, Borger, “Das dritte ‘Hause’ der Serie bīt rimki”)

• 난나(Nanna) 신에게 속한 선박처럼 신에게 속한 물건들(참고, Falkenstein and von Soden, Sumerische und akkadische Hymne und Gebete, 79).

Lexham 성경사전 우가리트어

우가리트어. 우가리트 본문은 거룩의 개념을 전달하기 위해 qdš 용어를 사용한다(참고, Costecalde, Aux origins du sacré biblique, 57–72). 일부 행정적 제의적 본문에도 사례가 있긴 하지만, 그 형태들은 종교적 신화적 문맥에 주로 나타난다(참고, de Tarragon, Le Culte à Ugarit, 73–74). 메소포타미아 본문과 유사하게, 우가리트 본문은 어떤 것이 신에게 속함을 규명하는 그것의 일원되는 자격과 관련해 거룩의 용어를 사용한다. 근본적으로 신의 부근에 있는 모든 것이 “거룩한”(qdš) 것으로 명시된다

Lexham 성경사전 우가리트어

어떤 그룹이나 신에게 속한다는 의미를 암시하는, “성별”의 뜻을 시사하는 것으로 보인다(Costecalde, Aux origins du sacré biblique, 72). 우가리트 본문에서 “거룩한”이란 용어가 도덕적 속성을 의미하는 사례는 없다.

헬라어 문헌에서 고대 근동 언어의 거룩과 의미론적으로 대등한 용어는 주로 70인역의 발전을 통해 나타난 것으로 보인다. 초기의 비-성경 헬라어 문헌들에는 거룩의 개념이 포함된 예가 거의 없다(참고, 상기 및 Procksch, “ἃγιος, hagios,” 89). “거룩한”(ἅγιος, 하기오스)의 용례와 관련해 비-유대교, 비-기독교 문헌의 제한된 사례들은, 고대 근동의 용례와 유사하게, 신들에게 봉헌된 사물과 사람들에 대해 묘사한다(참고, Liddell and Scott, Greek-English Lexicon, s.v. ἃγιος, hagios).

Lexham 성경사전 성경의 거룩에 대한 접근

성경의 거룩에 대한 접근

성경의 “거룩한” 또는 “거룩”이란 용어의 정확한 의미에는 논쟁적 여지가 있다. 역대 학자들은 성경의 거룩의 정확한 정의와 관련, 다른 결론들에 도달하기 위해 다양한 방법론을 활용했다(Laube, “Heiligkeit IV,” 708–09). 예를 들어:

• 전통적 연구는 어원학에 의존했고 성경의 거룩은 분리 또는 도덕적 성결을 의미하는 것으로 결론했다(참고, Alexander, From Paradise; Douglas, Purity and Danger; Eichrodt, Theology; Neusner, Idea of Purity; Rücker, Die Begründungen).

• 인류학자들 및 사회-역사학자들은 원시 종교의 더 광범위한 사회적 환경을 감안해 거룩을 연구했고 그것을 “초월성”으로 규정했다. 그 한 결과로, 사회학자들, 인류학자들, 그리고 신학자들이 자신들의 문화적 연구 내에서 거룩의 한 측면을 그것의 다른 측면보다 더 강조한 가운데 거룩과 관련한 많은 뉘앙스들이 등장했다

거룩(holiness) 명 ●‘거룩’은 하나님의 속성 중에 가장 중심 되는 성품이요, 하나님의 백성에게 첫 번째로 요구되는 명령이기도 하다(레19:2; 벧전1:15–16). 성경 원문에는 다양한 단어들이 사용되는데, 그 기본 의미는 ‘구별하다’, ‘분리(구분)하다’, ‘깨끗하게 하다’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 즉, 죄악과 부정으로부터 철저히 자신을 분리시키고, 오직 하나님의 소유로서 자신을 구별하여 드리는, 변화된 상태를 말한다. ●성전, 성물, 제사, 하나님께 제사드리는 절기, 하나님의 백성인 성도 등 거룩하신 하나님과 관련된 모든 것들 역시 거룩하다. 그리고 세상의 속되고 부패한 행실이나 풍습에서 구별되어 하나님의 법대로 살아가는 것을 가리키기도 한다(레11:44). 특히 신약성경에는 죄악과 구별된 도덕적인 삶(요17:19), 세속적이고 비신앙적인 것으로부터 자신을 엄격하게 구별하는 경건한 행위를 ‘거룩’이라 한다(벧전1:16).

구약에서 하나님께 적용된 거룩은 피조물에 대한 하나님의 초월성과 그분의 성품의 도덕적 완전성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은 피조물과 완전히 구별되며 피조물에 대해 주권적인 위엄과 권능을 행사하신다는 점에서 거룩하십니다.
하나님의 거룩하심은 시편(47:8)과 선지서(겔 39:7)에서 특히 두드러지게 나타나는데, 여기서 '거룩함'은 이스라엘의 하나님과 동의어로 등장합니다. 따라서 성경은 하나님을 "거룩하신 분"(사 57:15), "거룩하신 분"(욥 6:10, 사 43:15),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분"(시 89:18, 사 60:14, 렘 50:29)이라는 칭호로 지칭하고 있습니다. 구약에서 하나님의 거룩하심은 주님이 악하고 더럽혀진 모든 것과 분리되어 있음을 나타냅니다(참조, 욥 34:10). 그분의 거룩한 성품은 절대적인 도덕적 완전성의 표준입니다(사 5:16). 시편 99편에서는 하나님의 거룩함, 즉 초월적인 위엄과 성품의 순수함이 능숙하게 균형을 이루고 있습니다. 1절부터 3절까지는 하나님이 유한하고 지상에 속한 것들로부터 멀리 떨어져 계심을 묘사하는 반면, 4절과 5절은 죄와 악으로부터의 분리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구약에서 하나님은 그의 백성의 삶에서 거룩함을 요구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모세를 통해 이스라엘 회중에게 "너희는 거룩할지니 나 주 너희 하나님은 거룩함이라"(레 19:2)고 말씀하셨습니다. 구약에서 말하는 거룩은,
(1) 외적인 것, 즉 의식적인 거룩과
(2) 내적인 것, 즉 도덕적이고 영적인 거룩의 두 가지로 나뉩니다.
제사장과 레위인은 "구별된 자"라는 뜻의 히브리어 나실인(민 6:1-21)과 마찬가지로 복잡한 의식적 봉헌 과정을 거쳐 거룩해졌습니다(출 29장). 엘리사(왕하 4:9)나 예레미야(렘 1:5)와 같은 선지자들도 이스라엘에서 특별한 예언자 사역을 위해 성결하게 되었습니다.
시편 15편은 하나님의 윤리적 요구 사항을 다루고 있습니다. "누가 주의 거룩한 언덕에 거하리이까?"라는 질문에 주님은 이렇게 대답하십니다. "흠 없이 행하며 옳은 일을 행하며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진실을 말하는 자"(1, 2절). 비슷한 맥락에서 이사야는 하나님의 대속을 받은 공동체를 "거룩한 백성, 주님의 구속을 받은 자"(사 62:12)로 표현합니다.
나라
Lexham 신학 개론 하나님 나라

하나님 나라 교리는 왕이신 하나님께서 자신이 만드신 창조세계를 다스리시는 것에 대해 묘사하는 교리다. 하나님 나라 교리는 하나님께서 어떻게 이 세상을 다스리시고 구성하시는지와 더불어 하나님의 궁극적인 목적이 무엇인가를 함께 다룬다.

Lexham 신학 개론 하나님 나라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의 영에 의해 교회와 이 세상 가운데 현재 존재하고 계신다. 어떤 사람들은 이런 현재적 하나님 나라를 교회와 완전히 동일시한다. 물론 하나님 나라의 대표격으로 교회가 포함되어 있는 것은 맞다. 하지만 대부분의 신학자는 하나님 나라의 완전하고도 최종적인 개념은 그보다는 넓은 개념이라고 생각한다. 교회는 사역적 기관이지만, 하나님 나라는 교회의 사역이 성취된 결과로서 이해할 필요가 있다.

Lexham 신학 개론 하나님 나라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위해 기도하라고 권면하셨다. 그리스도의 이런 가르침에 담긴 함의는 하나님 나라가 아직 도래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즉 최소한 완전한 형태의 하나님 나라는 도래하지 않았다고 보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 나라가 “이 세상 속에 속한 것이 아니다”(요 18:36)라고 가르치셨다. 즉 하나님 나라는 정치적 실체라기보다는 보다 더 영적이라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성경 문화배경 사전 천국, 하나님의 나라

천국, 하나님의 나라(天國, kingdom of heaven, kingdom of God) 하나님께서 다스리시는 나라. ‘하늘나라’, ‘하늘 왕국’ 등으로 불린다. 이 모두가 같은 의미이지만 ‘천국’이란 표현은 마태복음에만 등장한다. 이는 마태복음이 유대인을 상대(독자)로 기록되었고, 유대인들은 전통적으로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는 부정한 입술로 거룩하신 하나님의 성호를 더럽혀서 안 된다는 생각에서였다. 그래서 마태는 하나님이 계시는 하늘을 하나님과 동의어처럼 사용하여 ‘천국’(하늘나라)이라 표현하였다.

결국 천국은 구원받은 백성들이 하나님의 다스림(통치)을 받으며 살아가는 나라를 말한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주권(통치)이 미치는 범위가 천국인 것이다. 이 통치 범위는 하나님이 창조하신 모든 세상과 만물 전체에 미친다. 하지만 성경은 현재 세상을 가리켜 공중 권세 잡은 자(사탄)가 다스리는 나라로 표현하기도 한다(마 4:8; 눅 4:5; 고후 4:4; 엡 2:2).

물론, 사탄의 활동도 하나님의 허용 아래서만 가능하다. 따라서 넓은 의미에서 보면 세상 모든 일이 하나님의 통치권 아래 있다 할 수 있다. 다만, 좁은 의미에서 통상적으로 천국은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의 주권에 순종하면서 하나님의 거룩하신 뜻을 이루어나가는 삶의 공간으로 볼 수 있다.

세례 요한은 이 천국이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초림)으로 이미 우리 가운데 시작되었다고 하였다(마 3:2; 13:1–52). 이를 천국의 ‘과거성’이라 한다. 그리고 천국은 장차 예수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때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온전하게 완성된다(마 22:1–14; 25:1–45). 이를 ‘천국의 미래성’이라 한다. 그리고 이 날이 이를 때까지 현재 이 땅에서 계속 완성되어 나간다. 이를 ‘천국의 현재성’이라 한다.

즉, 하나님의 백성이 삶 가운데서 하나님의 거룩하신 뜻을 이루고 살아가면서 하나님의 통치 주권을 넓혀 나가는 것, 그래서 하나님의 나라가 점점 확장되어 가는 것이 현재적 천국의 성격이다. 그래서 이런 천국을 가리켜 ‘천국의 역동성’이라 하는데, 이 현재적 천국은 영적(靈的)이다. 왜냐하면 이 현재적 천국은 눈에 보이는 것도, 또 세상 나라처럼 어떤 물리적인 공간을 차지하고 있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구원받은 성도가 주님을 모시고 살아가는 그 어디나 천국인 것이다(눅 17:21).

그리고 하나님의 통치 범위가 넓혀져 세상 마지막 날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때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천국이 완성된다. 학자들은 이런 천국의 특성을 가리켜 천국이 ‘이미 왔지만(already) 아직 완성되지 않았다(not yet)’고 한 마디로 설명하였다. 이 미래적 천국의 모습은 사도 요한이 본 환상 가운데 잘 묘사되어 있다(계 21–22장).

그렇다면 이미 천국 백성이 되었고 세상 마지막 날 완성될 천국을 대망하며 살아가는 성도가 이 땅에서 어떤 자세로 살아가야 할지는 자명하다. 이에 대해 예수께서는 주기도문에서, 하나님의 나라(천국)가 이 땅에 임하게, 그리고 하나님의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같이 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해달라고 기도하며 그런 자세로 살라고 가르치셨다(마 6:10).

하나님의 뜻
Everyday 신학 사전 정의 > 하나님의 뜻

하나님의 뜻은 하나님이 행하신 모든 일,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방법을 포괄한다. 하나님의 뜻은 불가피하며 자유롭고,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신비롭다.

● 불가피하다는 것은 하나님이 그분의 본질상 일관되게 일하신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하나님의 뜻은 그분의 지혜와 선에 일치하면서, 거기에는 하나님이 하지 않을 어떤 일까지도 내포되어 있다.

● 자유롭다는 것은 하나님이 반드시 세상을 창조하거나, 특정한 행위를 실행할 필요는 없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은 자유롭기 때문에 반드시 세상을 보존하고, 구원할 필요도 없다. 하나님은 자유함 속에서 그분의 흡족한 기쁨을 따라 행하신다(엡 1:5, 9). 인류를 지배하는 것은 운명이나 숨겨진 에너지가 아니라, 전능한 하늘 아버지의 뜻이다. 이런 이유로, 우리는 하나님의 선하고 완전하신 뜻 안에서 쉼을 얻을 수 있다(롬 12:2).

● 신비롭다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어떤 것을 계시하기로 작정하실지라도, 거기에는 우리에게 알려지지 않은 많은 것들이 있음을 의미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지혜의 깊이를 측량할 수 없다(롬 11:33–34). 그분은 본향으로 향하는 여정 중에 있는 자신의 백성의 성숙과 열매 맺음을 용이하게 하시는 자신의 뜻을 단지 일부만 드러내실 뿐이다.

또한 하나님의 뜻은 복잡하다. 적어도 다음과 같은 네 가지 측면을 포함하고 있다.

1. 때때로 하나님의 주권, 혹은 비밀스러운 의지로 불리는 하나님의 제정의 의지. “감추어진 일은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속하였거니와 나타난 일은 영원히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속하였나니”(신 29:29). 하나님은 주권적으로 일어날 모든 일을 제정하신다. 즉 그분의 통제 없이 일어나는 일은 아무것도 없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은 인간의 책임과 선택을 억압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주권과 우리의 자유로운 선택 사이에 있는 긴장은 우리 인간의 이해를 넘어선다.

2. 때때로 하나님의 계시된 뜻으로 불리는 하나님의 교훈의 목적. “나는 어떻게 나의 삶을 위한 하나님의 뜻을 발견할 수 있을까?” 교훈과 관련된 하나님의 뜻은 우리에게 감추어져 있지 않다. 우리는 하나님의 계시된 말씀을 통해 그분의 뜻을 많이 알 수 있다. 바울은 하나님의 뜻이 성경에 계시되었음을 반영하여, “그러므로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고 오직 주의 뜻이 무엇인가 이해하라”(엡 5:17)라고 기록했다. 우리는 비록 불순종하기로 마음먹을 수도 있지만, 하나님의 교훈하시는 뜻에 순종하도록 부름 받았다.

3. 하나님의 성향적인 뜻. 이는 그분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하나님의 성향을 설명한다. 성경은 하나님이 “악인이 죽는 것을 기뻐하지 아니하고”(겔 33:11)라고 하면서, 악인을 죽이기로 결심하신다(3:20)고 가르친다. 결국 하나님은 자신의 영광과 의로움을 기뻐한다. 그분은 심판 속에서 정의를 옹호하는 것을 기뻐한다.

4. 각 믿는 자들을 인도하는 하나님의 특정한 뜻을 의미하는 그분의 개별적인 의지. 성령은 하나님이 믿는 자들에게 목적하신 것을 이루도록 지시하신다.

명백한 뜻
Ephesians 5:17 NKRV
그러므로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고 오직 주의 뜻이 무엇인가 이해하라
신비한 뜻
Acts 16:7 NKRV
무시아 앞에 이르러 비두니아로 가고자 애쓰되 예수의 영이 허락하지 아니하시는지라

땅(אֶרֶץ, 에레츠;γῆ, 게). 인간이 거주하는 장소. "하늘"(또는 "하늘들")과 땅이 짝을 이루어 나타날 때는 전체 우주를 가리키거나 단순히 하늘과 땅을 구별하기 위한 것이다(창 1:1-2, 26; 27:28; 신 32:22; 행 4:24).

성경 문화배경 사전 땅 > 24. 비유와 상징

땅(land, earth) ‘지구의 겉을 이룬 흙과 돌의 총칭’,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세상에서 바다를 제외한 지구의 표면’, ‘동·식물이 자라는 곳’(창 27:28; 시 104:14), ‘사람이 사는 처소’(사 45:18) 등을 뜻한다.

고대 히브리인들은 땅을 우주의 중심으로 생각했다. 그리고 땅은 네 기둥에 의해 받쳐져 있는 평평한 단면으로 이루어졌다고 보았다(욥 9:6; 시 75:3). 또한 땅 위에는 해와 달과 별들의 거처인 궁창이 있고, 땅 아래는 물과 죽음의 세상인 음부(스올)가 있다고 생각했다. 즉, 죽은 자는 땅 아래 세상(스올)으로 간다고 믿었다(츨 20:4; 시 136:6).

땅은 하나님이 만드신 피조 세계의 한 부분이며,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형상을 닮은 사람을 만드시고 그들에게 “생육하고 번성하라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창 1:27–28)는 복과 명령을 아울러 주셨다. 그런데 인간의 불순종으로 땅은 인간과 함께 저주를 받아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내게 되었다(창 3:17–18).

신약성경에서 ‘땅’은 영적인 것에 반대되는 불신 세상, 죽음과 허탄으로 상징되는 처소 등으로 자주 묘사되어, 땅에 보물을 쌓는 행위(마 6:19)나 땅의 것을 생각하는 것은(골 3:2) 성도가 삼가야 할 악행으로 규정되었다. 그래서 “보물을 땅에 쌓아두지 말라”(마 6:19), “땅의 것을 생각하지 말라”(골 3:2), “땅에 신이라 불리는 자가 있다”(고전 8:5), “땅을 두고 맹세하지 말라”(마 5:35) 등의 경고가 등장한다. 한편, 역사의 끝날 곧 세상 종말에는 타락하고 부패한 하늘과 땅이 모두 사라지고 새 하늘과 새 땅이 조성될 것이다(사 65:17; 66:22; 벧후 3:13). 바로 그날에 처음 땅과 하늘과 바다는 모두 사라질 것이다(계 21:1).

마태복음에서 6장에서 “땅”의 문맥적 의미는 무엇인가?
-영적인 것에 반대되는 불신 세상
Matthew 6:19 NKRV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말라 거기는 좀과 동록이 해하며 도둑이 구멍을 뚫고 도둑질하느니라
1) 물리적으로는 땅, 토양 또는 지반으로,
2) 지리적으로는 지역으로,
3) 정치적으로는 주, 영토 또는 국가로,
4) 우주적으로는 하늘의 반대편으로,
5) 상징적으로는 물질적 존재의 전체로 간주되는 인간의 거주지입니다.
오늘
Lexham 성경사전 일용할 양식

일용할 양식일반적으로 생활에 기본적으로 필요한 것을 표현하는 것으로 이해되는 주기도문의 문구다(마 6:11; 눅 11:3). "매일"에 해당하는 헬라어 단어(ἐπιούσιος, 에피우시오스)는 신약에서 이곳에서만 나온다. 이 단어는 "오늘 우리에게 내일의 양식을 주소서"라는 제롬의 번역에서처럼 "미래"로 번역될 수도 있다.

1세기의 지배적인 종말론적 이해와 히브리 복음서의 번역 해석에 따르면, ἄρτος ἐπιούσιος는 "내일을 위한 빵", 즉 "구원의 때의 빵", "생명의 빵"을 의미할 수 있습니다.
지금, 지금, 오늘, 우리의 불쌍한 존재 가운데서 우리에게 생명의 빵을 주소서"(예레미야 201).
오리겐은 이 단어를 에피 텐 우시안(생존을 위해 필요한)으로 이해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오리겐의 모국어가 헬라어였으므로, 그의 해석이 지니고 있는 언어학적 가능성은 부인할 수 없다. 이런 사실은 잠 30:8의 말씀으로 확증될 수 있다.
명사 우시아(Eur., Hdt. 이래)는 우사(, 1510의 여성분사)에서 유래했으며, '아무개가 가진 것', 즉 '재산, 부, 소유물'을 의미한다.
sub·stance
물질, 실체, 본질
에피 : 위에, 가까이에, 앞에, 대한, 위한
존재를 위한 양식
양식

빵 (לֶחֶם, 레헴; ἄρτος, 아르토스). 곡물로 만ㄹ어진 음식; 때때로 곡 자체나 일반적인 음식을 언급하기 위해 사용됨. 성경에서 "빵"이라는 단어는 종종 다양한 상징적 의미들, 특히 영적인 자양분의 의미를 전달하기 위해 은유적으로 사용된다. 히브리어 단어 מַצָּה (마짜흐)는 필요할 경우 즉시 준비될 수 있는 누룩이 없는 빵을 말한다 (참고 창 19:3; 삼상 28:24).

묵상
하나님은 “이미” 우리 삶 가운데서 역사하고 계시다.
기도는 이미 역사하고 계신 하나님의 역사에 “민감”하게 반응하기 위해 하는 것이다.
얼마나 하나님의 역사에 동참하고 따를 것인가?
얼마나 하나님의 역사에 일치되게 생활할 것인가?
그것이 기도의 목적이다.
또한, 기도는 우리 삶에 임한 고난의 의미를 되찾기 위해서 하는 것이다.
고난을 피하게 해달라는 기도도 해야 한다.
그러나 동시에 고난의 의미를 깨닫게 해달라고 기도해야 한다.
고난의 의미를 알고, 고난의 공동체성을 알고, 고난의 사명성을 깨닫는 것이 기도이다.
이 고난을 통해 나를 어떻게 인도하실 것인가?
나는 어떻게 사용될 것인가?
내가 품어야 할 영역은 어디인가?
소요리 99문
제99문 : 우리의 기도를 지도하시려고 하나님께서 주신 법칙은 무엇입니까?
답 : 하나님의 모든 말씀이 우리의 기도를 지도하기에 유용합니다. 다만 특별한 법칙은 그리스도께서 제자들에게 가르쳐 주신 기도, 곧 일반적으로 ‘주님께서 가르치신 기도’라 부르는 것입니다.
1 John 5:14 NKRV
그를 향하여 우리가 가진 바 담대함이 이것이니 그의 뜻대로 무엇을 구하면 들으심이라
Matthew 6:9–13 NKRV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가 임하시오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고 다만 악에서 구하시옵소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
Luke 11:2–4 NKRV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기도할 때에 이렇게 하라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가 임하시오며 우리에게 날마다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모든 사람을 용서하오니 우리 죄도 사하여 주시옵고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소서 하라
2-1. 하나님의 모든 말씀이 우리의 기도를 지도하기에 유용합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도 기도를 합니다. 하지만 그들의 기도는 참된 기도가 아닙니다. 말씀에 근거한 기도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간절히 기도할지라도, 말씀에 근거한 기도가 아니라면, 공허한 메아리에 지나지 않습니다(잠28:9).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 속에서 기도의 법칙을 찾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모든 말씀” = 교리, 조직신학
2-2. 다만 특별한 법칙은 그리스도께서 제자들에게 가르쳐 주신 기도, 곧 일반적으로 '주님께 서 가르치신 기도'라 부르는 것입니다.
한 제자가 예수님께 물었습니다. "주여 요한이 자기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친 것과 같이 우리에게도 가르쳐 주옵소서"(눅11:1) 이 질문에 대한 대답으로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이 주기도문입니다. 주기도문은 "주님의 기도문”이라는 뜻입니다. 주기도문은 예수님이 직접 가르쳐 주신 기도의 법칙이기 때문에, 기도에 대한 가장 권위 있는 가르침입니다.

칼빈 선생님은 『기독교강요』 3권 20장에서 “기도의 자세”에 대해 언급하는데, 진실로 하늘 문 앞에서 하나님을 뵙는 듯한 태도로 기도하는 것이 바로 『기독교강요』에 정리되어 있는 “올바른 기도의 법칙”입니다.

『기독교강요』에는 이 법칙이 총 네 가지로 나타나 있습니다. 첫째 법칙은 “경외”입니다. 하나님께 기도할 때 무엇보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태도가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둘째 법칙은 “자신에 대한 부족함을 강하게 느끼면서”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 앞에 서 있는 “자기”를 깨달은 자가 느끼는 감정입니다. 기도야말로 하나님과의 맞대면이 아닙니까? 그러므로 하나님 앞에 선 자는 반드시 자신의 모습에서 한없는 부족함을 느끼면서 기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셋째 법칙은 “자기 신뢰를 버리는 겸손”입니다. 셋째 부분에서 강조되는 것은 둘째 부분과 연결됩니다. 하나님 앞에서 부족함을 느끼는 사람은 자기 신뢰를 버리고 전적으로 하나님을 바라보게 됩니다. 칼빈은 이 부분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기도하기 위하여 하나님 앞에 서는 사람은 겸손하게 영광을 전적으로 하나님께 돌리며, 자기의 영광을 생각하지 않고 자기의 가치를 일체 생각하지 말아야 한다. 곧 자기 신뢰를 전적으로 버려야 한다.”

그리고 끝으로 넷째 법칙은 “확신”입니다. 기도자는 반드시 자신의 기도를 하나님이 들으신다는 확신 가운데 기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교리문답은 이런 『기독교강요』의 내용을 거의 똑같이 인용했습니다. 둘째와 셋째에서는 완전히 똑같고, 첫째의 경우는 다르지만 사실 맥락을 살펴보면 같은 말입니다. 오늘 우리가 117문답의 대답을 통해서 배우려는 내용은 칼빈 선생님으로부터 받은, 개혁신앙 안에 면면히 전해 내려온 기도에 대한 바른 자세입니다.

20장

기도

요 약

1. 바른 기도를 위해서는 첫째,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있어야 하며, 둘째, 자신의 부족함을 제대로 알아야 하고, 셋째, 자신이 가치 있는 존재라는 생각을 모두 내려놓아야 하며, 넷째, 하나님께서 기도에 응답하실 거라는 확실한 소망과 믿음을 가져야 한다.

2. 주기도문의 머리말은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 그리고 하나님의 초월성을 보여 준다.

3. 첫 번째 간구는 하나님께 합당한 존귀를, 두 번째 간구는 하나님의 다스림을, 세 번째 간구는 하나님의 통치에 대한 우리의 순종을, 네 번째 간구는 우리의 모든 필요를, 다섯 번째 간구는 우리의 죄사함을, 여섯 번째 간구는 유혹에서의 승리를 의미한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졸지도 아니하시고 주무시지도 아니하시”(시 121:4)는 분인데, 그런 하나님께 구태여 왜 기도해야 하는지 의문을 가지는 자들이 많습니다. 하지만 기도는 우리의 큰 목소리로 하나님을 깨우는 일이 아닙니다. 기도는 우리의 필요를 하나님께 구함으로써 우리가 얻기를 구하는 모든 것들이 하나님께로부터 온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그리하여 하나님께 모든 영광을 돌리는 일입니다. 또한 기도는 우리의 신앙에 매우 유익한데, 그것은 다음의 여섯 가지 이유 때문입니다.
첫째, 기도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섬기고자 하는 열정으로 불타오르게 하며, 어떠한 어려움 속에서도 하나님만 의지하는 습관을 길러 준다.
둘째, 기도는 하나님 보시기에 부끄러운 헛된 욕망이 자리 잡지 못하게 한다.
셋째, 기도는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모든 선물들에 진심으로 감사하는 자세를 길러 준다.
넷째, 기도가 응답될 때마다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더욱 추구하게 된다.
다섯째, 기도를 통해 받은 축복들은 우리를 더욱 기쁘게 한다.
여섯째, 기도를 통해 하나님의 섭리를 체험적으로 깨닫게 된다.
그렇다면 기도할 때 우리는 어떤 자세를 반드시 지녀야 합니까? 올바른 기도를 위한 첫 번째 법칙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입니다. 마치 우리와 똑같은 사람과 대화하는 것처럼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크신 위엄 앞에 겸손히 엎드리는 자세로 기도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집중하는 것을 방해하는 잡다한 생각들과 걱정거리들을 떨쳐 버려야 하고, 오직 하나님께 합당한 것만을 간구해야 합니다(요일 5:14).
두 번째는 자신의 부족함을 제대로 아는 것입니다. 자신에게 무엇이 부족한지 모를 때는 중언부언하게 됩니다. 절실하게 바라지 않기에 형식적으로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부족할 때만 기도하라는 건 아닙니다. 사도 바울은 “항상 기도하라”, “쉬지말고 기도하라”(엡 6:18, 살전 5:17)고 말하는데, 이것 역시 사실입니다. 왜냐면 기도하지 않아도 괜찮을 만큼 부족하지 않은 상태는 없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영적인 측면에서 더욱 그러합니다. 우리를 향한 유혹이 한순간도 끊이지 않는데, 어떻게 하나님의 도움을 구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외적인 부족함만이 아니라 내적인 부족함까지도 절실하게 통감하면서 기도에 열심을 내어야 합니다.
세 번째는 자신이 가치 있는 존재라는 생각을 모두 내려놓는 것입니다. 만약 티끌만큼이라도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권리를 주장하게 된다면, 다시 말해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셔야 하는 근거가 우리 자신에게 조금이라도 있는 것처럼 교만하게 생각한다면, 우리에게 헛된 교만이 자리 잡게 되고 그 결과 하나님께서 자신의 얼굴을 우리에게서 돌려 버리실 것입니다. 그렇기에 자신이 지은 죄를 정직하게 고백하면서 죄 용서를 구하는 일이 올바른 기도의 준비요 시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네 번째는 하나님께서 기도에 응답하실 거라는 확실한 소망과 믿음을 가지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막 11:24)라고 약속하셨고, “너희가 기도할 때에 무엇이든지 믿고 구하는 것은 다 받으리라”(마 21:22)라고도 약속하셨습니다. 야고보 역시 “오직 믿음으로 구하고 조금도 의심하지 말라 의심하는 자는 마치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바다 물결 같으니 이런 사람은 무엇이든지 주께 얻기를 생각하지 말라”(약 1:6–7)라고 말했습니다. 이처럼 분명하게 하나님께서 우리 간구를 들으실 것을 약속하고 계시므로, 아무리 비참한 상황에서도 하나님의 응답하심을 의심해선 안 됩니다.
지금까지 살펴본 네 가지 법칙들을 보면 완전한 믿음과 회개가 없는 기도는 하나님께서 전혀 들으시지 않는 것처럼 생각하기 쉽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법칙을 완전무결하게 지키며 기도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심지어 다윗조차도 통제되지 않는 감정을 그대로 드러내며 기도한 적이 많았음을 시편에서 자주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처럼 부족한 기도에도 응답해 주셨는데,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부족함과 무지를 용납해 주시는 자비로우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설령 기도의 모든 법칙을 다 지키지 못한다 할지라도 지키기 위해 노력하는 그 자체를 하나님께서 기뻐하신다는 사실과 당장 최고 수준의 기도에 이르지 못한다 할지라도 계속해서 목표를 향해 전진하는 것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신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은혜로우신 하나님께 자주자주 기도로 나아가야 합니다.
우리가 이렇게 힘써 기도해야 하지만, 사실 우리 중 그 누구도 하나님 앞에 나아갈 만큼의 값어치를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우리가 두려움과 수치심 없이 하나님께 기도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아들을 중보자로 주셨기 때문입니다(딤전 2:5). 우리는 중보자 되신 그리스도 때문에 하나님 앞에 안전하게 나아갈 수 있고, 아버지께서 아들의 간구를 들어주시듯 예수님의 이름으로 드리는 우리의 기도에도 응답하실 것을 믿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행하리니 이는 아버지로 하여금 아들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라”(요 14:13)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로마 가톨릭은 그리스도뿐만 아니라 인간 중에서 탁월함을 인정받은 성자들에게도 중보자의 역할이 부여되어 있다고 주장합니다. 하지만 사도 바울은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또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자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딤전 2:5)라고 분명하게 못 박고 있습니다. 성경은 언제나 우리의 마음을 그리스도께로만 향할 것을 촉구하고, 하늘에 계신 아버지 역시 만물을 그리스도 안에서 함께 모으시기를 기뻐하십니다(골 1:20, 엡 1:10). 그러므로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유일한 길이신 그리스도를 벗어나서 성자들을 통해 하나님께 나아갈 길을 찾으려 하는 것은 어리석음의 극치입니다.
성자 숭배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는데, 그리스도가 아니라 성자를 통해 하나님께 나아가려 하는 자들은 반드시 우상 숭배에 빠지기 때문입니다. 역사적으로 보면, 사람들이 성자를 중보자의 반열에 올린 이후 그들은 각각의 성자에게 독특한 기능을 부여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기도해야 할 다양한 상황이 생길 때마다 그 상황에 걸맞는 성자를 찾게 되었고, 결국 사람들은 특정한 성자를 자신의 수호신처럼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각 도시마다, 인구수만큼의 수호신들이 세워지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성자들은 자신의 소망을 오직 하나님의 뜻에만 두고 오직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하나님께 나아가려 노력한 자들이기에, 성자를 추켜세우는 자들의 모습은 그들이 높이 기리는 성자들의 모습과는 판이하게 다릅니다.
주기도문 강해
주기도문 강해 누가복음판 주기도문의 문학적 맥락

누가복음판 주기도문의 문학적 맥락

다음으로, 주께서 가르치신 이 기도를 살펴보기 위해서는 먼저 이 기도 본문들이 들어 있는 맥락을 먼저 살필 필요가 있습니다.

누가복음판의 주기도문에 대한 문학적 맥락을 먼저 보도록 하겠습니다. 누가복음 11장 2–4절의 주기도문 본문에 앞서는 1절은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예수께서 한 곳에서 기도하시고 마치시매 제자 중 하나가 여짜오되 주여 요한이 자기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친 것과 같이 우리에게도 가르쳐 주옵소서.

예수의 제자 가운데 한 명이 기도를 가르쳐 달라고 했습니다. “세례 요한도 그의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쳐 주었는데, 이제 선생님도 우리에게 기도를 가르쳐 주셔야 합니다”라는 것입니다. 문맥으로 볼 때, 예수는 그 요청에 응하여 기도를 가르쳤습니다.

여기서 일단 우리는 제자들이 예수에게 이런 요청을 했다는 것이 사실은 매우 놀라운 것이라는 점을 주목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예수의 제자들은 유대인이었고, 유대인들은 기도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제자들이 기도를 할 줄 몰라서 예수에게 기도를 가르쳐 달라고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구약의 시편들이 사실은 다 기도 아닙니까? 더욱이 예수 당시 유대에는 유대인이라면 누구나 잘 알고 있을 유명한 기도들이 이미 있었습니다. 그 가운데 하나는 ‘카디쉬(Kaddish)’라는 좀 짧은 형태의 기도이고, 다른 하나는 ‘18번 축복 기도’ 즉 ‘세모네 에스레(Shemone Esre)’라는 긴 형태의 기도문입니다. 유대인들은 카디쉬와 같은 기도문들을 매일 두세 번씩 낭송하도록 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유대인들은 기도를 많이 알고 있었고, 많이 하고 있었고, 시편 기도를 따라서 하곤 했던 것이 분명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자들은 예수에게 기도를 가르쳐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이런 점에서 제자들의 요청은 상당히 놀라운 것이라고 볼 수밖에 없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기도를 가르쳐 달라는 제자들의 요청에 아무런 의문이 없는 것처럼 그냥 넘어갈 수 없습니다. 왜 제자들이 굳이 또다시 예수에게 기도를 가르쳐 달라고 했을까 하는 질문이 당연히 생깁니다.

Commentary on the New Testament Use of the Old Testam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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