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년) 주기도문 (마 6장)
외식(外飾, hypocrisy) ‘외식’을 뜻하는 헬라어 ‘휘포크리시스’(ὑπόκρισις)는 ‘…인 체하다’, ‘연극을 하다’, ‘꾸미다’는 의미의 ‘휘포크리노마이’(ὑποκρίνομαι)에서 파생된 말로서, 원래 가면(假面)을 쓰고 자기가 아닌 다른 사람의 모습으로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사람, 즉 연극 배우를 가리키는 단어였다. 성경에서는 이 단어를 사용하여 남에게 보이기 위해 거짓으로 행동하는 것, 곧 자기 자랑(만족)이 밑바탕 된 종교적(도덕적) 가식(假飾)이나 위선(僞善)을 가리키게 되었다(마 6:5; 23:27; 눅 6:42; 12:1; 갈 2:13; 벧전 2:1). 현대 영어에서 ‘위선자’를 가리키는 ‘hypocrite’는 여기서 차용된 표현이다.
예수께서는 공생애 기간 내내 이 외식하는 자들에 대해 책망하셨는데, 외식의 행태로 보면 구제(마 6:2), 기도(마 6:5; 막 12:40), 금식(마 6:16), 판단이나 비판(마 7:5), 부모 공경(마 15:5–7), 그리고 하나님을 섬기는 일(마 15:8), 율법을 준수하는 일(마 23:23) 등에서 표리부동(表裏不同)하게 행동함을 지적하셨다. 특히 예수께서는 이스라엘의 종교 지도자들(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외식에 대해 신랄하게 꾸짖으셨다. 그들은 남을 가르치기는 잘 하면서 정작 자신들은 그 가르침대로 행하지 않았다(마 23:3). 따라서 예수께서는 그들을 가리켜 그 속은 썩고 냄새가 나지만 겉은 잘 꾸며 놓은 회칠한 무덤 같다고 지적하셨다(마 23:25–28).
한편, 외식은 초대교회 안에서도 성행하던 악습이었다. 그 대표적인 경우로, 자신들의 신앙심을 자랑하려다 성령을 속인 죄로 급사(急死)한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 사건을 들 수 있다(행 5:1–11). 또 베드로가 이방인들과 식사하다가 유대 출신 교인들의 눈을 의식하여 그 자리를 슬그머니 빠져나간 이중적인 모습을 보임으로써 신앙의 모범을 보이지 못한 일로 사도 바울에게 면책당한 일이 있는데, 이 사건 역시 외식적인 행동을 책망받은 것이다(갈 2:11–14). 베드로는 이처럼 외식한 일로 인해 두고두고 후회했을 것이다(벧전 2:1).
이처럼 사람이 외식을 하게 되는 이유는, ① 하나님보다 사람들의 눈을 먼저 의식하기 때문이며(마 6:4–6,18; 23:28), ② 타인으로부터 영광과 칭찬을 받고자 하기 때문이고(마 6:2; 23:5,7), ③ 마음이 하나님으로부터 멀리 떠났기 때문이며(마 15:7–8), ④ 그 마음에 간사함과 악함과 불의가 충만하기 때문이고(마 22:18; 23:25,28), ⑤ 믿음을 배반했기 때문이다(딤전 4:1–2). 따라서 외식하는 자들은 그 하는 일에 이미 상을 받았기 때문에(타인에게서 칭찬을 받고, 자기 스스로도 만족을 얻었기 때문에) 천국에서 상을 기대할 수 없다(마 6:2,5). 외식을 피하기 위해서는 무엇을 하든지 먼저 하나님을 의식하며, 은밀히 살피시는 하나님 앞에서 행한다는 마음가짐으로 매사에 행동해야 한다(마 6:6,18).
성경 시대 이방인들이 믿었던 신은 못해도 300개 이상 되었다고 한다(또 다른 통계에서는 한 민족당 평균 300여 개 되었다고도 함). 따라서 어느 신이 자기 기도를 들어줄런지 모르는 상황에서 이방인들은 그 많은 신들의 이름을 모두 불러가며 기도했다. 그러다 보면 이방인의 기도는 자연히 횡설수설 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더욱이 이방인의 기도 습관 중에는 여러 말들을 많이 늘어놓고, 또 했던 말을 거듭거듭 무한 반복하는 경우가 있었다. 이것은 기도 응답에 대한 확신이 없기 때문에 일어나는 현상이다. 기도를 듣는 신의 응답 확신이 없이 주문 외우듯 드리는 기도는 허탄한 기도에 불과하다. 이외에도 이방인은 자신이 드린 제물이나 지금까지의 선행을 신에게 상기시킴으로써 신의 도움을 반강요하는 종교적 습관도 있었다. 따라서 자신의 종교적 헌신과 선행을 나열하느라고 기도 내용이 끝없이 늘어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이처럼 자신이 하는 기도의 내용도 모르고, 그저 주문을 외우듯이 열거하는 기도, 그것이 이방인들이 하는 기도의 특징이었다. 예수께서는 아무런 생각도 목적도 없이 타성에 젖어하는 기도는 이방인들의 중언부언하는 기도와 다를 바 없다고 책망하시면서 기도의 본보기로 ‘주님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일명 ‘주기도문’)를 가르치셨다(마 6:7).
Sirach 28:2
2이웃의 잘못을 용서해 주어라. 그러면 네가 기도할 때에 네 죄도 사해질 것이다.
2. 하늘의 구조
하늘은 원래 신들이 거주하던 장소였다. 메소포타미아 문헌에서는 아다파(Adapa)가 아누(Anu)와 회담하려고 하늘로 올라갔다. 위대한 신들의 천상 신전이 거기 있었다. 천상은 1층, 3층, 7층으로 변형이 가능한데, 이것은 보통 만신전에서 신들의 계급적 위치와 관련된 서로 다른 거주지를 구별하는 차원으로 묘사하려는 목적을 지녔다.8 메소포타미아에는 천상 안에서 거리 와 형태에 대한 이론이 있었다. 가나안인들은 신들이 산 정상에 거주한다고 믿었지만 이것은 하늘이 산 정상에 있었으므로 상반되지 않는다.
“샤마쉬 명판”은 특히 유익한데, 예배자들이 물리적으로는 지상 신전에 있지만 샤마쉬의 하늘 보좌 앞에 있는 것으로 보여주기 때문이다. 천상의 물이 그의 발아래 있고, 별들은 그 장면의 밑부분 궁창에 보인다. 바벨론의 “쿠두루”(kudurru, 경계석)에는 중요한 하늘 신의 상징이 상단에 그려졌는데 이것은 하늘의 영역을 나타낸다.
구약성경에서는 천상의 지리적 측면에 관한 언급은 거의 없으며, 주로 하나님께서 거기에 거하시고 그가 하늘을 창조하셨다고 말한다.
이름은 한 사람이나 사물을 다른 존재와 구별시키는 외적인 표시이다. 대개 그 대상의 인격이나 성격, 성품, 정체성, 신체적 특성 혹은 태어날 때의 비화(秘話), 부모의 소망, 하나님에 대한 가족의 신앙 등에 근거해서 이름이 붙여진다. 아이의 이름을 언제 지어야 한다는 규정은 없으나 대개 아이가 태어나는 즉시 지어 붙이는 것이 관례였다(삼상 4:21). 특히 신약 시대의 기록을 보면, 생후 8일째 할례를 행할 때에 아이의 이름을 정식으로 붙여준 것을 보게 된다(눅 1:59; 2:21).
이름이 지닌 의미(a sense with the name)
① 단순한 호칭 이상으로 기념할 만한 명성과 영예를 간직하고 있다(사 14:22). ② 개인의 전 인격과 전 인생을 대표하고 상징한다(전 9:5). ③ 개인의 본질적인 성격(성품)이나 특징, 정체성을 표시한다(창 27:36; 마 1:21,23; 눅 1:13–17). 이런 이유들에서 경건한 자들은 그토록 하나님의 이름을 알고자 갈망했던 것이다(시 9:11; 91:14). ④ 출생을 전후한 때에 일어난 특정한 일들이나 태어날 때의 신체적 특징 등을 함축하고 있는 명칭이기도 하다(창 18:12; 25:24–26). ⑤ 권세나 능력을 나타낸다(출 9:16; 대상 17:8,21; 시 54:1; 마 7:22; 약 5:14). ⑥ 영광과 지위를 나타낸다(삿 13:17–18; 삼상 18:30; 전 7:1; 엡 1:20–21). ⑦ 어떤 소원(소망)이나 축복 혹은 그 인생에 대한 예언적 메시지(운명에 영향을 끼치는 것)를 담고 있다(사 8:1–4; 호 1:4). ⑧ 이름의 존속은 그 존재의 계속성을, 이름을 제함은 멸망을 상징한다(신 7:24; 수 7:9; 전 6:10; 사 56:5). ⑨ 다른 사람의 이름으로 말하거나 대표(대리)하는 것은 그의 권위에 참여하는 것을 뜻한다(왕상 21:8; 렘 11:21; 29:25; 마 10:41; 고후 5:20). ⑩ 누구의 이름으로 세례받는다는 것은 그의 소유가 됨을 뜻한다(마 28:19; 행 8:16; 고전 1:13,15). ⑪ 이름의 변화는 그 사람의 인격(성격)과 신분(지위)의 변화를 뜻한다(창 17:5,15; 32:28–30; 41:45; 마 16:17–18; 막 3:17; 행 13:9).
고대 세계의 거룩 용어
고대 세계 문헌에 대한 폭넓은 연구는 고대 근동 주민들이 신성 영역으로의 일원됨과 근접성을 표현하기 위해 거룩의 언어들을 발전시켰음을 시사한다. 고대 근동 문헌들은 대개 신에게 바쳐지는 어떤 사람 또는 사물의 헌신을 가리키며 거룩의 언어를 “성별”(consecration)의 의미로 사용한다. 이런 문맥에서 도덕적 성결 또는 완전의 의미는 포함되지 않는다.
수메르.수메르 문헌에서, 쐐기문자 표기 “쿠”(KU)는3“거룩한”을 상징한다. 문헌학적 접근법을 사용해, 윌슨은 “거룩한”을 뜻하는 이 수메르어는 “신성의 영역에 부속한/속한”으로 규정되어야 가장 적절하다고 주장했다(Wilson, “Holiness” and “Purity,” 17). 수메르 문헌은 “거룩한”(쿠)이란 용어를3 다음과 관련해 사용한다:
• 신전들과 같은 거룩한 장소 또는 신전에 속한 기구들(성막 및 성막 기구들과 관련해 출애굽기와 레위기에 나타난 “거룩한”의 용례를 비교해 보라)
• 때론 “거룩한 산”으로도 언급되는, 어떤 신들의 거주지(DU6.KU3; 참고, Borger, “Das dritte ‘Hause’ der Serie bīt rimki”)
• 난나(Nanna) 신에게 속한 선박처럼 신에게 속한 물건들(참고, Falkenstein and von Soden, Sumerische und akkadische Hymne und Gebete, 79).
우가리트어. 우가리트 본문은 거룩의 개념을 전달하기 위해 qdš 용어를 사용한다(참고, Costecalde, Aux origins du sacré biblique, 57–72). 일부 행정적 제의적 본문에도 사례가 있긴 하지만, 그 형태들은 종교적 신화적 문맥에 주로 나타난다(참고, de Tarragon, Le Culte à Ugarit, 73–74). 메소포타미아 본문과 유사하게, 우가리트 본문은 어떤 것이 신에게 속함을 규명하는 그것의 일원되는 자격과 관련해 거룩의 용어를 사용한다. 근본적으로 신의 부근에 있는 모든 것이 “거룩한”(qdš) 것으로 명시된다
어떤 그룹이나 신에게 속한다는 의미를 암시하는, “성별”의 뜻을 시사하는 것으로 보인다(Costecalde, Aux origins du sacré biblique, 72). 우가리트 본문에서 “거룩한”이란 용어가 도덕적 속성을 의미하는 사례는 없다.
헬라어 문헌에서 고대 근동 언어의 거룩과 의미론적으로 대등한 용어는 주로 70인역의 발전을 통해 나타난 것으로 보인다. 초기의 비-성경 헬라어 문헌들에는 거룩의 개념이 포함된 예가 거의 없다(참고, 상기 및 Procksch, “ἃγιος, hagios,” 89). “거룩한”(ἅγιος, 하기오스)의 용례와 관련해 비-유대교, 비-기독교 문헌의 제한된 사례들은, 고대 근동의 용례와 유사하게, 신들에게 봉헌된 사물과 사람들에 대해 묘사한다(참고, Liddell and Scott, Greek-English Lexicon, s.v. ἃγιος, hagios).
성경의 거룩에 대한 접근
성경의 “거룩한” 또는 “거룩”이란 용어의 정확한 의미에는 논쟁적 여지가 있다. 역대 학자들은 성경의 거룩의 정확한 정의와 관련, 다른 결론들에 도달하기 위해 다양한 방법론을 활용했다(Laube, “Heiligkeit IV,” 708–09). 예를 들어:
• 전통적 연구는 어원학에 의존했고 성경의 거룩은 분리 또는 도덕적 성결을 의미하는 것으로 결론했다(참고, Alexander, From Paradise; Douglas, Purity and Danger; Eichrodt, Theology; Neusner, Idea of Purity; Rücker, Die Begründungen).
• 인류학자들 및 사회-역사학자들은 원시 종교의 더 광범위한 사회적 환경을 감안해 거룩을 연구했고 그것을 “초월성”으로 규정했다. 그 한 결과로, 사회학자들, 인류학자들, 그리고 신학자들이 자신들의 문화적 연구 내에서 거룩의 한 측면을 그것의 다른 측면보다 더 강조한 가운데 거룩과 관련한 많은 뉘앙스들이 등장했다
거룩(holiness) 명 ●‘거룩’은 하나님의 속성 중에 가장 중심 되는 성품이요, 하나님의 백성에게 첫 번째로 요구되는 명령이기도 하다(레19:2; 벧전1:15–16). 성경 원문에는 다양한 단어들이 사용되는데, 그 기본 의미는 ‘구별하다’, ‘분리(구분)하다’, ‘깨끗하게 하다’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 즉, 죄악과 부정으로부터 철저히 자신을 분리시키고, 오직 하나님의 소유로서 자신을 구별하여 드리는, 변화된 상태를 말한다. ●성전, 성물, 제사, 하나님께 제사드리는 절기, 하나님의 백성인 성도 등 거룩하신 하나님과 관련된 모든 것들 역시 거룩하다. 그리고 세상의 속되고 부패한 행실이나 풍습에서 구별되어 하나님의 법대로 살아가는 것을 가리키기도 한다(레11:44). 특히 신약성경에는 죄악과 구별된 도덕적인 삶(요17:19), 세속적이고 비신앙적인 것으로부터 자신을 엄격하게 구별하는 경건한 행위를 ‘거룩’이라 한다(벧전1:16).
하나님 나라 교리는 왕이신 하나님께서 자신이 만드신 창조세계를 다스리시는 것에 대해 묘사하는 교리다. 하나님 나라 교리는 하나님께서 어떻게 이 세상을 다스리시고 구성하시는지와 더불어 하나님의 궁극적인 목적이 무엇인가를 함께 다룬다.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의 영에 의해 교회와 이 세상 가운데 현재 존재하고 계신다. 어떤 사람들은 이런 현재적 하나님 나라를 교회와 완전히 동일시한다. 물론 하나님 나라의 대표격으로 교회가 포함되어 있는 것은 맞다. 하지만 대부분의 신학자는 하나님 나라의 완전하고도 최종적인 개념은 그보다는 넓은 개념이라고 생각한다. 교회는 사역적 기관이지만, 하나님 나라는 교회의 사역이 성취된 결과로서 이해할 필요가 있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위해 기도하라고 권면하셨다. 그리스도의 이런 가르침에 담긴 함의는 하나님 나라가 아직 도래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즉 최소한 완전한 형태의 하나님 나라는 도래하지 않았다고 보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 나라가 “이 세상 속에 속한 것이 아니다”(요 18:36)라고 가르치셨다. 즉 하나님 나라는 정치적 실체라기보다는 보다 더 영적이라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천국, 하나님의 나라(天國, kingdom of heaven, kingdom of God) 하나님께서 다스리시는 나라. ‘하늘나라’, ‘하늘 왕국’ 등으로 불린다. 이 모두가 같은 의미이지만 ‘천국’이란 표현은 마태복음에만 등장한다. 이는 마태복음이 유대인을 상대(독자)로 기록되었고, 유대인들은 전통적으로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는 부정한 입술로 거룩하신 하나님의 성호를 더럽혀서 안 된다는 생각에서였다. 그래서 마태는 하나님이 계시는 하늘을 하나님과 동의어처럼 사용하여 ‘천국’(하늘나라)이라 표현하였다.
결국 천국은 구원받은 백성들이 하나님의 다스림(통치)을 받으며 살아가는 나라를 말한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주권(통치)이 미치는 범위가 천국인 것이다. 이 통치 범위는 하나님이 창조하신 모든 세상과 만물 전체에 미친다. 하지만 성경은 현재 세상을 가리켜 공중 권세 잡은 자(사탄)가 다스리는 나라로 표현하기도 한다(마 4:8; 눅 4:5; 고후 4:4; 엡 2:2).
물론, 사탄의 활동도 하나님의 허용 아래서만 가능하다. 따라서 넓은 의미에서 보면 세상 모든 일이 하나님의 통치권 아래 있다 할 수 있다. 다만, 좁은 의미에서 통상적으로 천국은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의 주권에 순종하면서 하나님의 거룩하신 뜻을 이루어나가는 삶의 공간으로 볼 수 있다.
세례 요한은 이 천국이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초림)으로 이미 우리 가운데 시작되었다고 하였다(마 3:2; 13:1–52). 이를 천국의 ‘과거성’이라 한다. 그리고 천국은 장차 예수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때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온전하게 완성된다(마 22:1–14; 25:1–45). 이를 ‘천국의 미래성’이라 한다. 그리고 이 날이 이를 때까지 현재 이 땅에서 계속 완성되어 나간다. 이를 ‘천국의 현재성’이라 한다.
즉, 하나님의 백성이 삶 가운데서 하나님의 거룩하신 뜻을 이루고 살아가면서 하나님의 통치 주권을 넓혀 나가는 것, 그래서 하나님의 나라가 점점 확장되어 가는 것이 현재적 천국의 성격이다. 그래서 이런 천국을 가리켜 ‘천국의 역동성’이라 하는데, 이 현재적 천국은 영적(靈的)이다. 왜냐하면 이 현재적 천국은 눈에 보이는 것도, 또 세상 나라처럼 어떤 물리적인 공간을 차지하고 있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구원받은 성도가 주님을 모시고 살아가는 그 어디나 천국인 것이다(눅 17:21).
그리고 하나님의 통치 범위가 넓혀져 세상 마지막 날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때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천국이 완성된다. 학자들은 이런 천국의 특성을 가리켜 천국이 ‘이미 왔지만(already) 아직 완성되지 않았다(not yet)’고 한 마디로 설명하였다. 이 미래적 천국의 모습은 사도 요한이 본 환상 가운데 잘 묘사되어 있다(계 21–22장).
그렇다면 이미 천국 백성이 되었고 세상 마지막 날 완성될 천국을 대망하며 살아가는 성도가 이 땅에서 어떤 자세로 살아가야 할지는 자명하다. 이에 대해 예수께서는 주기도문에서, 하나님의 나라(천국)가 이 땅에 임하게, 그리고 하나님의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같이 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해달라고 기도하며 그런 자세로 살라고 가르치셨다(마 6:10).
하나님의 뜻은 하나님이 행하신 모든 일,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방법을 포괄한다. 하나님의 뜻은 불가피하며 자유롭고,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신비롭다.
● 불가피하다는 것은 하나님이 그분의 본질상 일관되게 일하신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하나님의 뜻은 그분의 지혜와 선에 일치하면서, 거기에는 하나님이 하지 않을 어떤 일까지도 내포되어 있다.
● 자유롭다는 것은 하나님이 반드시 세상을 창조하거나, 특정한 행위를 실행할 필요는 없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은 자유롭기 때문에 반드시 세상을 보존하고, 구원할 필요도 없다. 하나님은 자유함 속에서 그분의 흡족한 기쁨을 따라 행하신다(엡 1:5, 9). 인류를 지배하는 것은 운명이나 숨겨진 에너지가 아니라, 전능한 하늘 아버지의 뜻이다. 이런 이유로, 우리는 하나님의 선하고 완전하신 뜻 안에서 쉼을 얻을 수 있다(롬 12:2).
● 신비롭다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어떤 것을 계시하기로 작정하실지라도, 거기에는 우리에게 알려지지 않은 많은 것들이 있음을 의미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지혜의 깊이를 측량할 수 없다(롬 11:33–34). 그분은 본향으로 향하는 여정 중에 있는 자신의 백성의 성숙과 열매 맺음을 용이하게 하시는 자신의 뜻을 단지 일부만 드러내실 뿐이다.
또한 하나님의 뜻은 복잡하다. 적어도 다음과 같은 네 가지 측면을 포함하고 있다.
1. 때때로 하나님의 주권, 혹은 비밀스러운 의지로 불리는 하나님의 제정의 의지. “감추어진 일은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속하였거니와 나타난 일은 영원히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속하였나니”(신 29:29). 하나님은 주권적으로 일어날 모든 일을 제정하신다. 즉 그분의 통제 없이 일어나는 일은 아무것도 없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은 인간의 책임과 선택을 억압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주권과 우리의 자유로운 선택 사이에 있는 긴장은 우리 인간의 이해를 넘어선다.
2. 때때로 하나님의 계시된 뜻으로 불리는 하나님의 교훈의 목적. “나는 어떻게 나의 삶을 위한 하나님의 뜻을 발견할 수 있을까?” 교훈과 관련된 하나님의 뜻은 우리에게 감추어져 있지 않다. 우리는 하나님의 계시된 말씀을 통해 그분의 뜻을 많이 알 수 있다. 바울은 하나님의 뜻이 성경에 계시되었음을 반영하여, “그러므로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고 오직 주의 뜻이 무엇인가 이해하라”(엡 5:17)라고 기록했다. 우리는 비록 불순종하기로 마음먹을 수도 있지만, 하나님의 교훈하시는 뜻에 순종하도록 부름 받았다.
3. 하나님의 성향적인 뜻. 이는 그분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하나님의 성향을 설명한다. 성경은 하나님이 “악인이 죽는 것을 기뻐하지 아니하고”(겔 33:11)라고 하면서, 악인을 죽이기로 결심하신다(3:20)고 가르친다. 결국 하나님은 자신의 영광과 의로움을 기뻐한다. 그분은 심판 속에서 정의를 옹호하는 것을 기뻐한다.
4. 각 믿는 자들을 인도하는 하나님의 특정한 뜻을 의미하는 그분의 개별적인 의지. 성령은 하나님이 믿는 자들에게 목적하신 것을 이루도록 지시하신다.
땅(אֶרֶץ, 에레츠;γῆ, 게). 인간이 거주하는 장소. "하늘"(또는 "하늘들")과 땅이 짝을 이루어 나타날 때는 전체 우주를 가리키거나 단순히 하늘과 땅을 구별하기 위한 것이다(창 1:1-2, 26; 27:28; 신 32:22; 행 4:24).
라
땅(land, earth) ‘지구의 겉을 이룬 흙과 돌의 총칭’,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세상에서 바다를 제외한 지구의 표면’, ‘동·식물이 자라는 곳’(창 27:28; 시 104:14), ‘사람이 사는 처소’(사 45:18) 등을 뜻한다.
고대 히브리인들은 땅을 우주의 중심으로 생각했다. 그리고 땅은 네 기둥에 의해 받쳐져 있는 평평한 단면으로 이루어졌다고 보았다(욥 9:6; 시 75:3). 또한 땅 위에는 해와 달과 별들의 거처인 궁창이 있고, 땅 아래는 물과 죽음의 세상인 음부(스올)가 있다고 생각했다. 즉, 죽은 자는 땅 아래 세상(스올)으로 간다고 믿었다(츨 20:4; 시 136:6).
땅은 하나님이 만드신 피조 세계의 한 부분이며,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형상을 닮은 사람을 만드시고 그들에게 “생육하고 번성하라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창 1:27–28)는 복과 명령을 아울러 주셨다. 그런데 인간의 불순종으로 땅은 인간과 함께 저주를 받아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내게 되었다(창 3:17–18).
신약성경에서 ‘땅’은 영적인 것에 반대되는 불신 세상, 죽음과 허탄으로 상징되는 처소 등으로 자주 묘사되어, 땅에 보물을 쌓는 행위(마 6:19)나 땅의 것을 생각하는 것은(골 3:2) 성도가 삼가야 할 악행으로 규정되었다. 그래서 “보물을 땅에 쌓아두지 말라”(마 6:19), “땅의 것을 생각하지 말라”(골 3:2), “땅에 신이라 불리는 자가 있다”(고전 8:5), “땅을 두고 맹세하지 말라”(마 5:35) 등의 경고가 등장한다. 한편, 역사의 끝날 곧 세상 종말에는 타락하고 부패한 하늘과 땅이 모두 사라지고 새 하늘과 새 땅이 조성될 것이다(사 65:17; 66:22; 벧후 3:13). 바로 그날에 처음 땅과 하늘과 바다는 모두 사라질 것이다(계 21:1).
일용할 양식일반적으로 생활에 기본적으로 필요한 것을 표현하는 것으로 이해되는 주기도문의 문구다(마 6:11; 눅 11:3). "매일"에 해당하는 헬라어 단어(ἐπιούσιος, 에피우시오스)는 신약에서 이곳에서만 나온다. 이 단어는 "오늘 우리에게 내일의 양식을 주소서"라는 제롬의 번역에서처럼 "미래"로 번역될 수도 있다.
빵 (לֶחֶם, 레헴; ἄρτος, 아르토스). 곡물로 만ㄹ어진 음식; 때때로 곡 자체나 일반적인 음식을 언급하기 위해 사용됨. 성경에서 "빵"이라는 단어는 종종 다양한 상징적 의미들, 특히 영적인 자양분의 의미를 전달하기 위해 은유적으로 사용된다. 히브리어 단어 מַצָּה (마짜흐)는 필요할 경우 즉시 준비될 수 있는 누룩이 없는 빵을 말한다 (참고 창 19:3; 삼상 28:24).
칼빈 선생님은 『기독교강요』 3권 20장에서 “기도의 자세”에 대해 언급하는데, 진실로 하늘 문 앞에서 하나님을 뵙는 듯한 태도로 기도하는 것이 바로 『기독교강요』에 정리되어 있는 “올바른 기도의 법칙”입니다.
『기독교강요』에는 이 법칙이 총 네 가지로 나타나 있습니다. 첫째 법칙은 “경외”입니다. 하나님께 기도할 때 무엇보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태도가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둘째 법칙은 “자신에 대한 부족함을 강하게 느끼면서”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 앞에 서 있는 “자기”를 깨달은 자가 느끼는 감정입니다. 기도야말로 하나님과의 맞대면이 아닙니까? 그러므로 하나님 앞에 선 자는 반드시 자신의 모습에서 한없는 부족함을 느끼면서 기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셋째 법칙은 “자기 신뢰를 버리는 겸손”입니다. 셋째 부분에서 강조되는 것은 둘째 부분과 연결됩니다. 하나님 앞에서 부족함을 느끼는 사람은 자기 신뢰를 버리고 전적으로 하나님을 바라보게 됩니다. 칼빈은 이 부분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기도하기 위하여 하나님 앞에 서는 사람은 겸손하게 영광을 전적으로 하나님께 돌리며, 자기의 영광을 생각하지 않고 자기의 가치를 일체 생각하지 말아야 한다. 곧 자기 신뢰를 전적으로 버려야 한다.”
그리고 끝으로 넷째 법칙은 “확신”입니다. 기도자는 반드시 자신의 기도를 하나님이 들으신다는 확신 가운데 기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교리문답은 이런 『기독교강요』의 내용을 거의 똑같이 인용했습니다. 둘째와 셋째에서는 완전히 똑같고, 첫째의 경우는 다르지만 사실 맥락을 살펴보면 같은 말입니다. 오늘 우리가 117문답의 대답을 통해서 배우려는 내용은 칼빈 선생님으로부터 받은, 개혁신앙 안에 면면히 전해 내려온 기도에 대한 바른 자세입니다.
20장
기도
요 약
1. 바른 기도를 위해서는 첫째,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있어야 하며, 둘째, 자신의 부족함을 제대로 알아야 하고, 셋째, 자신이 가치 있는 존재라는 생각을 모두 내려놓아야 하며, 넷째, 하나님께서 기도에 응답하실 거라는 확실한 소망과 믿음을 가져야 한다.
2. 주기도문의 머리말은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 그리고 하나님의 초월성을 보여 준다.
3. 첫 번째 간구는 하나님께 합당한 존귀를, 두 번째 간구는 하나님의 다스림을, 세 번째 간구는 하나님의 통치에 대한 우리의 순종을, 네 번째 간구는 우리의 모든 필요를, 다섯 번째 간구는 우리의 죄사함을, 여섯 번째 간구는 유혹에서의 승리를 의미한다.
누가복음판 주기도문의 문학적 맥락
다음으로, 주께서 가르치신 이 기도를 살펴보기 위해서는 먼저 이 기도 본문들이 들어 있는 맥락을 먼저 살필 필요가 있습니다.
누가복음판의 주기도문에 대한 문학적 맥락을 먼저 보도록 하겠습니다. 누가복음 11장 2–4절의 주기도문 본문에 앞서는 1절은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예수께서 한 곳에서 기도하시고 마치시매 제자 중 하나가 여짜오되 주여 요한이 자기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친 것과 같이 우리에게도 가르쳐 주옵소서.
예수의 제자 가운데 한 명이 기도를 가르쳐 달라고 했습니다. “세례 요한도 그의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쳐 주었는데, 이제 선생님도 우리에게 기도를 가르쳐 주셔야 합니다”라는 것입니다. 문맥으로 볼 때, 예수는 그 요청에 응하여 기도를 가르쳤습니다.
여기서 일단 우리는 제자들이 예수에게 이런 요청을 했다는 것이 사실은 매우 놀라운 것이라는 점을 주목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예수의 제자들은 유대인이었고, 유대인들은 기도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제자들이 기도를 할 줄 몰라서 예수에게 기도를 가르쳐 달라고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구약의 시편들이 사실은 다 기도 아닙니까? 더욱이 예수 당시 유대에는 유대인이라면 누구나 잘 알고 있을 유명한 기도들이 이미 있었습니다. 그 가운데 하나는 ‘카디쉬(Kaddish)’라는 좀 짧은 형태의 기도이고, 다른 하나는 ‘18번 축복 기도’ 즉 ‘세모네 에스레(Shemone Esre)’라는 긴 형태의 기도문입니다. 유대인들은 카디쉬와 같은 기도문들을 매일 두세 번씩 낭송하도록 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유대인들은 기도를 많이 알고 있었고, 많이 하고 있었고, 시편 기도를 따라서 하곤 했던 것이 분명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자들은 예수에게 기도를 가르쳐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이런 점에서 제자들의 요청은 상당히 놀라운 것이라고 볼 수밖에 없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기도를 가르쳐 달라는 제자들의 요청에 아무런 의문이 없는 것처럼 그냥 넘어갈 수 없습니다. 왜 제자들이 굳이 또다시 예수에게 기도를 가르쳐 달라고 했을까 하는 질문이 당연히 생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