긍휼히 여기는 자의 복

팔복➄  •  Sermon  •  Submitted   •  Presen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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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5:1-7
팔복에 대한 말씀을 계속해서 나누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의도적으로 그러신 것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이 팔복은 독특한 구조로 되어있는데요.
지난주까지 살펴보았던 네 가지의 복의 조건이 있었습니다. ‘마음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다.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다. 온유한 자는 복이 있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다’입니다.
그리고 이 네 가지는 나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오는 내적인 태도라고 볼 수가 있는데요. ‘내가 하나님에 대해 어떤 마음과 삶의 태도를 보이는가?’ 이것이 중요합니다. 그러면서 팔복은 “천국은 저희의 것임이요”라고 하시면서 이 세상이 아닌, ‘저세상’ 이야기를 꺼내시는데요. ‘이 세상’을 살고 있는 우리에게 복을 주시려면 ‘이 세상’에서 누릴 수 있는 복을 주셔야 할 텐데 ‘저 세상’의 ‘천국’을 먼저 말씀하시는 게 참 흥미롭지 않습니까?
그리고 오늘부터 시작되는 다섯 번째 복은 ‘나와 이웃과의 관계와 태도를 어떻게 할 것인가?’를 말씀하시면서요. 이 세상 얘기를 하시기 시작합니다. 그 중의 첫 번째가 바로 ‘긍휼’의 문제입니다. 앞선 네 가지의 하나님을 향한 태도와 마음을 소유하게 되면 이제 긍휼로 흘러나올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의 핵심인 마태복음 5:7 합독
7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이 ‘긍휼’이라고 하는 단어는 국어사전을 보면 ‘불쌍하고 가엽게 여겨서 도와줌’이라고 해서 헬라어로는 ‘엘레이오스’(ἐλεήμονες) 즉, ‘자비와 연민’을 뜻합니다. 이 말을 히브리어로는 ‘헤세드’라고 합니다. 많이들 들어보셨죠? 이 헤세드는 성경 전체에서 가장 중요한 단어 중의 하나인데요.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사랑을 말할 때 ‘헤세드’라고 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긍휼’이라고 말할 때는 하나님께서 무조건적인 사랑이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도 이 긍휼이라는 단어를 종종 사용하셨는데요. 마태복음 9:36
36 무리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시니 이는 그들이 목자 없는 양과 같이 고생하며 기진함이라
그리고 이 구절 이후에 열두 제자가 세워지고 세상에 파송하시는 내용이 나오는데요. 그 이유가 뭐겠어요? 불쌍한 무리를 긍휼히 여기시는 마음 때문이었습니다. 그런가하면 마태복음 14:14
14 예수께서 나오사 큰 무리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사 그 중에 있는 병자를 고쳐 주시니라
역시 이 본문 뒤에 먹을 것이 없어 굶고 있던 오 천명을 먹이신 오병이어의 기적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마태복음 15:32
32 예수께서 제자들을 불러 이르시되 내가 무리를 불쌍히 여기노라 그들이 나와 함께 있은 지 이미 사흘이매 먹을 것이 없도다 길에서 기진할까 하여 굶겨 보내지 못하겠노라
역시 이 본문 뒤에 먹을 것이 없어 굶고 있던 사 천명을 먹이신 기적이 기록됩니다. 이렇듯 예수님의 사역에 반복해서 나타나는 예수님의 특징 중의 하나가 바로 이 긍휼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누가 하나님의 긍휼을 받는다고 합니까? 남을 긍휼히 여기는 사람이라고 하십니다.
흥미로운 것은요. 이 긍휼이라는 표현은 ‘창자에 이르기까지 감동을 받다’라고 하는 것으로 번역할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여러분, 히브리인들은요. 인간의 영혼이 창자에 있다고 생각을 했습니다. 그래서 ‘창자가 꼬인다’ ‘창자가 아프다’ ‘창자가 끊어진다’라고 하는 말로 내 중심까지 고통이 느껴진다고 할 때 이 창자라고 하는 단어를 사용했습니다. 다시 말해 ‘정말 가슴이 아프다’라고 하는 표현이 이 ‘창자가 끊어진다’라고 하는 이 긍휼의 본질적인 의미라는 것이죠.
자, 하나님 나라가 이미 이 땅 가운데 임했습니다. 그러나 완성되지는 않았습니다. 완성되지 않는 하나님 나라 속에서 하나님 백성들이 하나님의 뜻을 위하여 살아가야 하는데, 그렇게 살아가려고 하는 사람들의 삶이 얼마나 힘들고 어려울지 아셨기 때문에 그들을 바라보시면서 ‘창자가 떨릴 만큼 불쌍하다’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이죠. 그들은 가난할 것이고 애통할 것이고 의에 주리고 목마른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이런 그들의 삶 전체를 보고 계셨던 예수님의 이 불쌍히 여기는 마음, 무조건적인 사랑으로 바라보는 마음이 바로 우리 주님께서 무리를 보셨던 마음이고요. 오늘 우리를 향해서 긍휼히 여기는 자가 되어야 할 이유라고 말씀하시는 근거가 됩니다.
그런 차원에서 “하나님의 나라가 누구의 것인가?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진 사람은 모습은 어떤 것인가?” 할 때 가장 먼저 필요한 것이 긍휼히 여기는 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불쌍하게 여겨야 합니다. 조건 없이 사랑만 하는 것을 선택해야 합니다. 미워도 다시 한번 기회를 줘야 합니다. 죄는 미워하되 사람까지 미워해서는 안 되는 것이죠. 디모데후서 3:3
3 무정하며 원통함을 풀지 아니하며 모함하며 절제하지 못하며 사나우며 선한 것을 좋아하지 아니하며
여러분, 긍휼을 모르는 자들의 특징을 보십시오. “무정하며” “원통함을 풀지 아니하며” “모함하며” “사나우며” “선한 것을 좋아하지 아니하며” 아닙니까? 그래서 우리에게 그리스도인들은 어떻게 살아야 한다고 말하는 걸까요? 이어서 3:5 합독
5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니 이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
바로 이런 것들로부터 돌아서라고 하십니다. 이게 바로 말세를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명령이라는 것이죠. 한 구절만 더 보겠습니다. 빌립보서 4:5 합독
5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 주께서 가까우시니라
‘관용’은 너그러운 마음이잖아요? “너희의 너그러운 마음을 모든 사람들에게 알려라”고 하시는데요. 왜냐하면 “주님께서 가까이 오셨기 때문에” 굉장히 의미 있는 이야기 아닙니까? 이런 뜻이죠. “네가 너그러운 마음으로 사람을 대하면 제일 마지막에 오시는 주님께서 너를 너그럽게 대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서정오 목사님이라는 분은 긍휼의 원리에 대해 이렇게 말씀하시더라고요.
“세상에는 사랑을 받지 않아도 될 만큼 완벽한 자가 없다. 또한 남을 사랑하지 못할 만큼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는 사람도 없다. 우리는 가진 것으로 누구에게든 긍휼을 베풀 수 있다.”
한 가지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마태복음 18장을 보면, 그 유명한 일만 달란트 빚을 탕감받은 자의 비유가 나옵니다. 일만 달란트라고 하는 엄청난 빚을 종을 왕이 완전히 탕감해 줍니다. 우리는 이 일만 달란트라고 하는 게 얼마인지 지금 우리의 가치로 얼마 정도 되는지를 좀 볼 필요가 있는데요.
당시 노동자의 하루 일당이 일 데나리온이었는데, 6,000데나리온이 일 달란트였습니다. 자 그걸 가지고 계산을 해보면은요, 노동자가 한 20만 년 정도 일하면서 일당을 한 푼도 쓰지 않고 다 모아야 일만 달란트가 됩니다. 요즘으로 따지면 하루에 15만 원 정도를 받는 일용직 근로자였다고 계산을 해보면 약 9조 원 정도가 되는 거죠. 세상에! 9조 원을 어떻게 빌릴 수 있는 거죠?
여러분, 일만 달란트라고 하면 감이 안 오는데, 9조 원 그러면 어떻습니까? 역시 금액이 상상조차 안 될 정도로 너무 크다 보니까 감이 안 오죠. 예수님 당시에요. 이 로마의 식민지였던 유대 땅에서 세금을 내는데 그 액수가 800달란트밖에 안 되었다고 합니다.
여러분, 국가의 세금이 800달란트밖에 안 됐는데 지금 일만 달란트 빚을 지고 그걸 탕감해 주는 이야기가 예수님의 비유 가운데 등장하는 내용이죠. 여러분, 이 주인은요. 종이 돈을 갚을 수 없다는 걸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일만 달란트 왜 안 갖다 주냐?”라고 말했더니, 종의 말하길, “내게 참으소서 내가 다 갚으리라”하고 말하면서 바짝 엎드립니다. ‘지금 갚을 수 없으니까. 나한테 조금만 더 시간을 주면 내가 그걸 갚겠다’라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여러분, 이 종이요. 9조 원을 갚겠다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실은 갚겠다고 말하고 있지만 실제로 갚을 수 없는 돈이라는 거예요. 근데 갚을 수 없다는 걸 인정하지 않고요. “조금만 시간이 있으면 내가 그걸 갚을 수 있습니다”라고 지금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것은요. 지금 예수님께서 이 일만 달란트를 비유를 통해 인간이 가지고 있는 죄가 얼마나 강력한가? 그리고 강력한 한 죄에 대해서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이 없는 인간의 상태를 이야기하면서 죄인을 용서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계신 겁니다.
‘네가 아무리 노력하고 애를 써도 해결할 수 없는 것이 죄의 문제다’ ‘그래서 이 죄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내가 너를 용서하는 것밖에 없다’라고 하는 걸 보여주는 것이죠.
그런데 인간은 뭐라고 말합니까? ‘조금만 시간을 주면, 조금만 기회를 주면 내가 이 죄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습니다’라고 말하고 있더라는 것입니다. 자, 이제 왕은 선택을 해야 합니다. 왕이 선택할 수 있는 첫 번째 선택은, 정의를 행하는 것입니다. 이 사람이 이렇게나 많은 빚을 졌는데 갚지 못하니 교도소에 처넣고 이 사람이 가지고 있는 모든 걸 압수해서 아주 적은 돈이지만 그래도 갚게 해야 하는 게 인간이 생각하는 정의 아닙니까?
그런데요. 여러분, 왕이 그렇게 하지를 않아요. 그러면서 이 마태복음 18장 27절에는 왕이 그렇게 하지 않는 이유를 한 문장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마태복음 18:27
27 그 종의 주인이 불쌍히 여겨 놓아 보내며 그 빚을 탕감하여 주었더니
그 종의 주인이 불쌍히 여겨 놓아 보내며 빚을 탕감하여 주었다고 말합니다. 여러분, 이 종을 주인이 용서를 해 줍니다. 9조 원이나 되는 그 엄청난 빚을 다 없애줍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는 이유가 “불쌍히 여겼다”라는 한 문장밖에 없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인간적인 정의로 처벌하기에는 종이 너무 불쌍한 겁니다. 도무지 자기가 소생할 수 없는 상태인 줄도 모르고 또다시 해결할 수 있다고 말하는 이 종의 착각에 대한 잘못된 인식을 주인은 본 거죠. 전혀 논리적이지도 전혀 합리적이지도 또 어떻게 보면 정의롭지도 않은 일을 주인은 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이 주인이 종의 모든 빚을 탕감해 주는 이유는 주인의 마음 가운데 불이 일어났기 때문입니다. 어떤 불이에요? 진노와 심판의 불이 일어나야 하는데 긍휼의 불이 일어난 거예요. 사랑의 불이 일어난 겁니다. ‘아니 이 인간 아직도 모르는구나’ ‘자신이 해결할 수 없다는 걸 모르는구나’ 그래서 이 사람을 이제 처벌해야 하는데 하나님의 사랑의 불이 이 주인의 마음을 태워서 이 종의 갚을 수 없는 돈을 모두 없는 것으로 탕감해 주는 일이 일어난 것이죠.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우리가 왜 구원을 받고 오늘 이 자리에 나와 있는 줄 아십니까? 바로 아버지의 마음 가운데 일어난 불쌍히 여기는 긍휼 때문입니다. 우리 인간 편에서는요. 아무것도 할 수 없었습니다.
심지어 인간은 내가 얼마나 큰 빚을 졌는지도 모르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인간은 영적인 소경이었고 전혀 앞을 분간할 수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세상을 심판으로 오신 하나님 앞에서 ‘내게 조금만 시간을 주고 기회를 주면 내 죄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어요.’라고 말하고 있더라는 거죠. 전혀 자기를 파악할 수 없는 것이 인간의 상태였습니다. 허물과 죄로 죽었던 상태였음에도 불구하고 영적으로 죽어 있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 어떤 죄를 지었고 이 죄의 문제를 해결할 방법이 없다는 걸 인정하지 않는 것이 인간의 상태 아니었습니까?
그런데요. 이런 인간을요. 우리 주님께서는 슬픈 눈으로 바라보셨습니다.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도무지 사랑스럽지 않은 인간들인데 이 인간들을 사랑이 가득한 헤세드의 눈으로 바라보셨습니다.
여러분, 이게 하나님께서 우리를 바라보셨던 눈이고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는 눈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우리 인간을 용서하기로 하셨습니다. 모든 손해를 자기가 짊어지기를 선택하셨어요.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아들을 죽이심으로 십자가에서 엄청난 손해를 당하시고요. 구원이라고 하는 사건이 일어난 것입니다. 우리는 이 엄청난 빚을 탕감받았습니다.
자, 이제 이 탕감받은 종이요. 9조 원이라고 하는 엄청난 돈을 용서받았기 때문에 이제 그 큰돈을 용서받은 자가 얼마나 아름다운 삶을 살 것인가에 대한 기대감으로 이 사람을 볼 수밖에 없잖아요? 그런데 안타깝게도 탕감받은 자가 이후에 하는 행동이 이렇습니다.
빚을 모두 탕감받고 돌아가는 길에 마침 자신에게 백 데나리온을 빚진 사람을 만났습니다. 우리 돈으로 환산하면 1,500만 원 정도 됩니다. 그런데 이 1,500만 원 빚진 사람을 붙들어 놓고 멱살을 잡고 흔들다가 “내게 시간을 조금 주면 내가 갚겠습니다.”라고 말하는 사람을 감옥에 처넣고 맙니다. 자기는 9조 원을 탕감받았는데, 지금 1,500만 원 때문에 사람을 옥에 가두는 일을 하고 있더라는 거죠. 마침 이 상황을 주변에 있는 다른 사람들이 보고 그 주인에게 와서 보고를 합니다. 주인이 이야기를 듣고 분노하는 거죠. 이 주인이 분노하는 이유가 33절에 나옵니다. 마태복음 19:33
33 내가 너를 불쌍히 여김과 같이 너도 네 동료를 불쌍히 여김이 마땅하지 아니하냐 하고
“나는 너를 불쌍히 여겼는데 너는 어떻게 내 동료를 불쌍히 여기지 않을 수 있느냐?”라고 말하는 것 아닙니까? “네가 지금 어떤 은혜를 받고 어떤 용서를 받고 어떤 빚을 탕감받았는지를 안다면 너는 그렇게 행동하지 않을 텐데 네가 얼마나 큰 것을 용서받은 줄 안다면 너는 그런 방식으로 1,500만 원 빚진 자를 대하지 않았을 텐데, 내가 한 용서가 무엇인지 전혀 모르는 인간이구나”라고 하면서 분노하고 있습니다. 주인은 긍휼을 보여주었는데, 빚을 탕감받은 자는 정의를 보여주고 있는 것 아닙니까?
여러분, 팔복이 ‘천국’이라는 저세상 이야기로 시작한다고 말씀드렸죠? 우리가 얻은 천국은요. 이 세상의 것과 비교할 수 없는 일만 달란트를 탕감받은 것과 같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그래서 박지웅 목사님이라는 분이 이 ‘긍휼’이라고 하는 단어를 두고 ‘하나님의 바탕 마음’이라고 했습니다. 이 표현이 참 공감이 가더라고요. 이런 겁니다.
“하나님은 생각과 계획이 많으신데, 모든 생각과 계획에 가장 밑바닥에 있는 것이 무엇인가, 가장 바탕이 무엇이냐? 라고 물어보면 그건 하나님의 긍휼이다.”
여러분, 아시다시피 하나님이 화를 내실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어떠한 문제에 대해서는 칼같이 정확하게 끊으시는 때가 있습니다. 또 어떨 때는 용서할 때가 있습니다. 어떨 때는 불같이 찾아올 때가 있으시고요. 어떨 때는 한없이 받아줍니다. 그런데요. 그 모든 것들 바탕에 있는 것은 인간을 향한 긍휼이라는 것입니다.
제가 목회를 해가면서 다양한 사람을 많이 만나게 되잖아요? 누구나 다 장단점이 있고 강점과 약점이 있습니다. 그런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면 만날수록 그리고 하나님을 알면 알수록 ‘아~ 하나님의 바탕 마음은 긍휼이구나’라는 것이 더욱 진리로 다가오더라고요.
여러분,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의 기준에 합당할 수가 있습니까? 하나님이 긍휼이 아닌 정의의 잣대를 내미신다면 우리는 이 자리에 앉아 있을 수도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랑하는 독생자를 내어주시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셨는데, 그 크신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우리가 무엇으로 갚을 수 있을까요? 우리는 도무지 그분의 기준에 이를 수가 없습니다. 주님은 그냥 우리를 사랑하시기로 작정하신 거죠. 바탕이 그러시니까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마음이 바로 이것입니다. 하나님의 바탕 마음인 긍휼의 은혜를 받아서 죽을 수밖에 없는 자리에서 살아났다면 너도 누군가를 불쌍히 여기고 용서를 베풀고 이 조건이 없는 사랑을 행하라는 말씀 아닙니까?
물론 이 긍휼을 베푸는 삶은 결코 쉬운 게 아닙니다. 어떤 때는 옳고 그름을 따지는 게 더 쉬울 수 있습니다. 나에게 모욕을 주고 나를 해치려는 사람들을 끊어내는 것이 나를 더 편하게 만드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나와 비슷한 사람들과 어울리는 게 더 나을 수도 있습니다. 나에게 상처를 주거나 또 쉽게 상처를 받는 사람들과 살아가는 건 너무도 힘들고 어려운 일인 것 같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삶은 그런 편한 삶이 아닌 긍휼히 여기는 삶이더라는 것입니다. 누군가를 불쌍히 여기고 누군가를 용서하고 누군가를 조건 없이 사랑하는 삶을 우리에게 요구하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오늘도 긍휼이 바탕 마음이 되어 누군가를 섬기고 사랑하는 하나님의 백성을 찾고 계신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길 바랍니다.
그런 차원에서 우리가 긍휼과 관련해서 회복해야 할 두 가지의 것을 나누고자 하는데요.
먼저 첫 번째 우리가 회복해야 할 긍휼은 “힘의 원리가 아닌 공감의 능력”입니다.
“긍휼히 여기는”에 해당하는 헬라어 단어가 엘레에모네스(ἐλεήμονες)라고 했잖아요? 그런데 이것은 동사가 아니라 형용사입니다. 이게 무슨 말이냐면, 불쌍한 사람들에게 긍휼을 베푸는 ‘행동’보다 더 중요한 것은 불쌍한 사람들을 긍휼히 여기는 ‘마음’이라는 것입니다. 아까 ‘하나님의 바탕 마음’이라고 말씀드렸죠? 긍휼히 여기는 마음의 상태가 더 중요하다는 것 아닙니까? 그래서 주석가인 바클레이라는 분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긍휼은 다른 사람의 시각으로 그의 삶을 보는 것이다” 여러분, 이게 공감 능력 아닙니까?
누군가 어려운 일에 빠졌을 때 ‘내가 가서 도와야지’ 일만 달란트를 탕감받은 종이 백 데나리온의 빚을 진 사람을 향해 ‘아니, 그 빚 때문에 얼마나 마음고생이 많았냐고 나는 더 큰 빚을 탕감받았으니 당신의 빚도 없는 것으로 하자고“ 하는 것이 그가 했어야 할 공감 능력 아닙니까?
하워드 벤데웰이라는 분이 쓰신 「살며 사랑하며」 책이 있는데요. 제가 지금까지 봐 온 공감 능력을 가진 사람 중에서도 가장 탁월하게 공감 능력을 가진 아이를 이 책에서 만날 수 있습니다. 내용을 들어보세요.
예수님의 전 생애와 사역은 끊임없이 이어지는 긍휼의 행진이었다. 마태는 예수님이 복음의 굶주린 자들과 온갖 병에서 치유되기를 간절히 바라는 이들이 살던 팔레스타인의 모든 마을을 두루 다니셨다고 말해준다. 그리고 예수님은 무리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셨는데, 이는 그들이 목자 없는 양과 같이 고생하며 기진해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구절을 읽을 때마다 나는 운동장에 모여 함께 울던 아이들의 이야기가 떠오른다. 여기서 이제 가장 긍휼의 모습을 보여주었던 아이가 등장을 합니다.
아이들이 모인 한 가운데 한 남자아이가 아파서 몸을 웅크리고 있었는데, 선생님이 다가와 무슨 일이냐고 묻자, 한 어린 여자아이가 이렇게 답했다.
”지미(Jimmy)가 배가 아파서 우리도 배가 아파요.“
이 대목을 읽는데 울컥하는 거예요. 지금 한 아이가 운동장에서 배가 아파서 몸을 웅크리고 있으니까 선생님에게 하는 말이 ”지미가 배가 아파서 우리도 배가 아파요“ 여러분, 이게 공감 능력이에요. 여러분, 지미가 아플 때, 나도 아파야 공감이 일어나는 것 아닙니까?
저는 오늘 이 예배를 통해 저와 우리 성도님들의 긍휼이 회복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그런가하면 우리가 회복해야 할 긍휼 두 번째는, ”긍휼히 여기는 사람이 아닌 긍휼한 사람이 먼저 되기“입니다.
제가 이제 말씀을 준비하면서 알게 된 사실인데요. 한글 성경에서 ”긍휼히 여기다“라고 번역이 된 이 문장이 헬라어 원문과 영어 성경에는 다르게 번역이 되어 있다는 사실입니다.
헬라어 원문 성경에는 ”호이 엘레에모네스“라고 하고 영어로는 ”The merciful“이라고 해서 ’긍휼히 여기는 사람‘이 아니라 ’긍휼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새번역 성경에는 ’자비한 사람‘ 쉬운성경에는 ’자비로운 사람‘이라고 번역을 했습니다.
’긍휼히 여긴다‘고 할 때는 내가 누군가를 긍휼히 여기면 나도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이라는 결과론적으로만 접근할 수 있다는 것이죠. 그게 아니라 존재론적으로 이해를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내가 먼저 긍휼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자비로운 사람 스스로 긍휼한 마음을 가진 자가 긍휼한 행동을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누구도 쉽게 긍휼을 베풀만한 자격이나 능력이 있지 않습니다. 우리는 일만 달란트를 탕감시켜준 주인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종처럼 엄청난 빚을 탕감받은 것을 안다면 이런 기도가 나올 수밖에 없죠.
”주님, 제가 누군가를 긍휼히 여길 자격이 없는 사람입니다. 어쭙잖은 행위로 긍휼을 베풀기보다는 저의 존재부터가 긍휼한 사람, 자비로운 사람이 되길 원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무지 긍휼이 생기지 않을 때 어떻게 해야 할까요? 어떻게 해야 긍휼한 자가 될 수 있을까요? 마지막으로 이 부분을 나누고 말씀을 정리하고자 하는데요.
먼저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할 사실은, 긍휼의 부재는 하나님 은혜의 부재에서 온다는 사실입니다. 왜 경험하지 못할까요? 자신이 의인일 수도 있지만, 우리는 의인이 아니잖아요? 그러면 결국 죄인인데, 그 죄를 깨닫지 못해서 그렇습니다. 1만 달란트 탕감받은 것을 깨닫지 못하는 거예요. 비록 탕감받았을지라도 1만 달란트를 빚진 자였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되는 것이죠.
여러분, 긍휼의 은혜를 경험한 사람은 더욱 주님을 바라봐야 합니다. 주님을 보면 볼수록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이 나를 위해서 죽으셨으니까 그분을 보면 볼수록 우리의 죄가 보입니다. 주인을 볼수록 자신의 1만 달란트 탕감받은 게 보이는 거예요. 이것을 깨닫고 나면 그때부터 달라질 수밖에 없습니다.
바울은 갈라디아서 3장 13절을 통해 자신을 위해서 저주받아 죽은 예수님을 보았습니다. 그러면 이제 어떻게 해야 합니까? 복음에 참여하고 싶은데 자기가 할 수 있는 방법이 없으니까 그때 찾은 게 이방인이 보였던 것입니다. 그 백성들이 보여요. 그래서 그들을 향해서 살 수밖에 없었던 것이죠.
여러분, 이게 정말 중요합니다. 우리가 긍휼히 여기지 못하는 이유는,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지 못해서 그렇습니다. 긍휼을 어떻게 베풀 수 있냐고 저에게 물어보신다면, 그것은 아주 간단합니다. 주님께 더 가까이 가시면 돼요. 긍휼을 행하려는 노력보다 내가 먼저 긍휼한 사람이 되면 긍휼함이 흘러나오는 것입니다. 긍휼을 행하려고 하지 말고 더욱 주님께 집중하시길 바랍니다. 예수님의 은혜에 더 깊이 들어가시길 바랍니다.
에베소서 2장 3-5절 말씀
3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
4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합독] 5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는 은혜로 구원을 받은 것이라)
사랑하는 여러분, 긍휼을 베풀고 싶은데, 어렵기만 하십니까? 그렇다면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그리고 뭐라고요? ”너희는 은혜로 구원을 받은 것이라“ 십자가를 통하여 나를 구원해 주신 그 감격이 먼저 회복되시길 바랍니다.
그래서 베드로전서 2장 10절 (합독)
10 너희가 전에는 백성이 아니더니 이제는 하나님의 백성이요 전에는 긍휼을 얻지 못하였더니 이제는 긍휼을 얻은 자니라
“전에는“ ”이제는“ ”전에는“ ”이제는“ 이 긍휼이 많으신 분이 내게 베풀어 주신 긍휼이 회복이 될 때 긍휼을 흉내를 내는 자가 아니라, 긍휼한 자, 긍휼을 흘려보내는 존재가 될 줄로 믿습니다.
이런 은혜와 사랑이 오늘 예배를 드린 우리 모두에게 임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찬양 : 그 크신 하나님의 사랑
❙합심기도
여러분, 우리 이제 함께 기도하시는데요. 도무지 긍휼이 생기지 않으세요? 용서하고 싶고 긍휼히 여기고 싶은데 잘 안 되십니까? 내 안에 긍휼이 없어서가 아니에요. 이미 우리는 일만 달란트를 탕감받은 긍휼을 입은 사람들입니다. 그 크신 하나님의 사랑을 입은 사람들 아닙니까? 내 안에 하나님의 긍휼이 있습니다. 그 은혜가 회복되게 해달라고 기도하세요. 오늘 내 안에 용서하고 싶지 않은 이 마음이 깨뜨려지길 원합니다. 용서가 일어나고 불쌍한 이를 향한 눈물을 회복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이 시간 오늘 주신 말씀의 은혜를 기억하며 주님의 이름으로 한 번 크게 부르시고 함께 통성으로 기도하시겠습니다.
❙마침 기도
살아 계셔서 언제나 우리와 함께 하시는 아버지 하나님!
사랑하는 아내를 또 남편은 내 자식과 부모를 긍휼이라는 하나님의 바탕위에서 보길 원합니다. 나에게 해를 입히고 억울하게 만든 사람이 있다면 하나님의 긍휼을 우리에게 먼저 부어 주시옵소서.
지미가 배가 아파서 우리도 배가 아파요. 주님, 이 공감의 능력이 우리 안에 회복되길 원합니다. 교회 안에 연약한 자를 향한 긍휼의 마음을 주시고 무엇보다도 억지로 긍휼을 베푸는 그런 자들이 아닌, 더욱 주님께 집중하여서 내가 먼저 긍휼한 사람이 될 수 있도록 은혜 베풀어 주시옵소서. 모든 것을 주님께 맡겨드리며 사랑이 많으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축도
이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크신 사랑과 성령님의 교통하심이, 오늘 말씀으로 더욱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면서 공감의 능력을 가지고 긍휼한 자가 되기를 다짐하는 사랑하는 교우들 머리 머리 위에 지금부터 영원히 함께 계시기를 간절히 축원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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