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친 걸음을 다시 걷게하려면(빌 3:1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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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9999 ----
제목: 지친 걸음을 다시 걷게하려면
본문: 빌립보서 3:10-16
찬송: 273장 나 주를 멀리 떠났다
10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여함을 알고자 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11 어떻게 해서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
12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
13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14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
15 그러므로 누구든지 우리 온전히 이룬 자들은 이렇게 생각할지니 만일 어떤 일에 너희가 달리 생각하면 하나님이 이것도 너희에게 나타내시리라
16 오직 우리가 어디까지 이르렀든지 그대로 행할 것이라
1. 도입
우크라이나 전쟁에 관한 기사나 영상을 간혹 찾아볼 때가 있습니다.
전쟁이 지난 해 2월 24일경에 러시아의침략으로 시작되었는데 아직도 전쟁이 진행 중에 있습니다. 지금은 러시아의대공세를 버텨낸 우크라이나가 반격을 시작한지 수개월이 지나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러시아가 뿌린 지뢰밭, 장애물, 참호 등으로 인해 반격이 그리 쉽지만은 않다고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우크라이나 군인들과 국민들이 내 나라 내 땅을 찾기 위해 전쟁이 진행되고 있습니다.
전쟁 중인 영상을 보았는데 그 영상이 참 제게 인상 깊게 다가왔습니다.
참호에 들어가 있는 러시아 군인들과 그들을 무찌르기 위해 들어가고 있는 우크라이나 군인들의 영상이었습니다. 우크라이나 군인들이 그들을 자신의 나라에서 물리치기 위해서 공격하며 들어가는데, 총알이 날아와군인의어깨를 맞춰버렸습니다.
제 생각에는 아파서, 그리고 자신을 보호하려고 뒤로 물러설 것 같습니다.그런데 이 군인은 총알에 팔이 맞자마자 그 자리에서 지열 밴드로 팔을 고정시키고 다시 전투에 임하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결국 그 전투에서 우크라이나 군인들이 승리했습니다.
그 전투 영상을 보면서 제 마음에 한 가지 질문이 떠올랐습니다.
다친 그 병사가 지열밴드를 팔에 두르고 다시 전투에 임하는 그 모습을 보면서, 무엇이 이토록 그들을 전투에 임하게 할까? 무엇이 이들을 그 위험한 전투의 현장에서 물러서지 않게 할까? 제 안에 그런 질문이 떠올랐습니다.
여러분 무엇이 그들을 물러서지 않고 앞으로 나아가게 했을까요?
그리고 여전히 지뢰밭과 장애물과 목숨의 위협 속에서도 앞으로 나아가게 할까요?
사도 바울의 삶을 보면 우리는 동일한 질문이 떠오릅니다.
그는 예수님을 만난 이후로 한 번도 마음에 변심을 경험하지 않고, 한 번도 물러서지 않고 복음을 위한 삶을 살아갑니다. 그가 복음 대문에 겪은 어려움은 우크라이나 전쟁의 현장의 참혹함에 견주어도 작지 않게 생각됩니다. 바울이 겪은 고난에 대해서 잠시 살펴보면.
고린도후서 11장 23절에서 27절에 기록된 내용을 제가 읽어드리겠습니다.
23 그들이 그리스도의 일꾼이냐 정신 없는 말을 하거니와 나는 더욱 그러하도다 내가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하였으니 24 유대인들에게 사십에서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25 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 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고 일 주야를 깊은 바다에서 지냈으며 26 여러 번 여행하면서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 27 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
어떻게 사도바울은 이와 같은 고난을 겪으면서도 마치 지열밴드하는 붙이고 다시 전투에 임하는 군인처럼,그렇게 예수님의 복음을 위해 이토록 나아갈 수 있었을까요? 우크라이나 군인들이 내 나라 내 민족을 위하듯이, 바울에게도 내 나라 내 민족, 하나님의 나라와 복음을 위한 진실된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바울이 복음을 위해 살아갈 수 있었던, 그리고 복음을 위해 그 인생을 바치게 했던 그의 마음가짐은 무엇인지? 본문의 말씀을 중심으로 구체적으로 살펴보고자 합니다. 두 가지로 정리해 보겠습니다.
2. 본론
첫 번째 복음을 위해 살아갈 수 있었던 사도 바울은 마음 가짐은
‘잡은 줄로 여기지 않는 마음’입니다.
10절에서 13절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10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여함을 알고자 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11 어떻게 해서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
12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
13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아멘.
사도바울은 다메섹으로 가는 길에서 예수님을 만난 이후 예수님의 죽으심을 본받아 복음을 위해 살아갔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바라보며 죽은 자의 부활을 소망하며 살아갔습니다. 바울은 삶이 이 땅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믿는 자의 부활이 있음을 믿고 살아갔습니다.
그래서 그는 고린도전서 15장 19절에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19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바라는 것이 다만 이 세상의 삶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이리라
이 구절은 다시 쉬운 성경으로 읽어드리겠습니다.
19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소망하는 것이 이 세상 삶에 그친다면, 우리는 이 세상 어느 누구보다도 불쌍한 사람들일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그리스도 안에 소망하는 것이 이 세상뿐이면 우리는, 믿는 자들은 누구보다 불쌍한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면 그리스도인들이 불쌍하지 않은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리스도 안에서 소망하는 것이 이 땅에만 머물러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이 땅을 넘어 부활, 하나님 나라를 소망하며 살아갑니다.
사도바울은 그 부활을 바라보면 복음을 위해 수고하는 사도 바울은 또 이렇게 말합니다.
12절 말씀입니다. 함께 읽겠습니다.
12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
이 구절을 쉬운성경으로 다시 읽어드리겠습니다.
12 내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모습으로 이미 완성되었다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나는 아직 목표에 이르지 못했습니다. 나는 그 목표를 향해 열심히 달리고 있으며,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좇아가고 있습니다.
아멘.
사도 바울은 부활의 소망을 품고 달려가는데 어떤 모습으로 달려갑니까?
자신의 모습을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모습으로 이미 완성되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목표에 이르렀다고도 생각하지 않습니다.
목표를 위해 열심히 달리고 있으며 여전히 예수님을 향해 달려가고 있다고 말합니다.
사도바울은 그의 삶을 보며 누구에게든 자신의 삶이 복음으로 완성되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복음에 대한 이해가 깊어 성경을 썼고, 누구보다 헌신하고, 위험을 무릎쓰고 복음을 살아내고 있습니다. 누구에게든 자신의 삶이 완성된 것처럼 이야기해도 누구하나 뭐라고 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여전히 하나님이 원하시는 모습을 향해 달려가고 있다고 말합니다.
그는 ‘잡은 줄로 여기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앞으로 나아가며 여전히 복음을 살아낼 수 있었습니다.만약 그가 잡은 줄로 여겼다면 앞으로 나아갈 필요를 느끼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복음의 완성된 삶을 향해 나아가고 있습니다.
2002년 월드컵에서 우리나라 최초의 월드컵 4강을 이뤄낸 히딩크 감독은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나는 아직 배가 고프다”. 최초의 16강이라는 성적을 달성하고 난 뒤입니다. 이만해도 사람들에게 칭찬과 환호를 받기 충분합니다. 그런데 히딩크 감독은 “ 는 여전히 배가 고프다”말했습니다.
이 말을 바꿔 말해보면 “나는 아직 완성되지 않았다. 나는 아직 내가 원하는 꿈을 잡지 못했다”라는 말로 바꿔볼 수 있습니다. 그 말을 하고 히딩크 감독의 대한민국 축구팀은 8강을 넘어 4강에 오르게 되었습니다. 아직 잡은 줄로 여기지 않았기 때문에 올라갈 수 있었다고 생각됩니다.
여러분 우리도 마찬가지 아닐까요?
① 여러분 사도 바울은 아직 잡은 줄로 여기지 않았듯이, 우리도 아직 잡지 못한 것으로 여길 수 있다면, ② 그리고 사도 바울이 한 일 즉 뒤에 있는 일들을 잊어버렸듯이, 우리도 무엇인가 주를 위한 헌신과 수고가 있더라도 잊어버릴 수 있다면, 우리를 앞으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아직 이르지 않은 발걸음 뒤에 있는 것들은 잊어버리고, 아직 가벼운 발걸음으로 복음의 걸음을 걸어내시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길 소망합니다.
두 번째 복음을 위해 살아갈 수 있었던 사도 바울은 마음 가짐은
‘푯대를 향하는 마음’입니다.
14절에서 16절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저 한절 여러분 한절 읽겠습니다.
14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
15 그러므로 누구든지 우리 온전히 이룬 자들은 이렇게 생각할지니 만일 어떤 일에 너희가 달리 생각하면 하나님이 이것도 너희에게 나타내시리라
16 오직 우리가 어디까지 이르렀든지 그대로 행할 것이라
아멘.
14절 말씀을 다시 보시면,
사도 바울은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라고 말합니다.
사도바울은 복음의 삶을 어떻게 살아냅니까?
아직 잡은 줄로 여기지 않으며, 또 푯대를 바라보고 달려갑니다.
‘푯대’라는 말의 원어의 의미는 ‘목표’라는 의미가 있습니다.사도 바울은 목표지점은 정해놓고 그것을 바라보고 달려가고 있습니다. 그가 정해놓은 목표지점은 어디입니까?
‘예수그리스도’입니다.
10절 하반절에 “그리스도를 본받아”라고 말하는 것을 통해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가 정해놓은 또 다른 목표점은 무엇입니까?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 부활이 그의 목표점입니다. 또 어떤 목표점을 바라봅니까?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라간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그리스도, 부활, 부름의 상.
그는 티끌이 바람에 날리듯이 이리 흔들리고 저리 흔들이며 의식의 흐름 따라 삶을 살아가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을 만난 이후 분명한 목표점을 두고 살아갔습니다. 아니 예수님을 만나니 그 안에 분명한 목표점이 생겼습니다. 예수그리스도, 부활, 부름의 상.
세상은 향방 없는 달음질을 합니다. 왜입니까? 그들에게 분명한 푯대가 없기 때문입니다.
분명한 목표점이 없고 또 각자가 원하는 것을 목표점이라고 생각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발걸음은 향방 없는 발걸음이고, 방황하는 발걸음입니다.
여러분 사도 바울에게는 분명한 목표점이 있었습니다.
어떻게 목표점이 생겼습니까?
그리스도를 만나고 나니 이와 같이 목표점이 생깁니다.예수그리스도, 부활, 부름의 상.
복음 안에서 동일하게 우리에게 주어지는 목표점입니다.
다만 그것을 외면하는가 아니면 그것을 직시하고 내 목표점으로 받아들이는가의 차이가 있을뿐입니다. 사도 바울은 분명한 목표점을 내 것으로 받아들이며 살아갔습니다.
여러분 우리에게 목표점은 무엇입니까?
사도바울이 자신의 전 생애를 드려도 후회하지 않는 것처럼, 우리도 우리의 전생애를 드려도 후회하지 않을 목표점이 있으신가요?
여러분은 예수그리스도를 우리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예수그리스도의 생애와 십자가와 부활을 어떤 마음으로 대하시면 살아가십니까?
우리가 그것을 고민하고 다시 붙잡을 때에 우리는 복음의 걸음을 살아낼 것입니다.
분명한 목표점 “예수 그리스도”를 향해 나아가시는 저와 여러분이 축복된 삶이 되시길 소망합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