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배는 기억하는 것!

에스라 강해  •  Sermon  •  Submitted   •  Presen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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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스라 6:13–22 (NKRV)
13 다리오 왕의 조서가 내리매 유브라데 강 건너편 총독 닷드내와 스달보스내와 그들의 동관들이 신속히 준행하니라
14 유다 사람의 장로들이 선지자 학개와 잇도의 손자 스가랴의 권면을 따랐으므로 성전 건축하는 일이 형통한지라 이스라엘 하나님의 명령과 바사 왕 고레스와 다리오와 아닥사스다의 조서를 따라 성전을 건축하며 일을 끝내되
15 다리오 왕 제육년 아달월 삼일에 성전 일을 끝내니라
16 이스라엘 자손과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과 기타 사로잡혔던 자의 자손이 즐거이 하나님의 성전 봉헌식을 행하니
17 하나님의 성전 봉헌식을 행할 때에 수소 백 마리와 숫양 이백 마리와 어린 양 사백 마리를 드리고 또 이스라엘 지파의 수를 따라 숫염소 열두 마리로 이스라엘 전체를 위하여 속죄제를 드리고
18 제사장을 그 분반대로, 레위 사람을 그 순차대로 세워 예루살렘에서 하나님을 섬기게 하되 모세의 책에 기록된 대로 하게 하니라
19 사로잡혔던 자의 자손이 첫째 달 십사일에 유월절을 지키되
20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이 일제히 몸을 정결하게 하여 다 정결하매 사로잡혔던 자들의 모든 자손과 자기 형제 제사장들과 자기를 위하여 유월절 양을 잡으니
21 사로잡혔다가 돌아온 이스라엘 자손과 자기 땅에 사는 이방 사람의 더러운 것으로부터 스스로를 구별한 모든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속하여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를 찾는 자들이 다 먹고
22 즐거움으로 이레 동안 무교절을 지켰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그들을 즐겁게 하시고 또 앗수르 왕의 마음을 그들에게로 돌려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신 하나님의 성전 건축하는 손을 힘 있게 하도록 하셨음이었더라

서론

설 연휴가 길어서 감사하게도 월요일에 강원도를 좀 하루 다녀왔습니다.
월요일에 강원도를 가서 양양, 속초에 잠시 바람도 쐬고, 맛있는 것도 먹고 하는 좋은 시간을 보냈습니다.
그 전에 강원도를 몇번 갔었지만 이번에는 낙산사라고 하는 절을 처음 가게 되었습니다.
우리나라 절은 또 종교를 떠나서 우리나라의 문화가 담겨있는 곳이잖아요?
낙산사라는 곳이 또 그 산 위에서 바다도 보이는 절이라 경치도 상당히 좋더라고요.
그런데 그 낙산사를 가서 느꼈던 것은 “사람들이 바라는 소원이 참 많구나!” 였습니다.
왜 그렇게 느꼈냐면, 제가 사진을 몇 장 찍었습니다.
이 사진을 한번 보십쇼. 이게 절에 길 옆으로 있는 담장같은 곳에 사람들이 쌓은 작은 돌탑들입니다.
이 돌탑들을 쌓는 의미는 이걸 쌓으면서 소원을 빌잖아요? 이걸 보면서 정말 소원들이 많구나. 이곳에 오는 그 많은 사람들 중에서 소원이 없는 사람이 거의 없겠구나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이 사진을 한번 보세요. 해수관음상이라고 하는 유명한 불상입니다.
이 상에서 저희가 그곳에 있는 그 잠깐 시간 동안 이 상 앞에 절을 하고 돌아가시는 것을 봤습니다.
정말 간절히 절을 하시더라고요. 그게 참 마음에 있는 소원을 간절하게 빌면서 절하는 것이지 않습니까?
제가 이걸 얘기하는 이유는 이 불교라는 종교를 비난하기 위해서 하는 것이 아닙니다.
불교뿐만 아니라 세상 그 많은 종교들이 바로 이렇게 자신이 바라는 소원, 소망을 품고 종교생활을 하는 것이죠.
특별히 내면의 평화, 혹은 간절히 바라는 무언가 가족의 건강, 부의 축적 등 이런 것들을 바라며 절을 한다거나, 나름의 그 종교에서의 숭배 행위를 합니다.
그런데 기독교의 예배와 이런 종교의 숭배 행위와 무슨 차이가 있을까요?
이 둘 사이에 분명히 차이가 있어야만 한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드리는 예배는 참된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잖아요? 다른 종교의 신은 우상이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죠.
그런데 무엇이 다를까요?
저는 이 둘 사이의 가장 큰 차이점은 바로 기독교의 예배는 “기억하는 것”에서 시작한다는 점입니다.
세상 수많은 종교들은 내가 더 바라는 것들, 미래의 더 얻을 것들을 간절히 소망합니다.
기독교의 예배도 물론 우리가 바라고, 얻을 것들을 소망하며 기도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기독교의 예배의 시작은 바로 “기억하는 것”에서 시작합니다.
하나님을 기억하고, 이미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하신 일들을 기억하기 때문에 하나님을 예배하죠.
다른 종교들은 미래에 바라는 것들이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 확실하면 그 신을 숭배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기독교의 하나님은 이미 우리에게 하신 구원의 그 은혜를 기억해서 예배가 시작되는 것입니다.
만약 이미 하신 하나님의 그 사역과 구원의 은혜를 먼저 기억하는 것이 선행되지 않는다면, 우리가 드리는 예배의 의미는 심각하게 훼손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구체적으로 우리의 예배에서 무엇을 기억해야할까요? 그 대답은 바로 오늘 본문이 말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이제 수많은 바사 왕국의 신하들의 방해와 반대에도 불구하고, 결국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도우셔서 포로 귀환 이후 성전을 짓고 난 후 벌어진 일입니다.
이제 포로 귀환한 유대인들은 성전을 다 지었습니다.
그들이 성전을 다 짓고 난 이후에 한 일은 바로 “제사”와 “절기”를 준행하는 것이었습니다.
구약의 제사가 지금의 우리가 드리는 예배와 1:1로 딱 매칭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 형식과 의미에 다소 차이는 있으나, 제사의 대상과 정신은 확실히 지금의 예배와 같죠.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오늘 본문을 우리의 예배가 변질되기 않기 위한 본문으로 볼 수 있습니다.

본론

1. 예배는 하나님의 말씀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 본문을 통해서 알 수 있는 중요한 사실은 유대인들이 성전을 짓고난 이후 “하나님의 말씀대로” 제사를 드리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1) “권면을 따랐으므로 성전 건축하는 일이 형통한지라”, “모세의 책에 기록된 대로 하게 하니라”
에스라 6:14 (NKRV)
14 유다 사람의 장로들이 선지자 학개와 잇도의 손자 스가랴의 권면을 따랐으므로 성전 건축하는 일이 형통한지라 이스라엘 하나님의 명령과 바사 왕 고레스와 다리오와 아닥사스다의 조서를 따라 성전을 건축하며 일을 끝내되
선지자 학개와 잇도의 손자 스가랴는 포로 귀환한 유대인들의 영적인 리더였습니다.
선지자 학개는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는 자였으며, 스가랴는 남유다 왕들의 혈족을 이은 당시 유대인들의 총독이었습니다.
선지자는 구약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고, 왕은 하나님의 통치를 맡아서 하는 자였습니다.
그들이 하는 권면을 유대인들이 장로들을 필두로 그대로 순종하고 있는 거죠.
놀라운 사실은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는 자들의 통치에 따라 성전을 건축했을 때 건축하는 일이 어땠다고 말합니까?
“형통했다”라고 말합니다.
당시 유대인들이 바사 왕국의 신하들에 의해서 방해를 받았을 때, 16년간 성전 공사가 중단되었었습니다.
그런데 이 성전 공사를 지금 하나님의 말씀을 받들고 순종하는 자들에게 형통하게 진행되고 있지 않습니까?
이게 얼마만에 끝나냐면요.
에스라 6:15 (NKRV)
15 다리오 왕 제육년 아달월 삼일에 성전 일을 끝내니라
다리오 왕 제육년에 끝냈다고 말합니다.
이게 언제 시작되었냐면
에스라 4:24 (NKRV)
24 이에 예루살렘에서 하나님의 성전 공사가 바사 왕 다리오 제이년까지 중단되니라
다리오 제이년까지 중단됐다가 다시 시작된 겁니다.
그러면 몇년만에 끝났어요? 4년만에 끝났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성전 공사를 합니다. 그러니까 물론 그전에 방해를 받고 16년간 중단되었었지만 이제 4년 만에 하나님의 성전이 지어집니다.
놀라운 영광의 순간이죠.
그런데 이 가운데 가장 아름다운 현장의 모습은 무엇인지 아십니까?
한번 상상해보십쇼.
그 많은 유대인들 가운데 장로들이 있습니다. 그 장로들을 필두로 실제로 현장에서 성전을 짓게 될 겁니다.
그 가운데 자신들의 뜻대로 하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고 말씀대로 통치하는 선지자와 총독의 말을 듣고 순종하면서 일사분란하게 성전을 공사하는 겁니다.
이것이 얼마나 아름다운 일인가요? 하나님의 백성들이 움직이는 원동력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성전이 완공되고 나서 제사를 드리는데 여기서도 한번 보기 바랍니다.
에스라 6:18 (NKRV)
18 제사장을 그 분반대로, 레위 사람을 그 순차대로 세워 예루살렘에서 하나님을 섬기게 하되 모세의 책에 기록된 대로 하게 하니라
제사를 어떻게 드리나면, 모세의 책에 기록된 대로 하게 합니다.
모세의 책은 구약 성경의 모세오경을 말하겠죠. 구약 성경 말씀에 기록된 대로 하나님을 섬깁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성전을 공사하고, 그 끝에 제사까지 하나님의 말씀대로 그대로 제사 드립니다.
하나님의 성전이 공사되는 가운데 벌어지는 실로 아름다운 광경이죠.
적용)
성도 여러분 우리의 예배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기억하지 않는 예배는 세상의 우상들에게 드려지는 제사와 같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기억하지 않는 예배는 본질적으로 세상의 우상들에게 드리는 제사와 다를 것이 없습니다.
제가 신대원 마지막 학기에 들었던 예배학 과목에서 다니엘 블록이라고 하는 학자가 예배에 대해서 정의내리는 문장이 상당히 와닿는 부분인데요.
Daniel Block의 정의
“참된 예배는 주권자이신 하나님 앞에서 인간이 그분의 계시(말씀)에 대한 응답으로 ...... (드리는) 모든 경배 활동을 가리킨다.”
인간이 하나님의 계시 말씀에 대한 응답으로 드리는 경배 활동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은 이미 우리에게 다 주어졌고, 선포되고 있죠.
하나님의 말씀을 기억해서 그것에 응답하여 드리는 것이 바로 기독교의 올바른 예배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가 우리의 예배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기억하기 원합니다.
물론 예배 중에 말씀을 듣죠. 또 새롭게 알게 되는 것들이 있죠. 그런데 그 전에 하나님께서 이미 우리에게 말씀하셨던 것들을 기억하고, 그것을 통해 예배드리기 바랍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우리의 삶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채워야합니다. 주일에만 와서 예배만 떨렁 드린다고 그게 예배가 아니에요.
우리가 예배 드릴 때 하나님의 말씀을 기억하려면 주일뿐만 아니라 우리의 모든 삶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채워야겠죠.
읽고, 묵상하고, 실천하고 그러다가 주일 예배에 우리가 왔을 때 우리에게 들리고, 우리가 따랐던 그 말씀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그게 참된 예배의 기초인 것입니다.

2. 예배는 이미 구원하신 하나님을 기억하는 것이다.

두번째로 우리가 예배에서 기억해야 할 것은 “이미 구원하신 하나님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미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을 기억합니다.
사실 세상의 다른 종교인들의 제사는 아직 자신들에게 오지 않은 구원을 간절히 바라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자신이 간절히 바라는 그 무언가가 자신을 진정으로 행복하고, 구원해줄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이 돈을 간절히 바라고, 안정감을 간절히 바라고, 대학 합격을 간절히 바랍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것들이 그들의 삶을 간절히 바랄 것이라고 믿기 때문이죠.
그래서 그것을 위해서 일종의 종교 숭배 행위를 합니다.
그러나 기독교의 예배는 어떤 것일까요? “이미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미 우리의 삶 전체를 구원받았습니다. 모든 문제의 근원이었던 죄를 해결받고, 이제 그 죄가 우리에게 주는 모든 한계들로부터 승리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미 죄로부터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을 우리의 예배에서 기억해야 합니다.
1) 유월절의 의미 : 출애굽을 기억함
에스라 6:19 (NKRV)
19 사로잡혔던 자의 자손이 첫째 달 십사일에 유월절을 지키되
오늘 본문에서 유대인들은 어떻게 구원하신 하나님을 기억하였습니까?
그들이 절기를 통해서 기억합니다. 그 절기는 바로 “유월절”입니다.
유월절은 어떤 날입니까? 유대인들은 그들의 문화와 역사 속에서 유월절을 절대로 잊을 수가 없습니다.
유월절은 애굽에 노예였던 이스라엘이 비로소 풀려난 날입니다.
하나님께서 심판의 재앙 가운데서도 선택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을 살리시고, 구원하신 날을 기념하는 절기죠.
오늘 성전 공사 완료 이후 유월절을 지키는 것은 과거의 이스라엘을 애굽으로부터 구원하셨던 하나님을 기억하는 행위입니다.
그들의 선조들이 하나님께 받은 구원의 은혜를 기억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자신들을 구원하신 하나님을 또 기억하는 절기가 됩니다.
에스라 6:21–22 (NKRV)
21 사로잡혔다가 돌아온 이스라엘 자손과 자기 땅에 사는 이방 사람의 더러운 것으로부터 스스로를 구별한 모든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속하여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를 찾는 자들이 다 먹고
22 즐거움으로 이레 동안 무교절을 지켰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그들을 즐겁게 하시고 또 앗수르 왕의 마음을 그들에게로 돌려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신 하나님의 성전 건축하는 손을 힘 있게 하도록 하셨음이었더라
과거의 선조들과 같이 이들 또한 바벨론의 포로되어 노예로 살게 됐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어떤 분이셨습니까?
사실 하나님이 바벨론에게 포로로 잡혀가게 한 이유는 유대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다시 포로로부터 귀환시키십니다.
그들은 사로잡혔던 자들이었으나, 다시 돌아오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구원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출애굽과 같은 의미입니다.
그 유대인들은 바로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를 찾는 자들”입니다. 구원하신 하나님을 찾고 기억하는 자들이었습니다.
과거의 선조들의 출애굽 사건이 자신들의 출애굽 사건이 된 것입니다.
구원의 사건이 나 말고 다른 사람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라 정말 이제 내가 경험한 사건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제 선조들의 출애굽 사건을 기억하면서, 유월절을 지키고, 그러면서 선조들을 구원하신 하나님이 나를 구원하셨고 그 구원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적용)
여러분 . 우리의 예배가 살아있는 예배, 세상의 우상들에게 드리는 예배와 다른 예배가 되기 위해서 우리는 다른 사람이 아니라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을 기억해야 합니다.
예배는 내 옆에 있는 사람이 아니라, 혹은 불특정 다수 나와는 상관없는 사람이 아니라 바로 여기 이 자리에 있는 “나”를 구원하신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예배가 종종 다른 사람을 구원하신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처럼 될 때가 있습니다.
예배는 드림에도 불구하고, 그 마음 속에 기쁨과 감사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다른 사람 구원하신 것을 알기 때문이죠.
여러분 우리가 예배 드릴 때 정말 중요한 것은 바로 “나를 구원하신 하나님”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과거의 이스라엘을 출애굽 시키시고, 포로 시기 때 이스라엘을 다시 귀환시키신 그 사건이 나의 사건이 되게 하신 분입니다.
그 구원의 사건이 과거에만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닙니다. 현재를 살아가는 나에게도 적용이 되는 사건이라는 겁니다.
우리의 예배에는 나를 구원하신 그 하나님을 기억해야만 합니다.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은 “나”를 구원하셨거든요.
그래서 우리의 예배에서 “나”를 구원하신 하나님을 기억하게 된다면 우리의 예배에서 감사와 기쁨이 없을 수가 없습니다.
이미 “나”를 구원하신 그 하나님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결론

말씀을 맺겠습니다.
우리는 오늘 본문 안에서 세상의 우상들에게 절하는 그 예배와 우리가 드리는 예배가 어떻게 다른지 살펴보았습니다.
기독교의 예배의 본질은 바로 “기억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기억하고, 구원하신 하나님을 기억합니다.
“기억한다는 것”은 “이미 무언가 일어났다는 것”을 전제합니다.
우리가 예배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기억하고, 구원하신 하나님을 기억한다는 것은 곧 무슨 말입니까?
이미 말씀이 선포되었고, 이미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셨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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