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비하신 복을 누리는 비결은 이것뿐입니다

열왕기상  •  Sermon  •  Submitted   •  Presen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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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비하신 복을 누리는 비결은 이것뿐입니다
[서론]
여러분들에게 신앙의 모멘텀은 언제입니까?
제게 있어 신앙의 모멘텀이 언제였냐고 물으신다면 저는 이렇게 말하겠습니다.
제가 처음 대학교때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난 일이 첫번째 모멘텀이었습니다.
그리고 두번째 모멘텀은 제가 다닌 신학교에서 아침마다 묵상하며 하나님을 경험했던 일입니다.
제가 묵상을 통해 하나님을 만날수 있었던 비결이 무엇일까요?
묵상의 비밀은 단 하나, 순종에 있습니다.
묵상은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을 깨닫는 일입니다.
그러나 그 뜻을 알고도 순종하지 않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오늘 주신 말씀이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라고 믿고 그것을 순종할때 기적은 일어납니다.
저는 묵상하며 많은 기적들을 경험했습니다.
그렇다고 엄청난 기도응답이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 무엇보다도 말할수없는 기쁨과 평안을 경험했습니다.
하루에 1시간씩 기도하지 않아도, 성경을 한 시간씩 읽지 않아도, 선교를 가지 않더라도 하나님은 우리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십니다.
날마다 묵상하는 단 몇 줄의 말씀을 통해서도 우리는 하나님을 만날수 있습니다.
그러나 순종이 없다면 그런 경험은 불가능합니다.
저는 오늘 말씀을 보며 우리가 다시 한번더 순종의 중요성을 깨닫게 되기를 원합니다.
[본론]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이렇게 말하곤 합니다.
자신은 언제나 순종하고 싶은데 하나님이 자신에게 말씀하시지 않는다고 말입니다.
만약 하나님의 목소리를 직접 듣고 싶은 것이라면 그는 절대 들을수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직접 음성으로 말씀하시는 경우는 거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저는 하나님이 언제나 우리에게 말씀하신다고 자신있게 말할수 있습니다.
우리의 마음 속에 계신 성령이 우리에게 하나님의 뜻을 깨닫게 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자신의 뜻을 알려주시는 이유는 우리가 순종하기를 바라시기 때문입니다.
순종할때 하나님의 예비하신 복은 우리의 것이 됩니다.
그런데 왜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잘 깨닫지 못하는 것일까요?
무엇보다도 우리의 욕망이 들을수 있는 우리의 귀를 막고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말씀에는 그런 대표적인 인물 한 명이 등장합니다.
바로 여로보암입니다.
하나님은 솔로몬왕이 저지른 우상숭배의 죄때문에 이스라엘을 남과 북으로 가르셨습니다.
그리고 북 이스라엘의 왕으로 세운 사람이 바로 여로보암입니다.
하나님은 다윗왕과 솔로몬왕에게 하신 것처럼 여로보암왕에게도 약속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며 나아갈때 그의 왕위를 견고히 지켜주시겠다고 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하나님의 약속을 신뢰하지 못하고 자기 마음대로 일을 저지르고 맙니다.
여로보암은 북이스라엘의 남쪽과 북쪽 끝인 베델과 단에 산당을 세웁니다.
그리고 그곳에 금송아지를 두고 하나님이라고 부르며 사람들에게 제사드리게 합니다.
이스라엘의 절기 날짜도 바꾸고, 제사장도 자기 마음대로 세워버립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주신 율법을 완전히 어기는 것입니다.
지금으로 따지면 거의 기독교 이단, 사이비를 만들어버린 것입니다.
이대로 내버려두면 남과 북 이스라엘은 왕만 다른게 아니라 신앙도 완전히 다른 나라가 되어버리고 맙니다.
이것은 하나님 나라가 위기에 처했다고 말할수 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 나라를 위협하는 가장 큰 적은 우리의 불신앙과 불순종입니다.
그렇다면 여로보암이 이렇게 변질된 이유가 무엇일까요?
간단히 말해서 그의 욕심과 두려움때문입니다.
욕심과 두려움은 동전의 양면과 같습니다.
욕심이 커지면 그것을 지키기 위해 두려움도 커지기 마련입니다.
여로보암은 어떻게든 자자손손 왕의 자리를 유지하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혹시라도 그 자리를 빼앗길까봐 두려웠던 것입니다.
그것을 어떻게든 지키려다보니 우상숭배라는 방법까지 생각해낸 것입니다.
생각해보십시오.
북이스라엘에는 산당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남유다에는 솔로몬이 지은 웅장하고 화려한 예루살렘 성전이 있습니다.
성전때문에 북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이 다시 흔들리면 어떡합니까?
성전때문에 백성들의 마음이 다시 남유다쪽으로 향하게 될까봐 그는 두려웠던 것입니다.
이처럼 욕망과 두려움은 불순종을 낳고, 결국 하나님을 우상으로 변질시켜 버립니다.
우리의 신앙은 어떻습니까?
하나님이라고 부른다고 해서 다 하나님인 것은 아닙니다.
내가 부르는 하나님이 내가 만든 신, 우상일수 있습니다.
내 욕망에 따라 내 마음대로 만든 금송아지 하나님이 될수 있습니다.
그래서 같은 하나님을 믿는데도 전혀 다른 모습의 크리스천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저는 세상 사람들보다 더 욕심많고, 더 이기적인 크리스천들을 많이 보았습니다.
그들이 믿는 하나님은 분명 내가 믿는 하나님과 달라 보였습니다.
이처럼 왜곡되고 과도한 욕망은 불순종을 낳고, 우리의 신앙을 우상숭배로 변질시켜 버립니다.
그럼 우리는 이러한 죄의 욕망을 어떻게 다루어야 할까요?
날뛰는 죄의 욕망이 쉽게 잠잠해 지던가요?
내 속에서 날뛰는 죄의 욕망을 제어하는 과정은 단번에 일어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계속해서 내 속의 영적 전쟁을 통해 나를 제어하며 순종을 배워나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순종할 기회가 무한정 주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순종할 기회를 자꾸 무시하면 시간이 갈수록 우리의 마음은 더욱 딱딱해지고 무뎌지기 때문입니다.
마음에 고집이 깊이 뿌리내리면 다루기 힘들어집니다.
그 사람이 바로 여로보암 입니다.
하나님은 무명의 젊은 예언자 한 사람을 보내 여로보암에게 경고장을 날리십니다.
그 예언자는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해 북이스라엘의 베델로 건너갑니다.
그곳에서 금송아지를 하나님이라고 부르며 제사드리려는 여로보암을 만납니다.
그 예언자는 여로보암왕 앞에 서서 담대하게 하나님의 심판을 선포합니다.
그의 선포는 이렇습니다.
300년 후에 요시야왕이 등장하여 산당의 제사장들을 모두 제단에서 태워 죽일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 말은 너의 신앙은 거짓이기에 하나님의 심판받을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이 그의 제사를 받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심지어 하나님은 무뎌지고 딱딱해진 여로보암의 마음을 바꾸시기 위해 자신의 심판이 반드시 일어날 것이라는 징표까지 보여주십니다.
먼저 아무 손도 대지 않았는데 제단이 갈라지고 그 위에 재가 쏟아지게 하십니다.
또한 여로보암의 손이 마비되었다가 예언자의 기도로 다시 회복되는 일도 일어납니다.
이런 기적을 경험한다면 어떻게 반응해야 할까요?
당연히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돌이켜 불순종을 그쳐야합니다.
그런데 그는 오히려 예언자를 붙잡아 회유하려고 합니다.
예언자에게 자기 궁에서 식사도 대접하고 선물도 주겠다며 그를 붙잡아두려고 합니다.
그가 전한 심판을 돌이키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언자는 단호히 여로보암의 요청을 거절합니다.
하나님이 예언자에게 미리 명령하신바가 있기 때문입니다.
예언자는 밥도 얻어 먹어서는 안되고, 물도 얻어 마시면 안됩니다.
또한 왔던 길로 다시 되돌아가지 말아야 합니다.
그래서 그는 여로보암의 제안을 거부하고 다시 유다로 돌아갑니다.
이것이 13장 1-10절까지의 내용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야기는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또 하나의 사건을 통해 여로보암의 회개를 촉구하십니다.
11절부터 갑자기 베델에 사는 늙은 예언자 한 사람이 등장합니다.
그는 그의 아들들을 통해 젊은 예언자가 여로보암왕에게 한 모든 말과 행동들을 알게 됩니다.
그러자 그는 그 즉시 젊은 예언자를 쫓아가 그를 만나려 합니다.
아마도 이 늙은 예언자는 여로보암을 지지하는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 이야기를 읽을때 기억해야할 점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예언자에게 말씀하신 명령입니다.
음식 얻어먹지 마라, 물 얻어먹지 마라, 왔던 길로 돌아가지마라 입니다.
하나님이 왜 이런 요상한 명령을 내리신 것일까요?
먼길을 왔는데 심판도 여로보암왕에게 선포했으니까 음식이나 물 좀 얻어먹는게 뭐 그리 큰 문제일까요?
또, 왔던 길로 다시 돌아가면 훨씬 안전하고 빠를텐데 말입니다.
아마도 하나님은 예언자의 행동을 통해 어떤 메시지를 전달하시는것 같습니다.
예언자의 행동을 통해 순종에는 타협의 여지가 있어서는 안된다는 것을 보여주고자 하신 것입니다.
음식과 물을 예언자가 얻어먹으면 마음에 틈이 생겨 타협할 여지가 일어납니다.
그래서 예언자는 자신의 삶과 행동으로도 분명한 하나님의 뜻을 전달해야만 합니다.
이러한 예언자의 단호한 행동은 신앙을 타협하여 불순종의 길을 간 여로보암에게 하나의 경고가 되었을 것입니다.
그럼 오던 길로 다시 돌아가지 말라는 것은 어떤 의도일까요?
이 부분은 여기서 가장 많이 반복되는 단어를 보면 알수 있습니다.
이 이야기에서 가장 많이 나오는 단어는 ‘돌아가다’입니다.
16,17,18,19,20,22 등등 계속 나옵니다.
그런데 이 단어가 33절에서도 사용되고 있다는 점을 주목해야 합니다.
‘여로보암은 여전히 그 악한 길에서 돌아서지 아니하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여로보암이 걷던 죄의 길에서 돌이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는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예언자에게 왔던 길로 다시 되돌아가지 말라고 하신 것은 여로보암에게 지금까지 걸어왔던 죄악의 길로 다시 돌아가지 말라는 메시지를 전달하시려는 것입니다.
이처럼 예언자는 말뿐만 아니라 행동으로도 하나님의 뜻을 전해야 합니다.
그러나 아쉽게도 이 젊은 예언자는 끝까지 하나님의 명령을 지키지 못합니다.
그 역시 불순종의 길을 가게 된 것입니다.
그는 베델의 늙은 예언자의 거짓말에 속아 넘어가고 맙니다.
처음에는 늙은 예언자가 집으로 가자고 하자 거절했습니다.
그런데 늙은 예언자가 이렇게 말하자 넘어가고 말았습니다.
18절입니다.
“나도 그대와 같은 예언자요. 주님께서 천사를 보내셔서, 나에게 말씀하시기를, 그대를 내 집으로 데리고 가서, 밥도 대접하고 마실 물도 대접하라고 하셨소.”
늙은 예언자는 자신도 예언자고 하나님이 천사를 통해 대접하라고 들었다는 거짓말을 합니다.
그는 천연덕스럽게 주님의 이름까지 팔아가며 거짓말을 한 것입니다.
이것은 그가 주님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북이스라엘의 신앙이 얼마나 타락했는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우리 역시 그리스도인으로서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면 그 신앙은 이미 타락한 것입니다.
이처럼 늙은 예언자의 노련한 거짓말에 젊은 예언자는 속아 넘어가고 맙니다.
여로보암왕의 요청도 거절했고, 늙은 예언자의 첫번째 요청도 거절했는데 왜 이번만큼은 거절하지 못한 것일까요?
심판 예언을 여로보암왕에게 전달하라는 큰 명령은 잘 순종했습니다.
왕앞에서 목숨까지 걸어야 하는 위험천만한 일인데도 그는 용감하게 순종했습니다.
그런데 어찌보면 작은 명령인 먹고, 마시지 말라는 명령은 왜 순종하지 못했을까요?
순종할거 끝까지 순종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순종은 온전한 순종이기 때문입니다.
겉으로보면 그는 늙은 예언자의 소속과 경력에 속은 것입니다.
같은 예언자인데 자기보다 훨씬 경력이 앞서니 그의 말을 쉽게 받아 들인 것입니다.
만약 제게 40년 넘게 목회하신 어떤 목사님이 하나님의 뜻이라며 간곡히 부탁하신다면 어떨까요?
저 역시 깜빡 속을수 있습니다.
이러한 일은 우리 주변에서도 많이 일어납니다.
자기도 그리스도인이고, 장로라면서 사기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꿈이나 환상으로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면서 남을 속이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저는 어떤 의사 집사님에게 이런 이야기를 들은적이 있습니다.
어느날 같은 교회 다니는 어떤 형제분이 병원에 찾아왔더랍니다.
그래서 왜 오셨냐고 했더니 대뜸 돈을 빌려달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집사님이 왜 저한테 돈을 빌리러 오셨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그가 하는 말이 꿈에서 하나님이 알려주셨다는 것입니다.
믿어야 하는 것일까요? 아니면 믿지 말아야 하는 것일까요?
순종을 하더라도 먼저 영적 분별력이 필요합니다.
자신이 직접 하나님의 뜻을 분별할줄 알아야 합니다.
그러한 분별력은 하나님의 말씀을 날마다 묵상하는자에게 주어지는 것입니다.
만약 젊은 예언자가 늙은 예언자의 말을 듣고 먼저 하나님께 여쭤보았다면 어땠을까요?
충분히 그는 하나님의 뜻을 분별했을 것입니다.
명령하신 하나님의 뜻을 분명히 알았다면 그는 절대 속지 않았을 것입니다.
부분적인 순종, 하다만 순종은 불순종과 같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분별할줄 알아야 온전히 순종할수 있습니다.
그러나 젊은 예언자가 속아 넘어간 근본적인 이유는 따로 있습니다.
그것은 그의 마음에 벌써 빈틈이 생겼기 때문입니다.
그는 이미 용감하게 여로보암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했습니다.
중요하고 큰 명령을 하나 순종한 것입니다.
그러다보니 마음이 어느새 느슨해지고 빈틈이 생긴 것입니다.
또한 육체적으로도 많이 피곤하고 배도 고프니 방심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가 넘어지게된 근본적인 이유는 늙은 예언자의 거짓말에 속았기 때문이 아니라 그는 이미 자기 자신에게 속고 있었던 것입니다.
마치 이번 항저우 올림픽에서 롤로스케이트 선수가 방심해서 금메달을 놓친것과 같습니다.
실컷 힘든 코스랑 다 넘어가고 나서 마지막 한순간 방심해서 그는 많은 것을 놓치고 말았습니다.
축구도 한골 먼저 넣고나서가 가장 위험한 법입니다.
이처럼 사탄은 우리가 큰 일이라고 여기는 일을 마칠때 우리를 노립니다.
우리의 마음이 느슨해지고 빈 틈이 생기기 쉽다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마귀는 우리가 순종하는 것을 싫어합니다.
그래서 우리의 연약한 마음의 틈을 공격하여 우리를 불순종의 길로 들어서게 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온전히 순종하기 위해서는 유혹을 이겨내야만 합니다.
그럼 늙은 예언자는 왜 거짓말을 하면서까지 젊은 예언자를 속이려 했을까요?
그는 아마도 북 이스라엘에 내릴 하나님의 심판이 진짜인지 확인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의 심판이 사실이라면 그것을 바꾸고 싶은 마음도 있었을 것입니다.
13장 21-22절입니다.
그는 젊은 예언자를 집으로 데려와 식탁에 앉습니다.
그러자 하나님의 말씀이 갑자기 늙은 예언자에게 임합니다.
이 늙은 예언자는 젊은 예언자가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지 못했기때문에 죽게 될 것이고, 조상의 무덤에도 묻히지 못하게 될 것이라고 예언합니다.
실제로 그 젊은 예언자는 집으로 돌아가다가 사자에게 물려 죽고 맙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일어납니다.
그 사자가 젊은 예언자를 죽이기만 할뿐 그를 뜯어먹지 않은 것입니다.
심지어 그 옆에 있는 나귀도 물어 죽이지 않습니다.
원래 사자는 배가 고프지 않으면 공격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예언자만 죽이고 말았다는 것은 이 일이 평범한 일이 아니라는 의미입니다.
이것은 불순종한 예언자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라는 것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의 주검은 사자가 건들지 않게 하셔서 그에게 긍휼을 베풀어 주셨습니다.
또한 그는 죽음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이 반드시 이루어질 것을 확실히 알릴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그 예언자의 죽음을 무가치하게 만들지 않으셨습니다.
이런 일이 일어났으니 늙은 예언자는 젊은 예언자가 전한 심판의 말씀을 믿을 않을수가 없습니다.
또한 북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더이상 돌이킬수 없다는 것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그가 32절에서 하는 말을 들어보십시오.
그는 죽은 젊은 예언자의 시신을 가져와 무덤을 만들어주고난 후 자신의 아들들에게 이렇게 부탁합니다.
자신이 죽으면 자신의 뼈를 이 젊은 예언자가 묻힌 곳에 같이 묻어주라고 말하면서 젊은 예언자가 말한 모든 예언이 이뤄질것이라고 고백합니다.
그럼 이정도면 여로보암은 악한길에서 돌이켜야하지 않을까요?
그러나 그는 모든 기회를 놓치고 말았습니다.
그의 마음은 마비되었고, 그는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그 결과 솔로몬이 갔던 불순종의 길을 똑같이 걷게 된것입니다.
그 결과는 어떻습니까?
하나님은 그의 가문이 이 땅에서 흔적도 없이 사라지게 하십니다.
여기서 알수 있는 것은 순종과 불순종의 결과입니다.
불순종은 죽음과 파멸을 가져옵니다.
하나님의 복은 오직 순종을 통해 주어지는 것입니다.
[결론]
이제 오늘 말씀을 마무리 하겠습니다.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하나님의 예비하신 복은 오직 순종을 통해 주어집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복주시길 너무나 원하시지만 우리가 순종하지 않으면 하나님도 어떻게 하실수 없으십니다.
순종은 어렵습니다.
그러나 순종은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기쁘신 뜻입니다.
아담과 하와는 불순종했기 때문에 죽을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순종하셨기 때문에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셨습니다.
순종이 어려울때마다 예수님을 기억합시다.
예수님도 겟세마네 동산에서 땀방울이 핏방울이 되도록 기도하시면서 순종의 길을 걸으셨습니다.
하물며 우리는 어떻겠습니까?
그렇기때문에 성령은 연약한 우리를 도우십니다.
성령의 능력으로 세상 유혹을 이겨내고 하나님이 예비하신 복을 누리시길 바랍니다.
우리 모두 작은 것부터 순종합시다.
10분이라도 묵상하는 것부터 순종해봅시다.
10분이라도 기도하는것부터 순종해 봅시다.
날마다 내게 주어지는 한 말씀부터 순종합시다.
그럴때 하나님은 우리에게 예비하신 모든 복을 부어주실 것입니다.
그것을 마음껏 누리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길 축복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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