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1008 저녁] 너는 나를 따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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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송 323/459
본문 마 8:18-22
사사기를 보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가나안 정복을 명하셨다. 그런데 유다민족은 골짜기 주민들에게 철병거가 있다는 핑계로 그들을 쫓아내지 못했다. 하나님 말씀보다 자신들의 판단과 상식을 더 중요하게 생각했던 것이다. 결국 그들이 가나안 골짜기 주민들을 몰아내지 못한 것은, 그들에게 힘이 없었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하지 못한 까닭이다. 죄의 특징은 거짓이며 거짓은 잘못된 생각에 사로잡히게 만든다.
내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그들을 쫓아내고자 했다. 그러나 온전히 쫓아내지는 않았다. 이는 곧 절반의 순종이다. 절반의 순종은 절반의 승리가 아닌 완전한 패배로 끝이 난다. 신학자 달라스 윌라드는 “제자도를 위해 지불해야 할 댓가는 큽니다. 그러나 제자도를 포기할 때 지불해야 할 댓가는 훨씬 더 큽니다" 라고 말했다. 당장 이런 저런 고민들로, 이런 저런 사정으로 주님을 따르는 삶을 살지 않는다면 우리는 더 큰 댓가를 치뤄야 할런지도 모른다. 시편 18:29 에서 다윗은 이렇게 고백한다. “내가 주를 의뢰하고 적군을 향해 달리며 내 하나님을 의지하고 담을 뛰어넘나이다” 믿음은 철병거들을 바라보면서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의지하며 적군을 향해 달리며, 하나님을 신뢰하며 담을 뛰어넘는 것이다.
오늘 우리가 함께 봉독한 본문의 메세지의 주제는 아주 강렬하면서도 명확하다. 22절에 기록된 대로 “너는 나를 따르라" 라는 것이다. 이는 주님을 믿는 모든 신자들에게 주시는 말씀이며, 오늘 이 자리의 저와 여러분들에게 주시는 명령이다. 주님은 단지 믿음을 가진 채로 그 자리에 멀뚱거리고 서 있는 상태를 원하시지 않는다. 주님의 초청의 말씀을 듣고, 이제 서 있던 그 자리에서 앞서가신 주님의 발자취를 따라 주님의 제자된 자로서 걸어가길 원하신다. 오늘 본문의 말씀을 통해서 “주님의 제자된 삶이란 무엇인가?” 라는 주제로 말씀을 전하고자 한다.
예수께서는 많은 모인 무리들이 자신을 에워싸는 것을 보시고 갈릴리 반대편으로 건너갈 것을 명하신다. 자신의 치유사역이 널리 소문을 타면서 수많은 군중들에 의해 둘러싸이신 예수님은 복음사역에 지장이 생기자 오히려 그 자리를 피하여 호수 건너편 인적이 드문 지역으로 옮겨가기를 원하셨다. 그런데 그 때 한 사람이 등장하여 주를 따르겠노라고 말한다. 19절을 보면, 그는 바로 “서기관”이었다.
마태복음 8:19 “한 서기관이 나아와 예수께 아뢰되 선생님이여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따르리이다” 서기관은 예수님을 가리켜 “주님" 이라고 표현하지 않고 “선생님" 이라고 부른다. 일반적으로 서기관들은 율법을 가르치고 해석하는 일들도 감당했었는데, 이정도 수준에 이르기까지 랍비의 수하에서 지도를 받아야 했다. 따라서 서기관이 예수님을 가리켜 “선생님" 이라고 부르는 것은 이 단어가 히브리어의 랍비에 해당하는 단어로서, 예수님을 단지 좋은 성경교사 정도로 여겼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선생님이여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따르리이다" 라고 말하는 것은, 내가 더 많이 알고 공부할 수 있도록 훌륭한 랍비인 당신 아래에서 배우고자 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어찌 되었든 서기관이 예수님의 제자가 되겠다고 하는데, 예수님의 반응이 놀랍다. 주님은 뭐라고 반응하시는가? 마태복음 8:20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 하시더라”
예수님께서 거니시던 지역은 여우들이 많았다고 한다. 특히 사막여우들은 종종 땅에 굴을 파서 숨어있다가 지나가는 짐승들을 사냥하기도 하고, 때로는 과수원에 피해를 끼치기도 했다. 예수님께서 강조하시는 것은 이런 동물들(여우나 새)도 돌아갈만한 거처가 있다는 것이다. 돌아갈 집이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고 하셨다. 이는 머물만한 장소가 없으셨다는 의미이다.
이 말씀의 의미가 무엇일까? 예수님께서 실제로 거하실만한 집이 없으셨음을 의미하는가? 돌아갈만한 고향이 없음을 말씀하시는 것인가? 문자적인 의미로만 보면, 머리둘 곳이 없다는 것은 머물만한 곳이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을 가리켜서 우리 주님께서는 머물 집도 한채 없으셨던 무소유의 삶을 사셨다고 생각해서는 안된다. “인자는 머리둘 곳 없다" 라는 표현의 의미는 구약성경 안에서 해석해야 한다.
신28장 말씀을 보면 모세가 축복과 저주를 동시에 선언하는 장면이 기록되어 있다. 율법에 기록된 모든 말씀에 순종할 때에 이와 같은 복들이 있겠지만, 만약 그 말씀에 순종하지 않을 시 모든 복들이 반대로 저주가 되어 임할 것임을 선언한다. 그런데 그 저주들 중 하나가 바로 땅에서 쫓겨나는 것이었다. 하나님의 율법에 불순종했을 때 받게 될 저주 중 하나가 이리 저리 쫓겨다니는 것, 가인에게 내리셨던 형벌처럼 어디 하나 기댈 곳 없이 유리하는 삶을 살아야 하는 것이었다.
본래 패역한 우리는 우리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징벌로서 땅에서 쫓겨나 이리 저리 유리하는 자들이 되어야 했다. 머리 둘 곳 없이 방황하는 저주받은 삶을 살아야 했던 자들이 바로 우리였다. 그런데 저와 여러분이 겪어야 할 그 징벌을 주님께서 대신 받으셨다. 어찌 하늘보좌의 영광을 가지신 주님께서 이처럼 이 땅까지 낮아지시고, 안주할 곳 없는 방황하는 삶을 사셔야 했나? 우리가 받아야 할 모든 형벌을 친히 그분께서 당하시기 위해서이다. 내가 쫓겨났어야 했지만, 내 대신 주님이 친히 쫓겨나셨고, 내가 머리 둘 곳없이 방황하는 인생을 살아야 했지만, 내 대신 주님께서 머리 둘 곳 없는 삶을 살아가셨다는 것이다.
또한 머리둘 곳 없다는 말의 궁극적인 의미는 "자기 민족이 주님을 거부했음”을 의미한다. 요1:10-11 을 보면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아니하였으나" 말씀한다. 성자하나님께서는 천지가 창조되기 이전부터 삼위하나님으로 함께 계셨고, 성부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실 때에도 함께 창조사역에 동참하셨다. 그러나 세상은 성자 하나님을 알지 못했다. 자기 백성에게 내려오셨으나 자기 백성들은 그분을 알지도 못했고, 오히려 거부하고 있다. 이러한 사실은 사복음서에도 잘 나타나 있는데, 유대민족은 예수를 거부했고, 갈릴리 지역도 주님을 내쫓았으며, 가다라 지역도 주님을 떠나시길 간청했다. 결국 자기 백성들은 주님을 십자가에 못박아 죽게 만들지 않았던가? 주님은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세상에서 배척만 당하셨다.
성도 여러분, 이런 의미에서 주님을 따른다는 것은 참 쉬운 일이 아니다. 성경은 예수 믿기만 하면 인생의 시련이나 환난, 고난이 싹 사라진다고 말하지 않는다. 오히려 성경은 그리스도를 따르기 시작할 때, 그리스도를 좇기 시작할 때 시련이나 환난이나 고난이 찾아온다고 말한다. 야고보는 말하기를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당하거든....” 즉, 예수를 믿고 그분의 뒤를 따르기 시작한 이후에도 시험이 찾아온다고 말한다. 또한 주님께서도 말씀하시기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라고 하시며, 그리스도인으로서 이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 환난이 없어진다고 하지 않으셨다. 환난을 당한다고 말씀한다. 또한 사도 베드로 역시 “너희를 연단하려고 오는 불시험을 이상한 일 당하는 것 같이 이상히 여기지 말"라고 했다. 이 땅을 살아가는동안 내가 예수 믿는 그 믿음으로 인해, 내가 예수님의 발자취를 따르는 그분의 제자됨으로 인해 끊임없이 우리를 연단하기 위한 불시험이 찾아온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성경은 그리스도인으로서 주님의 뒤를 따르는 제자된 삶이 이처럼 시련과 환난과 고난이 임한다 할지라도, 그 길이 복되다고 말씀한다. 그 인생이 실패한 인생이 아니라 오히려 영광스러운 인생이라고 말씀한다. 우리 인생 속의 수많은 시련 중에도 우리가 기뻐할 수 있는 이유를 야고보는 뭐라고 말하는가? 야고보서 1:2–4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당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 그리스도인으로서 주님의 제자된 자로서 당하는 수많은 시련들이 우리 속에서 참된 인내를 만들어가며, 그것이 우리를 온전하게 만든다고 했다. 주님을 따르는 자로서 당하는 시련이 우리를 온전하게 한다.
또한 주님도 말씀하셨다. 요한복음 16:33 “이것을 너희에게 이르는 것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이 땅을 살아가는동안 그리스도인으로서 예수를 따르는 자로서 환난을 당한다. 그러나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평안을 누리고, 담대할 수 있는 것은 주님께서 세상을 이기셨기 때문이다. 할렐루야!
또한 베드로는 그리스도인에게 불시험이 찾아오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라고 말한다. 그럼에도 우리가 기뻐할 수 있는 이유는 무엇인가? 베드로전서 4:13 “오히려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 이 땅에서 겪는 불시험 가운데에도 우리가 실망하거나 낙담하지 않을 수 있는 것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함으로 인하여 주님 다시 오실 그 날에 주께서 우리를 즐거워하고 기뻐하신다고 말씀한다.
주 안에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러므로 “너는 나를 따르라" 는 주님의 초청의 말씀에 순종하여 이 복된 여정에 함께 하지 않겠나? 비록 이 여정 가운데 시련이 있고, 환난이 있고, 고난이 있겠지만, 이 인생은 결코 실패한 인생이 아니라 복된 인생이며, 비참한 인생이 아니라 영원한 영광가운데 살아가는 삶임을 기억하며, 주님의 발자취를 따라 살아가는 이 자리 모든 주님의 제자된 여러분들 되시기를 간절히 축원한다.
그렇게 주님의 발자취를 따라 걷다보면 수많은 선택의 기로들을 경험하게 된다. 주님의 뒤를 따라가는 것은 매우 중요한 부분임을 잘 알겠는데, 지금 내 앞에 산더미처럼 쌓여있는 많은 일들 중에서 어느 것을 우선시해야 할지 알지 못할 때가 있다. 본문 21절을 보라. “제자 중에 또 한 사람이 이르되 주여 내가 먼저 가서 내 아버지를 장사하게 허락하옵소서” 본문에서 말하는 제자란 예수님의 열두 제자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따르던 무리들 중 하나를 가리킨다. 그는 예수님 앞에 나아와 먼저 가서 부친을 장사하게 허락해 달라고 청한다. 부모를 장사하길 원하는 제자의 부탁은 당시 유대인들의 관습 상 지극히 당연한 요구였다.
그러나 본문에 등장하는 제자의 부모는 아직 죽지 않은 상태였던 것으로 보인다.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한글성경 본문 22절 말씀에서는 "죽은 자들이 그들의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고 너는 나를 따르라" 라고 번역한다. 즉 한글의 순서상으로 "너는 나를 따르라" 라는 부분이 가장 뒤에 등장하는데, 원문에서는 정 반대로 "너는 나를 따르라" 라는 말씀이 가장 먼저 등장한다. 다시 말해서 "너는 나를 따르라. 죽은 자들이 그들의 죽은 자를 장사하게 하라" 라는 말씀이다. 지금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핵심은 바로 일의 중요성이다. 주님을 따르는 것이 다른 어떤 문제들보다 우선시 되고 중요하다는 것을 교훈하신다.
여러분, 마태복음 8-9 장은 예수님의 이적에 대해 집중적으로 기록 보도하고 있다. 그런데 갑자기 그 도중에 오늘 본문의 말씀이 등장한다. 그리고 두 종류의 사람이 등장하여 주님을 따르겠다고 고백한다. 예수님의 이적의 권능을 보여주는 기사들 사이에 마치 오늘 본문이 갑작스럽게 끼여있는듯한 느낌까지 받는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것들을 통해 어떤 의미를 전해주고 싶으셨을까?
주님을 따르던 수많은 무리들이 있었다. 그 무리들이 너무 많이 몰려 예수님의 사역에 지장을 줄 정도였다. 이토록 많은 무리들이 몰려든 이유가 무엇일까? 그들은 주님께서 나타내시는 권능을 보며 자신들만의 이상과 기대감에 젖어 주님을 따르던 자들이다. 자신의 꿈과 야망을 실현시킬 목적으로 주님을 따르는 것은, 이방 우상숭배와 다를 바가 없음을 기억해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왜 이 땅 가운데 내려오셨는가에 대해서는 알지 못한 채, 아니 듣고도 관심을 갖지 않으며 헛된 이상과 꿈을 좇아 주님을 따르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들을 압제하던 로마를 물리치신 후에 진정한 하나님 나라를 회복하실 때, 곁에 서서 한 자리를 차지하고자 하던 제자들과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에 대해서는 생각하지도 않은채로 예수님의 권능만을 보고 눈이 멀어 주님을 좇던 자들에게, 오늘 본문의 말씀은 예수를 따르는 삶이 진정 어떠한 삶인지를 말씀하신다.
당시 예수를 박해하던 대표적인 무리들 중 하나가 서기관이었다. 따라서 서기관의 이와 같은 고백은 그 자체만으로도 놀라운 것이라 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는 주님을 따르는 자로서 감수해야 할 자기 부인, 희생, 고난에 대해서는 전혀 생각하지 않고 있다. 다만 예수님의 권능을 보고 예수님을 따르는 삶이 성공하는 삶이라 생각한 것이다. 주님께서는 막8:34 에서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하셨다. 주님을 따르고자 하는 사람들은 누구든지 자신의 죄의 정욕들을 날마다 물리쳐야 한다. 요일2:16 에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들은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라 세상으로부터 온 것”이라 말씀하신다. 주님을 따르고자 하는 자들은 세상에서 말하는 가치관을 따를 것이 아니라, 자신의 의를 높이기 위해 주님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야망과 꿈을 실현시키기 위하여 주님을 따를 것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와 그분의 의를 위하여 살아가야 한다. 마6:33 에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고 하셨다. 나의 죄악으로 얼룩진 의를 드러내는 삶은 세상의 것과 다를 바 없다. 주님을 따르고자 하는 자들은 날마다 자신을 십자가 앞에서 부인하고 죽이며,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만 살게 하시고, 하나님 나라와 그분의 의를 구하는 삶을 살아가야 한다.
오늘날도 많은 이들이 예수 믿으면 복을 받고, 예수 믿으면 성공하고, 예수 믿으면 부자가 된다고 말한다. 그래서 수많은 이들이 그 말에 혹하여 교회를 다니기 시작하고, 예수를 믿기 시작한다. 그러나 주님을 따르는 삶은 이런 삶이 아니다. 지금도 미국의 부흥사들은 예수 믿었더니 재산이 몇배가 늘었다고 설교한다. 예수 믿었더니 사업이 형통했다고 말한다. 예수 믿었더니 승진했다고 말한다. 수많은 이들이 이런 설교에 열광한다. 문제는 무엇인가? 성경이 그렇게 말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삶을 살기 시작했더니 오히려 시련이 찾아온다. 환난이 임한다. 고난이 찾아온다. 예수 믿기 전보다 더 힘겨운 삶을 살기 시작한다. 머리 둘 곳 조차 없는 나그네 인생을 살아가게 될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와 같이 예수를 좇는 삶이 복된 이유는 무엇인가? 이 땅은 유한하다. 이 땅의 것들은 영원하지 않다. 잠시 잠깐 반짝하다가 사라져버릴 이 땅의 것들만을 소망하며 살아가는 삶은 결국 이 땅이 사라질 때 그의 모든 소망도 함께 사라질 것이다.
그러나 날마다 나를 부인하고, 날마다 나를 십자가에 못박아 내 안에 그리스도만 사시게 하는 자들, 이 땅을 살아가면서도 늘상 하나님 나라와 그분의 의를 구하며 살아가는 자들, 세상의 기준으로는 늘 고생만 하고, 환난을 당하며, 시련 가운데 신음하는 모자란 인생, 실패한 인생, 비참한 인생처럼 보인다 할지라도 그럼에도 매순간마다 주님 가신 발자취를 따라 한걸음씩 나아가는 자들, 주님의 제자된 자로서 앞서 가신 주님의 발자취를 따라 걸어가는 자들, 바로 이들이 복되다고 성경은 말씀한다. 가장 잔혹하기로 소문났던 아우카족을 전도하려다가 창에 찔려 순교당했던 짐 엘리엇 선교사의 말처럼 “영원한 것을 얻기 위해 영원하지 않은 것들을 버리는 자는 결코 어리석은 자가 아니다" 왜? 이런 자들에게 하나님께서 영원한 하늘 영광을 약속하셨기 때문이다. 잠시 잠깐 있다 사라질 것들 대신 하나님께서 예수의 영원한 생명을 우리 안에 주셨기 때문이다.
때로는 우리 인생 가운데 수많은 선택의 갈림길이 찾아온다. 주님을 좇을 것인가, 당장의 사리사욕을 따를 것인가. 주님을 좇을 것인가 당장의 돈을 따를 것인가. 주님을 좇을 것인가 당장의 죄의 유혹을 따를 것인가. 주님을 찾아온 두번째 제자가 그러했다. 그는 선택의 갈림길에서 주님이 아닌 세상을 선택했다. 당장 급하지 않은 일 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주님을 버렸다. 그는 일어나지도 않은 일 때문에 정작 중요하고 긴급한 일이 무엇인지를 놓쳐버렸다.
주님께서는 "너는 나를 따르라" 라고 말씀하신다. 그 무엇보다 주님을 좇는 삶, 주님을 따르는 삶, 주님을 닮아가는 삶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신앙은 어떠한 선택의 갈림길 중에서도 가장 최우선적인 것이 되어야 한다. 다른 무엇과 비교할 수 없다. 오늘날 많은 이들이 세상에 대한 미련으로 신앙의 길을 최우선이 아닌 차선이나 그 다음으로 미루고 있다. 그들은 할 수만 있거든 이런 저런 핑계들로 신앙의 길을 가장 뒤로 미루어둔다.
눅14 장을 보면 혼인잔치 비유를 말씀하신다. 어느 임금이 자기 아들의 혼인잔치를 축하하기 위해 잔치를 배설하였다. 그리고 종들을 보내어 사람들을 잔치에 참여하도록 초청하였다. 그랬는데 초대를 받은 사람들은 “다 일치하게 사양"하기를, 어떤 이는 “내가 얼마 전에 밭을 샀는데 좀 둘러보러 나가야 하니 잔치에 못가겠소" 라고 거절했고, 또 어떤 이는 “내가 소 다섯 쌍을 샀는데 이놈들이 밭을 잘 가는지 못가는지 시험해봐야 하니 못가겠소" 라고 거절하며, 또 어떤 이는 “난 얼마전에 결혼한 몸이니 못가겠소" 라고 거절했다.
그들의 핑계거리를 오늘날 우리 일상의 언어로 바꾸면 이럴 것이다. “주님, 오늘은 좀 바빠서요", “주님, 오늘 직장에서 제가 얼마나 힘든 일을 겪었는지 아시잖아요! 오늘은 좀 쉴게요!”, “주님, 요즘 저 일 많은거 아시잖아요! 매일 야근이라구요!”, “주님, 요즘 육아가 얼마나 힘든지 아세요?”, “주님, 이번 기말고사까지만 좀 봐주세요! 이번에 좋은 성적 받아야 한단 말이에요!” 나중에요, 나중에요, 나중에 따라갈게요! 이런 저런 핑계로 신앙의 길을 뒤로 미루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자들이 결국 맞게 되는 최후에 대해 성경은 뭐라고 말씀하시는가? 누가복음 14:24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전에 청하였던 그 사람들은 하나도 내 잔치를 맛보지 못하리라 하였다 하시니라” 그들이 하나님의 잔치를 맛볼 수 없다고 하신다. 하나님의 천국잔치에 들어갈 수 없다고 하신다.
주 안에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 믿는 삶 그 자체가 얼마나 귀하고 아름다운지. 그러나 그것만으로 만족하여 여러분의 믿음의 발걸음을 멈춰서 있다면 그것은 악하고 게으른 종이라는 것을 잊지 말라. 우리의 신앙생활은 예수믿는 것이 그 시작점, 출발선이고 그 이후에는 앞서 가신 주님을 따라 제자된 삶을 살아가야 한다. 계속해서 믿음과 순종의 발걸음으로 나아가야 한다. 긴급하지 않은 일들을 뒤로 미뤄두고, 영원한 상급을 향하여, 우리에게 예비된 영광의 면류관을 향하여, 나를 부인하고 내 십자가를 짊어진 채로 주님을 따라가는 것, 이것이 신앙생활이다.
다시 한번 강조한다. 주님은 이 자리의 저와 여러분이 주님의 뒤를 따라오길 바라신다. 그저 예수 믿는 상태로 만족하며 그 자리에 멈춰 서 있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그분의 뒤를 따라 제자된 삶을 살아가기를 바라신다. 오늘도 저와 여러분의 마음 가운데 주님께서는 강하게 도전하신다. "너는 나를 따르라!" 라고 말이다. 이 부르심에 어떻게 반응하시겠는가? 여러 손해와 고난이 뒤따르는 것을 염려하며 그 부르심을 뒷전으로 미뤄두시겠는가? 내 약함 때문에 포기하고, 내가 자주 실패하기에 포기하고, 내 결핍과 내 부족함 때문에 포기하고, 때론 아프기 때문에 포기한다면 어찌 주를 따를 수 있겠는가?
“메흐디 디바즈”라는 이란 사람이 있었다. 그는 정통 무슬림 가문에서 자란 사람으로서 집안 자체도 무슬림 지도자 집안이었다. 그러나 그가 예수를 영접하게 되고, 붙잡혀 고문을 받고 1993년 12월에 사형을 언도 받는다. 배교에 대한 벌은 사형이었다. 그는 감옥에서도 “나의 구원자 되신 분을 따르는 것이 얼마나 영광스러운 일인가?” 라는 글을 남겼다. 그를 염려하던 전 세계 사람들의 탄원 덕분에 그는 잠시 옥에서 풀려났으나 무슬림들은 그를 계속해서 고소했고, 1994년 7월 결국 피살되었다. 그는 온갖 고난 중에도, 온갖 박해와 차별 속에도, 말도 안되는 형벌과 비난 중에도 이 모든 것들이 “내가 얼마나 예수 그리스도의 뒤를 따라갈 수 있는지에 대한 하나님의 시험"으로 여겼다. 그래서 온갖 고난 중에도 이 모든 것들을 주님의 제자된 자로서 친히 감당했던 것이고, 온갖 시련과 박해 중에도 이 모든 것들을 영광의 상처로 여겼던 것이다.
“참 고마운 친구 나의 예수님 나는 깨지기 쉬운 질그릇과 같으나 때론 낙심해도 포기치 않음은 예수의 생명이 내 안에 있기에 내 삶의 동행자 나의 예수님 나는 기대가 없는 어린 나귀같으나 늘 쓰러져도 다시 일어남도 예수의 생명이 내 안에 있기에 나의 약함은 나의 자랑이요 나의 실패는 나의 간증이요 나의 아픔은 나의 영광이니 그 부르심 따라 내가 걸어갑니다"
비록 이 신앙여정 가운데 수많은 어려움이 있고, 실패와 좌절과 낙심이 있어도 우리가 아주 넘어지지 않는 것은 내 안에 생명의 근원되시는 주님이 계시기 때문 아니겠는가? 나는 약하고 깨지기 쉬운 질그릇 같으나 계속해서 우리를 일으키시는 분, 계속해서 우리를 살게 하시는 분, 세상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존귀하시고 아름다우신 분께서 이 시간 여러분에게 명하신다. “너는 나를 따르라!”
여러분, 인생 속에서 셀수 없이 많은 선택의 갈림길을 마주하게 될 것이다. 그 때마다 주님은 계속 우리를 부르실 것이다. 하나님께서 그 선택의 갈림길에도 여러분의 삶을 통치하시는줄로 믿는가? 하나님께서 고난 중에도 여러분의 삶을 붙드실 줄로 믿는가? 그렇다면 조금도 고민하지 않고, 망설이지 않고, 주님의 부르심에 응할 수 있는 우리가 되자. 때로는 주님을 따르는 길에 여러 불편함이 있고, 주님의 뒤를 좇을 때 여러 손해가 있고, 때로는 나를 부인하고 내 십자가를 짊어지는 가운데 아픔과 괴로움이 있다 할지라도, 주님은 이적이나 물질이나 성공이나 번영이나 풍요를 따라가지 말고, "너는 나를 따르라!" 라 부르시는 주님의 뒤를 따라가자. 앞서가신 주님의 말씀을 확고하게 붙들고, 주님이 걸어가신 그 길을 우리가 함께 걸어가시는 이 자리의 모든 성도 여러분들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아멘.
기도하자.
지금도 우리를 부르시는 주님, 주변을 돌아보지 않고, 이런 저런 상황과 형편 고려하지 않고, 주님보다 더 사랑하던 것들을 내려놓고, 때로는 고난이 찾아오고 핍박이 있더라도, 여러 비난들과 손해들이 있을지라도, 주님의 부르심에 순종하는 우리가 되길 원합니다. “너는 나를 따르라" 우리를 부르실 때 “네 주님 제가 주님을 따르겠습니다" 라고 기꺼이 주님을 따르는 우리가 되도록 인도하여 주옵소서.
우리를 대신하여 모든 율법의 저주를 대신 당하신 주님, 주님의 사랑과 자비하심을 기억하며 다시금 주님의 부르심을 듣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예수 닮기를 소원했으나 아주 작은 불편함에도 쉽게 포기했고, 주님의 제자된 삶을 살기를 결단했으나 아주 작은 유혹에도 쉽게 넘어졌던 우리를 불쌍히 여겨주옵소서. “너는 나를 따르라" 하신 주님의 부르심에 다시금 포기했던 자리에서 다시 출발하길 원합니다. 쓰러졌던 그 자리에서 일어서길 원합니다. 멈춰섰던 발걸음을 다시 앞서가신 주님 따라 걸어가길 원합니다. 우리를 주의 길로 인도하여 주옵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