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땅에 또 한 번의 부흥을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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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 2:1-11
(할렐루야! 우리 하나님께 영광의 박수 올려드리겠습니다.) 임마누엘 찬양대의 귀한 찬양 감사합니다. 주님은 우리의 찬양을 받기에 합당하신 유일한 분이신 줄로 믿습니다. 날마다 우리의 삶이 주님을 향한 감사와 찬양으로 가득 넘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한 번 따라 하시겠습니다. “이 땅에 또 한 번의 부흥을 주소서!” 저는 오늘 사도행전 2:1-11의 본문을 가지고, “이 땅에 또 한 번의 부흥을 주소서!”라는 제목으로 하나님 말씀을 전하겠습니다. *우리 앞뒤좌우에 계신 분과 사랑의 인사를 나누겠습니다. “함께 예배함이 기쁨입니다” (네,) 한번 더 인사하실때 이렇게 인사하죠. “옆에 있어주셔서 감사합니다” (V) 누군가가 옆에 있다는 것, 함께 예배할 수 있다는 것이 참 얼마나 감사하고 기쁜 일인지 모르겠어요. 오늘 말씀을 통해 함께하는 우리 모두가 주님을 만나는 귀한 시간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말씀을 시작하면서 한 가지 질문을 드리고자 합니다. 사랑하는 우리 거룩한빛광성교회 성도여러분, 여러분은 “부흥”을 갈망하십니까? (그렇다면, 질문 한 가지를 더 드릴게요) 그러면, “부흥”이란 무엇입니까? (우리가 그토록 바라고 말하는 부흥은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요?)
우리가 “부흥”이 뭔지 정확히는 (잘) 몰라도, 이 단어가 풍기는 분위기를 볼 때, “뭔가 잘 되는 뉘앙스”를 가지고 있는 단어라는 것은 분명히 알고 있습니다. 뭔가 숫자가 늘어나는 것, 그것도 감당할 수 없을 만큼의 숫자로 늘어나는 것을// (이 ‘부흥’이라는 단어를 생각할 때) 머릿속에 그리게 되는 것 같아요. 20년 전인 2000년대 초에, 평양대부흥운동 100주년을 준비하면서 얼마나 이 ‘부흥’이란 단어가 한국교회 안에 “유행어”처럼 퍼졌는지, 교회/교회마다 부흥이라는 슬로건을 내걸었고, 선교단체, 찬양앨범에 이르기까지 “부흥”을 목놓아 외쳤던 시절이 있었어요. 90년대말에서 2000년대 초, 당시 대한민국 인구 4명 중에 1명이 기독교인이라는 자부심아래 “부흥”은 우리에게 양적인 성장과 풍족함으로 다가왔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그 양적 부흥은 오래가지 못했어요, 2010년을 기점으로 한국교회는 눈에 띄게 하락곡선을 그리기 시작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흥에 대한 열망을 포기할 수는 없었는지, 그 때즈음에 등장하는 단어가 바로 “질적 부흥”이에요. ‘이제는 외적으로 보이는 양적(수적)인 부흥의 시대는 끝났다, 그보다 더 중요한 내적인 부흥 곧 질적 부흥이 필요하다’는 말들이 한참 또 쏟아져 나오는 거에요. 그리고 또 10여 년이 지난 지금, 한국교회 안에서 더 이상 “부흥”이란 단어를 찾아보기가 쉽지 않은 것 같아요. “부흥”이 이제는 (더이상) 느낌으로 와 닿지 않는 세상에 살고 있는 것이죠. 물론 우리가 여전히 부흥이라는 단어를 쓰고 찬양도 부르지만, 이제 부흥은 (코로나시기를 지나면서 더더욱) 쉽지 않다는 생각들이 우리들의 마음 속 깊숙이 자리잡고 있는 것 같아요. 마치 옷장 저— 구석에 쳐박아놓은 유행지난 옷처럼 말이에요.
자, 이것은 부흥에 대한 어떤 현상적인 이야기였고, 우리는 아직 이 질문에 대답을 못했지요, 그래서 “부흥”이란 무엇인가요? 우리가 오늘 말씀을 시작하면서 이 ‘부흥’에 대한 의미를 정리하고 가면 좋을 것 같아요. 성경 안에서의 “부흥”이라는 단어는 구약성경 하박국 3장 2절 에 딱 한번 나오는데요, “주는 주의 일을 이 수년 내에 부흥하게 하옵소서” 여기서 부흥으로 번역된 단어는 히브리어로 “하야”라는 단어입니다. “하야”의 뜻은 이렇습니다. (한번 따라하실까요?) “다시 일으키다, 다시 숨쉬게 하다, 다시 소생시키다”// 이런 의미를 가지고 있어요. 그래서 우리가 이 하야라는 단어를 한문으로 다시 “부”, 일어날 “흥”자를 써서 “부흥”이라고는 번역한 것이죠. 부흥은, 말그대로 “다시 일어서다. 다시 살아나게하다”라는 의미에요.
자, 그래서 우리가 만약 (오늘 설교의 제목과 같이) “주님, 이 땅에 또 한번의 부흥을 주시옵소서!” 주님 우리를 다시 살아나게해주십시오, 다시 일어나게해주십시오. 우리에게 부흥을 주십시오!”라고 기도한다고 할 때, (물론 은혜도 되지만V) 우리는 이 기도가운데서 적어도 두 가지를 우리의 입으로 시인하게 되는 거에요.
첫번째로, (부흥이 필요하다는 것은 바꿔말하면) 지금 우리에게 부흥이 없거나 충만하지 않다는 것을 시인하는 거에요. 즉, 영적으로 지쳐있거나 주저 앉아있거나, 죽은 것 마냥 시들시들해져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있다는 것이죠. 두번째로, (다시 부흥을 달라고 했을 때는) 과거에 영적으로 충만하고, 너무나 좋았고, 생기가 넘쳤던 경험이 있었다는 것을 시인하는 거에요. 부흥은 “다시 (예전처럼) 일어나도록, 예전의 그 좋았던 때가 다시 오게 해달라는 거”잖아요. 그러니까 좋았던 그 때, 신앙으로 말하면 성령 충—만한 그 때가 있었다는 거죠, 그 신앙의 (즐거운)맛을 안다는 거에요. 아쉬운 것은 이 경험이 “과거”가 되어버렸다는 것이겠죠.
자, 여러분은 어떠세요? 여러분은 “부흥”을 갈망하고 계신가요?(부흥이 필요) 오늘 이 자리에 모인 우리 모두에게 “주님, 우리에게 부흥을 주시옵소서”, 이 간—절한 기도가 필요하지 않습니까? 오늘 저는 여러분의 지친 심령이 다시 소생케되는 부흥의 축복이 있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메마른 심령에 생기가 넘쳐나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낙심하여 주저 앉아있는 여러분의 마음과 육체가 다시 일어나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또한 부흥이 단지 우리의 과거의 일이 아니라, 바로 이 시간, 지금도, 우리에게 역사하고 진행되고 있는 하나님의 일임을 깨닫는 귀한 시간이 되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을 보니 그 거대한 부흥의 역사, 그 중심에 있는 사람들이 있어요, 오늘 본문 2장 1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시작)
[행2:1] 오순절 날이 이미 이르매 그들이 다같이 한 곳에 모였더니
(아멘!) 때는 오순절이었어요, 오순절은 이스라엘의 큰 명절 중 하나에요. 초여름, 처음 익은 밀을 수확해서 감사함으로 드리는 날이기 때문에, 이 오순절을 또 다른 말로 맥추절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오순절은 또한 문자적으로, 다섯 오에, 열흘을 나타내는 순을 사용해서 50일이라는 뜻이에요. 이 50일은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을 떠나 율법은 받은 시내 산에 도착한 시간이에요. 그래서 오순절이라고 이 시내 산에서 모세가 율법을 받은 사건, 즉 하나님의 약속을 받은 것을 기념하는 절기이기도 해요.
그래서 오순절이 갖는 의미를 생각해볼 때 “처음 것, 새로운 시작” 이러한 느낌을 가지고 있는 절기에요. 그래서 이 “오순절”이라고 할 때, 꼭 하나님께서 어떤 의미 있는 일을—새로운 일을—하실 것 같은 느낌이 듭니다. 바로 이 오순절에 “그들이 다같이 한 곳에 모였더니”라고 성경은 전하고 있어요. 그런데 “그들이 다 같이 한 곳에 모였더니”라고 할 때 “그들이 모였더니”라는 단어를 원문으로 보면, “에싼-”이라는 동사를 사용합니다. 이 “에싼”이란 동사가 어떤 뜻이냐면, “그들이 있었다”라는 의미에요. 그래서 1절을 원어의 의미를 살려서 다시 읽어보면, “오순절 날이 되었을 때 그들 모두가 같은 자리에 함께 있었다.”라고 읽을 수 있어요. 무슨 차기냐면, “자, 우리 3시까지 모여서 기도회를 시작하겠습니다”(V) 이렇게 어떤 목적을 가지고 모였다기보다는, 그저 그들이 그곳에 있었다는 거에요. 마치 우리 본당의 십자가가 저 오른쪽에 늘 있는 것처럼 말입니다. 제자들을 포함해 120명의 공동체가 그저 함께 그 자리에 있었어요.
성경을 읽은 우리는, 이들이 조금 있으면 성령의 충만함을 받게 될 것을 알고 있지만, 당시 다락방에 모인 그들은 앞으로 자신들에게 어떠한 일이 벌어질지 모르고 있었어요. 당시 마가의 다락방에 모인 120명이 ‘우리는 조금 있으면, (한 9시 40분쯤 되면) 성령으로 충만해지면서 다른 나라말들을 하게 될거야’라고 생각하고 그 자리에 있었던 것이 아니었다는 거에요. 단지 승천하기 전 예수님께서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기다리라”고 하신대로 그들은 무엇을 해야할지, 언제 약속하신 성령이 올지 알지 못했지만—사실 성령이 어떤 것인지도 몰랐지만—, 그들은 함께 있는 거에요. “존재”로서 함께 하고 있는 거에요.
영어로하면, “They were there.”라고 할 수 있어요. 그곳에 (함께) 있었던 사람들—주님이 말씀하신 그 자리를 떠나지 않고, 늘 거기에 있었던 사람들—그들이 바로 120명의 제자공동체였어요. 그런 의미에서 “충성은 어떠한 목적에 있는 것이 아니라 존재에서 나오는 것인 줄로 믿습니다.” 1년 중 가을이 깊어가는 이 맘 때가 되면, 간혹 찾아오시거나 전화주셔서 하시는 말들이 있습니다. “목사님, 잠깐 이야기 가능하실까요?” 그 말을 들으면 어떤 이야기를 하실지 잘 모르지만, 손에 막 땀이 나면서 가슴이 울렁거리고 긴장이되요. “예, 집사님/권사님 말씀하세요”, “목사님, 저 올 해까지만 사역을 하고, 올 해까지만 봉사하고 이제는 좀 내려놔야할 것 같아요.”
(V) 혹시 여러분 중에, 비슷한 생각을 마음에 품고 있는 분들이 이자리에 계실지도 모르겠어요. 이러한 말을 들을 때마다 목사로서 우선 ‘이 분이 이 말을 하기까지 얼마나 힘드셨을까, 그리고 이렇게 힘들어하는 것을 내가 왜 미처 몰랐을까’하는 생각에 밤잠을 설치면서 기도하게 되요. 그런데,(V) 무엇을 하고 뭔가를 잘 해내는 것이 전부가 아니죠,(V) 그것은 봉사와 사역의 아—주 작은 부분이에요. 그 무엇보다 함께 존재하는 것이, 함께 하는 것이, 함께 있는 것이 전부인 줄로 믿습니다. 목적에 목맨 사람은 그 공동체에서 그 목적을 이루지 못하면, 자기가 원하는 무엇인가에 미치지 못하면 공동체를 떠나는 것을 볼 수 있어요. 그리고 그러한 사람들이 많으면 공동체는 쉽게 무너지기 마련이죠, 부흥은 없어요. 그러나 “They were there.” 존재로서 그 공동체를 지키고 있는 사람들이 많은 공동체는 언제든 주님이 일하실 수 있는 부흥의 토양이 되는 것입니다.
저를 비롯한 모든 교역자들이 교회를 어떤 모양으로든지 섬기고 있는 여러분에게 꼭 드리고 싶은 말씀이 있다면 이것일 것입니다. “집사님, 권사님, 장로님, 성도님, 함께 해 주셔서 너—무 감사드립니다. 함께 교구를 섬겨주시고, 위원회를 섬겨주시고, 때로는 빛나는 자리가 아닐지라도 묵묵하게 함께 해주셔서 정말 감사해요. 그 자리에 계셔주신 것만으로도 저희에게는 너무나 큰 힘이에요.” 사랑하는 여러분, “충성은 존재에서 나오는 거에요.” 그리고 그 충성된 자들 한 사람 한 사람이 모여 그들이 그 곳에 있을 때 부흥은 바로 그 사람들을 통해 시작될 줄로 믿습니다.
저희 10교구 이야기를 안할 수가 없는데요, 저희 교구는 파주의 금촌과 봉일천을 포함한 북부지역, 그리고 고양의 북부지역으로 시작해서 (저 멀리 북한까지) 아주 넓—은 파주/고양의 윗지역을 품고 있는 교구입니다. 파주가 많이 개발되고 운정지구가 들어서면서, 파주 북부지역에 거주하던 젊은 가정들이 파주의 신도시로 나오면서 파주 운정을 비롯한 남부는 인구밀도 높아지고, 상대적으로 파주 북부는 가파르게 인구밀도가 낮아지고 있습니다. 일제심방을 하면서 봉일천 쪽에서 학원을 운영하시는 집사님들을 심방하게 되었는데, 아이들의 수가 눈에 띄게 줄어드니까 학원운영 자체가 어렵다고 할 정도에요. 상대적으로 3040대, 넓게는50대 젊은 가정들이 남쪽으로 오면서 학생들의 수가 줄고, 60대 이상의 연령이 주를 이루는 현상이 자리잡혀 가는 듯 합니다. 또 파주 북부지역은 농촌지역이기 때문에 가끔은 양 쪽에 논이 있는 1차선 논두렁길을 갈 때가 있는데 제가 다른 교구 목사님들한테 이야기를 안 믿더라고요. 그런데 정말 그래요, 아직 곳곳에 비포장도로도 있고요.
제가 우리 10교구 분들에게 정말 감사한 것이 있습니다. 저희 교구분들은 교회오는게 사실 쉽지 않습니다. 대중교통도 서울이나 일산 시내같지 않거든요, 교회에 빨리오면 4-50분, 차 시간을 놓치면 1시 30분도 족히 걸려요. 저—기 문산에서, 또 파평에서, 때로는 적성에서 2시간 걸려 오신분들도 있고요. 교회버스를 타도 적어도 20-30분은 족히 가야 집으로 갈 수 있습니다. 그래도 우리 집사님, 권사님들이 얼마나 귀한지요. 비가 오든지, 눈이 오든지, 차가 있든지 없든지, 없으면 카풀을 해서라도 언제나 이 곳에 나와 함께 예배하고, 함께 목양훈련하고, 함께 기도하고, 함께 봉사하고, 함께 청소하고 하는 모습을 보면서, 제가 지구장님들하고 ‘와, 이게 되네요!’ 감탄한 적이 한 두 번이 아니었던 것 같아요. 교구장으로서 너—무 감사하고, 또 죄송하고, 매순간 많이 배우게 되는 것 같습니다. 늘 그곳에 계신 분들, 자리를 지켜주시는 분들이 참 귀합니다, 감사해요. 그래요, 주님은 그 자리에 있는 자들로 주님의 일을 하시는 줄로 믿습니다.
여러분은 어디에 계신가요? 목장의 목원으로 있습니까? 목자/부목자의 자리에 계신가요? 아니면 위원회와 같은 사역의 자리, 봉사의 자리인가요? 아니면 정말 물리적으로 가까운 곳에 계신가요? 아니면 좀 먼—곳에 계셔서 힘드신가요? 혹시 주님께서 기다리라고 하셨는데, 기다리지 못하고 여러분의 목적을 따라 또 여러가지 이유들로, 때로는 관계의 어려움들로, 주님 부르신 그곳에 있지 못하고 떠나시려는 것은 아닌가요? 또는 물리적인 거리가 좀 멀어서, 아니면 심적인 거리가 좀 멀게 느껴져서 주님 부르신 그 자리에 머물러 있기를 주저하고 계신가요? 주님은 오늘 묵묵히 그 자리를 지키라고 말씀하고 계시는 줄로 믿습니다. 그것이 충성이요, 부흥의 시작점이에요. 오늘 첫번째로 나누고 싶은 것은 이것입니다. (함께 읽겠습니다)

1. 주님이 부르신 그 자리에 있는 것이 충성이요, 부흥의 시작입니다.

계속해서 본문 2-4절 상반절까지 함께 읽겠습니다.
2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 그들이 앉은 온 집에 가득하며 3 마치 불의 혀처럼 갈라지는 것들이 그들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 하나씩 임하여 있더니 4 그들이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마가의 다락방에 있었던 120명의 사람이 무엇을 했을까요? 오늘 본문에서는 잘 알 수 없지만, 우리 1장으로 가서 12-14절을 보면 힌트를 얻을 수 있습니다. 사도행전 1:12-14입니다.
12 제자들이 감람원이라 하는 산으로부터 예루살렘에 돌아오니 이 산은 예루살렘에서 가까워 안식일에 가기 알맞은 길이라 13 들어가 그들이 유하는 다락방으로 올라가니 베드로, 요한, 야고보, 안드레와 빌립, 도마와 바돌로매, 마태와 및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 셀롯인 시몬, 야고보의 아들 유다가 다 거기 있어 14 여자들과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와 예수의 아우들과 더불어 마음을 같이하여 오로지 기도에 힘쓰더라
다락방에 모인 모든 사람들이 마음을 모아, 끈기를 가지고 전심으로 기도할 때 가운데 성령의 임재가 있었고, 성령의 충만함을 받았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어요. 사랑하는 여러분, 다락방에 모인 120명의 성도들이 누구한테 기도를 배웠겠습니까? 네! 바로 예수님이죠. 누가가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을 기록하였는데, 누가가 기록한 이 두 책의 특징은 바로 기도라고 할 수 있어요. 예수님께서 중요한 일을 앞두실 때마다 기도하셨던 것처럼, 특별히 사도행전의 사도들 역시 예수님의 모범을 따라 기도하는 거에요.
[행2:42] 그들이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고 떡을 떼며 오로지 기도하기를 힘쓰니라
그들은 공동체로 모일 때마다 기도했어요,
[행3:1] 제 구 시 기도 시간에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올라갈새
시간을 정해서 정기적으로 기도의 시간을 지켰고요,
[행6:4] 우리는 오로지 기도하는 일과 말씀 사역에 힘쓰리라 하니
말씀사역과 기도하는 일에 매진했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행6:6] 사도들 앞에 세우니 사도들이 기도하고 그들에게 안수하니라
그들은 교회의 일꾼들을 기도로 세웠어요.
[행8:15] 그들이 내려가서 그들을 위하여 성령 받기를 기도하니
이방에 복음을 전할 때도 성령의 충—만함을 위해 기도했던 것을 볼 수 있어요.
제자들은 모일때마다 기도했고, 어떤 일을 하든지 기도로 시작했어요. 주님이 그랬던 것처럼 말이에요. 행동과 말이 기도보다 앞서지 않았어요. 기도는 초대교회의 모든 사역의 기초였고, 시작과 끝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어요. 기도의 능력으로 자신들의 사역을 감당할 힘을(!) 얻었던 것이죠. 기도없이는 그 무엇도 할 수 없었어요.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도 주어진 사역을 위해서는 기도해야 합니다. 다 그렇게 기도하시지요? 우리에게 어떤 인생의 숙제가 떨어지면 우리는 기도하지요. 누군가가 시켜서 하기도 하고, 뭘 할 생각을 하니까 내가 떨려서라도 기도하곤 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오늘 본문 전후로 120명의 성도들이 기도하고 있는 상황은 말그대로 “공백기”이에요. 예수님께서 성령이 오실 것이니 기다리라고는 하셨는데, 아직 성령님이 오시지 않았던 그 공백의 상황에서 기도하는 거에요. 뭔가가 정해지지 않은 불안한 상황, 한치 앞을 모르는 그 상황에서 함께 있는 120명은 기도를 선택하는 거에요. 주님 앞에 무릎을 꿇는거에요.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이러한 질문을 던지는 것 같습니다. “당신에게 당장 아무런 일이 벌어지지 않고, 눈에 보이는 변화가 없어도, 때로는 당신에게 특별한 역할이 주어지지 않아도 당신은 기도하는 사람입니까?” 특별히 “기약없는 주님의 약속을 붙잡고 또는 응답되지 않고 있는 기도제목을 붙잡고 끝까지 포기치 않고 여러분은 기도하고 있나요?”
저희 교구에 올해로 88세 되신 한 권사님이 계십니다. 권사님 댁에 방문해서 심방을 하면서, “권사님, 기도제목이 뭐에요?, 제가 함께 기도할게요.” 여쭤보니까 예순이 넘은 아드님을 위해서 기도한다는 거에요. 아들이 어렸을적에는 자기를 따라서 교회에 나왔는데 어느순간 아들이 교회에 나오지 않는다고 하면서 계속해서 아들의 신앙이 다시 회복될 수 있도록, 무너진 그 믿음이 다시 일어서도록 아들의 신앙과 또 아들 가정의 부흥을 위해 기도하시는 거에요. 그래서 제가 한번 더 여쭤봤어요, “권사님, 혹시 이 기도제목을 놓고 얼마나 기도하셨어요?”, “저요? 한 50년 됐을걸요”.
무려 아들의 신앙생활, 굳건한 믿음을 위해 기도한지가 50년이 지난거에요. 심방을 마치고 오는데, 50년에 담긴 우리 권사님의 눈물이 느껴지고, 간절함이 느껴지면서 기도가 절로 나오는 거에요. “주님 정말 일하고 계시죠? 주님 우리 권사님의 기도에 응답해주세요.” 사랑하는 여러분, 저는 우리 주님께서 권사님의 기도에 응답해주실 줄로 믿습니다. 자녀의 신앙이 다시 주님을 향하도록, 무너진 믿음이 다시 바로 서도록, 가정의 부흥을 위해 무려 50년을 기도하신 권사님의 기도, 여러분에게 어떤 의미로 다가오십니까? 언젠가 이루실 주님을 바라보며 기도로 그 영광의 날을 맞이할 준비를 하는 거에요. 저는 이것을 기도의 끈기라고 부르고 싶어요.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은 기도하고 계신가요? 당장 눈 앞에 무엇인가가 잡히지 않는 듯한 절망감에, 아니면 응답없는 길고 긴 공백기를 보내며 낙심하고 지쳐서 혹시 기도를 쉬고 있지는 않으세요? 사랑하는 여러분, 저는 우리 모두가 어떤 상황에 있든지 끈기를 가지고 전심으로 기도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변하지 않는 상황에 함몰되지 않고, 포기하지 않는 기도의 끈기로 부흥의 문을 여는, 저와 여러분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래서 오늘 두번째로 나누고 싶은 것은 이것입니다. (함께 읽겠습니다)
2. 끈기있는 기도로 부흥의 문을 여십시오.
계속해서 4절을 한번 더 읽겠습니다.
그들이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언어들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
이어서 9-11절입니다.
9 우리는 바대인과 메대인과 엘람인과 또 메소보다미아, 유대와 갑바도기아, 본도와 아시아, 10 브루기아와 밤빌리아, 애굽과 및 구레네에 가까운 리비야 여러 지방에 사는 사람들과 로마로부터 온 나그네 곧 유대인과 유대교에 들어온 사람들과 11 그레데인과 아라비아인들이라 우리가 다 우리의 각 언어로 하나님의 큰 일을 말함을 듣는도다 하고
이 사건을 보고 있노라면, 창세기 11장의 바벨탑 사건이 떠오릅니다. (창11:1-9한절씩 교독)
1 온 땅의 언어가 하나요 말이 하나였더라 2 이에 그들이 동방으로 옮기다가 시날 평지를 만나 거기 거류하며 3 서로 말하되 자, 벽돌을 만들어 견고히 굽자 하고 이에 벽돌로 돌을 대신하며 역청으로 진흙을 대신하고 4 또 말하되 자, 성읍과 탑을 건설하여 그 탑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여 우리 이름을 내고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 하였더니 5 여호와께서 사람들이 건설하는 그 성읍과 탑을 보려고 내려오셨더라 6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이 무리가 한 족속이요 언어도 하나이므로 이같이 시작하였으니 이 후로는 그 하고자 하는 일을 막을 수 없으리로다 7 자, 우리가 내려가서 거기서 그들의 언어를 혼잡하게 하여 그들이 서로 알아듣지 못하게 하자 하시고 8 여호와께서 거기서 그들을 온 지면에 흩으셨으므로 그들이 그 도시를 건설하기를 그쳤더라 9 그러므로 그 이름을 바벨이라 하니 이는 여호와께서 거기서 온 땅의 언어를 혼잡하게 하셨음이니라 여호와께서 거기서 그들을 온 지면에 흩으셨더라
창세기 1-11장은 이스라엘의 역사가 본격적으로 시작되기 전, 인류의 이야기들을 다루고 있어요, 이것을 원역사라고 부르는데, 원역사가 담고 있는 내용은 이렇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창조하셨어요. 하지만 죄로 인해 그 세상이 어그러지고 타락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창세기 6:3절입니다.
[창6:3]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나의 영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육신이 됨이라 그러나 그들의 날은 백이십 년이 되리라 하시니라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영을 거두실정도로 우리 인간의 죄, 그 죄의 추악함이 온 세상을 덮는 거에요. 하나님께서 한탄하시며 노아의 홍수를 통해 이 세상을 심판하시고 새로운 기회를 주시지만 곧 인간은 또 이 세상을 죄로 채워갑니다. 인간의 죄로인해 얻은 것이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과의 단절”이에요, 죄로인해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를 잃어버린 것이죠. 그 후 인간은 하늘에 닿을 탑을 쌓기 시작합니다. 하나님과 다시 친밀해지기 위해서, 주님과 가까워지고 싶어서 탑을 쌓는 게 아니에요, 하나님과 같이 높아지기 위해, 그 높은 하나님의 자리에 앉기 위해 계속해서 더 높이 탑을 쌓고 있는 거에요. 탑이 높아지면 높아질수록 인간은 파멸을 향해 가고 있는 것이에요. 그 때 하나님이 개입하셔서 언어를 혼잡하게 하시고, 온 인류를 지면에 흩어버리십니다. 이제 인간은 하나님과의 단절을 넘어, 사람과 사람 사이의 단절을 경험하게 되요. 이제 서로의 언어를 알아 들을 수 없을 뿐만 아니라 흩어져서 살기에 만날 수도 없는 것이죠.
그런데 오늘 성령충만의 결과로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습니까? 가장 눈에 띄는 것은 120명의 사람들이 갑자기 다른 나라의 말을 하기 시작하는 거에요. (우리가 흔히 이 시대에 은사라고 말하는) 이해할 수 없는 방언이 아니라, “그 나라 사람이면 누구나 들을 수 있는 명확한 언어”로 하나님의 큰 일을 말하는 것이에요. 오늘 성령의 충만한 역사는 죄로인해 흩으셨던 사람들을, 그 죄의 결과로 언어가 다르고, 사는 곳이 달라서 단절되어 있던 사람과 사람을, 다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자녀로—흩어진 자들을 다시 하나로—묶으시는 거에요. 성령님께서 이것을 경험하게 하시는 사건이 바로 오늘의 성령강림사건이요, 초대교회 부흥의 시작인 것이죠. 그 뿐 만이 아닙니다, 베드로는 오늘 본문 바로 뒤에 설교를 통해 오늘 이 성경강림의 사건이 요엘선지자의 예언을 성취했다고 말하고 있어요. 요엘 선지자는 마지막 때 하나님이 만민에게 하나님의 영을 부어주시고, 모든 육체에 예언의 영을 보내실 것이라고 예언합니다. 요엘 2:28-29 입니다.
28 그 후에 내가 내 영을 만민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 자녀들이 장래 일을 말할 것이며 너희 늙은이는 꿈을 꾸며 너희 젊은이는 이상을 볼 것이며 29 그 때에 내가 또 내 영을 남종과 여종에게 부어 줄 것이며
우리가 앞서 보았듯이/ 죄로인해 인간으로부터 거두어진 하나님의 영이/ 성령강림사건을 통해 사람들에게 다시 부어지고 있다는 것이에요. (할렐루야!) 이것은 더이상 우리가 하나님과 단절된 관계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다시 우리가 하나님과 화목해졌음을 말씀하고 있는 거에요. 이것이 바로 오늘 성령님께서 오순절 마가 다락방에 모인 120명에게 깨닫게 해주신 것이에요.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큰— 일이에요. 죄로 말미암아 단절 된 모든 것이 회복되는 것—즉,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단절된 관계가 회복되고, 사람과 사람과의 단절된 관계가 회복되는 놀라운 역사—가 오늘 마가의 다락방에서 성령님을 통해 확증되고, 모인 사람들로 하여금 이 하나님의 큰 일—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이 성령님을 통해 이해되기 시작하고 있다는 거에요. //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 죄로 인해 단절되어 있는 이 모든 관계를 회복하시기 위해, 곧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부활하셨을 뿐 아니라, 예수님이 보내주신 성령께서 이 모든 것을 깨닫게 하셨다는 그 놀라운 일을 선포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 하나님의 놀라운 큰 일이 선포될 때 비로소 초대교회가 부흥을 맞이하게 되었던 것이죠.
사랑하는 거룩한빛광성교회 성도 여러분, 저는 우리 거룩한빛광성교회 모든 성도들이 무엇보다 “하나님의 큰—일, 그 중심에 있는 예수 그리스도”를 온전히 이해하고 경험하며 선포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의 입술로 무엇을 선포하고 있습니까? 혹시 하나님의 큰 일—예수님이 여러분을 위해 행하시고 보이셨으며 베푸신 은혜—는 잊어버리고, (아니 조금 더 솔직하게 말해서) 잘 모르고, 우리의 현재의 자랑만, 때로는 우리가 원하는 것들만 얘기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우리의 집문제가, 우리의 자녀문제가, 우리의 재정의 문제가 “하나님의 큰 일보다 더 큰 일로 선포되고 있지는 않습니까?” 우리 앞에 놓인 그 문제만 해결되면 여러분 삶에 부흥이 찾아올 것 같은 착각에 빠져있지는 않습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저는 우리 모두가 오늘 이 아침 성령님을 통해 주님을 온전히 알게 되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의 문제보다 더 크신 주님을 알기 원합니다. 나에게 예수님이 어떤 의미인지, 우리가 신앙을 갖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성령님께서 깨닫게 해주시길 원합니다. 그러면/그러면, 누가 여러분에게 말하지 않아도 여러분 스스로 하나님의 그 크고 위대한 일, 예수 그리스도가 여러분 입술에서 터져나오게 될 줄로 믿습니다. 그게 바로 우리가 다시 한 번 경험해야할 부흥인 줄로 믿습니다. 그래서 오늘 마지막으로 나누고 싶은 것은 이것입니다.(함께 읽겠습니다)
3. 부흥은 “하나님의 큰 일”을 이해하고 경험한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선물입니다.
말씀을 마무리하려고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주님이 부르신 그 자리에 있는 것이 충성이요, 부흥의 시작입니다. 주님 부르신 그 자리 머물며 끈기있는 기도로 부흥의 문을 여십시오. 특별히 부흥이 “하나님의 큰 일”, 바로 예수그리스도를 이해하고 경험한 사람에게 주어지는 선물임을 기억하세요. 그래서 우리 거룩한빛광성교회 이 자리에 있는 우리 모두가 다시 한 번 부흥을 경험하는 축복이 넘치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찬양] 오소서 진리의 성령님(부흥2000)
이 시간 우리가 기도할 때에 성령님의 도우심을 구하길 원합니다. 주님께서 여러분을 부르신 그 자리—그곳—에 있기가 힘드신가요? 다시 주님의 도우심을 구하십시오. 또한 여러분의 기도가 혹시 멈춰있습니까? 결과가 당장에 보이지 않아도, 기다리는 시간이 길어진다할지라도 끈기있게 기도할 수 있는 힘을 달라고 구하세요. 그리고 하나님의 큰—일, 예수님의 놀라운 일을 깨닫고 알 수 있도록 성령님께 지혜를 구하십시오. 그리하여 부흥을 경험하는 우리가 되도록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이 시간 주여 한번 크게 부르짖고 기도하겠습니다!
사랑의 주님, 오늘 귀한 말씀을 우리에게 허락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무엇보다 성령하나님 이 시간 임재하셔서 우리의 연약한 인생을 불—쌍히 여기사 이 세상을 살아갈 힘을 부어주시옵소서. 다시 한번 일어날 수 있는 힘을 주시옵소서. 지친 영혼이 다시 살아숨쉬도록 힘을 주시옵소서. 우리에게 다시 한 번 부흥을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주가 부르신 그 부르심의 자리에 있기 원합니다. 우리의 마음과 우리의 건강을 붙잡아 주시옵소서. 눈에 보이지 않는 인생의 공백앞에서 끈기있게 기도하지 못했던 우리의 연약함을 불쌍히 여겨주시사 주님이 부르신 그 자리에 머물며 끈기있는 기도로 부흥을 맛보게 하여 주시옵소서. 무엇보다 성령님 이 시간 우리가 하나님의 큰 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사랑을 더 깊이 체험하기 원합니다. 더 깊이 이해하기 원합니다. 성령님 무지한 우리에게 오셔서 하나님의 큰 일을 깨닫게 하시고, 우리가 산 증인으로 하나님의 큰 일, 예수 그리스도를 선포할 때 다시 한 번 부흥을 경험하는 우리가 되도록 주여 축복하여 주시옵소서.
이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다함이 없는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 다시 한 번 부흥을 갈망하며 머리숙인 주의 백성들 머리위에// 특별히 지진과 홍수로 신음하고 있는 모로코와 리비아 땅 위에, 그리고 온 세계와 열방가운데, 지금부터 영원까지 함께하시기를 간절히 축원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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