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합적 영성과 리더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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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합적 영성과 리더십
본문말씀: 느혜미야 1:1~4
“(느 1, 개정) 『[1] 하가랴의 아들 느헤미야의 말이라 아닥사스다 왕 제이십년 기슬르월에 내가 수산 궁에 있는데 [2] 내 형제들 가운데 하나인 하나니가 두어 사람과 함께 유다에서 내게 이르렀기로 내가 그 사로잡힘을 면하고 남아 있는 유다와 예루살렘 사람들의 형편을 물은즉 [3] 그들이 내게 이르되 사로잡힘을 면하고 남아 있는 자들이 그 지방 거기에서 큰 환난을 당하고 능욕을 받으며 예루살렘 성은 허물어지고 성문들은 불탔다 하는지라 [4] 내가 이 말을 듣고 앉아서 울고 수일 동안 슬퍼하며 하늘의 하나님 앞에 금식하며 기도하여”
저는 오늘 여러분들과 함께 ‘통합적 영성과 리더십’이란 제목으로 하나님 말씀을 나누기를 원합니다.
1999년, 미국국제개발처(USAID) 주관으로 스리랑카 콜롬보에서 열린 한 세미나에서 조그마한 해프닝이 있었습니다. 세미나 주제는 국가경쟁력이었고, 청중은 스리랑카, 인도, 방글라데시 등 동남아시아 경제 지도자들과 전문가들이었습니다.
주제 발표자 중의 하나인 코스타리카의 전 대통령 피구에레스가 어떻게 자기 나라가 인텔의 공장을 유치했고, 정보 혁명에 성공적으로 적응했는지를 한 시간가량 들려주었습니다. 그런데 질문시간이 되자 놀랄 일이 벌어졌습니다. 동남아시아 청중들이 연이어 일어나 그에게 이런 질문을 던졌습니다. “혹시 우리나라 대통령으로 출마하실 의향 없으십니까?” 장난이 아니었습니다. 진지한 분위기에서 비중 있는 인물들이 연이어 심각하게 질문한 것이었습니다.
피구에레스의 발표를 들은 참석자들은 한결같이 이렇게 애기했습니다. 어째서 우리는 저런 사람을 지도자로 두지 못한 거지? 건달짓이나 하고 있는 우리나라 부패 층 지도인사들은 모두 뿌리 뽑아야 하는데, 그들이 아직 시퍼렇게 자리를 지키고 있으니 나라가 이렇게 된 거 아닌가. 저 만한 지도자를 나라 안에서 구할 수 없다면 외국에서라도 데려오면 될 것 아닌가?라고 이야기 했습니다.
실제로 그 자리에 있던 스리랑카의 한 대기업 경영자는 “내게 그 사람(외국에서 스카우트 해 오는 탁월한 대통령)급여를 몽땅 다 지불하라고 해도 난 개의치 않을 거요”라며서 흥분했습니다.(한홍, 세상 중심에서다)
우리는 세월호 침몰사건이나 삼풍백화점 붕괴 사건을 통해서도 리더의 리더십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지금으로부터 약2천500년 전 유대땅 예루살렘에 한 명의 리더가 등장합니다. 이 사람은 목회자도 아니었고, 학자도 아니었습니다. 그는 평범한 평신도 지도자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평신도 지도자의 마음에 뜨거운 소원을 주셨고, 그 소원으로 지도자가 된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의 이름은 ‘느혜미야’입니다.
느헤미야는 뛰어난 리더십을 가진 인물이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강했을 뿐 아니라, 실행 능력도 뛰어났습니다. 우리가 주변 사람들을 보면, 어떤 사람들은 기도만 합니다. 또 어떤 사람은 행동만 합니다. 우리는 느혜미야를 통해 깨달아야 할 리더십이 있습니다. 그 것은 통합적 리더십인 것입니다. 그는 기도와 행함을 겸비한 사람이었습니다. 믿음과 지성을 겸비한 사람이었습니다.
통합적 리더십이란 다른 말로 하면 전인격적인 리더십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이 통합적 리더십은 우리가 타인과의 관계에서 나타내는 영향력으로 그 ‘건강도’를 체크해 볼 수 있습니다.
사람이 건강하다고 하여도 부분적으로 건강하다면, 그것은 진짜 건강한 게 아닙니다. 피부와 근육과 조직은 건강한데, 내장 기관은 그렇지 못한 사람을 가리켜 건강하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물론 100% 건강한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모든 사람은 부분적으로 연약한 부분이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 연약한 부분이 자신의 건강의 균형을 깨뜨릴 만큼 영향을 미치지는 않기 때문에 우리는 그러한 사람을 가리켜 건강한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영성과 리더십도 마찬가지입니다. 성경은 사람을 영, 혼, 육으로 분류합니다. 데살로니가전서 5장23절 말씀에, “평강의 하나님이 친히 너희를 온전히 거룩하게 하시고 또 너희의 온 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강림하실 때에 흠 없게 보전되기를 원하노라”라고 말씀합니다.
어떤 사람은 영이 무척 건강합니다. 늘 깨어 기도하고, 성경보고, 전도합니다. 그런데 그의 삶에는 무언가 예수그리스도의 향기가 나지 않습니다. 왜 그럴까요? 그에게 ‘혼과 육’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가 혼과 육을 잘 관리를 하지 않는다면 건강한 리더십과 영성을 가질 수 없는 것입니다. ‘혼’은 무엇입니다. 혼은 히브리어로 네페쉬, 헬라어로 푸쉬케라고 합니다. 그것은 사람의 정신, 즉 인격을 가리켜 말합니다. 히브리어는 ‘혼’을 표현할 때 영과 구별된 단어를 사용합니다. 혼은 ‘네페쉬’입니다. 영은 ‘루아흐’입니다. 그리고 헬라어로 ‘혼은’ ‘푸쉬케’입니다. 영은 ‘프뉴마’입니다.
영어로 혼은 Soul이고, 영은 Spirit으로 번역합니다. 물론 학자들 중에 이 둘의 차이를 인정하지 않고, 인간을 설명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히브리인들은 사람을 영과 혼과 육으로 나누지 않고, 영,혼,육을 통합하여 인간을 설명합니다. 또한 장로교인들은 2분설을 주장합니다. 사람을 영과 육으로 나누어 설명합니다. 저는 1분설을 지지하면서도 성경이 말하는 3분설에 대해서도 지지하는 바입니다.
혹시나 저와 견해가 다른 분들은 오해하지 마시고 들어주시기 바랍니다. 저는 성경에 기록된 대로 인간을 영과 혼과 육으로 나누어 설명합니다. 사람에게 혼이 있기 때문에 그가 옛 과거에 상처가 있거나, 가정사에 문제가 있었거나, 죄를 지어 좋지 못한 습관이 생겼거나, 배우려고 하지 않고 자기 것만 주장하는 태도가 있다면 그가 아무리 하나님과 관계가 좋다고 스스로 생각하여도 그의 삶에는 예수님의 향기가 나타날 수 없습니다. 육체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육체를 함부로 관리하고, 사용한다면 아무리 선한 일을 한다고 해도, 기도를 오래 한다고 해도, 성경을 오래 읽으려고 한다고 해도 육체가 따라주지 않기 때문에, 그러한 사람들은 하나님의 선한 뜻을 이루지 못할 때가 많은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의 리더십과 영성은 입체적이고, 통합적으로 관리되어야 합니다.
가슴만 뜨거운 사람에게는 적절한 독서와 배움이 필요합니다. 머리만 뜨거운 사람에게는 기도와 경건 훈련이 필요합니다. 가슴과 머리가 둘 다 뜨거운데 육신이 나약한 사람들은 적절한 운동과 식습관의 개선이 필요합니다. 물론 우리가 건강한 리더십과 영성을 가지려는 이와 같은 일련의 노력 위에는 우리의 생각을 뛰어넘어 역사하시는 하나님이 계시다는 사실을 분명이 인식하고 있어야 합니다.
저는 오늘 본문을 통해 느혜미야가 가지고 있었던 통합적 영성과 리더십의 특징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첫째로, 느혜미야의 통합적 영성과 리더십의 특징은 ‘공감능력’에 있습니다.
공감능력은 태어날 때부터 타고난 사람도 있고, 후천적으로 길러지는 사람도 있습니다. 저 같은 경우 후자에 속하는 사람입니다. 남의 형편과 상황을 공감해 줄 수 있는 리더십은 다수를 이끌어가기에 적합한 리더십입니다.
저는 예수님을 믿은 이후에 이 공감능력이 많이 길러졌습니다. 성경을 읽고, 기도하는 가운데 영혼을 사랑해야하고, 그 영혼에 대한 필요를 채워주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의 필요를 채워주시고 공감해 주시기 위해 이 땅에 오셨기 때문입니다.
요 10:10절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합니다. “도둑이 오는 것은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라고 말씀합니다.
마귀는 우리를 공감해 주지 않습니다. 마귀는 자기중심적입니다. 자기의 뜻을 따라 하지 않는 사람은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고 혈안이 되어 있습니다. 반면에 예수님은 그 높고 높은 곳에서 저와 여러분들을 사랑하시어 하늘 보좌 다 버리시고, 미천한 몸으로 태어나신 분이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총명한 랍비가 이런 질문을 청중들에게 했습니다. 당신들 앞에 수많은 개미가 줄을 지어 10미터 앞 낭떠러지로 향하고 있습니다. 당신들이 개미를 살릴 수 있는 방법이 있다면 말씀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러자 청중들 중에 한 명이 “저는 개미가 낭떠러지로 가지 못하도록 손으로 개미를 막아 보겠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그 랍비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그럼 당신 앞에 지나가고 있는 개미를 손으로 막아 보시기 바랍니다. 그러자 개미는 그 손을 피해 이리저리 도망가기 바빴습니다. 그 과정 속에 몇몇 개미는 손가락에 짓눌려 죽기까지 했습니다. 또 다른 청중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저는 개미가 무사히 그 낭떠러지를 건널 수 있도록 다리를 만들어 주겠습니다.” 실제 그 사람은 나무로 다리를 만들어 낭떠러지에 연결해 보았습니다. 그런데 개미들 중 대부분은 나무다리가 아닌 낭떠러지 밑으로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청중들의 이런저런 대답을 듣고 있던 현명한 랍비는 큰 소리로 이렇게 말했습니다.
“당신들이 정말로 개미를 구하고 싶다면 당신들이 개미가 되어 개미들에게 10미터 전방에 낭떠러지가 있다고 알려주시기 바랍니다. 그것이 가장 많은 개미를 살릴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일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저와 여러분들을 공감해 주시기 위해서 개미가 되신 것과 같습니다.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서 희로애락을 느끼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저 높은 곳에 있으셨기 때문에 높은 사람들을 이해하실 수 있습니다. 또한 예수님께서는 저 낮고 낮은 곳에 돌베개를 베고 주무셨던 경험도 있으시기에 천한 사람들의 아픔과 힘듦 또한 피부로 와 닿게 공감하실 수 있는 것입니다.
이 공감 능력은 영혼을 구원하고, 건강한 영성과 리더십을 가지게 합니다.
1장 1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느 1:1, 개정) “하가랴의 아들 느헤미야의 말이라 아닥사스다 왕 제이십년 기슬르월에 내가 수산 궁에 있는데” 라고 말합니다.
느헤미야는 그의 아버지 하가랴가 바벨론으로 잡혀온 이후에 태어난 포로2세 였습니다. 그런데 그가 지금 아닥사스다왕과 함께 수산 궁에 있다고 말합니다. 수산궁은 페르시아의 수도였고, 아닥사스다왕이 겨울을 보내는 휴양지와 같은 곳이었습니다.
그런데 왜 느혜미야와 같은 포로2세가 왕과 함께 휴양지에 있는 것일까요? 그것은 그 당시 바벨론이나, 페르시아에는 공무원들을 등용할 때 출신보다는 사람의 능력과 성품을 중시하여 공무원을 등용하는 문화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포로로 잡혀 갔던 다니엘이나 그의 친구들도 그들의 능력을 알아보았던 관리들을 통해 왕을 접견할 수 있는 자리에까지 올라갈 수 있었던 것입니다. 느헤미야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는 11절 말씀에 보시면 “왕의 술 관원”의 자리에까지 올라갑니다.
페르시아의 왕들은 독살을 많이 당했습니다. 아닥사스다 왕의 아버지가 에스더의 남편인 아하수에르 왕입니다. 영화 300에서 등장한 크레르크세스가 바로 아하수에르 왕입니다. 그 아하수에르 왕도 신하들의 독살로 죽고 맙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닥사스다 왕은 자신의 최 측근의 자리에 술 관원과 떡 관원을 들여 자신의 신변을 보호할 뿐 아니라, 이런 저런 생각들을 함께 나누며 나라를 이끌어 갔습니다. 자신이 먹을 포도주를 관리하고, 왕이 식사하기 전에 먼저 시음하는 사람이 술관원이었습니다. 오늘날로 말하면 대통령 경호실장의 직위에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느헤미야가 왕과 함께 수산 궁에 머물 수 있었던 것입니다.
술관원은 왕의 최측근의 자리에 위치해야 했기 때문에 외모도 뛰어나야 했고, 머리도 좋고, 언변과 학식이 있어야 할 뿐 아니라 왕을 호위해야 했기 때문에 무예실력도 있어야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느혜미야를 그 당시 아주 높은 자리에까지 올려주셨던 것입니다.
그런 느혜미야가 2절 말씀에 등장하는 그의 형제 하나니를 보고 공감해 주는 것은 실로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처지가 다른 사람을 공감해 준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기 때문입니다.
자기중심적인 사람은 남의 말을 들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저 만나면 자기 얘기만 계속합니다. 이런 사람들은 공감능력이 부족한 것입니다. 누군가를 공감해 주기 위해서는 자기 얘기만 하기보다는 남의 얘기를 경청할 수 있어야 합니다. 저와 여러분들도 교회 내에서 이런저런 성도들과 만나면 다른 사람들의 말에 경청해 주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타인의 말에 왜 경청할까요? 그것은 다른 사람들의 필요가 무엇인지 알기 위함입니다. 예수님의 영성과 리더십은 항상 자기중심적이지 않았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분의 영성과 리더십도 남을 공감하는 통합적 영성과 리더십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물가에서서 만난 여인에게 먼저 말을 걸고, 그녀의 필요를 채워주기 위한 질문들을 했습니다.
사마리아 여인에게 유대인이 먼저 말을 거는 것은 그 당시 풍습에 맞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유대인들은 사마리아인들이 신앙을 잃어버린 혼혈인들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들과 식사도하지 않고, 만나도 인사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 배경 가운데에도 예수님이 먼저 여인에게 “물 좀 달라고” 말을 거시는 것은 대단한 일이었습니다.
(요 4:9-10, 개정) “[9] 사마리아 여자가 이르되 당신은 유대인으로서 어찌하여 사마리아 여자인 나에게 물을 달라 하나이까 하니 이는 유대인이 사마리아인과 상종하지 아니함이러라 [10]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선물과 또 네게 물 좀 달라 하는 이가 누구인 줄 알았더라면 네가 그에게 구하였을 것이요 그가 생수를 네게 주었으리라“
예수님은 여인을 공감해 주시기 위해 먼저 자신의 신분을 밝히십니다. 지금 네 앞에 있는 사람은 이 우물을 팠던 야곱보다 큰 자이다. “이 물을 마시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곳에서 영생하도록 속아 나는 샘물이 되리라” 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대화를 참 잘하십니다. 그 여인은 삶의 문제가 깊고, 어렵고, 복잡했기 때문에, 그 어떤 사람에게도 마음의 문을 열 수 없었습니다. 그런 그녀에게 예수님은 자신의 신적 권위에 대한 믿음을 깨닫게 하고, 실제 그 여인의 아픈 부분을 공감해 주시기 위해 말씀을 하십니다.
요 4:16-17절 말씀입니다. “[16] 이르시되 가서 네 남편을 불러 오라 [17] 여자가 대답하여 이르되 나는 남편이 없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남편이 없다 하는 말이 옳도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공감해 주십니다. “맞다 네게는 남편이 없다” 예수님께서는 그 여인이 이미도 다섯 남편이 있었고, 지금 오고, 가다 만난 남자가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남자들이 그 여인에게는 진실 된 남편이 되어주지 못했다는 사실에 예수님은 공감해 주셨던 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예수님과 같은 공감 능력이 없었다면 우린 이렇게 말했을 것입니다. “당신은 하나님 앞에서 거짓말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다섯 남편이 있었고, 지금도 어떤 남자와 살고 있는데, 당신은 성경이 말하는 가정을 이루며 살고 있지 않습니다. 성경은 분명 한 남편에게 한 부인을 주셨습니다. 그런데 당신은 왜 그렇게 많은 남편들과 방탕한 삶을 사셨습니까? 그것은 엄연히 죄입니다. 어서 빨리 하나님 앞에 회개하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의 이 공감능력을 통해, 이 사마리아 여인은 자신이 지금까지 목말라 갈급할 때 마다 찾고, 의지하려했던 남자들은 자신의 참된 평안과 목마름을 해결해줄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영원이 목마르지 않는 샘물 되시는 예수님을 그의 삶의 메시아, 즉 구원자로 믿고 모셔 들이게 됩니다.
(요 4:25-26, 개정) 『[25] 여자가 이르되 메시야 곧 그리스도라 하는 이가 오실 줄을 내가 아노니 그가 오시면 모든 것을 우리에게 알려 주시리이다 [26]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게 말하는 내가 그라 하시니라』
느혜미야 또한 예수님과 같은 통합적 영성과 리더십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느 1:2절 말씀입니다. “내 형제들 가운데 하나인 하나니가 두어 사람과 함께 유다에서 내게 이르렀기로 내가 그 사로잡힘을 면하고 남아 있는 유다와 예루살렘 사람들의 형편을 물은즉
느헤미야는 귀를 열고 경청합니다. 오랜만에 만난 자신의 친 동생에게 자신이 얼마나 큰 업적을 이루었으며, 자신이 얼마나 왕의 총애를 받고 있는지, 자신의 자리에 오르려면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강의하지 않습니다. 그는 그저 동생의 상황과 처지에 관심을 보입니다. 그리고 그들의 형편을 물어봅니다.
여기서 우리가 깨달아야 할 것은 공감능력은 타인을 향한 관심과 사랑에서 시작된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우리의 마음에 예수님의 사랑이 없다면, 타인을 향한 사랑과 배려가 없다면 타인의 상황과 관심에 공감할 수 없는 것입니다.
느헤미야는 어떻게 동생과 동생이 머물던 예루살렘에 관심이 있었을까요? 그 이유는...
첫째로, 느혜미야가 부모님으로부터 신앙교육을 철저히 받았던 게 틀림없습니다.
왜냐하면 느헤미야는 포로2세이기 때문에 자신의 혈육이 살고 있는 예루살렘에서 태어나지도 않았고, 전쟁의 포로로 잡혀가는 경험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페르시아에서 태어나 교육받고 자랐던 유대인포로 2세였습니다. 그런 그가 예루살렘에 살고 있는 자신의 혈육에 대해서 묻고 있다는 것은 신앙 교육을 통해 자연스럽게 그 마음에 쌓인 연민의 정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하나니와 예루살렘에서 온 사람들은 느혜미야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3절 말씀입니다. “그들이 내게 이르되 사로잡힘을 면하고 남아 있는 자들이 그 지방 거기에서 큰 환난을 당하고 능욕을 받으며 예루살렘 성은 허물어지고 성문들은 불탔다 하는지라” 라고 말씀합니다.
1300km떨어진 곳에서 벌어진 일을 느혜미야가 듣고 있습니다. “자신의 혈육이 큰 환난을 당했고, 능욕을 받고 있으며, 예루살렘 성과 성문은 불탔다.”라는 말을 듣는 순간 느혜미야의 심장은 멎을 듯 아파오기 시작했습니다. 이것은 신앙심에서 일어나는 공감대였습니다.
둘째로, 이 마음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마음이었습니다.
중국에서 지진이 일어나 수백명의 사람이 죽었다는 소식을 뉴스를 통해 듣게 됩니다. 우리 중 얼마나 이 소식 때문에 마음이 찢어질듯 한 아픔을 경험 하시겠습니까? 안타깝고, 슬픈 일이지만 나와는 거리가 먼 이야기에 불과한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특정 사람들의 마음에는 남다른 소원을 주십니다.
6,25당시, 전쟁의 참사를 사진으로 남겼던 한 미국인이 있었습니다. 그는 미국으로 돌아와 미국 상류층들이 모이는 사교모임에서 그 사진을 인화해 보여주었습니다. 그런데 그 곳에 있던 한 부부가 그 사진을 보고 마음에 큰 감동을 받아 많은 돈을 기부합니다. 그리고 그 부부는 집으로 돌아와 잠을 청하려고 하는데 계속 눈에 그 전쟁 참사로 집을 잃고 헤매는 아이들의 모습이 눈에서 떠나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다음 날 출근하여 일을 하는데 하루 종일 한국의 고아들의 모습이 눈에 떠나지 않아, 그 부부는 직접 한국을 찾아 전쟁의 실상과 그로 인해 어려움을 겪고 있는 한국 고아들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그리고 그들은 2~3명의 아이들을 미국으로 데려와 정성껏 키웁니다. 그런데도 그들의 마음은 한국 고아들에게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다시 한국을 찾아 20명도 넘는 고아들을 미국으로 데려옵니다. 급기야는 자신들의 전 재산을 팔아 한 재단을 만듭니다. 그것이 홀트아동복지 재단입니다. 그 홀트 부부에게 하나님께서 특별한 마음을 주셨던 것입니다.
빌립보서 2장 13절 말씀에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에게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특별히 주신 마음은 다른 사람들을 공감해 주고, 그들의 필요를 채워주라고 주신 마음임을 깨달으시기 바랍니다.
둘째로, 느혜미야의 통합적 리더십의 특징은 기도에 있습니다.
우리가 공감해 줄 때 상대는 큰 기쁨을 얻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공감하고 기도하면 상대는 하나님의 능력까지 체험합니다.
우리가 상대를 공감해 주는 것은 마치 바다 위를 표류하고 있는 사람의 마음에 돛을 달아주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수고를 우리가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가 바다에서 표류하지 않고 원하는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게 됩니다. 그런데 그 가운데 바람이 불지 않는다면 어떻겠습니까? 우리가 힘들게 노력하여 돛을 달아놓아도 바람이 불지 않는다면, 그 수고가 헛될 수 있는 것입니다. 기도는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하는 통로가 됩니다. 우리가 기도하는 것은 우리의 힘으로 할 수 없는 바람의 영역을 하나님께 맡기는 것입니다.
느헤미야는 그의 동생과 예루살렘에서 온 사람들의 상황과 처지를 공감해 주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5절 말씀 다 같이 읽겠습니다. “이르되 하늘의 하나님 여호와 크고 두려우신 하나님이여 주를 사랑하고 주의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 언약을 지키시며 긍휼을 베푸시는 주여 간구하나이다”라고 기도했습니다.
느혜미야 13장 중 느혜미야의 기도는 12번이나 나옵니다. 그는 지속적으로 기도합니다. 그리고 실행합니다. 그리고 사람들을 공감해 줍니다. 그리고 사람들의 필요를 채워줍니다. 그리고 사람들의 환경과 능력에 따라 일을 분배합니다. 귀족과 천민들을 통합하여 함께 일할 수 있도록 만듭니다. 그리고 한 손에는 무기를 들고, 또 한 손에는 무너진 성벽을 재건하기 위한 도구들을 들고 일하도록 격려합니다. 그러는 가운데 느혜미야는 인간의 힘으로 할 수 없는 위대한 일을 달성합니다.
고레스왕의 칙령으로 1차 귀한을 이끌었던 스룹바벨은 5만명의 이스라엘 백성들을 예루살렘으로 귀향하게 합니다. 그리고 무너진 성전을 짓고, 성벽을 재건하려고 부단한 노력을 합니다. 하지만 주변 나라들의 방해로 성벽은 건축할 수 없었습니다. 그 후 80년이 지난 어느 날 학자 겸 목사였던 에스라를 통해 이스라엘 백성들을 예루살렘으로 2차 귀환을 시킵니다. 그 때 에스라는 구약 율법서를 낭독하며 사람들의 무너진 패배의식을 회복하고, 신앙으로 돌아올 수 있도록 영적인 각성 운동을 벌입니다. 그 때에도 성벽재건을 위해 많은 노력을 했지만 주변 나라의 반대와 공격으로 그 뜻을 이룰 수 없었습니다. 그 후약 40년 후 느헤미야가 3차 귀환을 이끕니다.
스룹바벨도 할 수 없었고, 에스라도 할 수 없었고, 장작 120년 동안 그 누구도 할 수 없었던 예루살렘 성벽을 느혜미야는 단 52일 만에 재건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기적이었습니다. 그 일은 느혜미야의 인간적인 리더십으로 이루어진 게 아니었습니다. 느혜미야가 계획하고 실행하고, 사람들의 필요를 채워주고, 공감해주는 일과 병행하여 하나님께 눈물로 금식하며 지속적으로 기도했기 때문에 이루어진 기적이었습니다.
왜 성벽 재건한 일이 기적인가면...?
성벽은 성전의 연장선으로 이스라엘 백성의 자주권을 상징하는 중요한 방호벽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변 이방 국가들은 이스라엘이 옛 영광과 부귀를 회복하는 것을 원치 않았습니다. 그들은 성벽 재건되는 일 만큼만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방해했습니다. 심지어 성벽 재건을 허락할 수 있는 권한을 가졌던 아닥사스다 왕에게까지 주변 나라 관리들이 청탁을 넣어 예루살렘 성벽재건의 일이 중지된 상황에 있었습니다. 아닥사스다왕이 조서를 내려 성전재건을 중시시켰는데 다시 자신의 조서로 성전재건을 윤허하는 것은 바보같은 행동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어느 누구도 아닥사스다왕에게 이와 같은 요청을 할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느혜미야가 기도하는 가운데 지혜를 주셨습니다. 우리는 뱀처럼 지혜롭고 비둘기처럼 순결할 필요가 있습니다. 느혜미야 2장 1절을 보시면 느혜미야가 평상시와 다르게 얼굴에 수심이 가득한 가운데 왕 앞에 섭니다. 이것은 모험이었습니다. 그 당시 페르시아 법으로는 왕앞에 근심한 모습을 하고 있을 시 왕의 호위 무사가 즉결 처단할 수 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에스더 왕후도 왕이 찾지 않을 때 왕을 찾아가면 왕의 금 홀이 없을 시 죽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하나님께서 느혜미야가 기도할 때 주셨던 지혜였습니다. 평상시 일을 잘 하던 사람의 얼굴의 수심이 가득하니 왕이 금 홀을 내민 게 분명합니다. 하지만 2절 말씀에 보면 느혜미야도 두려워했다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왕의 심기를 건드리는 일을 하게 되면 처형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3절 말씀을 보시면 느혜미야의 재치가 엿보이는 대목이 등장합니다. 그것은 아닥사스다 왕이 에스라서에서 이방 사람들의 허위 보고를 듣고 성벽재건의 일을 중단시켰던 일을 다시 재개하도록 하려는 느혜미야의 재치있는 발언이 담겨져 있습니다. “왕께 대답하되 왕은 만세수를 하옵소서 내 조상들의 묘실이 있는 성읍이 이제까지 황폐하고 성문이 불탔사오니 내가 어찌 얼굴에 수심이 없사오리이까 하니”라고 말씀합니다. 그 당시 페르시아 사람들은 조상의 묘를 숭배하는 사상이 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느혜미야는 자연스럽게 페르시아 왕의 공감를 받을 수 있었을 뿐 아니라, 아닥사스다 왕에게도 느헤미야를 예루살렘에 보내어 예루살렘 성벽 재건하는 일을 허락하는 명분을 줄 수 있었던 것입니다. 4절 말씀에 느혜미야는 짧게 기도한 이후에 자신이 원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 아닥사스다의 마음을 움직이셨습니다.
(잠 21:1, 개정) 『왕의 마음이 여호와의 손에 있음이 마치 봇물과 같아서 그가 임의로 인도하시느니라』(잠 21:1, 새번역) 『왕의 마음은 흐르는 물줄기 같아서 주님의 손 안에 있다. 주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왕을 이끄신다.』
우리가 일할 때 일은 우리가 하는 것이지만, 우리가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 일하신다는 사실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저는 오늘 여러분들에게 느혜미야의 통합적 영성과 리더십에 대하여 말씀드렸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통합적인 영성과 리더십은 입체적이고, 복합적인 것을 말씀합니다.
오늘 저는 통합적 리더십의 두 가지 측면에 대해서만 말씀드렸습니다.
공감할 수 있는 능력과 기도의 능력에 대해서만 말씀드렸습니다.
우리의 영성과 리더십은 다양한 요소들로 이루어졌음을 인식하고, 다방면에서 균형 있는 영성과 리더십을 갖추어 하나님의 복음의 통로요, 축복의 통로요, 무너진 성벽을 재건하는 능력의 통로로 우리 모두 쓰임 받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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