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속도; 지체하심의 은혜(마 9:18-26 참조 막 5:21-43, 눅 8:40-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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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베이터 닫힘 버튼을 문이 닫힐 때까지 누르거나 연타한다.
3초 안에 열리지 않는 웹페이지는 보지 않는다.
컵라면이 다 익기도 전에 먹는다.
고기가 안 익었는데도 계속 뒤집어본다.
영화관 엔딩 크레딧이 다 올라가기 전에 자리를 뜬다. 여러분은 몇 개나 해당되시나요?
‘빨리빨리’. 우리가 살면서 가장 많이 하고 또 듣는 말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우리 민족은 원래부터 속도에 민감하지는 않았다고 합니다. 농경사회였을 때 농번기 말고는 딱히 할 일이 없기 때문에 오히려 느긋한 태도가 우리 민족의 삶이었습니다.
속도에 민감해진 것은 산업화가 진행되면서부터라고 합니다. 우리 삶은 농경에서 공장체제로 전환되었고 ‘마감’과 ‘경쟁’에 시달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다보니 자연스레 속도에 민감해진 것입니다.
이제는 조금만 기다리거나 막히는 상황이면 돌아가는 길을 찾고 초조해하는 현대사회가 된 것 같습니다. 기다림은 아름다움이나 느긋함이 아닌 불편함이 되었습니다. 맛집이나 명소를 갈 때 말고는 우리 삶에서 여유와 기다림을 찾는 것은 어려워진 듯합니다.
이런 우리의 삶과 문화의 변화가 우리의 신앙에도 영향을 준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저만 해도 그렇습니다. 시냇물같이 쌓이는 은혜보다는 속 시원히 흐르는 폭포수 같은 은혜를 원합니다. 구하고 기다린다기보다 구하고 주시는, 빠른 하나님을 원합니다. 여러분은 어떠십니까?
그러나 우리 하나님께서는 물론 빠르게 역사하시기도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 지체하시고 기다림을 경험하게 하십니다. ‘인내’의 열매를 맺게 하려 하십니다. 빠름에 익숙한 우리 입장에서는 매우 불편하고 곤혹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오늘 말씀은 잘 알고 있다시피 예수님께서 혈루병 걸린 여인을 고치시고 죽은 아이를 살리신 이야기입니다. 예수님의 능력과 자비를 잘 보여주는 본문이죠. 그런데 이 이야기 속에는 우리와 같이 하나님의 속도에 지체하심을 경험하는 한 사람의 이야기가 숨겨져 있습니다. 본문을 통하여 한 번 살펴보겠습니다.
배경 및 등장인물
배경 및 등장인물
오늘 본문의 말씀은 마태, 마가, 누가 세 개의 복음서에 모두 나타나 있습니다. 설교를 준비하며 내용을 종합해보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갈릴리 호수 건너편 거라사라는 지방에서 귀신들린 자를 고쳐주시고 다시 돌아와 환자들을 치유하시고 계속해서 말씀을 전파하시는 중입니다. 그곳에는 기적을 보기 원하는 사람들이 몰려와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을 전하고 계실 때에 한 관리가 헐레벌떡 뛰어와 예수님 앞에 엎드립니다.
‘예수님, 제 딸이 이제 곧 죽을 것 같이 위급합니다. 다른 사람들을 치유해주신 것 같이 제 딸을 치유해주십시오.’
이 관리의 이름은 야이로입니다. 유대 회당을 지도하고 관리하는 회당장이였습니다. 그리고 야이로에게는 열두 살의 외동딸이 있었습니다. 당시 열세 살이 되면 성인식을 치르기 때문에 열두 살은 지혜와 지식이 무럭무럭 자라나는 중요한 나이였습니다. 그런데 이 아이가 곧 죽을 만큼 위독한 상태라고 합니다. 예수님을 찾아온 것으로 보아 의학적으로는 더 이상 해결되지 않는 상태였을 것입니다.
회당장이 목수의 아들에게 엎드립니다. 자신의 모든 위치를 내려놓고 엎드릴 수 있었던 것은 딸을 살리고자 하는 절박한 마음때문이었을 것입니다. 야이로에게는 예수님의 치유능력만이 희망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일어나 따라가십니다. 야이로는 이제 되었다. 예수님이면 하실 수 있으실 것이다. 하고 안도했을 것입니다.
지체하심. 혈루증 걸린 여인을 고치시다.
지체하심. 혈루증 걸린 여인을 고치시다.
예수님께서 일어나셔서 야이로의 집으로 향하자 수많은 사람들도 그 기적을 보기 위해서 따라갑니다. 그 행렬 중에는 열두 해 동안 혈루증을 앓는 여인이었습니다. 한 아이의 인생만큼이나 힘든 시간을 겪은 여인입니다.
마가복음은 이 여인에 대해서 좀 더 자세히 설명하는데, 많은 의사에게 많은 괴로움을 받고 가진 것도 다 허비하였으되 아무 효험이 없고 도리어 더 중하여졌던 차에 예수의 소문을 들은 여인이었습니다.
야이로처럼 이 여인의 희망 또한 예수님 뿐이었습니다. 여인에게는 더 이상 방법이 없었고 돈과 힘도 남아있지 않았습니다. 이 여인은 예수님의 옷깃이라도 만지면 효험이 있을까 하여 만져봅니다. 이 때에 놀라운 일이 일어납니다. 예수님의 능력이 여인의 혈루증을 고친 것입니다. 이 능력은 원어로 뒤나미스라고 하는데 오늘날 다이너마이트의 어원이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가던 길을 멈추시고 누가 내 옷깃을 만졌는가를 물으십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조금이라도 예수님을 보기 위해 밀치던 상황이라 제자들은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어 밉니다. 알 수가 없습니다. 라고 대답합니다. 그러나 고침을 받은 여인은 자신을 찾는 줄을 알았습니다. 이제 목적을 달성했으니 조용히 사라지려했던 여인은 숨길 수 없음을 직감하고 예수님 앞에 엎드립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모든 사실들을 물으십니다. 여인은 12년 동안 자신에게 있었던 일들을 이야기했을 것입니다.
사실 예수님께서 이 여인을 부르신 데에는 이유가 있었습니다. 혈루증은 피가 멈추지 않는 만성질환이자 부정한 병입니다. 그러니까 이 여인은 부정한 병을 앓고 있는 부정한 여인이었습니다. 레위기는 유출병이 있는 자는 그가 앉고 눕고 만진 모든 것이 부정하다고 규정합니다. 당시 율법으로 부정한 여인이 정한 예수님을 만지는 것은 금기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꾸짖기 위함이 아니라 바로잡기 위해서 여인을 부르셨습니다. 여인은 만지기만 하면 나을 줄로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나았으니 조용히 사라지면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는 다소 미신적입니다. 예수님을 믿어서가 아니라 예수님을 만지기만 하면 나으리라 믿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녀의 삶의 이야기를 듣고 그녀의 잘못된 믿음을 바로잡아 주십니다. 나를 만져서가 아니라 나를 유일한 해답이라고 믿은 너의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고, 너의 삶에 하나님 나라가 임했다고 말입니다.
여인은 자신의 병을 치료하려 예수님을 만졌지만, 예수님께서는 여인의 병뿐만 아니라 여인의 삶을 바꾸어주십니다. 여인의 정체성이 바뀌는 순간을 우리는 봅니다. 그저 미신을 좇아가다 기적을 경험한 부정한 여인이 아니라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의 나라를 살아가는 하나님의 백성이 된 것입니다. 예수님 안에서 우리는 우리의 생각보다 더 큰 것을 얻게 되는 것을 봅니다. 우리가 문제 속에서 예수님만을 해답으로 생각하고 그 믿음으로 나아갈 때에 우리는 생각했던 것, 원했던 것보다 훨씬 더 큰 은혜를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야이로의 딸이 죽다.
야이로의 딸이 죽다.
이 광경을 본 많은 사람들은 환호하고 하나님 앞에 영광을 돌리며 예수님을 찬양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갑작스레 열린 간증집회에 기뻐하지 못하는 한 아버지가 있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아직 말씀하실 때에' 예수님께서 여인과 한참 친밀하게 교제하고 계실 때에 야이로의 집에서 보낸 사람들이 와서 이렇게 말합니다. ‘당신의 딸이 죽었습니다. 이제 예수님을 그만 괴롭게 하시지요.’
왜 야이로가 말이 없을까 싶었습니다. 아무 말도 없이 그저 예수님을 멍하니 바라보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혈루증은 만성질환입니다. 그러니까 곧바로 죽는 병은 아닙니다. 그런데 자신의 외동딸은 지금 당장 죽을지도 모르는 위급한 상황입니다. 응급실에서 당장 숨을 헐떡이는 아이가 아니라 만성 환자를 돌보느라 아이가 죽었다면 이는 의료분쟁으로도 이어질 수 있는 상황입니다. 심지어 고쳤으면 된 것인데 그 여인을 세워놓고 12년간의 이야기까지 듣고 있었습니다. 야이로의 시선과 마음에 당장 구원이 필요한 것은 자신의 딸이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예수님은 전혀 급하지도 않은 엉뚱한 사람을 향하여 능력을 보이시고 구원을 베풀고 계신 것입니다.
아버지는 모든 것을 잃었습니다. 유일한 방법이라 생각했던 예수님께서 그렇게 중요하지도 않은 일로 지체하셨기 때문에 자신의 딸은 죽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시간을 허비하셨기 때문에 죽었지 아마 혈루증 걸린 여인을 나중에 고쳤더라면 내 딸은 살았을 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아버지는 어떤 마음과 눈으로 그곳에 서있었을까요? 그곳의 분위기는 어떠했을까요?
그 정적과 분위기를 깨고 예수님께서는 아버지에게 말씀하십니다.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
이 분위기에서 유일하게 느긋하신 분은 아마 예수님밖에 없으실 것입니다. 예수님의 시간개념이 우리와 달랐기 때문입니다.
약속시간을 느슨하게 생각하는 사람이 있고 딱 맞추어야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또 1-20분 먼저 가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끼리 서로 약속을 잡는다면 어떨까요? 누군가는 편안한데 누군가는 바쁩니다. 두 시 약속에 한시 오십분인데 누군가는 늦었고 누군가는 딱 맞출 수 있고 누군가는 아직 넉넉히 남았다고 생각합니다. 예수님은 지금 이 상황이 지체된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시간은 넉넉히 남았습니다.
우리가 때로 하나님께 대하여 아주 당혹스러울 때가 있는데 하나님께서 우리의 생각과 계획대로 움직여주시지 않을 때가 그렇습니다. 우리 생각에는 지금 와서 도와주셔야 하는데, 지금 내 문제를 해결해주셔야 하는데 지체하시는 것처럼 느껴질 때 우리는 하나님을 향해 초조함과 원망의 마음을 품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을 향해 주무시냐고까지 물어봅니다.
우리 삶에 아주 중요하고 긴급한 일인데 나와 동행하시는 하나님께서는 왜 그리 바쁘신지요. 왜 다른 사람들은 그렇게 응답받고 풍성한 은혜를 누리는데 내 삶은 아직 제자리걸음이고 내 문제는 오히려 더욱 나빠지는지요. 이런 생각들을 해보신 적 없으십니까? 하나님 불합리합니다! 하고 원망하며 따지고 싶은 마음이든 적은 없으십니까? 하나님의 속도와 우리의 속도는 달라도 너무 다른 것 같습니다
하나님의 속도; 지체하심의 은혜
하나님의 속도; 지체하심의 은혜
예수님께서는 이런 상황 속에서 야이로의 집을 향해 발걸음을 옮기십니다. 유대에는 전문적으로 고인의 죽음을 슬퍼해주는 사람들이 있었는데 그들이 이미 와서 장례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들을 물리치시며 아이가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고 말씀하십니다. 당연히 비웃을 만 한 일입니다. 아이의 숨이 멎은 것을 모두가 확인했기 때문입니다.
모두를 물리치시고 예수님께서는 아이를 바라보시고는 손을 잡습니다. 그리고 달리다굼이라 말씀하십니다. 달리다는 소녀여 라는 뜻인데 단순히 소녀를 부르는 뜻이 아니라 엄마가 딸을 부르는 애정이 잔뜩 담긴 애칭입니다. 굼은 일어나라라는 뜻입니다. ‘얘야 일어나야지'정도로 번역해볼 수 있겠습니다. 이 말을 들은 소녀의 반응은 어떻습니까? 아침 햇살에 눈이 부신 듯 일어나는 여느 아이들처럼 예수님의 손을 잡고 일어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벙찐 부모님과 사람들을 향해 잠에서 깼으니 먹을 것을 주라고 말씀하시며 본문이 마무리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죽음'이라는 문제는 우리가 해결할 수 없는 영역입니다. 한 번 죽으면 그걸로 끝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손에서 죽음은 어떻습니까? 그저 잠일 뿐이었습니다. 이것이 가능한 이유는 예수님께서 전능하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우주 만물을 창조하시고 운행하시는 하나님께서 아이의 손을 잡고 사랑이 가득한 눈으로 일어나라 말씀하시고 깨워 일으키시는데 어찌 아이가 일어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께서 보기에 죽음에서 일으키는 것은 혈루병을 낫게 하는 것이나 귀신을 쫓는 것과 크게 다른 일이 아니었습니다.
야이로는 예수님께서 자신의 집을 향해 출발하실 때에 이제 됐다. 예수님께서 동행하신다 하는 생각에 마음이 놓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야이로는 예수님의 지체하심으로 딸의 죽음을 듣고 보아야만 했습니다. 이해할 수 없는 이 상황 가운데 예수님은 여전히 야이로를 향해 ‘내가 유일한 해결책임을 믿는다면 기다리고 신뢰해라'라고만 말씀하십니다. 만약 야이로가 이 때에 예수님께서 누구이신 줄 진정으로 알았다면 혈루증에 걸린 여인을 보며 조급해하지 않았을 것이며 지체하심에 대한 원망보다 기쁨과 즐거움을 나누지 않았을까요? 야이로가 놓치고 있었던 점은 예수님께서 하나님이시라는 것이었습니다. 딸을 통해 야이로는 직접 경험하며 비로소 자신의 믿음의 한계를 깨며 예수님을 하나님으로 믿게 되었을 것입니다.
우리와 동행하시는 그러나 지체하시는 하나님
우리와 동행하시는 그러나 지체하시는 하나님
우리 인생에서도 야이로처럼 우리의 시간과는 다른 하나님의 시간을 경험하는 순간들이 있습니다. 그 때에 우리는 당혹스럽고 원망스러운 눈으로 하나님을 보게 됩니다만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눈을 맞추시며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동행하고 있으니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
예수님께서 혈루병에 걸린 여인을 찾은 이유, 야이로의 딸의 죽음에도 느긋했던 이유는 무엇을 하셔야 할지 알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여인과 야이로의 생각을 넘어 훨씬 더 큰 일을 행하시고자하는 계획하심이 있으셨기 때문입니다. 단순히 문제해결을 생각했던 두 사람이었지만 그들은 우리가 살펴보았듯이 요구했던 것보다 더 큰 것 곧 예수님께 대한 믿음과 하나님 나라를 얻었습니다.
하나님의 지체하심을 통해, 하나님의 속도에 맞추며 야이로는 내 뜻대로 예수님을 움직이려는 교만을 내려놓게 된 것을 봅니다. 그리고 죽었던 딸이 살아나며 내 생각보다 크신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고 신뢰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문제 가운데 예수님만이 유일한 방법이라 믿으십니까? 그 예수님께서 동행하신다 약속해주십니다. 예수님을 그리고 그 계획을 신뢰하는 믿음이 우리 가운데에 있기를 소망합니다. 이해할 수 없는 지체하심 속에서도 하나님의 속도를 따라가다보면 우리는 말씀과 같이 우리의 요구와 생각보다 더욱 큰 은혜를 예비하신 하나님의 계획을 보고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 삶의 문제들 속에서 유일한 해답은 예수님이십니다. 그런데 그 예수님의 속도는 우리와 달라서 그 동행하심의 발걸음에 지체하심을, 초조함을 경험할 때가 있습니다. 그 때에 오늘의 말씀이 우리 삶에 다시금 묵상되어졌으면 좋겠습니다.
하나님 외에는 우리의 삶을 바꾸시고 문제를 해결하실 분이 없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전능하십니다. 실패가 없으시며 선하십니다. 그 하나님께서 우리와 동행하신다 약속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초조하거나 원망할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무엇을 하셔야 할지 아시고 마침내 우리의 생각보다 더 큰 일을 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결론
결론
말씀을 맺겠습니다. 풍랑도 죽음도 귀신도 아픔과 죄도 전능하신 하나님의 아들 앞에서는 하나님께 돌려드릴 영광의 도구요 평안함이 될 뿐입니다. 소녀를 일으키신 예수님의 능력과 사랑의 손은 우리의 손과 삶 또한 붙잡고 계십니다. 이 손을 놓치 않기 위해서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하나님의 손을 놓치셨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길 소망합니다. 그리고 언젠가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손을 잡아 일으켜 주실 것입니다.
그 때까지 예수님의 인도하심에 따라 예수님의 속도에 맞추어 가고 또 설 줄 아는 믿음을 가진 저와 여러분의 삶이되시길 소망합니다. 지체하심에 대하여 초조함과 원망보다는 인내와 소망으로 매일의 부활에 참여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