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1008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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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예배

여러분 반갑습니다! 오늘도 함께 모여 말씀을 나누게 되었습니다.
다들 추석 연휴 잘 보냈나요? 어찌보면 긴 휴일이기도 하면서, 막상 지나고 나면 짧은 그러한 연휴가 또 이번 연휴일 것 같아요.
우리 1-2학년은 그렇겠지만, 우리 11기 친구들은 지난주에도 함께 만났었죠? 지난주에는 연휴 중간에 오로지 11기만을 위한 예배로 함께 만나서 오랜만에 11기 선배들이 찬양팀도 하고 또 좋은 시간을 보냈습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을 제외하고 함께한 11기만을 위해 함께 말씀을 나누었었는데요, 또 12,13기 친구들은 말씀을 못들었으니까 또 한번 이야기를 정리해줘야겠죠?
지난주에도 우리가 계속 보고 있는 열왕기상 말씀을 보았는데요, 특별히 솔로몬 왕의 최전성기 모습을 볼 수가 있었어요.
그런데 말은 최전성기였지만, 사실 하나님의 입장에서는 솔로몬의 가장 연약한 시절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왜그랬죠? 사실 솔로몬이 세상적으로는 많은 것을 누렸죠. 재물도 많았고, 군대도 많았고, 아내도 많았습니다. 세상의 위대한 왕들이 했던 것들을 다 이룬 사람이 바로 솔로몬이었죠.
그런데 그 모든 것들이 하나님 앞에서는 뭐였다고요? 바로 죄였다고 했습니다. 왜냐. 하나님 앞에는 그 모든 것들이 사람으로 하여금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도록 하는 것들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지금 세상은 여러분들에게도 이러한 모습으로 다가온다고 했습니다. 마치 세상 속에서 이렇게 살아가는 것만이 진리인 것처럼, 세상의 방식대로 살지 않으면 엄청난 피해를 볼 것처럼 여러분들을 유혹한다는 것이었어요.
하지만 우리는 그러한 모습에서 벗어나 도구적인 것에 불과한 세상의 요소들이 아닌, 하나님께, 하나님이 세우신 우리를 향한 계획에 우리의 시선을 고정하고 나아가야한다라고 함께 나누었습니다.
그리고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말씀은 지난주 말씀에서 조금 더 지난 후의 이야기입니다.
어떻게 보면 솔로몬이 죄악을 범한 결과에 해당하는 말씀이라고도 볼 수 있겠죠.
그러면 우리가 함께 다시 말씀을 잘 살펴보면서, 솔로몬으로부터 비롯된 죄의 모습이 과연 이스라엘 가운데 어떻게 나타나는지, 그리고 그것을 통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어떤 것인지를 함께 나누어보도록 하겠습니다.
오늘 말씀의 첫 부분을 보면 이제 새로운 인물이 등장한다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등장인물을 살펴볼까요? 처음은 누구죠? 바로 하나님의 사람입니다. 그리고 두번째는 여로보암이라는 사람이 등장을 합니다.
우리는 여기서 가장 먼저 여로보암이라는 이 인물에 주목해보아야 할 것 같아요.
이 사람은 누구냐, 바로 북이스라엘의 첫번째 왕입니다.
오 이스라엘의 왕이라는 것은 다윗의 아들이라는 것이냐? 그렇지 않습니다.
앞서 제가 ‘북’이스라엘의 왕이라고 했죠. 이건 무슨 이야기겠어요? 나라가 반으로 갈라졌다는 것이겠죠.
그렇습니다. 북이스라엘의 첫번째 왕인 이 여로보암이라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솔로몬과 이스라엘의 죄악을 벌하시기 위해 세우신 또다른 왕이었습니다.
오늘 말씀에서 조금 앞으로 가면 등장하는 11장에 그 내용이 등장하는데요, 하나님께서 아히야 선지자를 통해 여로보암에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이스라엘에서 열 지파를 너에게 주고, 나머지 두 지파를 다윗의 자손 르호보암에게 주겠다고 말이죠.
이러한 일이 또 솔로몬의 귀에 들어가게 되고, 그래서 택함받은 여로보암은 애굽 나라에서 솔로몬이 죽을 때까지 숨어살게 됩니다.
그런데 솔로몬이 늙어서 죽게 됩니다. 그리고 그 아들 르호보암이 다음 왕으로 등극을 하죠.
그런데 이 르호보암은 시작부터 실책을 범합니다.
솔로몬 시대 말기, 고통을 받았던 백성들이 새로운 왕에게 이 고통을 조금 줄여달라고 청하러 나아옵니다.
르호보암은 이 이야기를 듣고서 아버지를 따랐던 늙은 신하들과, 자기와 함께 자란 젊은 신하들 두 부류에게 이 일에 대해 자문합니다.
늙은 신하들은 백성들의 말대로 고통을 줄여줄 것을 권했고, 젊은 신하들은 오히려 고통을 더 크게해야 한다고 조언했죠.
르호보암은 자신의 친구들이 한 말을 듣습니다.
그래서 유명한 이야기를 하죠. 나의 아버지는 채찍으로 징계했다면, 나는 전갈 채찍으로 징계할 것이다라고 말이죠.
당연히 다른 백성들의 마음은 어떻겠어요? 더 힘들게 해주겠다! 라고 하는데. 도망가고 싶었을 거에요.
그래서 이스라엘의 열두지파 중 북쪽에 있는 열지파가 르호보암으로부터 돌이켜 여로보암을 왕으로 삼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북이스라엘 왕국의 탄생이었죠.
나머지 두 지파. 유다와 베냐민 지파만 남아 르호보암을 계속 섬기게 됩니다. 여기가 바로 남유다 왕국이 되었죠.
하나님은 처음 여로보암을 택하실 때, 한가지 당부의 말씀을 하셨습니다.
열왕기상 11:37–38 NKRV
내가 너를 취하리니 너는 네 마음에 원하는 대로 다스려 이스라엘 위에 왕이 되되 네가 만일 내가 명령한 모든 일에 순종하고 내 길로 행하며 내 눈에 합당한 일을 하며 내 종 다윗이 행함 같이 내 율례와 명령을 지키면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내가 다윗을 위하여 세운 것 같이 너를 위하여 견고한 집을 세우고 이스라엘을 네게 주리라
솔로몬과 그 아들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아서 이러한 일이 벌어졌기에, 만약에 여로보암이 하나님 말씀대로 행한다면, 그의 나라를 다윗처럼 견고하게 하시겠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하지만 여로보암은 그렇지 못했습니다. 그의 왕으로서 첫 사역부터 어긋나기 시작하죠.
열왕기상 12:28–29 NKRV
이에 계획하고 두 금송아지를 만들고 무리에게 말하기를 너희가 다시는 예루살렘에 올라갈 것이 없도다 이스라엘아 이는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올린 너희의 신들이라 하고 하나는 벧엘에 두고 하나는 단에 둔지라
그렇습니다 여로보암이 처음 시작한 일은 북이스라엘에 금송아지 우상을 건축한 일이었어요.
우리가 처음 이 사실을 접하게 되면 매우 이상하게 느껴질거에요. 아니 하나님게서 말씀하신지 얼마나 됐다고 저런 짓을 할 수가 있을까.
그런데 사실 여로보암의 입장에서는 나름의 사정이 있었습니다.
열왕기상 12:26–27 NKRV
그의 마음에 스스로 이르기를 나라가 이제 다윗의 집으로 돌아가리로다 만일 이 백성이 예루살렘에 있는 여호와의 성전에 제사를 드리고자 하여 올라가면 이 백성의 마음이 유다 왕 된 그들의 주 르호보암에게로 돌아가서 나를 죽이고 유다의 왕 르호보암에게로 돌아가리로다 하고
바로 자신들의 백성이 다시금 유다 왕국으로 돌아갈 것을 염려한 것입니다. 왜냐? 바로 하나님의 성전이 유다의 영토인 예루살렘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지난번 성전 건축에 대해서 말씀을 나누었지만, 성전에서 당시 백성들이 무엇을 했다고 했었죠? 제사를 드리면서 자신의 죄를 사함받았다고 했습니다.
그렇기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성전에 정기적으로 예배하러 나아가야 했어요.
북이스라엘 백성들도 예외는 아니었겠죠. 그러니 여로보암의 입장에서는 자신들의 백성이 자꾸 적국으로 향하게 되는 위험한 상황에 있었다는 거에요.
만약에 예배하러 예루살렘으로 갔다가 유다왕국에서 그들을 꼬드겨서 완전히 넘어가게 하면, 결국 북이스라엘에는 남아있는 사람들이 없게 되겠죠.
여로보암에게는 이러한 상황이 매우 좋지 않게 여겨졌던 거에요.
그래서 예루살렘과 하나님의 성전을 대체할 다른 예배 장소를 만들어야 했던 것이죠.
그래서 나온 것이 바로 금송아지였습니다. 금송아지를 벧엘과 단에 두면서 이것이 바로 너희를 인도한 하나님이시다라고 말하면서, 이제는 예루살렘 가지 말고 여기서 예배드려라! 라고 한 것입니다.
여로보암의 행동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습니다. 벧엘과 단에 금송아지만 두면 끝일까요? 여러분 이전의 성전 안에 제사를 하러 온 사람들만 있었나요? 아니었죠. 제사를 돕는 이들이 있었어요. 바로 제사장들입니다.
그러니 북이스라엘에도 제사장이 필요했을 거에요.
그런데 이스라엘 지파에서 제사장이 되기 위해서는 한가지 필요한 것이 있었습니다. 그게 뭘까요?
바로 혈통입니다. 레위 자손이라는 혈통이죠.
하나님께서 레위 자손에게만 제사장의 직분을 허락하셨기 때문에 레위지파의 사람들만이 제사장을 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레위 자손이 북이스라엘에 없었던 것인지, 혹은 아예 유다와 분리하고자 했던 것인지, 여로보암은 레위자손이 아닌 일반 백성들을 제사장으로 삼게 됩니다.
그리고 산당을 지어 그 제사장들로 하여금 금송아지를 섬기는 제사를 하도록 한 것입니다.
여로보암은 여기에 더해 한가지 더 변화를 줍니다. 바로 절기를 변화시킨 것이죠.
유다백성들은 이전까지 절기를 지키며 예배를 하였습니다. 여러분들이 아시는 절기가 있나요?
유월절, 무교절, 초막절과 같은 절기들이 있었죠. 사실 이 모든 절기들이 출애굽 시기와 관련이 있습니다. 그래서 이 절기들을 지키며 출애굽 당시 함께하셨던 하나님을 기억하며 예배하였습니다.
그런데 여로보암은 유다왕국과 완전히 차별을 두기 위해서 이 절기들의 정해진 날짜들을 마음대로 바꾸어 그 시기에 맞추어 북이스라엘 백성들이 예배하도록 한 것입니다.
결국 여로보암은 솔로몬처럼 하나님 앞에 세 가지 잘못을 범하게 됩니다. 첫째는 금송아지 우상을 만들어 예배하도록 한 것이고, 둘째는 레위인이 아닌 사람을 제사장으로 세운 것이고, 마지막은 절기를 마음대로 바꾼 것입니다.
이 역시도 저번주 솔로몬과 같이 어쩌면 당시 지도자로서는 필요한 조치라고 여겨질 수도 있어요. 자신들의 나라 백성을 지키기 위한 것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죠.
하지만 이 역시도 하나님 앞에서는 큰 죄악이었습니다. 그리고 여로보암은 백성들을 올바른 길로 이끌어야 할 왕으로서 오히려 잘못된 방향으로 백성들을 내몰게 되었습니다.
결국 북이스라엘 백성들은 여로보암에 의해 모든 백성이 금송아지 우상을 섬기고 말씀에 적혀있지 않은 이상한 예배를 드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는 이후 세워진 모든 왕들이 말씀을 따르지 않는 악한 왕들이었던 것으로 나타났고, 결국 북이스라엘 왕국은 유다 왕국보다 먼저 앗수르 제국에 의해 멸망하게 됩니다.
하나님은 이 엄청난 죄악을 가져오게 될 여로보암의 행동을 절대로 좋게 보시지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오늘 처음 등장했던 하나님의 사람을 보내시죠.
그리고 오늘 말씀 처음 구절에 나타나는 것처럼 여로보암은 마침 자신이 만든 잘못된 예배를 드리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보내신 사람을 통해 제단을 향해 말씀하십니다. 다윗의 집에 요시야라 이름하는 아들을 통해 산당과 제사장을 제물로 바칠 것이고, 사람의 뼈를 네 위에서 사르리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이후 하나님의 사람은 하나님의 징조라면서 제단이 갈라지며 그 위에 있는 재가 쏟아지리라고 여로보암에게 선포합니다.
그러자 여로보암 왕은 하나님의 사람에게 손을 펴며 그를 잡으라고 소리칩니다. 아마도 그를 붙잡아 가두고자 했겠죠.
그런데 그렇게 하자마자 폈던 손이 말라버립니다.
그리고 여로보암이 제사한 제단은 하나님의 사람이 말한 그대로 갈라져 재가 쏟아지게 됩니다.
이 징조를 본 여로보암은 그제서야 이 사람이 정말로 하나님께서 보내신 사람임을 깨닫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사람에게 요청합니다. 하나님께 말씀드려서 내 손이 다시 성해지도록 기도해달라고 말이죠.
하나님의 사람은 그 말대로 기도를 해주고 여로보암의 손은 다시 돌아오게 됩니다.
여기까지가 바로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말씀이었습니다.
여로보암은 이 엄청난 이적의 사건을 통해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말씀하셨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죄악을 돌이키지는 않았습니다. 자신이 죄를 지었다는 것을 깨닫지 못한 것인지, 아니면 깨달았음에도 세상적인 욕심을 버리지 못한 것일수도 있겠죠.
결국 솔로몬의 죄로 인해 만들어진 기회를 잡은 여로보암은 그 자신마저도 죄로부터 돌이키지 못하고 그 기회를 잃어버리고 맙니다. 자신의 나라는 죄로 물들어버리고 결국 하나님에게서 떠나게 됩니다.
오늘 이 말씀을 통해 우리는 무엇을 바라볼 수 있을까요.
어쩌면 여로보암은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하셨던 그 말씀을 계속 기억하고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면서 스스로도 다짐을 했을수도 있겠죠. ‘나는 솔로몬과 같이 하지 않으리라’ ‘하나님의 말씀을 잘 지켜서 영원한 나라를 만들고 말리라’
하지만 자신의 백성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게 하고자 하니 자신의 나라가 위험함을 느끼게 되었죠.
결국 그는 나름대로의 방법을 사용한 것입니다. 굳이 예루살렘이 아니라 우리나라에서 예배하면 되는거지! 라는 생각으로 앞서 말한 세 가지 행동들을 한 것입니다.
하지만 여로보암이 깨닫지 못한 것이 있었죠. 바로 그 자신의 마음에 정말로 하나님을 향한 마음이 있지 않다면, 어떤 모습으로 예배를 드려도 하나님께서 받지 않으신다는 것을 말이죠.
그가 정말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향한 진정한 마음이 있었더라면, 성전으로 나아가는 백성들을 막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명하신 모든 절기와 제사들을 잘 지키게 했겠죠.
그렇게 말씀대로 지속적으로 행했다면, 아무리 백성들이 예루살렘으로 예배하러 향했다고 하더라도 이미 유다에서 신뢰를 잃어버린 르호보암 왕에게는 향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오히려 예루살렘에서 만난 유다의 백성들에게 말슴대로 행하는 여로보암 왕의 좋은 면들을 전하며 더 많은 백성들이 북이스라엘로 향하도록 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여로보암에게는 그러한 것들은 보이지 않았죠. 그에게는 하나님을 향한 마음보다는 하나님이 세워주신 왕의 자리에만 관심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랬기에 말씀을 지키기보다는 자신의 나라와 백성들을 지키고자 했고, 그것이 세 가지 죄라는 모습으로 나타나게 된 것입니다.
결국 여로보암은 자신이 원하는 바를 이뤘습니다. 자신의 나라가 유다왕국에 흡수되지 않도록 지켜낸 것이죠.
하지만 오히려 더 중요할지도 모르는 것을 놓치게 됩니다. 자신의 백성들을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게 한 것이죠.
아무리 그가 자신의 나라를 지켰던 하나님께서 함께하시지 않다면 아무런 의미도 없습니다. 결국 여로보암 왕 이후 왕위에 오른 그의 아들 나답은 반란으로 인해 목숨을 잃고 여로보암의 자손은 멸망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러한 반란은 여러차례 북이스라엘 나라에 지속되어집니다. 여로보암으로부터 시작된 죄악이 그 나라 가운데 오랫동안 남게 된 것이죠.
그래서 이후 말씀이 이스라엘 왕들을 언급할 때마다 ‘여로보암의 길로 행하며’라는 말이 등장하게 됩니다. 여로보암의 죄악이 나라 가운데 가득차게 된 것입니다.
이제는 우리의 모습으로 돌아와봅시다. 우리 친구들 중에 주일학교 다닌 친구들도 꽤나 있을텐데, 사실 주일학교에서 이 여로보암을 다루게 되면,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지 않은 나쁜 왕으로 이야기를 하게 됩니다. 그러면서 여로보암의 모습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대로 행해야 해요! 라고 이야기를 하죠.
그렇다면 여러분들은 과연 여로보암과 온전히 다르다고 할 수 있을까요?
여로보암의 죄는 물론 큰 것이었습니다. 형식만 지키면 된다는 생각으로 그 마음을 다 내팽개치고 하나님의 예배를 망가뜨린 것이었죠.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가요? 우리 안에 여로보암과 같은 마음으로 ‘이렇게만 하면 괜찮을거야’라는 마음이 있지는 않나요?
우리 마음 속에서 그것이 잘못되었다고 성령께서 말씀하고 계심에도 불구하고 ‘오늘만 이러는 거니까 괜찮아’ ‘나는 이래도 돼’라는 마음으로 그 잘못을 행하고 있지는 않나요? 한번 여러분들의 모습을 점검해보시기 바랍니다.
어쩌면 우리 속에 이러한 편의주의가 있는지도 모릅니다. 그저 형식만 지키면 되는 것처럼, 예배의 자리에 앉아만 있다가 가고, 그 시간동안 하나님을 전혀 생각하지 않는 그러한 모습들이 있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러한 예배를 전혀 원하시지 않습니다. 여로보암도 금송아지를 세워놓기는 했지만, 그 나름대로는 하나님께 드린다고 생각하며 예배를 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 속에 하나님을 향한 진정한 사랑의 마음이 없었기 때문에, 비슷하면 되겠지라는 마음으로 예배를 드린 것이고, 결국 하나님은 그 모든 예배를 기뻐 받지 않으시고, 그 제단을 깨어 버리십니다.
우리의 예배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은 여러분들을 너무나도 사랑하시기에, 여러분들도 하나님 자신을 사랑하기 원하십니다.
그런데 우리의 마음은 그저 그때그때 필요한 것만을 원하고, 그것들에 감사하지도 않은 채 비슷한 흉내만 내고 있는 모습인지도 모릅니다.
지금까지 우리의 예배가 어땠는지 다시한번 생각하면서, 여로보암의 잘못된 예배의 모습이 아닌 우리 마음 속에 진정으로 하나님을 향한 사랑의 예배를 드릴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말씀을 마무리할게요. 오늘 우리는 여로보암이 행한 죄악들을 살피며, 형식만 지키는 예배의 모습이 얼마나 잘못된 것인지를 살펴보았습니다.
여러분들은 가장 사랑하는 사람, 가장 귀한 사람을 만날 때 어떤 모습으로 나아오나요? 아마도 가장 최고의 모습, 가장 아름다운 모습으로 나아와 가장 좋은 행동만을 행할 것입니다.
당장 애인, 아이돌에게도 그렇게 행하고자 하는 마음이 넘쳐나는데, 그보다도 더 귀하신 하나님 앞에서도 우리는 분명 그러한 마음을 가질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 마음 속 최고의 자리를 주님께 드리고, 그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만을 가지고서 예배의 자리에 나아올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러면 이 예배의 시간, 하나님과 깊은 교제를 나누는 이 시간이 너무나도 기쁘고 행복한 시간이 될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그러한 온전한 예배를 드릴 수 있는, 그래서 하나님과 행복한 교제를 나누는 우리 모든 하임 공동체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찬양: 삶의 예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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