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이 청결한 자의 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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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5:1-8
2001년 9월 11일 하면 모두가 떠오르는 큰 사건이 있습니다. 미국 뉴욕의 중심지 맨해튼의 쌍둥이 빌딩인 세계무역센터 건물에 두 대의 여객기가 충돌하는 너무도 충격적인 장면이었죠. 저도 그날 학교 동기들과 그 장면을 보면서 말을 잇지 못할 정도로 큰 충격에 빠졌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한데요. 처음에는 영화가 아닌가 싶을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살다 보면 이렇게 믿기지 않는 일들이 일어나지 않습니까? 여러분, 어떻게 그런 끔찍한 일이 일어날 수 있었을까요? 도대체 왜? 샌프란시스코를 향해 날아가야 할 여객기가 난데없이 방향을 바꿔 뉴욕 중심부를 향해 돌진했을까?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요?
그것은 바로 조종실을 빼앗겼기 때문입니다. 조종실을 빼앗기면 샌프란시스코로 날아가야 할 비행기가 맨해튼의 쌍둥이 빌딩을 향해 날아가 그 어마어마한 고층 건물을 무너뜨리고 말지 않습니까? 테러범들에 의해 조종실을 빼앗겼기 때문에 이런 엄청난 참극이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마찬가지로 우리 인간 안에도 비행기 조종실과 같은 인간의 삶을 다스리고 조종하는 조종실이 있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그 조종실을 우리는 ‘마음’이라고 부릅니다. 마음이라는 조종실입니다. 그래서 탈진, 신경쇠약, 우울, 자살 충동 등은 외부의 압력을 견디지 못하고 우리 인생을 조종하고 다스리고 있는 내면세계라는 조종실을 빼앗겼기 때문에 일어나는 마음의 병들이라는 것이죠. 이 외부의 압력이 조종실을 뚫고 들어와서 점령해 버렸기 때문에 결국 방향을 잃은 채 절벽으로 충돌하는 일들이 우리 삶 속에서 벌어지고 있더라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항공기 조종실은 철저하게 차단하지 않습니까? 비행기를 다스리는 조종실이기 때문에 아무나 들어갈 수 없도록 철저하게 통제되어 있습니다.
그런가하면 전 세계적으로 환경오염의 문제가 매우 심각한 상황 아닙니까? 유튜브에서 환경오염에 대한 다큐멘터리 영상을 보니까 지구온난화를 비롯한 이 환경 문제가 이제는 경고 수준을 넘어 한계치를 넘어선 위험 수준까지 다다랐다고 하더라고요. 정말 심각해도 너무 심각한 것 같아요.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 보면 이 환경오염만큼이나 심각한 게 우리 인간의 오염된 마음 아닙니까? 하나님이 만드신 창조 세계에 하나님이 허락하신 것만 담겨야 하는데, 우리 인간은 인간 스스로를 위해 무언가를 계속 만들어 내고 담아내고 하다 보니 이 지구의 생명을 위협하는 환경오염이라는 엄청난 재난을 맞닥뜨리게 된 것 아니겠습니까? 인간의 마음도 똑같다는 것입니다. 자꾸 나 자신을 위한 무언가를 찾아서 그것만을 추구하고 내 삶을 채우려고 하다 보면, 의도치 않았는데 마음의 조종실을 빼앗겨 버려서 엉뚱한 방향으로 인생이 흘러가게 되는 게 우리 인간의 연약함 아닙니까? 그래서 팀 켈러 목사님이라는 분은 이런 말을 했습니다.
“내가 만든 신은 반드시 나를 배신한다.”
하나님이 아닌 다른 그 무언가에게 마음을 빼앗겨 오염되어 버렸을 때, 그것이 나의 마음을 지배하고 통제하는 신이 되었을 때 결국에는 나를 배신해 해를 입히게 되더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외부의 공격과 마음의 오염이 심한 시대에 과연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오늘은 마음이 청결한 자가 받는 복에 대한 말씀을 함께 나누고자 하는데요. 먼저 오늘 핵심 요절 말씀인 마태복음 5:8 합독
8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여러분, 마음이 청결한 상태는 어떤 것일까요? 마음이 청결해야 하나님을 볼 것이라고 하는데, 어떻게 해야 마음이 청결해질 수 있는지 궁금하지 않으세요? 마음이 청결하다고 하니까 사막의 수도사들처럼 수양도 많이 쌓고 화도 안 내고 그런 걸까요?
마음이 청결하다는 말은, 원래 성경의 용어가 아닙니다. 헬라시대에 철학자들이 사용했던 개념이었던 거죠. 예를 들어서 유리에 얼룩이 많아서 밖이 잘 안 보여요. 그래서 유리를 깨끗하게 닦는 것을 헬라어로 ’카탈로그오스‘라고 하는데, 여기서 파생된 말이 우리가 잘 아는 ’카타르시스‘입니다. 더러운 유리를 깨끗하게 닦으면 보는 사람이 상쾌하잖아요? 또 등산을 하면서 카타르시스를 느낀다고 하는 분도 보았는데요. 어쨌든 마태도 이 카타르시스의 개념을 가져오기 위해 ’청결하다‘라는 단어를 세 번을 사용했는데, 모두 사람의 마음의 상태를 나타내는 데 사용했습니다. 여기서 '마음'으로 번역된 헬라어는 ’카다로스‘ καθαρός(katharos)라고 해서요. 우리 몸의 ‘심장’을 뜻하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생각과 의지, 이해, 판단, 의욕, 때로는 정신과 양심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주목해야 할 점은, 이 ’카다로스‘라는 단어가 마음을 깨끗하게 비웠다는 뜻이 아니라는 거예요. 단순히 더러워진 마음을 비우고 청소하는 정도가 아니라, 사람의 마음 안에 원래 채워져야 할 것, 그 원래 채워져야 할 것이 채워진 상태가 바로 하나님이 보실 때 청결한 상태라는 것입니다. 매우 중요한 개념 아닙니까? 원래 채워져야 할 것이 채워져야 하는 상태가 하나님이 보실 때 청결한 상태입니다.
그래서 흔히 ‘나 마음 비웠어.’ 이런 말들 하잖아요? 무언가 큰일을 앞두었을 때 기대하지 않겠다, 마음 흔들리지 않겠다는 뭐 그런 의미 아닙니까? 여러분, 그때 정말 마음이 비워지셨나요? 마태복음 12장이나 누가복음 11장을 보면, 예수님께서 더러운 귀신을 쫓아버리셨는데 그 귀신이 돌아다니다가 원래 있던 곳 즉 사람 속이 깨끗하게 비워진 것을 보고 이전보다 더 악한 일곱 귀신을 데리고 들어간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사람은 마음을 깨끗하게 비우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 어떤 것으로 채워질 것인가? 바로 이것이 오늘 팔복의 청결의 문제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마음이 청결하다는 것은 우리의 ‘속사람’과 관련이 많습니다. 진짜 우리 마음 가장 깊숙한 곳에 담긴 그 생각 있잖아요? 그 진짜 속마음요. 여러분들 속마음은 무엇으로 채워져 있으십니까?
여러분, 사람의 마음이 왜 이렇게 중요할까요? 바로 사람은 마음의 생각과 의지에 따라 결단하고 행동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모세도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나님을 사랑하되 '마음으로부터' 하라고 당부를 했잖아요? 그런가 하면 예수님도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마22:37)”라고 말씀하셨는데, 이것은 우리가 의지만 다해서 주님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전 인격을 다하여 사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음은 우리 안에 있는 속사람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모든 것은 마음먹기에 달려 있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사람이 어떤 행동을 취할 것인가는 이 마음먹기에 달려 있다는 것이죠. ‘내가 선을 행할 것인가? 죄를 지을 것인가?’ 그것도 역시 마음먹기에 달려 있다는 것 아닙니까? 그런데 성경은요. 인간이 마음먹기를 잘못해서 타락했다고 합니다.
원래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은 인간은 하나님의 마음에 가까운 생각과 의지를 갖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뱀이 인간에게 접근해서 하나님처럼 되는 길이 있다며 선악과를 따 먹으라고 유혹을 하잖아요? 그렇게 뱀의 유혹에 넘어간 하와는 그 열매를 보고 뭐라고 해요? 먹음직하고 보암직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하다는 마음의 판단에 따라 행동을 하지 않습니까? 그리고 아담까지 끌어들이게 되죠. 그렇게 타락한 인간은 하나님을 정면으로 보지 못한 채 하나님의 시선을 피하고 숨어 사는 인생이 되잖아요? 이렇게 인간의 타락은요. 마음의 유혹을 뿌리치지 못한 마음 먹기를 잘못한 결과였습니다.
그뿐인가요? 아담과 하와의 아들이었던 가인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가인의 잘못은요. 제물의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동생 아벨의 제물은 받고 자기 제물은 받지 않으신 하나님의 판단과 결정에 대해 불평과 불만이라는 동생을 향한 질투와 증오로 나타난 것입니다. 그래서 동생을 죽이기로 마음을 먹게 된 거예요. 그런데도 하나님은 그에게 나타나 죄를 피할 기회를 주시지 않습니까? [창4:7]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이 말씀은 마음속의 분노와 증오가 살인이라는 행동으로 연결되기 전에 마음을 잡으라는 말씀이었습니다. 그러나 가인은 그렇게 하지 못했어요. 악한 마음이 악한 행동으로 연결되는 것을 막지 못했습니다. 그렇게 인류 최초의 살인자가 되었던 것이죠. 아담과 하와도 마찬가지이지만, 가인도 죄가 행동으로 드러나기 전에 마음을 다스리지 못한 것이 타락의 원인이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사탄은 우리를 유혹할 때 반드시 마음부터 공격합니다. 그래서 겉으로 드러난 행위의 범죄보다 무서운 것이 마음의 범죄 아닙니까? 타락한 인간의 마음은 점점 더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져 가게 되고요. 인간은 악한 것만 생각했고 행동도 점점 난폭해졌습니다. 그래서 인간을 통해 창조 세계를 다스리길 원하셨던 하나님의 기대는 완전히 무너지고 말았죠. 창6:5-7
5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가득함과 그의 마음으로 생각하는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6 땅 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사 마음에 근심하시고
7 이르시되 내가 창조한 사람을 내가 지면에서 쓸어버리되 사람으로부터 가축과 기는 것과 공중의 새까지 그리하리니 이는 내가 그것들을 지었음을 한탄함이니라 하시니라
이렇게 인간의 타락으로 인해 하나님의 마음에 근심이 생기시자 어떻게 하시죠? 당대에 완전한 자였던 노아와 그 가족을 제외하고 모든 인간과 가축을 홍수로 멸망시키십니다. 그래도 의인이었던 노아의 가족은 뭔가 다를 줄 아셨는데, 타락한 본성을 지닌 인간은 바벨탑까지 쌓아가면서 계속 하나님께 도전했습니다. 이렇듯 걷잡을 수 없는 인간의 타락에 대해 로마서 1장 21절을 보니까요.
21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하지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 라고 합니다.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을 첫 번째 문항이 인간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려고 창조되었다고 하는데, 인간의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져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지도 않고 감사하지도 않았던 것 아닙니까? 그러자 하나님도 ”그들을 마음의 정욕대로 더러움에 내버려 두었다(롬1:24)“ 즉 포기하셨습니다. 롬1:28
28 또한 그들이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하나님께서 그들을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버려 두사 합당하지 못한 일을 하게 하셨으니
여기서 '상실한 마음'으로 번역된 헬라어 '아도키몬 누스’는 ‘버림받은 마음, 인정받지 못한 생각'이라는 뜻입니다. 타락한 인간이 마음에 하나님 모시기를 싫어한 것처럼 하나님도 그런 인간들에 대해 포기하시고 내버려 두셨다는 겁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가장 무서울 때가 언제인지 아십니까? 범죄한 인간을 그냥 내버려 두실 때입니다. 잘못한 게 드러나면 차라리 벌을 주시고 깨닫게 하시면 괜찮은데, 어떨 때는 그냥 내버려 두십니다. 그러면 그 타락한 인간은 어떻게 되겠어요? 하나님에게서 점점 더 멀어지겠죠? 마치 고삐 풀린 망아지나 아버지 집을 뛰쳐나간 아들이 멀리멀리 도망쳤다가 결국 돼지우리 밑바닥까지 굴러떨어진 탕자처럼 되지 않겠습니까? 그렇게 세상의 타락과 범죄는 하나님을 마음에 두기 싫어한 인간들 때문에 비롯된 것입니다. 이 말은, 세상의 구원과 회복은 하나님을 마음에 두기를 좋아하는 인간으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팔복의 첫 번째 말씀 뭐였죠?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 그런데 오늘 말씀은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라고 합니다. 이 ’심령‘과 ’마음‘은 같은 것일까요? 다른 것일까요?
첫 시간에 말씀드린 것처럼 심령이 가난한 자는 영적으로 가난한 자를 뜻합니다. 조금 일상적으로 표현하자면 ’하나님이 배고픈 자‘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구하고 하나님의 임재를 구하는 삶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가 발생합니다. 우리는 세상을 쫓느라 이미 임재한 하나님의 나라를 찾지 않게 된 것이죠.
여러분, 기도가 배고프세요? 예배, 말씀 전부 다 하나님을 배고파하는 것이거든요. 그런데 우리가 말씀을 못 읽으면 굶어 죽게 됩니까? 예배를 안 드리면 정신을 잃게 됩니까? 예배 안 드리고 말씀과 기도가 없어도 아무런 문제가 없습니다. 영적으로 관심이 없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왜 하나님을 볼 수 없을까요? 마음이 청결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럼 왜 마음이 청결하지 않습니까? 하나님에 대해 굶주려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으로 충만해지고 그 영적인 충만함이 우리 가운데 있으면 우리의 마음과 생각에 영향을 미쳐서 즉 하나님이 내 마음의 조종실을 잡고 계셔서 우리의 마음이 깨끗해지고 정결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마음이 깨끗해지고 정결해지면 당연히 하나님을 볼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이렇듯 예수님께서는 마음이 청결한 자는 하나님을 볼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자! 그렇다면 하나님의 얼굴을 본다는 말이 무엇일까요? 구약 성경에는 하나님의 얼굴을 보면 죽는다고 했는데, 어떻게 하나님의 얼굴은 본다는 말입니까?
우리는 성경에서 마음이 청결해 짐으로 하나님의 얼굴을 본 대표적인 사람을 만날 수 있는데, 바로 야곱입니다.
창세기 32장에는 하나님과 씨름하는 야곱의 이야기가 등장하는데요. 야곱은 삼촌의 집이 있는 라반에서 살다가 고향 가나안으로 돌아가는데, 얍복강에 다다랐을 때 형 에서가 400명의 군인을 데리고 자신에게 달려오고 있다는 소식을 듣게 됩니다. 에서는 20년 동안 자신의 장자권을 훔쳐 달아난 동생을 향해 복수의 칼을 갈고 있었던 것이죠. 이에 야곱은 아주 치밀하게 전략을 짜는데요. 자신의 무리를 세 개조로 나누어서 먼저 강을 건너가게 하고, 각 조의 맨 앞사람이 에서에게 풍족한 선물을 건네주게 하는 것입니다. 거기서 그치지 않고 야곱은 일부러 밤에 가족들에게 얍복강을 건너게 하는데요. 에서와의 대면을 앞두고 강 건너편의 유리한 자리를 확보하기 위해서였습니다. 혹시라도 에서와의 협상이 틀어질 경우를 대비해 도주로를 미리 확보하려는 것이었습니다.
아마도 야곱은 이런 치밀한 준비를 통해 상황이 자신의 시나리오대로 흘러갈 것이라고 여겼을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에 하나님을 찾는 모습은 그 어디에도 없습니다. 이 모든 전략은 야곱이 자신을 위해 만든 신과 같은 자신의 머리를 숭배하면서 나온 전략일 뿐이었습니다.
그래서 내가 만든 신이 나를 배신하는 것처럼, 야곱 자신을 위한 시나리오에 갑자기 변수가 생기지 않습니까? 얍복강에 홀로 남은 야곱에게 하나님이 찾아오셨고 야곱과 씨름을 하시게 되는 거죠. 야곱은 하루 종일 에서를 만날 준비하면서 ’어떻게 대응해야 하나?‘ ’나와 내 가족이 살길은 무엇인가?’ 이런 것들로 씨름을 하고 있었는데, 정작 생명과 안전은 하나님과의 씨름을 통해서만 이루어지더라고요.
그리고 하나님은 그 씨름 끝에 야곱의 허벅지 관절을 쳐 어긋나게 하십니다. 이에 야곱은 내게 축복하지 아니하면 못 가게 하겠다고 말하게 되는데요. 호세아 말씀은 야곱의 이 말을 좀 더 생동감 있게 전달하고 있습니다. 호세아 12:3-4 합독
3 야곱은 모태에서 그의 형의 발뒤꿈치를 잡았고 또 힘으로는 하나님과 겨루되
4 천사와 겨루어 이기고 울며 그에게 간구하였으며 하나님은 벧엘에서 그를 만나셨고 거기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셨나니
야곱은 울면서 하나님께 매달렸습니다. 그동안 자신의 머리를 우상 삼은 우상숭배를 회개하며 자신의 마음의 조종대를 하나님께서 잡아주시도록 내어드리는 순간 아닙니까? 허벅지 관절이 꺾인 것은요. 그동안 자신이 숭배했던 자아가 꺾인 것입니다.
그 결과 자아라는 자신의 신을 만들어 냈던 야곱은 죽고 하나님을 섬기는 이스라엘로 새롭게 태어나지 않습니까? 야곱은 그곳의 이름을 브니엘이라고 불렀는데요. 그 브니엘의 뜻이 바로 ’하나님의 얼굴‘입니다. 그는 거기서 하나님의 얼굴을 보았던 것입니다. 자신의 마음의 조종실을 점령하고 온갖 오염된 것들로 가득 찼던 것들을 다 버리고 오직 하나님만을 믿는 진짜 믿음으로 마음이 정결해져서 하나님을 보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해야 할 점이요. 야곱이 하나님과 화해한 것이 즉각적으로 형 에서와의 화해로도 연결되었다는 점입니다. 얍복강에서 나온 야곱은 형 에서와 만나서 서로 부둥켜안고 울었습니다. 이때 야곱이 에서의 얼굴을 보며 의미심장한 말을 하는데요. 창세기 33:10 합독
10 야곱이 이르되 그렇지 아니하니이다 내가 형님의 눈앞에서 은혜를 입었사오면 청하건대 내 손에서 이 예물을 받으소서 내가 형님의 얼굴을 뵈온즉 하나님의 얼굴을 본 것 같사오며
야곱은 얍복강에서 본 하나님의 얼굴을 형 에서의 얼굴 안에서 보게 된 것입니다. 여러분, 에서의 얼굴이 바뀐 걸까요? 야곱의 눈이 바뀐 걸까요?
정답은 ’야곱의 눈이 바뀌었다‘입니다. 야곱은 마음이 청결한 자로 변화되었습니다. 야곱의 마음을 오염시켰던 것들을 얍복나루라는 곳에서 심령이 가난해지고 보니까 마음이 청결해져서 하나님을 보게 된 것입니다. 그의 인생의 주도권을 환도뼈와 함께 하나님께 내어드리고 나니까 그의 마음에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게 되었습니다. 그것이 어떻게 증명이 되었습니까?
그가 가장 두려워했던 존재인 형 에서의 얼굴을 보며 하나님의 얼굴을 본 것과 같은 놀라운 경험을 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요 여러분! 인류 역사 속에서 많은 혁명이 있었지만,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혁명은 바로 이 마음의 혁명입니다. 우리가 흔히 ’눈에 뵈는 게 없다‘라는 말을 하잖아요? 하나님과 사랑에 빠지면 정말 하나님 외에 눈에 뵈는 게 없어요. 어딜 봐도 누굴 봐도 하나님만 보입니다.
그래서 정말 저는 부탁을 드리고 싶어요. 저도 그렇고요. 여기 계신 우리 성도님들 모두 영적으로 좀 단순하게 살길 원합니다. 우리 뭐 복잡한 것 없습니다. 나를 오염시키는 것들로부터 마음을 잘 지키고 비우기만 하면 돼요. 서두에 제가 비우는 것보다 무엇으로 채우느냐가 더 중요하다고 말씀드렸잖아요? 우리 마음을 지배하고 있는 더럽고 오염된 생각들로부터 지켜지게 되면 그때부터 하나님의 말씀이 막 채워지기 시작합니다. 하나님이 머무시는 공간이 생기기 시작합니다. 내 인생의 조종대를 하나님께서 잡고 계시니까 내가 두려울 게 없어요.
물론 한 평생 살아가면서 지켜야 할 것들이 많이 있습니다. 내 건강, 재산 지켜야죠. 내 가족을 지켜야 합니다. 물론 그것들도 다 중요하지만, 가장 지켜야 할 것이 바로 내 마음이라는 거예요. 마음을 빼앗기면 모든 것을 다 빼앗기기 때문입니다. 예레미야 17장 9절에서는 우리의 마음이 어떤 상태인지를 잘 설명해주고 있습니다. 렘17:9
9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 누가 능히 이를 알리요
만물보다 더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이 마음이라고 합니다. 세상 모든 것이 만물이라는 것인데, 그것보다 더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이 인간의 마음이라고 합니다. 인간의 마음 상태가 얼마나 비참한 상태에 놓여져 있는지를 잘 설명해주는 말씀 아닙니까?
이제 오늘 말씀의 결론으로요. 이제 우리가 어떻게 하면 마음이 청결해질 수 있을까요? 어떻게 해야 마음이 청결한 자가 될 수 있을까요? 세 가지의 포인트로 나누고 말씀을 마무리하려고 하는데요.
마음이 청결한 자가 되기 위한 첫 번째 대안은 저를 따라 해 주시길 바랍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 마음 청소하기“
이것을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씻는다고 표현을 하는데요. 저는 이렇게 말씀드리고 싶어요. 마음 청소하기! 마태복음 26:28
28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
예수님의 피가 우리를 정결케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우리의 결심이 아닙니다. 사도 바울도 그가 말년에 쓴 편지에서 이렇게 말을 합니다. 베드로전서 1:18-19
18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조상이 물려 준 헛된 행실에서 대속함을 받은 것은 은이나 금 같이 없어질 것으로 된 것이 아니요
19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 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된 것이니라
주님의 피가 우리를 깨끗게 하셨다는 거죠. 예수님 보혈의 피가 우리를 정결케 하실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찬식을 통해 하나님의 경험하고 맛보게 됩니다. 우리 교회는 절기 때마다 이 성찬식을 하는데요. 여러분, 이 성찬에 임할 때 여러분들의 마음을 생각해 보십시오. 이 떡과 잔을 먹고 마실 때, 예수님의 몸에 찢겨진 살과 예수님의 흘리신 보배로운 피를 내가 먹고 마심으로 그분과 하나가 되고, 또 함께 신앙생활을 하는 성도들과 하나가 되는 연합의 시간이라는 사실을 잊지 마시길 바랍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우리를 깨끗게 하시고 마음의 청소가 일어나게 됩니다. 그분의 살을 상징하는 빵을 나눔으로 우리로 하여금 주님을 닮아가는 마음의 청소가 일어나는 것이죠. 그래서 이번 추수감사주일에도 성찬식을 진행할 텐데요. 그날 여러분 모두의 마음이 청소되는 특별한 은혜의 시간이 되실 수 있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마음이 청결하기 위한 두 번째 대안은 ”날마다 새 마음 구하기“입니다.
이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를 새 사람으로 바꾸어 주셨지만, 그러나 우리는 여전히 죄성이라는 우리의 마음을 오염시키는 바이러스와 싸워야 합니다. 그래서 날마다 순간마다 정결한 새 마음을 간구해야 하는 것이죠. 사무엘상 10:9 합독
9 그가 사무엘에게서 떠나려고 몸을 돌이킬 때에 하나님이 새 마음을 주셨고
하나님이 사무엘에게 무엇을 주셨어요? 새 마음을 주셨는데, ‘내가 결심해서 이제 새 마음을 가지고 거룩하고 정결하게 살아야지’ 아무리 결심해도 안 되는 거예요. 새 마음을 주시는 분은 하나님이세요. 그래서 우리가 해야 할 기도가 바로 이것입니다. 에스겔 36:26
26 또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거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
새 영이라는 백신을 우리 마음에 접종해 주셔서 굳어진 마음이 다 제거되고 부드러운 새 마음으로 바뀌는 것! 이것이 바로 우리가 드려야 할 기도 아니겠습니까? 죄를 범했던 다윗이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쓴 유명한 시편이 바로 시편 51편 10절인데요. (합독)
10 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
새번역 성경에는 이렇게 번역하고 있습니다. (화면) ”아, 하나님, 내 속에 깨끗한 마음을 창조하여 주시고 내 속을 견고한 심령으로 새롭게 하여 주십시오.“
여러분, 우리 하나님은요. 깨끗한 마음을 창조해 주시는 분이심을 믿으시길 바랍니다. 그 어떤 외부의 공격에도 끄떡하지 않을 견고한 심령으로 새롭게 해 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함께해야 할 기도는 바로 이것입니다. “사랑하는 주님, 더러워진 내 속에 깨끗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속을 견고한 심령으로 새롭게 하여 주시옵소서!” 이것이 우리가 드려야 할 기도인 줄로 믿습니다.
그런가 하면 마음이 청결해지기 위한 마지막 세 번째 대안은 ”하나님이 주신 새 마음을 잘 간직하기“입니다. 한 번 더 저를 따라해 보시길 바랍니다. “새 마음 잘 간직하기”
아무리 깨끗한 옷이라도 함부로 입으면 금방 더러워지지 않습니까? 하나님이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새 마음은요. 그냥 방치하고 자신을 점검하지 않으면 금방 더러워집니다. 그게 인간의 마음 아닙니까? 어떤 선행의 노력은 아니더라도 이 새 마음을 지키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그래서 유기성 목사님 같은 분은 그렇게 일기를 쓰라고 하잖아요? 내가 24시간 중에 예수님을 바라봤을 때와 바라보지 못했을 때 어떤 마음의 변화가 있는지 영성일기로 써보라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모두는 무엇인가 내게 주신 이 부드러운 새 마음을 지키기 위해 나만의 장치를 마련해야 합니다. 저 같은 경우는 매일 큐티와 새벽기도 시간이 제 새 마음을 지키기 위한 장치거든요. 그래서 목사이기 때문에 새벽기도회를 운명처럼 해야 한다는 말을 사실 저는 별로 동의하지 않습니다.
여러분, 제가 새벽에 기도하는 것은요. 하나님이 제 마음에 머무실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하는 시간이고요. 말씀 묵상을 하는 큐티는 제 마음을 영의 양식인 말씀으로 채우는 시간이에요. 비우고 채우는 것입니다. 저에게는 이게 하나님의 얼굴을 보는 법이에요. 그래서 새벽에 기도가 안 나오고 말씀 묵상도 시시하게 한 날은 여지없어요. 제 안에 딱딱하게 굳어지는 것들이 막 느껴집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에게 새 마음을 주셨음을 믿으십니까? 그렇다면 그렇게 귀하게 얻은 새 마음을 어떻게 지키고 계십니까? 어떤 분에게는요. 이렇게 주일에 나온 예배의 자리는요. 한 주간 오염되었던 내 마음을 청소하는 시간이에요. 얍복 나루에 선 야곱처럼 더 이상 물러설 데가 없습니다. 또 공동체성경읽기를 통해 마음을 청결하게 하는 분도 계실 겁니다. 또 저처럼 새벽기도와 말씀묵상으로 마음을 청결하게 하시는 분도 계실 겁니다.
중요한 것은, 주님의 보혈로 마음을 잘 청소해야 하나님이 거하실 공간이 생깁니다. 그리고 날마다 새 마음을 구하세요. 그리고 하나님이 주시는 그 새마음을 잘 간직하시길 바랍니다.
우리는 누구도 예외 없이 그 사람에게 맞게 은혜를 주십니다. 마지막으로 고린도전서 14장 25절을 새번역 성경으로 함께 읽겠습니다.
25 그 마음 속에 숨은 일이 드러나게 됩니다. 그래서 그는 엎드려서 하나님께 경배하면서 "참으로 하나님께서 여러분 가운데 계십니다" 하고 환히 말할 것입니다.
오늘 이 말씀을 통해 우리 마음속에 숨겨진 것들이 모두 드러나서 야곱과 같이 하나님께 경배하면서 “당신의 얼굴을 본 것이 하나님의 얼굴을 본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의 얼굴, 브니엘의 새 아침을 맛보는 믿음의 역사가 일어나게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찬양 : 세상의 유혹 시험이
❙합심기도
여러분, 우리 이제 함께 기도하시는데요. 오늘 예배를 통해 마음의 청소가 일어나셨습니까? 오늘 이 자리가 야곱이 하나님의 얼굴을 본 브니엘의 현장이 되셨습니까? 그렇게 기도하세요. “주님, 제 마음을 비우는 것 만큼이나 중요한 것은 하나님으로 채워지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마음을 청소하고 주신 새 마음을 잘 간직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이 시간 오늘 주신 말씀의 은혜를 기억하며 주님의 이름으로 한 번 크게 부르시고 함께 통성으로 기도하시겠습니다.
❙마침 기도
살아 계셔서 언제나 우리와 함께 하시는 아버지 하나님!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주님! 우리의 마음이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깨끗이 청소되길 바랍니다. 하나님이 머무실 공간이 마련되어서 우리가 어느 자리에 있든 그곳이 브니엘이 되게 하시고 에서와 같은 원수의 얼굴이 하나님의 얼굴처럼 보이는 은혜를 우리에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우리가 먼저 돌같이 굳은 마음이 제거되게 하시고 새 마음을 주셔서 잘 간직하고 살다가 주님 부르시는 날에 기쁨으로 “할렐루야”를 외치며 주님을 다시 볼 수 있는 은혜를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모든 것을 주님께 맡겨드리며 사랑이 많으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축도
이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크신 사랑과 성령님의 교통하심이, 오늘 말씀으로 더욱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면서 공감의 능력을 가지고 긍휼한 자가 되기를 다짐하는 사랑하는 교우들 머리 머리 위에 지금부터 영원히 함께 계시기를 간절히 축원하옵나이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