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1007주일예배_합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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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nscript
내가 내 파수하는 곳에 서며 성루에 서리라 그가 내게 무엇이라 말씀하실는지 기다리고 바라보며 나의 질문에 대하여 어떻게 대답하실는지 보리라 하였더니
여호와께서 내게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는 이 묵시를 기록하여 판에 명백히 새기되 달려가면서도 읽을 수 있게 하라
이 묵시는 정한 때가 있나니 그 종말이 속히 이르겠고 결코 거짓되지 아니하리라 비록 더딜지라도 기다리라 지체되지 않고 반드시 응하리라
보라 그의 마음은 교만하며 그 속에서 정직하지 못하나 의인은 그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오늘 우리는 기다리는 믿음, 인내하는 믿음의 진정한 가치를 말하고 있는 하박국서의 한 말씀을 함께 읽었습니다.
이 말씀은 예언자 하박국이 하나님과의 쟁론을 벌이는 가운데 나오는 이야기의 한 대목입니다.
예언자 하박국은 바빌론이 이스라엘의 심판자로서 나서게 된 상황을 못마땅해 하며 하나님께 항의를 합니다. ‘도대체 이런 부당한 일이 어디 있습니까? 뭇민족을 죽이고 못된 일만 일삼는 그들이 어떻게 재판관이 될 수 있습니까?’ 하고 항의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답변을 기다립니다. 오늘 본문 말씀의 전반부는 바로 그 하나님의 답변을 기다리는 하박국의 자세를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하바국은 자신을 파수꾼에 비유하며, 밤을 새며 무슨 일이 벌어질 것인가를 지켜보는 파수꾼과 같은 심정과 자세로 하나님의 정의가 어떻게 이루어질 것인지를 기다리고 있겠다고 합니다.
여기에 대해 하나님께서는 분명한 응답을 내리십니다. “너는 누구든지 달려가면서도 알아 볼 수 있도록 내가 알려 주는 것을 새겨 두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말씀하시기를, 하나님의 일은 정한 때가 있어 그 일은 기필코 이루어진다고 하십니다. 비록 더딜지라도 기다리면 기어이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박국이 불만스럽게 여기는 문제에 대해 답하십니다. 하나님이 지금은 바빌론을 들어 쓰시지만, 그의 마음은 교만하여 정직하지 못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들 자체를 옳게 여기시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 역시 종국에는 하나님의 심판을 면할 수 없다는 것을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나서 이와는 대조되는 의인에 관해 말씀하십니다. “의인은 믿음으로 산다.” 사도 바울이 ‘오직 믿음으로만 의롭다 인정받을 수 있다’는 신학을 펼치게 한 근거가 되는 말씀이며, 우리 그리스도교의 신앙적 가르침의 핵심이 되는 말씀입니다. 지금 당장 부딪히는 상황이 어찌되었든 하나님의 뜻이 기필코 이루어지고 만다는 믿음을 결코 포기해서는 안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신실함이 드러나기를 바라고 기다리는 사람의 태도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우리들은 우리를 둘러싸고 벌어지는 일들 하나하나를 마치 파수꾼과 같은 자세로 바르게 주시하여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묻고 인내하며 기다려야 합니다. 그리고 마침내 드러난 하나님의 뜻을 다른 사람에게 전할 수 있어야 합니다. 여기에서 가장 중요한 사실은 믿음, 곧 하나님의 신실함에 대한 믿음입니다. 하나님의 의는 이루어진다는 믿음입니다. 비록 더디더라도 의는 이루어진다는 믿음입니다. 하나님의 신실함이 만천하에 드러나는 것이 때로 더딜 수도 있고, 때로는 이미 드러난 하나님의 신실함을 사람이 깨닫는 데 더딜 수도 있습니다. 믿음을 지키고 기다리는 사람은 그 의를 보겠지만, 조급히 구는 사람은 그 의를 경험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 사실을 쉽게 망각합니다. 그 믿음의 태도를 쉽게 저버립니다. 하나님께로 부름을 받았다고 자처하는 사람들도, 그리고 오늘 우리들도 이 사실을 쉽게 망각하는 버릇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박국보다 뒤늦게, 바빌론이 멸망하고 이스라엘 백성이 포로에서 해방되었을 때 혼란한 상황 가운데서 예언활동을 하였던 예언자 말라기는 바로 그와 같은 상황을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것은 헛된 일이다. 그의 명령을 지키고, 만군의 주 앞에서 그의 명령을 지키며 죄를 뉘우치고 슬퍼하는 것이 무슨 유익이 있단 말인가? 이제 보니 오히려 교만한 자가 복이 있고, 악한 일을 하는 자가 번성하며, 하나님을 시험하는 자가 재앙을 면한다!”(말라기 3:14-15)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개탄한다는 것입니다. 어찌 보면 오늘 우리가 경험하는 상황을 대변해주고 있는 것 같기도 합니다. 하나님의 공의가 땅에 떨어져버린 현실, 정의가 발붙일 틈이 없는 듯이 보이는 현실을 두고 사람들은 그렇게 개탄합니다. 우리들도 수없이 그렇게 개탄할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세상이 만일 그렇기만 한다면 어떨까요? 어디를 둘러봐도 하나님의 신실함, 하나님의 공의를 발견할 수 없는 막다른 골목이라면 절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 절망감에 빠질 때 사람들이 할 수 있는 일은 자기 자신을 믿는 것밖에는 없습니다. ‘하나님을 믿느니 내 주먹을 믿겠다!’ 하는 태도에 빠집니다. 얼마나 살벌한 세상입니까?
여러분, 그래도 세상이 그 절망의 나락으로 떨어지지 않는 이유는 사람들이 나의 욕망의 한계를 벗어난 공의를 믿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만나는 사람들이 모두 이기적인 것 같지만, 꼭 그렇지만은 않습니다. 나의 유익만을 구하지 않고 다른 사람에게 유익이 되는 어떤 일을 감당할 수 있다는 기본적인 마음과 자세가 사람들 사이에서 결코 없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기에 세상은 그렇게 살벌하지 않고 살 만한 세상이 되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은 그 모든 공의의 근원인 하나님의 신실함을 믿으라고 역설합니다. 정말 절망스러운 상황이지만, 나는 그 믿음을 지키겠다는 예언자의 결의요 고백입니다.
우리는 그 기다리는 믿음을 가질 수 있어야 합니다. 기다리는 것은 믿음이 있어야 가능합니다. 사람을 기다리는 것은 그 사람이 올 것이라는 믿음이 있기에 가능합니다. 사람이 제대로 되기를 기다리는 것 역시 그 사람이 제대로 될 수 있다는 믿음이 있기에 가능합니다. 기다려야 할 것을 기다리지 못하고 서두를 때는 반드시 일을 그르치게 되어 있습니다.
믿음으로 기다리는 기쁨은 비단 특별한 상황에서만 경험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예언자 하박국이 처해 있던 상황처럼, 아니 우리가 일상적으로 처해 있는 상황처럼 도무지 좋은 일이 이뤄질 것 같지 않아 불안하고 초조해질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믿음으로 기다리는 기쁨을 누리는 것이야말로 오히려 소중하고, 그것은 결코 불가능한 일이 아닙니다.
메시야를 기다리는 믿음은 모든 것이 불가능해 보이는 상황 가운데서 희망을 간직한 믿음입니다. 오늘 대림절 둘째 주일 그 믿음을 우리 가운데서 새삼 확인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어쩌면 오늘 우리들의 존재 자체, 이 교회 공동체 존재 자체가 우리의 그 믿음의 증거일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여전히 많은 것이 결여된 가운데 있다고 느낄지 모릅니다. 그래서 때로는 불안하고 때로는 초조해 합니다. 그러나 한편으로 생각하면 우리는 제법 탄탄한 교회로서 그 몫을 다 하고 있다고 느낄 때가 적지 않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것은 우리의 믿음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그 믿음을 변함없이 지켜나가는 우리들이 되기를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