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예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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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의 회복

여러분은 ‘사랑’이라는 단어를 들으시면 무엇이 가장 먼저 떠오르십니까?
사랑에도 몇 가지 종류가 있는 것은 확실합니다. 성경을 봐도 그렇고 우리 삶을 봐도 그렇습니다. 친구의 사랑이 있고 남녀의 사랑도 있고 부모님의 사랑도 있고 하나님의 사랑도 있습니다.
그런데 확실한 것은, ‘믿음’과 ‘사랑’은 서로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라는 것입니다. 믿음이 자랄수록 사랑도 자랍니다. 믿음이 자랄수록 비워지고 낮아지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사랑을 수용할 수 있는 그릇이 커집니다.
내가 저 사람을 사랑하는데 믿지는 않는다는 것은 말이 안 되고, 또 저 사람을 믿는데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도 흔한 일이 아닙니다. 정말 누군가를 믿게 되면 사랑하게 되고, 또 사랑하면 믿게 됩니다. 인간에 대한 믿음과 사랑도 그렇지만 특히 예수님께 대한 믿음이 그렇습니다. 믿음이 자랄수록 그분의 사랑을 더 온전히 느낄 수 있습니다.
사실은 누군가를 향한 믿음이 자랄수록 내가 그 사람을 사랑하는 것도 커지지만, 그 사람이 나를 사랑하는 것에 대해 더 크게 느끼게 됩니다. 예수님도 더 믿으면 믿을수록 내가 예수님을 더 사랑하는 것도 있지만, 예수님의 나를 향한 사랑이 더 크게 느껴지는 것입니다.
1. 끝까지 사랑하시는 예수님과 배신하는 유다
1절은 예수님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시고, 또 자신도 영광을 얻으시는 것이 바로 그분의 사랑을 통해서라는 사실을 잘 보여줍니다.
“유월절 전에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 (1절)
첫째로, 시간적 배경으로 ‘유월절’이 언급되었습니다. 점점 예수님의 때가 다가오고 있습니다. 다른 때 보면 예수님이 ‘아직 때가 아니다.’라고 하시며 자신이 메시아이심을 드러내지 않으셨는데 이제는 때가 되었다는 겁니다.
둘째로,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라고 나옵니다. ‘때’라는 표현을 통해서 이제는 결정적인 시기가 왔다는 것을 알려줍니다.
셋째로, 앞서 언급한 것처럼 여기서부터 예수님이 제자들을 향해 집중적으로 말씀하시기 시작하십니다. 이제 떠나실 때가 가까웠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여기 가만히 보면 예수님은 자신의 죽음과 부활과 승천을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는 것’으로 표현하십니다. 이것을 통해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이 결코 패배가 아니라 예수님이 모든 사명을 다 마치시고 마치 장수가 개선 행진을 하는 것처럼 승리와 영광의 길을 가신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평생 자신의 때가 아니라 하나님의 때를 따라 사셨습니다. 이제는 그때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요한복음은 그때를 사시는 예수님의 걸음을 한마디로 ‘사랑의 걸음’이라고 표현합니다. 그래서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1)라고 하십니다.
여기서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은 직역하면 ‘세상에 있는 자기 것들’인데, 이미 1장 11절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아니하였으나” 말씀과 같습니다. 또한 그들은 ‘하나님이 택해 자기에게 맡기신 자들’(6:37)이고, 또 ‘자기 양들’(10:27)로 표현한 것과도 같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에 반응한 사람들, 하나님이 보내신 하나님 나라의 왕이신 예수님을 영접한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이제 예수님은 그들을 끝까지 책임져주신다는 것입니다. ‘자기 사람들’ 즉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사람들을 끝까지 책임져주십니다. 그것을 ‘끝까지 사랑한다’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끝까지 사랑하셨기 때문에 우리 인류에게 구원의 문이 열렸습니다. 끝까지 사랑하셨기 때문에 자기만 사랑하던 이기적인 사람들이 변화되었습니다.
우리의 신앙이 자란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바로 사랑하는 법을 배운다는 뜻이고, 인내와 오래 참음으로 나의 소중한 것을 내어주기까지, 즉 끝까지 사랑하는 사람으로 변화되어 가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신앙이 자라는 것은 사실 사랑이 자라는 것입니다. 사랑의 정도가 더 커지는 것입니다.
사실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다 사랑합니다. 그런데 사랑의 범위가 어떻게 되는가 보면, 대다수의 사람들은 그 범위가 굉장히 한정되어 있습니다. 자기 자신, 자기 것, 특히 자기 가족 정도에 한정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을 끝까지 사랑하신 예수님을 따르는 크리스천이라는 것은 바로 끝까지 사랑하는 것을 배우며 따라간다는 뜻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사랑을 하기는 하는데 하다가 그만둡니다. 조금 하다가 중단합니다. 끝까지 하지를 못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사랑은 끝까지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단순히 시간만 이야기하는 게 아니라, 내가 사랑하고 싶은 사람은 사랑하고 사랑하기 싫은 사람은 사랑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고 싶지 않은 사람까지도, 또 별로 사랑하고 싶지 않을 때에도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 ‘끝까지 사랑’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을 보실 때 그들이 예뻐서 끝까지 사랑하셨겠습니까? 그들은 예뻐할 만한 자격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끝까지 사랑하셨습니다. 그 조건은 단 하나입니다. 자기 사람들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을 향한 믿음을 고백한 사람들이며, 그들을 끝까지 책임져주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세족식은 단지 주인이 종의 발을 씻어주는 것과 같이 겸손한 섬김의 모범을 보여주신 것인데, 그것만이 아니라는 점을 2절이 잘 보여줍니다.
“마귀가 벌써 시몬의 아들 가룟 유다의 마음에 예수를 팔려는 생각을 넣었더라” (2절)
이 시점은 유월절 전날 저녁입니다. 유월절은 가장 큰 절기이고 유대인의 달력으로는 1월 15일입니다. 금요일 해질 때 유월절이 시작됩니다. 그러니 이날은 목요일 저녁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제자들과 최후의 만찬을 나누신 밤입니다. 이때는 이미 가룟 유다가 예수는 자기가 기대하던 메시아가 아니고 더 이상 그에게서 기대할 것이 없다고 판단하여서 돈을 받고 대제사장들에게 예수를 넘겨주기로 약속한 시점입니다.
분명히 유다도 예수님을 사랑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향한 유다의 사랑은 끝까지 사랑하는 사랑이 아니었습니다. 그냥 거기까지였습니다. 수많은 경우에 우리도 예수님을 사랑하긴 하는데 끝까지 하지 못하고 거기까지인 경우가 많습니다.
예수님의 사랑이 자신을 죽여서 남을 살리는 사랑이었던 반면에, 가룟 유다의 사랑은 자기를 살리기 위해서 남을 죽이는 사랑이었습니다. 자기가 먼저 받기 전에는 주지 않는 사랑이었습니다. 자기만 아는 사랑이었습니다.
분명히 예수님을 배반할 생각은 가룟 유다 본인이 스스로 판단한 것입니다. 그런데 요한복음에서는 마귀가 그런 유다의 마음에 배반의 생각을 넣었다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당연히 가룟 유다의 마음에 예수에 대한 실망과 그를 따른 3년 반 동안의 삶에 대한 후회, 내일에 대한 염려, 또 예수에 대한 불신이 자라고 있었고, 마귀가 바로 그것을 보고서 배반의 생각을 넣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마귀는 수없이 우리를 유혹합니다. 오늘 이렇게 교회에 예배하러 오셨지만, 예배하러 오기 전에도 마귀가 속삭입니다. 이미 우리 안에 그런 생각이 있습니다.
요한복음이 굳이 여기서 마귀를 언급하는 것은, 이 싸움이 영적 전쟁이라는 겁니다. 그저 인간적인 일만이 아니라는 겁니다. 그리고 세족식은 앞으로 있을 영적 전쟁에서 승리하는 길을 보여주는 의미가 있다는 것을 여기서 알려줍니다. 세족식은 마귀가 가룟 유다에게 심어준 생각과 정반대의 생각을 품을 때 예수님이 승리하신 것처럼, 제자들도 그렇게 섬김으로 승리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사건입니다.
처음에 유다가 예수님을 만났을 때 어땠겠습니까? 굉장히 좋았습니다. 마음에 꼭 들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엄청난 인기를 끄셨음에도 좀처럼 사람들을 모으려고 하시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오병이어의 기적 이후 사람들이 자기를 왕으로 삼으려고 하는 것을 보시고 그들을 해산시키신 후 혼자 산으로 가셔서 기도하셨습니다. 도망치신 겁니다. 예수님의 형제들이 ‘형님, 좀 유명해지려면 예루살렘에 가서 기적을 일으키세요.’라고 조언을 하는데도 ‘때가 되지 않았다.’라며 거절하시고 나중에 조용히 혼자 예루살렘에 올라가십니다.
또 사람들이 조금 모인다 싶으면 엉뚱한 요구를 하십니다. 엉뚱한 말을 하시니까 사람들이 실망하지 않겠습니까? 유다가 계속 실망하게 된 겁니다.
그런 일이 계속 이어지니까 가룟 유다는 어느 순간부터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나라(왕국)’와 자신이 꿈꾸는 ‘왕국’이 다르다고 느끼게 되었습니다. 그러다 결정적으로 예수님이 세 번이나 자신이 예루살렘에 올라가면 고난을 당하고 죽임을 당할 것이라고 말씀하시니까 결정적으로 마음을 접게 된 겁니다. 예수님에게서 혁명가의 모습이 전혀 안 보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스스로 자신을 죽음에 넘겨주고 아버지께로 돌아갈 생각을 하시는 동안, 가룟 유다 역시 예수님을 팔아넘기기로 작정한 것입니다.
가룟 유다는 분명히 예수님을 사랑한 사람입니다. 하지만 자기가 꿈꾸며 원하는 왕국을 세우기 위해서 자기 방식으로 예수님을 사랑한 사람입니다. 가룟 유다는 자신을 사랑하신 예수님을 사랑하지 않았습니다. 사실상 예수님의 사랑을 거부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예수님을 끝까지 사랑할 수가 없었습니다. 처음에 사랑하긴 사랑했는데, 자기 방식으로 사랑하다가 결국 끝까지 사랑하지 못하고 포기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계획과 기대에 맞을 때에만 예수님을 사랑하려고 했습니다. 자기 기대에 맞지 않으니까 버렸습니다. 자기가 더 많은 것을 얻는다는 보장이 있을 때에만 사랑하려고 했는데, 그렇게 안 될 것 같으니까 예수님을 포기했습니다. 가룟 유다에게는 예수가 사실상 자기 욕망을 이루어줄 우상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가룟 유다는 예수님을 사랑했지만 끝까지 사랑하지는 않은 대표적인 사람입니다.
그런데 우리도 신앙생활을 하면서 똑같을 수 있습니다. 내가 꿈꾸는 인생, 내가 꿈꾸는 가정, 내가 꿈꾸는 사회를 위해서 예수님을 내 방식대로, 내 입맛대로 사랑한다면 바로 가룟 유다와 같아지는 것입니다. 심지어 신앙생활도 내 방식대로, 내가 원하는 대로 예수님을 이용하려고 한다면 가룟 유다와 다를 바가 없게 됩니다.
2. 섬김 이상의 의미
사실 세족식이 있었던 최후의 만찬의 날까지도 가룟 유다뿐 아니라 제자들 모두 서로 누가 더 높은가에만 관심이 있었습니다. 십자가에서 돌아가시기 직전 최후의 만찬을 하는 목요일 저녁, 세숫대야도 있고 물도 있었지만 제자들이 서로 발을 닦아주는 모습이 전혀 보이지 않습니다. 이것을 보면, 그들은 낮아지는 것에 대해서 굉장히 조심하고 불편해 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한 제자들의 마음을 잘 아시는 예수님은 손수 그들의 발을 씻겨주심으로써 섬김의 본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런데 과연 예수님이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신 이 세족식이 섬김의 본을 보여주시는 것만이 목적이겠습니까? 다시 말해, 서로 높아지려고 하는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높아질 것에 관심을 두지 말고 섬기는 데에만 초점을 맞추라는 의미로 발을 닦아주셨느냐는 겁니다.
세족식은 예수님이 이 땅에서 행하신 일들 중 우리가 거의 유일하게 예수님을 그대로 따라서 할 수 있는 행위입니다. 그러나 세족식은 우리가 따라할 수 있습니다.
세족식의 핵심은 섬김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며 섬기셨듯이, 우리도 섬김을 배우기 위해서 세족식을 행합니다. 그러면서 우리도 서로 섬겨야 한다고 말합니다. 섬김은 정말 중요한 일이고, 우리가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반드시 따라야 하는 일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목적이 바로 섬김이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 스스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막 10:45)
세족식은 우리가 생생하게 바로 이 섬김을 배울 수 있는 기회입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신 세족식이 거행된 때는 최후의 만찬 시간이었는데, 그때 식사 중에 갑자기 일어나셔서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십니다.
“저녁 먹는 중 예수는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자기 손에 맡기신 것과 또 자기가 하나님께로부터 오셨다가 하나님께로 돌아가실 것을 아시고, 저녁 잡수시던 자리에서 일어나 겉옷을 벗고 수건을 가져다가 허리에 두르시고, 이에 대야에 물을 떠서 제자들의 발을 씻으시고 그 두르신 수건으로 닦기를 시작하여” (3-5절)
최후의 만찬을 하시며 세족식을 하신 이때는 예수님이 체포되시기 불과 몇 시간 전입니다. 그 밤을 지나고 캄캄한 새벽에 체포되셨습니다. 십자가에 달리시기 바로 전 날인 목요일 저녁입니다.
이때 예수님의 마음은 몇 시간 후에 달리실 십자가로 가득하지 않았겠습니까? 십자가에 못 박히는 죽음의 사명을 다 이루어서 하나님이 주신 계획을 온전히 완성하는 데에 모든 관심이 집중되어 있는 때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뜻만을 생각하고 계시는 예수님과 달리 제자들은 완전히 엉뚱한 것을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제자들의 관심은 오직 예수님이 내일 왕이 되셔서 권력을 잡으시면 누가 가장 그 밑의 높은 자리를 차지할 것인가, 누가 그분의 오른팔(2인자)이 될 것인가에만 관심이 있었습니다. 제자들이 평소에 ‘누가 크냐?’ 하고 싸운 이유가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유대인의 식사 자리에서는 대체로 발을 씻기는 의식이 행해집니다. 그때 예수님은 잡수시던 자리에서 일어나 겉옷을 벗고 수건을 가져다가 허리에 두르신 다음, 대야에 물을 담아다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고 그 수건으로 닦아주셨습니다. 그러니까 제자들은 옆으로 비스듬하게 누워 있는 상태였습니다.
식사 자리에서 발을 씻어야 한다면 누가 누구를 씻어야 마땅합니까? 그 집의 종들이 주인이나 손님의 발을 닦아주는 것이 보통입니다. 또 이렇게 사람들이 많이 있다면, 신분이 낮은 사람이 높은 사람의 발을 씻어주어야 합니다. 그러니까 당연히 제자들 중에서 가장 낮거나 가장 어린 사람이 예수님과 다른 선배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는 것이 당연한 문화였다는 겁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그때 모두 발을 씻는 일에 선뜻 나서지 않고 있습니다.
이 상황에서 자기가 나서서 발을 닦게 되면 자기가 다른 사람들보다 낮은 사람이라는 것을 스스로 인정하는 것이 됩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왕이 되신 다음에도 가장 낮아지니까 나설 수가 없는 겁니다.
바로 그때 예수님께서 놀라운 반전을 보여주십니다. 이런저런 이유를 생각하며 발을 씻는 데 나서지 못하고 있는 제자들의 발을 예수님이 손수 씻어주십니다. 제자들은 허를 찔린 기분이 들었을 것이고 깜짝 놀랐을 겁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자기 차례가 왔을 때 놀라면서 거절을 합니다.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니 베드로가 이르되 주여 주께서 내 발을 씻으시나이까” (6절)
그런데 베드로의 말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이 굉장히 이상합니다. 뭐라고 하십니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하는 것을 네가 지금은 알지 못하나 이 후에는 알리라” (7절)
“이 일의 뜻을 지금은 네가 알지 못한다.”라고 말씀을 하십니다. 무엇을 모른다는 말씀입니까? 베드로가 아무리 정식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한 어부 출신이라고 해도, 발을 씻어주는 것이 섬김의 본이라는 것을 몰랐을 리 없습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은 그에게 “지금은 네가 알지 못하지만 나중에는 알게 될 것이다.”라고 하십니다.
이것은 아주 의미심장한 말씀이고, 사실 이것이 오늘 말씀의 핵심입니다. 오늘 우리는 예수님의 세족식을 보면서 주로 예수님이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신 섬김을 생각합니다. 그래서 우리도 그것을 따라하면서 우리도 남들을 섬기는 삶을 살자고 결단하며 나아갑니다. 당연히 그것은 틀린 게 아니며, 아주 아름다운 일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가르침은 거기에서 조금 더 나아간다는 것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내가 하는 일을 지금은 네가 알지 못한다. 그러나 나중에는 알게 될 것이다.”라고 하십니다. 이 말씀의 의미가 무엇이겠습니까? 예수님이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신 세족식에 어떤 숨겨진 의도가 들어 있는 것입니까?
모세에게 신을 벗으라고 말씀하신 하나님은 오늘 우리에게도 신을 벗으라고 하시면서 이렇게 질문하시는 것과 같습니다. ‘2주면 갈 수 있는 너의 인생길을 내가 40년 동안 광야의 길로 인도하려고 하는데, 그래도 너는 나를 신뢰하며 따라오겠느냐?’ 이것을 물으십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질문에 대해서 ‘예, 하나님, 그렇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하나님을 신뢰합니다. 그래도 따르겠습니다.’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말은 쉬운데 실제로는 결코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진짜 믿음의 고백입니다.
사실 2주면 갈 수 있는 길을 40년 걸려서 가게 하신 데에는 깊은 뜻이 있습니다. 2주 밖에 걸리지 않고 이집트에서 모세가 이끌고 가나안 땅으로 그대로 들어갔으면 금방 망했을 것입니다. 아무 준비가 안 되어 있습니다. 전투도 해본 적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오히려 40년 동안 엄청난 훈련을 시키시고 준비를 시켜주신 것입니다. 40년이 꼭 필요한 기간이었기 때문에 40년이 걸려서 가게 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2주 만에 가고 싶어 합니다. 40년 걸려서 가고 싶어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거기에는 하나님의 깊은 뜻이 있습니다. 요즘의 표현대로 하나님은 다 계획이 있으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 계획을 따라가고 싶어 하지를 않습니다. 그러나 모세는 그 하나님의 계획을 따랐습니다. 순종했습니다. 뭐라고 하시든지 따라갔습니다. 심지어 “너는 가나안 땅에 못 들어가고 여기서 죽어야 한다.”라고 하셨을 때도 순종했습니다.
아니, 그런 삶을 살면 그게 바보가 아닙니까? 예, 그렇습니다. 주님의 말씀 앞에 바보처럼 무조건 따르고 순종하는 것이 바로 신을 벗는 의미입니다. 그렇다면 나는 주님 앞에서 신을 벗었는가?
3. 예수님과의 관계를 세우는 데 집중하라
예수님이 발을 씻겨주신 의미가 있는데 그것을 모르고 베드로는 못한다고 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이 뭐라고 하십니까?
“베드로가 이르되 내 발을 절대로 씻지 못하시리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너를 씻어 주지 아니하면 네가 나와 상관이 없느니라” (8절)
“절대로 못 씻기십니다.”라고 합니다. 당연히 어떻게 제자가 감히 발 씻김을 받겠습니까? 그런데 “씻겨주지 않으면 너는 나와 상관이 없다.”라고 하시니까 깜짝 놀라 다시 말합니다.
“시몬 베드로가 이르되 주여 내 발뿐 아니라 손과 머리도 씻어 주옵소서. 예수께서 이르시되 이미 목욕한 자는 발밖에 씻을 필요가 없느니라 온 몸이 깨끗하니라 너희가 깨끗하나 다는 아니니라 하시니” (9-10절)
베드로는 발뿐만 아니라 손과 머리도 다 씻어달라고 호들갑을 떠는 베드로에게 발만 씻으면 된다고 하십니다. 그런데 왜 베드로가 갑자기 ‘안 됩니다.’라고 하다가 ‘나와 상관이 없다.’라고 하시니까 ‘다 씻겨주십시오.’라고 합니까? 왜냐하면 2인자가 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처음에 안 된다고 한 것이 자기 나름대로는 예수님을 향해 예의라고 생각했는데 오히려 예수님은 ‘네가 나와 상관이 없다.’라고 하시니까 큰일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2인자가 되는 계획이 물거품이 됩니다. 그러니까 호들갑을 떨면서 다 씻겨달라고 합니다. 그러나 발만 씻으면 된다고 하십니다.
즉, 이 말은 정말 예수님을 따르기로 한 사람이라면 예수님이 자기 발을 씻기시도록 내어드릴 때 그것이 정말 예수님과의 관계가 세워지는 것이고 주님의 뜻이 무엇이든지 주님의 뜻을 따라 살겠다는 순종의 표현이 된다는 것입니다. ‘주님 앞에 내 발을 내어드릴 때 주님이 내게 무엇을 원하시든지 그 길을 가겠습니다.’라는 뜻이 된다는 것입니다.
‘네가 나와 상관이 없다.’라는 말씀이 무슨 뜻입니까? ‘네가 내게 발을 내어주지 않는다는 것, 즉 계속 네 뜻대로 살겠다고 주장한다면 나의 뜻이 너의 삶 가운데 이루어질 수가 없다.’라는 뜻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결국 21장에 가면 ‘네가 젊을 때는 스스로 다녔지만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릴 것이다. 남들이 띠를 띠울 것이다. 원하지 않는 곳으로 데려갈 것이다.’라고 나중에는 알게 될 것을 미리 이야기해주셨습니다(요 21:18-19).
오늘 본문에는 세 가지 사랑이 등장합니다. 예수님이 끝까지 사랑하신 ‘끝까지의 사랑’, 자기 방식대로 사랑하다가 사랑하기를 포기한 가룟 유다의 사랑, 그리고 자기가 원하는 것을 이루고자 예수님을 따랐던 베드로의 사랑입니다.
그렇다면 나의 사랑은 과연 어떤 사랑인가 점검해보아야겠습니다. 나는 내가 원하는 것을 이룰 때에만 주님을 따를 것인가? 나는 내가 원하는 것을 이루려 하다가 주님이 내 말을 잘 안 들어주시면 그냥 관둘 것인가?
아니면 상관없이 어떠한 길로 인도하시든 분명히 거기에는 하나님의 선한 뜻이 있음을 믿고 신뢰하며 하나님의 뜻을 따르고 하나님을 사랑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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