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4:43-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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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께서 하신 말씀을 믿고

지난 시간까지 사마리아 여인을 살펴보았습니다. 그동안 요한복음을 통해서 복음의 내용이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받아 드렸을 때 삶이 어떻게 변화는지를 사마리아 여인의 삶을 통해 알 수 있었습니다.
여인의 삶이 달라졌다고 해도 그녀는 물을 길러 다녀야 했고 지금의 남편이 아닌 남자와의 관계를 계속 유지하고 있을지 모릅니다. 예수님을 믿는다고 말하면 우리는 먼저 나쁜 습관을 버린다든지 자신의 성격을 바꾸려 노력한다든지 하는 것을 생각했습니다. 물론 눈에 보이는 변화는 중요합니다. 그러나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사마리아 여인에게 찾아온 기쁨 즉 빼앗길 수 없는 기쁨을 소유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이 여기에서 순서를 바꿈으로 인해 약간의 변화를 겪는다고 그것을 전부로 착각한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담배를 많이 핀 사람이나 술을 많이 마셔서 병을 얻은 사람이 있다고 하면 병원에서 진단을 받으면 그는 담배와 술을 끊는 행동을 합니다. 지극히 정상적인 순서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수술’ 즉 실제 아픈 곳을 치료하기 위한 준비에 불과한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복음 즉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 이심’을 믿는 것은 ‘영생’을 얻기 위함이라는 방향으로 다양한 사람들이 어떻게 가고 있는지를 저자인 사도 요한이 우리에게 보여 주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대표적으로 사마리아 여인의 모습을 길게 보여 준 것이지요.
그렇다면 오늘 본문은 ‘왕의 신하의 아들을 고치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통해 사도 요한은 무엇을 보여주고자 하는 것일까요? 마지막 절에 ‘54절 이것은 예수께서 유대에서 갈릴리로 오신 후에 행하신 두 번째 표적이니라’고 정해두고 있습니다.
시간이 흐른다고아는 것이 믿음이 되지 않습니다.
첫 번째 표적과 연결이 되죠. 그 연결점을 먼저 찾아 보는 것이 의미가 있습니다. 저자는 시간에 대해 독특하게 계속해서 언급하고 있다는 것은 이제 충분히 눈치를 채고 있을 겁니다. 사마리아 여인에게 시간은 ‘제6시 즉 우리 시간으로 정오’라는 시간과 이것을 ‘어둠’과 ‘밝음’ 즉 빛의 영역이라는 구분으로 이야기를 했습니다. 기억하실거라 믿고 ‘어둠’ 즉 밤에 찾아온 ‘니고데모’는 깨닫지 못했고 정오의 내리쬐는 태양 아래 물 긷는 여인의 고통은 오히려 밝음 즉 예수님을 만나고 말씀을 듣고 깨달음으로 빛은 안다, 깨닫는다. 기회가 있다라는 의미와 연결된다는 것이죠. 그러니까 본문에서도 43절 ‘이틀이 지매’라고 하시면서 사마리아인들과 거주하셨던 예수님이 40절 ‘거기서 이틀을 유하시매’ 다시 43절 이틀이 지나매 이렇게 가만히 있는 것이 아니라 시간의 변화를 계속 저자가 밝힘으로써 읽는 저와 여러분 즉 독자가 예수님의 지상 사역이 흐르고 있고 첫 번재, 두 번째 표적과 같이 계속해서 쌓여 간다는 것이죠.
예수님은 갈릴리에서 사역을 시작하시고 예루살렘에 내려오셔서 유대인의 최대 명절인 유월절을 보내시고 다시 갈릴리로 가시던 길에 중간즘의 사마리아 도, 수가시 에 들렸다가 이제 갈릴리도 가나시로 이동하는 배경을 기록하면서 예수님은 선지자가 고향에서는 높임을 받지 못한다 라고 문맥상 이해하기 어려운 말씀을 하십니다. 그러니까 앞으로 이어질 갈릴리의 사역은 쉽지 않는 데 그 이유가 45절에 명절에 예루살렘에서 하신 모든 일을 보았다, 그런데 이들이 갈릴리 사람이다. 여기서는 보았다 - 그래서 믿었다로 이어지지 않습니다. //
우리 주변에 무엇에 대해 아는 사람이 참 많습니다. 아는 것은 좋은 것이지만 때론 앞으로 나아가는 것을 막기도 합니다. ‘내가 해봐서 아는데’, ‘그건 내가 잘 아는데’ 물론 아는 것은 이렇게 도움이 되는 것 같지만 많은 경우 자신을 내세우거나, 자랑하는 방향으로 흐르거나, 상대를 안다는 이유로 무시하는 경우로 흐릅니다. ‘아는 것’이 겪어보지 못한 사람에게 유용한 정보가 된다면 좋은 경우지만 도전하지 못하게 하거나 좌절하게 만든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보았지만 믿지 못하는 것, 요한이 가장 문제를 삼는 경우가 이것입니다.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이 부모의 신앙 아래에서 태어나고 어려서부터 교회를 다니며 성장했기 때문에 ‘아는 것’이 많은 그리스도인이 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하지만 ‘아는 것’이 ‘믿음으로’ 간 사마리아 여인에게 누가 있었습니까? 바로 ‘예수님’이 있었습니다. 갈릴리인들은 예수를 보았고 기적을 보았을 뿐이지 예수님을 만난 사람들이 아닙니다.
그러면서 다시 아는 것과 예수님을 만난 사람인데 그 사람 이야기를 해주겠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2.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다는 것은 만난다는 의미입니다.
본문의 유사한 이야기가 마태복음 8:5–13 “5 예수께서 가버나움에 들어가시니 한 백부장이 나아와 간구하여 6 이르되 주여 내 하인이 중풍병으로 집에 누워 몹시 괴로워하나이다 7 이르시되 내가 가서 고쳐 주리라 8 백부장이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내 집에 들어오심을 나는 감당하지 못하겠사오니 다만 말씀으로만 하옵소서 그러면 내 하인이 낫겠사옵나이다 9 나도 남의 수하에 있는 사람이요 내 아래에도 군사가 있으니 이더러 가라 하면 가고 저더러 오라 하면 오고 내 종더러 이것을 하라 하면 하나이다 10 예수께서 들으시고 놀랍게 여겨 따르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 중 아무에게서도 이만한 믿음을 보지 못하였노라 11 또 너희에게 이르노니 동 서로부터 많은 사람이 이르러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함께 천국에 앉으려니와 12 그 나라의 본 자손들은 바깥 어두운 데 쫓겨나 거기서 울며 이를 갈게 되리라 13 예수께서 백부장에게 이르시되 가라 네 믿은 대로 될지어다 하시니 그 즉시 하인이 나으니라”
에 나오지만 차이가 있습니다. 또한 로마의 백부장의 하인을 고쳐 주는 이야기와 다르게 ‘왕의 신하’라고 말합니다. 가능한 추측은 ‘이방인’입니다. 앞서 예수님은 유대인들에게 그리고 같은 민족의 뿌리지만 상대하지 않는 ‘사마리아인’에게서 ‘이방인’까지 확장되고 있다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추측 가운데 중요한 것은 ‘가나’라는 지역이고 이곳에서 있었던 ‘물로 포도주를 만드신 곳’이라고 다시 설명을 붙입니다. 그렇다면 여기 ‘왕’은 누구일까요? 당시 유대, 사마리아, 갈릴리 이렇게 지역은 왕이라 불리는 체계로 로마가 일종의 정책을 펼쳤는데 그 지역 출신 왕을 세워 통치하는 방식인 것이죠. 그렇다고 로마의 황제와 같은 권한이라기 보다 그 지역을 다스리는 영주에 가깝다고 이해하면 될 것입니다.
전체 맥락으로 보면 왕의 신하는 갈릴리 즉 경기도에 가버나움시, 가나시 (23킬로)처럼 인근 지역으로 연결된 것으로 여기에 신하가 있었다는 것이죠. 유추를 해보면 아들이 있는 곳 즉 자신의 집은 풍무동인데 가나에서 일을 한다는 가정이 가능합니다. 그런 사정에서 예수가 오신다는 것을 들었고 그는 아들의 병을 고치고자 요청을 합니다. 그의 업무 때문에 가나에 있었는지 아니면 아들의 병 때문에 이런 저런 소식을 듣고 가나에 있었는지 자세히는 알 수 없습니다. 그렇지만 ‘아들의 병’ 때문에 그가 기적이 있었던 가나에 있었고 그때 예수의 오심을 들었다고 보거나, 왕의 신하였기 때문에 그의 최대 관심사가 아들의 병을 고침 받는 것이고 그랬기에 가나에서의 기적에 대한 정보, 그리고 그것을 행하신 예수께서 다시 오신다는 정보를 누구보다 먼저 알았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47절은 ‘듣고’, ‘가서’, ‘내려오셔서’, ‘고쳐 주소서’라는 동사로 가득찬 문장은 그만큼 ‘절박한’ 상황을 보여줍니다. 자식이 아프면 부모의 삶은 송두리째 빼앗긴듯 합니다. 오직 그것 밖에 보이지 않죠. 특히 49절 ‘내 아이가 죽기 전에’는 그만큼의 시급성을 다투고 그랬다면 그는 이런 시급성에 들린 ‘기적’의 이야기 그 주인공이신 예수님을 만난다면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했을 것입니다.
여기에서 48절의 예수님 말씀은 참 이상합니다. ‘너희는 표적과 기사를 보지 못하면 도무지 믿지 않는다’라는 것이죠. 그럼 앞서 갈릴리 사람들은 예루살렘에서 봤지만 믿지 않았습니다. 여기서 말씀과 배치되죠. 이렇게 정리하면 봤지만 믿지 않는 사람이나, 보지 않았다고 믿지 않는 사람이나 결국은 같은 사람이라는 것이죠. 예수 믿으세요라고 하면 ‘난 보지 않는 것은 믿지 않는 사람이야’라고 말합니다. 본다는 것은 산소를 눈으로 본다는 것이라는 의미보다 그것이 증명되어야 한다는 것에 가깝죠. 그러니까 나에게 ‘기적’ 즉 아들이 살아나는 일이 일어나야 나는 믿는다, 들었던 가나의 물이 포도주로 변한 능력은 일종의 ‘정보’에 불과하고 그렇다면 ‘내 아들이 살아나야’ 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죠.
물론 왕의 신하는 ‘당신이 예수라면 어디 내 아들을 살려봐’ 그럼 내가 믿을께 라고 한 것이 아닙니다. 그는 ‘듣고’, 가서, 내려오셔서, 고쳐 주세요 라고 지푸라기라도 매달리는 부모의 마음을 갖고 있는 것은 분명합니다. 그럼에도 앞서 살폈던 1-4장까지 예수님은 누구이십니까? ‘사람의 마음을 아시는 분’ 이라는 것입니다. 비록 부모로 자녀의 죽음을 앞두고 어떤 셈이나 이익을 따지겠습니까? 그래서 기적에만 눈을 두면 예수님은 안보이고, 아이가 살아난 것만 보입니다. 본문은 아이가 살아난 기적이 포커스가 아니라, 50절 ‘예수께서 하신 말씀을 믿’는 것이 주제라는 것입니다. 기적은 정말 강력합니다. 듣는 것보다 천 배, 아니 만 배나 강력한 것이 기적입니다.
한 개인에게도 이렇게 강력한데, 앞서 유월절에 대해 살폈던 것처럼 민족을 살려 애굽에서 탈출시키신 아버지 하나님의 기적은 어떠하겠습니까? 우리는 간절한 상황이 닥칠 때 예수님을 찾습니다. 그렇게 찾는 경우에도 응답하시지만 지금처럼 매주 전해주시는 말씀을 차분히 듣고 ‘하신 말씀’인 성경을 믿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3. 결과적으로 ‘예수께서 하신 말씀을 믿’었습니다. 그 말씀은 ‘가라 네 아들이 살아 있다’ 즉 시급성을 다투는 상황에서 ‘기적’을 찾아 가나에 온 ‘왕의 신하’는 예수의 말씀을 믿고 ‘내려 오셔서 고쳐주심’을 버렸습니다. 믿는 다는 것은 우리가 아는 ‘하나’ 또는 ‘그 이상’을 버려야 합니다.
열왕기 하에 ‘나아만’이라는 아람 왕의 군대 장관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는 나병환자였는데 이스라엘 땅에서 잡아온 소녀 하나가 자기 나라 즉 이스라엘에 병을 고칠만한 사람이 있다고 말하고 그것을 들은 나아만은 ‘엘리사’라는 선지자를 찾아갑니다. 그런데 엘리사는 나와보지도 않고 요단강에가서 일곱번 씻으라고 자기 종에게 말을 전합니다. 열왕기하 5:11 “11 나아만이 노하여 물러가며 이르되 내 생각에는 그가 내게로 나와 서서 그의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고 그의 손을 그 부위 위에 흔들어 나병을 고칠까 하였도다” 여기에 ‘내 생각에는’ 바로 이 부분입니다. 그리고 14절에 열왕기하 5:14 “14 나아만이 이에 내려가서 하나님의 사람의 말대로 요단 강에 일곱 번 몸을 잠그니 그의 살이 어린 아이의 살 같이 회복되어 깨끗하게 되었더라” ‘하나님의 사람의 말대로’ 즉 하나님의 말씀대로라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53절에 그는 아이가 회복되는 시점을 확인하고 그것이 예수께서 ‘살아 있다 말씀하신 그 때’라고 확인합니다. 이것은 믿음은 확인되는 특징을 갖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으로 우리는 대부분 믿음을 주관적, 개인적인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다보니 ‘믿는다’, ‘믿음이 있다’라는 것이 이성적이지 않는 것이라고 오해합니다. 지금 우리는 요한복음을 통해서 이것이 ‘복음’이다라는 것을 말슴을 통해서 듣고 그렇다면 복음을 들은 사람들은 어떤가를 보고 있는데 마찬가지로 ‘보고’만 있다면 갈릴리 사람과 같은 것입니다.
보는 것이, 성경의 말씀을 듣고 아는 것이 믿음이 되려면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야 합니다. 그래서 지금 우리는 요한이 말하는 예수님을 만나고 있는 것입니다. 그 결과 53절 계속해서 ‘알고’ 아는 것이 어떻게 나타났습니까? ‘자기와 그 온집안이 다 믿으니라’ 앞서 사마리아에서 일어난 일입니다. 그리고 이방인인 왕의 신하의 집에서 일어난 일입니다.
듣는 것은 믿음을 향해야 합니다.
로마서 10:17 “17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그러려면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인해서 일어나야 합니다.
가서 즉 아이가 있는 곳에 가서 ‘내 생각에’ 아이도 좀 살펴보고, 어쩌면 손도 만져보고 그렇게 고치는 것 아닌가 하는 자연스러운 생각이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보인 반응은 ‘믿음’을 갖고 ‘살아난 아이’를 만나러 가는 순간을 열어 보시기 바랍니다. 미래를 아시는 분은 예수님 밖에 없습니다. 즉 하나님이신 예수님의 능력 ‘말씀대로 되는’, 아버지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실 때 ‘말씀하셔서’ 그 말씀대로 ‘되는’ 것은 아들이신 예수님도 동일하십니다. 그 예수님을 저와 여러분이 만나고 있습니다. 우리가 하는 말에 ‘마음만 먹으면’ 이렇게 붙여서 온갖 일들이 마음만 먹으면 될 것 처럼 이야기합니다. 하지만 앞으로 여러분에게 일어나는 작은 일 하나 조차도 내 능력 밖에 일이오니 주님께 간구하시길 바랍니다. 주님 운동을 마음 먹었는데 안됩니다. 도와주세요. 주님 연습을 하는 데 잘 안됩니다. 도와주세요, 주님 잘 치우려고 하는데 안됩니다. 도와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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