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 그리고 독생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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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그리고 독생자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요한복음 3장16절)
저는 오늘 이 새벽에 세상이라는 용어와, 독생자라는 용어를 통하여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메시지를 듣고자 합니다.

첫째로, 세상에 대해서 말씀해 드리겠습니다.

세상이란 원어는 헬라어 ‘코스모스’입니다. 이 뜻은 우주, 질서, 세상, 인류,등의 여러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라고 말씀하실 때, 그렇다고 하나님께서 우주를 사랑하셔서 그의 아들을 보내셨을까요? 무언가 맞지 않지요? 그렇다면 이 세상 질서을 사랑하셔서 자신의 하나 밖에 없는 아들을 이 세상에 보내셨을까요? 이것도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인류 즉 세상의 모든 사람들을 사랑하사 그의 아들을 보내셨을까요? 이 문장은 어떻습니까? 적절하고 어울리지 않습니까?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모양과 형상으로 창조한 인간을 사랑하셔서 자신의 아들을 이 땅에 보내신 것입니다. 요한복음에서 말씀하고 있는 세상이란 단어는 전 인류를 뜻하는 단어인 것입니다.
인간은 땅에서 왔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니라”(창세기 2:7) 흙은 땅의 표면을 덮고 있는 먼지와 같습니다. 즉 먼지, 땅, 세계는 같은 성분이고 이를 크게 아우르는 표현이 바로 세상인 것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셨다는 표현은 바로 이 세상에 속한 인간을 사랑하셨다는 표현인 것입니다.
땅에는 태양빛이 비치고, 적절한 빗물이 내려줘야 생명을 낳는 옥토가 생성됩니다. 이 태양빛과 적절한 빗물은 누가 내려줍니까? 그렇습니다. 바로 하나님 이십니다. 땅도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야 옥토가 될 수 있습니다. 흙에서 인간이 왔기 때문에 땅을 대표하는 인간도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야 영육간의 건강한 인간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이 하나님의 사랑 받는 것을 거부한 일이 생기고 말았습니다.
그것이 바로 애덴동산 안에서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고 동산 중앙에 있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범한 것입니다. 그로인해 땅,흙(세상)은 저주를 받습니다.
창세기 3장 17~18절 말씀에 “아담에게 이르시되 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네게 먹지 말라 한 나무의 열매를 먹었은즉 땅은 너로 말미암아 저주를 받고 너는 네 평생에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 네가 먹을 것은 밭의 채소인즉 네가 흙으로 돌아갈 때까지 얼굴에 땀을 흘려야 먹을 것을 먹으리니 네가 그것에서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시니라”
타락한 인간은 땅에서 왔기 때문에 땅도 함께 저주를 받았던 것입니다. 이 저주받은 땅, 흙,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하나님께서는 아들 예수님을 보내신 것입니다. 이는 땅을 정복하고 관리하는 만물의 영장인 인간이 회복 되어야 순차적으로 이 땅에서 사는 모든 피조물들이 회복되고, 종국적으로 이 세상이 새롭게 되기 때문입니다.
“보라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나니 이전 것은 기억되거나 마음에 생각나지 아니할 것이라”(이사야 65:17) “[1] 또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 [2] 또 내가 보매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니 그 준비한 것이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더라”(요한계시록 21:1~2)
하나님께서는 타락한 인간을 구원하시어 땅과 세상을 새롭게 하시고자 하는 것입니다.
세상이 타락했기 때문에 성경은 세상에 대해서 말할 때 먼저는 긍정이 아닌 부정으로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요한일서 2장 15~16절입니다.
“[15]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안에 있지 아니하니 [16]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부터 온 것이라”라고 말씀합니다. 성경은 타락한 세상을 아름답다고 말하기 보다 사랑하지 말아야 하는 부정적인 대상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우리도 우리의 타락한 본성에 대해서 알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세상(흙)에서 왔고, 그 세상(흙)은 타락한 세상이기 때문입니다. 소크라테스는 “너 자신을 알라!”라고 말했습니다. 소그라테스는 자신이 다른 철학자들보다 나은 점이 있다면 그것은 ‘자신이 아무것도 모른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자신을 아는 자는 현명한 자이고, 강한자이고, 가능성이 무궁무진한 자인 것입니다.
성경은 인간의 타락에 대해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로마서 3장 10~12절 말씀입니다.
“[10] 기록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11]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12] 다 치우쳐 함께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로마서 3장 10~12) 바울은 “다 치우쳐 함께 무익”하게 된 존재가 인간이라고 말합니다.
그 무익한 인간의 결과를 바울은 로마서 3장 23절 에 이와 같이 말씀합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로마서 3장 23절)라고 말씀합니다. 세상 곧 인류는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게 됐고, 그로인해 결국은 영적, 육적인 사망 모두에 쳐하게 된 것입니다.
로마서 오장 십이절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들어왔나니 이와 같이”(로마서 5장 12절)라고 말씀합니다.
이 죄인을 위해 하나님께서 바로 독생자를 우리에게 보내주셨던 것입니다.

둘째로, 독생자에 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독생자는 헬라어 원어로 ‘모노게네스’입니다. 이 단어는 ‘유일하게 태어난, 단 하나의’란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단 하나 밖에 없는, 유일한 아들이라는 표현인 것입니다. 세상에 단 하나밖에 없는 것들은 그 가치가 엄청납니다. 금이나, 은 특별히 아주 특이한 보석들은 그 가치가 대단합니다. 실제 보석들은 하나의 물질, 광물에 불과한 것인데 그것이 변하지 않는다는 것 때문에, 그것이 희소하다는 것 때문에 세상은 보석에 대해 많은 가치를 부여합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그 보석들을 아주 비싼 가격에 사고 있는 것입니다.
독생자는 하나님에게 하나 밖에 없는 유일한 아들이기 때문에 아주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인간의 독생자도 그 가치가 있습니다. 하물며 하나님의 아들, 신의 하나 밖에 없는 아들은 그 가치가 더 대단한 것입니다.
마태복음 13:44 보시면 “천국은 마치 밭에 감추인 보화와 같으니 사람이 이를 발견한 후 숨겨 두고 기뻐하여 돌아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밭을 사느니라”고 말씀합니다. 왜 그 보물을 발견한 사람이 자신의 소유를 전부 팔아 그 밭을 샀을까요? 그렇습니다. 그 보물의 가치가 대단했기 때문입니다.
실제 고대 근동 지방에서는 귀중한 물건땅에 묻어두곤 했습니다. 그런데 보물 주인이 전쟁, 질병, 사고 등으로 죽게 되었을 때 미처 집 사람들에게 보물에 대해 말하지 않고 죽어, 아무도 모르게 오랜 시간 보물이 땅에 매장되어 있는 경우가 있었습니다.
어느 날 한 사람이 걸어가는 데 땅에 돌출된 무언가에 발이 걸려 넘어졌습니다. 그는 화가 나서 “누가 길에 이런 것을 가져다 놓았어!”라며 소리를 질렀습니다. 그 사람은 그저 화가 나서 땅 위로 조금 돌출돼 있는 부분을 발로 비비고, 찼습니다. 그러자 지면 위로 돌출된 부분에 묻어 있는 흙들이 떨어져나갔습니다. 그 때 그 사람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분명 돌이 아닌 보석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자 그 사람은 빨리 그 돌출된 부분을 흙으로 다시 묻어 습니다. 그리고 차분히 생각합니다. 그 땅에서 나온 보석을 자신이 소유하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말입니다. 그 당시 땅에서 보물이 나오면 이를 발견한 사람이 50%, 땅 주인 50%의 소유권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땅 주인 몰래 보물을 훔쳐갔다 발각이 되었을 때에는 모든 소유권이 주인에게 넘어가게 돼있었습니다. 그래서 이 사람은 땅 주인을 찾아가 땅 값을 잘해 주겠으니 땅을 팔라고 설득했습니다. 왜냐하면 보물보다 값이 싼 땅을 사게 되면 땅 보다 비싼 보물 전부를 자신이 가질 수 있게 되기 때문이었습니다. 이를 잘 알지 못하고 있는 땅 주인은 절절한 금액에 땅을 사겠다는 임자가 나왔기 때문에 그 비싼 보물이 땅에 묻혀 있다는 사실도 알지 못하고 땅을 팔게 됩니다.
우리에게 있어 밭에 감추인 보화가 무엇입니까? 그것이 바로 오늘 성경 말씀에서 말씀하고 있는 독생자인 것입니다. 단 하나밖에 없는 하나님의 아들인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가치 면에서 그 어떤 존재와도 비교가 될 수 없는 존재인 것입니다.
독생자의 가치를 조금 더 들여다 보기를 원합니다.

첫째로, 독생자이신 예수님은 인류의 어떤 사람도 치를 수 없는 죄의 값을 치르신 유일한 분이십니다.

인간이 지은 죄의 값은 사망이었습니다. 그 어떤 것으로도 값을 치를 수 없기에 모든 인류는 이 죄의 값을 치르기 위해 도덕적으로 잘 살아 보기도 했고, 자기 수양을 통해 그 값을 치러보려고도 했고, 다양한 종교를 통해 그 값을 치러보려고 했고, 과학과 문명의 발전을 통해서 그 값을 치러보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그 어떤 성인군자도, 뛰어난 수양가도, 그 어떤 종교의 창시자와 과학자도 그 죄의 값을 치르지 못하고 도리어 사망에 이르렀습니다. 세계 1~2차 대전이 일어났을 때 세상 종교와 철학 그리고 과학 모두에 사람들은 염증을 느끼게 됐습니다. 이 세상에는 그 어떤 곳에도 희망이 없다는 사실을 몸소 깨닫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 허무와 무의미, 종국에 죽음을 가져다 주는 사망의 값을 치르신 유일한 분이 계십니다. 그 분이 바로 독생자 예수님이십니다. 그는 성인군자로 이 땅에 오신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어떤 수양가나 종교가로 이 땅에 오신 것도 아닙니다. 그리고 경제 부흥과 과학 발전을 위해 이 세상에 오신 분도 아니십니다. 그는 이 세상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의 독생자, 하나 밖에 없는 아들이셨던 것입니다.
마태복음 1:21“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라는 이름의 뜻이 바로 “자기 백성을 죄에서 구원할 자”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세상에 속한 그 무엇도 인간을 죄에서 구원할 수 없는데 유일하게 독생자이신 예수님께서 인간의 죄의 값을 치르실 수 있는 자격을 가지고 있다는 것 자체가 예수님의 가치가 참으로 대단하다는 사실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밭에 감추인 보화를 알아볼 수 있는 사람에게만 그 밭은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이라는 가치를 알아볼 수 있는 사람들에게만 그 예수님은 가치 있게 다가오는 것입니다.
한국 설화에 있는 이야기입니다.
한 평화로운 고을에 무시무시한 호랑이가 나타나 농작물을 파헤치고 가축들을 잡아먹고 심지어 사람까지 헤치었습니다. 그래서 평화로운 마음은 곧 공포가 가득한 마을이 되었습니다. 그러자 마을 사람들 가운데 호랑이를 잡아 보겠다고 호랑이 굴로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호랑이 굴로 들어갔지만 살아서 나온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러자 마을 사람들 사이에 이상한 소문이 돌기 시작했습니다. 그것은 그 마을을 공격하고 있는 호랑이는 진짜 호랑이가 아니라 귀신이라는 것 이었습니다. 그러자 한 용한 무당은 예쁜 아가씨를 그 호랑이 귀신에게 바치면 더 이상 마을 주민을 공격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하였습니다. 그래서 실제 사람을 잡아 호랑이 굴 앞에 묶어 제물로 받쳤습니다. 그러자 실제로 호랑이가 마을을 공격하지 않았습니다. 그리하여 매년 그 마을에서는 제비를 뽑아 호랑이에게 바칠 여인을 선택했습니다. 그해도 다름없이 한 여인을 뽑기 위해 제비를 뽑았습니다. 그런데 홀아비를 극진하게 모시는 한 여인이 제물로 뽑히게 되었습니다. 마을 사람 모두는 가슴이 아팠지만 자신의 딸이 제비 뽑히지 않았기에 감사할 따름이었습니다. 그 여인의 아버지는 눈물을 흘리며 “이 딸 만큼은 안 된다고 하며, 차라리 자신을 제물로 바치라며” 동네 사람들에게 눈물로 호소했습니다.
이 슬픈 소식을 들은 옆 동네 한 총각이 자신이 호랑이를 잡아 오겠다며 긴 칼 하나 들고 호랑이가 사는 동굴을 점심 때 쯤 찾아 떠났습니다. 동네 사람들은 하나 같이 이 청년의 행동에 대해서 회의적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이미도 동네 건실한 청년 여러 명이 함께 호랑이를 잡으러 동굴로 들어갔었지만 살아 나온 사람들이 하나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청년은 체구도 작은데다가 홀로 호랑이 동굴로 들어갔으니 살아나올 가능성이 없다고 동네 사람들은 이야기 했습니다. 그래도 동네 사람들은 다 같이 나와 그 청년의 용기에 감탄하여 혹시나 하는 희망을 가지고 그 청년을 기다렸습니다. 어느덧 해가 뉘엿뉘엿 져가고 있었습니다. 동네 사람들은 하나 같이 “거봐라 아까운 청년 하나 또 잃었다”고 말하며...한 사람 한 사람 집으로 돌아가기 시작했습니다. 그 때 호랑이 울음 소리가 산 전체를 울렸습니다. “어흥,,,,”그리고 잠 시 있다 호랑이 굴로 들어갔던 청년이 산발이 된 머리로, 옷은 찢기어, 팔과 목 등에 여러 상처가 있는 가운데, 호랑이의 목을 잘라 들고 나오는 게 아니겠습니까? 그는 분명 피곤해 보였지만 그의 얼굴에는 미소가 가득했습니다. 이를 본 동네 사람들은 하나 같이 만세를 부르며 그 청년에게 다가 갔습니다. 그리고 그 청년을 위해 진수성찬을 마련해 주었습니다. 이 설화는 실제 이야기는 아닙니다. 말 그대로 설화입니다. 하지만 전 이 설화를 접할 때 마다 우리 예수님의 모습이 떠오릅니다.
공자나 맹자나 세상의 여러 성인들이 이 죽음의 동굴로 들어갈 때에 자신들이 이룬 학문적 성취와 사상적 성취를 가지고 이 죽음의 동굴로 들어갔습니다. 하지만 그 어느 누구도 살아 나온 사람이 없었습니다. 세계 유명한 수양가들 또한 무릎으로 기고, 어떤 사람들은 거꾸로 물구나무서고, 또 어떤 사람들은 잠도 자지 않고, 금식하며 그 죽음의 동굴로 들어갔지만 그 어떤 사람들도 그 죽음의 동굴에서 나오지 못하였습니다. 그리고 세계 3대 종교 중 2대의 창시자 석가모니와 3대의 창시자 마호메트도 그 죽음의 동굴로 들어갔지만 역시나 돌아오지 못했습니다. 문명과 과학 발전에 일조했던 에디슨도 그 죽음의 동굴에 들어갔다가 살아 나오지 못했습니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그 어떤 사람, 사상, 문명, 과학등도 그 죽음의 동굴에 들어갔다가 살아 나온 것들이 없었습니다. 사상과 문명도 시간이 지나면 바뀌게 되었고, 과학이나 의학도 그 한계가 있다는 점을 분명히 인식하게 되었습니다.
이 땅에 유한한 존재나 것들이 할 수 없는 죄의 문제를 해결하신 분이 계십니다. 그 분이 바로 독생자이신 우리 예수님이십니다. 그 분은 죄의 문제를 해결하실 수 있는 유일무일한 분임을 죽음을 이기신 부활 사건으로 증명하셨습니다. 세상에는 잠시 죽었다가 살아난 사람들은 있지만 다시 살아나 영원히 죽지 않은 사람은 없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사 망권세 다 이기시고 죽은 자 가운데서 3일 만에 부활하시어 그 어떤 사람도 치를 수 없었던 죽음의 값을 자신의 죽음으로 치르시고 다시 부활하사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의 구주가 되셨습니다. 그리고 그분은 지금도 살아계셔서 하나님 보좌 우편에 계십니다.
죽음을 이기시고 세상을 구원하신 분은 예수님 밖에 없으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경은 이를 이와 같이 주장합니다.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하였더라”(행4:12)

둘째로, 예수님은 하나님께 온전한 순종을 보이신 유일한 분이십니다.

부분적인 순종은 많은 사람들이 하나 결국은 불순종으로 죄를 짓습니다. 이것이 인간의 한계인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인간의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셔서 한 차례도 하나님께 불순종하지 않으시고 온전한 순종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셨던 유일한 분이십니다.
“한 사람이 순종하지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 된 것 같이 한 사람이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로마서 5장 19절)
순종은 하나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초대왕 사울은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던 불순종의 사람이었습니다.
사무엘상 15장 1절 말씀에 “사무엘이 사울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나를 보내어 왕에게 기름을 부어 그의 백성 이스라엘 위에 왕으로 삼으셨은즉 이제 왕은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소서”라고 말씀했습니다. 사울이 뛰어나서 왕이 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를 왕으로 세우셨기 때문에 사울이 왕이 되었다고 말씀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무엘 선지자는 사울에게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는 순종을 할 것을 당부합니다.
하나님께서 사울에게 하셨던 명령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아멜렉을 집멸하고 전리품을 남기지 말라는 말씀이셨습니다. “지금 가서 아말렉을 쳐서 그들의 모든 소유를 남기지 말고 진멸하되 남녀와 소아와 젖 먹는 아이와 우양과 낙타와 나귀를 죽이라 하셨나이다 하니”(사무엘상 15:3)라는 말씀이셨습니다.
하지만 사울왕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보다 자기 생각에 옳은 대로 행동하였습니다. 즉 자기 방식대로의 순종은 하였지만 하나님 뜻대로 하는 순종은 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삼상 15:9“사울과 백성이 아각과 그의 양과 소의 가장 좋은 것 또는 기름진 것과 어린 양과 모든 좋은 것을 남기고 진멸하기를 즐겨 아니하고 가치 없고 하찮은 것은 진멸하니라” 분명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을 진멸하라고 말씀하셨는데 사울은 진멸하기를 즐겨 아니하고 가치 없고 하찮은 것만 진멸하였습니다.
이에 대해 사물엘 선지자는 이와 같이 말씀합니다.
“사무엘이 이르되 여호와께서 번제와 다른 제사를 그의 목소리를 청종하는 것을 좋아하심 같이 좋아하시겠나이까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숫양의 기름보다 나으니”(사무엘상 15:22)
아담과 하와도 하나님께 부분적으로는 순종했습니다. 그러다 마귀의 꼬임에 넘어가 결국은 하나님이 절대로 범하지 말라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범했던 것입니다. 그로인해 인류에 죄가 들어오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끝까지 하나님께 순종하심으로 인류를 구원할 길을 여신 것 입니다. 예수님의 최고의 순종은 십자가에 매달리시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이 “나의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되기를 원합니다.”라고 땀방울이 핏방울이 되도록 기도하시면서 하나님 아버지께 온전한 순종을 보이신 유일한 분이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순종으로 흘린 피가 우리 죄를 씻기는 능력의 피로 변화되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믿는 자에게 그 피는 역사하여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죄를 깨끗하게 씻어 주시는 것입니다.
그 리고 예수님이 죽기까지 순종하심으로 성령님께서 이 땅에 오시게 된 것입니다. 성령께서 오셔서 우리의 부패한 내면을 밝고 맑고 환하게 변화시켜 놓으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중생인 것입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예수그리스도 안에서 새 사람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새 인류로 창조 받은 것입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후 5:17)
이 세상에 예수님이 오셔서 그의 유일하신 능력으로 우리의 죄를 씻어 주시고, 성령으로 새롭게 태어나게 하셨습니다. 이 분이 독생자 예수그리스도이신 것입니다.
저는 오늘 여러분들에게 세상 그리고 독생자에 대해 설명해 드렸습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단어이지만 그 단어에 이와 같이 깊이 있는 하나님의 마음과 뜻이 담겨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고 세상에서 독생자 예수님을 통해 구원 받은 그 은혜를 가지고 오늘 하루도 하나님께 감사하시고 그 하나님의 은혜를 또 다른 세상 누군가에게 전할 수 있는 하루가 되시길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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