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심을 준비케 하시는 말씀② : 나는 기독교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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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나는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낸 네 하나님 여호와니라 (출20:2)

1.서론

우리는 저번 주에 율법이 주는 유익에 대하여 살펴보았습니다. 기억하실지 모르겠지만 저번 시간에 저와 여러분들이 함께 살펴본 내용은 최근 우리 대한예수교장로회 합동측 안에서 가장 논란이 되고 있는 ‘회심 준비 교리’에 대한 내용이었습니다.
저번 시간에 함께 나눈 이야기를 간략하게 설명하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우선 하나님의 율법은 하나님에게 나온 것이기에 선합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는 이 율법을 완성하심으로 우리를 구원에 이르도록 하셨습니다. 이후 신자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도록 하셨습니다. 그것이 성화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율법을 멀리하는 것이 아니라 이 율법을 가까이 함으로 우리가 얼만 큰 죄인인지 깨달아 알도록 하십니다. 더 나아가 주님의 구원이 얼마나 값진 것인지 알게 하십니다. 이를 통해 하나님은 이후에 맏아들 되시는 예수 그리스돌르 본받아 살도록 하시니 그것이 바로 성화의 삶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여전히 율법은 우리로 하여금 먼저는 죄를 깨닫게 하십니다. 그리고 주님의 구원을 사모하며, 그의 사랑과 은혜 안에 거함이 얼마나 큰 축복임을 알게 하십니다. 그리고 그의 사랑 안에서 우리는 그를 닮고자 노력하도록 인도하십니다. 이것이 참회심에 이르도록 인도하시는 방법인이 이것이 바로 ‘회심 준비교리라 말했습니다. 오늘은 본격적으로 십계명에 들어가기 전에 십계명에 등장하는 서언에 대하여 살펴보고자 합니다.

1.1 해석상의 문제

‘서언’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누어 설명이 가능합니다. 그런데 사실 한글 성경으로 살펴보면 그 부분이 명확하지 않은데 그래서 원문의 순서를 따르자면 다음과 같이 설명이 가능합니다.
1) 전반부 : “나는 여호와 너의 하나님이라”
2) 후반부 : “너는 애굽 땅에서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낸”
그런데 사실 전반부 역시도 어떻게 해석하냐에 따라 조금은 그러나 지금 이 자리가 신학교 수업 시간이 아니기 때문에 자세한 원문의 내용은 배제하고 제가 원문을 직역한다면 다음과 같이 직역이 가능합니다.
‘나는 여호와, 너의 하나님이라’

2. (본론) ‘서언’에 드러난 세 가지

그런데 아마도 이 자리에서 이런 생각을 가지고 계신 분들이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전도사님 본문에서는 “네 하나님 여호와니라”라고 되어 있는데 이게 무슨 차이가 있습니까? 제가 보기에는 이거나 저거나 별 차이가 없어 보이는데요!” 예 그렇게 느낄 수 있습니다.
여기서 여러분에게 질문을 하나 하도록 하겠습니다. 여러분 혹시 성경을 읽으면서 분명 ‘여호와’도 하나님의 이름이시고 ‘하나님’도 이름이신데 성경은 왜 ‘여호와’와 ‘하나님’을 구분해서 기록하고 있을까요? 여러분들은 이러한 성경의 기록에 대해 질문을 하십니까?
사실 오늘 서언을 정확히 이해하면 십계명이 정확히 어떤 의미를 가진 율법 법조문인지 이해할 수 있게 됩니다. 오늘 서언에서는 분명하게 세 가지 점들을 설명합니다.
1) 하나님은 누구시며
2)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관계는 무엇이며
3) 이스라엘은 왜 십계명을 지켜야 하는지를 밝혀 줍니다.
즉, 오늘의 제가 원문을 직역한 방식에 따르면 다음과 같이 해석이 가능합니다.
1) ‘나는 여호와니라’라는 것은 하나님을 소개하는 것으로 십계명을 수여하시는 분이 누구인지 보여줍니다.
2) ‘너의 하나님’은 십계명을 수여하는 분은 이스라엘 백성과 무슨 관계가 있는지를 보여주십니다.
3) ‘애국 땅 종 되었던 집에서 너를 이돈하여 낸’은 이스라엘은 십계명을 왜 지켜야 하는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서문은 십계명을 수여하시는 분이 누구시면, 그분이 수여 받는 이스라엘과 무슨 관계이며, 그러기에 이스라엘 백성이 십계명을 왜 지켜야 하는지를 분명하게 보여준다는 사실입니다.
그러기에 서문은 바로 이 십계명을 이해하는 것을 넘어서 하나님과 그의 백성인 이스라엘의 관계가 무엇인지 분명하게 보여준다는 점에서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에게도 하나님과 나의 관계가 무엇이며, 그러기에 우리는 하나님이 주신 이 십계명을 어떻게 순종하며 살아가야 하는지 인식할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2.1 자기 소개 공식

그렇다면 먼저 ‘나는 여호와니라’라는 말씀을 먼저 살펴보고자 합니다.
사실 오늘 ‘나는 여호와니라’라는 이 말씀은 우리 주님께서 자신이 누구신지를 설명하는 부분에서 사용되는 말입니다. 그래서 신학적으로는 ‘자기 소개 공식’이라고 말합니다.
혹시 여기 계신 분들 중에서 나는 이름이 없다 하시는 분들이 있으십니까?
우리는 모두 이름이 있습니다. 그리고 이 이름이 무엇을 의미합니까?
바로 우리의 정체성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제 이름으로 설명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2.1.1 예시 (윤주현)

저는 윤주현입니다. 저는 칠원 윤씨에 속해 있습니다. 윤씨를 가진 사람들이 보통 파평 윤씨에 속해 있는데 저는 아주 독특한 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여튼 그리고 제 이름은 제 아버지가 지어주신 이름으로 ‘두루 주’에 ‘어질 현’을 쓰고 있습니다. 그래서 제 이름의 뜻은 “마음이 너그럽고 착하며 슬기롭고 높은 덕이 빠짐 없이 골고루 있으라는 뜻”입니다.
그러니 저는 윤주현 전도사이기 전에 저는 그저 한 사람으로서의 윤주현입니다. 칠원 윤씨의 사람으로 부모님이 너그럽고 착한 사람이 되라는 뜻에서 주현이라는 이름을 부여하신 설교가 무지 길고, 잔소리가 많고, 아주 평범한 대한민국 아저씨입니다.
그런데 저는 제 이름이 정말 좋습니다. 어렸을 때에는 ‘어질 현’이 마구 어질고 다니라는 뜻인줄 알고 정말 싫어했는데 지금은 정말 좋아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살아가기 위해 노력합니다.
교역자들 안에서도 제 설교가 길어서 뭐라고 합니다. 물론 저도 압니다. 제 설교가 다른 분들보다 아주, 아주 조금 더 길다는 사실은 그런데 제 설교가 긴 이유가 있습니다.
한 설교자가 한 본문을 선택해서 그 말씀을 묵상하는데 그 본문에는 정말 많은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물론 그 본문의 말씀을 쉽게 설명하면 좋겠지만 저는 그런 능력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저는 이 한 본문을 설교하기 위해서 하나님과 씨름합니다.
무식한 제가 하나님의 뜻을 알지 못해서 묻고 또 묻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제 인생 가운데 그 말씀이 무엇인지 삶을 통해 경험하도록 하십니다. 그러기에 제가 해석하기까지 하나님과 제 안에 스토리가 있습니다. 그냥 단순히 계산기에 버튼 몇 개 눌러 결과가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기에 저는 이따금 지체들에게 이런 말은 합니다. “설교가 길다고 다 은혜롭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짧은 설교에 하나님의 깊은 뜻을 담아낼 수 있다는 것은 저한테 있어서 난센스입니다.” 이런 생각이 있기에 제 설교는 깁니다.
그리고 잔소리가 많습니다. 왜냐하면 물론 지금도 여러분들에게 좋은 말로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잔소리를 많이 하는 이유는 분명합니다. 사람을 위로하는 말은 그 순간에는 좋습니다.
그런데 제가 부모가 되고 알게 된 사실이 있습니다. 청소년 시기에는 그렇게 부모님의 잔소리가 싫었는데 부모가 되어보니 부모님의 그 잔소리가 얼마나 나를 사랑하기에 할 수 있는 말이었는지 생각나면서 예전에 하신 잔소리가 부모님의 사랑으로 들리고, 그 잔소리에 부합하는 사람이 되어야겠다고 생각합니다.
성경 말씀 역시 이와 같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때로는 우리에게 잔소리와 같이 들릴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어느 순간 이 모든 것이 우리 주님이 지독히도 나를 사랑하시기에 하신 말씀이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때 주님의 사랑을 경험합니다.
물론 위로의 말을 무시하는 것 아닙니다. 우리 주님도 때로는 자신의 백성들을 위로하십니다. 그러나 더 깊은 사랑은 자신의 자녀들이 바른길로 향하여 부모에게로 향하길 바라는 잔소리에 더 큰 사랑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저는 설교가 길고, 잔소리가 많습니다. 이것이 제가 성경을 읽고, 만난 하나님의 모습입니다. 그리고 제 육신의 부모님이 지어주신 이름을 따라서 제 양심에 따라 여러분들에게 슬기롭고 착하고자 사람에 입맛에 따라 설교를 줄이거나 듣기에만 좋은 말들을 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제 이름이 갖는 정체성이 아니며, 윤주현이라는 사람의 성품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여호와’라는 이름은 우리 주님의 정체성과 성품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2.1.2 ‘나 여호와’

그럼 우리 하나님의 정체성과 성품과 핵심 가치는 무엇일가요?
출애굽기 6장 2절로 8절을 한번 살펴봤으면 좋겠습니다.
“하나님이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나는 여호와이니라 내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전능의 하나님으로 나타났으나 나의 이름을 여호와로는 그들에게 알리지 아니하였고 가나안 땅 곧 그들이 거류하는 땅을 그들에게 주기로 그들과 언약하였더니 이제 애굽 사람이 종으로 삼은 이스라엘 자손의 신음 소리를 내가 듣고 나의 언약을 기억하노라”(출6:2-5)
“그러므로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하기를 나는 여호와라 내가 애굽 사람의 무거운 짐 밑에서 너희를 빼내며 그들의 노역에서 너희를 건지며 편 팔과 여러 큰 심판들로써 너희를 속량하여
너희를 내 백성으로 삼고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리니 나는 애굽 사람의 무거운 짐 밑에서 너희를 빼낸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인 줄 너희가 알지라”(출6:6-7)
“내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주기로 맹세한 땅으로 너희를 인도하고 그 땅을 너희에게 주어 기업을 삼게 하리라 나는 여호와라 하셨다 하라”(출6:8)
우선 하나님의 속성은 무엇입니까? 2절로 5절에서 보여지듯 “전능하신 하나님”입니다.
다음으로 하나님은 어떤 일을 하십니까? 6절로 7절에서 보듯 속량 즉, “구원하시는 하나님”입니다.
그럼 이후에 이스라엘 백성에게 무엇을 하실겁니까? “그들에게 땅을 주시는 하나님”입니다.
결국 이것이 의미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바로 “나 여호와”라는 말은 “나는 구원자다”라는 선포입니다.
다시 말하면 “나 여호와”라는 말은 전능하신 분으로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 땅에서 속량하여 약속의 땅으로 인도해 그들을 자신의 백성으로 삼으실 것이라는 자기 정체성과 성품과 핵심 가치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2.2 자기 헌신 어구

다음으로 살펴볼 본문은 “너의 하나님”이라는 말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관계’를 보여주는 것이며, 신학적으로는 ‘자기 헌신 어구’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나는 너의 하나님’이라고 하시는 이 말씀이 사실 하나님 편에서는 엄청난 ‘자기 헌신’을 의미하고 있음을 알고 계십니까?
여호와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되신 것은 이스라엘을 애국에서 구원하셨기 때문입니다. “나는 여호와”는 자기 소개 공식에 “너의 하나님”이라는 “자기 헌신 어구”가 첨가됨으로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관계가 분명해진 것입니다.
즉,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심으로 이스라엘 백성의 주인이 된 것입니다. 이제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구원해 내신 여호와이시기에, 이스라엘의 ‘주인’이 되시며,
결국 이스라엘은 여호와의 소유, 즉 여호와의 백성이 된 것입니다. 그러기에 사실상 ‘구원자’와 ‘주인’이라는 두 개념은 분리할 수 없습니다.

2.3 이스라엘 백성이 십계명을 지켜야 하는 이유

이처럼 이스라엘은 잊지 말고 항상 해방자요 주이신 여호와께서 자신의 뜻을 계시하신 십계명의 말씀에 따라 순종해야 합니다. 그리고 이점을 분명히 기억하기 위해 하나님의 약속의 땅과 애굽 에서의 종된 삶을 계속해서 연결해 설명하십니다.
이처럼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출애굽의 사건을 강조해서 말씀하시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극섯은 약속의 땅에서 풍요함을 즐기며, 노예 생횔에서 자유로워 질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분명히 보여주고자 하시는 뜻이 있기 때문입니다.

2.4 오직 주님 안에서만 자유가 있다.

가나안 땅의 풍요를 경험하게 되면 자칫 여호와를 잊어버리고 다른 신을 섬길 가능성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여호와께서는 ‘너희는 애굽에서 노예였다.’는 사실을 잊지 말라고 누누이 당부하십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이미 역사를 알고 있듯 이스라엘 백성은 약속의 땅인 가나안 땅에서 하나님의 명령에 따르지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이것이 무엇을 의미합니까?
이스라엘이 여호와의 명령을 지킬 수 있었던 힘은 어디에서 나오는 것입니까?
그것은 바로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처럼 자신이 하나님을 벗어나면 종이 된다는 사실을 기억하는 것이었습니다.
여러분들 그 사실을 아십니까? 진정한 자유는 오직 여호와 하나님 안에서만 가능합니다. 여호와 하나님을 벗어나면 자유는 사라집니다. 또다시 종의 상태에 놓인다는 말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명령을 어김으로 바벨론의 포로가 되었으며, 이후에 로마에 멸망을 당해 2000년이 넘는 시간을 유랑민으로 살 수밖에는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모습이 과연 당시에 이스라엘 백성에게만 해당하는 것일까요?
여러분들은 진정한 자유를 누리십니까?
우리는 하나님 안에 거하지 않으면 여전히 종이 된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다음 시간에 더 자시히 살펴보겠지만 제1계명인 “나 이외에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럼에도 이 시대에 많은 사람들은 돈을 하나님과 겸하여 섬기는 모습들을 발견합니다. 그런데 예전에 한 미국에 한인 교회 담임 목사님 이런 말을 하시는 것을 들었습니다.
“미국에서 한인들은 정말 열심히 일합니다. 그들은 그 사회에서 약자입니다. 동양인은 미국에서 흑인보다도 못한 취급을 받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들의 자녀들에게 그런 삶을 물려주지 않기 위해 지독히도 일합니다. 그래서 자녀들을 교육하고, 그들이 어느 정도의 경제적 규모가 되면 자신들을 무시하지 못하고, 자신들의 가족을 막 대하지 못하리라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목숨을 걸어 일합니다. 그래서 실제로 착실한 한인들은 일정 기간이 되면 나름 부를 축적합니다. 집에 수영장도 있고, 좋은 가구와 좋은 TV도 구매합니다. 그리고 좋은 차량도 구매합니다. 그런데 그거 아십니까? 이 좋은 수영장과 좋은 가구와 TV를 주로 누가 사용하는지! 주인이 아닙니다. 바로 그 집에서 가사를 도와주는 도우미들이 사용합니다. 오히려 주인들은 돈을 여전히 벌기 위해 집에 있는 시간이 부족합니다. 그래서인지 한인들 중에는 건강이 좋지 못하신 분들이 많습니다. 이처럼 한인들의 삶을 순탄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아십니까? 돈을 버는 목적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우리의 삶에 돈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세상을 살아가며 돈은 우리에게 유익합니다. 그러나 이 물질이 우상이되고 그것을 섬기는 순간에 모든 것이 바뀝니다. 그 돈 때문에 모든 것을 포기합니다.
그러나 정작 돈을 통해 얻고자 한 것을 얻은 후에도 여전히 돈의 유혹에 헤어나지 못하고 여전히 돈을 섬깁니다. 이것이 우상숭배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떠나면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을 구속 밖에는 없습니다. 오직 주님 안에서만 자유가 주어집니다.
여러분들 진정한 자유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2.5 나는 그리스도인이다.

존 맥아더의 『슬리이브』라는 책에서는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가 통치하던 2세기에 기독교는 불법이엇습니다. 그래서 로마 제국 안에서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이유로 감옥에 투옥되거나 고문당해 죽음을 당하기까지 했습니다. 그러던 중 한 집사가 예수님을 믿는다는 이유로 체포되었습니다. 재판과정에서 다음과 같이 물었습니다. “너는 누구냐?” 그러자 그는 한마디로 답했습니다.
“나는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러자 재판관은 그를 압박하기 시작했습니다. 이후에 다시 물었습니다. 그러나 이번에도 대답은 같았습니다.
“나는 그리스도인입니다.”
다시 한번 재판관은 온간 수단을 동원했고 다시 물었으나 그의 답은
“나는 그리스도인입니다.”
당시 교회사를 기록한 유세비우스
“그는 자신의 이름도, 자신의 국적이나 자신이 살던 도시도, 자신이 자유인인지 노예인인지도 대답하지 않았습니다. 단지 모든 질문에 “로마어로 나는 그리스도인이다”라고 짧게 대답했습니다.”
결국 변절할 가능이 없자 원형경기장에서 공개 처형을 시켰습니다. 처형되는 날에도 뜨겁게 달궈진 쇠의자에 결박한 후에 그를 고문하였지만 결국 숨을 거두는 순간까지도 그의 답은
“나는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는 비엔나의 젊은 집사 상투스였습니다. 상투스는 그리스도인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한마디가 그의 모든 것을 규정하는 핵심 가치였습니다.

3. (결론) 세상이 우리에게 묻는 질문

세상은 기독교인들이라는 우리에게 ‘진짜’를 요구합니다. 상투스가 보여주듯 초대 교인들에게 ‘기독교인’이라는 이름은 “일반적인 종교적 칭호”가 아니었습니다.
‘기독교인’이라는 이름은 “어떤 대가를 지불하더라도 예수님을 기껒이 따르겠다”는 충성과 고백이었습니다. 이는 “예전의 삶의 방식을 버리고 하나님의 자녀로 태어났다”는 것을 의미하고 “어떻게 살고, 궁극적으로 어떻게 죽을 것이냐”를 결정하는 새로운 삶의 방식을 선포하는 것이었습니다.
초대 교회의 교부 이그나티우스는 사도 요한의 제자로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나는 단순히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리기를 원한 것이 아니라 실제로 그리스도인이 되기를 원했다. 그렇다. 내가 끝까지 신실하여 기독교인인 것이 증명된다면 나는 그 이름으로 불릴 수 있다. ..... 불이여, 십자가여, 야수와의 싸움이여, 뼈를 뒤트는 고통이여, 수족을 잘라내고 온 몸을 짓이기는 형벌이여, 마귀의 잔혹한 고문이여 오라! 다만 예수 그리스도를 얻게 하라.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해 하나님의 말씀과 계명에 순종해야 합니다.
죄인인 우리를 예수께서 해방시켜 자유롭게 하셨고, 이제 그 자유를 보존하고 누리기 위해서는 자발적으로 ‘그리스도의 노예’로 살아야 한다는 사실을 깊이 깨달아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기독교인입니다. 여호와의 품꾼으로 구세주요 주인이신 여호와의 말씀에 순종하며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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