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곱의 축복과 예언의 정확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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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언의 종말론적인 해석
예언의 종말론적인 해석
요셉은 무성한 가지 곧 샘 곁의 무성한 가지라 그 가지가 담을 넘었도다
야곱이 죽기전 마지막 유언으로 12아들을 축복합니다. 특히 요셉은 예언속에서 가지가 담을 넘을 정도로 번성한다는 축복의 유언을 듣습니다.
이것은 후에 실제로 실현이 되었습니다. 야곱의 열 두 아들은 르 시 레 유 갓 아 단 납 잇 스 요 베 이렇게 열두 아들입니다. 후에 레위지파는 제사장 역할을 담당하고 그 빈자리와 요셉지파 대신 요셉의 두 아들 에브라임과 므낫세 지파가 자리하게 됩니다.
야곱의 예언적 축복이 정확히 실현이 된셈입니다. 후에 이러한 12지파의 배열은 요셉이 포함된 경우와 요셉이 포함되지 않은 경우 두가지 전부 성경안에서 사용됩니다. 그러므로 성경에서 지파로 명명된 경우는 총 14개의 지파수가 됩니다. 요셉과 요셉의 두아들 에브라임과 므낫세 두지파가 모두 요셉계열인 셈입니다. 요셉은 무성한 가지 곧 샘 곁의 무성한 가지라 그 가지가 담을 넘었도다. 이 성경의 말씀이 응한 것입니다. 그리고 계시록에서 최종적으로 구원받는 열 두 지파는 단지파와 에브라임지파가 사라지고 요셉 지파와 므낫세 지파가 12지파 안에 속합니다. 사라진 단 지파와 에브라임지파의 개념은 서로 다른데, 단 지파는 하나님을 저주하므로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진 개념이고 에브라임은 요셉에 속한 장자로 구원을 입는 개념입니다.(계7:5-8)
아마도 교회말기에는 이단세력을 교회에 연합시키려한 WCC, NCCK에 속한 교회 등에서 배도하는자들 즉 삼위하나님과 그의 백성들을 조롱하는 자들이 나타나지 않을까 예상해 봅니다. 이들이 말세의 단 지파가 되는 셈입니다. 멸망의 아들이 제자중 하나 였듯이 아마도 말세의 적그리스도는 기독교인 출신 일 것으로 보입니다.
각설하고, 단지파가 버림이 된것은 하나님이 요셉의 인내를 보셨으므로 요셉을 강하게 사랑하시사 다른 지파의 사랑이 요셉에게 더욱 주어진 것이라고 이해해도 됩니다. 가장 하나님을 만홀히 여긴 단지파가 버림이 된것이죠. 이는 야곱의 예언속에서도 드러납니다. 17절에 보시면 “단은 길섶의 뱀이요 샛길의 독사로다 말굽을 물어서 그 탄자를 뒤로 떨어지게 하리로다” 라고 예언하였습니다. 뱀과 독사로 예언 되어있습니다. 단은 가룟유다의 예표이기도 합니다. 또한 단지파의 탐욕은 사사기 18장에 잘 나와 있습니다. 요한복은 12장 6절에 보면 가룟유다 또한 돈궤를 맡은자로서 그 돈을 훔치는 매우 탐욕스런자로 묘사되어 있습니다. 예수님보다 더 귀한분이 어디 있겠습니까. 성도들의 헌금을 함부로 전용하는것은 심각한 범죄라는걸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하나님을 바라보고 묵상하며 매일의 생활속에서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뜻이 무엇인지 살피고 바라고 견디며 행해야 합니다. 우리중 누구도 단지파가 되고 싶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하루의 삶속에 내가 하나님을 향하여 게으르지는 않는지, 하나님을 만홀히 여겨 부지중 그의 사랑을 가벼히 여기진 않는지 항상 살펴야 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핏값으로 구원을 입은 백성입니다. 그 핏값을 만홀히 여기는 죄는 버림받음으로 끝이 납니다. 이단에 속한 자들은 한두번 경계한 후에 멀리하라는 말씀을 지키지 않는 자들이 바로 버림이 되는 자들이 아니겠습니까. 말씀을 신실하게 지켜 행하지 않는 자들은 반드시 버림이 됩니다. 예수님께서 성찬을 행하여 기념하라 명하신 명령을 지키지 않는 자들은 말씀을 만홀히 여기는 것입니다. 오늘날 이 성찬을 부정하고 지키지 않는 교회들이 존재하는것을 우리는 압니다. 이러한 이단들은 불신자들 보다 더욱 악합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은 전도하여 바르게 가르치면 되지만 이단들은 저들 스스로도 믿는다고 자부하기 때문에 교정이 매우 힘듭니다.
우리는 성막을 통해서도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상징적인 예언을 볼 수 있습니다.
성막은 바닥 크기가 가로 50규빗 세로 100규빗 서로 곱하여 총 5000큐빗입니다. 그 바닥에 가로 10규빗 세로30 규빗 곱하여 넓이 300규빗의 성소와 지성소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막의 뜰은 총 5000-300=4700규빗입니다. 그리고 성소는 가로10 세로20 높이 10 곱하여 2000규빗, 지성소는 가로 세로 높이 10씩 곱하여 정육면체 모양의 부피 1000규빗이 됩니다. 이걸 이 성소의 모양을 통해 우리는 성막의 예언적 기능을 볼 수 있습니다. 아담부터 예수님이 오시기 까지 4000년이 걸렸습니다. 그러나 성소의 뜰은 4700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700년을 창조사의 기간으로 볼 수도 있습니다. 성경에는 7일로 표현 되어있으나 성막을 통해 우리가 하나의 가설로 볼 수 있는것은 하나님은 700년동안 물질세계를 창조하셨다 라고 이해해 볼 수도 있습니다. 지성소의 크기 2000규빛은 예수님 승천하시고 다시 오실날의 기간으로도 예상 해 볼 수 있습니다. 이로보면 정말 우리는 우리의 눈으로 예수님은 재림을 불 수 있는 시간 속에서 살고 있다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지성소 1000규빗은 예수님의 지상 재림후의 천년왕국을 예표한다고 이해해도 될 것 같습니다. 그러므로 인류사의 총 기간은 창조사를 제외한 4000+2000+1000=7000년이 됩니다. 이것이 성경에서 성막을 통해 우리에게 가르치는 인류사 입니다.
이러한 개념으로 우리는 사람의 형상의 기초 개념을 이해해 볼 수도 있습니다. 육의 크기 5000 속에 3000의 영혼이 있으며 그것은 그 3000은 2000 크기의 혼과 1000 이라는 영의 크기를 집작할 수 있습니다.
또한 육의 크기 5000속의 3000의 영혼은 육으로서는 1000으로 인식되나 사람의 존재성의 의미로는 3000의 크기를 가진다 라고 하나님이 지으신 사람을 이해해도 될 것 같습니다.
예수님이 오시기전에는 특정한 사람 대제사장만 지성소를 들어갔으나 예수님께서 그 육체로 지성소를 여신 지금 우리는 누구나 지성소르 들어갈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만인 제사장 시대를 살고 있으며 만인 대제사장 시대를 눈에 앞두고 있습니다.
그리고 말세의 핍박의 시대가 오면 뜰신앙 즉 육에 속한자 또는 세례를 받았으나 아직 육에 속한 율법신앙의 수준에 있는사람은 성소신앙에 있는 사람들과는 달리 핍박의 대상이 됩니다.
계 11:2
성전 바깥 마당은 측량하지 말고 그냥 두라 이것은 이방인에게 주었은즉 그들이 거룩한 성을 마흔두 달 동안 짓밟으리라
유대교에서 머물러 있는 이스라엘에 전쟁이 벌어지는 이유는 그들의 아직 육에 속한 율법의 신앙을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그러한 환란속에서 신앙의 발전을 이루며 결국 예수님의 메시야 되심을 인정하게 될 겁니다.
이러한 원리에 입각하여 휴거론을 생각해보면 환란전 휴거를 주장하시는 분들이 있는데(대부분이 그렇습니다.) 그러나 잘못된 판단입니다. 한란 후 휴거가 맞으며 다만 그리스도인은 환란기는 통과하나 환란을 격지는 않습니다. 두려워 할 이유가 없습니다. 성경의 전체적 맥락을 이해하지 못하는 견해라고 봅니다. 환란은 육체에 머물고 있는 사람들이 받습니다. 살고 있는 위치와 장소와는 전혀 상관이 없습니다. 위치와 관련이 있으면 롯과 같이 미리 피하게 하십니다.그리스도인을 위하여 예비된곳이 있을겁니다.
그러므로 공중재림과 지상재림을 둘로 나누어 생각할 필요가 없습니다. 재림은 한번 입니다.
이와 같이 성경의 여러 말씀을 통하여 우리는 기록된 말씀의 예언적 기능과 예표들을 보게 됩니다. 예수님 께서 은 삼십에 팔릴것도 하나님께서는 예표를 통하여 미리 보여주셨습니다.
스가랴서 11장에 보면 스가랴가 은총이라는 막대를 꺽은 후 백성들이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인 줄 알므로 저주가 예비되었습에도 스가랴에게 은 삼십을 줍니다. 그리고 스가랴는 그것을 성전의 토기장이에게 던집니다. 성전에 왜 토기장이가 있었을까요.. 토기장이는 흙은 다루는 사람입니다. 흙은 육체를 예표하며 육체는 율법을 예표합니다. 토기장이는 성전의 율법주의자들을 말합니다. 백성은 잠시 좋게 생각하나 잡혀죽을 운명의 가룟유다를 의미합니다. 스가랴는 값이 매겨진 예수님을 예표하며 여기서도 흙과 육체와 뷸법의 상관관계를 볼 수 있습니다. 첨언하자면 가룟유다는 잠시 양심의 찔림을 느껴 성전에 은전을 던졌으나 이 양심의 찔림이 예수께로 돌이키는 수준까지 이르지 못합니다. 그가 돌이켰으면 비참한 죽음은 성전의 제사장들에게 임했을겁니다. 그러나 예언의 정확성대로 유다는 비참한 끊어짐을 당합니다.
이러한 성막으로 보는 세계관은 성경에서 명확하게 말하고 있지 않는 모세의 부활과 승천을 예측 해 볼 수 있게 만듭니다.
성경 속에서 땅과 하늘을 왕래할 수 있는 자격을 가진 인물로는 어찌 됐던 육의 몸으로서 영의 몸을 함께 입은 사람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그러므로 모세의 육체를 두고 사단과 다툰 미가엘을 성경에서 볼 수 있으며 실제 모세는 변화산에서 승천자 엘리야와 함께 예수님을 만납니다. 이러한 관계로 에녹도 때에 따라서는 땅에 자신을 나타낼 수 있는 자격증을 가진 사람이다 라고 볼 수 있으며 예수님께서도 다메섹에서 바울을 만나셨습니다.
김근수 교수님의 강의중 너무 탁월하신 표현이라 무릎을 쳤던 경험이 있습니다. 창조이래로 하나님의 계시는 점점 더 밝아진다 라는 표현을 하셨는데 그 말씀이 너무나 탁월하고 정확합니다. 계시의 말씀은 때가 다가올 수록 점점더 밝아지고 그 의미가 명확해 집니다. 교회는 이러한 계시의 말씀을 터부시하여 성도들에게 명확히 전달하지 않는 우를 범하고 있습니다. 성도들은 때가 다가오는것을 피부로 느끼는데 소수의 교회만이 이러한 계시의 말씀들은 연구하고 성도들을 가르칩니다. 성도들은 애가타고 목이 마를 수 밖에 없습니다. 한국교회가 시대에 걸맞는 말씀을 전파하며 가르쳐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만인제사장의 때에서 만인대제사장의 때로 넘어가려는 이즈음 한국교회는 정신을 차려야합니다. 성경의 여러곳에서 구원받은 백성은 인류의 삼분의 일 정도가 될 것이라는 예측을 해볼 수 있는 몇몇 구절들이 보입니다. 스가랴 13:9
내가 그 삼분의 일을 불 가운데에 던져 은 같이 연단하며 금 같이 시험할 것이라 그들이 내 이름을 부르리니 내가 들을 것이며 나는 말하기를 이는 내 백성이라 할 것이요 그들은 말하기를 여호와는 내 하나님이시라 하리라
하나님을 대적하여 구원을 얻지 못한 사람들의 고통에 대해서는 스가랴 14:12 에서 그 처참함을 보여 줍니다.
예루살렘을 친 모든 백성에게 여호와께서 내리실 재앙은 이러하니 곧 섰을 때에 그들의 살이 썩으며 그들의 눈동자가 눈구멍 속에서 썩으며 그들의 혀가 입 속에서 썩을 것이요
그 때와 시는 명확히 계산 할 수 없습니다. 다만 우리는 그날이 가까이 옴을 볼 수 있는 말씀을 가지고 있습니다. 무화과 나무의 잎이 무성합니다. 이제 열매를 맺고 추수할 때가 보입니다. 우리는 날마다 경성하여 불안하여 떨지 않으며 삶속에서 그리스도의 사랑을 신뢰하는 모습으로 세상이라는 풍랑에 가라앉을 것 같아도 가라앉지 않는 방주처럼 오늘 하루 주어진 일 주안에서 굳건히 해내며 살아내는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겠습니다.
우리는 승리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