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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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위기 서론
레위기 서론
할렐루야! 새벽에 나오신 초양의 가족 여러분들에게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이 함께 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오늘은 본문의 말씀으로 “예배의 본질을 찾아서 - 레위기 서론”이라는 제목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듣겠습니다.
레위기는 모세 오경 중 세번 째 책입니다. 출애굽기가 이스라엘이 어떻게 구속을 받아 '제사장 나라와 거룩한 백성'이 되었는가에 대해 기록하고 있는 반면에, 레위기는 구속받은 거룩한 백성이 실천적인 삶을 살기 위해 어떻게 경배를 드리고 정결한 삶을 살아야 하는 것에 관한 기록입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분의 소유된 백성이니 이는 여러분을 어둠에서 불러내어 그분의 놀라운 빛으로 들어가게 하신 분의 덕을 선포하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You cannot worship God in a vacuum. You cannot worship God apart from his revelation.
존 F. 맥아더
“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
이 말씀은 이 시대를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이 어떠한 정체성을 가져야 하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 시대를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에게 레위기는 마치 KTX를 타는 아이에게 우마차를 타고 다니던 시절을 설명하는 것처럼 격세지감을 느끼게 하는 책임이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구약은 낡은 약속이 아닙니다. 구약은 아브라함을 통해서 인류의 구원자로 오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약속이며, 그 약속은 골고다 언덕에서 성취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성경(구약)은 자신에 대해 증언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요 5:39).
즉 구약은 오실 예수님에 대한 약속의 말씀이며, 신약은 오신 예수님과 다시 오실 예수님에 대한 복음의 말씀입니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은 신약의 백성으로써 교회의 구성원이 되어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구약의 말씀은 신약의 백성에게는 상관이 없는 것으로 오해하곤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도 우리에게 새 계명을 주시되 구약의 계명에 근거하여 주셨습니다.
요 13:34-35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줄 알리라”
그렇다면 왜 새 계명입니까? 이전 계명은 낡아서 폐기한다는 것입니까? 율법은 무용지물이 되었다는 것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율법이 없으면 복음을 출생할 수 없습니다. 율법을 통해서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알고 죄를 깨닫기에 율법을 통하지 않고서는 결코 복음에 이를 수 없는 겁니다.
롬3:20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그러나 율법 아래에 있었던 이스라엘 백성은 죄는 깨달았지만, 그 죄를 해결하지는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율법의 기능은 죄를 깨닫게 하는 것이지 죄를 용서하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물론 짐승의 제사를 통하여 부분적이고 일시적인 용서가 주어졌지만,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완전한 용서가 주어지 전에 구원의 그림자로서의 역할을 한 것입니다.
왜 하나님께서는 무려 천 오백년이라는 오랜 세월동안 이스라엘 백성을 율법 아래에 갇히게 하셨을까요? 사십년 광야생활을 통하여 광야학교를 졸업시키셨으면 바로 예수님을 보내셔서 제자교육을 시켜셨으면 되지 않았을까요?
구약의 역사를 통해서 살펴볼 수 있듯이, 이스라엘 백성은 단 한 번도 광야학교 졸업생으로서의 자격을 갖춘 적이 없어요. 늘 불평 불만 원망이었어요.그럴때마다 하나님께서는 선지자를 보내어 다시 계명을 상기시키고 돌이키셨지만, 여전히 그들은 광야학교의 가르침을 버리고 세상을 따랐습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시기 전에 이스라엘 백성은 나라 잃은 백성으로서 하나님이 주신 계명과 가르침을 버린 대가를 톡톡히 치렀습니다. 그러면서 성경에서 선지자가 없던 사백여년의 침묵기를 통하여 저들은 조금은 낮아진 듯한 모습을 보이며 다시 성경을 찾고 율법을 철저히 지키려는 몸부림도 보여요. 예수님 당시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바로 그러한 자들이었습니다.
이처럼 죄성을 가진 인간은 하나님이 주신 계명의 의미를 깨닫지 못했습니다. 말귀를 알아듣지 못한 겁니다. 하나님께서는 저들이 처음 계명으로는 결코 온전하지 못할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따라서 처음부터 '십자가와 부활'이라는 프로젝트를 준비하셨던 겁니다. 그럼에도 천오백년이라는 시간을 인내하신 것은 구약이라는 하나님 나라의 역사 교과서를 편찬하시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인간적인 생각이었다면 몇 번이고 구원 프로젝트를 때려치우고 싶으셨을 거예요. 그러나 하나님은 완전하신 분이시며 또한 그분의 계획은 완전한 겁니다. 단순히 구원 프로젝트를 완성하기 위한 것이라면 중간단계를 생략하고 심판하시면 그만입니다.
그러나 음식 하나를 만들더라도 좋은 재료를 선별하고 오랜시간 숙성시키고, 몇 년을 숙성시킨 장을 준비하며, 요리를 담을 아름다운 도자기 그릇을 준비합니다. 하물며 하나님께서 인류에게 주실 구원이라는 큰 선물을 준비하시는데 고작 40년의 시간을 할애하실 리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천오백년이라는 시간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사랑이라는 레시피를 선보이시기 위한 최적의 시간었던 겁니다.
롬10:4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시니라”
예수님께서 율법의 마침이 되실 수 있으셨던 것은 앞서 언급한 것처럼 하나님께서 천오백년의 구속사로 숙성시킨 결과입니다. 천오백년동안 숙성된 역사적 배경을 통해서 비로소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 사람들은 그 의미를 깨달을 수 있었던 겁니다.
인간의 의로서는 결코 이룰 수도 없는 하나님의 사랑, 율법의 의로써는, 인간의 의로써는 결코 흉내조차 낼 수 없는 그 사랑을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의 사랑으로 보여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새 계명을 주시되 '서로 사랑하라'라고 하신 것의 의미는,
첫째, 그리스도 안에서 신분이 바뀌었다는 것입니다.
전에는 하나님이 아버지 되심의 의미를 몰랐기에 자녀이기보다 백성이었습니다. 즉 육신으로는 같은 혈통이며 같은 민족일지라도, 같은 형제가 아닌 이웃이며 하나님을 섬기는 백성 중 하나였을 뿐이었습니다. 그러므로 한 아버지 밑에서 형제자매로서의 사랑이 없었던 겁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서 한 형제자매가 된 자들은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마 16:16)"라는 한 고백을 가지고 하나의 떡에, 하나의 포도주에 참예하는 자들입니다. 주 안에서 한 식구인 겁니다. 그러므로 여기에서 '서로'의 의미는 백성의 의미가 아닌 자녀이며 형제자매로서의 서로입니다.
둘째, 복음의 증거입니다.
예수님의 명령은 복음의 증인이 되라는 겁니다. 어떻게 증인이 되는 겁니까? 그것은 형제자매된 그리스도인들이 서로 사랑함으로써 증거한다는 겁니다. 이로써 알게 된다는 겁니다. 세상을 궁금하게 하고 놀라게 한다는 겁니다.
하나님의 법을 지키는 자가 하나님 나라의 백성입니다. 예수님의 명령을 지키는 자가 지저스 킹덤의 시민권자입니다. 예수님의 명령은 서로 사랑하라는 겁니다. 그 증거는 세상 사람들이 알게되는 겁니다.
그런데 지금 세상이 교회를 욕하는 것은 교회는 그렇지 않은데 세상 사람들이 오해한 것입니까 아니면 교회가 오해 살 일을 한 것입니까?
교회가 교회를 세상에 알리는 유일한 방법은 그리스도인이 서로 사랑하는 겁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한 형제자매가 된 자들이 서로 사랑하는 겁니다. 그런데 그 사랑을 보여주기는커녕 서로 다투는 모습을 보여주기에 세상 사람들이 예수의 제자인줄 모르는 겁니다.
셋째, 복음의 확장성입니다.
예수님이 서로 사랑하라고 하신 것은 코로나 바이러스처럼 불신을 퍼뜨리지 말고 사랑의 바이러스를 퍼뜨리라는 겁니다. 어린아이가 부모의 사랑을 보고 배우듯이, 복음을 모르는 세상 사람들은 보지도 못한 성경을 보고 배우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인들의 서로 사랑하는 모습을 보고 배우는 겁니다.
먼저 아내와 남편을 섬기십시오. 자녀를 섬기십시오. 믿음의 형제 자매를 혈육처럼 섬기십시오. 직장에서도 군림하기보다 공동체를 사랑으로 섬기고 직원을 진실함으로 대하십시오. 우리의 삶이 복음이 되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서는 세상은 결코 교회를 바라보지 않습니다. 종교인만 득실거리는 교회로 전락하고 말 겁니다.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 사람이 어떻게 경건의 예배를 드릴 수 있겠습니까? 경외의 의미조차 모르는 사람이 어떻게 경건하다 할 수 있겠습니까?
앞서 언급한 것처럼 KTX를 타는 세대가 어찌 아버지와 함께 우마차를 타고 장터로 가는 길에 푸른 하늘을 배경으로 코스모스가 피어 있고, 옆에는 넘실대는 벼가 익어가는 정취를 느낄 수 있겠습니까? 과거로 돌아가자는 것이 아닙니다. 복음의 본질로 돌아가자는 겁니다. 경건의 본질을 회복하자는 겁니다.
앞으로 레위기를 통해서 예배의 본질을 깨닫고 또한 교회를 통한 하나님의 사랑을 더 깊이 체험할 수 있는 시간이 되기를 소원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