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의 온전한 노예인 유두고의 죽음과 부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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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설교 제목 : 예수의 온전한 노예인 유두고의 죽음과 부활
핵심 포인트
- 그리스도인은 온전한 부활과 예배로 삶이 변화되어야 합니다.
사도행전 20장 7-12절[개역개정 성경]
7. 그 주간의 첫날에 우리가 떡을 떼려 하여 모였더니 바울이 이튿날 떠나고자 하여 그들에게 강론할새 말을 밤중까지 계속하매
8. 우리가 모인 윗다락에 등불을 많이 켰는데
9. 유두고라 하는 청년이 창에 걸터 앉아 있다가 깊이 졸더니 바울이 강론하기를 더 오래 하매 졸음을 이기지 못하여 삼 층에서 떨어지거늘 일으켜보니 죽었는지라
10. 바울이 내려가서 그 위에 엎드려 그 몸을 안고 말하되 떠들지 말라 생명이 그에게 있다 하고
11. 올라가 떡을 떼어 먹고 오랫동안 곧 날이 새기까지 이야기하고 떠나니라
12. 사람들이 살아난 청년을 데리고 가서 적지 않게 위로를 받았더라
<설교말씀>
오늘은 사도행전 20장 7절로 12절 말씀을 본문으로 하여 “예수의 온전한 노예인 유두고의 죽음과 부활” 이와 같은 제목으로 함께 말씀의 은혜를 나누기를 원합니다.
본문은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에 대해 아주 명확하게 제시하고 있다. 그리스도인은 어떤 사람인가? 본문은 크게 3가지 모습을 보여준다. 첫 번째로, 죄에 대해 죽음을 선포 받았으나 새 생명을 소유한 자이다. 9절에서 누가는 분명하게 선포했다. “죽었는지라.” 그러나 바로 다음 절에서 바울이 말한다. “생명이 그에게 있다.” 상반된 이들의 말은 롬 6:11의 말씀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 대하여는 살아 있는 자로 여길지어다” 말씀처럼 그리스도인이 살아 있는 자가 여김을 받는 것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일 때다. 죽음의 세력이 묶여 있던 유두고가 살아난 것은 성령의 능력에 사로잡혔던 바울을 통해 그리스도 예수가 유두고 안에 들어가셨던 것이다. 그를 자신의 거처로 삼으신 것이다.
두 번째로, 그리스도인은 신분이 바뀐 자이다. 한글 개역개정 성경을 보면 9, 12절 모두 유두고를 ‘청년’이라는 단어로 번역했다. 그런데 원어를 살펴보면 저자 누가는 이 두 구절에서 등장하는 ‘청년’이라는 단어를 달리 기록했다. 정확히 말해서 9절에서의 청년은 문자 그대로, 우리가 생각하는 ‘젊은 사람’을 뜻하는데 반해 12절에서의 청년은 조금 다르다. 12절에 쓰인 단어는 본문을 제외하고 총 4번 등장하는데 그 중 3번의 뜻이 바로 ‘종, 노예’의 개념이다. 용례를 참고해 본다면 12절 또한 ‘종’으로 번역할 수 있다. 결론적으로 사도행전의 저자 누가는 유두고가 죽기 전과 살아난 후의 신분을 의도적으로 달리 표현한 것이다. 죽기 전 청년 유두고는 세상으로 볼 때 누군가의 종, 노예였다. 그에게는 자유가 없이 낮에는 주인 밑에서 열심히 일을 했고, 밤이 되어서나마 자유를 얻어 돌아다닐 수 있었다. 하지만 죽었다 살아난 청년 유두고는 다름 아닌 그리스도의 종, 노예가 되었다. 비록 세상이 볼 때 그의 신분은 여전히 동일한 누군가의 종으로 동일했지만, 그의 본성은 더 이상 이 세상에 있지 않고 그리스도께 있었기에 앞으로 그리스도의 종으로써 살아갈 자가 된 것이다. 더 이상 죄의 왕국에 있지 않고 은혜의 왕국에 넘어 옴으로써 그분의 통치를 받게 된 것이다. 유두고의 신분은 분명히 바뀌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의 변화된, 올바른 정체성이다.
마지막이자, 세 번째는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을 드러냄과 동시에 친절하게 그리스도인이 어떻게 이 땅을 살아가야 할지 그 비전까지 제시한다. 그리스도인은 바로 위로를 전하는 자이다. 여기에서 말하는 위로란 무엇인가? 단순히 사람들의 마음을 따뜻하게 해주는 것인가? 힘들고 어려울 때 토닥토닥 해주는 격려를 뜻하는 것인가? 아니다. 본문에서 나타난 위로란 그리스도인으로써 주님께서 함께 해주심으로 인한 내적 평안을 뜻한다.
(행20:12)사람들이 살아난 청년을 데리고 가서 적지 않게 위로를 받았더라.
1. 죄에 대해 죽음을 선포 받았으나 새 생명을 소유한 자이다
사도행전에 묘사된 바울의 상황으로 보건대, 사실 그의 계획은 드로아에서 신도들과 성만찬을 나누고, 그들을 대상으로 강론을 진행한 후 곧바로 예루살렘을 향해 떠나려고 했던 것이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행 20:16). 그런데 바울로 하여금 성만찬과 강론만 하고, 즉 예배만 하고 떠나지 못하게 만드는 사건이 발생합니다. 등불이 많이 켜진 3층 방에서 바울의 강론은 밤이 깊도록 이어졌는데, 그러던 중에 유두고라는 이름의 청년이 강론 시간에 창문에 걸터앉아 졸다가 결국 창밖으로 떨어지는 사고가 일어났기 때문입니다. 사도행전은 유두고를 청년이라고도 했다가(20:9) 소년이라고 하는데(20:12), 짐작컨대 청년과 소년의 경계에 있는 나이쯤 되었을 것입니다. 추측컨대, 요즘의 청소년들 나이가 아니었을까 싶은데요. 아무튼 유두고가 창문에서 떨어진 이유는 명확합니다. 바울의 강론이 야심한 시간까지 이어질 정도로 지루하고 길다보니 졸음을 이기지 못하고 떨어진 것이지요. 사고의 원인은 본의 아니게 강론을 길게 한 바울에게 있었습니다.
한데 성서는, 그래서 유두고가 추락하여 즉사했다는 것인지 아니면 단순히 기절했다는 것인지 정확히 이해하기 어렵도록 모호하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3층 건물의 높이가 어느 정도였는지, 유두고가 피를 흘렸는지, 뼈가 부러졌는지, 그의 부상 정도가 어떠했는지 등에 관해서도 일절 언급하지 않습니다. 다만, 사람들이 일으켜 보니 그가 죽어 있었다고 말했다가(20:9), 곧 이어 바울이 내려가서 그를 살펴 봤을 때는 “아직 목숨이 붙어 있다”(그의 영이 그 안에 있다; φυχὴ αὐτου ἐν αὐτῳ)고 말한 것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20:10). 최종적으로 누구의 말이 맞는지 알 수 없습니다. 그런데 20장 12절에서 분명히 ‘살아난’ 청년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그는 어쨌든 죽기는 죽었던 것일 가능성이 높아 보입니다. 그렇다면 바울은 죽은 사람을 두고 왜 “아직 목숨이 붙어 있다”고 말했을까요? 단지 사람들을 안심시키기 위해서 거짓말을 한 것일까요? 아니면 죽었지만 그가 다시 살아날 수 있다고 확신했기 때문에 그런 말을 했던 것일까요? 역시 성서는 답을 주지 않습니다. 더욱이 바울이 그런 말을 하고 그 청년이 곧바로 정신을 차리고 깨어났는지, 아니면 계속 죽은 상태로 있었는지, 사람들이 바울의 말을 듣고 어떻게 대응했는지, 그 청년을 그곳에 그대로 두었는지 아니면 3층으로 다시 옮겼는지 등에 관해서도 아무런 정보를 제공하지 않습니다.
대신에 성서는 그 후에 이어진 상황에 관해서 명확하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위층으로 올라가서, 빵을 떼어서 먹고 나서, 날이 새도록 오래 이야기하고 떠나갔다. 사람들은 그 살아난 청년을 집으로 데리고 갔다. 그래서 그들은 적지 않게 위로를 받았다.”(20:11-12) 자, 다시 한 번 사건을 경과를 짚어보지요. 바울과 그의 일행이 방문하여 함께 성만찬을 나누고 바울이 직접 신도들을 대상으로 밤 늦도록 강론을 진행하던 중에 갑작스럽게 그 공동체의 어린 청년이 추락사하는 충격적인 사고가 났습니다. 분명히 사람들이 많이 놀랐을 것이고, 바울 자신도 당혹스러웠을 것입니다. 그러나 정확한 과정은 알 수 없지만, 결과적으로 그 청년은 확실히 “다시 살아났고”, 공동체의 구성원들은 그 일로 인해 큰 위로를 받았다고 합니다. 큰 위로를 받았다고 전하는 것으로 짐작해 보건데, 청년이 잠시 기절했다가 곧바로 깨어났던 것은 아닐 듯 싶습니다. 유두고가 정신을 차리고 깨어나기까지 꽤 오랜 시간이 지체되었을 것입니다. 만일 바로 살아났다면 안정을 취하도록 하기 위해서라도 즉시 청년을 집으로 데려가지 바울과 함께 위층으로 다시 올라가서 빵을 떼어먹고, 날이 새도록 오래 이야기를 나누고 그러진 않았겠지요. 오히려 그 청년이 깨어나지 못하고 있었던 그 시간 동안 바울과 드로아 공동체의 신도들이 그러한 행위를 했다고 보는 것이 좀 더 개연성 있는 추측일 것입니다.
9절에서 누가는 분명하게 선포했다. “죽었는지라.” 그러나 바로 다음 절에서 바울이 말한다. “생명이 그에게 있다.” 상반된 이들의 말은 롬 6:11의 말씀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 대하여는 살아 있는 자로 여길지어다” 말씀처럼 그리스도인이 살아 있는 자가 여김을 받는 것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일 때다. 죽음의 세력이 묶여 있던 유두고가 살아난 것은 성령의 능력에 사로잡혔던 바울을 통해 그리스도 예수가 유두고 안에 들어가셨던 것이다. 그를 자신의 거처로 삼으신 것입니다.
2. 그리스도인은 신분이 바뀐 자이다
한글 개역개정 성경을 보면 9, 12절 모두 유두고를 ‘청년’이라는 단어로 번역했다. 그런데 원어를 살펴보면 저자 누가는 이 두 구절에서 등장하는 ‘청년’이라는 단어를 달리 기록했다. 정확히 말해서 9절에서의 청년은 문자 그대로, 우리가 생각하는 ‘젊은 사람’을 뜻하는데 반해 12절에서의 청년은 조금 다르다. 12절에 쓰인 단어는 본문을 제외하고 총 4번 등장하는데 그 중 3번의 뜻이 바로 ‘종, 노예’의 개념이다. 용례를 참고해 본다면 12절 또한 ‘종’으로 번역할 수 있다. 결론적으로 사도행전의 저자 누가는 유두고가 죽기 전과 살아난 후의 신분을 의도적으로 달리 표현한 것이다. 죽기 전 청년 유두고는 세상으로 볼 때 누군가의 종, 노예였다. 그에게는 자유가 없이 낮에는 주인 밑에서 열심히 일을 했고, 밤이 되어서나마 자유를 얻어 돌아다닐 수 있었다. 하지만 죽었다 살아난 청년 유두고는 다름 아닌 그리스도의 종, 노예가 되었다. 비록 세상이 볼 때 그의 신분은 여전히 동일한 누군가의 종으로 동일했지만, 그의 본성은 더 이상 이 세상에 있지 않고 그리스도께 있었기에 앞으로 그리스도의 종으로써 살아갈 자가 된 것이다. 더 이상 죄의 왕국에 있지 않고 은혜의 왕국에 넘어 옴으로써 그분의 통치를 받게 된 것이다. 유두고의 신분은 분명히 바뀌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의 변화된, 올바른 정체성이다.
바울은 그들을 대상으로 밤이 깊도록 강론을 진행합니다(20:7). 즉, 신도들은 바울에게 강론을 들었습니다. ‘강론하다’(διαλέγετο)로 번역된 단어는 복수형태로 사용될 때는 ‘논쟁하다’(διελέχθησαν: 막 9:34)라는 뜻을 갖고 있습니다. 그런데 사도행전에서 이 단어가 바울과 관련되어 나타날 때는 언제나 단수형태가 사용되고 있습니다. 즉 바울은 가는 곳마다 사람들에게 일방적으로 강론을 했지, 그들과 상호 토론을 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17:2, 17; 18:4, 19; 19:8, 9). 오늘날에야 설교와 강의를 엄격히 구별하지만, 아마도 그때는 강론이 곧 예배 중에 이루어지는 설교와 유사한 것이었다고 이해하시면 됩니다. 따라서, 바울이 그들에게 오랜 시간 강론 혹은 설교를 했다는 것은 그가 신도들과 말을 대등하게 주고받았다는 것(tell)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바울은 그들을 상대로 하나님 나라의 ‘도(道)’를 긴 시간 동안 가르친(teach) 것입니다.
바울의 관점에서, 복음의 진리는 서로 말을 주고받는 가운데서 터득될 수 있는 그런 차원의 이야기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바울 자신이 그랬듯이(“내가 받은 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하였노니,” 고전 15:3), 그 진리의 내용을 가르치고 배우는 것을 통해서만 깨달을 수 있는 것입니다. 복음 역시 그 내용을 정확하게 가르쳐서 배우게 해야 하는 것이지 복음을 믿을 때의 느낌을 말로 서로 주고받는다고 해서 깨달을 수 있는 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좀 더 확장하자면, 복음의 진리는 보통의 말하고 듣는 과정을 통해선 도달할 수 없는 것, 오로지 외부에서 나에게 강제로 선포되어 나에게 주입되는 객관적인 차원에 있는 것입니다. 비유컨대, 복음의 진리는 공감적 소통의 대상이 아니라 주입식 교육의 대상입니다. 따라서 내가 그것을 복종하고 받아들이든지 아니면 거부하든지 둘 중에 하나이지, 내가 말을 보태서 그 내용을 변경시키고 그래서 상대방과 내가 대화하고 소통하는 가운데 그 내용에 관해 새로운 합의점에 도달할 수 있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바울은 드로아의 신도들에게 “가르치다”라는 의미에서의 강론을 수행했습니다. 왜 그렇게 했을까요? 교회는 성만찬과 더불어 바로 그와 같은 복음의 일방적이고 권위적인 가르침과 배움의 과정을 통해서만 탄생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도행전의 바울에게서 단 한 번도 디알레고마이가 복수형태로 사용되지 않은 것도 그런 이유에서입니다. 복음은 토론이나 논쟁의 대상이 아니라 선포와 가르침의 대상이라는 것이 사도 바울의 확고한 신념이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비록 세상이 볼 때 그의 신분은 여전히 동일한 누군가의 종으로 동일했지만, 가르침을 통해서 그의 본성은 더 이상 이 세상에 있지 않고 그리스도께 있었기에 앞으로 그리스도의 종으로써 살아갈 자가 된 것이다. 더 이상 죄의 왕국에 있지 않고 은혜의 왕국에 넘어 옴으로써 그분의 통치를 받게 된 것이다. 유두고의 신분은 분명히 바뀌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의 변화된, 올바른 정체성이다.
3.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을 드러냄과 동시에 위로가 될것.
세 번째는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을 드러냄과 동시에 친절하게 그리스도인이 어떻게 이 땅을 살아가야 할지 그 비전까지 제시한다. 그리스도인은 바로 위로를 전하는 자이다. 여기에서 말하는 위로란 무엇인가? 단순히 사람들의 마음을 따뜻하게 해주는 것인가? 힘들고 어려울 때 토닥토닥 해주는 격려를 뜻하는 것인가? 아니다. 본문에서 나타난 위로란 그리스도인으로써 주님께서 함께 해주심으로 인한 내적 평안을 뜻한다.
20장 12절에서 분명히 ‘살아난’ 청년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그는 어쨌든 죽기는 죽었던 것일 가능성이 높아 보입니다. 그렇다면 바울은 죽은 사람을 두고 왜 “아직 목숨이 붙어 있다”고 말했을까요? 단지 사람들을 안심시키기 위해서 거짓말을 한 것일까요? 아니면 죽었지만 그가 다시 살아날 수 있다고 확신했기 때문에 그런 말을 했던 것일까요? 역시 성서는 답을 주지 않습니다. 더욱이 바울이 그런 말을 하고 그 청년이 곧바로 정신을 차리고 깨어났는지, 아니면 계속 죽은 상태로 있었는지, 사람들이 바울의 말을 듣고 어떻게 대응했는지, 그 청년을 그곳에 그대로 두었는지 아니면 3층으로 다시 옮겼는지 등에 관해서도 아무런 정보를 제공하지 않습니다.
대신에 성서는 그 후에 이어진 상황에 관해서 명확하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위층으로 올라가서, 빵을 떼어서 먹고 나서, 날이 새도록 오래 이야기하고 떠나갔다. 사람들은 그 살아난 청년을 집으로 데리고 갔다. 그래서 그들은 적지 않게 위로를 받았다.”(20:11-12) 자, 다시 한 번 사건을 경과를 짚어보지요. 바울과 그의 일행이 방문하여 함께 성만찬을 나누고 바울이 직접 신도들을 대상으로 밤 늦도록 강론을 진행하던 중에 갑작스럽게 그 공동체의 어린 청년이 추락사하는 충격적인 사고가 났습니다. 분명히 사람들이 많이 놀랐을 것이고, 바울 자신도 당혹스러웠을 것입니다. 그러나 정확한 과정은 알 수 없지만, 결과적으로 그 청년은 확실히 “다시 살아났고”, 공동체의 구성원들은 그 일로 인해 큰 위로를 받았다고 합니다. 큰 위로를 받았다고 전하는 것으로 짐작해 보건데, 청년이 잠시 기절했다가 곧바로 깨어났던 것은 아닐 듯 싶습니다. 유두고가 정신을 차리고 깨어나기까지 꽤 오랜 시간이 지체되었을 것입니다. 만일 바로 살아났다면 안정을 취하도록 하기 위해서라도 즉시 청년을 집으로 데려가지 바울과 함께 위층으로 다시 올라가서 빵을 떼어먹고, 날이 새도록 오래 이야기를 나누고 그러진 않았겠지요. 오히려 그 청년이 깨어나지 못하고 있었던 그 시간 동안 바울과 드로아 공동체의 신도들이 그러한 행위를 했다고 보는 것이 좀 더 개연성 있는 추측일 것입니다.
그들이 다시 빵을 떼어 나누어 먹었다는 것은 그들이 예배를 진행했음을 암시합니다. 그렇다면 청년의 영(생명)이 아직 그 안에 있다고 했던 바울의 말을 믿고 함께 기도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거기서 끝이 아닙니다. 앞서 바울은 신도들을 대상으로 긴 시간 동안 강론을 했었습니다만, 예기치 못했던 사고가 발생하고 다시 예배를 진행한 후에는 그들과 “날이 새도록 오래 이야기합니다.”(20:11) 11절에서 ‘이야기하다’라는 뜻으로 번역된 원어는 앞서 나온 강론하다(διαλεγομαι)와는 전혀 다른 단어인 ‘호밀레오’(ὁμιλέω)라는 단어입니다. 말 그대로 바울이 신도들과 대등한 관계에서 대화를 나누었음을 가리킵니다. 앞서의 강론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이야기를 나눈 것입니다. 강론만 하고 서둘러 드로아를 떠날 생각이었던 바울이 예상치 못한 사고를 경험하면서 비로소 그곳의 신도들과 마주 앉아 차분히 대화를 나누게 되었습니다. 한데 이번에는 자신의 이야기만 일방적으로 하지 않고, 그들의 이야기를 들었을 것입니다. 지금 저렇게 쓰러져 있는 청년은 누구이고, 그는 어떤 삶을 살아 왔는가, 오늘 그는 무슨 일을 하고 왔는가, 유두고와 신도들의 관계는 무엇인가, 다른 신도들은 어떻게 드로아에서 살아가고 있으며, 그동안 어떻게 신앙을 지켜 왔는가, 드로아의 공동체에는 어떤 이들이 있고, 공동체 안에는 어떤 어려움이 있는가, 바울은 어떻게 예수의 사도가 되었는가, 사도가 된 이후로 그는 어떤 일을 겪었는가, 그와 그 일행은 드로아에 오기 전에 에베소에서 무슨 일을 겪었는가 등등의 정체성과 많은 사적이고 일상적인 삶의 이야기를 밤이 새도록 나누었을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서 본문에서 나타난 위로처럼 그리스도인으로써 주님께서 함께 해주심으로 인한 내적 평안의 위로를 서로에 대해 깊이 아는 시간을 가졌을 것입니다.
4.그리스도인은 온전한 예배로 삶이 변화되어야 합니다.
바울과 그의 사람들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함으로써 그들의 모임을 교회로 완성시킨 것일까요? 바울이 한 일을 하나씩 짚어보겠습니다. 첫째, 앞서도 말했듯이 일단 그 주간의 첫 날, 즉 오늘날의 관점에서 일요일인 주일에 바울은 사람들과 함께 모여서 빵을 뗐습니다. 말 그대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기억하고 그것을 몸에 새기는 성만찬 의례를 수행한 것입니다. 초기 그리스도교에서 성만찬은 유대교나 다른 종교적 공동체와 완전히 갈라져서, 예수를 따르는 메시아 공동체, 즉 교회를 탄생시키는 근본적인 활동에 해당했습니다(행 2:42).
그런데 이 드로아에 모여서 함께 빵을 뗐던 사람들 가운데는 적어도 바울이 에베소를 떠나 그리스에 이르렀을 때부터 그와 동행하다가 바울보다 먼저 그곳에 도착한 일곱 명의 제자(소바더, 아리스다고, 세군도, 가이오, 디모데, 두기고, 드로비모: 20:4)나 바울과 계속해서 동행하다가 그와 함께 드로아에 나중에 도착한 사도행전의 화자인 ‘우리’만 있었던 게 아닙니다(20:5-6). 드로아에는 이미 다른 사람들, 즉 원래부터 드로아에 살고 있었던 ‘그들’(신도들: αὐτοις)이 등장하고 있습니다(20:7). 즉, 바울이 그 모임을 처음부터 주도적으로 조직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어쨌든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을 공유하는 일단의 사람들이 드로아에 이미 존재하고 있었고, 그들이 자체적으로 모임을 이루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오늘 본문은 바울 일행을 포함한 그 모든 이들이 드로아의 모처에서 주일에 함께 성만찬을 거행했음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로버트 웨버가 피력한 복음주의 정신을 기초로 예배는 하나님께서 시작하는 것이며 그리스도 중심적인 내용을 가지고 있어야하며 동시에 하나님의 선포에 응답하는 회중들의 참여와 교제를 가져야 함을 보다 더 체계적이고 구체적인 방안들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이에 따라 오늘날 예배 갱신을 주장하며 변화를 추구하는 많은 한국 교회들이 따라야 할 건강한 지침서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중요한 것은 모래위에 세운 예배들도 있을 것이지만, 그것들은 곧 바람이 불면 무게에 결국은 무너져 버릴 것이다. 예배는 그들이 세운 기초만큼만 세워질 것이다. 바울과 그의 제자들이 초기에 드렸던 예배의 정신을 본받아 하나님이 가치 있고 필요하다고 여기시는 예배의 모습을 담기 위해 의도적으로 그리고 성실히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예배에 대한 성경적인 원리와 문화를 함축하고 있는 견고한 기초위에 세워진 예배는 어느시대에서든지 우리를 둘러싸는 변화와 소용돌이에 맞서 살아 남아 하나님을 만나는 수단과 방법들을 계속해서 마련해 줄 것입니다.
[결론]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유두고를 통해서 ‘죄에 대해 죽음을 선포 받았으나 새 생명을 소유한 자이다’라는 것을 알아 보았습니다.
죽음의 세력이 묶여 있던 유두고가 살아난 것은 성령의 능력에 사로잡혔던 바울을 통해 그리스도 예수가 유두고 안에 들어가셨던 것이다. 그를 자신의 거처로 삼으신 것입니다.
비록 세상이 볼 때 그의 신분은 여전히 동일한 누군가의 종으로 동일했지만, 가르침을 통해서 그의 본성은 더 이상 이 세상에 있지 않고 그리스도께 있었기에 앞으로 그리스도의 종으로써 살아갈 자가 된 것이다. 더 이상 죄의 왕국에 있지 않고 은혜의 왕국에 넘어 옴으로써 그분의 통치를 받게 된 것이다. 유두고의 신분은 분명히 바뀌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의 변화된, 올바른 정체성이다.
그리고, 그리스도인으로써 주님께서 함께 해주심으로 인한 내적 평안의 위로를 서로에 대해 깊이 전해주는 축복의 통로가 되시길 소망합니다.
또한, 한국교회가 예배의 중요성을 잃어가고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모래위에 세운 예배들도 있을 것이지만, 그것들은 곧 바람이 불면 무게에 결국은 무너져 버릴 것이다. 예배는 그들이 세운 기초만큼만 세워질 것이다. 바울과 그의 제자들이 초기에 드렸던 예배의 정신을 본받아 하나님이 가치 있고 필요하다고 여기시는 예배의 모습을 담기 위해 의도적으로 그리고 성실히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여러분들도 개혁주의 생명신학의 7대 실천운동으로서 우리는 하나님의 성품을 소유한 하나님의 자녀로써, 살아갈 때에 유두고처럼 신분이 바뀌어서 사변화된 학문에서 탈피하고 제자의 삶을 살아야 교회의 본질이 위기에 처한 한국교회를 구할수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리고 우리 자신이 선물이 되는 큰 사람이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복기도합니다.
<기도>
저희를 끝까지 생명 내어 놓고 책임지시고 사랑하시는 하나님 아버지. 이 시간 우리를 모두 성령으로 충만케 하여 주셔서, 문제 많고 어려움 많은 세상에서 죄에 대해 죽음을 선포 받았으나 새 생명을 소유한 자로 또한 유두고처럼 신분이 변화되게 하시어서, 승리하는 삶을 살게 하여 주시고 주님의 사랑으로 충만하여 세상을 변화 시켜 나가는 가장 큰 명령인 예배와 선교의 지상명령을 준행하는 주님의 귀한 일꾼들 다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존귀하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올리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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