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니엘과 같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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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단 1:1-9
제목 : 다니엘과 같이
구약성경에 등장하는 인물 중에서 가장 성공한 인물을 꼽으라면, 요셉과 다니엘을 선택할 수 있습니다. 또 구약성경에 등장하는 인물 중에 우리 아들 딸들이 닮았으면 하는 인물을 선택하라고 한다면, 요셉과 다니엘을 선택하기 마련입니다. 그렇다면 요셉과 다니엘 중에서 한 사람을 선택하라고 한다면, 누구를 선택하시겠습니까? 일반적으로 다니엘을 많이 선택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다니엘이 바벨론에서 총리를 오랫동안 해 먹었기 때문이죠. 여기 계신 분들 중에 우리 자녀들이 사회에서 어떤 직업을 갖게 되든지 짧고 굵게 재직하기를 바라는 분은 계시지 않을 겁니다. 가능하면 최대한 오랫동안, 은퇴할 때까지 직장에서 하나님께 영광 올려드리면서, 또 주위 사람들에게 그리스도인의 본이 되어서 복음 전하는 통로로 사용되기를 바라실 것입니다.
그런데 건강하고 바른 신학의 토대 위에서 성경을 읽고 적용하려면, 다니엘이 바벨론의 총리로 오랜 시간 동안 재직했다는 사실만 가지고 우리 자녀가 다니엘처럼 되면 참 좋겠다. 다니엘처럼 살아가면 소원이 없겠다. 이런 식으로 쉽게 표현해서는 안 됩니다. 진정으로 우리 자신이, 그리고 우리 자녀가 다니엘처럼 되기를 소망하면서 기도하려면, 성경에 등장하는 다니엘이라는 인물이 어떤 시대에 어떠한 인생을 살아갔는지, 또 하나님께서는 다니엘을 어떻게 인도하셨는지. 이러한 부분들을 주의 깊게 살펴봐야 합니다.
먼저 다니엘서의 시대적 배경에 대해서 살펴보겠습니다. 다니엘서 1장 1절 말씀을 보세요. 유다 왕 여호야김이 다스린 지 삼 년이 되는 해에. 바벨론 왕 느브갓네살이 예루살렘에 이르러 성을 에워쌌더니.
남유다의 왕인 여호야김이 통치하던 시대가 어떤 시대였는가 하면, 남유다 요시야 왕이 주전 609년에 이집트 왕인 바로 느고에 의해 므깃도에서 살해당합니다. 그리고 나서 이집트와 바벨론이 갈그미스에서 고대 근동의 패권을 두고 전쟁하는데요. 이때 바벨론이 대승을 거둡니다. 그 이후에 바벨론이 전쟁에서 승리한 그 기세를 이어서 남유다를 정복하는데요. 바로 이 시점이 다니엘 1장의 시점이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다니엘 1장 1절 말씀을 읽고 이해하려면, 요시야 왕이 어떤 왕이었고 갑작스럽게 므깃도 전투에서 사망하고, 여호아하스가 3달 통치하고, 이어서 여호야김이 통치하는데 3년 만에 바벨론이 침략하고. 이런 내용을 쭉 들어야만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스라엘 사람의 경우에는 다니엘 1장 1절을 읽으면, 말씀을 펴자마자 다니엘서의 분위기를 즉각적으로 캐치할 수 있습니다.
아, 남유다 역사상 최악의 시대구나. 남유다가 이제 완전히 몰락하고 이방 민족에게 멸망 당하는 시대구나. 하나님께 심판받는 시대구나. 너무나 암울하고 불안하고 어려웠던 시대구나. 그런 시대상을 다니엘서가 그리고 있구나. 이런 식으로 이해할 수 있는 것이죠. 따라서 오늘날 우리도 다니엘서 1장을 읽을 때, 이러한 시대적인 배경을 염두에 두고 굉장히 절망적인 시대에서 어떤 내용이 등장하는지를 침착하게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오늘 본문 다니엘서 1장 2절 말씀 보세요. “주께서 유다 왕 여호야김과 하나님의 전 그릇 얼마를 그의 손에 넘기시매 그가 그것을 가지고 시날 땅 자기 신들의 신전에 가져다가 그 신들의 보물 창고에 두었더라”
2절 말씀을 볼 때, 1절 말씀과 비교해서 볼 필요가 있습니다. 1절에서의 주체는 누구입니까? 바벨론의 왕 느부갓네살이 주체입니다. 느부갓네살이 예루살렘 성을 포위하죠. 그런데 2절 말씀에서의 주체는 누구입니까? 주께서. “주께서”라는 말은, 히브리어로 주인 또는 소유자를 의미합니다. 다시 말해 이스라엘의 주인이신 하나님께서 느부갓네살 손에 넘기셨다는 것이죠. 여기에서 우리는 일반적인 역사가의 관점과 다니엘서를 기록한 다니엘의 영적인 관점이 얼마나 크게 차이 나는지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일반적인 역사가의 관점 또는 남유다의 역사적인 흐름을 객관적으로 놓고 보면, 다니엘 1장 1절의 분위기는 어떻습니까? 최악이죠. 므낫세와 아몬으로 이어지는 최악의 왕들 이후에 요시야 왕이 나타나더니, 우상숭배로 물들었던 남유다를 종교개혁시키고, 남유다가 다시금 하나님 앞에서 강력한 국가로 변모하던 때에, 부흥의 주역이었던 요시야 왕이 갑작스러운 죽음을 맞이하자마자 즉각적으로 멸망을 향해 질주하는 시대이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다니엘서의 저자인 다니엘의 관점은 어떻습니까. 유다가 이방 민족에게 침략당해서 거룩한 성전, 하나님께서 임재하시는 처소에서 사용되는 거룩한 기물들을 빼앗기는 너무나 치욕스러운 사건이 발생하는데, 이 사건은 남유다의 국력이 약해서 강제적으로 이방 민족에게 거룩한 예루살렘 성전의 기물들을 강탈당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자발적으로 넘겨주시는 사건으로 보는 것입니다. 뭐 결과적으로 빼앗긴 것은 똑같지 않느냐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만, 그렇지 않죠.
이 당시의 고대 근동 국가들의 신론은 동일했습니다. A라는 국가가 B라는 국가를 침략해서 정복하면, A국가가 섬기는 신이 B국가의 신보다 강하다. 라는 기본적인 공식이 통용되던 시대였습니다. 그 신이 어떤 신이냐. 어떻게 숭배하냐. 이런 것 다 떠나서, 힘의 논리로 어떤 신이 더 우월하고 월등하느냐가 증명되는 시대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다니엘서의 저자인 다니엘은 남유다가 바벨론에게 성전의 기물을 빼앗기고, 얼마 지나지 않아 멸망 당한다고 하더라도 그런 일들은 하나님께서 허용하셔서 일어난 일이라고 기록하는 것입니다. 이는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믿는 삼위일체 하나님은 무소부재한 분이시며 전지전능한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능치 못한 일이 없으시며, 모르는 일이 없으십니다. 하나님께서 작정하지 않으신 일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모르시는 일, 하나님께서 허락하지 않으신 일은 발생할 수 없는 것입니다.
자 그렇다면, 하나님은 무소부재하시고, 전지전능한 분이시기 때문에, 하나님께 예배만 드리면, 기도만 열심히 하면 모든 일이 잘 풀리고 형통하는 축복을 누릴 수 있을까요? 네 그렇지 않습니다. 바벨론이 남유다 백성들을 포로로 잡아갈 때, 왕족과 귀족들을 잡아가는데요. 다니엘 1장 4절 말씀 보세요. “곧 흠이 없고 용모가 아름다우며 모든 지혜를 통찰하며 지식에 통달하며 학문에 익숙하여 왕궁에 설 만한 소년을 데려오게 하였고 그들에게 갈대아 사람의 학문과 언어를 가르치게 하였고”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간 사람들이 어떤 사람들이었습니까? 흠이 없고 용모가 아름다우며, 모든 지혜를 통달하며 지식에 통달하며 학문에 익숙한 사람들만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갔습니다.
자 그런데, 다니엘서 1장의 시대적인 배경이 어떻다고 했습니까? 세상적인 관점으로 볼 때, 너무나 절망스럽고 어둡고, 힘들었던 시대라고 했습니다. 보통 이런 시대에는 시대적인 영향을 받아서, 대충 사는 사람도 생기기 마련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아무리 열심히 살아도 나라가 망하면 아무 소용 없기 때문입니다. 그냥 소나 돼지처럼 도살당해도 아무런 할 말이 없는 것이 고대의 전쟁 아니겠습니까? 또한 전쟁에서 패배당해서 가까스로 목숨을 부지한다고 하더라도 일단 자기 나라가 정복당하면, 소망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습니다. 이러한 절망스러운 시대, 마치 자기 운명이 정해져 있는 것처럼 보이는 시대에 굳이 열심히 살 필요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다고 말하는 사람이 충분히 있을 수 있다는 거예요. 이러한 시대적인 상황을 핑계 삼아 되는대로, 아무런 목적 없이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때 남유다에 어떤 사람들이 있었습니까? 흠이 없고 용모가 아름다우며 모든 지혜를 통달하며 지식에 통달하며 학문에 익숙하여 왕궁에 설 만한 소년들이 있었다는 겁니다. 시대가 어떻든 자기 미래를 성실하게 준비하는 사람들이 있었다는 거예요. 단순하게 교회에 신앙생활 잘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으로 만족하는 것이 아니라, 흠이 없고, 용모가 아름다우며 모든 지혜를 통달하며 지식에 통달하며 학문에 익숙한 데다가 신실한 믿음을 소유한 사람들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중간 적용을 하고 넘어가겠습니다. 이 세상을 살아가는 모든 사람에게 있어서 어떤 시대든지 어렵지 않은 시대는 없습니다. 예컨대, 직장생활하는 분들 중에 본인이 다니는 직장이 힘들다고 생각하지, 남들에 비해서 나는 일하는 것도 편하고 돈 버는 것도 많이 벌고 너무 너무 편하고 쉽다. 이렇게 생각하는 분들은 흔치 않습니다. 이는 군 생활도 그렇고, 가정도 마찬가지입니다. 본인이 소속되어 있는 곳이 가장 어렵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시대를 분별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옛날에 비해서 지금이 훨씬 낫지. 이렇게 생각하더라도, 쉽다고 생각하진 않습니다.
물론 인생살이가 어렵다고 생각하는 것이 잘못된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그 이후에 시대를 분별하고 대응하는 방식에서 차이가 발생합니다. 예를 들어, 요즘 20대 30대 청년들 중에 비혼주의자들이 많다고 하지 않습니까? 자녀를 낳지 않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결혼 자체를 안하는 청년들이 굉장히 많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결혼해서 가정에 묶이는 것도 싫고, 경제적으로 빠듯하게 사는 것도 싫고. 서울 집값이 미친 듯이 올라서 옛날에는 한 직장에서 성실하게 일하면, 퇴직할 때 집 한 채는 마련할 수 있다고 하는데, 요즘은 한 푼도 없는 상태에서 사회생활 시작하면 200년 동안 일해도 서울 집 한 채 살 수 없다고 한다더라. 그럴 바에 결혼 왜 하냐. 그냥 혼자 살고 말지. 사고 싶은 거 다 사고. 좀 외롭더라도 개나 고양이 키우면서 여유 있는 삶을 사는 게 훨씬 낫다. 이렇게 생각하는 청년들이 많습니다. 이러한 생각은 시대적인 영향을 받아서 어쩔 수 없는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만, 영적으로 평가하면, 이러한 생각은 성경적인 세계관에 명백하게 역행하는 잘못된 생각입니다. 이는 비혼주의자들뿐만 아니라, 자신의 삶에 충실하지 않는 사람들, 다른 핑계를 대면서 나는 이래서 못해. 저래서 못해. 원래 못했어. 이런 식으로 회피하고 합리화하는 모든 사람을 포함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다니엘 1장 1절에서 4절 말씀을 읽으면 그 이유를 알 수 있습니다. 나라가 언제 멸망 당해도 이상하지 않은 때에, 어떤 사람들이 있었습니까? 흠이 없고 용모가 아름다우며 모든 지혜를 통달하며 지식에 통달하며 학문에 익숙한 사람들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하루 이틀 안에 준비될 수 있습니까? 그럴 수 없습니다. 이런 사람은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인생을 값지게 최선을 다해 살아가면서 준비한 사람입니다. 기본적인 생각과 인생의 가치관과 방향성이 성경적으로 바르게 정립된 사람인 것이죠.
자 그렇다면, 이렇게 준비된 사람의 경우에, 하나님께서 크게 쓰시는 도구니까, 이런 사람들은 어떤 시대든지 관계없이 시대의 흐름은 역행할 수 있을까요? 시대를 아예 뒤바꿀 수 있는 엄청난 능력이 있을까요? 네. 그렇다고 말씀 드리고 싶지만, 계란으로 바위 치기나 다름없는 경우가 훨씬 많습니다. 예컨대 다니엘서와 마찬가지로, 나라가 멸망 당하는 경우도 있고요. 본인의 능력과 관계없이 국가 경제가 어려워져서 물가가 상승함으로 가난한 사람들이 더욱 힘든 인생을 살아가게 되는 것 역시 막을 수 없죠. 또한 어떤 경쟁 구도에서 더러운 이득을 취하는 사람들로 인해서 보이게 보이지 않게 손해가 누적되는 것? 이런 일들은 비일비재합니다. 하나님께서 살아계셔서 역사하시는 것은 사실이지만, 부패하고 비열한 일들은 오늘날에도 일어납니다.
다니엘서는 방금 제가 말씀드린 이런 더러운 일들의 결과를 보여줍니다. 최선을 다해 미래를 준비하며, 용모를 가꾸고, 지혜를 통찰하며, 학문에 정진했던 소년들이 하나님 앞에서 끊임없이 범죄해서 나라를 멸망 당하게 만든 못난 어른들 때문에, 신실하게 미래를 준비하며 살아간 청년들이 포로로 잡혀가는 비극이 발생한 것입니다. 자신은 아무런 죄가 없지만, 그럼에도 시대적인 영향에서는 자유로울 수 없다는 것이죠.
하지만 시대적인 영향으로 인해서 손해를 보는 일이 있다고 하더라도, 믿음 때문에 고난을 감당하거나, 인간관계에 있어서 어려움을 겪거나, 물질적인 손실을 감당하는 과정에서 고통받을지라도,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준비된 자들을 통해 역사하십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다니엘의 삶을 어떻게 인도하시며 역사하시는지, 또 다니엘은 준비된 상태에서 어두운 시대를 어떻게 헤쳐 나아가는지 살펴보겠습니다.
우선 다니엘이 포로로 잡혀가면서, 굉장히 큰 변화 세 가지를 맞이합니다. 1장 4절 하반절에 “그들에게 갈대아 사람의 학문과 언어를 가르치게 하였고” 1장 7절 “환관장이 그들의 이름을 고쳐 다니엘은 벨드사살이라 하고.”
다니엘에게 일어난 세 가지의 변화는 바벨론의 학문을 배우는 것, 바벨론의 언어를 배우고 사용하게 된 것, 히브리어 이름을 개명 당한 것. 이렇게 세 가지의 큰 변화를 겪게 됩니다. 성경에 구체적으로 기록되어있지 않아서, 다니엘이 몇 살에 포로로 끌려갔는지 알 수 없습니다만, 대부분의 학자들은 다니엘의 나이가 젊게 보면 10대 중반, 좀 많게 보면 30대 초반까지도 봅니다. 가능성이 많이 열려있어서 확신하기 어렵습니다만, 일단 초등학생 정도는 아니라고 볼 수 있겠죠.
좌우지간 이때 다니엘이 바벨론의 학문과 언어를 배우고 바벨론식 이름으로 개명해서 생활했다는 점에서, 다니엘의 정체성에 큰 변화가 생길 수 있었겠구나. 이런 부분을 추측할 수 있습니다. 나라는 이미 멸망 당했고, 본인은 포로로 끌려왔고, 이제는 바벨론의 관료로 훈련받고 있으니, 바벨론 사람으로 살아야겠구나. 이렇게 생각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다니엘은 본인의 영적인 정체성을 굳게 붙잡았습니다. 다니엘 1장 8절 말씀 함께 읽겠습니다. 시작. “다니엘은 뜻을 정하여 왕의 음식과 그가 마시는 포도주로 자기를 더럽히지 아니하리라 하고 자기를 더럽히지 아니하도록 환관장에게 구하니”
여기서 다니엘의 행위와 하나님의 역사하심이 절묘하게 하모니를 이루는데요. 먼저 다니엘의 행위를 살펴보면, 다니엘의 행위는 두 가지로 나눌 수 있습니다. 첫째로, 다니엘은 자신의 뜻을 정했습니다. 어떤 뜻을 정했습니까? 세상과 타협함으로써 영적으로 자기 자신을 더럽히는 일들에 대해 허용하지 않기로 결정했습니다. 여기에서 다니엘의 위대함이 나타납니다. 세상 사람들과의 관계? 직장 상사의 기분? 라인을 타기 위해서 비위를 맞추는 것? 복음을 훼손하는 것이 아닌 이상 어느 정도 그냥 타협하며 살아가는 것? 이런 부분에 대해서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은 너무나도 쉽게 생각합니다. 타협할 것 다 타협하면서, 하나님만큼은 내 삶에 강권적으로 역사해 주시기를, 나의 불편함을 모두 다 해소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본인의 죄악된 본성과 말씀대로 살아가지 않는 추악한 마음과 행실에 대해서는 눈 가리고 아웅 하면서, 기도할 때에는 못하는 말이 없죠.
하지만 다니엘의 모습을 보십시오. 다니엘은 그 무엇으로도 자신을 영적으로 더럽히지 않게 하기 위해서 뜻을 정합니다. 인생의 원대한 목표만을 바라보며 달려가는 것이 아니라, 사소한 것 하나에도 하나님을 먼저 신경 씁니다. 하나님께 택함 받은 민족으로서의 거룩한 정체성을 훼손시키지 않기 위해서 타협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데 다니엘이 타협하지 않는 과정에서도 그의 지혜로움이 발휘됩니다. 1장 8절 하반절에 보시면, 환관장에게 구하니. 라고 되어있습니다. 이는 단순한 요청으로 볼 수 있겠습니다만, 원어로 볼 때 다니엘이 환관장에게 정중하게 요청한 것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나는 하나님의 거룩한 자녀인데, 지옥에 떨어질 인간이 감히 나한테 이래라 저래라 하냐. 이런 마인드로 영적 우월감을 가지고 상대방의 위치나 그 사람의 마인드에 대해서 전혀 신경 쓰지 않고, 본인의 믿음만 신경 쓰는 것이 아니라, 상황에 맞게 상대방을 존중하면서, 지혜롭게 대처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다니엘이 행동할 때 하나님은 다음과 같이 역사하십니다. 1장 9절 말씀 함께 읽겠습니다. 시작. “하나님이 다니엘로 하여금 환관장에게 은혜와 긍휼을 얻게 하신지라”
환관장이 다니엘에게 은혜와 긍휼을 베푸는데, 그 동인이 하나님께 있다는 것입니다. 바벨론의 우상을 숭배하는 환관장이 하나님을 향한 믿음의 정체성을 지키고자 하는 다니엘을 불쌍하게 여겨주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위대한 역사하심입니다.
여기서 인간적인 관점과 영적인 관점에 차이에 대해서 살펴보겠습니다.
다니엘 1장의 시점은, 남유다가 바벨론에게 멸망당하기 시작하는 때라고 했습니다. 외적으로는 남유다의 군사력이 바벨론보다 약해서 멸망당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힘이 약해서 성전의 기물들을 빼앗기고, 포로로 잡혀가는 것으로 보입니다. 겉으로 볼 때에는 너무나 자연스러운 힘의 논리에 의한 것으로 보이지만, 하나님께서 허용하셨기 때문에 이러한 일이 발생한 것이었습니다. 또한 다니엘이 뜻을 정하고 자기를 더럽히지 않겠다고 결단했을 때, 하나님께서 환관장에게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주셨습니다. 그래서 환관장이 10일 동안 풀과 물만 먹는 시험을 진행하도록 허락한 것이죠. 이러한 과정에서 하나님께서 직접적으로 말씀하시거나 어떤 기적을 보여주셨습니까? 그런 것 없습니다. 나중에 다니엘에게 환상을 보여주시지만, 다니엘 1장에서 믿지 않는 사람들이 인지할 정도의 초자연적인 기적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바벨론이 남유다를 멸망시키는 것에 대해 허락하셨고, 환관장으로 하여금 다니엘을 긍휼히 여기는 마음을 주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역사하심이며, 하나님은 오늘날에도 이와 같은 방식으로 역사하십니다.
자 그렇다면, 오늘날 우리가 다니엘서 1장 말씀을 보면서 어떻게 적용해야 할까요. 첫째로, 우리는 하나님의 역사하심에 대해서 생각할 때,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과 인간의 책임에 대해 깊이 고찰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절대주권과 인간의 책임은 쉽게 표현하자면, 하나님은 하나님대로, 신자는 신자대로 각자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다니엘의 삶은 어떤 삶이었습니까? 너무나 어렵고 타락한 시대, 국가의 존망이 걸려 있는 절망적인 시대에 포기하지 않고, 성실하게 자기 자신을 갈고 닦았습니다. 남유다가 멸망 당해서 자신이 언제 죽을지 모르는 상황이라고 하더라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나라가 망해서 포로로 끌려가서 평생토록 노예 신분으로 이방 민족의 똥오줌이나 닦아주며 사는 인생이 된다고 하더라도, 지식에 통달하며 학문에 익숙해지기 위해서 끊임없이 노력했습니다. 이렇게 치열하게 준비하는 과정 가운데, 결국 바벨론의 포로로 끌려갔습니다. 그곳에서 이방인의 학문을 배우고, 바벨론의 언어를 배우고, 강제로 바벨론식 이름을 사용하게 만들고, 우상 숭배한 제물들을 먹게 하는 상황에서 다니엘은 본인의 영적인 정체성을 지키기 위해서 뜻을 정했습니다. 그냥 기도 한번 해보고 상황이 그렇게 풀리지 않으면 말고. 이렇게 쉽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다니엘은 고집스럽고 유난스럽게, 본인의 믿음을 지키고자 뜻을 정했습니다. 그리고 본인이 정한 뜻을 믿지 않는 사람으로 하여금 불편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지혜롭게 중재안을 제시했습니다. 본인을 관리하는 환관장의 감정이 상하지 않도록 정중하게 요청했고, 열흘 동안 채식해서 일어나는 변화를 시험하는 방안을 제안했습니다. 단순하게 한번 기도하고 끝. 아니면 말고. 안 되면 하나님 책임. 이런 식으로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본인이 할 수 있는 최선의 최선을 다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우리 화평의 성도님들, 성도님들은 다니엘과 같은 인생을 살아가기를 원하십니까? 성도님들의 자녀들이 다니엘과 같은 큰 인물이 되기를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먼저 다니엘과 같이 하나님 앞에서 뜻을 정하시기 바랍니다. 또 자녀들로 하여금, 하나님 앞에서 택함받은 자녀로서의 정체성을 지켜내기 위해서 뜻을 정하도록 안내해 주시기 바랍니다.
또한 뜻을 정하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이를 지켜내기 위해서 치열하게 고민하시고, 그 어떠한 어려운 일을 만나더라도, 믿지 않는 사람들과의 갈등 관계 속에서 상대방의 감정이 상하지 않도록 주의하며, 상대를 존중하면서 갈등을 극복해 내시기 바랍니다.
이러한 일들이 우리 삶에 일어나려면, 무엇보다 교회 내에서의 생활이 뒷받침되어야 합니다. 한번 생각해 보세요. 교회에서 신앙생활하다보면, 크고 작은 감정 문제가 얼마나 많이 발생합니까? 너무나 사소한 작은 일에도 감정이 뒤틀리면 얼굴 쳐다도 보기 싫고, 옆자리에 앉는 것은 상상도 하기 싫거니와, 근처에 가기도 싫지 않습니까? 믿는 사람들끼리의 관계도 그러한데, 사회에서 믿지 않는 사람과 관계를 맺을 때, 신앙의 정체성을 보존함과 동시에 좋은 관계를 어떻게 유지할 수 있겠습니까?
다니엘을 닮는 것? 다니엘과 같은 인생을 살아가는 것? 다니엘처럼 성공하는 것? 말은 쉽습니다. 말은 좋습니다. 하지만 신자로서의 책임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알아서 다해주시기만을 바라는 것은 건강하고 바른 신앙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오늘날 다니엘 1장에서 역사하신 것과 마찬가지로 동일하게 역사하십니다. 우리가 우리의 소임을 다할 때, 하나님은 우리를 선한 길로 인도해 주십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서 사과나무 아래에 누워서 입 벌리고 있으면, 입에 들어가는 것은 사과가 아닌 먼지뿐이라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두 번째로 적용할 것은, 하나님께 긍휼히 여겨주시기를 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일차적으로는 하나님께서 우리 자신을 긍휼히 여겨주시기를, 이차적으로는 우리와 관련된 사람들이 우리를 긍휼히 여기는 마음을 갖기를 기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는 우리 자녀들을 위해 기도할 때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제가 고등부를 맡았을 때, 아이들에게 이런 메시지를 전한 적이 있습니다. 한국교회가 망했다고 하지만, 아직도 한국교회 주일학교에 출석하는 학생들의 숫자가 수만 명이다. 수만 명의 그리스도인 학생들 중에 하나님께서 너희에게만 축복해주실 이유가 무엇이냐. 너희 성적만 올려주셔야 하는 이유가 무엇이냐. 그런 것 없다. 성적 잘 받기 위해서 교회 나오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성적? 열매? 그런 것보다 신실한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이 먼저이다. 이런 메시지를 전한 적이 있습니다. 이는 다니엘서와 동일한 맥락입니다. 다니엘은 뜻을 구했고, 하나님은 환관장에게 긍휼히 여기는 마음을 주셨습니다. 극한의 상황까지 몰리고 나서야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하나님께 기도하자마자 신앙의 정체성을 지킬 수 있는 기적과 같은 일이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다시 말해 어려운 과정은 피할 수 없는 것입니다. 고난이 없는 열매는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우리 화평의 성도님들, 오늘은 특별히 직장인 연합구역예배로 모였습니다. 직장생활을 한다는 것은, 경제활동의 필요성을 직감하고 있다는 것이고, 치열하게 살아가는 것이 무엇인지 이미 체감하신 분들이 이 자리에 계신 것이죠.
따라서 저는 오늘 이 시간 두 가지의 도전을 드리고자 합니다. 앞서 말씀드린대로, 하나님 앞에서 뜻을 정하시기 바랍니다. 과정을 생략하고 결과만 얻기 위해서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먼저 과정을 밟아 나아가시기 바랍니다. 뜻을 정하고, 뜻을 지키기 위해서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갈 때마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간구하시기 바랍니다. 이러한 과정 가운데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역사하심을 생동감있게 체험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두 번째로 권면하는 것은, 가족 구성원들이 모두 하나님 앞에 뜻을 정하도록 안내해 주시기 바랍니다. 중보기도가 중요하다고는 하지만, 결국 본인이 신앙생활하지 않으면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우리 집사님들 권사님들 개개인이 뜻을 정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어디까지나 집사님들 권사님들 개인의 신앙의 정체성을 굳건히 하는 것에 불과합니다. 가족 구성원들은 본인이 하나님 앞에서 뜻을 정하고 또 본인 나름의 최선을 다해 살아가야만,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체험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부디 포기하지 마시고, 모든 가족 구성원들이 다니엘과 같은 인생을 살아갈 수 있도록, 첫 번째 단추인 하나님 앞에서 뜻을 정하도록 안내해 주시기 바랍니다. 이를 통해 전 가족 구성원이 삶으로 하나님께 영광올려드리며 살아가시는, 복된 인생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은혜와 긍휼이 많으신 하나님 아버지 감사를 드립니다. 다니엘 1장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허용하심과 역사하심을 깨닫게 하시고, 또 신자로서 하나님 앞에서 뜻을 정하고 살아감의 의미를 되새기게 하시니 감사를 드립니다. 직장생활하는 모든 화평의 지체들 기억해 주시고, 타협하고 합리화하는 직장생활이 아닌, 하나님께서 주시는 지혜를 발휘하여, 신앙의 정체성도 지키고, 믿지 않는 사람들과의 관계 가운데에서도 하나님께 영광올려드릴만한 직장생활을 영위하도록 주여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또한 우리 가족 구성원들 역시 다니엘과 같이 뜻을 정하여 푯대를 향해 달려가는 신실한 주님의 자녀 되기를 원하오니, 과정에 어려움이 있더라도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복음을 전파하는 통로로 사용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감사드리며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예배 부름 및 찬송가]
2023년도 하반기 직장인 구역 연합 예배를 드리시는 모든 화평의 집사님들 권사님들을 주님의 이름으로 환영하고 축복합니다. 이 시간 찬송가 412장 함께 찬송하시겠습니다.
[대표기도]
성혜영 집사님 우리를 대표해서 기도해 주시겠습니다.
[성경봉독]
이 시간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은 다니엘서 1장 1절에서 9절까지의 말씀입니다. 다니엘서 1장 1절에서 9절까지의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시작.
[헌금]
찬송가 442장 찬송하시면서 준비하신 예물 하나님께 올려드리겠습니다.
[광고]
여자 직장인 연합구역예배에 참석하신 모든 분들을 진심으로 환영하고 축복합니다. 다음 연합구역예배는 11월 12일 또는 11월 19일 주일 낮 1시 30분에 소예배실2에서 드립니다. 자세한 일정은 결정되는 대로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축도] 축도로 10월 여자 직장인 연합구역예배 마치겠습니다.
지금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무한하신 은혜와, 하나님 아버지의 지극히 크신 사랑하심과 성령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충만케 하심이, 뜻을 정하여 세상과 타협하지 않고, 삶으로 하나님께 영광 올려드리기를 소원하는 모든 주님의 자녀들 머리머리 위에, 이제로부터 영원토록 함께 있을 지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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