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평하게 하는 자의 복
Notes
Transcript
마태복음 5:1-9
한때 많이 불렀던 복음성가 중에 “세상은 평화 원하지만”이라는 제목의 찬양이 있습니다. 1절 가사가 이렇습니다.
“세상은 평화 원하지만 전쟁의 소문 더 늘어간다 이 모든 인간 고통 두려움뿐 그 지겨움 끝없네”
뭔가 아주 부정적인 표현으로 첫 가사가 되지 않습니까? 여러분, 세상은 평화를 원한다는 말에 많은 사람들이 고개를 끄덕일 것입니다. 그러나 정말 평화로울까요?
미국 역사학자인 윌리암 듀란트의 말에 따르면 역사에 기록된 3,421년 중 전쟁이 없던 해는 불과 268년에 불과하다고 합니다. 이 수치를 비율로 계산해 보면 인류 역사의 93% 기간이 전쟁이었고, 나머지 7% 기간만이 평화의 시기였다는 사실입니다. 마치 전쟁이 일상이고 평화가 이벤트인 것 느껴지지 않습니까?
이를 증명하듯이 지난 2022년 2월 24일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이후로 19개월이 넘게 전쟁은 계속 이어지고 있으며, 바로 10월 7일이었죠. 팔레스타인의 무장 단체인 하마스가 안식일 새벽에 이스라엘로 7천 발이 넘는 로켓 공격으로 어린아이와 여자를 포함한 수천 명의 민간인 사상자를 발생했습니다. 이에 이스라엘은 즉각 보복 공격을 했고 양측 수 많은 민간인 사상자가 발생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지상전과 함께 미국까지 개입하면서 제5차 중동전쟁을 예고하고 있습니다. 지금으로서는 이 전쟁의 휴전 가능성은 없어 보이고 어떻게 끝날지 아무도 모르는 상황입니다.
‘세상은 평화를 원하지만’ 그토록 원하는 평화는 쉽게 오지를 않고 전쟁의 소문만 늘어나고 있는 것이 2023년 현실 세계의 모습 아닙니까?
그런데 여러분, 이것이 국가만의 문제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 개인들도 정말 평화로워지고 싶어 하지만, 늘 다툼이 있고 갈등이 있지 않습니까?
우리 가정들도 보면 평화로웠으면 좋겠다 하지만, 가정마다 평화롭다고 느껴지는 가정이 많지는 않습니다. 두 남녀가 서로 결혼했다는 것은 깊이 사랑하거나 꽤 좋아하는 감정이 있었기 때문에 결혼했을 것입니다. 또 내 몸에서 낳은 자식인데도 불구하고 부모와 자식 간의 관계도 평화롭다기보다는 갈등을 겪고 있는 이야기를 듣기도 합니다. 심지어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도 천사와 같은 분들만 모인 곳이기 때문에 갈등은커녕 늘 따뜻하고 평화롭기만 할 것 같은데, 실제로 이 땅의 많은 교회들을 보면 다툼과 싸움의 소식이 들려올 때가 많더라는 사실입니다.
“세상은 평화를 원하지만” 평화는 쉽게 오지를 않는 것 같습니다. 이것이 이 땅을 살아가는 우리의 현실인 것이죠. 그렇다면 예수님께서는 팔복을 선포하시면서 평화에 대해 어떤 말씀을 주셨을까요? 어떻게 하면 평화를 이룰 수 있을까요? 오늘 팔복의 7번째 말씀을 통해 그 대안을 나누어 보도록 하겠습니다. 오늘 핵심 요절의 말씀인 9절 말씀을 다시 함께 읽겠습니다. (화면)
9 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우선 예수님 당시의 화평 즉 평화는 어떤 의미가 있었는가를 보도록 하겠습니다. 아시다시피 예수님 당시의 세계 패권은 로마 제국이었죠. 그러면 이 로마 제국이 추구했던 국가 개념이 뭔지 아십니까? 제국의 철학이라고도 할 수 있는 팍스로마나(Pax Romana)입니다. 여기서 ‘팍스(Pax)’가 바로 ‘평화’라는 뜻인데요. 말 그대로 ‘평화로운 로마’입니다. 참 뜻밖이죠? 여러분, 로마는 황제의 나라, 힘의 제국 아니었습니까? 그렇다면 평화는 평화인데, 힘과 억압과 통제 때문에 만들어진 모순적인 평화였습니다.
이런 로마의 통치 방식을 성경 곳곳에서 볼 수가 있는데요. 로마는 한 나라를 점령하고 나면 그 나라 시민들이 어떤 종교를 믿든지 일절 관여를 안 했습니다. 그런데 단 하나 용납하지 않는 게 있었는데, 팍스로마나 즉 로마의 평화와 질서를 깨뜨리려고 시도하면 매우 가혹하게 다스렸던 것이죠. 그래서 사도바울과 베드로를 체포하고 투옥한 이유도 그들이 기독교를 전파했다는 이유가 아니라, 기독교를 전파함으로써 야기되는 사회적 분란과 소요 때문에 사도들을 체포하고 투옥했던 것입니다.
그 예가 빌립보와 에베소에서의 소란이었습니다. 그 누구도 로마의 질서와 평화를 깨는 자는 관용을 베풀지 않고 엄하게 다스렸던 것이죠. 그래서 평화는 평화인데, 힘을 가지고 유지하는 이를 위한 가짜 평화였던 것입니다.
더 놀라운 사실은요. 오늘날 미국과 중국, 러시아를 중심으로 이 팍스로마나의 제국주의적인 평화 이념이 그대로 이어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네가 핵을 2개 가지고 있어? 그러면 우리는 세 개를 가져야지’ ‘네가 차지하고 있는 자원, 땅 전쟁을 치러서라도 내놓아야겠어.’ 이게 이 시대의 평화의 방식 아닙니까?
그런 질서와 가치관이 지배하던 세상 속에 예수님이 산 위에 올라앉아 제자들에게 가르친 진짜 평화가 무엇이냐는 거죠. 예수님 시대이든, 지금 이 시대든 강자들을 위한 거짓 평화가 판을 치는 이 시대에 진정한 평화는 무엇일까요? 우리는 이 답을 찾기 위해서 당시 예수님이 설명하셨던 평화의 뿌리인 구약 성경에서 근거를 찾아야 하는데요. 구약의 레위기 22장의 말씀을 함께 보겠습니다. (레위기 22:26~30)
26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27 수소나 양이나 염소가 나거든 이레 동안 그것의 어미와 같이 있게 하라 여덟째 날 이후로는
여호와께 화제로 예물을 드리면 기쁘게 받으심이 되리라
28 암소나 암양을 막론하고 어미와 새끼를 같은 날에 잡지 말지니라
29 너희가 여호와께 감사 제물을 드리려거든 너희가 기쁘게 받으심이 되도록 드릴지며
30 그 제물은 그날에 먹고 이튿날까지 두지 말라 나는 여호와이니라
여러분, 제가 레위기의 많은 제사 중에 유독 화목 제물을 소개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구약의 모든 제사는 사실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하는 것이죠. 그중에서도 압권은, 이 화목 제사라는 거예요. 30절을 보니까요. ‘제물은 그날에 먹고 이튿날까지 두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이렇게 감사함으로 드린 화목 제물의 고기는 그날에 먹으라고 하셨지만, 레위기 7장 15절부터 보면, 서원 제물이나 자원 제물에 대해서는 이튿날까지 먹을 수 있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화목 제물이든 서원이나 자원 제물이든 셋째 날까지 가면 안 되었습니다.
자! 여러분, 화목 제물을 왜 첫째 날 혹은 둘째 날까지만 먹게 했을까요? 지금 같으면 냉동실에 얼려두고 한 1년 먹으면 안 되나요? 당시에 화목 제물의 조건이 뭐냐면은요. 일단 흠이 없어야 했습니다. 둘째는 가정의 경제 형편에 따라 달라질 수 있지만, 재산이 있는 집은 소를 잡을 수도 있고, 경제 수준이 안되는 집은 양이나 염소를 잡을 수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양이나 염소는 모르겠는데 소를 제물로 바친 후에 그날 다 먹을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요? 제물로 드렸던 소를 각을 떠서 다 먹어야 해요. 언제까지요? 늦어도 이튿날까지. 여러분, 이것은 혼자서는 불가능한 일 아닙니까? 그런데 성경은 그렇게 다 먹으라고 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사람들과 함께 나누어 먹으면 되겠지요. 바로 여기에 화목에 대한 핵심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진짜 속뜻을 알아야 합니다. 제물로 바치는 소라면 지금으로 따지면 일 등급 한우 정도는 되지 않겠어요? 그 흠 없는 귀한 소 한 마리를요. 함께 나누어 먹으라는 겁니다. 우리 하나님은요. 이렇게 함께 하시는 걸 가장 즐거워하십니다. 그래서 아담을 만들어 놓고도 홀로 있는 게 좋지 않아도 돕는 배필을 주셨잖아요?
하나님께서는 태초부터 성부 성자 성령의 삼위일체 하나님이 함께 세상을 창조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형상대로” 지으셨다고 했습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이 함께하셨다는 말씀 아닙니까? 이것은 이 시대의 교회가 잃지 말아야 할 중요한 가치입니다.
사실 생각해 보면은요. 교회만큼 비경제적이고 비합리적인 공동체가 있나요? 기업이나 단체에서는 한두 사람, 혹은 인공지능 기술이나 무인 시스템으로 뚝딱! 해버리는 일을 교회는 무슨 절차도 이렇게 많고 사람을 모집하고 기다리고 또 채우고 하면서 일을 참 어렵게 해요. 둘이 해도 될 것을 넷 다섯이 하는 거예요.
그런데요. 여러분, 이게 하나님의 방식이에요. 느리더라도 꾸준히 함께 걷는 겁니다. 무슨 세상 적인 제도나 원칙을 내세우다 보면은요. 교회 안에 십자가의 긍휼이 사라져 버리고, 용서와 화해의 정신이 사라져 버립니다. 그냥 제도와 건물만 남을 뿐이에요. 그래서 교회 안에 세워져야 할 원칙은 오직 십자가뿐입니다. 남들은 어리석다고 하는 저 십자가에 모든 대답이 있더라고요. 함께 하는 것을 좋아하시는 하나님께서요. 당신의 아들에게만 홀로 십자가 지도록 하지 않으셨습니다.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라(막8:34)”고 하셨습니다.
여기에 놀라운 말씀의 깊이가 숨겨져 있는 것 아닙니까? 예수님의 십자가가 화해와 화목을 위한 상징인 것처럼, 화목제의 제물은 하나님과의 화해인 것과 동시에 사람과의 화목을 전제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고기를 나누다 보면 제일 먼저 누구랑 나누게 돼요? 가족들과 먼저 나누겠죠. 그다음은요? 친족들, 가까운 사람들과 나누게 됩니다. 내가 좋아하고 사랑하는 사람들과 먼저 나누게 된다고요. 그렇게 점점 나누다 보면 안 남아야 하잖아요? 그런데 화목제물은 내가 좋아하는 사람만 나눌 수가 없는 거예요. 그러기에는 양이 너무 많아요. 그래서 내가 원치 않는 관계에 있는 사람까지 이 제물을 나눌 수 있어야 진정한 화목제가 되는 거예요. 그런데 하루가 지나도록 고기가 남았다면 무슨 뜻이에요? 나랑 원수지었거나 싫은 사람에게는 나누어주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5:23-24
23 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려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이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24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
자, 예배드릴 때가 되어서 제단 앞에 제물을 드리려는데 무슨 일이 생각났어요? 형제에게 원망을 들을 만한 일이 생각 난 거예요. 그때 어떻게 해야 합니까? 예물을 제단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해를 한 후에 예물을 드리라는 말씀 아닙니까? 이런 이유로 레위기 7장의 화목 제물은 3일째까지 남으면 안 되는 거예요. 평소에 나와 좀 불편했던 사람들과도 나누고 베풀어야 합니다.
그런 차원에서 오늘은 우리가 어떻게 하면 화평하는 자가 될 수 있을지에 대해서 2가지의 지침을 나누고자 하는데요.
우리가 화평케 하는 자가 되기 위한 첫 번째 지침은 ‘진정한 자기 부인의 의미 바로 알기’입니다. 마태복음 16:24 합독
24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 아닙니까? 여러분, 예수님이 말씀하신 진정한 ‘자기부인’이라는 말은 내 성질 죽이는 게 아닙니다. 그냥 참고 사는 게 아니에요.
지난 수요일에 후배 목사님 한 분이 저를 찾아와서 함께 동역하는 심방전도사님과의 관계의 어려움에 대해 토로했습니다. 이 전도사님은 그 교회 출신이기 때문에 모든 교인들을 본인이 다 컨트롤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는 거예요. 그러면서 동료 목회자들을 무시하고 힘들게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목사로서 자기 성질을 죽이는 게 너무 힘들다는 거예요.
그래서 그 목사님께 화평하기 위해 어떤 노력을 해봤냐고 물어봤더니 그냥 참았다고만 했습니다.
여러분, 성경에서 말하는 자기 부인이라는 것은 내가 내 성질 죽이는 게 아닙니다. 오히려 나를 병들게 하고, 내 가슴에 대못을 박는 사람들 앞에서 나를 죄인 됨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내 말을 안 듣고 속을 썩이는 자식 앞에서, 나에게 면박을 주는 시댁 식구들 앞에서 나의 누추함을 드러내고 대신 회개하고 그들을 용서하고 사랑으로 섬기는 것이 진정한 자기 부인이라는 사실을 알고 계십니까?
가끔 내 배우자가, 내 자식이 십자가라고 하시는 분을 만납니다. 그런데 나를 속 썩이는 배우자가 지금 내 십자가 아닙니다. 나를 피 말리는 내 자식이 십자가가 아니라는 겁니다. 그 말 안 듣고 나를 구박하는 그를 용서할 수 없는 내 누추한 마음이 내가 져야 할 십자가인 거예요.
오늘 말씀을 잘 보세요. 예수님은 평화를 사랑하는 자가 복이 있다고 말씀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다 평화를 사랑하고 평화를 원하지만, 예수님께서는 평화를 외치는 자가 복이 있다고 하시지 않습니다. 오직 화평케 하는 자, 평화를 심는 자가 복이 있다고 하십니다.
우리가 누군가와 더불어서 화평케 되려면 내 것 중에서 무엇이든 양보하거나 버리지 않으면 안 됩니다. 사람들이 평화를 사랑한다고 하지만 실상 화평한 관계를 이루지 못하는 것은 말로만 평화를 이야기하고 그 평화를 위해 자신이 드린 화목 제물을 나누어 주려고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고기가 썩어 없어지더라도 그 원수 같은 사람과는 나눌 수가 없는 거예요.
하나님께서는 죄로 인해 하나님과의 관계가 가로막혀 있던, 더러운 죄인인 우리와의 사이를 화평케 하시기 위해 독생자인 예수님을 제물로 내놓으셨습니다. 다 나누어 주셨습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이렇게 부탁하시는 거죠. “너희도 너희 스스로를 버리고 비우고 누군가를 위해 나누어 주는 자가 복된 자이다. 그가 진정으로 내 자녀가 될 것이다” 이렇게 말입니다.
여러분, 인간의 시기, 질투, 분노와 두려움은 마음의 평안을 무너뜨립니다. 사탄은 우리의 평안을 빼앗으려는 전략을 펼칩니다.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는 게 얼마나 부담이 됩니까? 골로새서 1:20 합독
“그의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사 만물 곧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이 그로 말미암아 자기와 화목하게 되기를 기뻐하심이라”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룬다고 하셨습니다. 저의 짧은 목회경력 가운데서도 교회에서 상처를 받았다는 분들은 많이 만나봤지만, 본인이 상처를 줬다는 분은 보질 못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상처를 받으셨지만, 상처를 주시지는 않았습니다.
구원받은 우리가 ‘내가 정말 화평한 사람인가?’를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화평의 점검표가 있는데요. 내가 예수님의 보혈로 은혜를 입은 자라는 사실을 믿는다면 용서 못 할 사람이 없다는 사실입니다. 상대방이 문제인 줄 알았는데, 사실은 은혜를 잃어버린 내가 더 문제였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여러분, 이미 우리는 보너스로 사는 인생들 아닙니까? 내가 능력이 돼서 사는 게 아니라 오직 은혜로 살고 있다는 사실. 이 은혜를 아는 사람은 화평케 하는 피스메이커가 될 수 있는 줄로 믿으시길 바랍니다.
커피메이커에서는 향긋한 커피향이 흘러나오듯이 ‘피스메이커’인 사람에게서는 하나님의 평화가 흘러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지금 우리에게서는 어떤 것이 흘러나오고 있습니까? 내 삶의 영역에서 화평을 연습해야 합니다. 가정에서도, 일터에서도, 교회에서도 평화의 향기를 내뿜는 피스메이커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 힘으로는 불가능하지만, 내가 예수님의 보혈로 은혜 입은 자임을 생각한다면 할 수 있습니다.
그런 차원에서 우리가 화평케 하는 자가 되기 위한 두 번째 방법은 ‘숙제처럼 화평을 연습하기’입니다.
여러분, 숙제는 꼭 해야 하는 거잖아요? 숙제는 늘 내게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내 시간과 열정을 써야 하는 대가가 따릅니다. 우리는 화평케 하는 자가 되기 위해 숙제처럼 대가가 따르는 연습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어떤 연습이 필요할까요? 만약 누군가를 품을 수 없다면 그를 위해서 인내하면서 기도해 보십시오. 기도하시는데요. 제가 저 만의 방법을 한 가지 가르쳐 드릴게요. 그 사람의 이름을 부르지 말고 대명사로 불러 보세요. “그 사람” “그이” “그분” 이렇게 말입니다. 저는 그렇게 기도해 보세요. 내 감정이 정리되지 않은 상태에서 이름을 부르면 기도가 흐트러지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인내하며 기도하다 보면 나도 모르게 그를 향한 긍휼이 부어지게 됩니다. 커피메이커에서 향긋한 커피가 내려지듯이 평화의 마음이 쏟아져 내립니다. 이해가 되고 눈물이 됩니다. 그 다음에 내가 할 수 있는 노력을 해 보세요. 오히려 섬기고 선물도 해 보세요. 내 진심을 전해 보세요. 그러면 내 평화의 마음에 그 사람이 젖어 들게 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여러분, 억울한 일을 다 피하면서 화평하게 하는 자가 되는 길은 없습니다. 상처를 받았을 때는 참지 말고 그를 위해 기도하세요. 화평을 연습하세요. 언젠가 김양재 목사님의 판교 우리들교회를 지나가는데요. 큰 현수막에 이런 글귀가 적혀 있더라고요. “최고의 복수는 용서입니다”
여러분, 어떻게 생각하세요? 행복한 부부의 비결은 배우자를 끊임없이 용서하는 것입니다. 일단 용서하기로 했다면 나머지는 다 하나님께 맡겨야 합니다. 용서하려는 그 마음조차 하나님께 맡겨야 합니다. 만일 누군가를 용서하고 나면은요. 그동안 나를 묶고 있었던 죄책감들이 사라지고 말 것입니다. 내면의 깊은 곳에서부터 평안과 기쁨이 밀려오고요. 이해할 수 없었던 것들이 다 이해가 되기 시작하고 거짓말처럼 용서하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십자가의 용서를 경험한 우리는 이제 화목 제물을 이튿날까지 넘겨서는 안 됩니다. 남겨 두어서는 안 됩니다.
여러분, 이 세상에 참된 평화가 있을까요? ‘화평’이라고 번역이 된 히브리어가 ‘샬롬’이거든요. 우리 다 예배 시간에 샬롬이라고 인사를 하는데, 여러분 언제 평안하십니까? 건강 검진을 받았는데, 모든 몸의 기능이 정상이라고 하면 마음이 평안하죠. 통장이나 지갑에 현금이 두둑할 때도 평안합니다. 국가들끼리 전쟁 상태에 있다가 종전이 되면 평화가 임하죠. 경치가 좋은 곳, 자연이 잘 보존된 곳에서 휴식을 취할 때 평안하기만 합니다.
그런데 이런 평안은 그 조건들이 유리병이 깨지듯이 산산조각이 나면 모두 사라지고 말 평안입니다. 건강할 때 누렸던 샬롬은 건강이 악화되면 사라지게 됩니다. 돈 때문에 누렸던 샬롬도 돈이 떨어지면 완전히 사라지고 맙니다. 경치 좋은 곳에서 휴가를 보내며 누렸던 샬롬도 다시 일상으로 복귀하고 나면 사라지고 맙니다.
모든 것이 진동하고 질병과 가난과 다툼이 끊이지 않고 전쟁과 테러와 범죄의 소식들로 불안하고 두렵기만 한 세상을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들로서는 참 평안을 누리기가 참 어렵지 않습니까? 그래서 우리 주님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요한복음 14:27 합독
27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요20:19]
19 이날 곧 안식 후 첫날 저녁때에 제자들이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모인 곳의 문들을 닫았더니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주님이 내 마음에 임하셨을 때 참된 평안이 있는 줄로 믿습니다. 참된 화평, 참된 평화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만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화평을 이튿날까지 미루지 말고 나누어 주면서 화평하게 하는 자가 되라고 하십니다. 왜? 화평하게 하는 자가 하나님의 아들이기 때문입니다.
만나교회 김병삼 목사님이 그런 말씀을 하시더라고요.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불림을 받는 자들은 믿음과 신뢰와 평안 가운데서 또 다른 평화를 만들어 가는 사람이다. 하나님과의 회복된 자가 누리는 축복이 바로 평화를 만들어 가는 사람이다.”
참 옳은 말씀이죠? 우리 모두 이 평화를 누리며 평화를 만들어 갈 수 있는 하나님의 자녀가 다 되길 소망합니다.
죽음보다 강한 사랑 손양원 목사님의 이야기를 모르는 분이 안 계실 겁니다. 잘 아시다시피 손 목사님께서는 당신의 두 아들을 살해한 살인범이 공개처형을 당하기 직전에 구해내어 양아들로 삼으신 분이죠. 그 당시 손 목사님께 주신 말씀이 마태복음 5장 44절입니다. (화면)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원수를 용서하는 데 그치지 않고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을 지키기 위해 결심한 손 목사님의 행동은 세상에 없던 ‘화평하게 하는 자’였습니다.
당시 손 목사님의 장녀였던 손동희 권사님께서 아버지를 원망하며 호소했다고 합니다. “용서하면 용서했지, 아들로 삼는다는 말은 무슨 말입니까? 내 두 오빠를 죽인 원수가 어떻게 나의 오빠가 될 수 있습니까? 하늘 아래 이런 일은 있을 수가 없습니다. 아버지 제발 이러지 마세요. 이렇게까지 하지 않으면 예수를 못 믿는 거냐?” 아버지께 소리를 쳤습니다. 그때 손 목사님이 그러셨습니다.
“동희야, 성경 말씀을 자세히 보거라. 예수님 말씀에 원수를 사랑하라고 했잖니? 용서만 가지고는 안 된다. 사랑하라고 했으니 사랑을 하려면 아들로 삼아야 하지 않겠니?” 그렇게 안재선 씨는 손양원 목사님의 아들이 되었습니다. 손동인, 손동신을 죽인 안재선이 손재선이 되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그 안재선 씨의 아들이 목사가 된 사실을 아십니까? 안경선 목사님이라는 분이신데요. 안 목사님이 어느 날 ‘사랑의 원자탄’이라는 손양원 목사님에 관한 책을 읽게 되셨습니다. 책장을 얼마 넘기지 않아 여순반란사건이 나오고 동인과 동신 두 아드님이 순교하시는 내용을 읽게 됩니다. 그러면서 보게 된 ‘안재선’이라는 이름 석 자는 더 이상 그 책을 읽어 내려갈 수 없게 만들었다고 합니다. 이분이 뒤늦게 아버지에 대한 비밀을 알게 된 거예요. 그렇게 아버지의 진실을 알게 된 후에 너무도 괴롭고 힘들었던 시간을 보내시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두 아들을 무참히 살해한 아버지를 손양원 목사님께서 용서하셨을 뿐만 아니라, 아들로 삼는 그 사랑 때문에 다시 일어설 수 있었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이 안경선 목사님이요. CBS의 <새롭게 하소서>라는 방송에 출연하셨을 때 방송 제목이 뭔지 아십니까? “나는 용서의 열매입니다” 심지어 이분이 손양원 목사님 기념관의 관장이 되셨거든요. 손양원 목사님의 정신을 이어받아 용서와 사랑을 널리 전하는 자가 되고 싶으시다는 거예요. 오직 용서와 사랑만이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다는 것을 그가 그의 아버지를 통해 양조부이신 손양원 목사님을 통해 배웠기 때문입니다. 이분도 성은 안氏이지만, 그날 이후로 안경선이 아닌 손경선 목사님이 되었습니다. 손양원 목사님의 양손자가 되어서 그분으로부터 받은 사랑을 널리 전하는 자가 되기로 결심한 것입니다.
손양원 목사님과 평양신학교 동문이셨던 故방지일 목사님께는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교회를 세우러 오신 게 아닙니다. 예수님은 나를 위해 죽으려고 오셨어요. 그러니 오른뺨을 때리면 왼뺨도 대주어야 하지요. 이것이 신앙의 기본 아닙니까? 내 친구 손양원 목사는 그대로 살았던 사람입니다.”
여러분, 내가 하나님의 자녀라는 증거는 교회 가서 열심히 봉사하고 주일성수 하는 것으로 드러나지 않습니다. 그것이 신앙이 기본이 아니라, 손양원 목사님처럼 사는 게 신앙의 기본이래요. 내 오른뺨을 때리면 왼뺨도 대주는 것이 말씀대로 사는 거라고 하십니다.
그러나 저도 그렇고 우리가 손양원 목사님처럼 사랑의 원자탄이 되어서 살기는 어려울 겁니다. 그렇더라도 진노의 자식이었던 나를 위해 십자가에서 피 흘리심으로 화목을 주신 하나님의 구원하심과 은총을 경험한 사람들이라면, 손양원 목사님처럼은 아니더라도 적어도 손 목사님의 그 사랑을 널리 전하고 싶었다던 안경선 목사님처럼은 살아갈 수는 있지 않겠어요?
그러니 이제 여러분 스스로에게 이렇게 말씀하세요. “주님, 저는 용서의 열매입니다” “주님과 화목했으니 이제 화평하게 하는 자가 되겠습니다” “주님께 드린 화목제물을 이튿날까지 두지 않고 내 뺨을 때린 이에게도 전하는 용기를 제게 주십시오” “평화를 흘려보내는 피스메이커가 되게 해 주옵소서”
이런 믿음의 고백이 또 화평하게 하는 자의 복이 우리 성도님들의 삶 가운데 가득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찬양 : 보혈을 지나
❙합심기도
여러분, 우리 이제 함께 기도하시는데요. 여러분들은 누구에게 화목제물을 나누어 주셔야 합니까? 우리는 모두 용서의 열매입니다. 더 미루지 말고 평화를 흘러보내세요. “주님, 어렵지만 주의 보혈을 의지하며 화평하게 하는 자가 되겠습니다. 제게 용기를 주시옵소서!” 이 시간 오늘 주신 말씀의 은혜를 기억하며 주님의 이름으로 한 번 크게 부르시고 함께 통성으로 기도하시겠습니다.
❙마침 기도
살아 계셔서 언제나 우리와 함께 하시는 아버지 하나님!
“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능력으로 구원의 은혜를 입은 우리가 용서하지 못할 사람이 있을까요? 은혜를 받고 보니 상대방이 문제가 아니라, 내가 더 문제였음을 알게 됩니다. 보너스로 사는 인생이었는데, 한 평생 살아가면서 누군가와 트러블메이커로 사는 인생이 아닌 평화를 흘러보내는 피스메이커의 삶이 되길 원합니다. 우리 하름교회가 그런 화평케 하는 자들이 모인 평화의 공동체가 되길 원합니다. 진정한 자기부인이 무엇인지를 깨닫고 화평을 숙제처럼 연습하며 화평을 이루기 위한 작은 노력들을 해가는 믿음의 삶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모든 것을 주님께 맡겨드리며 사랑이 많으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축도
이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크신 사랑과 성령님의 교통하심이, 오늘 말씀으로 더욱 화평하게 하는 자가 되어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복을 누리길 다짐하는 사랑하는 교우들 머리 머리 위에 지금부터 영원히 함께 계시기를 간절히 축원하옵나이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