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가 죽음 앞 가족으로의 부르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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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16:26–27 (NKRV)
26 그 날에 너희가 내 이름으로 구할 것이요 내가 너희를 위하여 아버지께 구하겠다 하는 말이 아니니
26 그 날에 너희가 내 이름으로 구할 것이요 내가 너희를 위하여 아버지께 구하겠다 하는 말이 아니니
27 이는 너희가 나를 사랑하고 또 내가 하나님께로부터 온 줄 믿었으므로 아버지께서 친히 너희를 사랑하심이라
27 이는 너희가 나를 사랑하고 또 내가 하나님께로부터 온 줄 믿었으므로 아버지께서 친히 너희를 사랑하심이라
M1 : 본문의 사건을 전개하라
M1 : 본문의 사건을 전개하라
예수님은 성경의 중심입니다.
성경은 구약과 신약으로 구분되죠. 구약은 “옛 언약”이라는 의미이고 신약은 “새 언약”이라는 의미죠.
그 언약의 책이 성경입니다.
그 구약과 신약을 구분짓는 계기가 되는 분이 바로 예수님입니다.
그리고 구약과 신약의 중심이 되는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죠.
그래서 구약은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말하고, 신약은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말하고 있습니다.
성경의 중심 주제는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리고 그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의 이야기는 복음서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성경의 중심 주제가 예수 그리스도라면, 예수 그리스도의 이야기의 중심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입니다.
십자가에서 예수님이 죽으시고 부활하신 이야기는 예수 그리스도 이야기의 중심입니다.
왜냐하면 십자가에서 예수님이 모든 언약을 완벽하게 성취하셨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모든 언약을 다 성취하신 십자가 이야기의 한 부분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모든 언약을 다 이루시죠. 그 십자가에서 못 박히신 상태에서 하신 예수님의 말씀이 바로 오늘 본문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언약을 성취하시죠. 그런데 그 언약의 내용이 한 문장, 한 단어로 설명할 수 있는 깊이가 아닙니다.
정말 많은 것들을 성취해내십니다.
오늘은 그 많은 성취해내신 것들 중 한 가지 부분을 이야기하려고 합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계십니다. 상상해보십쇼. 그 황량한 골고다 언덕에 십자가에 못박히신채로 계신 예수 그리스도를요.
그 양 옆에는 유대인 최악의 범죄자 두명이 있습니다. 그리고 중앙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박혀 계십니다.
그 상황에서 마지막 유언과 같은 말씀으로 죽으시기 전에 말씀을 남기십니다.
그 말씀은 바로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를 사랑하는 제자인 요한이 어머니로 섬기라는 유언이었습니다.
요한복음 19:27 (NKRV)
27 또 그 제자에게 이르시되 보라 네 어머니라 하신대 그 때부터 그 제자가 자기 집에 모시니라
27 또 그 제자에게 이르시되 보라 네 어머니라 하신대 그 때부터 그 제자가 자기 집에 모시니라
제자 요한에게 “네 어머니라”라고 말씀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이제부터 어머니로 모시라는 말씀인 것이죠.
가족이 아니지만, 가족으로 대하고, 정말 어머니로 모시라는 예수님의 명령이었습니다.
M2 : 본문의 위기를 보여주라
M2 : 본문의 위기를 보여주라
도대체 예수님께서 이런 유언을 하신 이유는 무엇일까요?
아마도 예수님의 어머니인 마리아의 남편인 요셉이 죽었을 것이라는 점은 확실합니다.
요셉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어머니 마리아를 요한에게 모시라고 하는 것은 뭔가 이상한 말씀입니다.
실제로 초대교회 전승에 따르면, 그것을 성경보다 믿어서는 안되지만 성경에 정확히 기록되어 있지는 않는 가운데 우리는 참고할 수 있는데
요셉은 예수님의 공생애 생활 전 즉 예수님이 서른 살이 되시기 전에 돌아가셨다는 전승이 있습니다.
우리가 요한복음 초반부에 가나 혼인 잔치에서 마리아가 예수님을 인간적 아들인 예수로 많이 의지했던 것을 살펴보면 더 그 전승이 설득력 있어지죠.
그러면 예수님은 이제 혼자 남을 마리아가 걱정돼서 요한에게 가족으로 받아들이라는 명령을 했을까요?
그런데 의문이 남습니다. 왜냐하면 성경은 모든 것들을 적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특히 요한복음은 요한이 강조하는 이야기들을 적은 책입니다. 요한의 나름의 신학이 담긴 책인거죠.
그런데 거기서 굳이 이 말씀을 기록한 것은, 심지어 가장 이 책의 클라이막스인 십자가 죽음 직전에 이 말씀을 기록한 것은 분명한 이유가 있는 것이죠.
어쨌든 예수님이 이 말씀을 하신 의도에 대해서는 단순히 혼자 남을 어머니를 위한 “효”를 행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행위라는 점은 아닐 것이다라는 소결론만 남겨놓은채 계속 본문에 대해서 얘기하려 합니다.
여러분 예수님이 마리아를 요한에게 가족으로 받아들이라고 했을 때 이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이 명령은 요한뿐만 아니라 마리아에게도 쉽지 않은 일인 것입니다.
먼저 요한에게 쉽지 않은 이유는 무엇일까요?
우리는 예수님이 부활하신다는 결론을 알고 있기 때문에 큰 문제가 없을 수 있지만, 사실 당시 제자들은 예수님이 부활하실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예수님을 부인하죠. 다른 제자들은 부활을 기대하지 않고 각자 마을에서 자신의 생애를 위한 일을 했습니다. 이것이 성경의 기록입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실 것이라는 것을 모르는 상태에서 요한은 예수님의 죽음을 맞이하게 됩니다.
이제 예수님이 죽으시면 예수님을 죽인 유대인들은 남은 제자들도 처형하거나 처벌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을 죽인 유대인들에게 예수님은 그저 잘못된 가르침을 주는 이단이었기 때문입니다.
그에게 가르침을 받은 제자들은 척결 대상이죠.
요한은 자기 자신의 목숨도 확실치 않은 상태에서 마리아를 가족으로 받아들이고, 함께 생활해야 합니다.
그리고 또 쉽지 않은 점은 무엇인가요? 당시 과부는 혼자서 경제 활동을 할 수 없고, 정말 빌어먹는 것과 같은 생활을 합니다.
룻기를 통해서 어렴풋이 우리가 알 수 있잖아요.
그러니까 요한에게 마리아를 가족으로 받아들인다는 것은 아무런 경제적 활동을 할 수 없는 식솔 하나가 더 느는 것 뿐입니다.
자신의 목숨도 확실치 않은 상태에서 부양할 가족 하나가 더 는다는 것은 절대 쉬운 일이 아니죠.
그러면 마리아에게 쉽지 않은 이유는 무엇일까요?
먼저 마리아는 과부가 되어버립니다. 그나마 자신의 아들인 예수가 있었는데 그마저 죽음을 맞이하게 됩니다.
이 상황 자체가 정말 힘든 상황이죠.
만약 요한이 자신을 정말로 가족으로 잘 받아들인다면 다행이겠지만 그마저도 확실치 않습니다. 요한이 받지 않을 수도 있거든요.
혹은 요한이 자신을 가족으로 받아들인다고해도, 당분간은 예수님을 존경한 제자로서 잘 부양할지 몰라도, 앞으로 기한이 길어질수록 요한의 그 마음이 변하지 않을 것인가에 대한 확신도 없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마리아는 자신의 삶에서 자신의 의지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막연한 상황입니다. 자신의 삶은 이제 자신을 부양할지 안할지도 모르고, 부양하더라도 자신을 끝까지 부양할지 확실치도 않은 그 불확실한 요한의 가정으로 속해지는 것입니다.
결코 쉽지 않은 상황인 것이죠.
그 가운데 마리아를 어머니처럼 모시기로 결정하고 요한이 마리아를 모시는 것과 마리아가 요한의 가정 가운데로 들어간다는 것은 어떤 의미를 가지나요?
서로에게 부담스럽고 어려운 면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가족으로 받아들인다”라는 의미이죠.
나에게 없었던 새로운 가족 관계가 생기는 것입니다.
만약 정말로 그 새로운 관계를 받아들이려고 한다면 위험부담을 모두 감수하고 관계를 형성하게 되겠죠.
M3 : 본문의 사건을 오늘날로 연관하라
M3 : 본문의 사건을 오늘날로 연관하라
사회라는 것의 정의가 무엇일까요? 제가 국어 사전을 찾아보니까 이렇게 정의하더랍니다.
“공동생활을 영위하는 모든 형태의 인간 집단. 가족, 마을, 조합, 교회, 계급, 국가, 정당, 회사 따위가 그 주요 형태이다.”
공동생활. 즉 우리의 용어로 말하면 “공동체”라고 할 수 있겠죠.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은 사회를 이루며 살아가는 즉, 공동체를 이루며 살아가는 곳입니다.
그 공동체는 무엇으로 연결되어 있을까요? 바로 “관계”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런 관계들 가운데서도 특별히 “가족”이라는 관계는 사회의 가장 기본 단위의 관계라고 말하죠.
어떤 세상이라도 사실 가족이라는 공동체가 없으면 그 어떤 공동체도 존재할 수가 없습니다.
부부가 가족을 이루고 자녀를 낳아서 시작되지 않았으면 사회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 가족 관계라는 기본 관계를 시작으로 인간은 번성하였고, 사회가 이루어졌습니다.
가족이라는 관계를 시작으로 마을, 나라와 같은 공동체 뿐만 아니라, 학교, 직장도 다 이루어지는 것이죠.
이것이 바로 우리 사회의 구성 원리이죠.
M4 : 본문의 위기가 오늘날의 위기임을 느끼게 하라
M4 : 본문의 위기가 오늘날의 위기임을 느끼게 하라
그런데 현대 사회는 이 관계들로 이루어진 공동체가 그 의미를 잃어가고 있습니다.
심지어 많은 사람들이 “나”에게 가장 큰 관심을 쏟고 살아가지만, 나와 관계 맺고 있는 공동체, 그 관계에 대해서는 큰 관심을 쏟고 있지 않습니다.
이 세상에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나”이죠. 이게 현대인들을 대표하는 슬로건입니다.
그리고 이제 관계에 대한 많은 의구심을 가지게 되었죠.
내가 가정을 위해서 정말로 희생해야 하는가? 내가 속한 공동체를 위해서 희생해야하는가? 아니, 정말로 공동체라는 것이 필요한가?
직접 이렇게 생각하진 않을지라도, 사회 현상과 결과들은 정말 이런 의구심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에 대해서 대변해줍니다.
금쪽같은 내새끼라는 프로그램이 있습니다. 어린 아이들 중에 뭔가 문제가 있는 아이들이 많이 나오죠.
그 아이들을 보다보면 어떤 때는 참 안타깝고, 솔직한 마음으로는 화가 날 때도 있죠?
그런데 제가 그 프로그램을 종종 보면서 정말 마음 아팠던 것은 아이들의 행동이나 상태가 아닙니다.
그 가정의 상태입니다. 실상 아이의 문제이기보단 부모와 가정 안의 불안정한 모습이 아이의 행동에 투영된 것 같은 모습을 보잖아요.
그런데 그 안에 어떤 마음을 보게 되냐면, “내가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이기심”이 중심이 되는 것을 종종 보게 되는거죠.
가정 관계의 중심은 “사랑”이잖아요. 그 사랑의 숭고한 가치는 희생이라는 점이고, 부모는 자녀에게 자신의 희생을 감내하는 그 사랑으로 그 관계가 이루어지는데, 이제 우리 세대는 그 희생을 안하는 세대가 된 것입니다.
자녀는 부모의 희생하는 사랑을 받고 양육되어집니다. 그것을 통해 가정 관계는 건강한 관계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정말 우리 세대는 그렇지 않게 된거죠.
사회의 가장 기본단위라고 말하는 가정에 이런 모습이 생겨나고 있습니다. 이제 관계를 중심으로 한 공동체의 의미는 퇴색되고 있습니다. 사람과 사람 간의 정말 건강한 관계는 찾기 힘들어졌습니다.
만약에 지금 이 시대 풍조에 속에서 요한이 살았다면, 그리고 예수님이 어머니 마리아를 받아들이라는 마지막 유언을 듣게 되었다면
그리고 요한이 예수님의 제자라고 생각하지 않고 이 시대 속을 살아가는 평범한 사람에 불과했다면 과연 요한은 어떤 선택을 했을까요?
자신의 가족 관계조차도 나를 정말 중요하게 여겨서 가족을 위한 희생을 해내지 못하게 하는 세상 속에서 요한은 예수님의 명령을 따를 수 있었을까요?
요한은 마리아를 가족으로 받아들이기 결코 쉽지 않은 상황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시대는 그 쉽지 않은 상황을 거의 불가능하게 만드는 “나 중심의 의식”이 강렬합니다.
우리는 그런 시대 속에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바로 “나 중심의 의식”이 무엇일까요? 우리는 나 중심의 의식을 바로 죄의 본성이라고 말하며, 죄인의 특성 중 하나로 말합니다.
죄는 모든 관계를 순식간에 가장 낮은 위치로 끌어내려버리고, 나를 가장 높은 위치로 올려서 자신 중심의 의식을 가지게 합니다.
최초의 인류가 죄를 짓자 가장 먼저 일어났던 일은 무엇일까요? 바로 하나님과의 관계의 단절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된다는 것은 곧 모든 인류와의 관계에서 절대적인 평안을 제공하던 평안의 안식처인 하나님을 잃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으로부터 모든 영혼의 질병이 시작되고, 인간의 관계는 하나님 중심의 영역에서 나 중심의 영역으로 변화가 시작되는 것이죠.
하나님과의 관계의 단절은 결국 내 주변 사람들과의 관계에서도 결코 화평한 관계를 이룰 수 없게 만듭니다.
왜냐하면 내 주변 사람들을 사랑하는 그 사랑의 원천이 바로 하나님으로부터 오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의 원천이신데 그 사랑을 공급받던 관계가 깨어져버렸습니다.
그러면 인간은 어떤 관계와도 화평한 관계를 만들어낼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 중심에서 나 중심으로 그 인식의 변화가 시작되고, 이제 죄로 인해서 그 어떤 관계도 화평할 수 없는 불행의 시작이 진행 된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날 가정을 포함한 모든 관계들이 문제가 생기는 것은 본질적으로 바로 “죄로 인한 하나님과의 관계 단절”로부터 시작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마리아와 요한이 가정으로 받아들이기 어려워지는 그 이유조차도 본질적으로 “죄로 인해서” 생기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제가 언급했던 그 모든 문제들은 죄로 인해서 생긴 것입니다.
M5 : 본문에 나타난 구원자 하나님과 믿음의 반응을 보여주라
M5 : 본문에 나타난 구원자 하나님과 믿음의 반응을 보여주라
오늘 본문에서 가족 관계가 되는 것의 어려움들은 본질적으로 죄 때문에 시작되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는 다시 이 질문으로 돌아올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왜 요한에게 마리아를 어머니로 모시라고 하였는가?”
“굳이 왜 그 중요한 성경의 중심인 십자가 죽음 앞에서 이 말씀을 하셨는가?”
“분명한 어려움이 있음을 예수님께서 아셨음에도 단순한 부탁이 아닌 명령으로 하셨는가?”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예수님의 말씀의 의도를 알기 위해선 십자가 사건이 우리가 계속해서 얘기하는 “공동체 관계”에 미치는 영향을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이 죄로 인해서 무너진 그 공동체들의 관계에 무슨 영향을 미칠까요?
먼저 예수님의 십자가 사역은 관계의 깨어짐의 본질적인 문제를 해결하십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역이 가장 먼저 영향을 미친 것은 모든 죄를 해결하는 겁니다.
그러면 이 죄를 해결하는 것이 공동체 관계에 있어서 어떤 영향을 미칩니까?
죄로 인해서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돼서 공동체의 관계를 건강하게 형성할 수가 없었는데, 죄가 해결되면 어때요?
그 관계를 건강하게 형성하는 하나님의 사랑을 개개인이 공급받게 됩니다.
그렇다면 이제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받아들이고 죄를 해결받은 성도들은 타락 이전의 형성할 수 있었던 건강한 관계를 가질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죄를 해결받은 성도들이 이제 하나님의 사랑을 공급받고 그 사랑으로 관계를 형성할 수 있는 것이죠.
그러면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이 결국 인간 관계에 있어서 어떤 영향을 미치는 거에요?
죄로 인해 생긴 자기 중심성을 하나님의 사랑으로 해결하고, 진정한 사랑의 관계를 형성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십자가에서 예수님이 공동체 관계에 대해서 이루신 엄청난 쾌거입니다.
우리는 성도입니다. 우리가 성도라는 말은 우리는 깨어진 관계를 회복할 수 있는 자들이라는 것입니다.
이 세상의 수많은 깨어진 관계들. 그것은 죄로부터 시작되죠. 그 관계들을 해결해나가는 사람들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 이제 본문의 요한과 마리아를 얘기하면, 예수님이 십자가 죽음 앞에서 마리아를 요한에게 어머니로 모시라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요?
예수님은 이런 말씀을 하신 것이죠.
“이제 내가 십자가에서 죽음으로 모든 죄를 해결할 것이다. 그러므로 죄로 인해 자기 중심성으로 진정한 사랑의 관계를 형성할 수 없었던 너희는 이제 진정한 관계를 만들 수 있다.”
이겁니다.
그런데 한 가지 더 중요한 것은 이겁니다.
그 진정한 사랑의 관계를 무엇으로 예수님이 표현하시죠? “어머니와 아들의 관계” 즉 “가족 관계”로 표현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가족 관계로 표현하신 이 회복된 관계는 결국 “교회 공동체”를 이루게 됩니다.
초대교회 공동체는 “가족 공동체”입니다. 그런데 단순한 가족 공동체가 아니죠. 진짜 사랑하는 가족 공동체가 되는 것입니다.
죄를 해결받은 성도들이 모인 가족 공동체가 바로 교회입니다.
그래서 이 본문은 “교회 공동체는 곧 가족 공동체이다.”라는 말을 하고 있습니다.
M6 : 동일한 구원자 하나님과 우리에게 필요한 믿음의 반응을 제시하라
M6 : 동일한 구원자 하나님과 우리에게 필요한 믿음의 반응을 제시하라
여러분 지금 옆에 계신 우리 청년부 일원, 지체들.
가족인 거에요.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인해서 우리가 그 죽으신 값으로 가족이 됩니다.
우리 예수님을 믿는 성도들의 공동체는 정확히 말하면 먼저 “교회”이죠.
그런데 이 교회 공동체는 곧 “가족”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거에요. 마리아를 가족으로 받아들이라고. 근데 그것은 사실 교회 공동체거든요.
예수님이 요한과 마리아에게만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바로 그 당시 초대 교회에게 말씀하신 것이고, 우리에게도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여러분 지금 예수님이 우리에게 하시는 말씀은 바로 이것입니다.
“나를 믿는 너희 교회 공동체는 지금 나를 믿는 너희 서로를 가족으로 받아들여라”라고 말하는 겁니다.
하나님의 가족된 교회는 어떻습니까? 이제 자기 중심성을 버리고, 그 공동체의 지체를 가족으로 받아들일 때 예상되는 모든 희생해야하는 것들을 기꺼이 희생하고, 가족 공동체로 받아들입니다.
요한과 마리아가 가족이 되었을 때 예상되는 모든 문제들이 존재합니다.
그것이 우리에게도 똑같이 존재합니다.
우리가 우리 옆에 있는 지체들을 받아들일 때 생기는 어려움이 정말 많지 않습니까?
나랑 너무 다른 이 사람과 함께 가족 관계를 맺으면, 이 사람으로 인해서 내가 상처 받을 때도 있을 것이고, 이 사람에게 내가 맞춰야하는 것도 있을 것이고, 이 사람을 위해서 내가 희생해야하는 것도 엄청나게 많을 겁니다.
만약 죄인이어서 자기 중심성에 의해 관계를 맺으려 한다면 그 모든 희생들을 감수하지 않겠죠.
그런데 이제 교회 공동체가 된 우리는 그것을 해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으로부터 공급받는 진정한 사랑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이제 조금 더 확장된 이야기를 해봅시다.
가족 공동체는 우리로만 끝나지 않아요. 이제 앞으로 이 교회 공동체에 속하게 될 미래의 모든 영혼들도 가족 공동체가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은혜로 부르시고 구원하실 영혼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그 영혼들을 오늘 태신자라고 작정하고, 그들을 우리 가족 공동체로 초대하고, 그 영혼을 향해 전하고, 사랑할 거에요.
그런데 그 과정 가운데 우리가 그 새로운 사람들을 가족 공동체로 데리고 오려고 할 때 생기는 모든 희생할 것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먼저 그들에게 연락해야겠죠. 여러분 연락하고, 얘기하는 것 쉬울까요? 쉬운 분들도 있겠지만 다 그렇지는 않죠.
그러나 우리는 연락해야하겠죠. 어떤 때는 얼굴도 잘 모르는 사람들에게 연락해야할 때도 있을거에요. 근데 우리는 해내게 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그 사랑으로 우리는 그것을 감내합니다.
또한 그들이 정말 우리 공동체 안으로 들어오게 되었을 때, 어색하죠. 그리고 어떤 분들에게 자신의 자리와 위치를 그 사람에게 내어줘야 하는 사람들도 있겠죠.
그때 여러분은 그 모든 것들을 희생할 것인가? 안할 것인가? 갈등 가운데 있게 될 겁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어떤 선택을 하시겠습니까?
여러분들이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이제 하나님의 사랑을 공급받게 된 성도라는 사실을 믿는다면, 그것을 희생해야 하는겁니다.
우리 청년 여러분.
새생명축제가 이제 금방 다가오고 있습니다. 그 새생명축제에 오게 돼서 우리 공동체에 속하게 될 그 사람들은 우리의 가족입니다.
이방인이 아닙니다. 외부인이 아니에요. 우리의 가족이에요.
그 사실을 잊지 않으셔야 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