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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축복하라 축복하고 저주하지 말라

15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

16 서로 마음을 같이하며 높은 데 마음을 두지 말고 도리어 낮은 데 처하며 스스로 지혜 있는 체 하지 말라

17 아무에게도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모든 사람 앞에서 선한 일을 도모하라

18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목하라

19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

20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게 하라 그리함으로 네가 숯불을 그 머리에 쌓아 놓으리라

21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

팀 켈러, 당신을 위한 로마서 2 선으로 이기는 길이 있다

선으로 이기는 길이 있다

10–16절에서 바울은 그리스도인 형제자매들을 어떻게 사랑할 것인가에 대해 말했다. 이어지는 17–21절에서는 원수를 사랑하는 문제를 다루고 있다. 14–16절을 전환부로 볼 수 있는데 바울이 “너희를 박해하는 자”라고 이미 14절에서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14–16절은 우리에게 호의적인 사람들을 어떻게 대할지 뿐만 아니라 우리에게 적대적인 사람들을 어떻게 사랑할 것인지를 다룬다.

모든 권고의 기본 원리는 처음과 끝에 요약되어 있다. “아무에게도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17절),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21절). 여기서 ‘이기라’는 “제압하다”(overpower)를 의미하는 군사 용어이다. 이것은 대단히 예리하고 근원적인 통찰력이다. 악을 악으로 갚는 것은 전쟁에서 제대로 싸워 보지도 못하고 악에게 패배하는 것과 같다! 악을 물리치는 유일한 길은 해를 입힌 사람에게 선을 행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잘못한 사람을 미워하게 되면 그 사람이 이기는 것이다! 악을 이기는 유일한 길은 그 사람을 용서하고 사랑하는 것이다. 만약 ‘악’을 ‘악을 행한 사람’과 너무 동일시하게 되면, 악을 없애기 위해 악을 행한 사람을 없애야 한다고 믿게 된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악에게 좋은 일을 하게 되고 우리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악한 세력에게 조종당하게 된다.

J. R. R. 톨킨은 《반지의 제왕》에서 이러한 원리를 잘 묘사했다. 악의 왕인 사우론을 파멸시키기 위해 사우론의 반지를 사용한 선한 사람들은 그 과정에서 예외 없이 악이 되어 버렸다. 요컨대 잘못 쟁취한 승리는 모두 헛된 것이 되고 만다. 악을 이기기 위해 반지를 낀 사람은 도리어 자신이 악이 되어 악을 돕는 꼴이 되었다. 패배한 것이다.

따라서 악을 이기는 비밀은 ‘악’을 ‘악을 행한 사람’과 구분하는 것이다. 우리의 주된 목표는 용서하고 사랑하고 악을 행한 사람에게 친절을 베푸는 것이다. 이렇게 하면 두 가지 일이 일어나는데 첫째, 악이 우리를 침범하지 못한다. 악에 속한 교만과 미움이 우리를 물들이지 못한다. 둘째, 악이 더 이상 악을 행한 사람에게 침범하지 못할 수도 있다. 그는 우리의 사랑으로 마음이 유순해져 선한 영향력의 도움을 받을 수도 있다. 바울은 우리의 선한 행위와 말이 “숯불을 그 머리에 쌓아 놓”는 것과 같다고 말한다(20절). 이것은 회개에 이르게 할 수도 있다는 표현이다. 그 사람이 우리의 선한 반응을 보며 자신의 악을 부끄러워하고 괴로워하고 뉘우칠 수도 있는 것이다.

실제로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세 가지 의미로 볼 수 있다.

첫째, 악의를 가진 사람을 피하지 말라.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목하라”(18절). 누군가 우리에게 잘못했을 때 대부분은 그 사람을 피해 버린다. “나는 그들이 내게 한 잘못을 되갚지 않아. 단지 보고 싶지 않을 뿐이야.” 하지만 당신의 회피가 보복의 한 형태일 수도 있다. 악을 피하는 것이 악을 이기는 것은 아니다(이 말에는 조건이 따른다. 아래에서 설명할 것이다).

둘째, 말과 행동으로 사랑을 표현하라.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20절, 14절도 참조). 이 말은 악의를 가진 사람들에게 정중하고 친절하게 말하고 행동해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조심해야 한다! 간혹 우리는 악의를 가진 사람들을 부끄럽게 만들려는 의도로, 또는 그들의 잘못을 생각나게 하기 위해 친절을 베풀 수도 있다. 이것은 올바른 동기가 아니다. 우리는 사려 깊게 그들에게 도움이 될 일을 찾아서 하고, 또한 공손하게 말해야 한다.

셋째, 앙갚음을 하지 않는다.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19절).

그럼에도 한계선이 있다. 9절은 누군가 우리에게 죄를 짓도록 허용한다면 그것은 지혜롭고 참되게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고 말해 주고 있다. 악한 의도라고 해도 그 정도에는 차이가 있다. 지나치게 해롭고 위험한 사람일 경우 이들과 함께하는 것이 죄짓게 만드는 것일 수도 있다. 그렇다면 이들에게 ‘선’을 행하는 것은 떨어져 있는 것이 된다. 우리는 떨어져 있고 싶은 동기가 보복에 있는지 아니면 어떻게든 이들을 돕고 싶은 신중한 대응에 있는지 잘 분별해야 한다.

복음은 원수도 사랑하게 한다

바울은 우리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누군가 악의를 품고 당신에게 잘못을 범했는가? 그렇다면 당신은 이에 대해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 들끓는 복수심으로 어느 때고 무엇이든 당신이 할 수 있는 앙갚음을 할 것인가, 아니면 넓은 마음으로 그들에게 가장 좋은 일을 할 것인가?” 바울이 말하는 사랑의 법에서 면제될 만큼 심각한 핍박이나 깊은 상처는 없다고 치자. 그렇자면 실제로 누가 자신의 원수에게 이렇게 할 수 있겠는가… 하지만 바울은 우리가 정말로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1절) 산다면 이렇게 할 수 있다고 말한다. 복음만이 9–21절에 나오는 사랑의 다양한 모습대로 살게 해준다. 왜 그런가?

첫 번째, 복음은 하나님이 우리에 대해 얼마나 오래 참으셨고 지금도 참고 계신지 생각나게 해준다. 하나님은 우리가 회개하고 믿음을 가지기까지 마지막 심판을 유보하시며 오래 참으셨다(2:4). 그리고 반복되는 우리의 약점과 실패를 그리스도 안에서 용서하시며 지금도 참고 계신다.

두 번째, 복음은 우리 자신에 대해 “지혜롭게 생각”하게 한다(12:3).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믿음으로 자신을 평가해야 한다. 먼저는 세상에 존재하는 다른 모든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자신이 구원에서 멀어진 죄인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따라서 우리 앞에 있는 사람이 그리스도인이건 아니건, 훌륭한 사람이건 아니건 죄에 관해서는 모두 같다는 것을 알게 된다. 또한 우리가 죄인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이 우리를 의롭다 하셨고 영원히 사랑하신다는 것을 알게 된다.

따라서 우리는 다른 사람 앞에 아무것도 증명할 필요가 없다! 만약 복음이 없다면 유명하고 사회적으로 성공한 사람들과 어울려 자신의 가치와 유용성을 증명 받고 싶겠지만 복음 안에서는 그럴 필요가 없다. 온 우주의 하나님이 우리 아버지가 되셨고 우리를 기뻐하실 뿐 아니라 우리 안에 거하신다! 따라서 이제는 인정받을 만한 사람들과 사귀기 위해 애쓸 필요가 없다. 우리가 가장 사랑하고 닮고 싶은 분이 이미 우리 안에 계시기 때문이다! 복음을 통해 우리는 낯선 사람, 힘든 사람, 불편한 사람을 사랑할 수 있을 만큼 풍족한 자유를 얻게 되었다. 우리는 사회의 주변부로 밀려난 사람들을 존중하며 함께 잘 지낼 수 있다.

이처럼 그리스도인들은 가장 편견 없는 사랑을 할 수 있는 사람들이다. 자신의 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받아 주신 것을 알기에 인종이나 계급, 직업에 대한 편견이나 선입관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다.

세 번째, 복음은 다른 사람의 기쁨과 슬픔을 진심어린 애정으로 함께 나눌 수 있게 해준다. 그리스도만이 우리의 참된 기쁨이라면 다른 사람과 더불어 맘껏 기뻐하고 슬퍼할 수 있을 것이다. 예를 들어 무척이나 결혼을 원하는 싱글이라면 결혼하는 친구와 함께 기뻐하는 것이 쉽지 않을 것이다. 결혼이 인생의 목적이라면 더더욱 힘들 것이다. 하지만 그리스도를 참 기쁨으로 모셨다면 함께 즐거워할 수 있을 것이다.

다른 사람의 슬픔을 공감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의와 평화가 되지 않았다면 우리가 무시하거나 열등하다고 여기는 사람에 대해 공감하는 것이 무척 어려울 것이다. 하지만 복음은 우리를 겸손하게 만들고 우리 자신을 똑바로 평가하게 해준다. 복음은 우리가 하나님과 원수였을 때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셨다고 말한다(5:8). 이것을 깨닫는다면 우리가 사랑하지 못할 사람은 어디에도 없다.

공감하지 못하는 또 다른 이유 가운데 하나는 삶이 반드시 좋은 것이어야 한다는 강박 때문이다. 이런 경우 우리는 삶의 어두운 면이나 고통을 외면하고 힘든 상황을 그럴듯하게 가린다. 고통 받는 사람의 마음도 당연히 헤아리지 못한다. 만약 우리의 미래에 대한 만족과 확신을 그리스도 안에서 찾지 못한다면, 늘 환경 속에서 위안을 찾거나 그 결과로 세상에서의 힘든 삶을 거부하게 될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 복음은 우리가 사랑의 감정을 느끼지 못해도 사랑을 행하도록 해준다. 예수님도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 그 마음이 우리를 향한 애정과 사랑으로 충만하시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 순간 예수님의 사랑은 오로지 의지의 발현이었다. 예수님은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눅 22:42)라고 하실 만큼 힘드셨다. 하지만 십자가를 지시기로 결심하셨다. “그러나 내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그래서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눅 23:34)라고 말씀하실 수 있었던 것이다.

네 번째, 복음은 모든 것을 바르게 정리하실 신뢰할 만한 심판관이 우리에게 있다고 말한다. 우리는 되갚을 필요가 없다. 우리와 세상을 돌보시는 하나님이 한 치의 오차도 없이 공평하게 심판하실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갚으실 것을 알기에 우리는 자유롭게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맡길 수 있다(19절). 십자가는 하나님이 죄를 얼마나 심각하게 여기시는지, 그리고 그것을 얼마나 정확하게 심판하시는지 보여 준다. 베드로는 그리스도의 발자취를 따르기 위해 선한 일을 하다가 환난을 겪었던 그리스도인들을 향해 확신을 가지고 말한다. “욕을 당하시되 맞대어 욕하지 아니하시고 고난을 당하시되 위협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공의로 심판하시는 이에게 부탁하시며”(벧전 2:23). 복음은 우리에게 공의를 약속한다. 하지만 그것을 집행하는 것은 우리가 아님을 상기시킨다.

필요한 사람이 되고자 하는 욕망

“산 제물”(1절)로 사는 것은 쉽지 않다. 그것은 오늘날의 문화와 반대되는 삶이다. 오늘날에는 ‘자신을 사랑하라’는 심리학 혹은 처방들이 가히 전성기를 누리고 있다. 왜 그런가? 많은 카운슬러들은 여러 사례를 통해 스스로를 사랑스럽게 여기지 않는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로부터 함부로 취급 받게 된다고 말한다. 그 결과 우리 시대의 지혜는 다음과 같다. “당신이 원하는 것을 찾아 전진하라. 상호간 이익이 있다면 관계를 유지시키라. 당신이 더 많이 희생해야 한다면 그것은 건강한 관계가 아니다. 당신 자신의 가치를 더 높이 평가하라! 당신에게 필요한 것이 아니라면 무시하라!”

이러한 태도들의 문제는 상황을 너무 단순하게 본다는 것이다. 세상은 복음은커녕 다양한 형태의 죄와 자기의(自己義)도 알지 못한다. 따라서 목적과 의도를 가지고 도우려는 사람과 자발적인 사랑에서 다른 사람들을 도우려는 사람을 구별하지 못한다. ‘본인은 남을 도와주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남을 망치고 있는 사람’(enabler)이나 ‘중독된 사람에게 심리적으로 종속되어 상호 의존하게 만드는 사람’(codependent)은 자신이 유용하다고 느끼기 위해 희생하는 사람들이다.

만일 당신이 그리스도 안에서 받아들여졌다는 것을 깨닫지 못한다면, 다른 사람의 사랑을 통해 그렇게 느끼고 싶을 것이다. 그 경우 사랑하는 사람을 우상으로 만들어서 그 사람에게 싫은 말을 하지 못하게 되거나 자신이 필요한 사람이 되고자 하는 욕망에 빠지고 만다. 다른 사람들이 자신을 남용하는 것을 기꺼이 즐기고, 더 나아가 순교자적 희생으로 자신이 더 가치 있는 사람이 되었다고 느끼는 것이다. 이런 욕망이 작용하고 있다면 자신을 덜 사랑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너무 많이 사랑하고 있는 것이 문제다! 이 경우 주는 쪽도 받는 쪽도 서로를 사랑하지 않으며 상대방을 잃게 될까봐 진실을 말하지 못한다.

그러므로 9절은 10–21절을 잘못 해석하는 것을 막아 주는 경계선과 같다. 사랑하는 사람이 당신을 죄짓게 만든다면 그것은 이미 사랑이 아니다. 죄를 허용하거나 조장하는 것은 누구에게도 좋은 일이 아니다. 마찬가지로 “선에 속하라”(9절)는 의미는 자기 자신에게도 결코 죄를 짓지 말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 하나님께 불순종하는 방법으로 다른 사람들을 사랑해서는 안 된다.

요컨대, 다른 사람의 사랑이나 하나님의 사랑을 얻기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에게 이미 부어 주신 사랑 때문에 사랑해야 한다. 성경에는 우리를 위해 자신을 바친 그리스도의 사랑에 관한 많은 기록이 있다. 예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기 위해 벌거벗겨졌고 죽임을 당하셨다. 이러한 사랑 때문에 우리는 그분이 사신 대로 살고, 그분이 사랑한 대로 사랑할 수 있다. 만일 우리를 희생하고서 다른 사람을 사랑한다면 우리는 그리스도처럼 사랑하는 것이 무엇인지 이해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어서 나오는 14–21절의 말씀은 이웃과의 관계, 특히 상대하기 힘든 이웃과의 관계에 대해 말하고 있다. 이런 이웃은 대개 교회 밖의 사람이지만, 교회 안에도 그런 사람이 있을 수 있다. 교회 안이든 밖이든 우리를 괴롭히고 대적하는 자가 우리의 원수이다. 이런 원수를 어떻게 대해야 하는가 하는 것은 실제 생활에서 부딪히는 중요한 문제이다.

1) 핍박하는 자를 축복하라(14절)

바울은 먼저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축복하라. 축복하고 저주하지 말라.”고 말한다(14절). 이것이 우리를 괴롭히는 사람들을 대하는 원칙이다(마 5:43–48 참조). 여기서 ‘핍박하다’(디오코, διώκω)는 것은 원래 ‘뒤쫓다, 추격하다’의 의미를 가지고 있는데, 따라서 끈질기게, 계속해서 괴롭히는 것을 뜻한다(Bauer). 한 번 두 번 괴롭히는 것 정도야 참을 수 있지만, 계속 따라오면서 괴롭힐 때에는 참기 어렵다. 그럴 때에라도 우리는 그런 사람을 저주하지 말고 축복해야 한다고 말한다. 여기서 ‘축복하다’(율로게오, εὐλογέω)는 것은 다른 사람을 위해 하나님께 ‘복을 비는 것’을 뜻한다. 이것은 그 사람을 향한 사랑의 첫 걸음이다. 단지 참고 인내하는 것만으로는 사랑을 실천할 수 없고, 한걸음 더 나아가 그 사람을 위해 복을 빌어야 한다. 이렇게 할 때 우리는 그 사람을 사랑할 수 있는 힘을 얻게 된다.

2) 함께 즐거워하고 함께 울라(15–16절)

15절은 서로 마음을 같이 할 것을 말한다. 우리는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울어야 한다. 이렇게 해야만 참된 가족이며 지체이다. 그리고 “서로 마음을 같이 하며 높은 데 마음을 두지 말고 도리어 낮은 데 처하며 스스로 지혜 있는 체 말라.”고 한다(16절). ‘마음을 같이 한다’는 것은 원어상 ‘같은 것을 생각하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우리의 생각을 같이 하는 것이 중요하다. 특히 높은 것들을 생각하지 말고(3절 참조), 비천한 자들과 함께 어울리는 것이 중요하다. 예수님은 비천한 자들과 함께 하시고 그들의 친구가 되셨다(막 2:16; 마 11:19).

3) 악으로 악을 갚지 말라(17–18절)

바울은 또 “아무에게도 악으로 악을 갚지 말고 모든 사람 앞에서 선한 일을 도모하라.”고 한다(17절). 이것은 14절과 같은 맥락의 말씀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직접 원수 갚는 것을 금하셨다(19절). 다윗은 이 원칙을 끝까지 고수하여 큰 복을 받았다(삼상 17–31장). 그는 사울을 죽일 수 있는 기회가 몇 번 있었지만, 자기 손으로 원수를 갚지 않고 하나님께 맡겼다. 만일 그가 자기 손으로 직접 원수를 갚았다면, 그도 함께 악인이 되고 말았을 것이다.

18절은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목하라.”고 한다. 우리는 가능한 한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평하도록 해야 한다. 이것이 우리가 취해야 할 행동이다. 그러나 아무리 노력해도 안 되는 경우가 있다. 이런 경우에 대해서는 다음 절들에서 말한다.

4) 친히 원수를 갚지 말라(19–20절)

19절 초반의 “내 사랑하는 자들아”는 말은 이런 어려움에 처한 우리의 사정을 알고서 사랑으로 권면하는 것을 나타낸다. 이럴 경우에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맡기라.”고 한다(19절). 아무리 어려운 경우라 할지라도 우리가 ‘친히’ 곧 ‘우리 스스로’ 원수 갚는 것은 하나님이 금하신다.

그러면서 바울은 성경을 인용한다.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19절; 신 32:35 참조) 하나님은 각 사람의 잘잘못을 따지고 심판하신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악인을 벌하시는 것은 정당하지만, 우리가 직접 악을 갚는 것은 하나님이 금하신다.

그러면서 바울은 잠언의 말씀을 인용한다.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우라. 그리함으로 네가 숯불을 그 머리에 쌓아 놓으리라.”(20절; 잠 25:21–22) 이 구절은 많은 주석가들에게 난해 구절로 인식되고 있다. 왜냐하면 ‘숯불을 원수의 머리에 쌓아 놓는 것’은 여태까지 말한 사랑의 원리에 부합되지 않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여기의 ‘숯불을 머리에 쌓는다’는 표현을 사랑의 행위로 본다. 그러나 ‘숯불을 머리에 쌓는 것’이 사랑의 행위인지 징벌의 행위인지는 직접 자기 머리 위에 숯불을 쌓아 보면 알 것이다. 숯불은 화력이 센 뜨거운 불이다. 성경에서 ‘숯불’은 부정적인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시 18:8, 12, 13; 140:10; 욥 41:21; 잠 6:28; 겔 24:11).

그래서 많은 주석가들은 이 표현에 대해 원수들로 하여금 부끄러워하게 하여 회개하도록 하는 것이라고 해석한다(Origen, Pelagius, Augustine, Cranfield, Ridderbos, Hendriksen, Schlier 등). 곧, 계속해서 사랑을 베풀면 그 원수가 내적으로 부끄러움을 느껴서 회개하고 화해하게 될 것이라고 본다. 그러나 이 해석도 중대한 문제점을 가지고 있다. 첫째로, 이 원수가 부끄러움을 느끼고 회개하는 것은 우리의 희망 사항이기는 하지만 문맥을 볼 때 거리가 멀다. 왜냐하면 19–20절의 말씀은 우리가 우리를 괴롭히는 원수에게 아무리 사랑을 베풀고 선을 행해도 소용이 없을 때를 가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우리가 사랑을 베풀면 베풀수록 더욱 더 우리를 우습게 여기고 괴롭히는 경우를 많이 보게 된다. 둘째로, 이 해석의 난점은 ‘숯불을 원수의 머리에 쌓는다’는 것이 상대방으로 하여금 부끄러움을 느끼게 하는 것이라고 볼 수 없다는 것이다.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숯불을 머리에 쌓는 것’은 하나님의 진노의 상징이다. 흐레이다너스 같은 주석가는 이에 대해 ‘숯불을 자기 머리에 쌓는 것’은 견딜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자신의 악한 행동을 계속할 수 없을 것이라고 말하지만, 여기의 이 악한 자는 자기의 행동이 자기에게 벌을 가져올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지도 못하고 있기 때문에(깨달았다면 그런 악한 행동은 아예 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이런 해석은 아무 소용이 없다.

따라서 우리는 이 구절을 왜곡하지 말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야 한다. 곧, 우리가 우리를 괴롭히는 원수에게 계속해서 사랑을 베풀면, 그것이 결과적으로 (원수가 끝내 회개하지 않을 경우에는) 숯불을 그 머리에 쌓는 것과 같은 것이 된다는 뜻이다(Chrysostom, Theodoret, Oecumenius, Theophylact, Haldane, Schreiner 등). 물론 우리는 상대방에게 이러한 의도를 가지고 사랑을 베풀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어디까지나 상대방이 회개하고 돌아오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사랑을 베풀어야 한다. 그래서 그 사람이 자기의 잘못을 뉘우치고 돌아오면 참으로 감사한 일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회개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그 사람의 머리 위에 숯불이 쌓이게 되는 결과가 되고 만다. 곧, 하나님의 맹렬한 진노가 임한다는 뜻이다. 우리가 그토록 사랑을 베풀었는데도 불구하고 그가 더 악하게 굴면, 이 모든 것을 감찰하시는 하나님께서 마침내 진노를 발하시게 되는 것이다. 즉, 우리의 사랑의 행위가 ‘결과적으로’ 그 악한 사람에게 진노를 촉발하는 ‘계기’가 되고 만다. 우리는 이것을 다윗과 사울의 관계에서 볼 수 있다. 다윗은 무고하게 그를 죽이려고 하는 사울을 해치지 않고 끝까지 선(善)을 베풀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울이 회개하지 않았을 때, 마침내 하나님께서 진노를 발하셔서 사울이 전장에서 엎드러져 죽게 하셨던 것이다.

물론 이런 해석을 취할 때 제일 걸림이 되는 것은 ‘네가’라는 주어이다. 만일 주어가 ‘하나님’이라면 문제가 없겠지만, 숯불을 쌓는 주어가 ‘네가’로 되어 있으니 문제이다. 그러나 여기서 ‘네가’라는 것은 네가 ‘직접’ 그 사람 위에 숯불을 쌓는다는 의미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 사람의 머리 위에 숯불을 쌓지만 ‘너’는 사랑의 행위를 통해 결과적으로 그러한 진노를 불러일으키는 ‘계기’를 제공한다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다. 즉, 숯불을 쌓는 주체는 ‘하나님’이시지만, ‘너’는 그러한 일에 계기를 마련하게 되었다는 의미이다. 이처럼 실제의 행위 주체와 문법적 주어가 일치하지 않는 경우로는 마태복음 6:34이 있다. 원문에 의하면 “내일이 스스로를 염려할 것이요”라고 되어 있다. 이 말은 곧 ‘하나님’께서 내일의 모든 일을 염려하신다는 뜻이다. 그런데도 문법적 주어는 ‘내일’로 되어 있다.

5) 선으로 악을 이기라(21절)

따라서 결론은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는 것이다(21절). 우리가 악을 악으로 갚으면 결국 악에게 지고 마는 것이 된다. 끝까지 선을 베풀고 하나님을 의지하며 기도하면 악을 이기는 것이 된다. 따라서 어떤 경우에든 우리가 행해야 할 것은 선(善)이요 사랑이다. 상대방이 끝까지 회개하지 않을 때에 그가 당할 일은 하나님이 알아서 하실 일이요 우리의 소관이 아니다. 우리는 어디까지나 그 사람을 사랑하며, 그가 회개하고 돌아오기를 원하는 선한 의도를 가지고 선을 베풀어야 한다.

교훈과 적용

1. 우리는 우리를 핍박하는 자를 축복해야 한다(14절). 우리를 괴롭히고 힘들게 하고 악하게 구는 사람을 향하여 도리어 기도하고 사랑을 베풀어야 한다. 왜냐하면 이것이 예수님이 가르쳐 주신 것이요 성경이 명하는 바이기 때문이다. 악한 사람을 향하여 같이 악을 행하면 우리도 나쁜 사람이 되고 만다. 그러면 둘 다 하나님께 벌을 받게 된다. 그러나 우리가 끝까지 선을 행하고 사랑을 베풀면, 하나님이 보시고 판단하시며 우리에게는 복을 내리신다.

2. 우리가 아무리 상대방에게 선을 행하고 사랑을 베풀어도 회개하지 않고 더욱 악하게 나오는 경우가 있다. 이럴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겠는가? 참다 못 하여 울분이 폭발하거나 같이 악하게 대하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 그러나 그럴 때에도 우리는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고 기도해야 한다. 결코 자기 손으로 악을 갚으면 안 된다(19절). 다윗은 원수 사울을 죽일 수 있는 기회가 여러 번 있었지만 자기 손으로 죽이지 않고 하나님께 맡겼다. 그러자 때가 되매 하나님께서 사울을 심판하셨으며, 다윗은 이스라엘의 왕이 되었다.

3. 그리스도인의 행동 원리는 ‘선으로 악을 이기는 것’이다(21절). 악으로 악을 갚으면 둘 다 패배자가 된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자녀가 악을 행하는 것을 원치 않으신다. 악으로 악을 갚으면 악이 끊이지 않는다(잠 17:13). 보복의 악순환이 일어나서 더욱 큰 악을 행하게 된다. 그러나 선으로 악을 갚으면 보복이 끝나고 사랑이 찾아 든다. 상대방이 끝내 회개하지 않으면 하나님이 알아서 처리하시고 우리에게는 복을 내려 주신다. 따라서 하나님의 자녀된 우리는 끝까지 선을 행하고 사랑을 실천하도록 해야 한다.

12:14-16 이 문단에는 긍정적으로 언급된 여섯 가지 권고와 부정적인 형태를 취하는 세 가지 권고가 포함되어 있다. 사도는 독자들에게 그들을 박해하는 사람들을 대신하여 하느님의 축복을 구하라고 권했습니다. 우리는 산상에서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마 5:44 / 누가복음 6:28)고 하신 예수님의 가르침을 기억합니다. 스데반은 돌에 맞아 죽으면서 “주여 이 죄를 저 사람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행 7:60; 고전 4:12 참조)라고 말하면서 이러한 경건한 태도의 예를 제시했습니다. 개인적인 상해에 대한 보복 금지 원칙은 신약성경 전체에 퍼져 있습니다. 삶이 우리를 전혀 신경 쓰지 않고 실제로 우리가 옹호하는 모든 것에 반대하는 사람들과 맞서게 될 때 지침을 제공합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축복을 누릴 수 있도록 기도해 주십시오! 사랑은 필연적으로 다른 사람들이 누구인지에 관계없이 최선을 다하기를 원합니다. 옛 본성은 “그들을 저주하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나에게 그들을 축복해 달라고 구하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느님의 뜻은 당신의 자녀들이 한 사람의 기쁨이 모든 사람의 기쁨이 되고, 한 사람의 고통을 다른 모든 사람이 기꺼이 나누는 가족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경험은 한 사람이 세상에 맞서는 것이 아니라, 서로를 돌보라는 명령을 함께 실천하며 살아가는 하나의 큰 가족입니다. 그러므로 기뻐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15절). 탕자의 이야기에 나오는 형은 함께 기뻐하지 않는 예를 보여줍니다(누가복음 15:25-32). 반면, 복음서에는 오빠가 죽은 뒤 마리아를 만나 “예수께서 우셨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요한복음 11:35).
교만은 불화의 씨앗을 뿌립니다. 자신을 특혜를 받을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는 경향은 범위에 있어서 보편적입니다. 사소한 말다툼부터 국제 전쟁까지 이어지는 개인적 갈등의 전체 범위는 우리가 그들보다 낫다거나 그들이 우리에게 불리한 짓을 했다는 잘못된 생각을 반영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우리에게 “서로 화목하게 지내라”(16절)고 권고했습니다. 이러한 연합은 다른 사람의 관점에 동의한 결과라기보다는 하나님의 사고방식을 상호 이해한 결과입니다. 바퀴살이 중심에 모이는 것처럼, 우리가 하나님께 더 가까워질수록 우리는 서로 더 가까워집니다. 바울은 몸의 조화를 깨뜨리는 것은 무엇보다도 교만하므로 교만하지 말라고 독자들에게 권면했습니다.
16절의 두 번째 문장에서 쟁점이 되는 것은 두 대명사 형용사의 성별에 관한 문제이다. 첫 번째는 중성이지만 두 번째는 남성이거나 중성입니다. Goodspeed는 두 번째를 중성적으로 받아들이고 "너무 야심적이지 말고 겸손한 일을 받아들이십시오"라고 번역합니다. 버클리는 “명예를 추구하지 말고 겸손한 상황에 기꺼이 적응하라”고 말했습니다. NIV(두 번째 형용사를 남성형으로 취함)와 유사하게 Phillip의 “속물 같은 사람이 되지 말고 평범한 사람들에게 진정한 관심을 가져라”와 Norlie의 “거만한 태도를 피하십시오. 낮은 자들과 어울리라.” 두 경우 모두, 높은 말에서 벗어나 현실을 직시하라는 권고입니다. 우리의 관심이 필요한 보잘것없는 일과 평범한 사람들이 모두 있습니다. 어느 쪽이든 물러서는 것은 자존심이 우리 삶을 지배하도록 허용하는 것입니다. 크랜필드는 이렇게 썼습니다. “교회의 '지도자'가 사회적으로 우월한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교회 안팎의 겸손한 사람들과 더 이상 쉽고 자유롭게 어울리지 않는 것은 교회의 세속성을 나타내는 표시입니다." 그래서 이 구절은 “너희 자신을 너무 높이 생각하지 말라”(TCNT)는 설득력 있는 조언으로 끝납니다. 누구도 완전한 지식을 갖고 있다고 가정해서는 안 됩니다. 이사야는 “스스로 지혜롭게 여기고” “스스로 명철하게 여기는” 사람들의 어리석음을 말했습니다(사 5:21; 잠 3:7 참조). 모리스는 “스스로 보기에 지혜로운 사람이라도 다른 사람 눈에는 그렇지 않은 경우가 거의 없다”고 말합니다.
12:17-21 부상을 부상으로 갚으려는 자연스러운 충동이 있습니다. 그러나 개인적인 상해에 대한 보복은 제자들에게 다른 쪽 뺨을 대고 2마일을 가라고 명하신 분을 따른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마 5:39, 41; 참조. 갈 6:10; 살전 5:15; 벧전 3:9). 그 대신 신자들은 모든 사람 앞에서 선한 일을 행하도록 조심해야 합니다(참조, 잠 3:4). 초대교회는 외부인에게서도 좋은 평판을 받아야 할 필요성을 이해했습니다(딤전 3:7). 신자들은 하나님 보시기에 옳은 일을 행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중요하지만, 우리가 하는 일이 기독교 윤리에 어긋나지 않는 한 세상의 좋은 평가를 받는 것도 중요합니다(고후 8: 21). 가능한 한 우리는 모든 사람과 평화롭게 살도록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사악함은 반대되어야 하고 의는 칭찬받아야 하지만,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께 대한 충성으로 인해 그들이 복음을 전하고자 하는 세상에서 멀어지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화평케 하는 자에게 축복을 선언하셨고(마 5:9), 히브리서 저자는 우리가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화평하게 지내기를 힘쓰라”(히 12:14)고 썼습니다.
그리스도인은 결코 자신의 손으로 원수를 갚아서는 안 됩니다(19절; 레위기 19:18 참조). 오히려 우리는 하나님의 진노가 그 길을 따르도록 허용해야 합니다. 결국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복수하는 것은 나입니다. 갚을 사람은 바로 나다.”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께서 신적 보복을 행하도록 도와달라는 요청을 받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너희를 괴롭히는 자에게는 재앙을 갚”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살후 1:6). 그에게는 우리의 도움이나 조언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진정한 신뢰는 모든 것을 그의 손에 맡길 것입니다. 원수를 갚기보다는 원수들이 배고프면 먹을 것을 주고, 목마르면 마실 것을 주는 것입니다. 이런 식으로 우리는 “그로 하여금 불타는 수치심을 느끼게” 할 것입니다(Moffatt). 21절은 지금까지 말한 내용의 대부분을 요약합니다. 악이 우위를 점하고 패배하도록 허용하는 대신, 옳은 일을 하여 잘못된 것을 상대로 승리를 거두십시오. Bruce는 "적을 제거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그를 친구로 만드는 것입니다. "라고 말합니다. 악에 맞서는 우리의 가장 강력한 무기는 선입니다. 악에 악으로 대응하는 것은 악을 극복하는 것이 아니라 악을 더하는 것입니다. 신자들은 예수님께서 사셨던 것처럼 계속해서 살아가면서 적대적인 세상에서 승리하며 살아가라는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옳은 것은 필연적으로 그른 것에 승리할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의 보좌에 앉으셨고, 이 세상의 모든 것이 옳지 않을지라도 악한 자에게 복수하고 의로운 자에게 상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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