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10.15. 주일3부예배. 살아가며 Ⅲ: 영원에 잇대어 사는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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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로새서
골로새서
성경전서 개역개정판 3장
3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의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2 위의 것을 생각하고 땅의 것을 생각하지 말라
3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추어졌음이라
4 우리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그 때에 너희도 그와 함께 영광 중에 나타나리라
서론
서론
우리는 영원한 생명에 대해서 참 폭이 좁은 이해를 가지고 살아간다. 우리의 구원에 대한 이해의 폭이 좁은 탓일게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신 목적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우리는 무엇을 위해 구원을 받았다고 생각하는가? 이 질문에 죽어서 천국을 가는 것밖에는 대답할 것이 없다면, 우리가 받은 구원에 대해 정말 조금밖에는 알지 못하는 것이며, 그만큼 온전한 구원의 은혜를 누리며 살아가지 못하는 셈이 된다. 여러분은 어떤가? 부디 하나님의 말씀을 부지런히 듣고 묵상하고 연구하며 구원에 대한 이해가 날마다 확장되길 바란다. 여지껏 신앙 생활을 한 햇수가 몇 년이며, 교회에서 먹은 밥이 몇 그릇인데 어쩜 그렇게 모를 수 있냐고 타박하려는 의도로 하나님의 구원에 대해서 알아야 한다는 말을 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구원에 대해 더욱 알면 알수록 우리의 마음에 여유가 생기고 삶에 깊이가 생기니, 이러한 모양의 은혜를 누림이 우리의 삶에 더욱 가득했으면 하는 의도로 하나님의 구원에 대해서 알아야 한다는 말을 하고 있는 것이다. 호세아 선지자는 이렇게 말한 바 있다.
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그의 나타나심은 새벽 빛 같이 어김없나니 비와 같이, 땅을 적시는 늦은 비와 같이 우리에게 임하시리라 하니라
힘써 알아야 하는 것이다. 힘써 아는 만큼 누리는 은혜가 있는 법이다. 여기서 힘써라는 단어의 원래의 의미는 앞서 가는 누군가를 열심히 쫓아간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이미 우리보다 앞서서 우리의 구원을 완전히 이루시고 우리의 삶의 모든 과정 속에서, 다시 말해서 시간의 순서를 따라 그 구원이 펼쳐지고 완성되어가게 하셨다. 우리가 이 구원을 힘써 알수록 우리는 하나님께서 이미 베푸신 것들을 더욱 온전히 누릴 수 있게 될 것이다.
자, 그러면 구원이란 무엇인가? 구원으로 번역되는 히브리어는 나짤과 예슈아가 있고, 헬라어는 소테리아가 있다. 이 단어들의 의미는 모두 같다. 이러한 상황을 상상해보라. 키우는 강아지가 깊은 구덩이에 빠져서 밧줄을 타고 내려가 강아지를 구덩이에서 건져 올렸다. 이것이 히브리어와 헬라어가 가리키는 구원의 의미이다. 곤경에서 건져내어 구출하는 것 말이다. 또한 이러한 상황을 상상해보라. 키우는 강아지가 개장수에게 끌려가 좁은 케이지에 갇혀 옴짝달싹 못하게 되어 얼른 자물쇠를 부셔서 강아지를 풀어주었다. 이것도 히브리어와 헬라어가 가리키는 구원의 의미이다. 억압에서 풀어주어 해방하는 것 말이다.
여기까지만 설명하면 50점짜리의 설명이다. 조금더 근본적인 의미로까지 거슬러 올라가 보자. 첫번째 상황에서 구덩이에 빠진 강아지는 처음부터 구덩이에 있었는가? 아니다. 강아지는 원래 구덩이 밖에 있었다. 두번째 상황에서 케이지에 갇힌 강아지는 처음부터 케이지 안에 있었는가? 아니다. 강아지는 원래 케이지 밖에 있었다.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 감이 잡히는가? 강아지의 원래 상태 즉, 건강하고 아름답고 자유로운 상태로 회복되는 것이 구원이다.
이제 우리 사람들 이야기로 넘어가보자. 아담의 타락 이후 모든 사람은 죄의 구덩이에 빠진 신세요, 사망이라는 케이지에 갇힌 신세가 되어버렸다. 하지만 원래 인간이 그렇게 창조된 것인가? 아니다. 인간의 원래의 상태는 하나님과 함께 더불어 살아가며 건강하고 아름답고 자유로움을 누리도록 창조되었다. 하지만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지은 직후 인간은 그 죄로 인해 하나님이 계신 곳에서 쫓겨나게 되었다. 죄로 인해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져 버린 것이다. 하나님과 더불어 살던 때에는 하나님으로부터 흘러나오는 모든 풍성함을 누리며 살았으나, 이제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지자 그 모든 풍성함이 사라지게 되었다.
영화관에서 영화가 시작하기 전에는 조명을 켜두게 마련이다. 그러다가 영화가 시작하기 직전 잠시 모든 조명이 꺼지고 화면도 어두운 순간이 반드시 있다. 빛이 사라지는 순간 우리는 무엇을 경험하는가? 가득한 어둠이다. 빛이 가득한 곳에서 빛이 사라지면 그 자리는 곧장 어둠으로 채워지게 마련인 것이다.
이처럼 우리의 영혼도 하나님과 더불어 살 때에는 선으로 가득하였으나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지자 곧장 악으로 가득해지고 말았다. 원래는 하나님이 누리시는 모든 충만함으로 가득하였으나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지자 곧장 텅텅 비게 된 것이다. 전자를 성경은 참 생명 혹은 영원한 생명이라 부르고, 후자를 죽음과 사망이라고 부른다.
이제 거의 다 왔다. 집중해보시라. 그렇다면 구원은 무엇이겠는가? 죄에서 건져지고 사망에서 해방된 것, 물론 맞다. 하지만 조금 더 근본적인 의미에서 구원을 설명해보라. 구원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진 자가 다시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된 것을 말한다. 그래서 인간이 본래 가졌으나 잃어버린 것, 하나님으로부터 흘러나오는 모든 충만함을 다시 누리게 되는 것이 구원이다. 단순히 죽어서 천국에 가는 정도가 아니라, 다시 한 번 하나님과 더불어 살아가며 하나님이 누리시는 모든 충만함을 우리도 누리게 되는 것이 구원인 것이다. 이것이 우리가 받은 구원의 온전한 의미이다.
전자와 후자 사이에는 얼마나 큰 차이가 있는가? 구원을 죽어서 천국에 가는 정도로 이해하는 자들에게는 기쁘고 좋은 날이란 이 땅에서의 고생을 다 마치고 난 후에야 찾아오는 까마득히 멀리 있는 날에 불과하다. 하지만 구원을 하나님과 더불어 살아가는 삶이며 하나님의 충만함을 누리는 것으로 이해하는 자들에게는 기쁘고 좋은 날이 오늘, 이곳이 된다. 하나님께서 이미 허락하신 이 놀라운 은혜를 굳이 저 멀리로 미뤄두고 손가락만 빨며 기다릴 이유가 도대체 무엇이 있겠는가? 그러니 지금 누리시라. 하나님의 나라는 우리의 삶에 이미 시작되었다. 그리고 우리 안에 겨자씨처럼 심겨져 시작된 하나님의 나라는 우리 안에서 날마다 자라가며 하나님의 풍성함을 흘러넘치게 하고 있다.
사도 요한은 이 구원에 대해서 이렇게 선언한다. 우리가 너무나도 잘 아는 구절이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요한의 선언에 따르면 하나님이 보내신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마다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 요한은 구원의 결과, 다시 말해서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어 얻게 되는 것을 강조하여 말하고 있는 것이다. 여러분들이 아는 영원한 생명과 방금까지 풀어 설명한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어 얻게 되고 누리게 되는 것을 비교해서 생각해보라. 어떤 차이가 있는가?
흔히들 많은 사람들이 영원한 생명을 단순히 양적인 측면에서만 생각하고 그친다. 죽지 않고 영원히 사는 삶, 딱 그 정도 말이다. 과연 영원한 생명이 죽지 않고 영원히 사는 삶에 불과한 것일까? 절대 그렇지 않다.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수준에서 영적인 성장을 멈추고 단순히 수명만 무한히 늘어난다고 생각해보라. 우리가 거하는 천국은 놀랍게도 이름만 천국으로 바꾼 지옥일 것이다. 여전히 탐욕스럽고, 여전히 거짓되고, 여전히 음란하고, 여전히 미움가득한 자들이 서로를 향해 그 속에 있는 것들을 가득 쏟아내며 무려 그러한 상태로 영원히 살아가는 곳, 그곳은 절대 천국일 수 없다.
고로 영원한 생명을 생각할 때 우리는 반드시 질적인 측면을 함께 생각해야 한다. 성경은 영원이라는 말을 절대 아무 곳에나 갖다 붙혀서 쓰지 않는다. 영원히 지속될만한 가치가 있는 것들에만 영원이라는 단어를 허락한다. 예를 들어보자. 하나님은 영원하신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은 당연히 영원에 합당하신 분이시다. 하나님의 말씀과 법도와 규례는 영원하다. 하나님의 말씀, 법도, 규례는 가장 순결하고 아름다운 것이기에 영원히 지속될만한 가치가 있다. 하나님께서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나라 또한 영원하다. 하나님께서 다스리시는 곳은 완전하여 흠잡을 곳이 없는 곳이기에 영원히 지속될만한 가치가 있다. 그렇다면 영원한 생명은 어떠해야 하겠는가? 그 모습이 가장 순결하고, 가장 아름답고, 가장 완전하여서 영원히 지속될만한 가치가 있어야할 것임에 틀림없다.
하나님은 영원한 생명을 가지신 분이시며, 영원한 생명을 살아가시는 분이시다. 영원한 생명을 살아가시는 하나님의 삶의 모습을 보라. 그분은 어떤 삶을 살아가시는가? 잠시 귀를 기울여볼 만한 사람이 있다. 사도 요한이다. 요한은 사도들 중에 가장 마지막까지 살아남아 이 땅에 사람으로 오신 하나님의 삶을 묵상한 자다. 그는 영원한 생명을 살아가시는 하나님에 대해 한 단어로 요약한다.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영원한 생명을 살아가시는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이 말은 곧 이것을 뜻한다. 하나님은 처음부터 사랑으로 모든 것들을 지으셨고, 태초부터 지금까지 사랑으로 만물을 붙들고 계시며, 앞으로도 계속해서 사랑으로 만물을 보살피실 분이시다. 하나님은 늘 사랑으로 수고하시는 분이시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기르시나니”. 이어서 또 이렇게 말씀하셨다.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생각하여 보라 수고도 아니하고 길쌈도 아니하느니라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 같지 못하였느니라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지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어디 공중의 새와 들의 백합화 뿐이겠는가? 성경은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다고 선포하며 만물이 주의 사랑으로 빚어내신 대상들임을 밝힌다. 또한 성경은 주님께서 “만물의 주재”가 되신다고 선포하며 만물이 주의 사랑으로 보살피시는 대상들임을 밝힌다. 온통 사랑이다. 영원한 생명을 살아가시는 하나님의 삶의 모습에는 사랑으로 수고하며 섬기는 모습이 가득하다.
본론
본론
오늘 본문에서 바울은 그리스도인들을 향해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은 자들이라고 말한다. 1절을 보라.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의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또한 바울은 그리스도인들을 향해 생명이 하나님 안에 감추인 자들이라고 말한다. 3절을 보라.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추어졌음이라
두 구절은 서로 조금씩 다르게 표현하고 있을뿐 모두 우리가 받은 구원에 대해 설명하는 구절들이다.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다 함은 그리스도처럼 죽음을 이기는 생명을 갖게 되었음을 말하는 것이고, 생명이 하나님 안에 감추어졌다 함은 이 생명이 우리나 세상이 아닌 하나님께 속한 생명임을 말하는 것이다. 곧 바울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을 향해 “너희들은 영원한 생명을 가진 자들이다”라고 선언하고 있는 셈이다.
이 영생을 가진 자들은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 1절부터 3절까지의 구절들 속에서 바울은 이렇게 말한다. 위의 것을 찾으라. 위의 것을 생각하라. 땅의 것을 생각하지 말라.
바울이 말하는 위는 1절을 보면 알 수 있듯이 하나님께서 거하시는 하늘을 뜻한다. 그렇다면 반대되는 짝으로서 사용된 땅은 무엇을 뜻하겠는가?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된 자들이 살아가는 세상을 뜻한다. 고로 바울은 지금 구원받은 자들이 마땅히 살아야 할 삶의 모습에 대해 하늘과 땅을 대비시키며 설명하고 호소하고 있는 것이다. 1절부터 4절까지 바울이 전하고자 하는 말씀을 요약하자면 하늘에 속한 삶이 있고 세상에 속한 삶이 있는데, 구원을 받았다면 혹은 영생을 받았다면 하늘에 속한 삶을 살아가야함이 마땅하다는 것이 된다. 너무나도 당연한 말씀이다. 우리가 받은 영생은 하나님께 속한 생명이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어서 하나님께 속한 영원한 생명을 받아 누리고 살아가는 사람들이라면 당연히 하나님께서 살아가시는 삶의 모습이 그들의 삶에서도 나타나야 하지 않겠는가?
구원받았으니 구원받은자 답게 살아가라는 것이다. 영생을 받았으니 그 영생에 걸맞는 삶을 살아가라는 것이다. 헌데 많은 사람들이 우리가 영원한 생명을 받아 누리게 될 삶에 대해서 이상한 이해를 하는 것이 문제이다. 많은 사람들이 세상을 살며 경험한 삶의 모습을 이상으로 삼아 장차 내가 누리게 될 천국에서의 삶이라고 여긴다. 평생 배를 곯으며 살아온 자들은 걱정없이 맛있는 음식을 마음껏 먹는 삶을 바라보며 장차 천국에서의 삶이 그럴 것이라고 꿈꾼다. 평생 내 집 하나 마련하지 못하고 좁고 허름한 집에서 살아온 자들은 으리으리한 저택에서 사는 삶을 바라보며 장차 천국에서의 삶이 그럴 것이라고 꿈꾼다. 평생 좋은 옷, 신발, 가방 한 번 맘놓고 사보지 못하고 늘 허리띠를 졸라매어 살아온 자들은 마음껏 플렉스하며 사는 삶을 바라보며 장차 천국에서의 삶이 그럴 것이라고 꿈꾼다.
우리의 천국에 대한 이해가, 영원한 생명을 가지고 살아가는 삶에 대한 이해가 이정도 수준에 머문다면 우리와 이슬람은 절대 구분할 수 없게 되어버림을 알고 있는가? 이슬람교도들은 이런 천국을 꿈꾼다. 최고급의 포도주가 강을 이루어 흐르고, 온갖 산해진미가 산을 이루어 펼쳐져 있다. 천국에 들어간 자들은 궁궐같은 집에서 최고급 실크로 된 침대에 누워 72명의 처녀들에게 온갖 봉사와 섬김을 받는다. 혹 우리가 꿈꾸는 천국이 이정도는 아니라고 해도, 이슬람이 꿈꾸는 천국의 또다른 버전과 같지는 않은가? 이 문제는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는듯하다. 바울은 2절에서 이렇게 엄히 가르친다.
위의 것을 생각하고 땅의 것을 생각하지 말라
이 땅에서 마치 하나님처럼 살아가는 자들의 삶의 모습을 바라보면서 그런 삶을 우리의 소망으로 삼거나 그렇게 살아가려 애쓰지 말라는 것이다. 정말 하나님께서 살아가시는 삶의 모습을 바라보면서 그런 삶을 우리의 소망으로 삼고 그렇게 살아가려 애쓰라는 것이다. 물론, 천국에 가면 기쁨과 즐거움이 가득하고 부족함이 없을 것이다. 하지만 천국이 단순히 우리의 끝없는 욕망을 만족시키며 그저 편안하게 살아가도록 하는 곳이라면 과연 영원이라는 말을 붙이기에 합당한가? 그런 욕망으로 가득 넘치는 삶이 과연 영원히 지속해도 괜찮을만큼 가치있다고 생각하는가? 절대 그렇지 않다.
그렇다면 우리는 영원한 생명을 가진 자로서 어떤 삶을 꿈꾸며 노력해야하는가? 하나님께서 영원을 허락하실만큼 가치있는 삶을 꿈꾸며 그런 삶을 살아가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바울은 그런 삶의 모습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만 발견할 수 있다고 단언한다. 1절을 다시 한 번 보라.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의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위의 것을 찾으라! 거기에 누가 계신가? 그리스도께서 계시다. 여기 나오는 찾으라는 단어는 본래 헬라어로 제테오라고 하는데, 이는 목표로 삼아 열렬히 추구하는 것을 뜻한다. 즉 바울은 죽으시고 다시 사셔서 하늘에 오르신 분, 사람으로 오신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셨던 삶의 모습을 소망으로 품고 목표로 삼아 그런 삶을 살아가도록 열심히 노력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오직 예수께서 사람의 몸으로 오셔서 몸소 보이신 삶의 모습만이 영원에 합당한 가장 아름답고, 가장 순결하고, 가장 가치있는 삶이니 그리 살아가라고 말하는 것이다.
예수님은 어떤 삶을 사셨는가? 그분의 삶에서 가장 두드러지게 보이는 모습은 무엇인가? 예수님은 잃어버린 양을 찾아 밤낮없이 수고하시는 목자셨다. 예수님은 상하고 깨어진 자들을 찾아 밤낮없이 고치시는 치료자셨다. 예수님은 가난하여 춥고 배고픈 자들을 찾아 밤낮없이 돌보신 보호자셨다. 예수님은 죄로 인해 하나님 앞에서 쫓겨난 자들을 위해 대신해서 죄를 지시고 형벌과 저주와 죽음을 당하신 구원자셨다. 이분의 삶에서 여러분은 무엇이 볼 수 있는가? 결국에는 그들을 위해 수고하고 희생하도록 이끈 크신 사랑이다. 예수님의 삶에는 사랑으로 가득차있었고, 사랑이 눈부시게 빛나고 있었다. 이분은 하나님이시기에, 예수의 삶을 보는 자는 곧 하나님의 삶의 모습을 보는 것과 같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빌립아 …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영원한 생명을 살아가시는 하나님께서 그분의 제자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나누어주시며 이렇게 말씀하신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서로 사랑하라… 이것이 우리가 살아가야 할 삶의 모습의 전부이다. 하나님께서 가지신 영원한 생명 속에는 사랑이 가득차있고, 사랑으로 눈부시게 빛난다. 그 생명을 주시며 우리도 사랑하라 말씀하시는 것이다. 반대로 생각하지 말라. 열심히 사랑을 실천하면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될지도 모른다는 말이 아니라, 이미 영원한 생명을 값없이 은혜로 주셨고, 이제 그 생명을 가진자로서 사랑하며 살아가라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러니 사랑하며 살아가라. 오직 사랑하며 살아가라. 훌륭한 일들을 이뤄내고, 많은 것들을 손에 넣는 삶보다 하나님께서는 사랑하는 삶을 가치있게 여기시며, 우리로 그러한 가치있는 삶을 살아가게 하시려 구원하셨다.
이제 우리를 구원하신 목적과 영원한 생명을 주신 이유에 대해서 밝히 드러났다. 영원한 생명의 능력을 힘입어 마음껏 사랑하며 살아가시라. 하나님께서는 비록 이 땅에서의 삶을 살아가지만 우리 모두를 영원에 잇대어 놓으셨다. 단순히 죽지 않는 삶을 허락하셨다는 것이 아니라, 진정으로 가치있는 삶을 허락하셨다는 것이며, 우리의 하루하루의 삶이 진정으로 가치있는 삶이 될 수 있도록 끊임없이 영원한 생명을 공급하시며 자라나게 하신다.
가족을 사랑하고, 교회 공동체 내의 형제 자매들을 사랑하며, 직장과 학교의 동료들을 사랑하라. 나아가 하나님께서 돌보시는 모든 피조물들도 사랑하라. 특히 이 창조세계를 사랑하는 일이 시급하다. 집에가서 한 번 관련된 내용을 찾아보길 바란다. 인간이 일으킨 공해로 인해 자연이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지경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당장 모두가 발벗고 나서서 자연을 사랑하며 돌보지 않으면 2050년 이후로는 문명이 붕괴되고 서서히 지구상의 모든 생물들이 대멸종하게되는 단계에 이르게 된다고 한다. 성경은 이미 이 때의 일에 대해 미리 내다보고 이렇게 예언하였다.
피조물이 고대하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는 것이니
그 바라는 것은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 노릇 한 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니라
모든 피조물들이 함께 탄식하며 진정으로 구원받은 자들이, 영원한 생명을 얻은 자들이 나타나기만을 기다린다. 자연을 착취하며 파괴하는 자들이 아닌 하나님께서 사랑으로 돌보시듯 사랑으로 돌보는 사람들이 나타나기만을 기다린다.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