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직한 사람은 그의 얼굴을 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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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할 때 강함되시네'라는 찬양이 있습니다. 그 가사를 다시 생각해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약할 때 강함되시네 / 나의 보배가 되신 주 / 주 나의 모든 것
주안에 있는 보물을 / 나는 포기할 수 없네 / 주 나의 모든 것
십자가 죄 사하셨네 / 주님의 이름 찬양해 / 주 나의 모든 것
쓰러진 나를 세우고 / 나의 빈잔을 채우네 / 주 나의 모든 것
참으로 은혜가 되는 말씀이 아닐 수 없습니다. 약함을 통해 강함이 되시는 하나님을 경험했을 뿐만 아니라, 십자가 보혈의 능력을 경험한 작곡가의 간증과 고백이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가사로만으로 충분히 은혜롭지만, 그 배경을 안다면 이 가사의 깊이는 더욱 깊어지며, 그 감동은 더욱 증폭됩니다.
이 작곡가는 데니스 저니건 이라는 사람입니다. 이 사람은 동성애자였습니다. 하지만 자신이 행하고 있는 그 행동이 죄임을 깨닫게 되었고, 주 앞에 그 죄를 회개함과 동시에 자신의 치부를, 그 약함을 만 천하에 공개했습니다.
지금 우리는 알게 모르게 각자가 저지르고 있는 은밀한 죄, 숨기고 싶은 죄들이 하나씩은 있으리라 생각이 듭니다. 저 또한 부끄럽지만 있습니다. 만약 그런 저의 약한 모습이 만 천하에 공개가 된다면 마음이 어렵고, 수치스러울 것 같습니다.여러분은 어떠십니까? 괜찮으십니까? 하지만 데니스 저니건은 그 수치스러운 죄를 찬양을 통대 만 천하에 공개했습니다.
그리고 그 약함을 공개했던 것을 통해 그 약함을 도리어 강함으로 사용해주셨던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그래서 지금까지도 수많은 예배시간에 많은 이들의 입술에서 저 찬양을 불리우게 하시며 약한 이들의 강함 되시는 하나님을 전파하는 귀한 통로로 쓰임을 받고 있습니다. 이처럼 찬양은 찬양 자체로 은혜가 되지만 그 배경과 상황을 알 때, 그 은혜는 더욱더 깊어집니다.
오늘 시편을 살펴 보면, ‘다윗의 시 지휘자를 위한 노래’라고 적혀 있습니다. 하지만 이를 개역개정으로 본다면 ‘다윗의 시, 인도자를 따라 부르는 노래'라고 나와 있습니다. 표제어를 통해서 알 수 있는 사실을 인도자가 있고 그에 따라 이 노래가 불려 졌을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많은 학자들은 이를 보고 대부분 예배의 상황에서 불리어 졌을 것이라고 추측합니다. 이것이 시임과 동시에 찬양이라는 것이지요.
아마 고대의 어느 순간에 하나님을 찬양했던 찬양 중에 한 곡이 아니었을까 생각해 봅니다. 하지만 우리가 앞서 살펴 본대로 이 찬양 또한 배경을 가지게 되며, 작곡가의 생각 또는 삶을 반영할 것입니다. 그럼 이 찬양 속에는 어떤 배경과 작곡가의 어떤 상황이 담겨져 있을까? 오늘 말씀은 그 상황을 살펴 보는 것으로 말씀을 이어 나가고자 합니다. 1절입니다.
내가 여호와를 의뢰하는데 어째서 너희가 내 영혼에게 “새처럼 산으로 피하여라” 하고 말하느냐?
지금, 화자는 어떤 위협에 놓인 상황으로 보여 집니다. 그 위협은 자신의 몸을 산으로 피하게 해야하는, 다시 말하면 도망을 재촉하는 일이어야 하는 상황일 것입니다. 단순한 심적인 위협이 아니라 외부로 부터 어떤 공격이 오는 상황입니다. 그래서 아마도 이 상황이 전쟁 중이거나, 어떤 군사가 위협해 오는 상황이라고 묘사합니다. 이를 보면 자연스레 다윗이 공격을 받던 때가 생각이 납니다. 사울의 군사에 쫓겨 수도 없이 도망을 다니고 숨어야 했던 다윗의 처지말입니다. 아마도 다윗 또한 이 순간 아주 어려운 위협에 처했던 것으로 보여 집니다.
하지만 오늘 찬양은 외부로 부터 오는 어려움에 대해서 묘사하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 오늘 시편 은 외부로 부터 오는 어려움 자체를 다루는 시편이 아니라, 그 주변에 충고로 인해 어려움을 토해내는 시편인 것 같습니다. 다윗은 도망 다녀야 하는 순간, 여호와를 의지하여, 여호와께 의뢰하고 있는데 주변에서 누군가 충고를 해오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야, 이 어려운 상황에 뭐하고 있어 빨리 새처럼 산으로 피해.’
여기서 새처럼은 조용히와 ‘빨리’의 ‘의미’를 가집니다. 이를 감안하여 읽어 본다면
‘야, 이 어려운 상황에 뭐하고 있어, 빨리 산으로 피해, 아무도 모르게 조용히 지금 당장 산으로 피해!’
의 정도의 의미가 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조언은 또 이어 집니다.
보라. 악인들이 화살을 활에 대어 당기고 마음이 바른 사람을 남몰래 쏘려 하고 있구나.
다음 또 다윗의 상황을 추측케 하는 문장이 또 나옵니다.
‘야, 잘봐 ! 악한 사람들이 화살을 당겨 남몰래 쏘려고 하고 있잖아.’
다른 번역본에서는 이렇게 나옵니다.
‘어두운 곳에서 지금 쏘려고 하고 있잖아.!’ 빨리 피해!
라고 조언을 해줍니다. 지금 화살이 어디서 날라올지 모르는 일촉즉발의 상황인 것처럼 보여집니다. 3절입니다.
기초가 무너지고 있는데 의인들이라고 별 수 있겠는가?
그때, 그 친구는 화자의 마음에 결정적인 비수를 꽂습니다.
‘지금 이렇게 기초가 무너지고 있는데 의인이들이라고 별 수 있겠는가?’
여기서 기초는 기가 서 있는 법과 공의의 근본적인 원리를 말해줍니다. 다시 말해서, 화자는 한 사회에서 법과 질서를 세우려는 모든 노력이 의미가 없어진 아노미 상태에 놓인 것입니다.
모든 것이 박살나고, 아무런 의미가 없어진 상태, 지금 그 상태가 바로 다윗이 처한 상황 같습니다. 그떄 그 다윗의 주변 친구들이 조언을 해주는 상황인 것입니다. 생각해 봅시다. 지금 앞서 묘사된 상황을 놓고 볼때, 그 상황으로만으로 힘들지 않겠습니까? 누군가 자신의 목숨을 위협한다면 얼마나 두렵고 떨리겠습니까? 하지만 그 상황만으로 충분히 어려운데 다윗은 주변의 충고, 조언 때문에 더욱 고통 받고 있습니다.
사실 생각해보면 그렇습니다. 우리가 어려움에 처했을 때 우리의 상황과 전혀 상관없는 조언들은 우리가 무시할 수 있습니다. 가령 그런 것입니다. 누군가 부득이하게 경제적인 어려움으로 파산의 위기에 놓여 있다고 가정해 봅시다. 그때, 누군가 그에게 찾아와서 경제적인 어려움을 겪고 싶다면 100억을 어디에 투자 하십시요. 그럼 당신은 경제적인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습니다. 라고 말한다면 그냥 콧방귀를 끼면서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 버릴 것입니다. 왜냐면 돈 백원이 없는 상황에서 지금 상황에 전혀 가당치도 않은 소리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 상황을 반영한 조언은 다릅니다.
‘정말 어려운데, 젊은 사람이 이러고 있을꺼야? 나가서 돈이라도 벌어야 할거 아니야’
를 주변에 가장 신뢰할 수 있는 사람에게 전해 들었다고 가정해 봅시다. 그때 그 어려움을 겪는 사람의 마음이 어떠하겠습니까? 아주 그 마음이 처참하게 박살날 것입니다. 열심히 하지 않아서 파산한 것도 아니고, 믿던 너 마저 나의 편이 아니구나 하면서 말입니다. 나의 마음을 알아 줄 수 있는 사람은 너 밖에 없구나 하면서 말입니다. 그리고 자기 자신은 더욱 무능하다고 느끼며, 상황 앞에, 또 자신의 초라한 모습 앞에 오히려 더 절망하고 말 것입니다. 어쩌면 그러한 충고는 상대방을 두번 죽이는 일일 것입니다.
다윗도 이렇게 현실적인 조언을 듣습니다. ‘이렇게 모든 것이 다 무너져 가는데 의인이라고 별 수 있느냐,’ ‘빨리 피해라, 지금 목숨이 왔다 갔다 하는 상황에서 의인 같은 소리하지말고 일단 살고 봐야 할 거 아니야.’
상황으로만으로 힘든데, 그래서 주님을 의지하고 있는데, 자기가 믿는 이 믿음, 이것이 한심한 것은 아닌가?, ‘내가 과연 그토록 어리석은 행동을 하고 있는 것인가?’, ‘아니 어쩌면, 하나님은 지금 나에게 저 사람을 통해서 말씀하고 계신 것은 아닐까?’ 등의 생각들이 그의 모든 생각을 지배하고 말 것입니다. 왜냐하면 너무 타당하고, 너무 맞는 말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다윗은 그 상황에서도 중심을 놓치지 않습니다. 4-5절입니다.
여호와께서 그분의 거룩한 성전에 계시고 여호와의 옥좌는 하늘에 있으니 그분이 눈을 열어 사람들을 지켜보신다.
여호와께서는 의인들을 시험하시고 악한 사람들과 폭력을 좋아하는 사람들을 미워하신다.
그 어려운 순간에도 다윗은 다시 마음을 잡고 그 중심을 놓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자신을 지켜 봐 주실, 자신의 마음의 중심을 알아 주실 주님만을 의지했습니다.
‘아니야! 하나님은 살아계셔서 그의 눈동자로 사람을 꿰뚤어 보셔. 나의 중심이 주님께 있어. 하나님은 이런 자들을 두루 감찰하셔.’
‘그리고 하나님은 악한 사람을 미워하며, 의인의 손을 끝끝내 들어 주실 거야'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악인들에게는 덫과 불과 유황과 무서운 혼란을 비 오듯 쏟아부으실 것이니 그것이 그들의 몫이 되리라.
의로우신 여호와께서는 의를 사랑하시니 정직한 사람은 그분의 얼굴을 보리라.
그리고 마침내 그 의인은 하나님의 얼굴을 보게 될거야.라고 자신의 믿음 잃지 않고 지켜 냅니다. 어려운 상황이지만 그 상황으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상황 너머에 있는 하나님을 바라본 것입니다.
이 시편을 놓고 봤을 때, 그가 하나님을 만나게 되었을까, 아닐까 하는 의문이 들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분명히 만났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자신을 찾는 모든 이들을 외면치 않으시고, 그에게 언제나 은혜를 베풀어 주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지금까지 우리가 이 시편의 상황적인 맥락을 살펴 봤습니다. 아마도, 이런 다윗의 어려움이 가사로 표현이 되었고, 많은 후대의 사람들이 자신의 믿음이 흔들릴 때, 어려움에 처할 때 불렀던 찬양이자 시편이었을 것을 것입니다. 이런 시편의 내용, 찬양의 가사는 너무나도 큰 도전이 됩니다.(…)
오늘은 이번텀 마지막 예배팀 기도회가 있는 날입니다. 물론 우리의 섬김은 텀과 상관 없이 지속 되겠습니다만, 한 텀을 정리하면서 우리의 신앙을 되새기는 것은 유의미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우리가 이 시간 지난 날 우리의 믿음 생활을 돌아보십시다.
온누리교회 J4U 공동체 예배팀이기 앞서 우리가 예배자로 살아가는데 우리 앞에 얼마나 유혹이 많이 있니까? 특별히 상황이 우리의 믿음을 집어 삼키려고 할 때, 믿음을 지켜내려고 굳게 마음을 먹었지만, 그 믿음을 마구마구 흔드는 주변의 사람들이 우리를 공격해 올 때 말입니다.
생각해 봅시다. 우리가 믿음 생활을 하면서, 특별히 신앙 생활을 하면서 얼마나 많은 유혹에 노출이 됩니까? 너무나도 합리적인 방법, 그럴싸한 방법, 그리고 수많은 방법론이 이성적인 사고가 우리의 신앙을 위협한 적이 어디 한 두번이겠습니까?
또, 우리가 결연한 의지로 하나님을 선택하며 과감히 믿음의 길을 선택했지만, 응답이 없자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현실적인 방법으로 눈길을 돌리는 모습이 우리의 일반적인 모습이며, 우리 신앙생활의 현 주소일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그렇게 믿음을 저버리고 현실에 매몰되었던 것은 상황이 하나님 보다 더 커보이기 때문에, 아니 어쩌면 그 상황을 하나님 보다. 더 사랑해서 일 것입니다. 하나님은 마음의 중심을 보십니다.
예전에 제가 예수님을 만나고 자신의 모든 것을 버렸다는 한 의사 출신 목사님의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얼마나 크게 감동이 되던지, 어떻게 하면 하나님을 만나고 그 모든 것을 버릴 수 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저 또한 하나님 앞에 그 모든 것을 드리고 싶어졌습니다. 그래서 집에 있는 것을 모두 버리기 시작했습니다. 특별히 제가 옷을 좋아 했던 적이 있습니다. 그때 있던 옷장의 모든 옷, 최소한의 옷들을 내버려 두고 전부 버렸습니다. 그렇게 하면 하나님이 좋아하실 줄로 알았습니다. 그 뿐만이 아니라 재정을 비롯한 모든 것을 하나씩 비워 내기 시작했습니다. 이유는 딱 한가지 하나님 기뻐하실 줄 알았던 것입니다.
하지만 언젠가 기도하면서 하나님이 나를 가장 기뻐하셨을 때가 언제였을까 하고 생각했던 적이 있습니다. 당연히 저는 제가 버린 그때를 기억하시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별 것 아닌 것 같지만 저는 그 당시 제가 드릴 수 있는 전부를 드렸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제 마음의 전혀 다른 장면을 떠올리게 해주셨습니다. 바로 제가 하나님을 만나고 얼마뒤 기도를 하러 교회를 갔을 때 그 장면 이었습니다.
그때 하나님을 만날 때, 정말 빈털터리로 왔습니다. 기나긴 방황 끝에, 또 실패 끝에 하나님을 찾아 왔던 터라 제게 무엇이 있었겠습니까? 차비만 챙겨 겨우 교회에 왔는데 드릴 돈도 없고, 물건도 없어서 어디 구석에서 뻘쭘하게 혼자 앉아 있는 것 같아서 멍하니 앉아 있었습니다. 그런데 문득, 마음을 보신다는 겁니다. 근데 불현 듯 오! 저거면 내가 할 수 있겠다. 저에게도 소망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마음으로 드리는게 뭔지도 모르겠지만, 진심으로 마음을 다해 기도했던 적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바로 그 장면을 기억나게 하셨습니다. 사역적으로 성공했을 때, 제가 어떤 일을 잘 처리했을 때가 아니라 중심을 주님께 드릴 때, 그때를 가장 기뻐하셨다는 마음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상황을 잘 아실 것입니다. 상황에 좌초되고 매몰될 만한 상황에 놓인 것도, 우리의 연약함도 모두 잘 아실 것입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바로 마음의 중심일 것입니다.
‘하나님은 나를 보고 계신다. 그 하나님은 끝끝내 나의 손을 들어 주실 것이다.’하는 그 중심 말입니다. 정말 하나님은 모든 것을 지켜보고 계십니다. 그리고 우리의 행동을 기억하시고, 그 은혜를 갚아 주시는 분이십니다.
저는 여러분이 이 믿음을 지켜내셨으면 좋겠습니다. 그 중심에서 주님을 놓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합당한 방법 선택, 그럴싸한 선택하는 여러분이 아니라 하나님의 방법과 하나님이 원하시는 선택을 사모하시는 여러분이 되셨으면 좋겠습니다. 그런다면 우리 하나님께서 반드시 하나님의 얼굴을 우리게 비춰 보여 주시며 은혜를 보답해 주실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