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국 열쇠 사용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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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마 16:13-20
제목 : 천국 열쇠 사용처
저는 결혼하기 전 20대 때, 어디서 쿠폰을 받거나, 마일리지가 쌓여서 사용해야 할 때, 일부러 쓰지 않은 적이 참 많았습니다. 결혼하고 나서는 야무지게 쓰고 있는데요. 어린 시절에는 “이거 어디서 쓸 수 있나요. 어떻게 쓰면 되나요.” 잘 모르면 한마디만 물어보면 해결되는데, 그 말이 입에서 잘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쿠폰 같은 것은 뒷면에 보면 자세하게 설명이 나와 있습니다만, 그런 걸 보고도 쓰지 않았습니다. 쭈뼛거리느라 제대로 사용하지 못했던 것이죠.
또 숙박업소를 이용할 때, 카드키를 사용하지 않습니까? 저는 과거에 제가 투숙하는 방이 몇 호실인지 헷갈려서 옆 호실 문 앞에서 카드를 대고 왜 안 되지? 이렇게 웃지 못할 실수를 한 적이 있습니다. 한번 쯤은 그럴 수 있죠? 투숙비를 지불해서 카드키를 받아도 본인이 묵는 방이 몇 호인지 모르면 들어갈 수 없습니다. 이것은 너무나 당연한 말이죠. 계속해서 카드를 대 봐도 아무런 반응이 없을테니까요.
이와 같이 열쇠나 카드키를 가지고 있어도 어느 문을 열어야 하는지 알지 못하면, 열쇠가 없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천국 열쇠를 줄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저의 실수를 예로 들어 말씀드렸듯이, 예수님께서 주신 이 천국 열쇠가 무엇이며, 이 열쇠가 어느 문을 열 수 있는 열쇠인지, 천국 열쇠의 사용처를 정확하게 인지해야만, 예수님께서 교회에게 주신 천국 열쇠를 올바르게 사용할 수 있습니다. 이 시간 천국 열쇠의 사용처에 대해서 살펴보고, 오늘날 우리가 이 열쇠를 어디서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지 말씀을 통해 함께 상고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오늘 본문 말씀을 이해하려면,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하신 말씀의 문맥을 이해해야 합니다. 이 내용은 두 달 전 수요예배 시간에 전한 내용인데요. 간략하게 요약해서 설명해 드리자면, 마태복음 16장 13절에서 20절까지의 말씀은 예수님을 향한 베드로의 신앙고백으로 유명한 단락입니다. 그런데 13절에서 20절까지의 분량은 여덟 절이나 되는데, 베드로의 고백은 16절, 딱 한 절만 기록되어 있고, 오히려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하시는 말씀은 17절 18절 19절 말씀. 이렇게 세 절씩이나 할애됩니다. 이러한 점에서 우리는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말씀하신 내용의 의미를 주목해야 합니다. 특별히 18절과 19절은 마태복음의 교회론이 등장하는 굉장히 중요한 구절입니다. 마태복음이 말하는 교회란 무엇인지, 교회의 본질과 역할이 등장하기 때문입니다. 18절 상반절 말씀 보세요. (in)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내가 이 반석 위에 나의 교회를 세울 것이다.” 내가 나의 교회를 세울 것이다. 이것이 바로 마태복음에서 처음으로 등장하는 교회론의 본질입니다. 예수님께서 예수님의 교회를 세우겠다고 말씀하신 것. 교회를 건축하고, 교회를 소유하신 분이 바로 예수님이라는 것이죠.
이에 따라 우리는 교회에 대한 불안감을 떨쳐내야 합니다. 신학교 미달 사태, 한국교회 출석 교인 감소 추이, 한국교회 교역자들의 질적 양적 변화. 이런 요소들이 교회에 대한 걱정을 품게 만들지만, 엄밀히 말하자면, 눈에 보이지 않는 교회, 예수님께서 세우신 교회의 본질 그 자체는 변함이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세우시고 소유하신 교회의 본연의 가치가 훼손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점에서 우리가 걱정하고 우려해야 할 것은, 교회가 망하면 어떡하지. 이런 걱정이 아니라, 신학교 미달 사태나 성도들의 숫자와 교회 감소 추이나. 이런 문제들을 야기한 원인이 무엇이며, 한국교회의 위기라고 여겨지는 요소들을 구체적으로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를 고민해야 하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마태복음에 따르면 교회는 예수님께서 친히 건축하셨고 소유하고 계시는 개인 사유재산이기 때문입니다. 그것도 일반인이 소유하고 있는 사유재산이 아니라, 창세 전부터 존재하신 분, 천지 만물을 창조하신 분, 택자들의 죄를 사하시고, 주님의 때에 다시 오실 그분께서 소유하고 계시는 사유재산이 바로 교회이기 때문입니다.
자 그렇다면, 교회는 예수님의 소유이기 때문에, 가만히 내버려 둬도 알아서 잘 돌아갈까요? 태엽 인형처럼 감아놓기만 하면 설계된 대로 알아서 문제없이 구동될까요? 네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교회를 유기체와 같이 세우셨고, 교회와 예수님의 제자들이 지상에서 마땅히 감당해야 하는 증인과 청지기의 사명들을 주셨습니다. 그 사명이 19절 말씀에서 등장하는데요. 19절 말씀 함께 읽겠습니다. 시작. (in)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하시고” (out)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천국 열쇠를 줄 것이라고 말씀하시죠. 여기서 천국 열쇠라는 것은 원어로, 하늘나라의 열쇠들입니다. 그런데 참 아이러니하게도, 일반적으로 19절 말씀을 이해할 때, 천국 열쇠 따로, 뒤에 나오는 내용 따로. 마치 별개의 내용처럼 이해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하지만 이 말씀은 하나로 연결해서 이해해야 합니다. 천국 열쇠와 묶고 푸는 것이 다른 내용이 아니라 같은 내용이라는 것이죠.
그렇다면 천국 열쇠와 묶고 푸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살펴보겠습니다. 우선 19절 말씀을 해석함에 있어서 학자들마다 견해가 상이한데요.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울 것이라는 말씀에서 반석이 누구냐. 베드로냐. 베드로의 신앙고백이냐. 이 문제와 마찬가지로 천국 열쇠의 소유권이 누구에게 있는가. 묶고 푸는 것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런 두 가지의 문제가 있습니다.
먼저 천국 열쇠의 소유권이 누구에게 있는지 살펴볼텐데요. 로마 카톨릭의 경우에는 예수님께서 천국 열쇠를 베드로 개인에게 주셨기 때문에, 열쇠의 소유권이 베드로에게 있다고 봅니다. 그래서 이들에게 마태복음 16장 19절 말씀은 로마 카톨릭 교리의 근간을 이루는 핵심적인 말씀으로 작용합니다. 또한 이 말씀이 그들에게 얼마나 중요한 말씀으로 여겨지는가 하면, 바티칸에 위치한 성 베드로 대성당 입구에 세워진 베드로 동상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베드로 대성당은 베드로의 무덤 위에 세워진 성당이라는 전설이 있으며, 로마의 4대 성당 중에 하나이자, 최대 6만 명을 수용할 수 있는 거대한 규모의 성당입니다. 바로 이 성당 입구에 위치한 베드로 동상을 보면, (이미지) 베드로가 천국 열쇠를 쥐고 있는 모습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엄청난 상징성을 부여한 것이죠. (out) 따라서 로마 가톨릭은 천국 문을 열고 닫을 수 있는 권세를 소유한 사람이 베드로 한 사람뿐이며, 이에 따라 베드로가 공교회의 지도자, 다시 말해 초대 교황이고, 오늘날 교황이 그 권세를 이어받았다고 주장합니다. 교황 수위권의 근거 구절이 마태복음 16장 19절이라는 것이죠. 이러한 의미에서 베드로 개인이 천국 열쇠를 받았다는 해석은 그들에게 있어서 타협할 수 없는 핵심적인 주장이되는 것입니다.
자, 그렇다면 과연 그들의 주장대로 베드로 개인이 천국 열쇠를 단독으로 소유하고 있을까요? 마태복음 18장 18절 말씀 함께 읽겠습니다. (in) 시작.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무엇이든지 너희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아멘.
여기서 “너희가”라는 표현은 예수님의 제자들을 가리킵니다. (out) 물론 18장 18절에서 하늘나라의 열쇠들이라는 표현이 등장하지 않기 때문에, 천국열쇠는 여전히 베드로의 소유가 아니겠느냐. 이렇게 반문할 수 있겠습니다만,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이 말씀이 마태복음 16장 19절 말씀과 같기 때문에, 천국열쇠라는 표현이 등장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똑같은 의미로 이해해야 합니다. 따라서 베드로만 천국열쇠의 소유권과 사용 권한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제자들도 똑같이 받은 것입니다.
이뿐만 아니라 에베소서 2장 20절 말씀을 보시면, 교회의 기초가 무엇인지를 확인할 수 있는데요. 에베소서 2장 20절 말씀 함께 읽겠습니다. 시작. (in)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잇돌이 되셨느니라” 에베소서에 따르면 베드로 개인이 교회의 기초가 아니라, 사도들과 선지자들 모두 교회의 기초가 된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이어서 요한계시록 21장 14절 말씀 함께 읽겠습니다. (in) 시작. “그 성의 성곽에는 열두 기초석이 있고 그 위에는 어린 양의 열두 사도의 열두 이름이 있더라”
요한계시록 21장 9절 이하의 말씀에는, 하나님께로부터 내려오는, 하늘에서 내려오는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에 대한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out) 그런데 새 예루살렘에 대한 환상에서 핵심적으로 부각되는 것은 베드로가 아닌, 어린 양의 열두 사도의 열두 이름입니다. 이러한 점에서 교회의 기초를 이루고, 천국 열쇠의 권한을 소유한 사람은 베드로 한 사람이 아닌, 열두 제자에게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여기서 더 나아가 마태복음 16장 문맥에 비추어 생각해 보겠습니다. 마태복음 16장 18절 말씀에 따르면, (in) “내가 이 반석 위에 나의 교회를 세울 것이다.” 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베드로! 나의 하나뿐인 수제자.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탁월한 능력을 가진 너의 위에 나의 교회를 세우겠다. 이렇게 말씀하지 않으시고, 너는 페트로스이다. 내가 이 페트라 위에 나의 교회를 세울 것이다.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다시 말해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라는 진리 위에 예수님 자신의 교회를 손수 세울 것이라고 말씀하신 겁니다. (out) 이러한 점에서 우리는 베드로가 고백한 올바른 신앙고백과 그 내용에 기초한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가 진리 위에서 천국 열쇠를 소유하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자,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친히 세우신 교회. 예수님께서 소유하신 교회. 천국 열쇠를 가진 그분의 교회는 천국 열쇠를 어떤 곳에 어떻게 사용해야 할까요. 이 문제를 해결하려면 마태복음 16장 19절 말씀의 의미를 올바르게 이해해야 합니다. 마태복음 16장 19절 말씀 다시 한번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시작. (in)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하시고”
이 구절은 신약성경에서 해석하기 어려운 난문 중의 하나입니다. (in) 이 말씀을 해석할 때 우리가 주의해야 할 부분은, 노란색 부분과 빨간색 부분인데요. 특별히 빨간색 부분을 주목해야 합니다. 이해를 돕기 위해서 이 부분만 따로 살펴보면, (in) 매일 것이요. 에스타이 데데메논. 풀리리라. 에스타이 렐뤼메논. 이 내용을 이해하는 것이 핵심입니다. 이 표현들이 문법적으로 어떤 문제가 있는가 하면, 우리말로 “매일 것이다. 풀릴 것이다.”라는 말은 그냥 단순하게 미래 수동태 정도로 쉽게 생각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원어로는 이 부분이 be동사의 미래 중간태 직설법과 완료 수동태 분사가 결합된 형태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신약성경에서 이런 형태는 마태복음 16장 19절을 제외하고 단 한 번도 등장하지 않습니다. 또한 번역본에 따라 차이점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영어 성경 많이 보시는 분들의 경우에는, (in) 역본에 따라 다르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빨간 글씨 보시면, NIV 성경과 ESV 성경은 미래 수동태로 번역한 반면에, NASB 성경은 미래완료 수동태로 번역했습니다. 앞서 설명해 드린 대로, 원어의 뉘앙스를 살려서 번역한다면, 미래완료 수동태로 번역해야 합니다. (out) France라는 학자는 이 부분을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in) “미래완료 수동태 동사가 사용된 것은 이례적이며 사실상 부자연스러운 표현이다. 만일 마태가 매일 것이다. 풀릴 것이다라는 뜻을 전하고 싶었다면, 단순 미래 수동태라는 훨씬 자연스러운 구문을 사용했을 것이다.” (out)
여기서 의문점이 생깁니다. 예수님께서는 신약성경에 등장하지도 않는 문법, 심지어 부자연스러워 보일 수 있는 표현을 어떤 이유로 사용하신 걸까요. 마태복음 주석가들은 마태복음 16장 19절의 미래완료 수동태라는 굉장히 독특한 문법 형태를 연구하면서 이 시제가 하늘에서 이미 내려진 결정을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했습니다. 조금 더 구체적으로 설명해 드리자면, 19절에서 미래 시제가 주는 인상은, 아무도 알 수 없는 미래에 누군가 땅에서 무언가를 풀면 그대로 하늘에서 풀리는 것처럼 생각할 수 있겠습니다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는 거예요. 땅에 있는 주체가 하늘의 일을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굳이 미래완료 수동태로 표현하신 이유는, 하나님께서 결정하신 대로 미래에 그렇게 이루어지게 하신다는 것을 표현하기 위함입니다. 무엇이든지 땅에서 묶으면, 그것이 하나님의 뜻에 따라 묶은 일이라면, 그래서 천국열쇠를 소유한 자가 땅에서 묶으면 하늘에서 묶여질 것이라는 겁니다. 반대로 풀리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천국열쇠를 소유한 자가, 하나님의 뜻에 따라 땅에서 풀었다면, 하늘에서도 풀려질 것이라는 겁니다.
지금까지 살펴본 내용을 정리하겠습니다. 베드로는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께 천국 열쇠를 받을 것이라는 말씀을 들었으나, 사실상 다른 제자들도 천국 열쇠를 받았다는 사실을 살펴보았습니다. 또한 천국 열쇠의 개념은 베드로라는 개인이 지상에서 하늘의 주도권을 잡고 천국 문을 자신의 뜻대로 여닫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따라 하늘에서 결정된 대로, 하나님께서 예정하신 목적에 합한 결정을 하게 만드는 신적인 인도하심이 이 안에 담겨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말씀을 묵상하면 묵상할수록 참 오묘합니다. 땅에서 묶으면, 하늘에서 묶여지는데, 하늘에서 이미 묶여져 있는 것을 땅에서 묶는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하나님의 예정하심에 따라, 천국 문에 들어올 사람을 인도해서 천국 문을 열어주는 역할을 교회가 감당하는데, 이 과정에서 교회가 문지기 역할을 감당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때 문지기는 본인의 뜻대로 문을 열고 싶으면 열어주고, 닫고 싶으면 닫는 것이 아닙니다. 문지기는 문을 열거나 닫는 것에 대해서 결정할 수 있는 권한이 없습니다. 문지기는 그저 청지기로서 문을 열어 주는 역할을 맡은 것뿐입니다. 교회를 통해 예수님을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로 고백하는 사람들이 천국에 들어가는 것을 허용하는 역할을 감당하는 것이죠. 이를 실제적으로 표현하자면, 하나님께서는 허물과 죄로 죽어있는 사람들의 심령이 예수 그리스도를 만날 수 있도록, 예수님을 찾아갈 수 있도록 돕는 일에 우리를 사용하신다고 이해할 수 있겠습니다.
그렇다면, 천국 열쇠를 소유한 교회가, 그 사명을 이어받은 우리가, 오늘날 어떻게 하늘나라의 열쇠를 사용해야 할까요?
천국열쇠 사용법 첫째는, (in) 복음을 전파하는 것과 선교 사역을 통해 하늘나라의 열쇠들을 사용할 수 있습니다. 교회는 천국의 열쇠들을 가지고 있다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열쇠를 말씀하실 때, 단수가 아니라 복수로 말씀하신 것은, 다양한 방면에서 교회가 복음을 전파하고, 선교 사역을 감당해야 함을 암시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하늘나라의 문을 열어 주는 방식에는 여러 방식이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땅에서 하늘 문을 여는 자들은, 물리적으로 문을 열어 주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피부로 실감하기 어려울 수 있겠습니다만, 교회는 예수님께 천국의 열쇠들을 받았기 때문에, 땅에서 하늘의 권한을 행사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미 결정되어있는 것을 인도하심에 따라 행한다고 하더라도, 천국 문을 여는 주체가 되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영광스럽게 여겨야 합니다.
또 한편으로, 우리가 복음 전하는 일들을 감당할 때, 그리고 선교사님들을 후원하고 다양한 방면으로 도와드릴 때, 우리의 선택으로부터 비롯되는 결과가 하늘 문을 여는 행위로 연결된다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신중하게 결정해야 할 것입니다. 사적인 감정이나, 잘못된 목적의식을 가지고 복음 전파와 선교 사역을 감당하는 것은, 천국 문을 닫는 행위가 될 수 있음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이어서 천국열쇠 사용법 둘째는, (in) 올바른 성경해석에 근거한 가르침으로 성경 말씀을 바르게 적용하는 것으로 천국 열쇠를 사용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알고 그분을 믿는다고 신앙 고백하는 사람들이 하나님에 대해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성령 하나님에 대해서, 구원과 재림과 종말과 심판에 대해서, 구원받은 자의 성화의 삶에 대해서 올바른 가르침과 적용이 우리 삶의 현장에서 끊임없이 일어나야 합니다. 만약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그렇게 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마태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책망하신 말씀과 똑같은 말씀을 듣게 될 것입니다.
마태복음 23장 13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시작. (in)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천국 문을 사람들 앞에서 닫고 너희도 들어가지 않고 들어가려 하는 자도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도다” (out)
일반적으로 우리는 하나님께 심판받는 사람들이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이며 죄를 지은 사람들이라고 생각합니다. 원론적으로는 맞는 말입니다만, 마태복음 23장 13절 말씀에 따르면,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화가 있다고 하는데요.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천국 문을 사람들 앞에서 닫고, 너희도 들어가지 않고, 들어가려고 하는 사람도 들어가지 못하게 했기 때문입니다. 무슨 십계명을 어겼다거나, 중범죄를 저질렀다거나 하는 문제가 아닙니다. 천국열쇠를 소유하고 있음에도 그 열쇠를 바르게 사용하지 않고, 들어가려고 하는 사람도 들어가지 못하게 막으면, 하나님께서 그 삶에 화를 내리시겠다는 겁니다. 여기서 우리는 교회에서 일어나는 수많은 영적인 시험들에 대해서 주의해야 합니다. 나의 말 한마디, 나의 행동 하나가, 천국 문을 닫는 행위가 될 수 있음을 주의해야 합니다.
만약 우리가 교회 지체들 가운데 누가 되었든, 그 연약한 심령에 상처를 준다면, 그 행위는 천국 문을 닫는 행위가 될 수 있습니다. “화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천국 문을 사람들 앞에서 닫고 너희도 들어가지 않고 들어가려 하는 자도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도다.” 이 말씀을 듣는 대상이 우리 자신이 되면 안 되지 않겠습니까? 그러니 부디 천국 열쇠를 올바르게 사용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우리 화평의 성도님들 이제 말씀을 맺겠습니다. 베드로가 신앙 고백한 대로, 예수님은 그리스도이시며,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예수님은 이러한 고백과 진리의 토대 위에 교회를 세우셨습니다. 예수님의 교회는 사람이 소유할 수 없으며, 예수님께서 친히 건축하시고 소유하시는 교회입니다. 이러한 교회는 음부의 문들에 대해서는 공격적인 입장을 취합니다. 영적으로 악한 무리들과 음부의 권세들은 교회를 무력으로 이길 수 없습니다.
또한 교회는 하나님의 자녀들에 대해서 천국 문을 열어 주는, 아름다운 청지기의 역할을 감당합니다. 세상이 아무리 교회를 손가락질하고 힐난하더라도, 교회의 참된 가치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교회 욕을 백만 번 천만번 한다고 하더라도, 사람들이 교회를 쓰레기라고 인식한다고 하더라도, 괜찮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는 온 세상의 비난보다 강하기 때문입니다. 교회와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은 이와 같은 예수님의 크신 은혜를 담대하게 선포합니다.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화평의 성도님들, 세상이 교회와 신자의 믿음을 비난하는 것에 대해 어떤 태도를 취하십니까? 우리 자신의 연약함과 부족함을 느끼는 것과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임을 선포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입니다. 세상이 아무리 비난을 쏟아부어도,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는 그분께서 흘리신 보혈의 은혜 속에서 여전히 맑고 깨끗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세상이 무엇이라 말하든 관계없이 우리 주님께서 맡겨주신 천국 열쇠를 올바르게 사용하는 데에 최선을 다해야 할 것입니다. 어디서 어떻게 사용하는지 몰라서, 엄한 곳에 사용하다가 주님께 책망받아서는 안 될 것입니다. 창세 전에 예정된 주님의 자녀들이 주님의 품으로 돌아올 수 있도록 복음을 전파하며, 선교사님들을 물질과 기도로 후원함으로써 천하보다 귀한 영혼들이 돌아오도록 우리 모두가 힘을 더해야 할 것입니다. 또한 우리의 삶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함으로써 천국 열쇠를 올바르게 사용해야 할 것입니다.
오늘 함께 나눈 말씀을 묵상하시면서, 과연 나는 천국 열쇠를 어떻게 사용하고 있는지, 천국 열쇠를 썩혀두고 있는 것은 아닌지, 아니면 천국 열쇠를 올바르게 사용하기 위해서 매일 매일 부단히 노력하고 있는지 돌아보시고, 훗날 우리 주님을 다시 만났을 때, 천국 열쇠를 올바르게 잘 사용한 청지기라고 칭찬받으시는 모든 화평의 성도님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은혜와 자비가 풍성하신 하나님 아버지 감사를 드립니다. 고아같이 우리를 내버려두지 않으시고, 자격 없는 우리를 주님의 자녀 삼아 주시니 감사를 드립니다. 목이 뻣뻣하고 교만한 우리가, 겸손한 마음과 말씀을 사모하는 마음을 품게 된 모든 것이 주님의 은혜임을 고백합니다. 한없는 은혜에 감사를 드리며, 우리에게 맡겨주신 청지기 사명을 온전히 감당하기를 원하오니, 천국 열쇠를 통해 천하보다 귀한 영혼들이 주님 품으로 돌아오는 역사를 체험케 하시고, 그 무엇보다 복음 전파와 말씀대로 살아가는 복된 인생의 소중함을 기억하는 우리 모두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감사드리며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바른성경
마 16:13 예수께서 빌립보의 가이사랴 지방에 가셔서 자신의 제자들에게 물으시기를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고 하느냐?" 하시니,
마 16:14 그들이 말하였다. "어떤 이들은 세례자 요한이라고 하고, 다른 이들은 엘리야라고 하고, 또 다른 이들은 예레미야 또는 선지자들 중의 하나라고 합니다."
마 16:15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시기를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하시니,
마 16:16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말하였다. "주님은 그리스도이시며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마 16:17 예수께서 그에게 대답하여 말씀하셨다.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다. 이를 네게 계시하신 분은 사람이 아니라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이시다.
마 16:18 나 또한 너에게 말한다. 너는 베드로이다.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겠으니, 음부의 세력이 그것을 이기지 못할 것이다.
마 16:19 내가 너에게 하늘나라의 열쇠들을 주겠으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고,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
마 16:20 그 후에 예수께서 아무에게도 자신이 그리스도라는 것을 말하지 말라고 제자들에게 경고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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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병수 – 마태복음의 교회론
교회는 시작점과 최종점을 예수 그리스도께 두고 있음.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친히 세우시며, 그리스도께서 세상의 끝날까지 교회와 함께 하심.
(4) 교회와 음부
음부의 문들이 교회를 당하지 못할 것이다. 문들이라는 표현이 겹겹의 문들을 뜻하는 것인지, 다면의 문들을 뜻하는 것인지 분명하지 않음. 어떻게 사용되었든 음부가 방어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음. 음부의 행위를 묘사할 때 사용된 카티스퀴에인은 전쟁 용어임. “~보다 힘이 세다”라는 의미를 가짐. 이 단어는 부정사와 함께 사용될 때 “~보다 힘이 세지 못하다, ~을 당해내지 못할 것이다”라는 뜻을 갖게 됨. 이 구절은 틀림없이 아브라함의 씨가 그의 대적자들의 문을 얻을 것이라는 약속과 깊은 관련이 있음(창 22:17, 24:60).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주신 약속을 예수님께서 교회에게 다시 주심.
사탄의 나라가 아무리 강한 문들을 가지고 방어한다고 해도, 교회의 공격을 감당하지 못할 것. 사탄의 나라는 교회의 세력 앞에 방어할 힘이 없음. 이는 교회가 담대하게 어둠의 나라를 공격해야 할 것을 알려 줌. 교회는 공격하는 교회임. 교회는 반석 위에 서 있기 때문에 무슨 일이 있어도 흔들리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사탄의 나라를 뒤흔듦. 이렇게 교회는 영역을 꾸준히 확장시킴(겨자씨 비유 마 13:31-32; 누룩 비유 마 13:33).
(5) 교회와 천국
“내가 너에게 천국의 열쇠들을 줄 것이다”
여기서 “너에게”라는 말이 베드로 개인을 가리키는 것인가? 베드로는 교회를 대표하는 사람이 아니라 통일성을 의미함. “너”라는 말로써 교회의 단일하며 통일된 전체를 지시함. 교회는 천국의 열쇠들을 받음. 교회는 음부에 대해서는 문들을 파괴하는 전투적인 모습을 가지지만, 천국에 대해서는 문을 순조롭게 여는 자격을 가짐. “천국의 열쇠들”을 가진다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이는 마 23:13에서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천국을 닫는다는 말로부터 도움을 얻을 수 있음.
이들이 천국을 닫는 것은 자기들도 들어가지 않고 들어가는 사람들도 들어가지 못하게 하기 위함임. 교회는 천국의 열쇠들을 가지고 있어서 사람들이 그리로 들어가는 역할을 함. 열쇠들은 교회가 다양한 방면에서 선교해야 할 것을 암시함. 교회는 이러한 천국의 열쇠들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교회에게는 땅에서 하늘의 권한을 갖는 것. 선교적인 차원에서 교회는 하늘과 땅을 연결시킴. 이 사실로부터 우리는 교회가 얼마나 능력있는 존재인지를 깨달아야 함. 또한 교회에게 땅에서 하늘을 결정하는 권세가 주어졌다면 교회는 선교와 치리를 결정함에 있어서 얼마나 신중해야 할 것인지를 생각해야 하며, 선교와 치리를 진행함에 있어서 얼마나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인지를 생각해야 함.
3. 교회와 세상
1) 세상에서 불려진 교회
교회는 세상에서 부르심 받았음(마 22:9). 세상이 악한 자와 선한 자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에(마 22:10), 이 때문에 교회는 그리스도께서 함께하심에도 불구하고 다양성과 혼합성을 지닌 (불완전한) 혼합체로 묘사됨.
2) 세상 안에 있는 교회
교회는 세상 안에 있음(마 5:13-14). 그러나 이는 교회가 세상의 일부라는 것을 의미하지 않음. 하나님께서 세상 가운데 교회를 부르셨기 때문에, 교회는 세상에 대해 책임을 가짐. 교회는 이 세상에 대한 책임을 감당하기 위해 의식을 가지고 대응할 것을 항상 준비해야 함.
3) 세상에 마주서는 교회
교회는 세상과 마주섬(마 5:14-16). 교회는 산들 위에 우뚝 선 도시이며, 등경 위에 높이 달린 등불임. 교회는 세상의 일부가 될 수 없는, 질적으로 다른 모습을 지닌 존재임. 문제는 아름다운 열매를 맺는 것에 있음(마 7:19). 아름다운 열매를 맺는 것은 듣고 행하는 것에 달려있음(마 7:24). 참된 교회의 표식은 사람들이 보고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 영광 돌리게 만들 동기가 되는 착한 행실임(마 5:16).
4) 세상으로 가는 교회
세상으로부터 부르심 받은 교회는 다시 세상으로 보내심 받음(마 28:16-20).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가라고 명령하신 것처럼(창 12:1), 예수님께서도 교회에게 “가라”고 명령하심(마 28:19). 교회는 예수님의 명령을 따름. 교회는 예수님 제자들의 전체이기 때문. 예수님께서는 지상사역 중에 제자들을 만드시고, 이 제자들로 하여금 다시 제자 삼게 하심. 제자 삼기 위해 세상으로 가는 교회는 먼저 예수의 제자로서의 따름을 전제로 함. 예수님의 입장에서 볼 때 예수님은 제자들과 세상 끝날까지 함께 하시고, 제자들의 입장에서 볼 때 제자들은 예수님과 동일한 삶을 구성함. 예수님과 같은 모습으로 복음을 전파하고(마 4:17; 10:7), 예수님의 고난에 동참함(마 10:38-39; 16:24-25). 교회는 선교하는 교회이며, 교회는 순교하는 교회임. 선교는 순교를 전제로 하며 순교는 선교를 결과시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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틴데일
베드로는 예수님의 제자들 중에서, 초기에 교회를 발전시킨 정평이 난 리더였음. 기초석의 이미지는 신약성경에서 주로 그리스도에게 적용되었지만(고전 3:10이하; 벧전 2:6–8 등), 에베소서 2:20과 요한계시록 21:14은 기초로서의 사도들에게도 적용되었음.
이 단락의 역사적 확실성에 대한 주요 반대중의 하나는 ‘교회를 세우는 것’이 예수님이 사역하는 시대에는 불가능한 교회적 관심이라는 것. 그러나 이 ‘에클레시아’(ekklēsia)라는 단어는 구약적 배경과 관련하여(칠십인역은 이 단어를 하나님의 백성의 모임이나 공동체를 뜻하는 히브리어 ‘카할’[qāhāl]의 번역으로 사용함), 예수님 제자들의 메시아 공동체를 묘사하기에 아주 적절함.
게다가, “메시아 공동체 없는 메시아는 유대인에게 생각할 수 없는 것이었음”(AB, 195). ‘세움’이라는 은유는 베드로라는 이름과 관련하여 자연스럽게 사용될 수 있는데, 어떤 수직적인 구조를 요구하지는 않는다(이것은 또한 메시아가 와서 성전을 건축할 것이라는 기대를 반향함). 하나님의 정결케 된 백성의, 새로운 공동체는 세례 요한의 선교의 핵심이었고, 예수님 사역의 필연적인 결과였음. 왜냐하면 예수님 사역을 통해 사람들은 믿음과 불신으로 나뉘어져, 결국 예수 공동체를 형성했기 때문. 놀라운 것은 ‘공동체를 세운다’는 개념이 아니라, 이 공동체를 예수님이 ‘하나님의’ 공동체보다, ‘나의’ 공동체로 묘사하는 대담함에 있음.
‘음부의 권세’(the gates of Hades)는 이사야 38:10에 나온다(히브리어로는 ‘gates of Sheol’이다). 지혜서 16:13과 다른 유대 문서에서는 이 단어가 ‘죽음의 문’(시 9:13; 107:18 등), 죽은 자들의 장소를 뜻함.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는 공동체가 음부의 권세에 의해 죽거나 갇혀있지 않을 것이라는 뜻. 이 말씀은 죽음의 권세의 공격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죽음의 과정을 이야기함. 더욱이 이 본문은 교회가 죽음의 권세를 공격하는 사상을 지지함(이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일종의 교회의 ‘음부강하’를 말하는가?!). 그래서 베드로는 하나님의 회복된 백성으로서, 새로운 예수 공동체의 기초석이 되며, 이 공동체는 영원할 것.
〈19〉 베드로는 앞장서서 인도하는 역할을 할 뿐만 아니라, 악한 권세를 극복하는 역할도 함(18:18의 후반부에서 보여지듯이, 비록 그 혼자 가지고 있는 권위는 아닐지라도). 열쇠의 이미지는 집의 출입을 통제하는 문지기의 역할보다, 집을 관리하는 청지기로서 역할을 암시함(참조, 사 22:15과 연결지어, 22:22). 따라서 이슈는 교회의 출입을 허가하는 문제가 아니라(이것은 천국을 의미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주권을 위임받은 권위에 있음. 그 권위는 ‘매고’, ‘풀’ 때 행사됨. 이 매는 것과 푸는 것은 무엇이 허락되었고, 허락되지 않았는 지를 선언하는 랍비적 용어임(매는 것은 금지를 뜻하고, 푸는 것은 허락을 뜻한다). 그러므로 이 구절은 아마도 교회 안에서 법을 제정하는 권세를 말하는 것 같음. 물론 이 구절은 용서와 관련하여, 직접적인 암시를 나타냄에 틀림없지만, 이것은 18:18에 더 구체적으로 적용됨(또한 이 용서의 관점은 요 20:23에 비슷하게 등장함). 베드로가 이 권세를 사용했던 실제 예는 그가 솔선하여 이방인 회심자들을 교회가 받아들이도록 할 때였음(행 10–11; 참조, 행 15:7–11). ‘매일 것이요’와 ‘풀리리라’는 문자적으로 미래 완료임. 미래완료시제는 영어에서처럼, 헬라어에서도 과장의 의미가 있음. 따라서 이 미래완료시제는 다분히 의도적임. 이 경우 하늘이 베드로의 독립적 결정을 비준하는 것이 아니라, 베드로가 하늘에서 이미 결정된 것을 전달하는 것.
〈20〉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는 예수님의 명령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8:4의 주석을 보라. 여기서의 주제는 예수님의 메시아 신분임. 21–23절은 심지어 베드로도 예수님의 사명을 아직 충분히 이해하지 못하였다는 것을 보여줌. 그 사명은 인기나 승리보다는 거절과 고난이었음. 일반 백성에게 이런 오해의 위험은 훨씬 더 컸음(참조, 14:22의 주석). 민족적으로 이해된 ‘그리스도’(메시아)라는 용어는 잘못된 열정을 더 촉진시킬 수 있었음. 그래서 예수님은 그의 사명이 퍼져나가지 못하게 했음. 베드로의 고백은 하나님이 주신 진정한, 그리고 잘 이해된 고백이었음. 그러나 21절의 해석없이, ‘그리스도’라는 칭호 자체는 굉장히 부적절한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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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ICNT – R.T.프랜스 (pp.719-)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하늘에서도 풀리리라.
“매는” 은유의 초점은 죄에 대한 판단에 맞추어짐. 두 동사의 목적어는 중성임. 매고 푸는 대상은 사람이 아니라 사물이나 문제라는 것.
미래완료 수동태 동사가 사용된 것은 이례적이며 사실상 부자연스러운 표현. 만일 마태가 매일 것이라, 풀릴 것이라는 뜻을 전하고 싶었다면, 단순 미래 수동태라는 훨씬 자연스러운 구문을 사용했을 것. 이 구절은 신약 성경에 나오는 유일한 미래완료 수동태임. (다른 경우는 70인역)
본문에 미래완료형이 반복된 것에는 이유가 있는 것으로 보임. 단순미래인 경우 베드로가 주도권을 쥐고 하늘이 따랐을 것. 그러나 미래완료는 베드로가 결정한 내용이 이미 하늘에서 결정되어진 것이라는 사실을 드러냄으로써 그를 교회의 새로운 방향에 대한 주도권자가 아니라 하나님의 예정된 결정을 이루는 신실한 청지기로 제시함. 본문은 신적 보장에 대한 약속이 아닌 베드로로 하여금 하나님의 예정된 목적에 합한 결정을 하게 하는 신적 인도하심에 대한 약속이라고 할 수 있음. (카슨, Davies and Allis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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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ECNT – 데이비드 터너
예수는 자신을 건축자로 묘사함. 이러한 점에서 예수는 자신을 교회로 기초로 말하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음. 또한 베드로의 사도적 고백도 교회의 기초가 아님. 고백하고 있는 사도 베드로가 바로 교회의 기초임. 그러나 문맥상 베드로는 전체 사도들을 대신해서 말하고 있는 것이 분명하기 때문에 베드로가 홀로 교회의 기초가 된 것이 아니라 동등한 사도들 가운데 첫 번째로서 교회의 기초가 된 것. 오늘날 마태복음에 대한 복음주의 주석 학자들 대부분이 이에 동의함.
(J. Broadus, Blomberg, Bruner, Carson, France, Hagner, Hendricksen, Keener, Morris, Ridderbos)
열쇠와 매는 것과 푸는 것
기초와 열쇠 은유들을 관련시키는 것은 우리가 교회와 천국을 분리시킬 수 없으며 또한 교회는 땅에서 천국을 확대시키는 기관임을 보여줌.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은 열쇠를 관리하고 천국 권위를 행사함으로써 교회의 기초가 되는 그들의 역할을 수행함(사 22:15, 22; 계 1:18, 3:7, 9:1-6, 20:1-3). 이 권위는 매고 푸는 것을 통해 행사됨. 사도들은 예수에 대한 자신들의 신앙고백을 통해 교회에 들어가는 사람들을 조절하여 그들의 죄가 용서받도록 함(마 10:7, 13:19-23, 24:24, 28:18-20).
다른 사람들은 16:19와 18:18을 비교하면서 매고 푸는 것이 교회의 권징을 묘사한다고 결론 내림. 이는 매고 푼다는 주제가 특정 행위들을 허용하고 금지하는 결과를 가져오는 성경 율법의 할라카적 해석을 가리키는 랍비 본문들을 언급함으로써 지지를 받음. 이 해석을 판단하는 것은 어려움. 천국에 들어가는 개념과 공동체 내에서 용인되는 삶을 유지하는 것을 결합하는 것이 가장 좋을 것 같음. 그렇다면 교리와 권징은 실제로 하나이며(Brnuer), 하나님의 뜻을 선포함으로써 권한을 부여받은 대리인은 하나님의 통치에 대한 문을 열거나 닫는 것.
그러나 이 문제는 문맥을 통해 해결해야 함. 16:16-19의 이미지는 주그하살인 예수에 대한 사도적 신앙고백을 그대로 따라하는 사람들이 들어감으로써 교회를 세우는 일과 관련이 있음. 교회의 기초를 세우는 지도자들이며 천국을 이 땅에 확대하는 기관으로서의 베드로와 사도들은 천국의 문지기들임. 그들은 16:16의 진리를 지속적으로 권위 있게 선포하도록 안내하며, 그렇게 함으로써 교회를 통해 예수를 고백하는 자들이 천국에 들어가는 것을 허용함. 예수를 고백하지 않는 자들은 천국에 들어갈 수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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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르만 리델보스 – 마태복음
엡 2:20과 계 21:4에서 다른 제자들도 하나님의 새로운 백성을 위한 기초로 부르심 받았으며,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부여하신 권세는 다른 제자들에게도 주어졌음(요 20:21-23). 심지어 교회에게도 주어졌음(마 18:18-20). 베드로는 그의 고백 때문에 홀로 선발된 것.
그러므로 주님께 받은 베드로의 축복과 위치는 제자들에게 하나의 표식이 되었음. 그것은 교회의 기초가 되는 일을 그와 함께 하게 될 때, 베드로의 고백이 그들의 모든 사역을 위한 조건과 지침(지도 원리)이 되어야 한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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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더반 – 그랜트 오즈번
반석은 베드로이다! (그랜트 오즈번)
본문은 마태복음에서 “교회”(에클레시아)가 등장하는 3회의 경우 중 첫 번째임(18:17에서 두 번 나타남). 어떤 이들은 이 단어의 두 구성 요소(에크 + 칼레오)를 근거로 밖으로 불러낸 신자들을 의미한다고 생각함. 하지만 이 단어는 일반적인 목적으로 모인 사람들의 모임을 뜻함. 그리스도인들의 모임을 가리키는 것.
16:19
열쇠는 고대 세계에서 하늘의 영역으로 가는 문을 여는 권세와 능력을 얻는 것을 의미했음. 열쇠를 갖는다는 것은 상당한 권세를 의미함. 계 3:7에서 예수님께 반복됨(계 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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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LAB 주석 **
마 16:17
우리는 종종 어떤 사람들이 어디에서 통찰이나 믿음을 얻게 되었는지에 관해 의문을 가짐. 믿음이 어디에서 오는지 알았다면, 우리는 믿음의 공로를 거기에 돌릴 수 있었을 것.
만일 믿음이 우리 내부에서 온다면, 우리 자신의 공로가 인정 받아야 함. 그런데 만일 믿음이 우리 외부로부터 온다면, 하나님께서 공로를 인정 받으심. 소경이 세상을 보기 위해서 도움이 필요하듯이, 영적으로 죽은 사람들도 영적인 생명을 발견하기 위해서는 도움이 필요함. 예수님께서 그러한 도움을 우리에게 주시는 것. 만약 당신의 믿음에 대해 자랑할 기회가 오면, 하나님에 대해 자랑하라. 그분이 바로 우리에게 믿음을 주시는 분이시다!
예수님은 베드로의 신앙고백에 대해 복이 있다고 말씀하심. 마카리오스는 하나님의 은혜로운 인정에 의한 호의를 의미함.
16:17
예수님께서는 사단이 베드로를 부추겨서 예수님께 다가오는 죽음을 피하시라고 말하는 반면(16:23), 오늘 본문에서는 아버지께서 이 진리를 베드로에게 계시하셨다고 강조함. 16:18에서 베드로는 반석이지만, 16:23에서 그는 ‘넘어지게 하는 자’가 됨. 이 대조적인 이미지는 베드로의 우유부단한 특성을 보여줌.
16:18
베드로는 반석인가? 반석이 무엇을 가리키는가? 반석은 네 가지 방식으로 설명할 수 있음.
1. 반석은 예수님 자신(십자가에서 우리를 위해 죽으심에 의한 구원 사역)을 가리킴. 이는 예수님께서 우리 믿음의 신적인 건축가이시며, 그분 자신이 모퉁잇돌이시라는 의미임. 그러나 이러한 해석은 본문의 의미를 있는 그대로 나타내는 것이 아님. 초점은 베드로와 그에 대한 예수님의 응답에 있음.
2. ‘반석’은 교회의 최고의 지도자 혹은 첫 번째 감독인 베드로임.
이 견해는 로마 가톨릭 학자들에 의해 장려되었음. 이 견해는 그들 교회의 교권 제도에 권위를 부여하며, 베드로와 그 후계자들 각각을 교회의 최고 교황으로 여김. 그러나 이 구절들에는 계승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으며, 초대교회가 베드로에 대해 큰 경의를 표혔으나 그를 최종 권위자로 여겼다는 증거 역시 전혀 없음. 이러한 견해는 그들의 기원을 베드로에게로 거슬러 올라가지 않는 교회들을 배제시킴으로 심각한 문제를 일으킴.
3. 반석은 베드로가 먼저 했고, 또 이후에 모든 참 신자들이 하는 믿음의 고백을 가리킴.
이 견해는 2번 견해에 대한 반작용으로서, 루터와 종교개혁자들에 의해 장려되었음. 하지만 베드로의 고백을 존중하고 그의 지도력을 도외시함으로써 이 구절을 불필요할 정도로 추상적으로 만들고 있음. 베드로는 교회 안에서 지도자로 여겨졌음. “너는 베드로라”에서 “너”는 강조어구로, 베드로의 역할을 강조함.
4. 반석은 제자들의 지도자와 대변인(기초석)으로서의 베드로를 가리킴.
베드로가 예수님의 진정한 신분을 드러내 보였듯, 예수님께서도 베드로의 신분과 역할을 드러내셨음. 이 문맥이나 어떤 서신서에서도 사도직의 계승을 발견할 수 없지만, 교회의 지도자와 대변인으로서 베드로의 역할은 도외시되어서는 결코 안 됨. 이 견해는 베드로가 그리스도의 신분에 관한 믿음과 통찰을 계시 받은 사람이고 그리스도를 고백했던 첫 번째 사람이기 때문에, 베드로가 선구자라는 점에서 2번 견해의 요소를 지니고 있음.
‘교회’(에클레시아)라는 단어는 복음서 중 오직 마태복음에서만 발견되지만, 그 개념은 사복음서 모두에서 두루 발견됨. 교회는 불러냄을 받은 하나님의 백성을 의미함. 베드로의 권위는 사도행전에서 젲들과 기독교 공동체의 대변인이 되었을 때 명백해졌음. 대변인인 베드로는 그리스도의 교회를 세울 모든 신자들의 기초석이 되었음.
후에 베드로는 그리스도인들에게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모퉁잇돌로 하여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워진 교회라는 것을 상기시켰음(벧전 2:4-8, 고전 3:11). 모든 신자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는 믿음, 즉 베드로가 여기서 고백한 것과 동일한 믿음에 의해 이 교회에 결합됨(엡 2:20-21, 계 21:14). 베드로와 같은 참 신자들은 그들의 믿음을 하나님으로부터 온 계시로 여기며, 기꺼이 그분을 공적으로 고백함.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의 믿음의 고백에 대해 칭찬하셨음. 베드로의 믿음과 같은 믿음이 그리스도 나라의 기초가 됨.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예수님은 교회의 불멸성과 자신을 믿어 자신의 교회에 속하게 될 모든 사람에 대한 보호를 약속하심.
16:19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주리니’는 미래 시제인데 그 시점은 아마도 예수님의 부활 이후, 베드로가 예수님과 교제를 회복한 요 21장 이후의 시간일 것. 권세의 매고 푸는 측면은 베드로에게만이 아니라 모든 제자들에게 적용되었음(18:18).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 신자들과 오순절 이후 교회에 대해 그가 취했던 지도력에서 보인 제자들 그룹에 대한 부인할 수 없는 권위를 베드로에게 부여하셨음.
어떤 이들은 천국 열쇠가 교회의 징계, 입법, 행정을 수행할 권위를 나타낸다고 주장한다. 다른 사람들은 열쇠가 죄의 용서를 선언할 권위를 준다고 말한다(요 20:23). 가장 그럴듯한 것은 열쇠 자체가 교회에게 주어진 천국의 권위라는 것. 여기에는 하나님의 말씀에서 발견되는 구원의 메시지를 사람들에게 제시함으로써 그들을 천국으로 인도할 기회가 포함됨(행 15:7-9). 이 열쇠들은 매고 푸는 열쇠들임. 베드로는 그리스도께서 세우실 건물의 기초에 대한 말씀을 들었고, 그 다음 그 건물의 열쇠들을 받았음. 열쇠는 그가 그 건물에 들어가려는 사람을 통제하는 문지기임을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건물을 관리할 청지기를 묘사하는 것.
땅과 하늘은 공간적인 연관관계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고, 제자들의 지상 행동들 배후에 있는 신적인 하늘의 권위를 가리키는 것. 매는 것과 푸는 것은 규칙을 정함이나 징계라는 두 가지 의미를 지닐 수 있는 랍비적 개념. 제자들은 하나님의 공동체를 세움에 있어 어느 정도 규칙 제정에 관여할 것이었고, 그 공동체의 다른 구성원들을 징계할 권위도 갖게 될 것이었음. 그러므로 이 말씀은 또한 하나님의 새로운 계시의 선포자로서 제자들의 영감을 가리킴.
우리가 다른 사람에게 천국문을 열거나 닫아놓는 것을 결정할 수 없지만, 하나님께서는 다른 사람이 내면의 그 길을 찾도록 돕는 데 우리를 사용하심. 그리스도를 믿고 그분의 말씀을 순종하는 모든 사람에게 천국 문은 활짝 열려있음.
[문맥상 16:21-28 예수님의 첫 번째 죽음 예고 / 베드로 책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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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윤선 (pp.439)
베드로는 반석이라는 뜻이니 시몬이 신령한 반석이라고 칭찬 받게 된 이유는 그의 본래 인격이 견고해서가 아니고 그가 이제 고백한 신앙 그것 때문이다. (중략) 이 신앙이 있는 곳에 교회가 있고 이 신앙이 없는 곳에 교회는 없다. 그러니만큼 예수님께서는 “이 반석”(이 신앙) 위에 자기의 교회를 세우시겠다고 하신 것이다.
이 점에 있어서 우리가 명심할 것은 이 신앙이 반석이라는 명칭을 받는 데는 이유가 있다는 사실이다. 이 신앙의 터가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시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교회의 터라고 사도 바울은 분명히 말하였다(고전 3:11). 교회의 견고한 터가 되신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을 가리켜(그 신앙 때문에) “산 돌”이라고 베드로는 말하기도 하였다(벧전 2:4-5).
6:19 천국 열쇠
천국 열쇠는 베드로만 받은 것이 아니고 다른 사도들도 받은 것이다. 열쇠는 주관하는 권세를 의미한다. 사도들은 그리스도를 대리하는 사신으로서 교회를 치리할 수 있었다. 그것은 그들에게만 있었던 권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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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빈 주석
마 16:17 혈육이 아니요
그리스도께서는 베드로를 통해 모든 사람이 아버지로부터 신앙을 구하고 아버지께서 주시는 은혜에 대하여 찬양하도록 권면하고 계신다. 혈육은 하나님의 특별한 빛을 알지 못한다고 본문이 말씀하고 계시기 때문이다. 이 사실을 볼 때 인간의 마음은 그리스도 안에 숨어 있는 하늘의 지혜에 관한 신비를 이해하는 능력을 갖고 있지 못함을 알 수가 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기 영광을 볼 수 있도록 우리들의 눈을 열어 주시기까지 인간의 모든 지각은 부족함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누구나 자신의 통찰력을 믿고 교만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성령만이 우리의 어두운 지각을 밝혀 주시도록 겸손하게 빛의 아버지께서 우리를 가르치시게 해드리자. 믿음을 얻은 자들은 자신의 우매함을 알고 자신이 받은 믿음은 하나님께서 주신 것임을 알도록 하자.
마 16:18 이 반석 위에... (반석 = 신앙고백)
모든 신자는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에 근거하여 거룩한 일치에 의해 하나님께서 그 가운데 계시도록 신령한 건물을 형성한다. 그리스도께서는 이 반석이 전체 교회를 위한 공통된 기초가 된다고 선언하심으로 주님은 이 세상에 생존하는 모든 신자들을 베드로에게 결합시키기를 원하고 계시기 때문이다.
*** 천국 열쇠 의미 정리 ***
1. 박윤선 : 천국 열쇠는 사람들로 하여금 천국에 들어가게 해주는 효과적인 복음 전파를 가리킨다. 베드로 뿐만 아니라 다른 사도들과 일꾼들도 이 일에 사용되었으니 그것이 열쇠의 역할이다. 그러므로 천국 열쇠는 베드로만 받은 것이 아니고 다른 사도들도 받은 것이다(요 20:23). “열쇠”는 주관하는 권세를 의미한다. 사도들은 그리스도를 대리하는 사신으로서 교회를 치리할 수 있었다. 그것은 그들에게만 있었던 권세였다. 후대의 목사들은 사도들이 명한 말씀에 순종하여 교회를 사역할 뿐이고 직접 치리권을 가진 것은 아니다.
2. B.H.Streeter : 랍비의 구체적이고 실제적인 토라 해석에 근거한 그른 행동과 바른 행동, 허용된 일과 금지된 일의 결정이라는 넓은 의미로 해석.
권징
But, Blomberg에 따르면, 이는 후대의 랍비 용법을 반영하는 것. 따라서 묶고 푸는 것의 의미는 열쇠의 이미지를 차용해야 할 것. 잠그고 푸는 이미지로 설명해야 함(사 22:22에 근거).
묶고 푸는 것은 그리스도인이 사람들이 하나님의 왕국에 들어갈 수 있게 하는 것을 언급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야 함. 이는 요 20:23과 밀접하게 연결되며, 눅 11:52의 지식의 열쇠와 연결됨.
약간 다른 맥락에서 예수님은 모든 제자를 매고 푸는 약속을 반복하셨음(마 18:18). 베드로의 특권은 마태복음의 다른 부분에서도 일관되게 규정되어야 함. 베드로는 제자들의 대변인이지만, 그는 제자들의 대표임. 엡 2:20과 계21:14에서 모든 사도들은 교회의 기초로 언급됨.
3. 보른캄(Bornkamm) : 일반적인 해석 – 가르치는 권세
이 해석은 확대되어 죄의 용서와 용서하지 못함, 구원과 정죄의 결정을 포함하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음. 천국에 들어가는 것을 허용하느냐, 허용받지 못하느냐가 제자들에 의해 말씀 선포(예수님의 가르침)에 의해 결정된다는 것.
4. 놀란드(Nolland) : 전통적으로 미래완료 수동태는 이미 하나님에 의해 묶여진, 풀려진 것이 될 것이다. 라고 주장되어 왔음. 또는 영원히 묶이거나 풀릴 것이다를 의미한다고 주장되어 왔음. 그러나 두 견해 모두 완료 분사에 너무 많은 의미를 부여함. 이러한 상황은 베드로의 행동 이전에 존재할 필요도 없고, 완료 분사가 반드시 상황을 무한정 고정시킬 필요도 없음. 완료 분사의 선택은 조화로운 행동을 표현하려는 욕구에 의해 동기가 부여된 것으로 가장 잘 설명됨. 당신이 땅에서 묶거나 푸는 것은 (그 정확한 순간에) 하나님에 의해 묶여있거나 풀릴 것.
- 이러한 의미에서 묶거나 푸는 것은 허용되거나 금지된 행위에 관한 선언이나, 신앙 공동체로부터의 배제 금지를 부과하고 해제하는 데 적합할 것. 사람이 하나님을 대신하여 말하고 그분의 뜻을 실행하는 것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음. - 마태복음의 맥락에서 묶고 푸는 것은 열쇠 사용의 일부. 열쇠들을 사용하는 것은 사람들을 천국으로 데려가는 것과 관련이 있음.
- 산상수훈에서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많지 않으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라고 함(마 5:20). 산상수훈과 강한 연관성을 지닌 복음의 마지막 도전에는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지키도록 가르치는 것”이 포함됨.
- 묶고 푸는 것의 의미는 보수적으로 해석해야 함.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모든 것이 사람들의 삶에 영향을 미치는지 확인하는 것이 베드로의 역할. 베드로는 예수님께 배운 대로만 묶고 푸는 법을 배웠음. 매는 조항과 푸는 조항은 18장 18절에서 거의 동일하게 반복되지만 모든 제자들과 관련이 있음.
- 18:18과 16:19의 차이점은 단수에서 복수로의 변화임. 베드로에서 전체 교회로의 이동임. 묶고 푸는 것이 행동의 규제와 관련이 있는 것으로 가장 잘 이해됨. 어떤 행동인가? 그것은 제자가 될 사람들의 삶에 예수님께서 존재하셨고 그분께서 가르치신 모든 것을 전하는 것과 관련이 있음.
5. 오스번
- 매고 푸는 것은 베드로에게만이 아니라 모든 제자들에게 적용되었음(18:18).
어떤 이들은 천국 열쇠가 교회의 징계, 입법, 행정을 수행할 권위를 나타낸다고 말함(18:15-18). 다른 사람들은 열쇠가 죄의 용서를 선언할 권위를 준다고 말함(요 20:23). 여기에는 하나님 말씀에서 발견되는 구원의 메시지를 사람들에게 제시함으로써 그들을 천꾸으로 인도할 기회가 포함됨(행 15:7-9). 이 열쇠들은 또한 매고 푸는 열쇠들임. 베드로는 그리스도께서 세우실 건물의 기초에 대한 말씀을 들었고, 그 다음 그 건물의 열쇠들을 받았음. 열쇠는 그가 그 건물에 들어가려는 사람을 통제하는 문지기임을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건물을 관리할 청지기를 묘사하고 있음.
땅과 하늘은 공간적인 연관 관계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고, 제자들의 지상 행동들 배후에 있는 신적인 하늘의 권위를 가리키는 것. 매는 것과 푸는 것은 규칙을 정함이나 혹은 징계라는 두 가지 의미를 지닐 수 있는 랍비적 개념임. 제자들은 하나님의 공동체를 세움에 있어 어느 정도 규칙 제정에(어떤 종류의 행동이 그 구성원들에게 합당한지를 결정하는 것과 같은) 관여할 것이었고, 그 공동체의 다른 구성원들을 징계할 권위도 갖게 될 것. 그러므로 이 말씀은 또한 하나님의 새로운 계시의 선포자로서 제자들의 영감을 가리킴.
종교 지도자들은 자신들이 천국의 열쇠를 쥐고 있다고 생각했고, 어떤 사람들은 배제시키려고 노력했음. 우리가 다른 사람에게 천국을 열거나 닫아놓는 것을 결정할 수 없지만, 하나님께서는 다른 사람이 내면의 그 길을 찾도록 돕는 데 우리를 사용하심. 그리스도를 믿고 그분의 말씀을 순종하는 모든 사람에게 천국 문은 활짝 열려 있음.
7. 채영삼
베드로가 대표하는 교회에게 예수님께서 천국 열쇠를 주시는데, 이 내용은 베드로의 고백과 밀접한 관련이 있음. 열쇠를 준다는 것은 권세를 부여한다는 의미. 베드로만이 아니라, 베드로가 했던 예수님에 관한 신앙고백을 하는 자들에게 부여되는 권세임. 그들은 예수님의 정체성을 올바르게 믿고 고백하는 자들임. 그들은 이 땅에서 예수님의 정체성 안에서 그분의 사역을 대행할 수 있는 권세를 받음.
특별히 매고 푸는 것은 유대교적 전통에서 가르침과 관련됨. 예수님을 알고 그분을 믿는 신앙고백을 하는 자들이, 하나님에 대하여,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성령에 대하여, 천국과 종말과 심판과 구원에 대하여 어떻게 가르치는가, 구원받은 자의 삶이 어떠해야 하는가를 가르치는 것이 사람들을 천국으로 들어가게 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됨. 예수님은 가르침의 권세를 그분의 교회에 맡기심. “가르쳐 지키게 하라”(마 28:20).
나중에 예수님께서는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을 향하여 “너희는 천국 문을 사람들 앞에서 닫고 너희도 들어가지 않고 들어가려 하는 자도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도다”라고 힐난하심(23:13). 그것은 그들의 가르침이 잘못되었기 때문. 그들은 율법도 모르고, 율법과 선지자들이 바라보았던 그 성취, 성취의 절정이신 그들의 목자 예수님도 알아보지 못했음. 그들은 이제 천국의 서기관이 될 수 없는 자들임(14:52). 천국의 서기관 자리는 예수님의 교회, 그분의 제자들에게 맡겨졌음. 예수님께서는 이미 이러한 부분을 예상하시고 경고하셨음. 누구든지 그의 가르치신 바, 그의 계명들 가운데 지극히 작은 것 하나라도 버리고 또 그같이 사람을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지극히 작다 일컬음을 받을 것임(5:19).
이제 마태는 바로 이런 공동체, 베드로가 고백한 올바른 신앙고백에 기초한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가 천국의 열쇠를 가졌음을 보여줌(마 18:18).
예수님께서 자기 자신 위에 세우신 그분의 교회, 천국의 열쇠를 가진 그분의 교회는 어떤 공동체인가? 이 종말의 새로운 하나님의 백성은 어떤 공동체를 이루어야 하는가? 마태는 이제 이 새로운 공동체의 본질을 설명한다.
** 채영삼 ‘바다로 나간 교회’
교회의 참된 기초는 예수 그리스도임. 세상이 아무리 이를 갈고 달려들어도 예수님의 몸된 교회는 무너지지 않음. 그분의 은혜는 온 세상의 비난보다 강함. 교회는 그리스도의 은혜를 선포함. 그분이 의롭다 하신 자들을 감히 누가 정죄하겠는가?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는 놀라우신 은혜임. 그 어떤 비난도 예수님께서 흘리신 보혈의 피를 무효화시키지 못함. 우리는 세상의 비난에 대해 어떤 태도를 취하는가? 우리 자신의 부족함을 느끼는 것과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임을 선포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임. 세상이 온갖 비난을 쏟아 부어도,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는 그 보혈의 은혜 속에서 여전히 맑고 여전히 깨끗하다.
교회의 참된 기초는 예수 그리스도 뿐이다. 사망의 권세도 교회를 흔들지 못한다. 재난도, 전쟁도, 국가도, 민족도 교회를 흔들지 못한다. 교회가 안정적으로 신앙을 유지하기 위해 정치와 경제가 평안한 것도 좋지만, 교회가 마치 정서적 안정이나 경제적 풍요나 민족적 합의 위에 서 있는 것처럼 의존적이어서는 안 된다. 교회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 위에 서 있기 때문이다. 정치적 위협이나 경제적 불안에도 상관없이, 교회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앉고 설 뿐이다. 오직 그분을 따라서만 가고 멈출 뿐이다.
8. R.T.프랜스 : 교회 안에서 법을 제정하는 권세를 말하는 것 같다.
9. 오경준 : 매고 푼다의 의미는 합심 기도와 관련이 있음.
** 마 16:19 구문
미래 시제 + 미래 완료 분사
= 이 시제들의 의미는 분명하지 않음. 많은 주석가들은 이 구문에 예정의 의미를 부여해서 이 시제들은 하늘에서 이미 내려진 결정을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함(Gundry, Carson, Mantey, Marcus). 마태가 선택의 교리를 가지고 있는 것은 11:25-27을 볼 때 명백함. 따라서 이 시제들은 중요하게 해석되어야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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