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1020 금요기도회: 마태복음 25:31-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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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룩하신 아버지 하나님. 오늘도 저희를 금요기도회로 부르셔서 말씀을 듣고 기도할 수 있는 은혜를 베푸심에 감사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저희와 교제하시길 기뻐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나 저희는 하나님과 교제하는 것을 기뻐하기 보다 다른 것에 더 즐거움을 두진 않았는지 돌아봅니다. 저희의 연약함을 용서하시고 하나님과 교제하는 것을 기뻐하시는 그리스도를 닮아 기쁨으로 하나님과 날마다 교제하는 저희가 되게 도와주시옵소서. 이 시간 말씀과 기도를 통해 하나님과 더욱 가까워지고자 하니 저희와 만나주시옵소서. 저희에게 기도라는 큰 방편을 주신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오늘 함께 읽을 하나님의 말씀은 마태복음 25:31-46 의 말씀입니다. 제가 봉독하도록 하겠습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인자가 자기 영광으로 모든 천사와 함께 올 때에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으리니
모든 민족을 그 앞에 모으고 각각 구분하기를 목자가 양과 염소를 구분하는 것 같이 하여
양은 그 오른편에 염소는 왼편에 두리라
그 때에 임금이 그 오른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 복 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받으라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헐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
이에 의인들이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께서 주리신 것을 보고 음식을 대접하였으며 목마르신 것을 보고 마시게 하였나이까
어느 때에 나그네 되신 것을 보고 영접하였으며 헐벗으신 것을 보고 옷 입혔나이까
어느 때에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가서 뵈었나이까 하리니
임금이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하시고
또 왼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저주를 받은 자들아 나를 떠나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된 영원한 불에 들어가라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지 아니하였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지 아니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지 아니하였고 헐벗었을 때에 옷 입히지 아니하였고 병들었을 때와 옥에 갇혔을 때에 돌보지 아니하였느니라 하시니
그들도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께서 주리신 것이나 목마르신 것이나 나그네 되신 것이나 헐벗으신 것이나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공양하지 아니하더이까
이에 임금이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아니한 것이 곧 내게 하지 아니한 것이니라 하시리니
그들은 영벌에, 의인들은 영생에 들어가리라 하시니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반갑습니다. 금요기도회 나오신 여러분을 진심으로 환영합니다. 어제는 비도 오고 날씨가 많이 추워진 것 같습니다. 날은 추워지지만 말씀과 기도를 통해 우리의 마음은 따뜻해지면 좋겠습니다. 오늘도 기도를 통해 하나님의 마음을 알아 우리의 마음이 따뜻해지는 시간이 되길 바랍니다.
말씀을 시작하면서 여러분에게 질문 한 가지를 드리겠습니다. 만약 여러분이 왕이고 여러분을 대신해 사자를 보냈습니다. 사자는 왕의 말을 전하는 역할을 합니다. 그런데 왕의 말을 받아야 하는 백성이 이 사자를 귀하게 여기지 않는다면 여러분은 어떻겠습니까? 자신이 보낸 사자인데 귀하게 여기지 않으니 왕인 자신을 귀하게 여기지 않는 것과 동등하게 여기지 않겠습니까? 오늘 본문이 바로 그런 말씀입니다. 오늘 본문을 마주할 때 우리는 단순히 우리 주변에 있는 작은 자에게 선행을 베풀어야 한다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오늘 본문은 그런 의미가 아닙니다. 그렇다면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지극히 작은 자’가 누구일지, 그리고 오늘 본문을 통해 하나님께 우리에게 어떤 말씀을 하시는지 지금부터 함께 살펴보겠습니다.
먼저, 31-33절에서 주님께서는 재림하실 때 이 세상을 심판하신다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은 24장부터 25장까지 계속해서 쭉 심판 때에 일어날 일들에 대해서 말씀하셨습니다. 특별히 오늘 본문에서는 그 날에 주님께서 모든 민족을 모으셔서 양과 염소로 구분하시고 양은 오른쪽에, 염소는 왼쪽에 두신다고 말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오른쪽에 있는 양은 의인들을 뜻하고, 왼쪽에 있는 염소는 악인들입니다. 그리고 의인과 악인들의 특징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의인들은 왜 의인이고, 악인들은 왜 악인일까요?
35절부터 40절까지 의인들의 특징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헐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 그러자 의인들이 대답합니다. “주여 어느 때에 저희가 주께서 그리하신 것을 보고 그렇게 하였나이까?” 이에 주님께서 대답하십니다.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서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하시고” 바로 주님의 형제 중에서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주님께 한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짚고 넘어가야 할 점은 주님께서 말씀하신 “내 형제 중에서 지극히 작은 자”가 누구인지입니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우리는 우리 주변에 있는 어려움에 처한 사람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주님께서 말하시는 대상은 예수님의 제자들, 즉 예수님을 믿고 복음을 전파하는 모든 신자들을 의미합니다. 왜냐하면 38절과 39절에서 나그네 된 것과 옥에 갇혔다는 것을 말씀하심으로써 이 대상이 복음전파자로서 박해를 받아 어려움에 처한 사람임을 말하고 있기 떄문입니다. 바울서신을 통해 우리는 바울은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 나그네가 되었고 박해를 받아 감옥에 갇혔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따라서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내 형제’는 예수님의 제자들, 더 나아가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모든 신자들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그 중에서 ‘지극히 작은 자’, 바로 예수님의 제자들을 비롯한 모든 신자들 중에 어려움에 처한 자들을 말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 주님께서는 모든 신자들 중에 어려움에 처한 자들을 돌보는 것이 곧 주님께 한 것이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이 의인들에게 주님께서는 34절에서 상을 약속하십니다. “내 아버지께 복 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받으라” 이 의인들에게 약속된 상은 하나님 나라입니다. 이 본문에서 주님은 자신을 심판하는 왕으로 묘사하셨습니다. 따라서 한 나라의 주인인 왕이신 주님께서 이들에게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주시는 것, 다른 말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을 약속하십니다. 46절을 보시면 이 의인들이 미래에 약속된 상이 ‘영생’임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곧 영생이니 같은 말입니다.
그런데 이 의인들은 본인들이 그런 약속된 상이 있으며 자신들이 주님께 선행을 했는지조차 모릅니다. 37-39절을 보십시오. 이 의인들은 자신들이 주님을 향한 선행을 했다는 것조차 모르고 있습니다. 심지어 그들은 자신들이 선을 베풀었다는 사실조차 기억하지 못합니다. 정말 놀랍지 않습니까? 우리는 자신이 어떤 선행을 했는지 기억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서의 의인들은 기억하지 못합니다. 그들이 왜 기억하지 못합니까? 이들이 기억력이 좋지 않아서였을까요? 그렇지 않다는 것을 여러분도 아실겁니다. 그들이 기억하지 못하는 이유는 그들이 약속된 상인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 의도적으로 공로적인 행위를 하지 않았기에 그렇습니다. 25장에 나오는 열 처녀 비유와 달란트 비유는 구원의 선물과 성령에 의한 변화를 진정으로 경험한 사람이라는 것을 드러내는 증거는 외적인 행위임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같은 장인 오늘 본문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의인들이 주변에 있는 어려움에 처한 동료 신자들에게 이런 선행을 한 것은 이미 하나님 나라에 그들이 들어가 있기 때문이라는 증거입니다.
34절에서 주님은 의인들을 향해 “내 아버지께 복 받을 자들이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실 이 번역은 정확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내 아버지께 복을 받기로 결정된 자들아!”라고 번역하는 것이 정확합니다. 다시 말해 이 의인들은 하나님께로부터 복을 받기로 결정된 자들입니다. 그들의 행위에 의해서 복을 받는 것이 아니라 그 이전에 이미 그들에게 약속된 복이 있었습니다. 이미 약속된 복을 받기로 결정된 자들에게 나타나는 증거가 바로 어려움에 처한 동료 신자들을 돌보는 모습입니다.
이것이 오늘 본문에서의 의인들의 특징입니다. 의인들은 어려움에 처한 동료 신자들을 위해 선행을 했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선행은 하나님 나라의 지체로서 한 것일뿐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서 한 것이 아닙니다. 이것이 바로 의인과 주님과의 관계입니다. 주님은 의인들의 선행과 상관없이 복과 하나님 나라를 약속하셨습니다. 그리고 의인들은 자신이 왕이신 주님의 백성이기에 어려움에 처한 동료 신자들을 돌보았습니다.
이상 우리는 의인들의 특징을 함께 살펴보았습니다. 그렇다면 악인의 특징은 무엇일까요? 간단하게 말하자면 의인들의 특징의 반대가 바로 악인의 특징입니다.
42절과 43절을 보십시오. 의인들이 했던 선행을 악인들은 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어려움에 처한 신자들을 돌보지 않았습니다. 앞에서 우리는 의인들이 “지극히 작은 자”와 같은 신자들임을 말하였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악인들도 ‘신자’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41절의 “저주를 받은 자들”을 풀어서 말하면 “이미 저주를 받기로 결정된 자들”이라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 신자가 아니라는 뜻입니다. 신자가 아닌 자들에게서 나타나는 모습들이 바로 어려움에 처한 신자들을 돌보지 않는 모습입니다. 에베소서는 교회를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말합니다. 교회는 신자들의 모임입니다. 따라서 신자들을 돌보지 않는 것은 교회를 돌보지 않는 것이며, 더 나아가 오늘 본문에서 말하는 것처럼 예수님을 돌보지 않는 것입니다. 악인들의 죄는 단지 신자들을 돌보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신자들의 모임인 공동체를 돌보지 않았고, 더 나아가 예수님을 돌보지 않은 것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악인들은 악행을 행하지 않았습니다. 지금 주님께서는 그들을 핍박하고 박해했기에 심판한다고 하시지 않습니다. 그들을 심판하시는 이유는 그들이 해야 하는 선행을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예수님의 제자들이 복음을 위해 수고할 때에 아무런 도움을 주지 않은 것은 사실 그들을 박해한 것이나 다름 없다는 뜻입니다. 구원받지 않는 악인들의 외적 증거는 신자들이 어려움에 처할 때 돌보지 않는 모습입니다. 십계명에는 온통 “하지 말라”라는 명령으로 가득 차있습니다. 그런데 종교개혁자 칼빈은 십계명을 해설하면서 하지 말라는 명령 이면에는 이것과 반대되는 것을 적극적으로 해야 한다는 것과 그것을 하지 않은 것은 죄라고 말합니다. 쉽게 말해 “살인하지 말라”라는 6계명의 말씀에는 살인하지 말라는 금지 명령과 동시에 우리가 이웃의 생명을 적극적으로 지켜주어야 하며, 지켜주지 않고 방치하는 것은 죄라는 뜻입니다. 교리적으로 설명한다면 칭의와 성화를 떼어놓고 볼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칭의를 받은 신자는 반드시 그 증거가 성화의 과정에서 나타나게 되어 있습니다.
다시 돌아와서 이렇게 어려움에 처한 신자들에게 선행을 베풀지 않은 악인들에게 약속된 것은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된 영원한 불에 들어가는 것이고, 곧 46절에서 말하는 것처럼 영원한 벌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의인들이 영생이라는 상을 받은 이유는 그들이 단지 어려운 사람을 도와주었다는 공로 때문이 아니라 주님을 믿은 후에 가지게 된 의로움과 그에 따른 의의 열매 때문이었던 것처럼 악인들이 영벌에 처하는 이유도 그들의 행실이 단지 나빴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이 주님을 믿지 않았고 그들의 타락한 본성대로 살아 불의한 자로 남았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주님께서 세상의 마지막 날에 이렇게 심판하실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은 오늘 본문에서 말하는 의인과 악인을 찾아내서 우리가 구별해야 한다는 것을 뜻하지 않습니다. 이것을 구별하실 수 있는 것은 오로지 심판자이신 예수님밖에 없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의인과 악인을 양과 염소라고 말하는데, 당시 이스라엘에서 양과 염소는 구분하기가 굉장히 어려웠다고 합니다. 다시 말해 우리 눈으로는 의인과 악인을 구분하기가 굉장히 어렵다는 뜻입니다. 오늘 이 본문을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은 하나님께 구원받은 우리는 우리 주변의 어려움에 처한 동료 신자들을 돌보아야 함을 가르치시기 위함입니다.
우리는 오늘 본문에서와 같이 하나님께로부터 복을 받기로 이미 결정된 자들이며 예비된 나라를 상속받는 자들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행위와는 상관없이 이미 우리에게 이러한 것들을 약속하셨습니다.
하나님은 가난하고 헐벗고 굶주리고, 나그네였던 우리에게 먼저 복과 나라를 주셨습니다. 참 감사하지 않습니까? 하나님 나라를 위해 아무런 공로가 없는 우리에게 이런 엄청난 약속을 주셨다니요. 이것을 다른 말로 표현하면 무엇입니까? 복음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어떻게 해야겠습니까? 주님께서 그렇게 하셨듯이 우리 주변에 있는 어려움에 처한 동료 신자들을 돌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오늘 본문에서와 같이 우리는 우리가 선행했다는 사실조차 기억하지 못하더라도 우리 주님께서는 기억하고 계십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우리가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했다더라도 다 기억하고 계십니다. 우리 주님이 기억하고 계신 것만으로도 충분하지 않습니까? 내가 착한 일을 했다고 남들이 기억해주지 못하고, 심지어 내가 기억하지 못하더라도 우리 주님은 다 기억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그분 앞에 우리가 섰을 때 “내가 어려움에 처했을 때 너희가 나를 돌보았다. 지극히 작은 자에게 한 것이 곧 나에게 한 것이니라”라고 칭찬하실 겁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주변에 어떤 어려움에 처한 자들이 있습니까? 한번 생각해봅시다. 우리는 그들을 귀하게 여겨야 합니다. 그리고 그들을 돌보아야 합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복음 전파에 힘 썼던 것처럼 우리는 그들을 귀하게 여기고 그들을 돌봄으로써 그들이 각자의 자리에서 복음을 전할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오늘 말씀을 기억하며 우리 주변에 어려움에 처한 동료 신자들을 귀하게 여기고 돌보고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하는 우리 모두가 되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말씀을 기억하며 같이 기도하면 좋겠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이미 하나님께 복을 받기로 예정되어 있으며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로 약속된 자들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행위를 보지 않으시고 이것들을 약속하셨습니다. 이 약속에 근거하여 우리는 우리 주변에 있는 어려움에 처한 동료 신자들을 귀하게 여기고 돌보아야 합니다. 이 시간 우리 함께 돌아봅시다. 우리 새순교회 안에서 어려움에 처한 사람은 없는지 돌아보고 그 사람을 위해 내가, 그리고 우리 교회가 적극적으로 돌보게 해달라고 이 시간 같이 기도하도록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