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은 우리를 이렇게 격려하십니다.

열왕기상  •  Sermon  •  Submitted   •  Presen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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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론]
오늘 말씀은 엘리야가 놀라운 기적들을 일으키고 난 후 일어난 상황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17, 18장에서 엘리야는 정말 놀라운 기적들을 많이 경험했습니다.
하나님은 까마귀를 통해 엘리야에게 먹을 것을 날라다 주셨습니다.
한끼 식사밖에 남지 않았던 과부의 집에 양식이 샘솟듯이 생겨나는 기적도 일어났습니다.
죽은 과부의 자식을 다시 살려내는 엄청난 기적도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바알 예언자들과 대결에서 엘리야가 승리하였습니다.
엘리야가 하나님께 기도하자 하늘에서 불이 떨어졌습니다.
그래서 바알 예언자들 450명을 모두 기손 시냇가에서 처단했습니다.
또한 엘리야의 기도로 인해 3년 넘게 가뭄을 겪던 이스라엘에 비가 내리는 기적도 일어났습니다.
모두 하나님이 하신 것입니다.
그렇지만 엘리야를 통해 일하셨으니 얼마나 위대한 예언자입니까?
그래서 구약에서 가장 위대한 사람 두 사람을 뽑으라고 하면 단연 모세와 엘리야입니다.
그런데 19장에서 우리가 만나는 엘리야는 완전 다른 사람이 된 것 같습니다.
3-4절입니다.
엘리야는 두려워서 급히 일어나, 목숨을 살리려고 도망하여, 유다의 브엘세바로 갔다. 그곳에 자기 시종을 남겨두고, 자신은 홀로 광야로 들어가서, 하룻길을 더 걸어 어떤 로뎀나무 아래로 가서, 거기에 앉아서, 죽기를 간청하며 기도하였다. “주님, 이제는 더 바랄 것이 없습니다. 나의 목숨을 거두어 주십시오. 나는 내 조상보다 조금도 나을 것이 없습니다.”
엘리야는 목숨을 잃을까봐 두려워 멀리 광야로 도망칩니다.
유다의 브엘세바는 유다 남쪽 끝에 있는 지역입니다.
북이스라엘에서 남쪽 유다 최남단까지 도망간 것입니다.
믿음과 용기로 가득했던 엘리야는 어디로 간 것일까요?
심지어 주님께 죽여달라고 간청하고 있습니다.
놀라운 기적들을 행하던 위대한 예언자는 어디가고, 그는 왜 이렇게 변했을까요?
1-2절입니다.
아합은, 엘리야가 한 모든 일과 그가 칼로 모든 예언자들을 죽인 일을, 낱낱이 이세벨에게 알려 주었다. 그러자 이세벨은 엘리야에게 심부름꾼을 보내어 말하였다. “네가 예언자들을 죽였으니, 나도 너를 죽이겠다. 내가 내일 이맘때까지 너를 죽이지 못하면, 신들에게서 천벌을 달게 받겠다. 아니, 그보다 더한 재앙이라도 그대로 받겠다.”
여기에 따르면 엘리야가 두려워 도망친 이유는 희대의 악녀 이세벨 때문입니다.
아합왕은 그의 아내 이세벨의 꼭두각시에 불과합니다.
엘리야가 한 모든 일을 남편 아합에게 들은후 이세벨이 뭐라고 합니까?
이세벨이“회개합니다. 제가 우상숭배의 죄를 저질렀습니다.”
이렇게 고백하나요?
아닙니다.
엘리야가 자신이 후원하는 바알 예언자들 450명을 모두 죽여 버렸습니다.
나라가 후원하는 바알 종교를 뒤흔든 것은 왕권을 뒤흔드는 반역과 같습니다.
그래서 이세벨은 오히려 신들의 이름을 걸고 내일까지 반드시 엘리야를 죽이겠다고 맹세합니다.
이런 악독한 이세벨의 위협때문에 엘리야가 그 멀리까지 도망친 것일까요?
그래서 주님께 죽여달라고 바라는 것일까요?
이런 엘리야가 이해가 되십니까?
450명의 바알 예언자들을 홀로 상대하던 그 당당하던 엘리야는 어디에 있습니까?
과연 엘리야가 죽음의 두려움때문에 이런 상태에 빠진 것일까요?
죽음이 두려운 사람이 450명의 바알 예언자들과 목숨을 걸고 대결할수 있을까요?
만약 엘리야가 죽음을 그토록 두려워 했다면 왜 지금와서 주님께 죽여달라고 하는 것일까요?
말은 죽여달라고 하면서 죽음이 두려워 도망치는 것은 말과 행동이 다른 것입니다.
그럼 반대로 생각해보겠습니다.
만약 하나님께 요청한것처럼 진짜 죽고 싶었다면 어떨까요?
정말 죽고 싶은 사람이 로뎀나무 아래에 앉아 죽기를 바라는 것일까요?
로뎀나무는 사막에서 2-3미터까지 자라는 나무로서 그늘을 만들어주는 나무입니다.
죽고 싶었다면 그냥 땡볕에 엎어져야지, 왜 그늘 아래에 있습니까?
5절에 보시면 심지어 죽으려는 사람이 그곳에서 잠까지 잡니다.
또한 정말 죽고 싶은 것이라면 이세벨에게 저항하다가 용감하게 죽으면 그만입니다.
이렇게 멀리 유다땅까지 도망와서 죽을 이유가 어디 있을까요?
이세벨에게 죽어야 더 뜻깊은 죽음이 아닐까요?
도대체 뭐가 엘리야의 진짜 마음인지 알수가 없습니다.
마치 이중인격자처럼 엘리야는 왜 이렇게 왔다갔다 하는 것일까요?
제가 말하고자 하는 요점은 이것입니다.
엘리야가 도망친 것은 죽음이 두려웠기 때문인 것은 맞습니다.
그러나 생각이 왔다갔다 하는 것을 보면 그것이 핵심 이유는 아닙니다.
엘리야가 지금 겪고 있는 이런 혼란은 영적 침체 때문입니다.
우울증 걸린 사람처럼 자기 마음을 자기도 제대로 모르는 것입니다.
그럼 그의 이런 영적 침체는 근본적으로 어디에서 온 것일까요?
그 단서를 4절 마지막부분에서 찾을수 있습니다.
엘리야는 자신이 조상들보다 낫지 못하다고 고백합니다.
다시 말하면, 자신이 그리 뛰어난 존재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이는 엘리야가 자신의 사명에 압박감을 느끼고 있음을 의미합니다.
엘리야가 왜 이런 상태까지 가게 된 것인지 좀더 자세히 살펴보겠습니다.
이 점을 좀더 잘 알수 있는 부분이 9-10절입니다.
엘리야는 거기에 있는 동굴에 이르러, 거기에서 밤을 지냈다. 그 때에 주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엘리야야, 너는 여기에서 무엇을 하고 있느냐?”엘리야가 대답하였다. “나는 이제까지 주 만군의 하나님만 열정적으로 섬겼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자손은 주님과 맺은 언약을 버리고, 주님의 제단을 헐었으며, 주님의 예언자들을 칼로 쳐서 죽였습니다. 이제 나만 홀로 남아 있는데, 그들은 내 목숨마저도 없애려고 찾고 있습니다.”
엘리야가 40일 동안 달려 도착한 곳이 호렙산입니다.
호렙산은 모세가 율법을 받았던 시내산과 동일한 곳입니다.
그곳에 도착해 동굴에 있는데 주님의 음성이 들립니다.
주님의 질문은 이것입니다.
‘엘리야야, 너는 여기에서 무엇을 하고 있느냐?”
이 질문은 엘리야가 진짜 무엇을 하고 있는지 몰라서 물으시는게 아닙니다.
엘리야의 정체성을 묻고 있는 것입니다.
엘리야가 지금 있어야 할곳은 이곳이 아니라는 그런 의미입니다.
마치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짓고 하나님을 피해 숨었을때 하나님이 그들에게 어디있느냐고 물으시는 것과 같습니다.
거기서도 아담과 하와가 어디 있는지 모르셔서 물으신게 아닌 것과 동일한 것입니다.
이런 하나님의 물음에 대한 엘리야의 답변은 어떻습니까?
하나님은 똑같은 질문을 14절에서도 하셨습니다.
그런데 엘리야의 답변은 동일합니다.
그만큼 엘리야가 하나님의 의도를 깨닫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엘리야가 한 답변을 보십시오.
간단히 말하면 이렇습니다.
자신은 너무 열심히 일했는데 열매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열심히 일했는데 그 결과 자신의 목숨만 더 위협받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엘리야가 왜 영적 침체에 빠지게 되었는지 짐작할수 있습니다.
그는 놀라운 기적들이 일어나면 백성들이 완전히 탈바꿈할것이라고 기대했던 것입니다.
아합왕을 포함해서 백성들이 대대적으로 회개하고 주님께 돌아올것이라고 믿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 열매가 없는 것입니다.
자신만 이렇게 죽으라고 일해봤자 무슨 소용이 있느냐고 항변하고 있는것입니다.
그러나 엘리야의 말은 틀렸습니다.
엘리야 혼자 주님을 위해 싸우고 있는게 아닙니다.
앞서 오바댜의 말을 들어보면 주님의 예언자 100명이 동굴에 숨어 살아있습니다.
그들은 엘리야처럼 저돌적으로 싸우지는 않지만 끝까지 바알을 섬기지 않은 하나님의 사람들입니다.
이러한 엘리야의 말은 그들의 존재가치를 무시하는 말과도 같습니다.
그러므로 엘리야 자신 혼자 싸우고 있으며 자신 혼자 남아있다는 말은 큰 착각입니다.
엘리야가 빠진 함정은 두가지입니다.
바로 자기 중심성과 하나님 약속에 대한 의심입니다.
엘리야는 자꾸‘나’를 강조합니다.
내가 이렇게까지 최선을 다했는데 결과는 형편없지 않았느냐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은 자기 조상들과 다를바없는 그냥 그런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이런 엘리야에 대해서 어떤 학자는 이렇게 평가합니다.
그가 ‘메시야 병’, 즉 ‘슈퍼맨 병’에 걸렸다고 말합니다.
슈퍼맨 병은 오직 자신만이 세상을 구해야한다고 믿는 사람을 의미합니다.
엘리야가 그런 착각에 빠져있다는 것입니다.
자신이 엄청난 결과를 만들어내서 하나님 일의 주인공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또한 엘리야의 말을 잘 생각해보면 그는 하나님 약속에 대한 신뢰를 잃어버렸습니다.
자신이 이렇게까지 했는데도 백성들이 아무도 주님께 돌아오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분명 엘리야의 기도로 하늘에서 불이 떨어졌을때 백성들은 진짜 하나님이 누구신지 깨달았다고 고백했습니다.
그들은 엘리야가 450명의 바알 예언자들을 죽일때 옆에서 도와주었던 사람들입니다.
그들이 그 후 어떻게 되었는지는 알수없습니다.
그렇지만 그들 모두 다시 바알쪽으로 돌아섰다고 볼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엘리야는 자기 마음대로 판단하며 자신을 항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엘리야의 불신앙을 보여줍니다.
여기서 우리는 엘리야가 왜 도망쳤는지 알수있습니다.
내가 해봤자 바뀐게 없으니 자신의 사명을 벗어던지고 싶은 것입니다.
그런 예언자의 삶이 지긋지긋한 것입니다.
그래서 사명의 자리에서 벗어나 멀리 멀리 도망치고 싶었던 것입니다.
마치 자신의 사명을 거부하고 싶어 도망치던 예언자 요나의 모습과 같은 것입니다.
이런 엘리야의 모습에서 우리는 무엇을 보게 됩니까?
혹시 우리의 모습이 보이지 않습니까?
하나님을 열심히 섬기는데도 뭔가 내 사역에 또는 내 삶에 큰 변화가 없다면 어떨까요?
그냥 다 때려치우고 도망치고 싶은 마음이 들때가 있지 않으십니까?
저도 그런 적이 있습니다.
그럼 이런 엘리야의 영적 침체를 하나님은 어떻게 다루실까요?
만약 제가 엘리야 옆에 있었다면 저는 이렇게 말했을거 같습니다.
“도망간다고 해결되는게 아니야, 다시 기도하면서 회복해봐”
그런데 우리 하나님은 그렇게 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엘리야가 많이 지치고 피곤한줄 아십니다.
하나님은 엘리야가 슈퍼맨이 아니라는 것을 아십니다.
그 역시 연약한 인간으로서 자신의 기대와는 전혀 다른 결과에 실망하고 좌절할수 있다는 것을 아십니다.
엘리야에 대한 하나님의 처방은 무엇일까요?
첫째, 하나님은 쉼과 먹을 것을 주십니다.
5-8절입니다.
그런 다음에, 그는 로뎀나무 아래에 누워서 잠이 들었는데, 그 때에 한 천사가 일어나서 먹으라고 하면서 그를 깨웠다. 엘리야가 깨어보니, 그의 머리맡에는 뜨겁게 달군 돌에다가 구워 낸 과자와 물 한병이 놓여 있었다. 그는 먹고 마신 뒤에, 다시 잠이 들었다. 주님의 천사가 두 번째 와서 그를 깨우면서 말하였다. “일어나서 먹어라. 갈 길이 아직도 많이 남았다.”엘리야는 일어나서, 먹고 마셨다. 그 음식을 먹고 힘을 얻어서 밤낮 사십 일 동안을 걸어 하나님의 산인 호렙산에 도착하였다.
하나님은 엘리야에게 곧바로 나타나지 않으십니다.
대신 자신의 일꾼인 천사를 보내십니다.
천사가 곤히 자고 있는 엘리야를 깨워 한 말은 먹으라는 것입니다.
엘리야가 얼마나 피곤했겠습니까?
3년을 숨어다녔고, 목숨을 걸고 바알 예언자들과 대결을 펼쳤습니다.
가뭄에 비가 내리도록 7번씩 머리가 다리 사이에 들어갈정도로 얼마나 열심히 기도했습니까?
주님은 그의 모든 수고를 아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가 충분히 로뎀나무 아래에서 쉬고 잘수 있게 배려하시는 것입니다.
주님은 저처럼 엘리야에게 광야에서 목숨걸고 기도하라고 하지 않으십니다.
흔히들 잠이 보약이라고 말합니다.
잠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귀한 회복의 선물입니다.
우리 몸에 보약일뿐만 아니라 우리 마음의 보약이기도 합니다.
특히 엘리야처럼 낙심하거나 영적 침체와 탈진에 빠진 사람들에게 그렇습니다.
주님은 심지어 음식도 제공해 주십니다.
음식 역시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귀한 회복의 선물입니다.
주님은 엘리야에게 금식하면서 기도하라며 책망하지 않으십니다.
지금까지 수고한 엘리야에게 단지 한끼 따뜻한 식사를 제공해 주십니다.
천사가 요리사이니 얼마나 맛있는 요리겠습니까?
미슐랭이 아니라 천슐랭입니다.
우리는 이런 주님의 모습을 예수님에게서도 발견할수 있습니다.
부활하신후 제자들을 만나러 오신 예수님은 책망하지 않으셨습니다.
너희가 나를 배신해? 3년동안 먹이고 재우고 가르쳐주고 다 했는데 그게 할짓이냐?라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단지 물고기를 잡아서 평소처럼 제자들을 먹이셨습니다.
스승님이 구워주신 그 고기가 얼마나 맛있었겠습니까?
예수님은 단지 낙심한 제자들과 함께 계셨습니다.
얼굴은 아니꼬우면서 말과 행동만 그렇게 하신게 아닙니다.
그 분은 제자들에게 지금 필요한 것은 책망이 아니라 위로와 회복임을 아셨습니다.
여러분, 우리 주위에도 열심히 주님을 섬기다가 낙심하거나 탈진한 그리스도인들이 있습니다.
그들에게 아무말이나 하지 마십시오.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주님이 주시는 쉼과 잠이지, 우리의 충고가 아닙니다.
푹 쉬고, 푹 자고, 잘 먹게 도와주십시오.
나중에 이것이 하나님의 선물임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여기서 그치지 않으십니다.
둘째, 하나님은 세미한 음성을 들려 주십니다.
11절부터 13절입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셨다. “이제 곧 나 주가 지나갈 것이니, 너는 나가서, 산 위에, 주 앞에 서 있어라.” 크고 강한 바람이 주님 앞에서 산을 쪼개고, 바위를 부수었으나 그 바람 속에 주님께서 계시지 않았다. 그 바람이 지나가고 난 뒤에 지진이 일었지만, 그 지진 속에도 주님께서 계시지 않았다. 지진이 지나가고 난 뒤에 불이 났지만, 그 불 속에도 주님께서 계시지 않았다. 그 불이 난 뒤에, 부드럽고 조용한 소리가 들렸다. 엘리야는 그 소리를 듣고서, 외투 자락으로 얼굴을 감싸고 나가서, 동굴 어귀에 섰다. 바로 그때에 그에게 소리가 들려왔다. “엘리야야, 너는 여기에서 무엇을 하고 있느냐?”
하나님은 마치 모세에게 하신 것처럼 엘리야 앞에 지나가시겠다고 하십니다.
모세는 출애굽기 33장에서 하나님의 등을 보는 특권을 얻었습니다.
그런데 엘리야에게도 주님은 자신을 보여주시겠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먼저 크고 강한 바람이 산을 쪼개고, 바위를 부수었습니다.
그런데 그 바람 속에 주님이 계시지 않습니다.
다음으로는 지진이 일어났는데 그 속에도 계시지 않습니다.
마지막으로 불이 일어났는데 그 불 속에도 주님이 계시지 않습니다.
원래 바람, 지진, 불은 하나님이 나타나실때 일어나는 현상들입니다.
시내산에서 모세가 주님을 만날때 경험한 것들과 유사합니다.
그런데 거기에 주님이 보이지 않습니다.
엘리야는 아마 이런 기적들 사이에서 주님을 만날수 있을거라 여겼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습니다.
놀랍게도 주님은 이런 일들이 일어난후 부드럽고 조용한 목소리로 엘리야를 부르십니다.
여기서 부드럽고 조용한 소리란 우리 책 밑에 보면 나온것처럼 ‘얇은 침묵의 소리’입니다.
침묵의 소리라는 말이 모순적이긴 하지만 이것은 거의 조용한 속삭임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직감적으로 엘리야는 이 목소리가 주님의 소리임을 깨닫고 외투로 얼굴을 감싸고 동굴 입구에 섭니다.
하나님을 직접 보는 자는 죽을수 밖에 없기 때문에 얼굴을 자기 옷으로 감쌌을 것입니다.
그럼 도대체 왜 주님은 그런 기적들 속에서 나타나지 않으신 것일까요?
저는 주님이 엘리야가 빠진 함정에서 나오길 원하셨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엘리야는 기적을 통해서만 하나님이 일하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엘리야의 예상을 깨뜨리시고 세미한 음성으로 다가오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엘리야의 잘못된 생각을 논리적으로 지적하시면서 깨뜨리시지 않으십니다.
요나의 잘못된 생각을 포도나무 하나로 깨뜨리셨듯이 엘리야의 잘못된 생각도 이렇게 깨뜨리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조용하고 세미한 음성을 통해 하나님은 일하십니다.
이것도 하나님의 기적입니다.
우리 역시 하나님께 기적만 바라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럼 과연 기적이 없어 우리의 삶이 무기력해진 것일까요?
아닙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도 기적입니다.
탈진한 사람에게 필요한 것은 기적이 아니라 하나님의 세미한 음성입니다.
이제 주님은 엘리야에게 새로운 사명을 주십니다.
15-18절입니다.
주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돌이켜, 광야길로 해서 다마스쿠스로 가거라. 거기에 이르거든, 하사엘에게 기름을 부어서, 시리아의 왕으로 세우고, 또 님시의 아들 예후에게 기름을 부어서, 이스라엘의 왕으로 세워라. 그리고 아벨므홀라 사밧의 아들 엘리사에게 기름을 부어서, 네 뒤를 이을 예언자로 세워라. 하사엘의 칼을 피해서 도망하는 사람은 엘리사가 죽일 것이다. 그러나 나는 이스라엘에 칠천 명을 남겨 놓을 터인데, 그들은 모두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도 아니하고, 입을 마추지도 아니한 사람이다.”
주님은 엘리야에게 새로운 사명을 주십니다.
이제 또다른 기적들을 행하는 삶이 아니라 사람을 세우는 사역입니다.
이방왕 하사엘을 왕으로 세워 나중에 북이스라엘을 심판하게 하십니다.
예후를 세워 이스라엘의 왕이 되게 합니다.
마지막으로 자신의 제자인 엘리사를 세워 자신이 못다한 사역을 이어가게 하십니다.
그리고 한마디 덧붙이는 주님의 말씀에 답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엘리야 말고도 다른 7000명의 사람들을 준비하고 계십니다.
엘리야 혼자 슈퍼맨처럼 일하게 하신게 아닙니다.
엘리야가 하나님을 잘 알지 못했을 뿐입니다.
자기 중심성에서 벗어나지 못하니 일하시는 하나님이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조용하고 세미한 음성처럼 보이지 않게 조용히 일하시는 하나님이 보이지 않은 것입니다.
주님은 주님의 시간대에서 주님의 계획표대로 일을 이루시는 분이십니다.
이제 엘리야가 하나님의 이런 음성을 듣고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요?
엘리야의 반응은 등장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가 어떤 반응을 보였을지 짐작케 하는 구절이 곧바로 등장합니다.
바로 19-21절입니다.
19   엘리야가 그 곳을 떠나서, 길을 가다가, 사밧의 아들 엘리사와 마주쳤다. 엘리사는 열두 겨릿소를 앞세우고 밭을 갈고 있었다. 열한 겨리를 앞세우고, 그는 열두째 겨리를 끌고서, 밭을 갈고 있었다. 엘리야가 엘리사의 곁으로 지나가면서, 자기의 외투를 그에게 던져 주었다.
20   그러자 엘리사는 소를 버려 두고, 엘리야에게로 달려와서 말하였다. "아버지와 어머니에게 작별 인사를 드린 뒤에, 선생님을 따르겠습니다." 그러자 엘리야가 말하였다. "돌아가거라. 내가 네게 무엇을 하였기에 그러느냐?"
21   엘리사는 엘리야를 떠나 돌아가서, 겨릿소를 잡고, 소가 메던 멍에를 불살라서 그 고기를 삶고, 그것을 백성에게 주어서 먹게 하였다. 그런 다음에, 엘리사는 곧 엘리야를 따라가서, 그의 제자가 되었다.
엘리야는 자신의 부족함을 깨닫고 다시 사명의 자리로 돌아왔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자신에게 주어진 일인 사람을 세우는 일을 시작합니다.
그것이 바로 자신의 제자 엘리사를 세우는 일입니다.
[결론]
이제 오늘 말씀을 마무리 하겠습니다.
하나님은 열심히 살다가 탈진한 우리를 다그치시거나 책망하지 않으십니다.
그 분은 우리에게 쉼을 주시며, 먹을 것을 선물해 주십니다.
일상에서 느끼는 소소한 기쁨을 회복하게 하십니다.
그리고 세미한 음성으로 우리를 격려하십니다.
다시 사역의 자리, 삶의 자리로 돌아가도록 인도해 주십니다.
우리가 해야할 일은 내가 지금 있는 자리를 깨닫고 주님께 돌아가는 것입니다.
나를 보지 않고 주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야생화같은 주님이라는 글을 읽고 마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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